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룩한 성전에 들어가기 위해 준비함,” 거룩한 성전에 들어가기 위해 준비함 (2002), 1–37
“거룩한 성전에 들어가기 위해 준비함,” 거룩한 성전에 들어가기 위해 준비함, 1–37
거룩한 성전에 들어가기 위해 준비함
성전으로 오십시오
우리가 성전에 가야 할 이유는 많습니다. 성전의 외형에서도 이 건물의 심오한 영적인 목적이 은연중 나타나 있으나, 그러한 영적인 목적은 그 건물의 내부에서 더욱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성전 문 위에는 “주님께 거룩함”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습니다. 여러분이 어느 성전이나 헌납된 성전에 들어가게 되면 곧 주님의 집에 있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우리는 많은 종류의 건물을 짓습니다. 우리는 그러한 건물 안에서 예배드리며 가르치며 활동하며 조직합니다. 스테이크, 와드, 선교부, 정원회나 상호부조회는 그러한 건물이나 전세 건물에서도 조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계시하신 질서에 따라 가족을 조직할 때에는 성전에서 이를 행합니다. 성전 결혼과 그 인봉 의식은 성전에서 가질 수 있는 지고의 축복입니다.
성전 안에서, 합당한 교회 회원은 인간에게 계시된 가장 높은 구원 의식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그곳에서 우리는 신성한 의식을 통해 씻음, 기름 부음, 가르침, 엔다우먼트, 인봉을 받습니다. 우리는 자신을 위한 이러한 축복을 받은 후, 그와 같은 축복을 받을 기회를 갖지 못하고 돌아가신 분들을 위해 대리 의식도 집행할 수 있습니다. 성전에서는 산 자를 위해서 뿐만 아니라 죽은 자를 위한 성스러운 의식도 똑같이 행해집니다. 성전에는 죽은 자들을 위한 대리 침례를 집행하는 침례반이 있어 합당한 회원이 이미 죽은 자들을 위해 대리 의식을 행합니다.
“성전으로 오십시오.” 지금 당장 올 수 없다면 될 수 있는 대로 속히 오십시오. 그날이 오기를 고대하면서 열심히 기도하고 자신의 생활을 정리하며, 열심히 저축하십시오. 매우 어렵고 실의에 빠질 때가 많은 회개의 여행길을 지금부터라도 시작하십시오, 성전은 개인을 변화시키며 그곳에 들어가기 위해 기울인 어떠한 노력도 그에게 충분히 보상을 받게 합니다. 성전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사는 사람들의 경우에는 그들이 처음으로 성전을 가기도 전에 성전이 곁에 세워지는 수도 있을 것입니다. 신앙과 희망을 지니고 합당하게 되어 성전에 오도록 결심하십시오.
이 일은 성스럽습니다
경전을 주의 깊게 읽어 보면 주님께서는 모든 백성에게 모든 것을 다 말씀하시지는 않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성스러운 것에 대한 지식을 얻으려면 그에 대한 전제 요건이 되는 어떤 자격을 갖추어야 합니다. 성전 의식이 바로 그에 속합니다.
우리는 성전 밖에서는 성전 의식에 관해 논의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이러한 성전 의식에 관한 지식을 몇몇 선택된 소수의 사람에게 제한하여 다른 사람들은 모르게 하도록 하려는 의도는 결코 아닙니다. 오히려 그와는 정반대입니다. 우리는 모든 사람에게 성전에 들어갈 수 있는 자격을 갖추고 준비하도록 온 힘을 다해 권고하고 있습니다. 성전에 다녀온 사람은 다음과 같은 가르침을 받게 됩니다. 언젠가는 모든 살아 있는 자들과 이 지상에 살았던 자들이 복음을 들을 기회를 갖게 되며 또한 성전이 주는 축복을 받아들이든지, 아니면 거부할 기회를 갖게 될 것입니다. 만일 이러한 기회를 거부한다면 그것은 그 개인이 거부하는 것입니다.
성전 의식과 예식은 매우 단순합니다. 그것은 아름다우며 성스러운 것입니다. 이 의식은 아직 준비되지 않은 사람들에게 주어지지 않도록 비밀로 지키게 되어 있습니다. 호기심만으로는 준비되었다고 할 수 없습니다. 또한 그 의식을 준비하기 위해서는 신앙, 회개, 침례, 확인, 주님의 집에 손님으로 초대받아 오는 사람들이 지녀야 할 성숙함과 고결성 등의 기본적인 단계를 거쳐야 합니다.
우리는 성전에 가기에 앞서 준비되어 있어야 하며 합당해야 합니다. 그러려면 정해진 규정과 조건에 따라야 합니다. 그것은 주님이 정하신 것이지 인간에 의해 정해진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성전에 관련된 모든 일들을 신성시하고 비밀로 하도록 지시할 권리와 권세를 지니고 계십니다.
모든 면에서 합당하고 자격을 갖춘 사람은 모두 성전에 들어갈 수 있으며, 그곳에서 성스러운 의식을 받게 됩니다.
들어가기에 합당함
일단 성전에서 행해지는 의식의 신성함과 성전 축복의 가치에 대해 다소 이해하게 되면 이러한 거룩한 성전에 들어가기 위해 주님께서 세우신 높은 표준에 대한 의문이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성전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성전 추천서를 소지해야 합니다. 추천서에는 와드의 감독과 스테이크 회장의 서명이 있어야 합니다. 선교부 산하에서는 물론 지부 회장과 선교부 회장이 성전 추천서를 발급할 책임을 지고 있습니다. 오직 합당한 자만이 성전에 들어가야 합니다. 감독은 개인적인 합당성에 대해 질문할 책임을 갖고 있습니다. 이 접견은 교회 회원들에게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그 이유는 이 접견이 주님의 성임된 종과 함께 자신의 인생 과정을 검토해 보는 기회가 되기 때문입니다. 만일 자신의 생에서 무엇인가 잘못이 있다면 그것을 해결하도록 감독이 도와 줄 것입니다. 이와 같은 절차, 곧 이스라엘의 보통 판사와의 상담을 통해 여러분은 주님의 승인을 받아 성전에 들어가기에 합당함을 선언받게 되도록 도움을 받을 수 있습니다.
제일회장단 제1보좌로 봉사했던 엔 엘돈 태너 회장은 신권 대회에서 접견에 관해 말씀한 바 있습니다. 그분의 권고는 접견을 행하는 교회 지도자나 접견을 받는 교회 회원 모두에게 중대한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이 권고를 주의 깊게 생각해 보십시오.
감독이나 스테이크 회장은 성전 추천서 접견을 다음과 같은 방법으로 시작하는 것이 좋습니다.
“형제님/자매님은 성전 추천서를 받기 위해 오셨습니다. 저는 주님을 대신하여 접견할 책임이 있습니다. 접견을 마칠 때 제가 서명을 해야 하는 조항이 있습니다. 그러나 저의 서명은 그다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이 추천서가 효력을 갖추려면 형제님/자매님 스스로 서명하셔야 합니다.
“추천서에 서명하실 때 형제님/자매님은 그러한 추천을 받는 사람에게 부여되는 특권에 자신이 합당하다는 것을 주님 앞에 서약하는 것입니다. 몇 가지 꼭 여쭈어야 할 질문이 있습니다. 질문마다 정직하게 대답해 주시길 바랍니다.”
접견 대상자에게 질문을 한 뒤에는 다음과 같은 말을 하면 좋습니다. “주님의 집에 가는 사람은 청결하고 거룩해야 하고 불순종과 부자연스러운 행동으로부터 자유로워져야 합니다.”
형제 여러분, 접견은 사랑하는 마음으로 정숙한 가운데 해야 합니다. 다음과 같은 질문으로 잘못된 것을 고칠 수도 있습니다. “성전 추천서에 자신의 서명을 하면서 주님께 부정직하거나 마음의 불안을 느끼는 일이 혹시 있다면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서명을 하기 전에 어떤 개인적인 일들을 잠시 생각해 보시겠습니까? 주님께서는 모든 것을 알고 계시며 결코 소홀히 여기시지 않는다는 것을 명심하십시오. 우리는 형제님/자매님을 돕고자 합니다. 주님으로부터 부름을 받거나 추천을 받거나 축복을 받기 위해 결코 거짓말을 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이 이와 같은 방법으로 접견을 시도하면 회원은 스스로를 판단할 책임을 지게 됩니다. 감독이나 스테이크 회장은 분별력을 가질 권리가 있습니다. 그들은 추천서를 발급하기 전에 정리해야 할 일이 있는지 없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교회 접견의 축복”, 성도의 벗, 1979년 4월호, 61~62쪽 )
성전 추천서를 위한 접견은 감독과 교회 회원 사이에 은밀히 행해져야 합니다. 이 접견에서 회원은 개인적인 행위와 합당성과 교회와 교회 역원에 대한 충성심을 알아보기 위한 질문을 받게 됩니다. 접견 대상자는 자신이 도덕적으로 깨끗하고 지혜의 말씀을 지키며, 완전한 십일조를 바치고 있고, 교회의 가르침과 일치되는 생활을 하며, 배도 단체에 가입하거나 그들에게 동조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감독은 접견 대상자와 가진 접견 내용을 다루는 데 있어서 비밀을 지키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지시를 받고 있습니다.
