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장들의 가르침
조지 앨버트 스미스의 생애와 성역


조지 앨버트 스미스의 생애와 성역

교회 회장으로 봉사하던 어느 날, 조지 앨버트 스미스는 사진 한 장과 함께 이런 쪽지를 받았다. “이 사진에 우리가 아는 회장님 모습이 잘 나타나 있어서 보내 드립니다.” 그 사진에는 스미스 회장이 한 어머니와 어린 네 자녀를 만나는 모습이 담겨 있었다. 그날 스미스 회장은 기차를 타기 위해 서둘고 있던 중 자녀들이 하나님의 선지자와 악수를 해 보았으면 하고 바라던 이 어머니와 마주쳤다. 그 순간을 본 사람이 그 장면을 사진에 담은 것이다.

이어서 쪽지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우리가 [이 사진]을 아끼는 이유는 회장님처럼 바쁘신 분이 급하게 차를 타고 기차역으로 가서 출발을 앞둔 기차를 타기 위해 서두르시는 도중에도 짬을 내어 그 집 아이들과 일일이 악수를 나누셨기 때문입니다.”1

이 경우처럼 친절한 행위는 조지 앨버트 스미스의 생애와 성역에 나타나는 특징이다. 신앙 때문에 시련을 겪는 이웃에게 사랑과 격려를 보내는 일이든, 수천 명을 먹이기 위해 광범위한 복지 사업을 조직하는 일이든 조지 앨버트 스미스는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마가복음 12:31)는 구주의 계명에 따라 살았다.

어린 시절, 1870~1890년

Picture of young George Albert Smith

네 살 무렵

조지 앨버트 스미스는 1870년 4월 4일 솔트레이크시티에 있는 존 헨리 스미스와 사라 파 스미스의 가난한 집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스미스 가족에게는 하나님 왕국을 위해 봉사해 온 위대한 유산이 있었다. 조지 앨버트 스미스의 아버지는 훗날 십이사도 정원회와 제일회장단에서 봉사했다. 조부이자 그에게 이름을 물려준 조지 에이 스미스는 선지자 조셉 스미스의 사촌이었으며, 1847년 솔트레이크밸리로 들어온 첫 번째 후기 성도 개척자 중 한 사람이다. 또한 조지 에이 스미스는 사도이자 브리검 영 회장의 보좌였다. 조지 앨버트 스미스의 증조부인 존 스미스는 교회 축복사이자 솔트레이크시티 초대 스테이크 회장으로 봉사했다. 외조부인 로린 파는 유타 주 옥든 시의 초대 시장이자 초대 스테이크 회장이었다.

Picture of John Henry Smith

존 헨리 스미스

조지 앨버트 스미스는 부모님을 사랑하고 존경했다. 그는 궁핍한 사람에게 손을 내밀라고 가르친 아버지를 신뢰했으며2, 복음 안에서 가정을 꾸려나가기 위해 희생한 어머니를 칭송하며 이렇게 회상했다. “우리는 몹시 가난했고, 아버지께서는 제가 다섯 살 때 선교 사업을 나가셨지만 저는 어머니께서 불평하시는 모습을 본 기억이 없습니다. 또한 어머니께서 자신의 처지를 힘들어하며 눈물을 흘리시는 모습도 본 적이 없습니다. 어머니께서는 제가 아는 그 누구보다도 돈을 알뜰하게 쓰실 수 있는 분이셨습니다. ……

아버지께서 선교 사업으로 집을 비우시자 어머니께서 그 자리를 맡으셨으며 부재중인 가장의 역할을 톡톡히 해내셨습니다. 우리는 가족과 함께 기도하고 음식을 축복했으며, 복음에 관한 의식을 믿는 신앙이 깊으신 어머니께서는 누군가가 아프면 장로들을 부르셨습니다. 어머니께서는 늘 십일조를 철저하게 바치셨으며, 제가 아는 바로는 ‘몰몬이즘’이 잘못되었거나 참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품어 보신 적이 한 번도 없으신 분입니다. 어머니는 온 영혼을 다해 믿으셨습니다.”3

Picture of Sarah Farr Smith

사라 파 스미스

특히 조지 앨버트 스미스는 어머니가 기도하고, 하나님께서 응답해 주실 것을 믿으라고 가르친 일을 떠올렸다. “어린 [소년]이었을 때 어머니께 제가 받은 영향을 생각하면 숙연해지고 눈물이 납니다. …… 어머니께서 제 손을 잡고 계단을 따라 이층으로 올라가시던 때가 마치 어제 일처럼 떠오릅니다. 그곳에서 저는 어머니 곁에 무릎을 꿇고 어머니 손을 잡은 채 기도하는 방법을 배웠습니다. 저는 마음속에 복음의 영과 다른 사람을 축복하려는 소망을 품은 어머니들이 있다는 것에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기도를 배운 지 오랜 세월이 흐른 지금도 저는 그 기도를 되풀이 할 수 있습니다. 저는 그 기도를 통해 하나님 아버지께서 계시다는 확신을 얻었으며, 하나님께서 제 기도를 듣고 응답해 주셨다는 사실을 배웠습니다. 제가 자라난 뒤에도 우리는 계속 목조로 된 이층집에서 살았는데, 세찬 바람이 불면 집은 무너질 듯이 흔들렸습니다. 저는 가끔 너무 겁이 나서 잠을 잘 수가 없었습니다. 제 침대는 작은 방에 덩그러니 있었는데, 저는 밤 중에 침대에서 내려와 무릎을 꿇고 하나님 아버지께 우리 집을 보살펴 주셔서 산산조각 나지 않도록 보호해 달라고 기도한 적이 많습니다. 그러고 나서 저는 마치 하나님 아버지의 손을 잡고 있는 것처럼 악으로부터 보호 받으리라는 확신을 느끼며 작은 침대 속으로 다시 들어갔습니다.”4

어린 시절을 회상하며, 조지 앨버트 스미스는 이렇게 말했다.

“부모님께서는 매우 초라한 환경에 사셨지만 저는 온 마음을 다해 저를 그분들의 가정으로 보내 주신 창조주께 찬양과 감사를 드립니다.

…… 저는 소년 시절에 이 사업이 주님의 일임을 배웠습니다. 저는 지상에 살아 있는 선지자가 있음을 배웠습니다. 전능자의 영감이 그 영감을 향유하기에 합당하도록 살아온 사람에게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배웠습니다.

…… 저는 제가 타고난 권리에 감사드리며,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가르쳐 주시고 가정에서 모범을 보여 주신 부모님께 감사드립니다.”5

어린 조지 앨버트 스미스는 행복하고 쾌활한 소년이었다고 한다. 친구들은 그의 명랑한 천성을 좋아했으며, 스미스는 하모니카, 밴조, 기타와 여러 가지 재미있는 노래로 친구들을 즐겁게 해 주었다. 그러는 동안에도 스미스는 강한 책임감을 키우는 데 도움이 된 여러 경험을 했는데, 어린 소년에게 일어난 일이라고 생각하기에는 특출한 일들이었다. 열두 살 때 조지 앨버트 스미스는 브리검 영 아카데미에 입학하여 삶에 지대한 영향을 준 권고를 들었다. 훗날 그는 이렇게 회상했다.

“저는 훌륭한 교회 학교를 최초로 세운 뛰어난 교육자인 칼 지 매서 박사님 밑에서 공부하는 행운을 얻었습니다. …… 그곳에 있는 동안 들은 말씀들 중 기억나는 것은 거의 없지만 단 한 가지만은 절대 잊지 못할 것입니다. 저는 그 말씀을 수없이 되뇌어 보았습니다. 어느 날, 매서 박사님은 일어서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이 하는 모든 일을 책임지게 될 뿐 아니라 여러분의 생각까지도 책임질 것입니다.’

