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어나 공격에 맞서다”, 『성도들: 후기의 예수 그리스도 교회 이야기, 제2권, 그 어떤 신성하지 않은 손도, 1846~1893년』(2020) 제32장
제32장: “일어나 공격에 맞서다”
제32장
일어나 공격에 맞서다
1880년이 시작될 무렵, 조지와 엘리자베스 캐넌 부부는 워싱턴 D.C.에 있었다. 의회의 새로운 회기가 시작되는 시점이었고, 조지는 여전히 유타의 준주 대표로서 일하고 있었다. 조지 부부는 올해 어린 두 딸을 동부로 데려왔다. 그들은 미국의 정계와 언론계에 후기 성도 가족의 긍정적인 모습을 보여 주고 싶었다.1
물론 조지와 엘리자베스가 복수결혼을 시행한다는 것은 많은 사람에게 알려져 있었다. 실제로 조지는 네 명의 아내와 스무 명의 생존한 자녀가 있었다. 그러나 어느 기자가 평했듯, 캐넌 가족의 모습은 성도들에 대해 일반적으로 알려진 그릇된 편견과는 거리가 멀었다. 한 기자는 이렇게 적었다. “한 집단의 가치가 그 지적 타당성과 그것을 따르는 이들을 정화하는 힘으로 평가된다면, 일부다처제에 대한 편견은 사라질 것이다.”2
그러나 1년 전에 미국 대법원이 조지 레이놀즈 건에 대한 판결을 내린 후로 성도들에 대한 편견은 갈수록 악화될 뿐이었다. 러더퍼드 헤이스 대통령은 1879년 12월에 미국 전역에 낸 연례 담화에서 일부다처제를 비난하며, 법 집행관들에게 모릴의 일부다처제 금지법을 지지하도록 촉구했다.3
대통령 담화를 듣고 대담해진 일부 의원들은 더 공격적으로 복수결혼을 반대했다. 일부다처제를 불법으로 규정하기 위해 헌법을 개정하는 법안을 내놓은 의원도 있었고, 조지 큐 캐넌을 의회에서 추방해야 한다는 뜻을 밝힌 의원도 있었다. 그러는 동안 미국 전역의 시민들은 복수결혼 근절에 더 주력하도록 자기 지역의 대표자들을 압박하기 시작했다.
조지는 1월 13일에 존 테일러에게 다음과 같이 편지를 썼다. “우리 주위로 구름이 더욱더 짙게 몰려들면서 불길한 징후가 보이는 듯합니다. 주님께서 피뢰침을 놓아 주셔서 이 전류를 다른 방향으로 돌려 주신다면 좋겠지만, 만일 그리하지 않으신다면 우리가 일어나 공격에 맞서는 것밖에는 다른 도리가 없을 것 같습니다.”4
그 무렵, 데시데리아 킨타나르 데 야녜스는 어느 날 밤 꿈에서 Voz de amonestación『보스 데 아모네스타시온』이라는 제목의 책이 멕시코시티에서 인쇄되는 장면을 보았다. 잠에서 깨어난 그녀는 그 책을 찾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5
데시데리아는 아즈텍의 통치자였던 쿠아우테모크의 후손으로, 세간의 존경을 받으며 노팔라에서 아들 호세와 함께 살고 있었다. 멕시코인은 대다수가 가톨릭 신자였지만, 데시데리아와 호세는 그 지역에 있는 개신교 교회에 다녔다.6
데시데리아는 그 수수께끼 같은 책을 찾기 위해 멕시코시티로 가야 한다는 느낌이 들었지만, 멕시코시티는 노팔라에서 120킬로미터 이상 떨어진 곳에 있었다. 그곳까지 가려면 어느 정도는 열차를 탈 수 있었지만, 대부분은 비포장 길을 따라 걸어가야 했다. 육십 대의 데시데리아는 그렇게 고된 여행을 감당할 만한 몸이 아니었다.7
그녀는 반드시 그 책을 찾겠다고 결심하고, 아들에게 자신이 꾼 꿈에 대해 이야기했다. 호세는 어머니의 말을 믿었고, 얼마 후 그 알지도 못하는 책을 찾아 멕시코시티로 출발했다.8
집으로 돌아온 호세는 데시데리아에게 자신이 겪은 놀라운 일을 들려주었다. 멕시코시티는 그 인구가 수십만에 달하는 거대한 도시였고, 호세가 이곳에서 그 책을 찾는 것은 가망이 없어 보였다. 어느 날 도시의 번화가를 걷던 호세는 플로티노 로다카나티를 만나게 되었고, 그는 호세에게 『보스 데 아모네스타시온』이라는 책에 관해 이야기해 주었다.
