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대하고 고결하고 굳세게
청년 성인을 위한 전 세계 영적 모임 • 2022년 9월 11일 • 솔트레이크시티 템플스퀘어
데일 지 렌런드 장로: 감사합니다. 저희는 유타주 솔트레이크시티의 유서 깊은 솔트레이크 태버내클에 모여 있지만, 전 세계에 청중이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경전 곳곳에서 우리에게 기억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물려받은 신앙과 헌신, 인내의 유산을 기억할 때, 우리 시대의 도전과 맞설 관점과 힘을 얻을 수 있습니다.
『성도들: 후기의 예수 그리스도 교회 이야기』는 “주께서 사람의 자녀들에게 얼마나 자비로우셨던가”를1 기억하고자 하는 소망으로 탄생하게 되었습니다. 이 책들은 이미 출판되었습니다. 이 책은 과거에 살았던 충실한 후기 성도들의 이야기를 서술한 역사입니다. 여기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사랑한 사람들의 실제 경험이 기록되어 있으며 그들은 성약을 맺고 성약의 길을 따라 걸으며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되었습니다.
루스 엘 렌런드 자매: 이제 성도들 시리즈의 세 번째 책으로 실제 경험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는 『성도들: 담대하고 고결하고 굳세게』를 읽을 수 있게 되어 기쁩니다. 이 책은 1893년 솔트레이크 성전의 헌납부터 1955년 스위스 베른 성전 헌납까지의 교회 역사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기간 동안 교회와 회원 개개인은 선지자를 통해 계속해서 계시를 받았으며, 회원들은 자신의 삶을 위한 개인적인 계시를 받았습니다. 『성도들』 제3권은 우리의 역사와 그 역사를 살았던 사람들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렌런드 장로: 이 기간 동안 제 조부모님 네 분이 모두 교회에 가입하셨습니다. 제 부모님은 성전에서 결혼하기로 약속했던 터라 각자 핀란드와 스웨덴에서 솔트레이크시티로 이주하셨습니다. 1950년에 유럽에는 성전이 없었습니다. 그분들은 솔트레이크 성전에서 각자 엔다우먼트를 받으셨지만, 영어로 된 지시를 들으면서도 그게 무슨 말인지 한 마디도 이해를 못 하셨습니다. 그분들은 결혼하고 인봉 되었으며 자신들이 영원한 축복을 받았다고 여겼습니다. 성전에서 인봉 받기 위해 무엇이든지 하겠다는 그분들의 선택은 제 삶에도 영원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제 아내 루스처럼 초기 개척자의 후손이든, 아니면 저처럼 후대 개척자의 후손이든, 또는 여러분 스스로가 신앙의 개척자이든 이것이 『성도들』 제3권은 우리의 유산입니다. 여러분은 계속되고 있는 이 교회의 역사에서 중요한 부분을 맡고 계십니다. 선조들이 세운 신앙의 토대 위에 자신의 신앙을 확립하고자 여러분이 기울이시는 모든 노력에 감사드립니다. “여러분이 이[ 『성도들』] 제3권을 통해 과거를 더 폭넓게 이해하고, 신앙을 강화하며, 승영과 영생으로 이어지는 성약을 맺고 지킬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2
렌런드 자매: 『성도들』 제3권에 실린 이야기를 나누게 되어 무척 기쁩니다. 그럼 시작해 볼까요!
렌런드 장로: 현재 계속되는 교회의 회복을 보여주는 사례부터 시작하겠습니다. 러셀 엠 넬슨 회장님은 회복이 “한 번의 사건이 아니라 과정이며 주님이 다시 오실 때까지 계속될 것”이라고 자주 가르치십니다.33 조셉 에프 스미스 회장이 생애의 말기에 보여준 예가 그런 훌륭한 예입니다.
1918년 스미스 회장은 건강이 좋지 않았으며, 아마도 자신이 오래 살지 못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죽음이 그를 둘러싸고 있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먼저 그의 맏아들 하이럼이 병에 걸려 맹장 파열로 사망했습니다. 스미스 회장은 일지에 자신의 슬픔을 이렇게 쏟아 부었습니다. “내 영혼이 갈기갈기 찢겨나가고 있다. … 아! 하나님 저를 도와주소서! …”4 스미스 회장의 슬픔은 하이럼의 미망인인 아이다가 얼마 후 심부전으로 사망하자 더욱 깊어졌습니다.