생각을 조절하는 습관이 제대로 배어 있지 않던 소년으로서 저는 어떻게 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걱정했습니다. 이 말씀은 제 뇌리에 남았습니다. 일주일 내지 열흘이 지나자 저는 그분이 어떤 뜻으로 그런 말씀을 하셨는지 문득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제서야 그 말씀에 담긴 철학을 알게 된 것입니다. 불현듯 그 말씀을 이렇게 해석할 수 있다는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그것은 이생을 마치는 날이 오면 제 삶은 제 생각에서 비롯된 결과물일 것이므로, 저는 제 생각에 대해 책임을 지게 되리라는 뜻이었습니다. 그 조언 한 마디는 평생 저에게 커다란 축복이 되었으며, 부적절한 생각을 피하는 데 여러 차례 도움이 되었습니다. 제가 인생살이를 마치는 날을 맞았을 때 저라는 존재는 바로 제 생각의 산물이라는 것을 깨달을 것이기 때문입니다.”6

1882년, 십이사도 정원회에서 2년째 봉사하던 부친이 유럽 선교부 회장으로 부름을 받자 어린 조지 앨버트 스미스는 가정에서 큰 책임을 맡게 되었다. 존 헨리 스미스가 없는 동안 조지 앨버트 스미스는 가족을 부양하는 일을 도와야 했다. 열세 살 때 그는 교회 소유인 제조공장과 솔트레이크시티에 있는 백화점에서 일자리를 얻고자 지원했는데 관리자는 아무도 고용할 수 없다고 말했다. 조지 앨버트 스미스는 자신이 원하는 것은 돈이 아니라 오직 일하는 것이라고 대답했다. 스미스는 이렇게 덧붙였다. “제가 조금이라도 가치 있는 사람이라면 돈을 받게 되리라고 믿었지요.”7 이런 적극적인 자세로 그는 주급 2달러 50센트를 받는 공장 노동자 자리를 얻었으며, 자신이 지닌 철저한 직업윤리 덕분에 곧 더 나은 자리로 승진했다.

18세 때, 조지 앨버트 스미스는 철로 측량 회사에서 일했다. 이 일을 하는 동안 그는 모래사막에 내리쬐는 태양광선 때문에 눈에 부상을 입었다. 이 일로 조지 앨버트 스미스는 영구적인 시력 장애가 생겨 글을 읽기 어려웠으며 평생 불편을 겪었다.

선교 사업과 결혼, 1891~1894년

1891년 9월, 윌포드 우드럽 회장은 조지 앨버트 스미스에게 유타 주 남부에서 단기 선교 사업을 하라는 부름을 주었다. 그는 특별히 그 지역 교회 청소년들을 위해 일하도록 지명을 받았다. 그리하여 조지 앨버트 스미스는 넉 달 동안 동반자와 함께 스테이크와 와드 내에 청소년 조직을 세우는 일을 도왔으며, 여러 모임에서 말씀하고, 청소년들이 교회 표준에 따라 살도록 독려했다.

선교 사업에서 돌아온 조지 앨버트 스미스는 어릴 때부터 연모해 온 윌포드 우드럽 회장의 손녀인 루시 우드럽에게 구애를 계속했다. 두 사람은 이웃으로 성장했으며, 루시는 조지 앨버트 스미스의 성품이 발전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루시는 그를 존경하는 마음을 일지에 기록했다. “오늘밤 나는 하나님께 감사드리는 마음으로 귀가했다. …… 나는 그가 이 세상에 살았던 가장 훌륭한 청년들 중 한 명임을 믿어 의심치 않으며, 하나님께서 힘을 주셔서 내가 그의 사랑을 받기에 더 합당한 사람이 되기를 기도드린다. 그는 정말 선하고 친절해서 눈물이 난다.”8

Picture of Lucy Emily Woodruff Smith

루시 에밀리 우드럽 스미스

그러나 루시 주변에는 구애하는 청년들이 많았으며, 그중 어떤 이들은 매우 부유해서 값비싼 선물을 주기도 했다. 반면에 조지 앨 버트 스미스는 주님에 대한 헌신으로 루시의 마음을 끌었다. 그는 루시에게 이렇게 썼다. “당신이 돈을 위해 누군가와 결혼하기를 바란다면 저는 그런 상대가 못 됩니다. 왜냐하면 저는 오래 전부터 제 자신과 제 삶과 제 시간을 돈을 버는데 바치지 않고 주님을 섬기고 이 세상에 사는 그분 자녀들을 돕는 데 바치기로 결심했기 때문입니다.”9 루시는 마음을 정했고, 1892년 5월 25일에 유타 주 맨타이 성전에서 조지 앨버트 스미스와 결혼했다. 인봉의식은 조지 앨버트 스미스의 부친이 집행했다. 그날 루시는 자신의 사진을 담은 작은 사진 갑을 남편에게 주었다. 조지 앨버트 스미스는 그 사진 갑을 주머니 시계줄에 묶어서 심장에 가까운 곳에 달고 다녔으며 온 생애 동안 거의 매일 지니고 다녔다.10

신혼부부가 된 지 한 달도 채 안 되어 조지 앨버트 스미스는 또다시 선교 사업을 떠났다. 이번에는 미합중국 남부에서 전도하는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서였다. 부름장이 결혼 3주 전에 도착했기에 이미 출발이 임박했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이별은 여전히 힘들었다. 4개월이 된 무렵, 조지 앨버트 스미스는 선교부 서기로 일하기 시작했는데 루시 역시 남편과 함께 선교부 사무실에서 봉사하라는 부름을 받았다. 두 사람은 날아갈 듯 기뻐했다.

당시 남부 주 선교부 회장은 칠십인 정원회 일원이었던 제이 골든 킴볼이었다. 킴볼 회장은 스미스 장로가 봉사하는 동안 솔트레이크시티에서 중요한 업무를 보기 위해 두 차례나 선교부를 비워야 했다. 한 번은 스미스 장로가 선교부 서기가 된 직후였고, 다른 한 번은 그로부터 1년이 지난 후였다. 이 두 기간 동안 킴볼 회장은 스미스 장로에게 선교부를 이끌고 관리하는 중차대한 책임을 맡겼으며, 서신을 통해 숱한 지원과 권고를 주었다. 합산하면 스미스 장로는 16개월 가량 선교부 회장 대리로 봉사했다. 그토록 오랫동안 선교부를 비우는 것이 마음에 걸렸지만 킴볼 회장은 젊은 보조를 신뢰했다. 한 편지에서 킴볼 회장은 스미스 장로에게 이렇게 썼다. “분별력과 식견이 부족한 저이지만 장로님의 고결성과 인품을 높이 평가하고 있음을 잊지 마시길 바랍니다.”11 다른 편지에서 킴볼 회장은 이렇게 썼다. “제가 장로님의 수고와 열정과 선한 영에 감사하고 있다는 사실을 항상 기억하시기 바랍니다.”12

킴볼 회장은 여러 차례 스미스 장로의 열정과 선한 영을 목격했다. 한번은 두 사람이 함께 여행을 하던 중에 작은 통나무집에서 하룻밤을 묵도록 초대받은 일이 있었다. 훗날 조지 앨버트 스미스는 이렇게 회상했다.

“자정이 가까웠을 때, 우리는 밖에서 들려오는 끔찍한 고함소리에 잠을 깼다. 상황을 살피려고 침대에 걸터앉자 천박한 말들이 들려왔다. 그날 밤에는 달빛이 환해서 바깥에 많은 사람이 모여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킴볼 회장님은 벌떡 일어나 옷을 입기 시작하셨다. 사람들은 문을 두드리고 상스러운 말을 하며 몰몬은 나오라고 호통쳤다. 나오기만 하면 쏘아 죽일 심산이었다. 킴볼 회장님은 나에게 일어나서 옷을 입지 않겠느냐고 물으셨다. 그러나 나는 이렇게 말씀드렸다. ‘싫습니다. 이대로 누워 있겠습니다. 주님께서 틀림없이 우리를 돌보아 주시리라 믿기 때문입니다.’ 방안에는 금세 총탄이 빗발쳤다. 폭도들은 네 무리로 나누어 집 모퉁이로 총을 쏘아 대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나무 파편 조각이 머리 위로 이리저리 날아다녔다. 잠시 조용해지더니 다시 사격이 가해지고 더욱 많은 파편이 날아다녔다. 나는 전혀 두렵지 않았다. 그곳에 누워 있으면서 무척 담담했으며, 내 생애 가장 무시무시한 일을 겪으면서도 주님께서 나를 보호해 주시리라 믿었고, 그분은 그렇게 해 주셨다.

폭도들은 실망하여 그곳을 떠났다. 다음 날 아침 문을 열어 보니 폭도들 이 남부에 있는 선교사들을 혼내 주려고 사용하던 것과 같은 묵직한 나무 몽둥이가 한 무더기나 있었다.”13

세월이 흐른 후, 조지 앨버트 스미스는 손자 손녀들에게 주님을 신뢰하라고 가르칠 때 이 경험담을 들려주었다. “너희에게 이걸 강조하고 싶구나. 주님께서는 위험이 닥칠 때 너희를 돌보아 주실 거란다. 너희가 주님께 그럴 수 있는 기회를 드리기만 한다면 말이야.”14

가정생활

1894년 6월, 조지 앨버트 스미스와 루시는 선교 사업에서 해임되었다. 몇 달 후에 솔트레이크시티로 돌아온 루시는 할아버지인 윌포드 우드럽 회장으로부터 축복을 받으며 자녀를 갖게 되리라는 약속을 받았다. 1895년 11월 19일, 루시는 에밀리라 이름 지은 딸을 낳았으며, 4년 후에는 둘째 딸 에디스를 낳았다. 막내인 조지 앨버트 이세는 1905년에 태어났다.