플로티노는 호세에게 호텔로 가서 선교사인 제임스 스튜어트를 만나 보라고 말했다. 호텔에 간 호세가 알게 된 바에 따르면, 『보스 데 아모네스타시온』은 『보이스 오브 워닝』이라는 책의 스페인어 번역판이며, 『보이스 오브 워닝』은 수십 년간 후기 성도 선교사들이 영어권 사람들에게 그들의 신앙을 소개할 때 사용해 온 책이었다. 이 책은 그리스도의 복음이 회복된 사실과 미 대륙의 고대 주민들이 남긴 성스러운 기록인 몰몬경의 출현을 증거했다.9
『보스 데 아모네스타시온』은 아직 인쇄되기 전이었지만, 제임스는 호세에게 종교적인 내용이 담긴 소책자들을 건네며 집으로 가져가라고 했다. 호세는 그 소책자들을 데시데리아에게 가져다주었고, 데시데리아는 그것들을 꼼꼼히 읽어 보았다. 그런 후 그녀는 선교사들에게 노팔라로 와서 자신에게 침례를 베풀어 달라고 요청했다.
이에 4월이 되어 노팔라로 온 멜리톤 트레호는 데시데리아와 호세, 그리고 호세의 딸 카르멘에게 침례를 주었다. 며칠 뒤, 호세는 다시 멕시코시티로 가서 멜기세덱 신권을 받았다. 그는 소책자와 책을 한 아름 안고 집으로 돌아왔는데, 그중에는 새로 인쇄한 『보스 데 아모네스타시온』 책도 열 권이나 있었다.10
아이다 헌트가 기억하는 가장 오래된 추억은 그녀의 외할아버지인 애디슨 프랫이 그녀를 무릎에 앉히고 흔들어 주던 일이었다. 그때 아이다의 가족은 캘리포니아주 샌버너디노 근처의 농장에 살았다. 아이다의 부모인 존과 로이스 프랫 헌트는 아이다가 한 살쯤 되었을 때 그곳에 정착했다. 그러나 몇 년 후에 아이다의 가족은 가까이서 함께 살자는 아이다의 외할머니 루이자 프랫의 요청에 따라 루이자가 1858년 이후 생활해 온 유타 남부의 작은 마을인 비버로 이사했다.
애디슨은 1872년에 캘리포니아에서 세상을 떠났다. 애디슨과 루이자는 끝까지 견해차를 좁히지 못한 채 그가 죽기 전 15년 동안 거의 떨어져 지냈지만, 두 사람 모두 딸들과 손주들에 대한 사랑만큼은 변함이 없었다. 아이다는 조부모인 애디슨과 루이자를 모두 깊이 사랑했다.11
아이다는 루이자의 집에서 한 구역 떨어진 곳에 살았고, 오후가 되면 할머니 곁에서 많은 것을 배우며 시간을 보내곤 했다. 아이다는 열일곱 살이 되던 1875년에 가족과 함께 비버를 떠났다. 3년 후, 교회의 지도자들은 아이다의 가족에게 한 번 더 거처를 옮길 것을 요청했다. 이번에 그들은 애리조나준주의 스노플레이크라는 마을로 가야 했다. 그러나 아이다는 가족과 함께 떠나는 대신 비버로 돌아가 한동안 할머니와 함께 지내기로 했다.
비버에 돌아온 아이다는 할머니인 루이자만이 아니라 근처에 사는 두 이모 엘런과 앤에게 없어서는 안 될 존재였다. 아이다는 집안일을 돕고, 아픈 가족을 돌보는 일을 거들었다. 그렇다고 아이다가 항상 집에서만 지낸 것은 아니었다. 그녀는 저녁이면 자주 다른 사람들과 식사를 하기도 하고 파티와 음악회에 참석하기도 했다. 그리고 얼마 후에는 조니라는 젊은이와 교제도 시작했다.
