2010~2019
아버지
2016년 4월


15:59

아버지

저는 오늘 남성으로서 지니는 최고의 임무인 남편과 아버지의 역할을 잘 이행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겠습니다.

특히, 아버지에 대해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아버지는 신성한 행복의 계획에서 근간이 되므로, 그 부름을 훌륭히 수행하기 위해 힘을 다하고 계시는 분들께 격려를 드립니다. 아버지와 그들이 가진 부성을 칭송하고 고무시키는 것은 누구를 무안하게 하거나 무시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저는 오늘 남성으로서 지니는 최고의 임무인 남편과 아버지의 역할을 잘 이행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겠습니다.

Fatherless America(아버지 없는 미국)의 저자인 데이비드 블랭큰혼은 다음과 같이 썼습니다. “오늘날의 미국 사회는 부성의 개념에 대해 근본적으로 상이하고 양면적인 태도를 보인다. 그것이 무엇인지 기억조차 못하는 사람도 있다. 그에 대해 분개하는 사람도 있다. 이를 등한시하거나 업신여기는 사람 중엔 가족학자들도 적잖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딱히 이에 반대하지 않으나 그렇다고 열성적인 것도 아니다. 많은 이들이 그것을 실천하기를 바라기는 하지만, 우리 사회는 그저 더는 실천할 수도 없고, 실천되지도 않을 것이라 믿는다.”1

우리는 아버지들을 믿습니다.
아버지는 사랑과 의로움으로 다스립니다.

우리 교회는 아버지들을 신뢰합니다. 우리의 “이상은 가족을 최우선에 두는 사람”2입니다. “하나님의 계획에 의하여 아버지는 자신의 가족을 사랑과 의로움으로 다스려야 하며, 생활에 필요한 것들을 마련하고 가족을 보호할 책임이 있다”3고 믿습니다. 상호보완적인 이 책임을 수행할 때 “아버지와 어머니는 동등한 동반자로서 서로를 도울 의무가 있다”4는 점, 그리고 아버지는 유일무이하며 그 무엇으로도 대신할 수 없는 꼭 필요한 존재라는 점도 믿습니다.

부모는 상호보완적인 책임이 있습니다.
아버지는 그 무엇으로도 대신할 수 없습니다.

어떤 이들은 부성의 이점을 사회적 관점에서 찾는데, 이를테면 남성들에게 자녀에 대한 의무를 지워서 자녀들이 선량한 시민이 되고 다른 사람을 배려하는 사람이 되도록 키울 책임을 줌으로써 “자녀에 대한 책임을 어머니에게만 전가하기보다 부모가 함께 공유하게 하는 것[입니다.] … 요컨대, 남성들의 핵심 요건은 아버지가 되는 것이며, 자녀들의 핵심 요건은 아버지를 갖는 것[입니다.] 사회의 핵심 요건은 바로 아버지를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5 이같은 사고들이 올바르고 중요하다는 점은 명백하지만, 우리는 부성이 사회적 개념 또는 진화의 산물 그 이상이라는 점을 알고 있습니다. 아버지의 역할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로부터, 그리고 이 필멸의 세상에서는 아버지 아담으로부터 그 신성한 기원을 찾을 수 있습니다.

부성에 대해 완전하고도 신성한 모범을 보이는 분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이십니다. 그분의 품성과 속성은 선함과 완전한 사랑으로 가득합니다. 그분의 일과 영광은 자녀들을 발전시키고 그들에게 행복과 영생을 가져다주는 것입니다.6 이 타락한 세상에 사는 아버지들이 하늘에 계신 지극히 크신 분에 견줄 만한 것은 아무것도 없으나, 그들은 그들 나름대로 그분을 본받기 위해 열과 성을 다하며 그분의 일에 실제로 참여하고 있습니다. 이토록 특별하고도 진지한 신뢰를 받는다는 것은 영예로운 일입니다.

남성들은 부성을 경험함으로써 스스로의 나약함과 개선의 필요성을 깨닫게 됩니다. 부성은 희생을 요구합니다만, 무엇에도 견줄 수 없는 만족감과 기쁨의 원천이기도 합니다. 다시 한 번 언급하건대, 궁극적인 본보기는 바로 하나님 아버지시며, 그분은 영의 자녀들인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셔서 우리의 구원과 영생을 위해 독생자를 보내 주셨습니다.7 예수께서는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8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들은 가족을 돌보고 부양하기 위해 자신의 삶을 희생하며 날마다 수고하고 일하는 모습으로 그 사랑을 표현합니다.