조지 앨버트 스미스는 사랑이 많은 아버지였으며, 자녀들은 그를 흠모했다. 에디스는 아버지에 대해 이렇게 썼다. “아버지는 딸의 사랑을 받을 만한 모든 품성을 지닌 분이셨습니다. 제가 아버지에게 기대하는 모든 점을 채워 주셨습니다.” 자녀들은 특히 조지 앨버트 스미스가 사랑하는 아내를 대하는 방식에 감동을 받았다. 에디스는 이렇게 기록했다. “어머니에 대한 아버지의 사랑과 배려는 아름다웠습니다. 아버지께서는 항상 어머니께 고마움을 표하셨습니다. 어떤 일을 하든 두 분은 꼼꼼하게 계획을 세운 다음, 힘을 모아 함께 일하셨습니다. 아버지께서는 어머니를 소중하게 대하셨습니다. …… 우리는 모두 어머니를 존경했지만, 저는 아버지께서 어머니를 사려 깊고 다정하게 대하셨기 때문에 자녀들이 어머니를 더욱 사랑하게 되었다고 믿습니다.”15

아버지로서 조지 앨버트 스미스는 자신이 복음에 따라 살 때 느끼는 기쁨을 자녀들도 경험하도록 돕기 위해 성심을 다했다. 어느 성탄절, 선물을 풀어 본 다음에 그는 어린 딸들에게 성탄절 선물을 하나도 받지 못한 아이들에게 장난감 중 일부를 주는 것이 어떻겠냐고 물었다. 딸들은 방금 새 장난감을 받았기 때문에 가지고 놀던 장난감을 어려운 집 아이들에게 주는 데 동의했다.

그러나 조지 앨버트 스미스는 다정하게 “새 장난감도 좀 나누어 주면 어떻겠니?” 하고 한 번 더 물었다.

딸들은 머뭇거렸지만 마침내 새 장난감 한두 개를 주기로 동의했다. 조지 앨버트 스미스는 마음에 두고 있던 아이들 집으로 딸들을 데려가서 선물을 전했다. 그 경험으로 딸들은 한껏 고무되었고, 한 아이는 그곳을 나서며 들뜬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얼른 나머지 장난감도 가져와서 아이들한테 나눠 줘요!”16

십이사도 정원회, 1903~1945년

1903년 10월 6일 화요일, 조지 앨버트 스미스는 업무가 너무 많아서 그날 연차 대회 모임에 참석하지 못했다. 사무실을 떠날 무렵에는 오후 총회 모임이 거의 끝나갈 때여서 그는 아이들을 박람회에 데려 갈 요량으로 집으로 향했다.

집에 당도하자 그는 방문객들이 문전성시를 이루고 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그중 한 사람이 앞으로 나오더니 따스한 축하 인사를 건넸다.

“이게 무슨 일이죠?” 하고 그가 묻자

“모르세요?” 하고 그 자매가 대답했다.

“무얼 모른단 말이죠?”

“형제님은 십이사도 정원회 일원으로 지지받으셨어요.” 방문객이 목청을 높이며 말했다.

조지 앨버트 스미스는 “그럴리가 없어요. 무언가 착오가 있었을 겁니다.” 하고 말했다.

그러나 그 자매가 “제가 직접 들었는데요.” 하고 되받아 말했고

조지 앨버트 스미스는 이렇게 대답했다. “틀림없이 다른 스미스 형제일 겁니다. 그 일에 대해 저는 한 마디도 들은 게 없거든요. 믿을 수가 없어요.”

어리둥절해진 그 방문객은 혹 잘못들은 게 아닌지 확인하기 위해 태버내클로 돌아갔다. 그곳에서 그 자매는 자신이 옳았으며, 조지 앨버트 스미스가 새로운 십이사도 정원회 일원이 되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17

딸 에밀리는 훗날 당시 광경을 이렇게 회상했다. “마치 태버내클에 있던 모든 사람이 잔디밭을 가로질러 우리 집으로 몰려오는 것 같았습니다. 모두 눈물을 흘리고 어머니께 입맞춤을 하며 아버지께서 사도가 되셨다고 말하길래, 우리는 사도가 되는 게 세상에서 제일 안 좋은 일인가 보다라고 생각했습니다.”

그 소식을 확인한 뒤에도 조지 앨버트 스미스는 약속대로 딸들을 박람회에 데려가기로 마음먹었다. “그렇지만 아버지는 박람회를 제대로 보실 수가 없었어요.” 에밀리는 이렇게 회상했다. “벽 쪽에 서서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데 시간을 다 보내셨거든요.”18

이틀 후인 1903년 10월 8일, 솔트레이크 성전에 있는 위층 어느 방에서 조셉 에프 스미스 회장은 조지 앨버트 스미스를 사도로 성임했다. 의식을 마친 후 그는 십이사도 정원회 회원들에게 소감을 말해 달라는 청을 받고 이렇게 말했다. “저는 연륜이 쌓인 분들에 비해 연약하고 판단력이 부족합니다. 그렇지만 저는 올바른 마음을 지녔으며 주님의 일을 진척하기를 열렬히 소망합니다. …… 제게는 이 사업이 신성하다는 살아 있는 간증이 있으며, 복음이 주님의 지시와 인도로 이 땅에 주어졌고, 과거와 현재에 감리하도록 선택받은 사람들이 문자 그대로 그분의 종이라는 사실을 압니다. 저는 순수하고 겸손하게 생활하여 온 생애 동안 영으로부터 오는 속삭임과 권고로 인도받을 수 있기를 소망하고 기도드립니다.”19

조지 앨버트 스미스는 정원회 회장으로 봉사한 2년을 포함하여 거의 42 년을 십이사도 정원회에서 봉사했다. 이 기간에 그는 여러 임무를 수행했으며 수많은 방법으로 전 세계 사람들을 축복했다.

복음을 나누고 교회를 위해 친구를 사귀다

스미스 장로는 사람들을 편안하게 만들고, 적을 친구로 만드는 데 천부적인 재능이 있었다. 교회 회원이 아닌 지역 사업가 한 명은 스미스 장로의 장례식에서 이렇게 말했다. “그분은 쉽게 다가갈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여러분이 가까이하고 싶어 할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분이 건네는 친절한 웃음, 다정한 악수, 따스한 인사는 여러분과 이웃을 향한 그분의 진실한 우정을 가슴으로 느끼게 해 주었습니다.”20

교회가 아직 세상에 널리 알려지지 않아 많은 사람에게 의심을 받던 시기에 이런 재능은 중요한 역할을 해냈다. 한번은 웨스트버지니아 주에서 임무를 수행할 때, 스미스는 시 공무원들이 몰몬이즘을 전파하는 사람을 모두 체포하겠다고 위협한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 정책을 변경시키기 위해 스미스 장로는 담당자인 잉글 씨를 만났다. 훗날 조지 앨버트 스미스는 일지에 이렇게 썼다. “처음 잉글 씨를 찾아갔을 때, 그는 매우 날이 서 있었으며 그 도시에서는 우리를 받아 줄 수 없다고 딱 잘라 말했다. …… 나는 그에게 무언가 잘못 알고 계신 것이 분명하며, 함께 앉아 담소를 나누고 싶다고 했다. …… 우리는 잠시 몰몬이즘에 관한 대화를 나누었다. 내 가 떠나기 전, 그는 눈에 띌 정도로 누그러지더니 악수를 청하고 명함을 건넸다. 나는 편견이 어느 정도 해소되었다고 느끼며 자리를 떠났다.”21 사흘 후 스미스 장로는 다시 잉글 씨를 만났으며 이번에는 몰몬경 한 권을 전달했다.22

스미스 장로는 언제나 사람들과 교회에 관한 이야기를 나눌 기회를 모색했다. 임무를 받고 여행을 떠날 때면 사람들에게 줄 몰몬경과 교회 잡지와 여러 교회 서적을 챙겼다. 몰몬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강하게 증거하기 때문에 스미스 장로는 몰몬경이 이상적인 성탄절 선물이라고 생각했으며, 몰몬경을 종교가 다른 친구들뿐 아니라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저명인사들에게도 보냈다.23 그런 성탄절 선물과 함께 보낸 한 편지에서 그는 이렇게 적었다. “며칠 후면 기독교계에서 구주의 탄생을 축하하는 날이 올 거야, 이 절기에는 친구들을 기억하는 것이 우리 전통이기도 하지. 나는 자네가 이 몰몬경을 받아 줄 것이라 믿네. …… 자네가 이 책을 기쁜 마음으로 서재에 비치해 두리라 믿으며 성탄절 선물로 보낸다네.”