둘째로, 그는 맹위를 떨치는 세계 대전에 관한 끔찍한 보고서를 읽었습니다. 제1차 세계 대전 동안 2천만 명의 군인과 민간인이 사망했습니다. 셋째로, 치명적인 독감 변종으로 전 세계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전 세계의 사망자 수는 최소한 5천만 명이었습니다. 이러한 죽음은 전 세계의 가족들에게 말할 수 없는 슬픔과 마음의 고통을 안겨주었습니다. 스미스 회장은 인명 손실에 애통해했습니다. 또한 그는 수개월간 병상에 누워있었습니다. 선지자의 마음에 죽음이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여기 스미스 회장님이 소장하셨던 성경이 있습니다. 바로 이 성경을 통해 그는 여느 누구와 다르지 않게 계시를 받았을 지도 모릅니다.
렌런드 자매: 1918년 10월 3일, 조셉은 자신의 방에 앉아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와 세상의 구속에 대해 곰곰이 생각하고 있었다. 조셉은 … 베드로전서를 펴서 영의 세계에 있는 영들에게 전파하시는 구주에 관한 다음 구절을 읽었다. … 영이 [스미스 회장]에게 임하여 이해의 눈이 열렸다.” 그는 영의 세계를 보았으며 그곳에는 “구주의 지상 성역 이전에 사망한 의로운 남성과 여성들이 사망의 띠에서 해방을 선포하러 그분이 오시기를 기쁜 마음으로 기다리고 있었다.
구주께서 … 나타나셨고, 의로운 영들은 … 크게 기뻐하며 … . 그분 앞에 무릎을 꿇고 사망과 지옥의 사슬에서 건져내 주시는 구주이자 구원자로 그분을 인정했다.
… [스미스 회장]은 구주께서 불순종한 영들에게 친히 가시지 않으셨음을 이해하게 되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분은 의로운 영들을 조직하여 … 복음 메시지를 어둠 속에 있는 영들에게 전하도록 위임하셨다. 이런 방법으로, 범법 가운데서 죽은 자들이나 진리를 알지 못하고 죽은 모든 자가 하나님을 믿는 신앙, 회개, 죄 사함을 위한 대리 침례, 성신의 은사, 복음의 다른 모든 필수 원리에 대한 가르침을 받을 수 있었다.”
렌런드 장로: “그런 다음, 선지자는 이 경륜의 시대의 충실한 [이들이] 다음 생에서도 어둠 속과 죄의 속박 아래 있는 영들에게 복음을 전파하며 계속 일할 것임을 깨달았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회개하는 죽은 자는 하나님의 집의 의식에 순종함으로써 구속함을 받으리니, 그들이 자기들의 범법에 대한 형벌을 치르고 깨끗이 씻음을 받은 후에 자기들의 행위에 따라 상을 받으리라. 이는 그들이 구원의 상속자가 됨이니라.’”
렌런드 자매: “… 다음 날 아침 [스미스 회장은] 건강이 좋지 않은데도 10월 연차 대회의 첫 번째 모임에 참석[했다]. 회중에게 연설하기로 결심한 조셉은 연단에 불안정하게 서서 그의 큰 몸이 떨리는 가운데에서도 이렇게 말했다. … 그는 감정에 휩싸이지 않고는 시현에 대해 말할 힘이 없었기에 그저 넌지시 전할 수밖에 없었다. 조셉은 회중에게 이렇게 말했다. ‘저는 지난 5개월 동안 혼자 있지 않았습니다. 기도와 간구와 신앙과 결심의 영이 저와 함께했으며, 저는 주님의 영과 끊임없이 교통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덧붙였다. ‘오늘 아침 이 모임은 저에게 행복한 모임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축복하시기를 기원합니다.’5
스미스 회장은 연차 대회가 끝난 후 그의 아들 조셉 필딩 스미스에게 그 계시를 받아 적게 했습니다. 이것은 그가 서명하여 제일회장단과 십이사도 정원회에 제출한 두 부의 사본 중 하나입니다. 그들은 그 시현을 읽고 그것을 전적으로 지지했으며6, 그것을 교리와 성약 138편으로 공식 인정했습니다. 우리는 이제 하나님께서 필멸의 휘장 저편에 있는 이들을 아끼신다는 것을 이해합니다. 그분은 그들의 구속에 관심을 가지고 계십니다. “죽은” 자는 죽은게 아니었습니다. 우리는 지금도 계속되는 회복을 통해 이러한 사실을 이해하며 다음 세상에 대한 위안과 설명을 얻습니다.