아버지가 해야 하는 가장 필수적인 임무를 꼽자면 아마도 자녀들의 마음을 하나님 아버지께로 돌리는 일일 것입니다. 아버지가 일상생활 속에서 말과 모범을 통해 하나님에 대한 충실함을 나타내 보일 수 있다면, 그는 자녀들에게 이 세상에서는 평화를, 장차 올 세상에서는 영생을 누리게 하는 열쇠를 주는 셈이 됩니다.9 아버지가 자녀들에게 경전을 읽어 주거나 함께 읽을 때, 자녀들은 주님의 음성에 친숙해집니다.10

경전을 읽는 아버지

경전에는 자녀를 가르치는 부모의 책임이 반복적으로 강조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또, 시온이나 또는 시온의 조직된 어느 스테이크이든지 그 안에 자녀를 둔 부모가 그들의 나이 여덟 살일 때, 회개,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 그리고 침례와 안수에 의한 성신의 은사의 교리를 이해하도록 그들을 가르치지 아니할진대, 그 죄는 그 부모의 머리 위에 있느니라. …

그리고 그들은 또한 자기 자녀에게 기도할 것과 주 앞에서 올바르게 걸을 것을 가르쳐야 하느니라.”11

1833년, 주님께서는 자녀들을 가르치는 임무에 충분히 주의를 기울이지 않은 것에 대해 제일회장단을 질책하시며 제일회장단 중 한 명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계명에 따라 네 자녀에게 빛과 진리를 가르치지 아니하였고, 저 사악한 자가 아직도 너를 다스리는 능력을 가지고 있나니, 이것이 네 고난의 이유니라.”12

아버지는 각 세대에게 하나님의 율법과 그분이 하시는 일을 새롭게 가르쳐야 합니다. 시편의 저자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여호와께서 증거를 야곱에게 세우시며 법도를 이스라엘에게 정하시고 우리 조상들에게 명령하사 그들의 자손에게 알리라 하셨으니

이는 그들로 후대 곧 태어날 자손에게 이를 알게 하고 [난 후에] 그들은 일어나 그들의 자손에게 일러서

그들로 그들의 소망을 하나님께 두며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을 잊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계명을 지[키게 하려 하심이로다]”13

함께 춤을 추는 아버지와 딸

복음을 가르치는 일은 분명히 아버지와 어머니가 함께 해야 할 임무입니다만, 주께서는 아버지가 앞장서서 그 일을 우선 사항으로 정하기를 바라십니다. (여기서, 자녀들과 함께 격식 없는 대화를 하고, 함께 일하고, 즐겁게 놀며,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이 가르침의 중요한 한 요소가 될 수 있다는 점을 기억합시다.) 주께서는 자녀들이 발전하도록 아버지가 돕기를 바라시며, 자녀들은 본보기를 원하고 또 필요로 합니다.

함께 일하는 아버지와 아들

제 아버지는 언제나 제게 모범이 되셨습니다. 제가 열두 살쯤 되었을 때, 아버지는 우리가 살던 자그마한 마을의 시의원 선거에 출마하셨습니다. 선거 운동을 크게 벌이지는 않으셨는데, 제가 기억하는 것이라고는 저와 제 형제들에게 집집마다 전단을 돌리면서 폴 크리스토퍼슨에게 투표하도록 부탁하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제가 전단을 건넨 사람들 중에는 아버지가 훌륭하고 정직한 사람이라고 말하며 그에게 기꺼이 투표하겠다는 사람이 여럿 있었습니다. 제 어린 마음은 아버지에 대한 자부심으로 부풀어 올랐으며, 아버지의 발자취를 따르겠다는 자신감과 소망이 생겼습니다. 누구나 그렇듯 아버지도 완벽하지는 않으셨지만, 올바르고 선하며 아들에게 본이 되셨습니다.

훈육과 교정은 가르침의 일부입니다. 바울이 말했듯이 “주께서[는]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십니다.]”14 그러나 아버지는 훈육의 과정이 학대에 가까워지지 않도록 각별한 주의를 기울여야 하며, 학대는 결코 정당화될 수 없습니다. 교정을 할 때, 아버지의 동기는 사랑이어야 하며 성령의 인도를 따라야 합니다.

“성신에 감동되었을 때에는 제때에 날카롭게 꾸짖을 것이나, 그 후에는 네가 꾸짖은 자에게 더 큰 사랑을 나타내 보여, 그가 너를 자기 원수로 여기지 않게 하라.