스미스 장로는 다음과 같은 답장을 받았다. “나는 그 책을 선반 위에 두고 [처음부터 끝까지] 열린 마음으로 신중하게 읽어 볼 셈이네. 그 책을 신중하게 읽어 본다면 누구라도 시야를 넓히고 관용 정신을 키울 수 있겠지.”24

시정 참여

스미스 장로는 교회 회원들에게 자신이 속한 지역 사회에 참여하고, 환경을 개선하기 위해 영향력을 행사하라고 격려했다. 스미스 장로 자신도 총관리 역원이라는 중책을 맡으면서도 여러 시 조직에 관여했다. 그는 국제 관개 회의[International Irrigation Congress] 및 건조 농업 회의[Dry Farming Congress] 회장으로 선출되었으며, 미국독립혁명 전국 후계자 협회[National Society of the Sons of the American Revolution] 부회장 직에 여섯 번이나 선출되었다. 스미스 장로는 여러 곳을 방문하는 총관리 역원의 임무를 더 효율적으로 수행하는 데 유용할 항공 산업을 열렬히 지지했고, 웨스턴항공[Western Air Lines]에서 중역으로 일하기도 했다. 또한 미국 보이스카우트[Boy Scouts of America]에도 적극 관여하여 1934 년에는 스카우트에서 주는 최고 영예인 실버 버팔로 상을 수상했다. 제1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 몇 년 동안 그는 아르메니아 및 시리아 구호 운동 유타 주 의장으로 봉사했으며, 전쟁으로 집을 잃은 사람들에게 안식처를 찾아 줄 목적으로 설립된 국제주택총회[International Housing Convention] 주 대표를 역임했다.25

사도로 부름 받기 전에 조지 앨버트 스미스는 정치 활동에 적극적이어서 더 나은 사회를 만드는 데 도움이 될 만한 대의나 후보를 위해 열성적인 캠페인을 벌였다. 총관리 역원이 된 후 정치 참여는 줄어들었지만 자신이 믿는 대의를 옹호하는 일은 멈추지 않았다. 한 예로, 1923년에 그는 유타 주 입법부에 한 가지 법안을 제출하는 일을 도왔는데 이 일을 계기로 결핵 환자들을 위한 요양원이 건립되었다.26

특히 스미스 장로는 1933년부터 1949년까지 맹인구호협회[Society for the Aid of the Sightless] 회장으로 봉사하는 동안 타인에 대한 크나큰 동정심을 발휘했다. 시각장애로 고통을 겪은 한 사람으로서 스미스 장로는 맹인에 대해 특별한 연민을 느꼈다. 그는 점자로 된 몰몬경 출판을 총괄했으며 맹인들이 점자를 배우고 여러 방법으로 장애에 적응하도록 돕기 위해 프로그램을 마련했다. 스미스 장로가 펼친 봉사로 혜택을 받은 사람들은 그의 노고를 높이 샀다. 맹인구호협회에 속한 한 여성 회원은 스미스 장로의 70번째 생일에, 그에 대한 고마운 마음을 헌시에 담았다.

인생에 거센 폭풍 몰아치고,

쓰라린 눈물 떨굴 때.

고독한 겨울에 내 영혼이 에이고,

공허한 메아리 울릴 때—

나는 간절한 소망으로 발길을 돌린다,

느리고 힘겨운 걸음,

이해하는 가슴 찾아,

친절한 불꽃 피어 있고

온화한 지혜 거하는 곳으로,

상냥하고 친절하며,

하나님과 인간을 향한 그 믿음은

눈먼 이에게도 향하니. ……

온화하고 사랑이 깃든 그 얼굴

바라볼 수는 없어도,

친절한 지혜는 볼 수 있지

이해심 깊은 그 가슴에서.

그 영혼에 실린 평화를 느낄 때

우리 안에 평화가 스민다.

그가 드리는 고요한 기도 소리

우린 혼자가 아니라 말하지.

우리 향한 그의 믿음에 힘을 얻는다,

보이지 않는 길을 걸을지라도.

우리 영혼을 끌어올리는 사람

하나님과 손을 맞잡고서.27

질병과 여러 시련들

조지 앨버트 스미스는 온 생애 동안 대체로 건강이 좋지 못했다. 수영과 승마, 기타 몸을 움직이는 활동을 즐겼지만 몸이 허약했고 가끔은 기력이 없었다. 만성적인 시력장애 외에도 스미스 장로는 위장병과 요통, 만성 피로, 심장병과 다른 여러 질병으로 늘 고생했다. 여러 책임을 수행하는 데 따르는 스트레스와 중압감 또한 건강에 타격을 주었지만, 처음부터 그는 건강을 지키기 위해 업무 속도를 늦추는 것을 내켜 하지 않았다. 결국 조지 앨버트 스미스는 1909년부터 1912년까지 지독한 병마와 싸우느라 병석에 누워 지냈으며 십이사도 정원회의 소임을 수행할 수 없었다. 업무에 복귀 하기를 필사적으로 바란 스미스 장로에게 이 기간은 참으로 힘든 시절이었다. 1911년에 부친이 세상을 떠나고 아내가 심한 독감에 걸려 고생하면서 스미스 장로는 회복에 더욱 어려움을 겪었다.

세월이 흐른 후, 조지 앨버트 스미스는 이 시기에 겪은 경험을 다음과 같이 들려주었다.

“수년 전 저는 심각하게 아팠습니다. 솔직하게 말씀드려서 아내를 제외 한 모든 사람이 저를 포기했으리라 생각합니다. …… 저는 너무 쇠약해서 거의 움직이지도 못했습니다. 침대에서 돌아누울 때조차 천천히 움직이며 숨을 헉헉거릴 정도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저는 주변을 인식하지도 못하는 상태가 되었는데 마치 저 세상에 간 것 같았습니다. 저는 크고 멋진 호수를 등진 채 거대한 나무 숲을 마주하고 있었습니다. 아무도 보이지 않았고, 호수에는 제가 어떻게 그곳에 오게 되었는지를 알려줄 만한 배나 다른 운송수단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저는 제가 필멸의 기간 동안 할 일을 마치고 본향으로 돌아왔음을 깨달았습니다. ……

주위를 살펴보다가 곧 숲으로 통하는 오솔길을 발견했는데, 사람들이 거의 다니지 않은 듯 대부분 풀로 덮여 있었습니다. 오솔길을 따라 숲 속으로 얼마 동안 꽤 멀리 걸었는데, 누군가 제게 다가오는 것이 보였습니다. 저는 그 사람이 체구가 아주 크다는 것을 깨달았고, 서둘러 그분께로 갔습니다. 그분이 바로 제 할아버지인 [조지 에이 스미스]임을 알아챘기 때문입니다. 살아 계실 때 그분은 체중이 136킬로그램이 넘는 분이었기 때문에 얼마나 거구셨을지 짐작이 가실 겁니다. 할아버지께서 오시는 것을 보고 제가 얼마나 기뻐했는지 지금도 생생합니다. 제 이름은 할아버지 성함을 따서 지어졌는데 저는 그 이름을 늘 자랑스럽게 여겼습니다.

Picture of George A. Smith

조지 에이 스미스

할아버지께서는 몇 발자국 앞에서 걸음을 멈추셨습니다. 그것은 저도 멈추라는 의미 같았습니다. 그 후 에 일어난 일을 소년 소녀와 젊은이들이 절대로 잊지 않았으면 합니다. 할아버지께서는 저를 매우 진지하게 바라보시더니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네가 내 이름으로 무슨 일을 했는지 알고 싶구나.’

제가 한 모든 일이 활동사진처럼 제 앞을 스쳐갔습니다. 제가 한 모든 일들이 말입니다. 그곳에 서 있던 그 순간 생생한 기억들이 빠르게 스쳐 지나갔습니다. 제 온 생애에 대한 기억이 스쳐 지나갔습니다. 저는 웃으면서 할아버지를 바라보며 말했습니다.

‘저는 할아버지 존함으로 할아버지께서 수치스럽게 여기실 만한 일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분께서는 제게 다가오셔서 저를 팔로 안으셨습니다. 그러자 저는 의식이 돌아왔고 주변을 인식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스스럼없이 답할 수 있었다는 감사함에 흘린 눈물로 베개는 물을 쏟은 듯이 젖어 있었습니다.