감독의 질문에 긍정적인 답변을 하면 대개 성전 추천서를 받기 위한 개인의 합당성을 인정받게 됩니다. 만일 신청인이 계명을 지키지 않고 있거나 일상 생활에서 시정하거나 해결해야 할 일이 있을 경우, 성전 추천서를 받기 전에 자신이 진정으로 회개했음을 나타내 보일 필요가 있습니다.
감독이 그와 같은 접견을 한 후, 스테이크 회장단의 일원이 같은 방법으로 접견을 합니다. 우리가 처음으로 성전에 가는 경우, 대개 스테이크 회장이 그 접견을 하게 됩니다.
확실한 것은 성전 추천서를 받기 위해 접견하게 될 때, 여러분은 자신이 이 성스러운 곳에 들어가기에 합당한지 아닌지를 결정하기 위해 주님을 대표할 책임을 지닌 이스라엘 판사로 지명된 사람의 판단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첫 번째와 그 이후 매번
여러분이 처음으로 성전에 들어갈 때 다소 염려스런 감정을 느끼게 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입니다. 잘 알지 못하는 일에 불안을 느끼는 것은 당연합니다. 우리는 새로운 경험을 하게 될 때 흔히 신경이 날카롭게 됩니다.
마음을 평안히 하십시오, 여러분은 성전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성전에서는 어디서든지 언제나 누군가가 여러분을 도와 줄 것입니다. 여러분은 친절히 안내를 받게 될 것입니다.-마음을 평안히 가지십시오.
우리는 성전에 들어갈 때 경건해야 합니다. 꼭 필요한 대화를 할 때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해야 합니다. 가르침을 받을 동안에도 지극히 경건하고 조용해야 합니다.
조용하고 경건한 가운데 명상할 기회를 베풀어 줄 수 있는 장소가 몇 군데 있습니다. 의식을 위해 성전에 들어가기 전에 일행이 성전의 예배당에 함께 모이는 경우가 흔히 있습니다. 이곳에서 회원들은 일행이 다 모일 때까지 기다립니다. 대개 일상 생활에서는 기다린다는 것에 익숙해 있지 않은 편입니다. 맨 처음으로 실내에 들어와서 마지막 사람이 들어오기까지 기다려야 한다면 다른 상황에서는 짜증이 날 것입니다. 그러나 성전에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여기서는 기다린다는 것이 가장 훌륭한 기회로 생각됩니다. 아무 말 없이 조용히 앉아 경건하고 영적인 생각에 잠긴다는 것은 얼마나 훌륭한 특권입니까! 그것은 영혼을 새롭게 해줍니다.
성전에 올 때 여러분은 하나님의 집에 손님으로 와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것은 기쁜 시간, 곧 조용한 기쁨의 시간입니다. 때때로 성전 결혼에서 친척과 친구들에게 그들의 사랑과 축하의 인사와 오랫동안 만나지 못했던 가족들에 대한 인사는 극히 조용하고 작은 음성으로 해야 함을 상기시켜 줄 필요가 있습니다. 큰소리로 말하고 웃는 것은 주님의 집에서는 합당하지 못합니다.
성전에서 봉사하는 봉사자의 지시를 받아들이십시오. 의식이 진행되는 동안 누군가가 여러분을 안내해 줄 것입니다.
높은 곳으로부터 받은 가르침
성전에 처음 가는 것이든 여러 번 가 보았든, 성전에 가기 전에 성전에서의 가르침은 상징적인 방법으로 주어진다는 것을 여러분이 이해하면 도움이 될 것입니다. 위대한 교사이신 주님은 대체로 이러한 방법으로 가르침을 주셨습니다.
성전은 위대한 학교이며, 배움의 집입니다. 성전에서는 심오한 영적인 일에 관한 것을 가르칠 수 있는 이상적인 장소가 되도록 분위기가 유지되고 있습니다. 십이사도 정원회의 고 존 에이 윗소 장로는 명문 대학 총장이었으며 세상에 잘 알려진 학자였습니다. 그는 성전에 대해 커다란 경외심을 갖고 있었으며 언젠가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성전 의식은 교회 지도자들이 늘 가르친 구원의 계획에 관한 것이며, 난해한 일들을 잘 밝혀 주고 있습니다. 성전에서의 가르침을 위대한 구원의 계획에 적용시키는 것은 조금도 어색하거나 무리가 없는 일입니다. 엔다우먼트의 철학적인 완전성은 성전 의식의 진실성에 대한 한 가지 훌륭한 논지입니다. 더욱이 복음 계획에 대한 이 완전한 개요와 설명은 성전 예배로 복음의 전체 골격에 대한 기억을 새롭게 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의 하나가 됩니다.
또 다른 일면이 언제나 저에게 성전 사업의 진실성에 대한 강한 내적 증거가 되었습니다. 주님께서 선지자 조셉 스미스에게 계시하신 성전 사업과 엔다우먼트는 명백하게 네 부분으로 이루어집니다. 그것은 예비 의식, 강의와 발표에 의한 가르침, 성약, 마지막으로 지식을 시험하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저는 교육도 제대로 받지 못하고 논리도 서툰 선지자 조셉이 혼자 힘으로 그러한 일을 논리적으로 그렇게 완전하게 해냈다고는 생각지 않습니다.(존 에이 윗소, “성전 예배”, The Utah Genealogical and Historical Magazine, [1921년 4월] 12:58)
윗소 장로의 기사를 다시 인용해 보겠습니다.
우리는 상징의 세계에 살고 있습니다. 우리는 상징에 의하지 않고서는 아무것도 알 수 없습니다. 우리는 종이에 몇 개의 부호를 그리고 그것을 하나의 단어라고 말합니다. 그 부호가 바로 사랑이나 미움이나 자비나 하나님이나 영원을 나타냅니다. 그 부호는 우리의 눈에 그렇게 아름답게 보이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책에 나오는 상징 부호가 그것이 나타내는 사물만큼 그 아름다움을 강하게 나타내지 못한다고 비난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라는 글자에 대해 아무런 의문을 제기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그 글자가 그다지 아름답지는 않지만 하나님의 위엄을 나타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 상징의 의미를 분명히 알 수만 있다면 그 상징을 갖게 된 것을 기뻐할 것입니다. 오늘 저녁 제가 여러분에게 말씀을 하는 동안 여러분은 저의 연설 방법이나 어휘 선택에 대하여 별로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습니다. 여러분은 제가 분명하게 밝히고자 하는 생각의 의미를 이해하려고 애쓰는 동안 제가 말한 어투나 어휘는 까맣게 잊으신 것입니다.
우리는 상징의 세계에 살고 있습니다. 어떠한 사람도 상징 이면에 있는 강력한 실재를 보지 못한다면, 성전에서 자신이 받아야 할 엔다우먼트를 제대로 받고 나올 수 없습니다.(“Temple Worship,” 62쪽)
여러분이 성전에 가서 그 가르침이 상징적임을 기억한다면, 여러분은 반드시 시야를 더욱 넓히게 되고, 보다 숭고한 느낌을 지니게 되며, 영적인 것에 대한 지식이 증가되어 합당한 영의 상태를 지니게 될 것입니다. 가르치는 계획은 참으로 훌륭합니다. 그것은 영감받은 것입니다. 위대한 교사이신 주님은 제자들을 가르치실 때 언제나 비유, 곧 다른 방법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울지도 모르는 일들을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방법을 사용하여 가르치셨습니다. 주님은 제자들의 생활에서 끌어낸 평범한 경험을 들어 말씀하셨으며, 또한 암탉과 병아리와 새와 나무와 강도와 도둑과 일몰과 부자와 가난한 자와 의사와 옷을 깁는 것이며 가라지를 뽑는 일, 집을 청소하는 것과 알곡을 고르는 일이나 곡간에 저장하는 것과 집을 짓는 것과 일꾼을 고용하는 것과 기타 수많은 일들에 관해 말씀하셨습니다. 그분은 겨자씨와 진주에 관해서도 말씀하셨습니다. 그분은 그에게 귀를 기울이는 사람들을 가르치기를 원하셨으므로 단순한 일들을 상징적인 방법으로 말씀하셨습니다. 이러한 것 중 어느 것도 신비스럽거나 불분명한 것은 없었으며 모두 상징적인 것입니다.