그리하여 그로 하여금 네 성실함이 죽음의 끈보다 더 강한 줄 알게 하라.”15

신성한 본보기를 통해 훈육하는 것은 사랑하는 자녀가 자제를 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므로 처벌과는 거리가 있습니다.

일터의 아버지
생계를 꾸림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모든 자녀는 그들이 장성하기까지 그들 생계 유지를 자기 부모에게 요구할 권리가 있느니라.”16 생계를 부양하는 것은 성스러운 일입니다. 가족을 부양하는 일은 대개 가족과 떨어져 있는 시간을 요구합니다만, 이는 부성과 일맥상통하며, 훌륭한 아버지가 되는 데 필수적입니다. “일과 가족은 서로 중복되는 영역[입니다].”17 물론 이 사실이 직장을 핑계로 가족을 소홀히 하거나, 정반대로 최선을 다하지 않고 다른 이들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사람을 정당화하지는 못합니다. 베냐민 왕은 이렇게 가르쳤습니다.

“너희는 너희 자녀들이 굶주리거나, 헐벗게 되도록 그들을 버려 두지 아니할 것이며, 그들이 하나님의 율법을 범하며 서로 싸우고 다투[도록] 버려 두지도 아니하리니, …

오히려 너희는 참되고 진지한 길로 행하도록 그들을 가르칠 것이요, 너희는 서로 사랑하고 서로 섬기도록 그들을 가르칠 것이니라.”18

우리는 가족을 부양하기에 적절한 수단과 방법을 찾지 못하는 분들의 고뇌를 이해합니다. 주어진 시간 동안 각고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아버지의 임무와 역할을 다하지 못하는 분이 자책감을 가질 필요는 없습니다. “장애나 죽음이나 기타 다른 상황에 따라 이러한 원리를 개별적으로 조절할 필요가 있을 수도 있[습니다.] 필요한 경우, 친척이 도움을 주어야 [합니다.]”19

사랑 넘치는 부모
춤추는 부모

아버지가 자녀를 위해 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일 두 가지는 자녀들의 어머니를 사랑하는 것과 그 사랑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가족의 삶과 안전의 토대라 할 수 있는 결혼 생활을 재확인시키며 강화해 줍니다.

십대 아들들과 함께한 아버지

어떤 분들은 홀로된 아버지이거나 양아버지이거나 의붓아버지이기도 합니다. 많은 경우 쉽지 않은 이 역할을 다하기 위해 온 힘을 쏟아 노력합니다. 개인과 가족의 필요 사항을 충족시키기 위해 사랑과 인내, 자기 희생을 통해 가능한 모든 일을 해 주시는 분들께 경의를 표합니다. 하나님께서도 당신의 독생자를 양아버지에게 맡기셨음을 기억하십시오. 예수께서 성장하는 과정에서 “지혜와 키가 자라가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욱 사랑스러워 가[셨다]”20는 사실과 관련하여 어느 정도는 요셉에게 그 공이 있습니다.

죽음이나 버림받음 또는 이혼으로 인해 아버지와 함께 생활하지 못하는 자녀가 있음은 애석한 일입니다. 어떤 아버지는 함께 살고는 있으나 정서적으로 부재하기도 하고, 무관심하거나 부양의 의무를 이행하지 못하기도 합니다. 아버지 여러분, 더욱 분발하시고 더 좋은 아버지가 되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언론 및 오락 매체를 향해서도 부탁의 말씀을 드립니다. 아버지에 대해 너무도 빈번히 그려지는 정신없이 허둥거리는 모습이나 광대 또는 “사고뭉치”의 모습 대신에, 아내를 사랑하고 자녀들을 현명하게 인도하는 헌신적이고 유능한 아버지의 모습을 보여 주셨으면 합니다.

가족 내에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자녀분들께 말씀드립니다. 그 일로 인해 여러분의 가치가 손상되는 것이 아닙니다. 시련을 겪는다는 것은 때로 주님의 신뢰를 받음을 의미합니다. 그분께서 직접적으로나 다른 사람들을 통해 여러분의 문제를 극복하도록 도우실 것입니다. 여러분은 아마 가족 중 최초로, 하나님께서 가족을 위해 마련하신 신성한 본보기를 실천해 모든 후대에 축복을 가져다주는 세대가 될 수도 있습니다.