1880년 봄이 되자, 스노플레이크에 있던 아이다의 가족과 친구들은 아이다에게 집으로 오라고 했고, 아이다는 고심 끝에 비버를 떠나기로 결정했다. 작별 인사를 하는 아이다를 보며, 루이자는 거의 말을 잇지 못했다. 그저 손녀의 여행길이 안전하기만을 빌 뿐이었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조니와의 관계 덕분에 아이다가 어쩌면 다시 비버로 돌아올지도 모른다는 것이었다.12
아이다는 스노플레이크로 가는 동안 동부 애리조나 스테이크의 회장인 제시 스미스의 가족과 동행했다. 제시 스미스의 두 아내인 에머와 아우구스타는 아이다가 경탄할 만큼 성스럽고 이타적인 관계 속에서 지내고 있었다. 아이다의 부모는 복수결혼을 하지 않았으므로, 아이다는 복수결혼으로 맺어진 가족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본 적이 거의 없었다. 그러나 스미스 가족과 함께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아이다는 자신이 복수결혼을 시행하는 문제를 더 많이 고려해 보게 되었다.13
만일 복수결혼을 한다면, 아이다는 제 또래 다른 성도들과는 거리가 생길 수도 있었다. 성도들은 대부분 복수결혼을 받아들이고 옹호했지만, 교회에서 복수결혼을 하는 사람들의 숫자는 줄어드는 추세였다. 복수결혼은 대체로 미국 서부 성도들에게만 국한된 일이었고, 유럽과 하와이를 비롯한 전 세계 다른 지역에는 복수결혼을 하는 교회 회원이 없었다.
복수결혼이 가장 성행했던 1850년대 후반에는 유타 주민의 50퍼센트 정도가 복수결혼으로 맺어진 가정에 속하게 될 것으로 예상됐었다. 그런데 이제는 그 숫자가 20~30퍼센트 정도로 줄었고, 그런 감소 추세는 계속해서 나타나고 있었다.14 교회의 회원이라고 해서 반드시 복수결혼을 해야 하는 것은 아니었으므로, 복수결혼을 하지 않는 쪽을 선택하더라도 성도들은 교회 및 하나님과 좋은 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다.15
스노플레이크에 도착한 지 몇 달 만에 아이다는 할머니의 부고를 받게 되었다. 아이다는 몹시 슬퍼하며 루이자를 떠난 것을 후회했다. 계속 비버에 있었더라면 자신이 할머니의 생애 마지막 몇 달 동안을 함께 지내며 할머니를 위로해 줄 수 있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즈음 아이다는 조니에게도 편지를 받았다. 조니는 애리조나로 와서 아이다와 결혼하고 싶다고 했다. 그러나 그 무렵에 아이다는 기꺼이 복수결혼을 하고자 하는 남자와 결혼하고 싶은 바람이 있었다. 조니는 복음에 대한 신앙이 부족했고, 아이다는 그가 자신에게 알맞은 남편감이 아님을 알았다.16
1880년은 교회가 창립된 지 50주년을 맞이하는 해였다. 존 테일러 회장은 고대 이스라엘에서 50년마다 희년을 기념하며 백성들의 빚을 탕감해 주고 노예를 풀어 주었던 것을 떠올리며, 영구 이주 기금에서 자금을 빌려 시온에 집합한 가난한 성도 수천 명의 부채를 덜어 주었다. 그는 은행과 사업체를 운영하는 성도들에게 빚을 일부 탕감해 주도록 요청했고, 교회의 회원들에게는 궁핍한 이들을 위해 가축을 기부해 달라고 촉구했다.
또한, 상호부조회 곡물 위원회 회장인 에멀라인 웰스에게 부탁하여 상호부조회의 저장고에 보관된 밀을 감독들에게 필요한 만큼 빌려주어 감독들이 각 와드에 소속된 궁핍한 이들을 먹일 수 있게 했다.17
6월에 테일러 회장은 솔트레이크 스테이크의 상호부조회 대회에 참석했다. 이번 모임에는 상호부조회의 보조 조직 격인 초등회와 젊은 여성 상호 향상회의 대표들도 참석했다. 이 모임에서 엘리자 스노우는 한 와드의 초등회 회장인 루이 펠트를 교회 전체의 초등회를 관리 감독할 사람으로 추천했다. 여성들은 루이를 초등회 회장으로, 그리고 다른 두 여성을 그녀의 보좌로 지지했다.