저는 이 일을 여러 차례 되새겨보았으며, 그날 이후로 제 이름을 소중히 간직하기 위해 과거 어느 때보다도 더 애썼다는 사실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저는 어린이들과 청남 청녀들과 교회와 이 세상 젊은이들에게 말씀드립니다. 여러분의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십시오. 여러분 이름을 명예롭게 하십시오.”28

마침내 스미스 장로는 활력을 되찾기 시작했고, 진리에 대한 간증을 가질 수 있음을 새롭게 감사드리며 이 고난에서 벗어났다. 그는 곧이어 개최 된 연차 대회에서 성도들에게 이렇게 말씀했다. “최근 몇 년간 저는 죽음의 그늘이 드리워진 골짜기를 걸었습니다. 그러므로 저 세상 근처에 가 있던 저는 하나님 아버지의 특별한 축복이 없었더라면 이 자리에 남아 있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 아버지께서 축복해 주신 간증이 희미해진 적은 한 순간도 없었습니다. 제가 저 세상에 가까워질수록 복음이 참되다는 확신은 더욱 커졌습니다. 살아남게 된 지금, 복음이 참됨을 안다고 간증드릴 수 있어서 너무 기쁘며 그 사실을 밝혀주신 하나님 아버지께 제 온 영혼을 다해 감사드립니다.”29

스미스 장로는 이후에도 몇 년에 걸쳐 여러 가지 신체 질환과 역경으로 고통을 받았다. 아마도 가장 힘든 시절은 1932년부터 1937년 사이에 아내 루시가 관절염과 신경통으로 고통스러워하던 때였을 것이다. 루시는 극심한 통증을 느꼈으며, 1937년이 되자 곁에서 항상 돌봐 줄 사람이 필요한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그러다 1937년 4월에는 심장마비로 거의 목숨을 잃을 뻔했으며 그 일로 몸은 더욱 쇠약해졌다.

루시에 대한 걱정은 끊이지 않았지만 스미스 장로는 자신이 맡은 소임에 계속 최선을 다했다. 1937년 11월 5일, 한 친구의 장례식에서 말씀한 후 자리에 앉았을 때 누군가 당장 집으로 돌아가라는 쪽지를 전했다. 훗날 그는 일지에 이렇게 썼다. “장례식장을 떠나 한걸음에 달려갔으나 집에 도착했을 때는 사랑하는 아내가 이미 숨을 거둔 후였다. 장례식에서 말씀하는 동안 아내는 마지막 순간을 보내고 있었다. 나는 헌신적인 배우자를 잃었으며, 이제 아내가 없어 외로울 것이다.”

루시와 조지 앨버트 스미스는 루시가 68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45년 남짓한 결혼 생활을 했다. 스미스 장로는 아내를 무척 그리워했지만 이별은 잠시뿐임을 알았기에 힘을 낼 수 있었다. 그는 이렇게 적었다. “가족이 너무나 괴로워할 때에도 우리가 충실하다면 루시와 재회할 수 있다는 확신으로 위안을 얻었다. 루시는 헌신적인 조력자요, 사려 깊은 아내이자 어머니였다. 어찌됐건 루시는 6년 동안 병석에 있었으며, 나는 루시가 저 세상에서 먼저 가신 어머니와 정들었던 다른 사람들과 함께 행복하리라 믿는다. …… 주님께서는 참으로 친절하시며, 죽음에 따른 모든 슬픔을 거두어 가셨다. 나는 이 점에 대해 크게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30

유럽 선교부 회장

1919년, 교회 회장으로 지지받은 지 얼마 안 된 히버 제이 그랜트 회장은 스미스 장로에게 유럽 선교부를 감리하라는 부름을 주었다. 선교 지역으로 떠나기 직전에 열린 연차 대회에서 스미스 장로는 이렇게 말씀했다.

“형제 자매 여러분, 얼마 전까지만 해도 허약한 상태에 있던 저를 주님께서 일으켜 주셨습니다. 총관리 역원들이 볼 때 제가 외국 땅에서 선교 사업을 할 수 있겠다고 여길 만큼 건강을 회복시켜 주신 것을 영예롭게 생각합니다. 아니, 영예를 뛰어넘는 커다란 축복으로 여깁니다. ……

…… 다음 수요일이면 저는 기차를 타고 동부 해안가로 가서 대양을 건너 부름 받은 지역으로 갈 것입니다. 이렇게 떠날 수 있는 기회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이 진리에 대한 지식이 제 영혼에 자리 잡게 된 것에 감사드립니다.”31

당시 유럽은 몇 달 전에 종결된 제1차 세계 대전에서 아직 복구 중인 상태였다. 전쟁으로 유럽 내 선교사 수는 얼마 되지 않았고, 스미스 장로가 맡은 소임 중 하나는 선교사 수를 늘리는 일이었다. 그러나 종전 후 경직된 유럽 경제 상황 때문에 정부는 선교사 파견에 필요한 비자 발급을 꺼렸다. 사태를 더 어렵게 만든 것은 후기 성도에 대한 많은 오해와 편견이 여전히 존재한다는 현실이었다. 교회에 대한 인식을 개선하기 위해 스미스 장로는 수많은 정부 관리와 저명인사들을 만났다. 유럽과 전 세계에 선교사를 파견하는 목적을 설명하면서 그는 종종 이렇게 말했다. “여러분에게 있는 모든 훌륭한 것을 간직하고, 하나님께서 여러분 삶을 풍요롭게 하기 위해 주신 모든 것을 지키십시오. 그런 다음, 우리가 여러분에게 행복을 더해 주고 만족을 늘려 줄 무언가를 나누도록 허락해 주십시오.”32 스미스 회장 밑에서 봉사한 한 선교사는 이렇게 전했다. “회장님은 능수능란하고 친절한 방법으로 사람들에게서 존경과 우의를 구하여 선교사에 대해 과거에는 허용되지 않았던 양해를 얻어내셨습니다.”33

임기 마지막 해인 1921년까지 스미스 장로는 유럽에서 봉사하는 선교사 수를 늘리고 후기 성도에 대한 편견을 어느 정도 돌려놓는 데 성공했다. 또한 교회를 위해 친구들을 사귀었으며, 그 후로도 수년 동안 편지를 주고받으며 관계를 유지했다.

교회 사적 보존

스미스 장로는 사람들에게 교회와 교회 역사상 위대한 사건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즐겼다. 스미스 장로는 성역을 수행하는 내내 교회의 역사 유적지에 기념비나 표지판을 세워 역사를 보존하는 일에 기여했다. 스미스 장로의 동료 한 사람은 이렇게 기록했다. “그는 젊은 세대가 조상이 이룬 업적에 주의를 기울이도록 도와줌으로써 자신이 의미 있는 봉사를 한다고 믿었습니다.”34

젊은 사도로서 스미스 장로는 뉴욕 주 팔마이라에 가서 조셉 스미스 일세의 농장을 교회 명의로 구입하기 위한 협상에 나섰다. 뉴욕에 머무는 동안 그는 조셉 스미스가 금판을 받았던 쿠모라 산 소유자인 플리니 섹스톤 이라는 사람도 방문했다. 섹스톤 씨는 교회에 그 땅을 팔 의향이 없었음에도 스미스 장로와 친구가 되었다. 교회가 결국 그 부동산을 취득하여 기념비를 헌납할 수 있었던 데에는 섹스톤 씨와 좋은 교분을 유지한 스미스 장로의 공이 컸다.

교회가 조직된 지 100주년이 된 1930년, 스미스 장로는 유타 개척자 유적 협회 설립을 도왔으며 초대 회장으로 선출되었다. 그로부터 20년 동안 이 협회는 100개가 넘는 기념비와 표지판을 세웠는데 그중 상당수는 솔트레이크밸리로 들어온 개척자들이 걸은 길을 기리는 것이었다. 스미스 장로는 기념비 헌납식 대부분을 주관했다.35

교회가 역사 유적에 관심을 갖는 이유를 설명하며 스미스 장로는 이렇게 기록했다. “기념비는 전통적으로 어떤 사람을 기리기 위해 세워집니다. 또한 기념비를 세움으로써 위대한 사건들이 사람들 마음속에 영구히 자리 잡습니다. …… 세상에는 잊혀지는 유적지들이 많습니다. 사람들은 그 유적지들을 의미 있는 방법으로 표시하여 후손이 중요한 사건에 대해 관심을 갖게 해야 한다고 느꼈습니다.”36

개척자들과 함께 걸어서 유타로 들어간 할아버지를 둔 스미스 장로는 신앙을 위해 많은 것을 희생한 초창기 교회 회원들에 대해 깊은 존경심을 느꼈다. 상호부조회 회원들에게 말씀하는 한 모임에서 스미스 장로는 손수레 개척자들의 발자취를 따라가며 겪은 일을 들려주었다.