렌런드 장로: 개인적인 계시도 여러 면에서 이와 같은 과정이 필요합니다. 제 경우, 저는 문제에 집중해야 합니다. 그 문제를 공부하고 그것에 관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다양한 해결책을 고안해 내야 합니다. 그래야만 개인적인 계시가 확실하게 올 수 있는 것 같습니다. 종종 계시는 “가라”나 “행하라” 또는 “말하라!”와 같은 짧고 간결한 명령형의 지시로 저에게 임합니다.
렌런드 자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저는 숙고하고, 연구하고, 기도하고 나면, 종종 마음속에 어떤 생각이나 아이디어가 떠오르는데, 저는 그런 것들이 제가 생각해 낸 것이 아님을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저를 알고 계시며 성신을 통해 선을 행하도록 속삭이신다는 사실에 저는 언제나 용기를 얻습니다.
렌런드 장로: 계시는 그 구체적인 필요가 있기에 옵니다. 한 가지 주목할 만한 사례가 1894년 4월 연차 대회에서 일어났습니다. 윌포드 우드럽 회장은 보좌들과 십이사도 정원회에게 자신이 성전 의식과 관련된 계시를 받았다고 발표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주님께서는 자녀가 부모에게 인봉 되고, 그 부모는 그들의 부모에게 인봉 되며, 우리가 기록을 얻을 수 있는 한 최대한 조상 대대로 그렇게 인봉 되는 것이 옳다고 말씀하셨습니다.”7 이 계시는 엘리야가 커틀랜드 성전에서 인봉 권세를 회복한 지 50여 년이 지난 후에야 왔습니다.
렌런드 자매: 1894년 연차 대회 일요일 모임에서 우드럽 회장은 이렇게 선언했습니다. “‘우리는 계시를 다 받은 것이 아닙니다. … 하나님의 일도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는 조셉 스미스가 하던 성전 건축과 성전 의식의 체계를 잡는 일을 브리검 영이 어떻게 계속 수행했는지에 대해 언급했다. 우드럽 회장은 “하지만 그는 이 일의 세부 요소에 대한 모든 계시를 받은 것은 아닙니다.”라고 회중에게 상기시켰다. 테일러 회장도, 윌포드 우드럽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일이 완성될 때까지 끝은 없을 것입니다.’”8
회원들은 나부 시절 이후로 사망한 가족을 위해 죽은 자를 위한 침례를 베풀어 왔습니다. 하지만 조상에게 인봉되는 중요성에 대해선 계시를 받지 않았습니다. 우드럽 회장은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우리는 후기 성도들이 지금부터 자신의 계보를 최대한 찾아내어 조상들에게 인봉 되기를 바랍니다. … 자녀들을 그들의 부모에게 인봉하여, 가능한 한 많은 조상 세대까지 이 연결 고리를 이어 가십시오.”9
우드럽 회장은 “조셉 스미스가 커틀랜드 성전에서 형 앨빈에 대한 시현을 보았다는 사실을 성도들에게 상기시켰다. “이 복음을 알지 못하고 죽은 자로서 만일 머물기를 허락 받았더라면 그것을 받아들였을 자들은 모두 다 하나님의 해의 왕국의 상속자가 되리라.
우드럽 회장은 ‘그것은 여러분의 조상들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라며 영의 세계에 있는 사람들에 대해 말했다.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을 사람은 극소수일 것입니다.’