성전 자체가 하나의 상징입니다. 밤에 환히 불이 켜진 성전을 본다면 그것이 얼마나 인상적인 광경인가를 알게 될 것입니다. 암흑 가운데 환히 밝혀져 있는 우뚝 솟은 주님의 집은 점점 영적인 암흑으로 빠져 들어가는 세상에 횃불이 되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권능과 영감을 나타내는 상징이 됩니다.
성전 의식은 한 번 성전에 가는 것으로는 충분히 이해될 수 없습니다. 부분적으로만 이해할 수 있을 뿐입니다. 지속적인 방문을 통해 배워야 합니다. 그러기를 거듭할 때 여러분의 마음을 어지럽게 했던 것이나 풀지 못했던 일들과 신비스러웠던 것들을 차츰 알게 될 것입니다. 그러한 일은 대체로 다른 사람에게는 설명할 수 없는 은밀하고 개인적인 것입니다. 자기 자신만이 그러한 것들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전에서 무엇을 얻는가 하는 것은 대부분 우리가 얼마나 겸손하고 경건한 방법으로 구하며 배우기를 갈망하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우리가 겸손하게 받아들일 자세를 취한다면 성전 안에서 성령에 의해 배우게 됩니다.
성전에서 엔다우먼트 의식에 참여하거나 인봉 의식을 지켜볼 기회를 갖게 되면 그곳에서 진행되는 일들의 깊은 의미를 잘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성전 방문을 마치고 나서도 이러한 일들에 관해 곰곰이 생각하고 조용히 기도하는 마음으로 그것을 돌이켜본다면 자신의 지식이 커지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성전에서 경험하는 것 중에서 가장 가치 있는 것은 그것이 지상과 관련된 하나님의 목적의 광범위하고도 전반적인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일단 우리가 성전을 통해 이것을 보게 되면(우리가 자신의 기억을 새롭게 하여) 인생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이러한 계획과 일치시키게 됩니다. 우리가 현재 어디에 있는가를 올바른 관점에서 볼 수 있으며, 우리가 올바른 길에서 벗어나 있다면 즉시 그것을 알 수 있게 됩니다.
그러므로 성전을 향해 바라보십시오. 자녀들을 성전으로 인도하십시오. 자녀들이 어렸을 때부터 성전에 관심을 갖게 하십시오. 그리고 그들이 자라 거룩한 성전에 들어갈 날을 위한 준비를 시작하십시오.
동시에 가르침을 받아들일 준비를 하고 경건하십시오. 성전에서만 받을 수 있는 상징적이며 심오한 영적인 가르침에 깊이 잠기도록 하십시오.
성전 결혼을 준비하는 데는 시간이 걸립니다. 이것은 세심한 계획을 세울 가치가 있습니다. 사랑에 빠진 젊은 남녀가 결혼하기로 결정하고는 부모의 간청을 무릅쓰고 한두 주일 안에 결혼하겠다고 고집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젊은 남녀는 준비할 시간을 좀더 갖자는 부모의 간청을 그들의 결혼에 대한 반대로 간주하는 경우가 흔히 있습니다. 그들은 결혼을 늦추면 그들의 결혼 계획에 방해가 되는 어떤 일이 일어나지 않을까 하고 걱정합니다. 젊은 남녀들 중에는 성급하게 결혼을 고집함으로써 오히려 더욱 큰 어려움을 당하게 되고 결과적으로 다른 상황에 처했던 것보다 훨씬 좋지 못한 경험을 하게 되어 스스로 성숙하지 못하고 불친절한 면을 드러내는 수가 있습니다.
너무 급하게 서두르거나 쫓기다 보면 처음 성전을 방문할 때나 성전 결혼을 할 때 어떤 것을 빠뜨리게 되는 것 같습니다. 이러한 최초의 성전 방문이나 결혼하는 날에 인봉되는 것은 일생에 한 번 있는 경험입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충분히 준비해야 할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너무나 의미 깊은 것이므로 미흡한 준비나 사소한 집안 일로 인해 그 의미를 감소시키게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러므로 모든 준비를 미리 갖추어야 합니다. 어떤 중대한 일을 그때까지 행하지 않고 미루어 둔다면 크게 좌절할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이 모임에 일찍 나가서 예배당에 조용히 앉아 사람들이 도착하는 것을 지켜본다면 그들이 무엇인가를 갖고 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때 영적인 분위기가 살아나고 그 방은 빈방에서 영적인 경험을 얻기를 고대하는 형제, 자매들이 모인 방으로 변하여 그 방의 분위기가 바뀌게 됩니다.
분주한 나날을 보내다 보면 모임에 참석할 때마다 항상 이렇게 하기는 어렵습니다. 이와 같은 태도로 모임에 임하는 것은 성전에 갈 때 그 중요성이 배가됩니다. 우리가 처음으로 성전에 갈 경우에는 특히 그러합니다. 우리는 그곳에 일찍 도착해야 합니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이와 같이 일찍 참석하는 것은 단지 보호받기 위해서나, 추천서와 다른 사항들이 잘 준비되어 있는가, 또는 우리 자신이 이 새로운 경험에 잘 적응할 수 있는지 확인하기 위한 것만은 아닙니다. 그 이상의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조용히 올바른 영을 얻기 위해 제시간에 올바른 장소에 도착하는 것입니다. 즉 앞으로 진행될 것을 위해 스스로 준비하는 것입니다.
이제까지는 성전 의식에 참여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나 성전 결혼이 잘 계획되고 있는데 매우 가까운 가족 몇 분이 성전 추천서를 받기에 적합하지 못한 경우도 있습니다. 이것은 신랑이나 신부가 개종자여서 그 부모가 아직 교회에 속하지 않은 경우라든지, 그들이 교회에 들어온 지 얼마 안 되어 아직 성전 추천서를 받을 자격이 없는 경우입니다. 또는 부모가 교회 회원이기는 하나, 두 분 중 한 분이 성전 추천서를 받을 수 있을 만큼 충분히 복음의 표준대로 생활하지 않는 경우입니다. 이러한 제약은 성전 결혼 시에 큰 문제가 될 수 있습니다. 이때야말로 가족이 한데 뭉쳐 인생의 이 성스러운 순간을 함께 나누도록 해야 합니다. 자격을 갖추지 못한 사람에게 성전 추천서를 발급하지 않거나 비회원 친구나 친척을 의식에 참관하도록 초청할 수 없는 것은 당장 문제를 야기시킬 수도 있습니다. 그로 인해 모든 일이 극히 평온하게 진행되고 최대로 화목해야 하는 바로 그 순간에 오히려 불행과 다툼이 초래될 수도 있습니다.
그와 같은 경우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우리가 해서는 안 되는 일은 감독에게 조르는 것입니다. 감독은 이스라엘의 보통 판사로서 그가 지켜야 할 표준에 따라야 하므로 자격이 없는 사람에게 추천서를 발급할 수는 없습니다. 만약 그렇게 한다면 그 당사자에게 큰 해악을 끼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감독 자신에게도 온당치 못한 일이 될 것입니다.
성전 결혼의 일정이 정해지고 부모 중 한 분이나 가까운 친척이 성전에 들어갈 수 없을 경우에는 잘 계획하면 문제를 야기시키기보다는 그 순간을 기회로 삼을 수 있습니다. 다음과 같은 제언에 대해 생각해 봅시다. 비회원인 부모나 성전 추천서를 받을 수 없는 사람을 결혼식에 참석할 사람들과 함께 성전에 가자고 권유하는 것입니다. 성전 경내에서는 다른 곳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영과 영향력을 느낄 수 있습니다. 성전에는 대부분 방문자 센터가 있습니다. 어느 곳이든지 성전 경내는 아름답게 꾸며져 있습니다. 어디든 화평과 정적이 감돌고 있습니다.
누군가가 그 가족과 함께 있게 합니다. 가족을 혼자 남겨 두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성전에 들어가 결혼식을 참관할 수 있는 충분한 자격을 갖춘 가족 중에서도 성전에 들어갈 수 없는 사람과 함께 성전 경내에서 시간을 보내는 것에 만족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들은 성전 주위에서 주님의 집에 들어가 인봉받고자 하는 젊은 남녀의 소망을 설명해 줍니다.