이 모임에서 테일러 회장은 서기에게 1842년에 나부 상호부조회가 조직되었던 것에 관한 글을 낭독해 달라고 부탁했다. 테일러 회장은 에머 스미스가 상호부조회의 회장으로 결정되었던 그 첫 번째 모임에 참석했었다. 그는 에머의 보좌들인 세라 클리블랜드와 엘리자베스 앤 휘트니에게 부름을 행할 권세를 부여하기도 했다.
서기가 낭독을 마치자, 테일러 회장은 여성들이 상호부조회를 통해 얻는 권능과 임무에 관해 이야기했다. 그런 후, 메리 이사벨라 혼은 교회 전체 상호부조회의 회장으로 엘리자 스노우를 임명할 것을 테일러 회장에게 제안했다. 엘리자는 초대 상호부조회의 서기로 봉사한 경험이 있었고, 십 년 이상 모든 와드의 상호부조회에 자문 역할을 해 온 사람이었다. 그러나 에머 스미스가 상호부조회의 회장이었던 1840년대 이후로 교회 전체의 상호부조회를 이끄는 회장이 있었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테일러 회장은 엘리자를 본부 상호부조회의 회장으로 추천했고, 여성들은 그녀를 지지했다. 엘리자는 지나 영과 엘리자베스 앤 휘트니를 보좌로, 세라 킴볼을 서기로, 메리 이사벨라 혼을 회계 담당자로 선택했다. 엘리자처럼 그들도 모두 나부 시절만이 아니라 유타에서 이 조직이 재건된 후에도 상호부조회에 몸담고 일한 이들이었다.
그날 오후에 열린 대회의 마지막 모임에서, 엘리자는 메리 이사벨라 혼이 이끄는 스테이크 상호부조회의 보좌 중 한 명인 엘미나 테일러를 본부 젊은 여성 상호향상회의 회장으로 추천했다. 엘미나는 보좌들과 서기, 회계 담당자와 함께 지지받았다.18
유타준주 곳곳의 자매들은 본부 회장단들이 새롭게 조직된 것을 기뻐했다.
한 달 뒤, 피비 우드럽은 상호부조회 모임에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 자매들이 이렇게 조직되어 가는 것을 보니 무척 기쁩니다.” 한 스테이크 상호부조회의 회장인 벨린다 프랫은 자신의 일지에 이렇게 기록했다. “우리는 얼마나 멋진 시대에 살고 있단 말인가! 교회 자매들의 책임은 얼마나 위대한가. 그들이 해내는 일은 얼마나 놀라운가!”19
그해에 교회에서는 다른 측면에서도 영감에 따른 변화들이 일어났다. 3년 전 브리검 영이 사망한 후로 십이사도 정원회는 제일회장단 없이 교회를 이끌고 있었다. 십이사도 정원회는 이 문제를 두고 논의하고 기도한 끝에 뜻을 모아, 존 테일러를 교회의 회장으로, 조지 큐 캐넌과 조셉 에프 스미스를 그의 보좌로 지지했다. 이후에 열린 10월 연차 대회에서 자리를 가득 채운 성도들은 손을 들어 새로운 제일회장단을 지지했다.20
회장단 지지에 이어 조지 캐넌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조지는 조셉 스미스가 쓴 글의 일부와 그가 영감으로 번역한 기사들을 엮은 값진 진주를 교회의 새로운 표준 경전으로 삼을 것을 제안했다. 선교사들은 1851년에 값진 진주가 출판된 후로 그 판본을 선교 사업에 사용하고 있었지만, 값진 진주를 경전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두고 교회 회원들에게 의사를 묻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마지막으로 테일러 회장은 이렇게 말했다. “지지를 통해 우리가 한마음 한뜻임을 알 수 있게 되어 매우 기쁩니다. 여러분들이 이 일에서처럼 다른 일에 관하여도 계속해서 뜻을 모은다면, 앞으로 하나님은 변함없이 곁에서 우리를 지켜 주실 것입니다.”21
6개월 뒤, 노르웨이 해안의 번화한 마을인 트론헤임에서는 아나 윗소가 얼음처럼 차가운 피오르에서 걸어 나오고 있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 후기 성도 교회의 회원으로서 이제 막 침례를 받았다. 비록 몸은 차가웠지만, 아나의 가슴속에서는 복음의 불이 타오르고 있었다. 또한 그녀는 자신을 둘러싼 성도들을 깊이 사랑했다.