설교 막바지에 그는 성도들에게 … 돌아가신 친족들을 찾아내도록 권하며 이렇게 말했다.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의 기록을 계속 찾고, 주님 앞에서 올바르게 기록을 작성하며, 이 원리를 실천합시다. 그러면 하나님의 축복이 우리에게 임할 것이며, 구속받은 자들은 장래에 우리에게 감사할 것입니다.’”10 이 계시는 회원들이 성전에 자주 방문해 죽은 조상을 위해 대리 의식을 행할 명분을 제공했습니다. 가족들은 여기 있는 이 책과 같은 책에 이런 의식과 의식을 완료하기 위해 그들이 한 일을 주의 깊게 기록했으며, 이 책은 옌스 피터와 마리 데임 가족의 일원들을 위해 행한 일을 보여 줍니다.
렌런드 장로: 오늘날 우리에게는 여러 세대를 잇는 인봉의 교리가 너무나 당연하고 자연스러워 보이지만, 가족 인봉을 올바로 조직하기 위해서는 주님의 계시가 필요했습니다. 핀란드 서해안에서 멀리 떨어진 라르스모 섬에 살던 저희 가족은 이 계시의 영향을 직접적으로 받았습니다. 이 이야기는 『성도들』 제3권에 실리지는 않았지만, 우리 가족에게는 소중한 이야기입니다. 1912년에 제 친조부모이신 레나 소피아와 마츠 레안데르 렌런드는 스웨덴에서 온 선교사들이 회복된 복음을 전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레나 소피아와 레안데르는 그다음 날 침례를 받았습니다. 그들은 새로운 신앙 안에서 그리고 핀란드에 최초로 세워진 작은 지부의 일원이 된 것에서 기쁨을 찾았습니다. 그러나 불행히도 재난이 닥치면서 그들은 삶의 운명이 바뀌었습니다.
1917년 레안데르 할아버지는 열 번째 아이를 임신한 레나 소피아 할머니를 홀로 남겨두고 결핵으로 돌아가셨습니다. 그 아이가 제 아버지였는데, 아기는 레안데르가 사망한 지 두 달 후에 태어났습니다. 더 많은 가족이 결핵으로 사망했습니다. 결국 레나는 10명의 자녀 중 7명을 묻었습니다. 남은 가족을 온전히 지켜내는 일은 가난한 시골 여성이었던 제 할머니에게 매우 힘든 일이었습니다.
그분은 거의 20년 동안 밤에 휴식다운 휴식을 취해 보지 못하셨습니다. 낮에는 허드렛일을 열심히 해서 겨우 먹을 음식을 장만하셨고, 밤에는 병으로 죽어가는 가족들을 돌보셨습니다. 할머니의 심정이 어땠을지 상상하기가 힘듭니다.
저는 1963년 12월에 레나 소피아 할머니를 한 번 뵈었습니다. 저는 11살이었고, 할머니는 87살이셨습니다. 할머니는 평생의 노동으로 허리가 굽으셨었는데 갖은 풍상을 겪은 얼굴과 손의 피부는 닳아빠진 가죽처럼 질기고 거칠었습니다. 할머니를 뵈었을 때 할머니는 서서 할아버지의 사진을 가리키며 스웨덴어로 “Det här är min gubbe.”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분이 내 남편이란다.”
저는 할머니가 동사의 현재 시제를 잘못 사용하셨다고 생각했습니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지 46년이 지난 터라, 저는 이 명백한 실수를 어머니께 지적했습니다. 어머니는 “그건 아직 네가 잘 몰라서 그렇단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부분이 이해가 가질 않았어요. 레나 소피아 할머니는 오래전에 죽은 남편이 영원토록 자신의 남편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영원한 가족이라는 교리를 통해, 할아버지는 할머니의 삶과 미래에 대한 큰 희망의 일부로 계속 존재하셨습니다.