다른 경우라면 불가능할지도 모르는 것이 이 순간에 큰 영향을 미칠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대부분의 큰 성전에서는 안내자가 함께 하기 마련입니다. 미리 계획함으로써 어떤 이유에서든지 성전에 들어갈 수 없는 가까운 가족이나 특별한 주의를 기울일 수 없는 가까운 가족의 요구에 맞추어 특별한 주의를 기울일 수 있을 것입니다. 비회원인 부모나 성전에 들어갈 수 없는 회원의 부모의 실망이나 분개심, 때로는 악감정을 이런 방법으로 크게 완화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일부 성전에는 성전에 들어갈 수 없는 부모들의 질문에 답해 줄 수 있는 자격을 갖춘 사람과 만날 수 있는 특별한 방이 마련되어 있습니다.
젊은 부부는 부모가 평생 동안, 그들이 신랑, 신부로서 결혼하는 날을 학수고대해 온 사실을 이해해야 합니다. 부모가 자녀의 결혼식에 참석하기를 열망하는 것이라든지 결혼식에 참석할 수 없게 되었을 때 느끼는 섭섭함은 부모로서의 당연한 애착심의 증거가 됩니다. 젊은 남녀는 이것을 원망해서는 안 됩니다. 이것을 이해해야 하며 결혼식의 일부로서 세심하게 미리 계획해야 합니다.
물론 성전에 들어갈 자격이 없는 부모가 감정이 상해 풀어지지 않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러한 경우에 젊은 남녀가 그러한 상황에서 그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이러한 의문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일반 결혼을 하여 부모님들이 결혼식에 참석할 수 있도록 하고 필요한 만큼 몇 년을 기다렸다가 성전에 들어가면 어떨까? 그러나 그것을 이상적인 해결책이라고는 할 수 없습니다. 기도하는 마음으로 세심하게 계획을 세운다면, 대개의 경우, 문제 그 자체를 가족이 전보다 더 가까워질 수 있는 기회로 변화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친구나 와드 회원 또는 그 외 다른 사람들을 너무 많이 결혼식의 증인으로 초대해서는 안 됩니다. 결혼식에 참가하는 수는 양가의 가족과 몇몇 극히 친밀한 사람을 포함해서 소수로 제한해야 합니다. 이따금 와드에서 결혼식을 광고하고 결혼하는 당사자들에게 도움이나 격려를 주도록 모든 사람에게 참석하기를 권고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피로연이 바로 이러한 목적으로 있는 것입니다. 피로연은 친구와 그 외에 행복을 빌어 주고 싶어하는 사람들에게 인사할 기회를 마련해 줍니다. 성전 결혼 그 자체는 신성해야 하며 결혼하는 사람들의 생애에서 매우 특별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는 사람들만 함께 참석해야 합니다.
우리는 성전 밖에서 인봉 의식의 말씀을 인용해서는 안 되지만, 인봉실이 아름답고 분위기가 조용하며 그곳에서 행해지는 성스러운 의식에 의해 거룩하게 된 곳임을 설명할 수 있습니다.
한 쌍의 남녀가 인봉 의식을 받기 위해 제단으로 가기 전에 의식 집행자는 젊은 남녀에게 몇 가지 권고를 하고, 또 젊은 남녀는 그것을 받을 특권이 있습니다. 이때에 젊은 부부는 다음과 같은 내용의 말씀을 듣게 됩니다.
“오늘은 두 분의 결혼일입니다. 두 분은 자신의 결혼에 대한 감정에 휩싸여 있습니다. 성전은 이와 같은 의식을 위한 성소로서 지어졌습니다. 우리는 세상에 속해 있지 않습니다. 세상의 일들은 여기서 진행되는 일에 적용되지 않으며 우리가 여기서 행하는 일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합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나와 주님의 성전에 들어왔습니다. 오늘은 두 분의 생애에서 가장 중요한 날입니다.
“두 분은 세상에 태어나, 각자 영이 거할 수 있는 육신의 장막을 준비하신 부모에 의해 이 세상에 오게 되었습니다. 두 분은 모두 침례를 받았습니다. 성스러운 의식인 침례는 정결과 사망과 부활의 상징이며 새 생명으로 나오는 상징입니다. 여기에는 회개와 죄 사함이 포함됩니다. 성찬은 침례 성약을 새롭게 하는 것이며 우리가 그대로 생활한다면 계속해서 죄 사함을 받게 됩니다.
“신랑은 신권 성임을 받았습니다. 신랑은 먼저 아론 신권을 받고 그에 속한 직분인 집사, 교사, 제사 직분을 모두 거쳐 발전했을 것입니다. 그런 후 신랑은 멜기세덱 신권을 받기에 합당하다는 것을 알게 된 날을 맞이했습니다. 대신권인 이 신권은 하나님의 가장 거룩한 반차를 따른 신권, 즉 하나님의 아들의 반차를 따른 성신권(앨마서 13:18 및 힐라맨서 8:18 참조)으로 정의됩니다. 형제님은 그 신권의 한 직분을 받았습니다. 형제님은 이제 장로입니다.
“두 분은 각자 자신의 엔다우먼트를 받았습니다. 그 엔다우먼트에서 두 분은 영원한 잠재력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모든 일들은 어떤 의미에서 두 분이 현세와 영원을 위한 남편과 아내로서 인봉되기 위하여 제단으로 나아가기 위한 예비와 준비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두 분은 이제 한 가족을 이루어 자유스럽게 생명을 창조하는 일을 행할 수 있고 헌신과 희생을 통해 자녀를 세상으로 데리고 와 지상에 사는 동안 그들을 안전하게 양육하여 언젠가는 그들도 두 분과 같이 성스러운 성전 의식에 참여할 수 있도록 돌보아야 합니다.
“두 분은 자의로 이곳에 왔으며 합당하다는 판단을 받았습니다. 이 결합은 약속의 성령에 의해 인봉될 것입니다.”
그런즉, 나는 이제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곧 나의 친구 된 너희에게 보내어 너희 마음속에 거하게 하노니 이는 곧 약속의 성령이라. 이 다른 보혜사는 요한의 증거에 기록된 것같이 내가 나의 제자들에게 약속한 바로 그이니라.
이 보혜사는 내가 너희에게 주는 영생 곧 해의 왕국의 영광의 약속이니라.(교리와 성약 88:3~4)
“결혼 성약에서 서로를 받아들이는 것은 커다란 책임이며 무한한 축복이 따르는 것입니다.”
신랑 신부는 결혼식 때 너무나 벅찬 감정에 사로잡혀 있어서 그 말씀을 주의 깊게 듣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즉 인봉 의식에서 행해지는 말씀을 잘 듣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성전 밖에서 이 말씀을 그대로 옮겨 말할 수 없을지라도 다른 사람의 결혼식을 참관하기 위해 그곳에 다시 들어갈 수 있습니다. 이때 우리는 몸소 그 의식에 참여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 의식에서 행해지는 말씀을 주의 깊게 들을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물론 죽은 자들을 위한 의식을 행하기 위하여 자주 성전에 감으로써 엔다우먼트를 받은 경험에 대한 느낌과 영을 새롭게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이미 일반 결혼을 했다면, 이제 여러분은 영원을 위한 인봉을 받고 싶을 것이며, 여러분에게 자녀가 있다면, 영원한 가족 관계를 맺도록 그들을 여러분에게 인봉하고 싶을 것입니다. 여러분이 이렇게 할 자격을 갖추었다면, 이러한 축복을 받는 것은 여러분의 커다란 특권이 될 것입니다.
흰옷을 입고
우리는 성전에서 의식을 행할 때 흰옷을 입습니다. 이 흰옷은 순결과 합당성과 청결의 상징입니다.
성전에 들어가면 평상복을 벗고 흰 성전복으로 갈아입습니다. 옷을 갈아입는 것은 갱의실에서 하는 것으로, 갱의실에는 각 개인에게 하나씩 옷장과 옷을 입는 공간이 주어지며, 그곳은 완전히 독립되어 있습니다. 성전에서는 정숙이라는 개념이 철저히 지켜집니다. 옷을 옷장에 둘 때에는 모든 근심과 걱정과 혼란을 벗어 둔 옷과 함께 그곳에 남겨 둡니다. 이 갱의실에서 흰옷으로 갈아입고 나오면 모두가 하나이며 평등하다는 느낌을 갖게 됩니다. 왜냐하면 주위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모두 같은 옷을 입고 있기 때문입니다.
처음으로 성전에 갈 경우에는 감독과 상의해야 합니다. 감독은 성전 추천서를 발급해 줄 때, 성전에서 입어야 할 옷에 대해 설명해 줄 것입니다. 이 옷을 구하는 것은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 옷은 교회 배부 센터에서 구입하거나 성전에서 빌릴 수 있습니다. 후자의 경우에는 성전복 세탁비에 해당되는 매우 저렴한 사용료만 지불하면 됩니다. 소규모 성전에서는 성전복을 대여하지 않고 있습니다.