“우리는 마틴 손수레 부대에 속해 있던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은 곳에 도착했습니다. 그들이 야영한 곳에 최대한 가까운 장소를 찾았습니다. 그 부대 후손들이 표지판을 세우는 일을 돕기 위해 함께했습니다. 그런 후 우리는 일 년 전에 임시 표지판을 세워 두었던 록 크릭에 도착했습니다. 유독 그때는 야생 붓꽃 같은 예쁜 야생화들이 지천에 피어 있었고 참가자들은 이 꽃들을 모아 지난해에 쌓아 두었던 돌무더기 위에 정중히 올려놓았습니다. …… 이곳에는 배고픔과 추위로 목숨을 잃은 교회 회원 15명이 한 무덤에 매장되어 있었습니다.

때때로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께 가까이 있다고 느끼는 때와 장소에 있게 됩니다. 델 듯 뜨거운 여름과 혹독하게 추운 겨울을 뚫고 평원을 건넌 개척자들의 후손인 우리는 윌리 손수레 부대가 재난을 당한 록 크릭의 작은 계곡에서 장작불 주위에 둘러앉아 선조들이 경험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 참으로 기쁜 순간이었습니다. 우리를 위해 역사가 되풀이되는 시간이었습니다.

…… 우리가 복음으로 축복을 누리도록 모든 것을 바치신 분들과 마주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주님께서 임재 하시는 듯했습니다.

삼사십 명 되는 우리 중 눈시울을 붉히지 않은 사람은 없었을 것입니다. 눈물을 닦고 길을 가는 동안 그 조촐한 모임에서 영향을 받은 우리는 가슴에 영을 느꼈으며, 그중 한 훌륭한 자매님은 제 팔을 잡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스미스 형제님, 저는 앞으로 더 나은 여성이 되렵니다.’ 이 자매님은 가장 훌륭한 여성 중 한 분이시지만, 저는 우리 대부분과 마찬가지로 그분께서는 우리 영혼이 도달해야 할 이상에 못 미치는 부분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감화를 받으셨다고 믿습니다. 이곳에 묻히신 분들은 이 사업이 신성하다는 믿음을 증거하려고 살아갈 시간뿐 아니라 생명 자체를 바치셨습니다. ……

이 조직[상호부조회]에 속한 회원 여러분이 주님을 믿는 신앙으로 어려움에 맞선 그분들, 이 평원에 묻혀 누워 계시는 이분들처럼 충실하다면 더 많은 업적을 이룰 것입니다. 사랑이 많으신 아버지의 은혜가 여러분과 여러분 자손에게 깃들 것입니다.”37

교회 회장, 1945~1951년

1945년 5월 15일 새벽, 미 동부에서 기차 여행 중이던 스미스 장로는 철도 승무원이 전한 소식을 듣고 잠에서 깼다. 그것은 당시 교회 회장이던 히버 제이 그랜트 회장이 별세했다는 내용이었다. 스미스 장로는 속히 기차를 갈아타고 솔트레이크시티로 돌아갔다. 며칠 후 조지 앨버트 스미스는 십이사도 정원회 선임 사도로서 예수 그리스도 후기 성도 교회 제8대 회장으로 성별되었다.

교회 회장이 된 뒤 열린 첫 번째 연차 대회에서 스미스 회장은 방금 자신을 지지해 준 성도들에게 이렇게 말씀했다. “이곳에 있는 사람들 중에 여러분 앞에 선 저만큼 자신을 연약하고 미천하다고 느끼는 사람이 있을지 궁금합니다.”38 그는 가족들에게도 비슷한 말로 소감을 말했다. “나는 이 자리를 바라지 않았단다. 내가 이 자리에 걸맞은 사람이라고 생각한 적도 없단다. 하지만 이 자리가 내게 주어졌으니 최선을 다해 수행할 거란다. 너희 모두가 알았으면 하는 것은 [가정 복음] 교육에서부터 스테이크를 감리하는 일까지 너희가 교회에서 무슨 일을 행하든 최선을 다한다면 너희 부름은 내 부름만큼 똑같이 중요하다는 사실이다.”39

많은 사람들은 스미스 회장이 이 부름에 꼭 맞는 재능을 지녔다고 느꼈다. 한 총관리 역원은 스미스 회장이 지지받고 얼마 후 이러한 확신을 다음과 같이 전했다. “사람들은 종종 주님께서 특정한 소명을 수행할 특정한 사람을 세우신다고 말합니다. 제가 조지 앨버트 스미스 회장님 앞에 어떤 특정한 소명이 기다리고 있는지 말씀드릴 입장은 아니지만 이 점만은 확실히 압니다. 세계 역사상 이 특별한 시기만큼 형제들 사이에 사랑이 절실했던 적은 없습니다. 저는 또한 제가 아는 모든 사람 가운데 조지 앨버트 스미스 회장님만큼 인류 가족을 전체적으로나 개별적으로 심오하게 사랑하는 사람은 없다는 점을 압니다.”40

제2차 세계 대전 여파로 궁핍해진 사람들을 돕다

제2차 세계 대전은 조지 앨버트 스미스가 교회 회장이 된 지 몇 달 안 되어 끝이 났다. 전쟁으로 유럽에 있는 수많은 사람들은 집을 잃고 궁핍해졌으며, 스미스 회장은 도움을 주기 위해 교회 복지 자원을 신속하게 가동했다. 고든 비 힝클리 회장은 이러한 노력에 대해 훗날 이렇게 회상했다. “저는 이곳 솔트레이크시티 복지 광장에서 여러 날 동안 기차에 물자를 싣는 일을 도운 사람 중 한 명이었습니다. 이 식량은 항구로 운송되었고 그곳에서 바다 건너로 수송되었습니다. [1955년] 스위스 성전 헌납식이 열리는 동안 독일에 있는 많은 성도들이 그 성전에 왔는데 저는 그 중 몇몇 분들이 눈물을 흘리며 삶을 연명하게 해 준 그 식량을 보내준 일에 대해 감사를 표하는 소리를 들었습니다.”41

또한 스미스 회장은 전쟁이 남긴 황폐함으로 세상 사람들이 영적으로 크게 굶주려 있음을 알았다. 이에 응하고자 그는 전쟁으로 선교 사업이 중단된 나라에서 선교부를 재조직하기 위한 조치를 취했으며, 평화의 복음대로 생활하도록 성도들을 북돋았다. 스미스 회장은 전쟁이 끝난 직후에 이렇게 말씀했다. “이 시기에 감사를 표할 수 있는 제일 좋은 방법은 슬픔에 찬 세상에 행복을 가져오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다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 아버지의 자녀이며, 이 세상에 사는 사람으로서 이곳을 더 행복한 곳으로 만들 책임이 있기 때문입니다.

친절과 배려가 담긴 손길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손을 내밀며 실의에 빠진 사람들을 잊지 맙시다. 평화를 기뻐할 때에는 그 평화를 얻기 위한 대가로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사람들을 잊지 맙시다. ……

저는 사람들이 하나님께 돌이키고 그분께서 제시하시는 방법에 순종하여 분쟁과 파괴로부터 세상을 구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 아버지만이 주실 수 있는 평화가 슬픔에 잠긴 모든 사람의 마음과 가정에 깃들기를 간구합니다.”42

복음을 나눌 기회가 늘어나다

스미스 회장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사람들과 복음을 나누는 일을 계속했는데, 교회 회장이 되자 복음을 나눌 기회는 더 많아졌다. 1946년 5월, 스미스 회장은 교회 회장 중에서는 처음으로 멕시코 성도들을 방문했다. 회원들을 만나고 큰 대회에서 말씀하는 일 외에도 스미스 회장은 멕시코 고위관리들을 방문하고 회복된 복음에 관해 이야기했다. 마뉴엘 카마초 멕시코 대통령을 방문하는 동안 스미스 회장 일행은 이렇게 설명했다. “우리는 대통령 각하와 국민을 위해 특별한 메시지를 가지고 왔습니다. 우리는 여러분의 조상과 예수 그리스도의 회복된 복음을 알려 드리려고 이곳에 왔습니다. …… 우리에게는 그리스도께서 태어나시기 600년 전에 가족을 비롯한 여러 사람을 데리고 예루살렘을 떠나 ‘약속의 땅, 다른 땅보다 뛰어난 땅’으로 알려진 이 위대한 미대륙에 온 훌륭한 선지자에 관한 책이 있습니다. 이 몰몬경은 또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대륙을 방문하시어 그분의 교회를 세우시고 열두 제자를 택하신 이야기가 담겨 있습니다.”