2006년 핀란드 헬싱키 성전이 헌납되기 전에 누나는 우리 아버지 쪽 가계에 필요한 의식이 무엇인지 확인해 보았습니다. 누나가 알아낸 것은 인봉 권세를 믿는 레나 소피아 할머니의 신앙에 대한 타오르는 확신이었습니다. 할머니는 죽은 자녀들의 가족 기록을 제출했는데, 자녀들이 사망 당시 8세 이상이었기 때문에 1938년에 성전 사업을 행할 수 있었습니다. 이것은 핀란드에서 성전에 제출된 최초의 의식 중 하나였습니다.
레나 할머니는 구원의 교리를 마음에 새기며 그것을 극복했습니다. 할머니는 이러한 재난이 닥치기 전에 가족이 영원하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을 하나님이 베푸신 크신 자비 중 하나로 여겼습니다. 할머니가 예수 그리스도의 회복된 복음으로 마음 깊이 개종했다는 표시는 선지자 조셉 스미스, 윌포드 우드럽, 조셉 에프 스미스를 통해 계시된 가족 역사 사업에서 할머니가 하신 일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할머니는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한 사람들과 같았습니다.”11
렌런드 자매: 그리고 회복은 지금도 계속되는 과정이므로, 우리도 더 많은 것을 기대할 수 있지 않을까요? 불과 1년도 안 되었지만, 넬슨 회장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성전 절차에 대한 현재의 조정 사항과 앞으로 올 변화는 주님께서 당신의 교회를 적극적으로 이끄신다는 사실을 계속해서 입증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 각자가 삶의 중심을 그분과, 성전에서 이루어지는 의식과 성약에 맞춤으로써 영적인 기초를 더욱 효과적으로 강화할 기회를 주고 계십니다.”12 넬슨 회장님은 이러한 조정 사항이 “주님의 지시와 우리 기도의 응답에 따라” 이루어졌다고 설명했는데, 이는 주님께서 우리가 “정확히 무엇을 하겠다고 성약을 맺는지를 [우리 자신이] 명확하게 이해하고 … [우리가] 받은 특권과 약속과 책임을 이해하고 … 영적인 통찰과 깨달음을 얻기를 바라시기 때문입니다.”13
때때로 계시는 필요한 순간에 꼭 맞추어 옵니다. 이 일은 로렌조 스노우가 교회 회장이었을 때 계속되는 회복의 또 다른 사례와 함께 일어났습니다. 1898년에 교회는 어려운 재정 상태에 있었습니다. 일부다처제를 반대하는 운동이 한창일 때, 미국 의회는 교회 재산의 몰수를 승인했습니다. 정부가 자신들의 헌금을 압류할 것을 우려한 많은 성도가 십일조 지불을 중단하게 되자 교회는 주요 자금원이 크게 줄어들었습니다. 교회는 손실분을 메우기 위해 주님의 사업을 계속할 충분한 자금을 제공하기 위해 돈을 빌렸습니다. 교회는 솔트레이크 성전 완공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대출을 받기까지 했습니다. 85세의 선지자는 교회의 재정 상황으로 마음이 무거웠습니다.14
“5월의 어느 이른 아침, 스노우 회장은 자신의 아들 리로이가 방에 들어왔을 때 침대에 앉아 있었다. … 선지자는 아들을 맞아 주며 이렇게 말했다. ‘세인트조지에 가련다.’
리로이는 깜짝 놀랐다. 세인트 조지는 483킬로미터나 떨어져 … 있었다. 그곳에 가려면 기찻길이 놓인 최남단까지 기차를 타야 했고, 그런 다음에는 나머지 길을 마차로 이동해야 했다. 노인에게는 길고 버거운 여행이 될 것이었다. 그들은 길고 힘든 여행을 시작했다. 그들이 먼지투성이의 지친 몸으로 … 도착했을 때, … 스테이크 회장은 그들에게 여정의 목적을 물었다. ‘글쎄요.’ 스노우 회장이 말했다. ‘무슨 일로 세인트조지에 왔는지 저도 모릅니다. 그저 영이 우리에게 가라고 해서 왔을 뿐입니다.’