우리는 성전 의식과 마찬가지로 성전 밖에서는 성전 안에서 입었던 의복에 관해서도 거의 언급하지 않습니다. 의식과 마찬가지로 이것도 상당히 큰 상징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교회 회원이 주님의 면전에서 거북하게 느끼지 않을 복장과 몸가짐을 하고 성전을 방문하는 것은 경건과 존경의 표적이 됩니다. 잠시 우리가 크게 존경받는 저명한 지도자의 가정에 손님으로 초대되었다고 가정해 봅시다. 그러면 같이 초대받은 다른 저명한 손님들과 함께 하리라는 것을 알 것입니다. 그와 같은 자리에 초대받는다는 것은 주인이 여러분을 극진히 존경하고 있다는 표시입니다. 그러나 초대를 매우 부러워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그들은 어떤 사유로 인하여 초대받지 못했으며 따라서 참석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런 경우 낡은 작업복이나 운동복 차림으로는 참석하지 않을 것이며 남자인 경우, 수염도 깎지 않고 여자인 경우 머리도 매만지지 않고 오지는 않을 것입니다.
품위 있고 교양 있는 사람들은 중요한 모임에 초대받으면 어떤 복장이 적합할 것인지 문의할 때가 많습니다. 여러분은 이와 같이 특별한 경우 세심하게 준비하지 않겠습니까? 여러분은 자신의 외양이 그러한 고상한 분위기에 뒤떨어지지 않도록 새 옷을 사거나 맞춰 입기까지 할 것입니다.
또한 옷을 세탁하고 다림질하는 등 세심한 주의를 기울일 것입니다. 만일 적절한 옷차림을 하지 못했다면 불편함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성전 방문 기회는 그러한 초대에 비유될 수 있습니다.
교회 회원이 평상복으로 성전에 들어가도록 초대되는 한 가지 경우가 있는데 그것은 성전 결혼을 참관하기 위해 들어가는 때입니다. 그러한 경우에는 단지 신고 있는 구두만 벗고 흰 덧양말로 바꿔 신을 수 있습니다. 수년 전에 총관리 역원은 성전 결혼 직전에 있는 엔다우먼트 의식에 참석하지 않을 가족들과 친구들의 편의를 위해 특별히 이것을 승인했습니다.
신랑과 신부는 성전에서 현세와 영원을 위한 결혼을 하게 됩니다. 신부는 그곳에서 디자인과 옷감이 수수하며 화려한 장신구가 달려 있지 않은 긴 소매의 흰색 드레스를 입습니다. 신랑 또한 흰색의 옷을 입습니다. 성전 결혼의 증인으로 초대된 형제들은 턱시도를 입지 않습니다.
우리는 때때로 성전에 참석하여 결혼식을 참관하거나 성전의 어떤 모임에 참석하기 위해 오는 사람이 마치 소풍이나 운동 경기를 구경하러 가기라도 하는 복장으로 오는 것을 보고 당황하거나 슬픔을 느끼기조차 합니다.
성전에 들어가는 특권은 우리가 그 이상으로 높이 생각할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깨끗이 목욕을 하고 아무리 값싼 옷일지라도 깨끗한 옷을 입는 것은 주님이 보시기에 기쁜 일입니다. 우리는 성찬식에 참석하거나 품위 있는 모임에 참석할 때에는 어울리는 복장을 해야 합니다.
간혹, 복장과 몸차림, 곧 의복, 머리카락의 길이 및 손질에 있어서 단정하지 못한 세상의 유행에 따르지 말라는 총관리 역원의 권고에 전혀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성전 결혼을 참관하는 사람들을 목격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세상의 방법을 따르기를 더 좋아하는 자를 기쁘게 여기시지 않는다는 사실을 정말로 성전에 들어가도록 허용된 만큼 성숙한 사람이 왜 지각하지 못하는지 의문스럽습니다.
추천서를 받은 회원이 어떻게 단정하지 못하거나 세상적인 옷을 입고 성전에 들어갈 수 있을까요? 어떻게 두발 상태가 지저분하며 품위가 없는 그러한 몸차림을 할 수 있을까요?
성전 의식에 참여하거나 인봉 의식에 참관하기 위해 성전에 갈 기회가 있으면 먼저 자기 자신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여러분은 주님의 집에 초대된 손님입니다. 주인이 나타났을 때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을 복장과 몸차림을 해야 합니다.
신권의 축복을 지니고 함께 나누는 사람은 선지자 조셉 스미스에게 엔다우먼트 의식이 주어질 때 그에게 계시된 대로 복장을 갖추어야 합니다.
성전 의식을 받은 회원은 특별한 내의 곧 가먼트를 입어야 합니다. 성전 가먼트는 교회의 한 기관에서 공급합니다. 이것은 교회가 운영하는 배부 프로그램을 통해 전세계의 회원이 쉽게 구입할 수 있습니다.
가먼트는 성스러운 성약을 나타냅니다. 이것은 정숙한 마음을 키워 주며 착용자에게 방패와 보호벽이 됩니다.
그와 같은 가먼트를 착용했다고 해서 여러 나라에서 일반적으로 유행되는 그러한 옷을 입어서는 안 된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단정하지 못하거나 극단적인 스타일의 옷은 가먼트와는 어울리지 않습니다. 성전에 가본 경험과는 무관하게 교회의 회원이면 누구나 극단적이거나 단정하지 못한 옷은 되도록 피해야 할 것입니다.
엔다우먼트를 받은 교회 회원은 가먼트에 관한 질문을 받을 때가 있을 것입니다.
한번은 총관리 역원 한 분이 로드아일랜드의 뉴포트에 있는 해군 군목 훈련원의 교수와 직원들에게 연설해 달라는 초청을 받았습니다. 청중 가운데는 천주교, 개신교, 유대교 출신의 고위 해군 군목이 여러 분 있었습니다.
질의 응답 시간에 한 군목이 이렇게 질문했습니다. “몇몇 몰몬 군인이 입고 다니는 특별한 내의에 관해 말해 줄 수 있습니까?” 그의 질문에서 내포하고 있는 뜻은, “왜 그런 옷을 입습니까? 이상하지 않습니까? 그 때문에 문제가 일어나지 않습니까?”였습니다.
질문을 한 군목에게 총관리 역원은 다음과 같은 질문을 했습니다.
“귀하는 어느 교회를 대표하고 있습니까?” 그 질문에 그는 개신교의 한 종파를 말했습니다.
총관리 역원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군대 생활에서 그리고 군대 예배에서 귀하는 성직자의 옷을 입지요?” 그 군목은 그렇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는 계속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는 그 옷이 귀하에게 중요한 의미가 있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면에서 그것은 귀하가 다른 사람과는 다르다는 것을 나타내기도 합니다. 그것은 목사의 제복입니다. 또한 그보다도 중요한 의미가 있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것은 또한 귀하가 누구이며 귀하의 의무와 성약이 무엇인지를 귀하 본인에게 상기시켜 줍니다. 그것은 귀하가 성직자의 한 사람이며 자신을 주님의 종으로 여기며, 자신이 성임받은 것에 합당하게 생활할 책임이 있음을 계속 귀하에게 상기시켜 줄 것입니다.”
그러고 나서 그는 또한 이 가먼트를 입는 것은 성전에서 맺는 성약과 연관되는 더 깊은 영적 의미가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우리로서는 재론할 여지가 없지만, 그는 또한 그것은 비밀이기 때문이 아니라 성스럽기 때문이라는 것을 되풀이해 강조했습니다.
우리의 몸을 감싸는 이 가먼트는 시각적으로 또한 감각적으로 이러한 성약을 상기시켜 줍니다. 대부분의 교회 회원에게 있어서 가먼트는 그 착용자가 유혹을 받을 때 보호벽이 됩니다. 무엇보다도 이것은 하나님의 율법, 그 중에서도 도덕적 표준에 대한 우리의 깊은 존경심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인봉의 권능
성전 사업의 역사와 교리를 알고자 한다면 인봉의 권능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인봉의 권능을 사용할 수 있는 권세의 열쇠가 왜 중요한가에 대하여 적어도 어느 정도는 일가견을 갖고 있어야 합니다.
기원전 약 9백년 전에, 선지자 엘리야는 이스라엘 왕의 법정에 나타났습니다. 그는 성스러운 권세인 인봉의 권능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엘리야는 자신의 성역을 베풀었으며, 자신의 뒤를 잇도록 엘리사를 성임하고 성별했습니다. 중요한 사실입니다만, 그후 그는 죽음을 맞보지 않았습니다. 그는 앞서 살았던 모세처럼 변화되었습니다.