아나는 쉽지 않은 과정 끝에 침례를 받았다. 아나의 남편은 3년 전에 그녀와 두 아들, 존과 오스보네를 남기고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났다. 그들은 이제 얼마 안 되는 연금과 아나가 옷을 지어 버는 수입으로 근근이 살고 있었다. 남편이 세상을 뜨자 아나는 하나님께 의지했다. 그녀는 왜 하나님이 자신에게서 남편을 데려가신 것인지 알고 싶었다.
그녀는 어려서부터 성경을 읽었고, 성경의 이야기들도 알고 있었다. 아나는 답을 찾기 위해 성경을 공부했다. 그렇게 하면서 그녀는 하나님께 더 가까워지고 있다고 느꼈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이 다니던 교회에서 가르치는 교리에는 뭔가 불완전하고 불만족스러운 점들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느 날, 아나는 올라우스 욘슨이라는 신발 수선공에게 신발 한 켤레를 맡겼다가 찾아왔다. 그 신발 두 짝 속에는 각각 종교적인 내용의 소책자가 하나씩 들어 있었다. 소책자를 읽고 아나는 더 알고 싶은 호기심이 생겼다. 그래서 얼마 후, 봄 기운이 따뜻하게 전해지던 날 그녀는 다른 신발 한 켤레를 들고 그 수선공을 찾아갔다. 그러나 막상 수리점에 들어서니, 아나는 그에게 너무 많은 질문을 하는 것이 마음에 내키지가 않았다. 그래서 문을 열고 그곳을 막 떠나려는데, 수리공 올라우스가 아나를 부르며 말했다.
“저는 손님의 아이가 신는 신발의 밑창보다 더 귀한 것을 손님께 드릴 수 있습니다.”
“구두장이인 당신이 제게 무엇을 줄 수 있으시죠?” 아나는 물었다.
“이생에서 행복을 찾고, 다음 생에서 영원한 기쁨을 누리기 위해 준비하는 법을 알려 드릴 수 있지요.” 그가 말했다.
“당신이 누구인데요?” 아나가 물었다.
올라우스가 말했다. “저는 그리스도 교회의 회원입니다. 몰몬이라고도 하지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진리가 있습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아나는 도망치듯 수리점을 빠져나왔다. 노르웨이에서 후기 성도들은 광신도로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아나는 소책자에 마음이 갔고, 얼마 후 올라우스와 카렌 부부의 집에서 열린 한 모임에 트론헤임 성도들과 함께 참석했다. 노르웨이 사회는 계층과 계층이 엄격히 분리되어 있었으므로, 아나는 욘슨의 누추한 집과 그곳에서 예배하는 가난한 사람들이 편치 않았다. 남편이 살아 있을 적에는 더 부유한 계층이었던 그녀는 가난한 사람을 낮춰 보는 경향이 있었다.
아나는 썩 내키지는 않았지만, 그 후로 2년 동안 정기적으로 선교사들을 만났다. 어느 날, 집에 있던 중에 아나는 영을 강하게 느꼈다. 주님께는 계층 간의 차이가 무의미했지만, 그 평판 나쁜 교회와 회원들, 그리고 그들의 가난에 대해 생각할 때면 그녀는 강한 편견을 지울 수가 없었다. 아나는 생각했다. ‘나도 그들과 똑같이 되어야 하는 것일까?’
그녀는 자신의 질문에 이렇게 스스로 답을 내렸다. ‘맞아, 이게 진리라면 그렇게 해야 해.’22
한편, 미국에서는 제임스 가필드가 러더퍼드 헤이스의 뒤를 이어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헤이스처럼 가필드 대통령 역시 교회를 비판하며 의회에 복수결혼의 완전한 근절을 요청했다. 그런데 임기를 시작한 지 겨우 몇 달 만에 그는 불만을 품은 한 남자의 총에 저격을 당했고, 항간에는 총을 쏜 사람이 후기 성도일 것이라는 추측이 나돌았다.23 그러나 이는 사실이 아니었다. 존 테일러는 신속히 총격을 비판하는 입장을 밝히고, 병상에 누운 대통령에 대한 연민을 표했으며, 교회를 반대하는 그의 정치적 입장을 비난하지 않았다.