멕시코에 사는 후기 성도에 대해 경의와 찬사를 표한 카마초 대통령은 몰몬경에 대해 큰 호기심을 느끼고 이렇게 물었다. “몰몬경을 한 권 얻을 수 있겠습니까? 그 책에 대해 한 번도 들어 본 적이 없습니다.” 그러자 스미스 회장은 특별히 관심 있을 만한 구절 목록을 맨 앞에 첨부한 뒤 스페인어로 된 가죽 양장본 몰몬경을 건넸다. 카마초 대통령은 이렇게 말했다. “저는 이 책 전체를 읽어 볼 것입니다. 이 책은 저와 우리 국민에게 매우 유익할 것이기 때문입니다.”43

개척자 도착 백 주년을 기념하다

조지 앨버트 스미스가 교회 회장으로 봉사한 6년 동안 있었던 주요 사건 중 하나는 1947년, 교회가 개척자들의 솔트레이크밸리 도착 100주년을 기념한 것이다. 스미스 회장은 국민 전체가 주목한 기념행사를 감리했다. 이 행사는 개척자들이 최초로 도착한 계곡 근처에 세워진 기념비인 솔트레이크시티에 있는 이곳이 바로 그곳이다[This Is the Place] 기념비를 헌납 하면서 막을 내렸다. 1930년 이래로 스미스 회장은 개척자들이 남긴 업적과 신앙을 기리는 기념사업 계획에 관여했다. 그러나 그는 기념비가 초기 탐험가와 타 종파 선교사와 그 시대에 살았던 주요 아메리카 인디언 지도자들까지 기릴 수 있도록 신중을 기했다.

이곳이 바로 그곳이다[This Is the Place] 기념비 헌납식에 참석한 당시 동부 주 선교부 회장 조지 큐 모리스는 친선의 영이 임재하고 있음을 느꼈으며, 그 공을 스미스 회장에게 돌렸다. “스미스 회장님이 형제애와 관용을 위해 기울이신 노고가 헌납식에 반영되었습니다. …… 기념비에는 인종이나 종교를 떠나 몰몬 개척자들에 앞서 서부 산간 지역에서 역사를 이룩한 사람들의 조각상이 가능한한 한 사람씩 개별적으로 새겨졌습니다. 헌납식 프로그램을 기획할 때 스미스 회장님은 주, 카운티, 시 관리들과 더불어 모든 주요 종교 단체를 참여시키고자 하셨습니다. 주요 연사 중에는 예수 그리스도 후기 성도 교회 대표자들과 함께 가톨릭 신부, 개신교 목사, 유대교 랍비도 포함되었습니다. 행사가 끝난 후, 동부에서 온 한 방문객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는 오늘 영적으로 다시 침례를 받았습니다. 저는 세계 어느 곳에서도 일어날 수 없는 일을 목격했습니다. 오늘 보여진 관용 정신은 참으로 감명 깊었습니다.’”44

높이가 18미터에 이르는 기념비도 인상 깊었지만 스미스 회장은 개척자들이 보여준 신앙과 헌신의 본보기를 따르는 것이 그들을 기리는 가장 훌륭한 방법이라고 가르쳤다. 기념비 헌납 기도에서 그는 이렇게 기도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시여 …… 저희는 오늘 아침 이 고요한 산비탈에서 아버지께 나아와 아버지의 아들딸과 그들이 바친 헌신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이 위대한 기념비를 바라봅니다. …… 아버지와 아버지의 사랑하는 아들을 믿었으며, 하나님 아버지를 예배하며 살기를 바랐기에 이 계곡에 왔던 그 충실한 자들이 지녔던 똑같은 영을 저희에게도 부어 주시기를 기도드립니다. 저희 가슴속에 예배와 감사의 영이 늘 함께하기를 기도드립니다.”45

80세 때 인생을 회고하다

고령에도 불구하고 스미스 회장은 교회 회장으로 봉사하는 대부분 동안 과거에 자신을 구속했던 육체적 병고 없이 회장직을 수행해냈다. 1950년 4 월, 80번째 생일 즈음에 발간된 기사에서 스미스 회장은 삶을 돌아보고, 어떻게 주님께서 자신을 지지하고 축복해 주셨는지를 언급했다.

“80년 동안 저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해 세상을 다니며 사백만 리 이상을 여행했습니다. 저는 여러 지역과 여러 땅과 여러 나라를 가 보았으며, 교회 회원과 비회원을 막론하고, 사람들은 어린 시절부터 저에게 친절과 도움을 베풀어 주었습니다. 어디를 가든지 고귀한 사람들을 만나볼 수 있었습니다. ……

…… 이 위대한 교회에서 지도자로 부름 받기에는 제가 얼마나 연약한 사람인가를 생각하면서 제게 얼마나 많은 도움이 필요한지를 깨닫습니다. 감사하게도 저는 하나님 아버지께 도움을 받았고, 평생 세상 어느 곳에 가도 만날 수 있었던 국내외 수많은 훌륭한 분들에게서 격려와 동료애를 느꼈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그는 계속해서 자신이 오랫동안 봉사해 온 사람들에게 사랑을 표했다.

“그런 분들과 교분을 나눈 것은 참으로 축복이며, 이 기회를 통해 여러분 모두가 제게 베풀어 주신 친절에 대해 온 영혼을 다해 감사드립니다. 저는 또한 이 기회를 통해 여러분 모두에게 이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제가 여러분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모르실 것입니다. 말로는 표현할 길이 없습니 다. 저는 하나님 아버지의 모든 아들딸들에게 그런 감정을 느끼고 싶습니 다.

저는 사람의 평균 수명 이상으로 오래,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세상 순리에 따라 저세상에서 저를 부를 날도 멀지 않았습니다. 저는 기쁜 마음으로 그날을 고대합니다. 팔십 평생 세상 여러 곳을 다니며 수많은 훌륭하고 선한 사람들과 사귀다 보니 저는 하나님께서 살아 계시고, 예수는 그리스도이시며, 조셉 스미스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선지자였다는 사실을 과거 어느 때보다 더 잘 알게 되었다는 간증을 드립니다. 또한 조셉 스미스가 하나님 아버지께 인도를 받아 조직한 교회인 예수 그리스도 후기 성도 교회가 …… 베드로, 야고보, 요한이 조셉 스미스와 올리버 카우드리에게 부여한 신권과 똑같은 권능과 권세로 운영되고 있음을 간증드립니다. 저는 제가 살아 있음을 알듯이 이 사실을 알며, 이 간증을 여러분께 나누는 일이 매우 중요하다고 느낍니다. 또한 저는 이 일과 더불어 하나님 아버지의 이름으로 가르친 다른 모든 것에 대해서도 그분 앞에서 책임을 질 것입니다. …… 모든 사람을 향한 제 마음속 사랑과 친절을 담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간증드립니다.”46

일년 후, 81번째 생일인 1951년 4월 4일에 조지 앨버트 스미스는 자택에서 아들과 딸들이 곁을 지키는 가운데 조용히 세상을 떠났다.

사랑에서 우러나온 단순한 봉사

조지 앨버트 스미스는 81년 생애 동안 교회와 지역 사회와 세계 전역에서 많은 업적을 이루었다. 하지만 그와 개인적으로 친분이 있던 사람들은 스미스 회장에 대한 기억으로 친절과 사랑에서 우러나온 단순하고 겸손한 행동들을 손꼽았다. 스미스 회장 장례식을 주관한 데이비드 오 맥케이 회장은 그에 대해 이렇게 말씀했다. “그분은 진실로 고귀한 영혼이었습니다. 그분은 다른 사람을 기쁘게 할 때 가장 행복해하셨습니다.”47

십이사도 정원회 일원이었던 존 에이 윗소 장로는 중대하고 까다로운 문제를 해결하려 애쓰며 경험한 일을 회상했다.

“저는 하루 일과를 마치고 피곤한 상태로 사무실에 앉아 있었습니다. …… 몹시 지쳐 있었습니다. 그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나더니 조지 앨버트 스미스 회장님이 들어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일을 마치고 집에 가는 길에 자네와 자네가 해결해야 할 문제들이 생각났다네. 위안과 축복이 될까 해서 왔지.’

조지 앨버트 스미스 회장님은 늘 그런 식이셨습니다. …… 저는 결코 그 일을 잊지 못할 겁니다. 잠시 이야기를 나누다가 우리는 헤어졌고, 그분은 집으로 가셨습니다. 제 마음은 고양되었으며 더는 피곤하지 않았습니다.