그 사건 이후, 그의 이름은 구약전서의 마지막 장, 마지막 절 바로 앞에 단 한 차례만 등장합니다. 지구 전체가 저주로 내려치지 않게 하도록 엘리야가 돌아와 “아버지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키게 하고 자녀들의 마음을 그들의 아버지에게로 돌이키게 [할 것이라]”(말라기 4:5~6)고 말라기가 예언한 바로 그 구절입니다.
예수께서 빌립보 가이사랴 지방에 이르러 제자들에게 물어 이르시되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
이르되 더러는 침례 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 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
이르시되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능이 이기지 못하리라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하시고 (마태복음 16:13~19)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이 주님과 함께 변형의 산에 올랐을 때, 그곳에서 그들은 변형된 주님과 함께한 두 사람을 보게 됩니다. 그들은 자신들에게 인봉의 권능을 전하기 위해 온 모세와 엘리야를 알아보았습니다.(마태복음 17:1~8 참조; 일라이어스는 히브리 이름 엘리야에 대한 그리스어의 번역어이며 종종 신약에서 구약의 선지자인 엘리야를 지칭하는 데 사용되었음을 주목한다.)
베드로가 그 열쇠를 갖게 되었습니다. 베드로는 인봉하는 권능, 곧 땅에서 매거나 인봉하거나 풀면 하늘에서도 그렇게 되는 권능이 있는 권세를 갖게 되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십자가에 달리신 후, 주후 34년에 니파이 백성들에게 성역을 베푸셨습니다. 경전 역사상 특이할 만한 일로 주님은 그들에게 말라기의 마지막 두 장(엘리야가 다시 올 것이라는 예언이 포함되어 있음)을 일러주시고 그것을 기록하게 하시고 그에 대해 설명하셨습니다.
모로나이 천사는 금판에 관해 말하기 위해 선지자 조셉 스미스에게 나타났을 때 엘리야가 다시 오시리라는 말라기의 예언을 인용했습니다. 이 인용문은 교리와 성약 2편에도 나와 있습니다.
모로나이가 나타난 지 13년 후에 그러한 목적에 부합되는 한 성전이 세워졌고, 주님이 다시 나타나셨으며 엘리야가 그분과 함께 와서 인봉의 권능 열쇠를 부여했습니다.
그러한 열쇠는 선지자, 선견자, 계시자인 교회의 회장이 소유합니다. 현재 교회에는 이 성스러운 인봉의 권능이 존재합니다. 이 권세의 중요성을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 이보다 더 성스럽게 숙고되고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어느 것도 이보다 더 엄중히 유지되고 있는 것도 없습니다. 그 어느 때에라도 이 지상에는 비교적 소수의 남자들만이 이 인봉의 권능을 지니고 있었으며, 각 성전에는 이 인봉의 권능을 부여받은 형제들이 있습니다. 어느 누구도 선지자, 선견자, 계시자인 예수 그리스도 후기 성도 교회의 회장 및 그분이 다른 사람들에게 위임한 사람들을 통하지 않고는 그것을 받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보니, 주께서 ……”
엘리야가 돌아온 날은 1836년 4월 3일 일요일 오후였습니다. 이날 커틀랜드 성전에서 성찬식이 있었습니다. 선지자는 그날 오후에 있었던 일을 다음과 같은 단순한 말로 설명했습니다.
오후에 나는 오늘 성찬대에서 집행하는 특권을 가진 십이사도에게서 주의 만찬을 받아서 교회 회원에게 나누어 주고 있던 다른 회장들을 도왔다. 나의 형제들에게 나누어 주는 이 일을 마친 후에 나는 휘장이 드리워진 설교단으로 물러나서 올리버 카우드리와 함께 몸을 굽히고 엄숙한 침묵의 기도를 드렸다. 기도를 마치고 일어나자 우리 두 사람에게 다음 시현이 열렸다.(교리와 성약 110편 서문)
휘장이 우리의 마음에서 걷히고 우리의 이해의 눈이 열렸더라.
우리가 보니, 주께서 우리 앞 설교단 흉벽 위에 서 계시는데, 그 발 아래에는 호박 같은 순금이 펴 있더라.
그의 눈은 불꽃같고 그의 머리털은 깨끗한 눈같이 희고 그의 얼굴은 해보다 더 밝게 빛나고, 그의 음성은 큰 물의 격류 소리 같으니, 곧 여호와의 음성이라. 이르시기를,
나는 처음과 마지막이라, 나는 살아 있는 자요, 죽임을 당하였던 자니, 나는 아버지께 대한 너희의 변호자니라.
보라, 너희 죄는 사함 받았으니, 너희는 내 앞에서 깨끗하도다. 그러므로 너희 머리를 들고 기뻐하라.
네 형제들은 마음으로 기뻐할지며, 그 힘을 다하여 내 이름을 위하여 이 집을 지은 나의 모든 백성은 마음으로 기뻐할지어다.
이는 보라, 내가 이 집을 받아들였고 내 이름이 여기에 있을 것이며, 내가 이 집에서 자비 가운데 나의 백성에게 나 자신을 나타낼 것임이니라.
그러하도다, 만일 내 백성이 나의 계명을 지키고 이 거룩한 집을 더럽히지 아니하면, 나는 나의 종들에게 나타나 나 자신의 음성으로 그들에게 말하리라.
참으로 수천 수만의 마음은 이 집에서 부어질 축복과 나의 종들이 이 집에서 받은 엔다우먼트로 인하여 크게 기뻐하리라.
그리고 이 집의 명성은 외국에까지 퍼지리니, 이는 나의 백성의 머리 위에 부어질 축복의 시작이니라. 참으로 그러하도다. 아멘.
이 시현이 닫히고 난 후에 여러 하늘이 다시 우리에게 열리더니, 모세가 우리 앞에 나타나 땅의 사방으로부터 이스라엘을 모으고 북방 땅으로부터 열 지파를 인도해 내는 열쇠들을 우리에게 맡기더라.
이 일 후에 일라이어스가 나타나 아브라함의 복음의 경륜의 시대를 맡기며 이르기를, 우리와 우리의 후손으로 말미암아 우리 뒤의 모든 세대가 복을 받으리라 하더라.
이 시현이 닫힌 후에 또 다른 크고 영화로운 시현이 우리에게 갑자가 나타났는데 이는 죽음을 맛보지 아니하고 하늘로 들리운 선지자 엘리야가 우리 앞에 서서, 이르기를,
보라, 말라기의 입으로 말한 바 된 그때가 완전히 이르렀나니-그가 증거하기를, 주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그(엘리야)가 보내심을 받아-
아버지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키게 하고 자녀의 마음을 아버지에게로 돌이키게 하리라 돌이키지 아니하면 두렵건대 온 땅이 저주로 치심을 당할까 하노라 하였느니라.
그러므로 이 경륜의 시대의 열쇠들이 너희 손에 맡겨지나니, 이로써 너희가 주의 크고 두려운 날이 가까이 곧 문 앞에 이른 줄을 알 수 있으리라.(교리와 성약 110:1~16)
그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이 놀라운 사건은 세상 사람들의 주의를 끌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이 일은 지금까지 살았던 자들과 앞으로 살게 될 자들의 모든 영혼의 운명에 영향을 미치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일들은 조용히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이 교회는 성전을 짓는 교회가 되었습니다.
세상은 어떤 의미에서는 우연의 일치라고 생각할 수도 있으나 개인과 조직과 사회가 점차 가족 역사 탐구에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일들은 조용히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이러한 일은 모두 엘리야가 커틀랜드 성전에 나타난 이후에 일어난 것입니다.
1836년 4월 3일, 바로 그날부터 자녀들의 마음이 그들의 아버지에게로 돌이키기 시작했습니다. 그 이후로 모든 의식은 일시적인 것이 아니고 영구적인 것이 되었으며, 우리는 인봉의 권능을 갖게 되었습니다. 어떠한 권세도 가치에 있어 그것을 능가할 수는 없습니다. 그 권능은 산 자나 죽은 자를 위해 합당한 권세에 의해 행해진 모든 의식에 의미와 영원성을 부여해 줍니다.
모든 것이 질서 정연하게 행해짐
커틀랜드 성전에서 극적인 사건이 있은 후 성도들은 고난과 박해를 받아 이동하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그들이 가는 곳마다 주님께서는 성전을 지을 계획을 계시하셨습니다. 이러한 일은 인디펜던스와 미주리 주 파웨스트에서도 있었습니다. 이 시기에 성도들은 전례 없이 심한 박해를 받게 되어 일리노이 주 나부로 피하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여기서 또다시 그들은 주님의 집을 지으라는 계시를 받았습니다.