존은 성도들에게 말했다. “우리 모두와 마찬가지로 대통령도 틀릴 수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틀릴 수 있습니다. 누구나 다 자신에게 가해지는 압력에 저항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24
가필드 대통령은 총상에서 회복되지 못하고 몇 달 뒤 사망했다. 후임자인 체스터 아서 대통령도 가필드 못지않게 복수결혼을 근절하겠다는 결심이 확고했다.25 의회에서 유타를 대표하는 조지 큐 캐넌은 즉시 압력을 느꼈다. 1881년 12월, 조지 에드먼즈 상원 의원은 복수결혼을 행하는 성도들에 대한 기소를 더 용이하게 하는 법안을 의회에 제출했다.
에드먼즈 법이 통과되면, 성도들은 “불법적인 동거”를 한 혐의로 수감될 수 있었다. 즉, 이제 법원은 실제로 복수결혼이 이뤄졌다는 것을 증명할 필요가 없었다. 복수결혼을 시행하는 것으로 보이는 교회의 회원은 누구라도 법에 따라 기소될 수 있었다. 복수결혼을 하고 같은 집에서 생활하거나 바깥에 함께 모습을 드러내는 부부는 체포될 위험을 안게 되었다.
또한 이 법에 따르면, 복수결혼을 한 남성과 여성들은 투표권을 박탈당하고, 벌금형과 구금형을 받게 되며, 배심원으로 선출되거나 정치적인 직분에 오를 수도 없었다.26
조지의 마음을 무겁게 하는 것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조지의 아내 엘리자베스는 폐렴으로 건강이 악화되어 유타로 돌아가 있었다. 조지는 엘리자베스와 함께 있고 싶었다. 그러나 1882년 1월 24일, 엘리자베스가 전보를 보내왔다.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지금 하는 일에 계속 집중하세요. 하나님께서는 이곳에서도 그곳에서도 당신의 기도에 응답하시어 저를 낫게 하실 수 있으세요.”
이틀 뒤, 또 한 통의 전보가 조지에게 전해졌다. 그것은 엘리자베스의 부고였다. 조지는 자신의 일지에 이렇게 적었다. “이생의 남은 날 동안 우리가 떨어져 있어야 하고, 다시는 아내의 얼굴을 볼 수 없으며, 아내에게 애정 어린 관심을 받으며 육신을 입은 채 달콤한 대화를 나누는 기쁨이 이제는 끝이 났음에 나는 망연자실할 뿐이다.”27
얼마 뒤에 에드먼즈 법이 통과되었고, 조지는 의원직을 박탈당했다. 그는 4월 19일에 하원에서 마지막 연설을 했다. 그는 여느 때보다 더 침착했지만, 동료들이 에드먼즈 법을 통과시키기로 했다는 데는 격분했다. 성도들이 복수결혼을 행하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그렇게 명하셨기 때문이라고 그는 말했다. 성도들은 누구에게도 믿음을 강요할 생각이 없으며, 단지 그들이 옳다고 생각하는 대로 하나님께 순종할 권리를 얻고자 했다.
조지는 이렇게 덧붙였다. “세상의 정죄에 관한 한, 우리는 아브라함과 같은 위치에 놓이는 것을 마다치 않습니다.”