청남 여러분께도 말씀드립니다. 여러분이 가족을 부양하고 보호하는 역할을 하게 되리라는 것을 인식하고, 학업에 열중하며 고등 교육을 받을 계획을 세우는 등 지금부터 준비하십시오. 대학교나 전문 대학, 기술학교, 또는 유사한 프로그램을 통해 이루어지는 교육이야말로 여러분이 필요로 하는 기술과 능력을 개발하는 데 핵심이 됩니다. 어린이들을 포함한 모든 연령대의 사람들과 어울리면서 건강하고 가치 있는 관계를 형성하도록 여러 기회를 활용하십시오. 그것은 단지 문자 메시지를 보내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과 직접 만나 대화하고 무언가를 함께 행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러분의 결혼 생활과 자녀들에게 순결함을 더해 줄 수 있도록 생활하시기 바랍니다.

모든 자라나는 세대에게도 말씀드립니다. 여러분의 아버지를 좋음-더 좋음-가장 좋음 가운데 어느 등급으로 여기든지 간에(여러분이 나이가 들고 지혜가 쌓이면서 그 등급이 더 후해지리라 생각합니다만), 올바른 생활을 함으로써 아버지와 어머니에 대한 존경을 보이겠다고 결심하십시오. 아버지였던 요한이 간절히 소망했던 바를 기억하십시오. “내가 내 자녀들이 진리 안에서 행한다 함을 듣는 것보다 더 기쁜 일이 없도다”21 여러분의 의로움이야말로 아버지로서 가질 수 있는 최고의 영예입니다.

이 교회에 속한 아버지 여러분, 여러분이 ‘내가 더 완벽한 아버지였으면 좋았을텐데’ 하고 생각하신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저도 그런 생각을 합니다. 하지만 우리의 한계를 딛고 앞으로 나아갑시다. 오늘날 문화에 팽배한 개인주의와 자율성이라는 과장된 관념을 뒤로하고 주변 사람들의 행복과 복리를 먼저 생각합시다. 우리의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우리를 강하게 하시고 우리의 작은 노력이 결실을 맺도록 도우실 것입니다. 저는 수년 전 교회 잡지에 실렸던 한 이야기에서 용기를 얻습니다. 그 저자는 다음과 같이 썼습니다.

“어렸을 때 우리 가족은 침실 하나만 있는 작은 아파트에 살고 있었다. 나는 거실의 소파에서 잠을 잤다. …

철강 노동자였던 아버지는 매일 아주 일찍 출근을 했다. 아침마다 아버지는 … 내게 이불을 덮어 주고 난 다음 잠시 멈춰 서 계시고는 했다. 나는 비몽사몽간에 종종 아버지가 소파 곁에 서서 나를 바라보시고 있다는 것을 육감으로 느꼈다. 잠에서 서서히 깨어나던 나는 아버지가 거기에 계신 것이 당혹스러웠다. 그래서 잠을 자는 척했는데, 아버지는 곁에 서서 나를 위해 온 정성과 힘과 주의를 다해 조용히 기도를 드리고 계셨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매일 아침 아버지는 내가 하루를 무사히 보내고 미래를 위해 배우고 준비하도록 간구하셨다. 저녁이 되기까지 나와 줄곧 같이 계실 수가 없었기 때문에 그분은 하루 동안 나와 함께 있게 될 선생님이나 친구들을 위해 기도하셨다. …

처음에 나는 아버지께서 날 위해 아침마다 기도하시면서 무엇을 간구하셨는지 이해가 가질 않았었다. 하지만 차츰 나이가 들어가면서 나와 내가 하는 모든 일에 대한 그분의 사랑과 관심을 깨닫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일은 나의 가장 소중한 기억 가운데 하나로 남아 있다. 그로부터 수년 뒤 결혼을 해서 나도 자녀를 갖게 되고, 그들이 잠들어 있을 때 방에 들어가 그들을 위해 기도를 하게 되면서야 비로소, 아버지께서 나를 향해 어떤 마음을 갖고 계셨는지를 완전하게 이해하게 되었다.”22

앨마는 그의 아들에게 이렇게 간증했습니다.

“보라, 내가 네게 이르노니, … 정녕 오실 이는 [그리스도]이시니, 참으로 그가 오시는 것은 자기 백성에게 구원의 기쁜 소식을 선포하려 하심이니라.

또 이제 내 아들아, 이것이 네가 부름 받은 직무였나니, 곧 이 기쁜 소식을 백성에게 선포하여 그들의 마음을 준비시키는 것이었은즉, 곧 다시 말해서 … 그가 오실 때 말씀을 듣도록 그들 자녀들의 마음을 준비시키게 하는 것이었느니라.”23

그것이 바로 오늘날 아버지의 성역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행할 능력을 축복해 주시기를 바라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말씀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