주님은 그 집을 짓는 목적은 의식을 나타내기 위함이라고 설명하셨습니다. “또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집이 나의 이름을 위하여 건축되게 하여 내가 그 안에서 나의 백성에게 나의 의식을 드러낼 수 있게 할지어다. 이는 창세 이전부터 감추어져 온 것들, 때가 찬 경륜의 시대에 관한 것들을 내가 나의 교회에 드러내려고 생각하고 있음이니라.”(교리와 성약 124:40~41)
주님께서는 성전은 교회 회원들이 다음과 같은 의식을 행하는 장소가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너희의 기름 부음과 너희의 씻음과 죽은 자를 위한 너희의 침례와 너희의 성회와 레위의 아들들에 의한 너희의 희생 및 너희가 대화하심을 받는 지극히 거룩한 곳에서의 너희의 계시를 위한 너희 정성의 표시와, 시온의 계시와 기초의 시작 및 모든 시온 주민의 영광과 존귀와 엔다우먼트를 위한 너희 규례와 법도는 나의 거룩한 집의 의식으로써 제정되나니, 이 집을 나의 거룩한 이름을 위하여 지으라는 명령을 나의 백성은 언제든지 받느니라.”(교리와 성약 124:39)
우리가 교회에서 행하는 의식은 다음과 같습니다. 침례, 성찬, 자녀 명명 및 축복, 병자 축복, 교회의 부름에서의 성별, 직분에 성임됨, 그 외에도 성전에서 행해지는 더 높은 의식이 있습니다. 이 의식에는 씻음, 기름 부음, 엔다우먼트, 일반적으로 성전 결혼이라고 불리워지는 인봉 의식 등이 포함됩니다.
이러한 의식들은 교회의 회원인 우리에게 얼마나 중요한 것입니까?
여러분은 이러한 의식을 받지 않고서 행복해질 수 있으며 구속될 수 있으며 승영될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그 답은 그러한 의식은 권고할 만한가, 바람직한가, 또는 필요한가를 따질 여지가 없는 것이며 필수적이거나 꼭 필요한 것 이상의 것으로서 우리 각자에게 없어서는 안 되는 결정적인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선지자 조셉 스미스는 종종 다음과 같은 질문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그러한 모든 의식을 거치지 않고서 구원을 받을 수는 없습니까?” 나는 “안 됩니다. 충만한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라고 대답합니다. 예수께서 “내 아버지의 집에는 거할 곳이 많도다. 내가 가서 너희를 위해 처소를 예비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에서 언급된 집은 왕국이라고 번역되어야 합니다. 가장 높은 곳으로 승영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해의 왕국의 율법과 온전한 율법에 따라 생활해야 합니다.(History of The Church of Jesus Christ of Latter-day Saints, B. H. Roberts 편, 제7권, [솔트레이크시티: 예수 그리스도 후기 성도 교회, 1949년], 6:184)
조셉 필딩 스미스 회장은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나는 여러분이 이 교회에서 어떠한 직분을 갖고 있든지 상관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사도, 축복사, 대제사, 그 외 다른 직분을 갖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성전에 들어가서 선지자께서 말씀하신 이러한 의식을 받지 않고서는 신권의 충만함을 얻을 수 없습니다. 아무도 주님의 성전 밖에서 신권의 충만함을 얻을 수는 없습니다.(조셉 필딩 스미스, Elijah the Prophet and His Mission [솔트레이크시티:데저렛 출판사, 1957년], 46쪽)
우리는 앞에서 성전에서 행해지는 더 높은 의식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이 의식 가운데는 엔다우먼트가 있습니다. 엔다우먼트를 베푸는 것은 풍요롭게 하는 것이며 다른 사람에게 영속적이며 매우 가치 있는 다른 어떤 것을 주는 것입니다. 성전 엔다우먼트 의식은 세 가지 면에서 풍요롭게 해줍니다. ㈀ 의식을 받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지는 권능이 부여됩니다. “엔다우먼트를 받는 자는 높은 곳으로부터 주어지는 권능을 받습니다.” ㈁ 엔다우먼트를 받는 자는 지식을 받게 됩니다. “그들은 주님의 목적과 계획에 관한 교육을 받습니다.”(브르스 알 맥콩키, Mormon Doctrine, 2판, [솔트레이크시티: Bookcraft, 1966년], 227쪽) ㈂ 제단에서 인봉될 때 자신의 엔다우먼트의 일부로서 영광스러운 축복과 권능과 존귀를 받게 됩니다.
다음의 두 책에 엔다우먼트에 대한 정의와 설명이 나와 있습니다. 첫 번째로 브리검 영 회장은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여러분에게 간략한 정의를 내리겠습니다. 엔다우먼트의 목적은 주님의 집에서 행해지는 모든 의식을 받기 위한 것입니다. 그것은 여러분이 이 생을 떠난 후에 파수꾼으로 서 있는 천사에게 성신권에 관한 표시와 표징이 되는 중요한 말을 하고, 그의 곁을 지나 아버지의 면전으로 다시 돌아갈 수 있게 해주며, 지상 생활과 사탄에도 불구하고 영원한 승 영을 얻게 해줍니다.(브리검 영, Discourses of Brigham Young, 존 에이 윗소 편, [솔트레이크시티: 데저렛 출판사, 1971년], 416쪽)
제임스 이 탈매지 장로는 엔다우먼트를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현대의 성전에서 집행되는 성전 엔다우먼트에는 과거의 경륜의 시대의 중요성과 순서에 관한 가르침과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하고 중대한 시기인 현재의 경륜의 시대의 중요성에 관한 가르침도 포함된다. 이러한 가르침에는 에덴 동산에 살던 우리 첫 조상의 상태, 창조의 시기에 일어난 가장 중요한 사건, 그들의 불순종과 범법 후 복된 거처로부터의 추방, 노동하고 땀을 흘려 살도록 운명이 결정되었을 때 세상에 처하게 된 외롭고 두려운 상태, 아담의 범법이 속죄받을 수 있게 마련된 구속의 계획, 대배도의 기간, 고대의 모든 권능과 특권을 다시 누리게 한 복음의 회복, 절대적이고 필수 불가결한 조건인 개인의 순결과 현세에서 의를 이루기 위한 헌신, 복음의 필수 요건에 대한 엄격한 순종에 관한 설명이 포함된다.(제임스 이 탈매지, 주님의 집, 72쪽)
탈매지 장로의 이 말씀에는 엔다우먼트를 받을 때 주님이 지상을 창조하고 사람을 살게 하신 그 목적과 계획에 관한 가르침을 받으리라는 것이 분명히 밝혀져 있습니다. 우리는 승영을 얻기 위해 행해야 할 바를 배우게 될 것입니다.
엔다우먼트의 축복은 완전한 승영을 얻기 위해 필요한 것입니다. 모든 후기 성도는 이 축복을 받기에 합당하게 되고 그것을 받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씻음과 기름 부음 의식은 흔히 성전에서 시작의 의식이라고 불립니다. 현재 우리를 위해서라면 단지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으로 충분할 것입니다. 씻음과 기름 부음 의식은 엔다우먼트와 관계가 있습니다. 이러한 것은 본질상으로는 대부분 상징적이지만 미래의 축복뿐 아니라, 분명하고 즉각적인 축복을 약속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의식과 연관해서 성전에서 여러분은 공식적으로 가먼트를 입고 이것과 연관된 놀라운 축복을 받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의식이 집행되는 동안 주의해서 듣고 약속된 축복과 그것이 실현될 수 있는 조건을 기억해 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인봉 의식은 가족을 영원히 결속시키는 의식입니다. 성전 결혼은 인봉 의식입니다. 부부가 일반 결혼 후에 성전에서 인봉될 경우 성전 인봉 전에 태어난 자녀들은 성약 안에서 태어나지 않았으므로 간략하고 성스러운 의식을 통해 그들에게 인봉되어야 합니다..
여러분의 삶이 완전히 질서 정연하게 진행되고 있는지 살펴보십시오. 이것은 오직 성전 축복과 의식을 받음으로써 그렇게 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의식으로 경건의 능력이 나타나”(교리와 성약 84:20)기 때문입니다.
성스러운 성약
주님은 지금 교리와 성약 132편으로 알려진 계시에서 이렇게 선언하셨습니다.
보라, 이는 내가 너희에게 새롭고도 영원한 성약을 계시함이니, 만일 너희가 그 성약을 지키지 아니하면, 너희는 정죄를 받느니라. 이는 아무도 이 성약을 거부하고는 나의 영광에 들어오기를 허락 받을 수 없음이니라.