그가 말을 마치자 몇몇 의원은 그의 연설을 칭찬했다. 조지를 반대하라는 압력을 받았다고 시인하는 의원들도 있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의원들은 그저 그가 떠난다는 것에 만족스러워하는 듯했다.28
에드먼즈 법에도 불구하고 아이다 헌트는 복수결혼에 관한 생각을 바꾸지 않았다. 1881년 가을, 아이다는 엘라와 데이비드 우달 부부와 함께 스노플레이크에서 72킬로미터가량 떨어진 애리조나의 세인트존스라는 마을에서 생활했다. 이 무렵 그녀는 세인트존스에서 감독으로 봉사하는 데이비드와 지역의 협동조합 상점에서 함께 일했으며, 엘라와도 가까워져 자매 같은 사이가 되었다.29
데이비드와 엘라는 데이비드가 감독이 된 직후 자신들도 복수결혼을 행할 때가 되었다는 결론을 내린 바 있었다. 얼마 후, 데이비드는 엘라의 동의를 얻어 아이다에게 청혼했다. 아이다는 그의 청혼을 받아들이고 싶었지만, 아이다가 보기에 엘라는 다른 사람과 남편을 공유한다는 사실을 아직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 같았다. 아이다는 데이비드에게 답하는 대신, 복잡한 마음을 안고 스노플레이크로 돌아갔다.30
얼마 후, 아이다는 데이비드의 청혼에 대한 엘라의 마음을 알아보기 위해 엘라에게 편지를 썼다. 아이다는 친구로서 엘라에게 이렇게 말했다. “이 일을 더 진행하기 전에, 자매님이 앞으로 다가올 일들을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으신지를 먼저 확인하고 싶어요. 마음에 걸리시는 게 있다면 제게 말씀해 주시는 것이 자매님의 권리이자 피할 수 없는 의무일 거예요.”
아이다는 엘라에게 장담했다. “약속해요. 저는 그걸로 마음 상해하지 않을 거예요.”31
6주 뒤, 엘라는 짧게 답장을 보내왔다. “자매님이 질문하신 문제는 아마도 자매님이 상상하신 것보다 훨씬 더 많이 저를 괴롭고 슬프게 했을 거예요. 하지만 처음부터 그래 왔듯이, 주님의 뜻이라면 저는 기꺼이 감내할 수 있어요. 그리고 모든 것 가운데 가장 좋은 것을 위해 그분께서 상황을 이끌어 주시리라 굳게 믿어요.”32
1882년 5월 6일, 아이다는 데이비드와 엘라, 그리고 그들의 어린 딸 펄과 함께 스노플레이크를 떠나 세인트조지 성전으로 가는 18일간의 여행길에 올랐다. 우달 가족과 함께 천천히 사막을 건너는 동안, 아이다는 엘라가 이 결혼에 대한 불편한 마음을 다 버리지 못했음을 알 수 있었다. 아이다는 자신이 하는 말이나 행동이 엘라를 더 고통스럽게 할 수 있다는 생각에 언행을 삼갔다. 그들은 어색한 침묵을 피하기 위해 함께 소리 내어 책을 읽기도 하고 펄과 놀기도 했다.
어느 날 밤, 아이다는 데이비드와 둘이서만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그녀는 엘라의 불편한 감정이 걱정스러웠고, 데이비드의 청혼을 받아들인 것이 잘못된 선택은 아니었을지 염려되었다. 데이비드는 애정과 격려의 말을 전했고, 아이다는 희망을 느꼈다. 그날 밤, 아이다는 자신들이 순종하고자 노력할 때 고난 속에서도 하나님께서는 자신들을 지탱해 주시리라는 확신을 안고 잠이 들었다.
아이다와 데이비드는 5월 25일에 세인트조지 성전에서 인봉되었다. 아이다는 불확실한 미래를 직면하게 되었지만 데이비드가 자신을 보살펴 주리라는 것을 믿어도 좋다는 느낌이 들었고, 자신이 그를 더 사랑할 수 있기만을 기도했다. 엘라도 인봉 의식의 집행자가 전한 말씀과 권고를 듣고 위로를 받은 듯했다.
그날 그들은 엘라의 자매 중 한 명의 집에서 밤을 보냈다. 다른 이들이 모두 잠들자, 엘라는 잠을 이루지 못하고 살며시 아이다의 방을 찾아갔다. 두 여인은 처음으로 얼굴을 마주하고 그들의 새로운 관계와 미래에 대한 소망과 바람을 이야기했다.
두 사람 다 아이다가 데이비드와 결혼한 것은 하나님의 뜻임을 믿었다. 그러나 에드먼즈 법이 발효된 지금, 그날 일어난 모든 일로 이제 이 가족은 정부와 더욱 대치되는 국면을 피할 수 없게 되었다.
그날 밤 아이다는 자신의 일지에 이렇게 적었다. “평범한 상황에서도 결혼을 한다는 것은 엄중하고 중요한 한 걸음을 내딛는 것이다. 그러나 이 위태로운 시기에 복수결혼을 한다는 것은 훨씬 더 그렇다.”3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