아시다시피 사랑이란 …… 단지 말이나 마음속 느낌이 아닙니다. 사랑이 빛을 발하려면 반드시 행동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그때 스미스 회장님은 그렇게 하셨습니다. 자신의 시간과 힘을 저에게 주셨습니다.”48

십이사도 정원회 일원이자 스미스 회장과 가까운 친구였던 매튜 카울리 장로는 장례식에서 이런 헌사를 남겼다.

“고통 속에 있거나 질병이나 다른 역경에 처해 있는 사람 중에 누구든 이 하나님의 아들 앞에 오면 덕과 힘을 얻었습니다. 이 사람 앞에 서면 육체적으로는 아닐지라도 영적으로 치유되었습니다. ……

……하나님께서는 경건한 이들을 불러 모으십니다. 저는 이 하나님의 사람이 다녔던 모든 여정 중에서 가장 짧은 여행은 그가 방금 시작한 이 여행임을 믿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입니다. 조지 앨버트 스미스는 사랑입니다. 그는 경건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를 그분께로 데려가셨습니다.

……그가 살아온 삶을 말로써만 기릴 수는 없습니다. 말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의 덕과 부드러운 성품, 그의 위대한 성품인 사랑을 기리는 유일한 길은 우리 행위에 달려 있습니다. ……

서로를 더 용서하고 부드럽게 대하며 배려하고 서로의 감정에 관대해집시다.”49

조지 앨버트 스미스의 묘비에는 다음과 같은 비문이 새겨져 있다. 이 비문은 사랑에 찬 봉사로 일군 그의 삶을 적절하게 함축한다.

“조지 앨버트 스미스는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이해하고 전파했으며 그 가르침을 실천하는 일에서 비범했다. 친절하고 인내심 많고 지혜로우며 관대하고 너그러운 사람이었다. 끊임없이 선을 행했고 유타와 미국을 사랑했으나 편협하지 않았다. 사랑이 필요하고 사랑에 힘이 있음을 의심 없이 믿었다. 교회와 가족에 대한 끝없는 애정으로 그들을 열렬히 섬겼다. 이뿐 아니라 인종, 종교, 지위를 막론하고 모든 사람을 사랑했다. 그는 사람들에게, 그리고 사람들에 대해 자주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모두 아버지의 자녀입니다.’”

  1. D. Arthur Haycock, “A Day with the President,” Improvement Era, Apr. 1950, 288.

  2. “Pres. Smith’s Leadership Address,” Deseret News, Feb. 16, 1946, Church section, 6 참조.

  3. “Mothers of Our Leaders,” Relief Society Magazine, June 1919, 313–14.

  4. “To the Relief Society,” Relief Society Magazine, Dec. 1932, 707–8.

  5. “After Eighty Years,” Improvement Era, Apr. 1950, 263.

  6. “Pres. Smith’s Leadership Address,” 1.

  7. Merlo J. Pusey, Builders of the Kingdom (1981), 209.

  8. Lucy Woodruff’s journal, Feb. 5, 1888, George Albert Smith Family Papers, University of Utah, box 138, book 1.

  9. Emily Stewart Smith, “Some Notes about President George Albert Smith,” May 1948, George Albert Smith Family Papers, University of Utah, box 5, page 3.

  10. Emily Stewart Smith, “Some Notes about President George Albert Smith,” 5 참조.

  11. J. Golden Kimball, letter dated Mar. 18, 1893, George Albert Smith Family Papers, University of Utah, box 72, folder 12.

  12. J. Golden Kimball, letter dated June 30, 1893, George Albert Smith Family Papers, University of Utah, box 72, folder 15.

  13. “How My Life Was Preserved,” George Albert Smith Family Papers, University of Utah, box 121, scrapbook 1, pages 43–44.

  14. “How My Life Was Preserved,” 43.

  15. Edith Smith Elliott, “No Wonder We Love Him,” Relief Society Magazine, June 1953, 366, 368.

  16. Builders of the Kingdom, 240 참조.

  17. Builders of the Kingdom, 224–25 참조.

  18. Emily Smith Stewart, in “Pres. Smith Mementos At Y.” Deseret News, Oct. 14, 1967, Church section, 6–7.

  19. George Albert Smith Family Papers, University of Utah, box 100, folder 23, page 11.

  20. John F. Fitzpatrick, in Conference Report, Apr. 1951, 172.

  21. George Albert Smith’s journal, Oct. 27, 1906, George Albert Smith Family Papers, University of Utah, box 73, book 3, page 70.

  22. George Albert Smith’s journal, Oct. 30, 1906, George Albert Smith Family Papers, University of Utah, box 73, book 3, page 72 참조.

  23. Francis M. Gibbons, George Albert Smith: Kind and Caring Christian, Prophet of God (1990), 208–9 참조.

  24. Glenn R. Stubbs, “A Biography of George Albert Smith, 1870 to 1951” (PhD diss., Brigham Young University, 1974), 295.

  25. Bryant S. Hinckley, “Greatness in Men: Superintendent George Albert Smith,” Improvement Era, Mar. 1932, 270, 271 참조.

  26. “A Biography of George Albert Smith,” 283 참조.

  27. Irene Jones, “The Understanding Heart,” Improvement Era, July 1940, 423.

  28. “Your Good Name,” Improvement Era, Mar. 1947, 139.

  29. Conference Report, Oct. 1921, 42.

  30. George Albert Smith’s journal, Nov. 5, 1937, George Albert Smith Family Papers, University of Utah, box 74, book 11, pages 83–84.

  31. Conference Report, June 1919, 42, 44.

  32. Conference Report, Oct. 1950, 8.

  33. James Gunn McKay, in “A Biography of George Albert Smith,” 141.

  34. George Q. Morris, “Perpetuating Our Ideals through Markers and Monuments,” Improvement Era, Apr. 1950, 284.

  35. “Markers and Monuments,” 284 참조.

  36. Letter to Leslie O. Loveridge, Mar. 15, 1937, George Albert Smith Family Papers, University of Utah, box 67, folder 25.

  37. “To the Relief Society,” Relief Society Magazine, Dec. 1932, 705–6.

  38. Conference Report, Oct. 1945, 18.

  39. Builders of the Kingdom, 315–16.

  40. Joseph F. Smith, in Conference Report, Oct. 1945, 31–32; 조셉 에프 스미스는 교회 축복사였으며, 제6대 교회 회장이었던 조셉 에프 스미스 회장의 손자다.

  41. 고든 비 힝클리, 성도의 벗, 1992년 4월호, 52쪽.

  42. “Some Thoughts on War, and Sorrow, and Peace,” Improvement Era, Sept. 1945, 501.

  43. Arwell L. Pierce, in Conference Report, Apr. 1951, 112–13 참조.

  44. “Markers and Monuments,” 284–85.

  45. “Dedicatory Prayer,” Improvement Era, Sept. 1947, 571.

  46. “After Eighty Years,” 263–64.

  47. David O. McKay, in Conference Report, Apr. 1951, 3.

  48. John A. Widtsoe, in Conference Report, Apr. 1951, 99.

  49. Matthew Cowley, in Conference Report, Apr. 1951, 168–69.

남부 주 선교부 선교사들. 신혼부부인 루시(왼쪽에서 세 번째)와 조지 앨버트 스미스(루시 옆에 앉은 사람)는 선교 본부에서 함께 봉사했다.

1921년 당시 십이사도 정원회. 왼쪽부터 오른쪽 방향으로 서 있는 사람: 조셉 필딩 스미스, 제임스 이 탈매지, 스티븐 엘 리차즈, 리차드 알 라이먼, 멜빈 제이 밸라드, 존 에이 윗소. 왼쪽부터 오른쪽 방향으로 앉은 사람: 루저 클로슨, 리드 스무트, 조지 앨버트 스미스, 조지 에프 리차즈, 올슨 에프 휘트니, 데이비드 오 맥케이

조지 앨버트 스미스 장로는 점자로 된 몰몬경 출판을 총괄했다.

천사 모로나이가 조셉 스미스에게 금판을 전해 준 쿠모라 산에 있는 기념비

스미스 회장과 그의 보좌인 제이 르우벤 클라크 이세(왼쪽)와 데이비드 오 맥케이(오른쪽)

1947년에 스미스 회장은 개척자들의 솔트레이크밸리 도착을 기념하는 이곳이 바로 그곳이다[This Is the Place] 기념비를 헌납하였다.

자신의 사무실에 앉아 있는 스미스 회장

존 헨리 스미스와 사라 파 스미스의 자녀들, 왼쪽이 조지 앨버트 스미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