이는 내 손에서 축복을 받고자 하는 자는 모두 그 축복을 위하여 정해진 율법과 그 조건을 창세 이전부터 제정된 대로 마땅히 지켜야 함이니라.(교리와 성약 132:4~5)
조셉 필딩 스미스 회장은 새롭고도 영원한 성약을 다음과 같이 정의했습니다.
새롭고도 영원한 성약이란 무엇입니까? 새롭고도 영원한 성약의 참된 의미에 관하여 잘못 알고 인도되고 있는 교회 회원이 있다는 사실은 참으로 유감스러운 일입니다. 새롭고도 영원한 성약이란 모든 복음 성약과 임무를 합한 것입니다.(조셉 필딩 스미스, 구원의 교리, 1:152)
이 성약에는 복음의 모든 의식, 곧 성전에서 행해지는 가장 높은 의식이 포함됩니다. 스미스 회장은 또다시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새롭고도 영원한 성약에 대한 분명한 정의가 내려졌습니다. 그것은 충만한 복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올바른 방법으로 행하여진 결혼, 침례, 신권 성임, 기타—모든 계약, 모든 의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관계되는 모든 것으로서 현세에서 그분의 율법에 따라 약속의 성령으로 인봉된 것이 모두 새롭고도 영원한 성약의 일부입니다. (구원의 교리, 1:152)
앞서 인용한 구절(교리와 성약 132:4)에서 주님께서는 너무나 분명하게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 이는 아무도 이 성약을 거부하고는 나의 영광에 들어오기를 허락 받을 수 없음이니라.”
성전에 들어가는 사람은 그들 자신의 승영과 다른 사람의 승영에 관계되는 특별한 성약과 의무를 받을 특권을 지니고 있습니다. 제임스 이 탈매지 장로는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엔다우먼트 의식을 받을 때 개인은 다음과 같은 책임을 지게 된다. 덕과 순결의 법을 지키고, 자비롭고 유덕하며 관용을 베풀고 순결하기로 결심하며, 재능과 재물을 바쳐 진리를 전파하고 인류를 향상시키기로 하며, 진리의 대업을 위해 헌신을 계속하며, 이 지상을 만왕의 왕인 주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일 수 있게 준비시키는 데 힘써 공헌하기로 성약을 맺는다. 모든 성약을 맺고 책임을 받아들이며, 조건을 충실히 준수함으로써 축복을 받게 된다는 약속이 주어진다.(주님의 집, 73쪽)
우리는 주님께 그분의 왕국을 위해 우리의 시간과 재능과 재산을 바치겠다는 서약을 합니다.
우리는 성약의 백성입니다. 우리는 시간과 돈과 재능, 곧 우리가 가진 모든 자원과 우리 자신을 지상의 하나님의 왕국을 위해 바치겠다는 서약을 합니다. 간단히 말해서 우리는 선을 행하겠다고 성약을 맺습니다. 우리는 성약의 백성이며 성전은 우리의 성약의 중심이며 또한 성약의 근원입니다.
성전으로 오십시오. 성전으로 나아와야 합니다. 여기서 먼저 돌아가신 어떤 분을 위한 대리 사업을 행할 때 여러분은 이미 맺은 성약을 다시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주님의 집과 관련된 위대한 영적인 축복을 마음속으로 다시 굳게 다지게 될 것입니다.
성스러운 의식에 합당하도록 해야 합니다. 그것과 관련된 성약을 존중해야 합니다. 이와 같이 한다면 행복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생활에 질서가 잡히고 모든 것이 순서대로 잘 정돈될 것입니다. 여러분의 가족은 결코 끊어질 수 없는 반차로 연결될 것입니다.
성전에서 구할 수 있는 축복은 성약과 의식 안에 들어 있습니다. 우리가 성약을 지키는 자라는 칭호를 받기에 합당할 때, 주님께서 기뻐하실 것이 틀림없습니다.
적대자가 없지 않음
성전은 교회의 영적인 힘의 중심이 됩니다. 우리가 이 성스럽고 영감에 찬 일에 참여하고자 할 때 적대자는 교회 전체로서나 개인적인 면에서 대항하여 우리를 방해할 것입니다. 그 방해는 초기의 무서운 박해로부터 그 일에 대한 무관심 등 다양하게 나타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아마 성전 사업에 대한 방해 가운데 가장 위험하고 쇠약하게 만드는 형태일 것입니다.
성전 사업은 후기 성도와 교회 전체에 너무나 큰 영적인 힘을 가져다주는 근원이 되므로 그처럼 큰 저항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로간 성전 정초식에서 조지 큐 캐넌 회장은 이와 같이 말씀했습니다.
성전에 놓여진 모든 초석과 주님께서 거룩하신 성신권을 위해 계시하신 질서에 따라 세워진 모든 성전은 지상에서 사탄의 세력을 줄이고 하나님의 권능과 성스러움을 증가시키며 강력한 권능으로 우리를 위해 하늘을 움직이며 영원하신 하나님과 그분의 면전에 거하는 자들의 축복이 우리에게 내릴 것을 요구하고 불러 내립니다.(“로간 성전” Millennial Star, 1877년 11월 12일, 743쪽)
교회 회원들은 고통스러울 때에나 큰 결정을 앞에 두고 마음이 무거울 때 흔히 성전에 갑니다. 성전은 우리의 모든 걱정을 받아들여 주는 훌륭한 장소입니다. 성전에서 우리는 영적인 통찰력을 얻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성전 봉사를 하는 동안에는 이미 “세상에 속한 자가”(요한복음 15:19) 아닙니다.
여기서 큰 가치가 있는 것은 자기 스스로를 위해 의식을 받을 수 없는 사람들을 대신해 무엇인가를 행한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돌아가신 분을 위해 엔다우먼트를 행할 때 주님께 도와 주실 것을 열심히 간구하기를 약간 주저하게 됩니다. 젊은 부부가 어떤 결정을 해야 할 때 만일 성전 가까이에 산다면 성전 의식에 참석하는 것은 매우 훌륭한 일입니다. 성전의 영적 분위기는 우리를 깨끗하게 하며 정화시켜 주는 어떤 것이 있습니다.
S때로는 우리의 마음이 어떤 문제에서 헤어나지 못하여, 즉시 해결해야 할 복잡한 문제로 인해 분명히 생각할 수 없고 명백히 볼 수 없을 때가 있습니다. 성전에서는 주위를 산만하게 하는 먼지가 가라앉고 안개와 아지랑이가 걷히게 되어 전에 볼 수 없었던 것들을 “볼 수 있게” 되고 자신의 고통을 통해 전에 알지 못했던 어떤 길을 발견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가 성스러운 성전 의식을 집행할 때 우리를 축복해 주실 것입니다. 축복은 성전 사업에만 국한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하는 모든 일에서 축복을 받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마땅히 우리의 영적인 일이나 세상적인 일에서 주님의 관심을 받게 될 것입니다.
휘장을 향하여
우리는 왜 성전을 세워야 하며 왜 우리에게 의식이 필요한지 어느 정도 이해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계속해서 영적으로 중대한 일들에 관해 가르침과 일깨움을 받고 있습니다. 이것은 규칙에 규칙을, 교훈에 교훈을 더해 주는 것이며, 결국 우리는 충만한 빛과 지식을 얻게 됩니다. 이것은 개인적으로 우리 각자를 보호해 줍니다. 이것은 또한 교회를 보호해 줍니다.
성전 사업과 가족 역사 탐구보다 더 이 교회를 보호해 주는 사업은 없습니다. 어떠한 사업도 이것보다 더 영적으로 정화시켜 주고 우리에게 더 큰 능력을 주지 못합니다. 이보다 더 높은 의의 표준을 요구하는 사업도 없습니다.
성전에서 우리가 행하는 일은 우리를 한 개인으로서 또한 한 백성으로서 보호해 주는 방패가 됩니다.
우리는 성전 의식을 통해서 주님과 성약을 맺게 됩니다. 바로 그곳에서 우리는 성약의 백성이 됩니다.
만일 우리가 성전 사업에 관한 계시를 받아들여 아무 조건이나 변명 없이 성약을 맺는다면, 주님께서 우리를 보호해 주실 것입니다. 우리는 생의 어려운 문제를 위한 영감을 받게 될 것입니다.
성전에 관련된 사업은 참된 것입니다. 이것은 장막 저편에서부터 계시되었으며 또한 계시가 계속되고 있습니다.
교회 회원 개개인은 성전 사업에 대한 계시를 개별적으로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전으로 오십시오. 와서 축복을 받도록 하십시오. 이 사업은 성스러운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