다음 날인 5월 17일, 선지자는 세인트조지 태버내클에서 성도들과 모임을 했다. 붉은색 사암 건물인 태버내클은 세인트조지 성전에서 북서쪽으로 몇 구역 떨어진 곳에 있었다. 스노우 회장은 일어서서 성도들에게 말씀을 전했다. ‘저희가 이곳에 온 이유를 확실하게 표현할 수는 없지만, 주님께서 우리에게 하실 말씀이 있으실 것 같습니다.’
렌런드 장로: 설교 도중, 스노우 회장은 갑자기 말을 멈추었다. 장내는 쥐 죽은 듯 고요해졌다. 그의 눈은 반짝였고, 그의 얼굴은 환하게 빛이 났다. 이윽고 선지자가 입을 열었을 때, 그의 목소리에서 더 큰 힘이 느껴졌다. 하나님의 영감이 홀을 가득 채우는 듯했다. 그런 후, 선지자는 십일조에 대해 말했다. … 그는 … 많은 … 성도가 완전한 십일조를 내는 것을 꺼리고 있다며 한탄했다. … ‘이것은 시온을 위한 필수적인 준비 사항입니다.’라고 그는 말했다.
다음 날 오후, 스노우 회장은 태버내클에서 다시 말씀을 전했다. ‘이제 미래를 준비하며 올바른 기초 위에 굳게 발을 디디고자 하는 모든 후기 성도들은 주님의 뜻을 행하고 완전한 십일조를 바칠 때가 되었습니다. 이는 여러분에게 주시는 주님의 말씀이며, 시온 땅 모든 정착지에 주시는 주님의 말씀입니다.’
스노우 회장은 나중에 이렇게 가르쳤다. ‘우리는 끔찍한 상황에 처해 있고, 그것 때문에 교회는 속박되어 있습니다.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성도들이 이 율법을 지키는 것입니다.’ 그는 [회원들]에게 율법을 온전히 지키도록 요청하면서, 그들의 노력을 주님께서 축복해 주시리라고 약속했다. 그는 또한 십일조를 내는 것이 이제부터 성전에 참석하기 위한 확고한 요건이 될 것이라고 언명했다.”15
렌런드 자매: 그 이후로 많은 사람이 주님은 이 단순한 율법을 기꺼이 따르는 이들에게 당신의 가장 풍성한 축복을 부어 주신다는 것을 충실하게 간증할 수 있습니다. 알로이스 치에프 형제는 오스트리아 빈 지부의 회장으로 봉사했습니다. 그는 이 소박한 금고에 십일조와 기타 지부 기록을 보관했습니다. 이것은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공습을 받았을 때 치에프 회장과 그의 가족이 개인 소유물보다 먼저 챙긴 물건이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율법을 받아들이는 데 어려움이 있으나 그 결과 놀라운 축복을 받았다고 간증했습니다.
일본의 야나기다 가족의 경험이 그러한 예입니다. 1948년에 제일회장단은 다시 한번 일본에 선교사를 파견했습니다. 야나기다 도시코가 아버지에게 종교에 대해 물었을 때, 그녀의 아버지는 후기 성도의 예배에 참석해 보라고 격려했습니다. 그는 1915년에 교회에 가입했습니다.
야나기다 자매는 선교사들을 만나 개종했으며, 1949년 8월 아버지가 참석한 가운데 침례를 받았습니다. 그녀의 남편은 나중에 선교사들을 찾았고 야나기다 자매를 가르쳤던 선교사에게 침례를 받았습니다.16
렌런드 장로: 야나기다 형제와 자매는 십일조를 내는 데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그들은 “수입이 많지 않았고, 때로는 아들의 학교 점심 급식비를 내기에도 빠듯한 형편일 때가 많았다. 그들은 집도 장만하고 싶었다. 언젠가 교회 모임이 끝난 후, [야나기다 자매]가 한 선교사에게 십일조에 대한 질문을 했다. ‘일본 사람들은 지금 전쟁을 겪은 후라 정말 가난해요. 그런 우리에게 십일조는 너무 버거워요. 우리가 그걸 꼭 내야 할까요?’
그 장로는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에게 십일조를 바치도록 명하셨다고 대답하며 그 원리에 순종할 때 얻는 축복을 이야기했다. [야나기다 자매]는 회의를 느꼈고, 화도 조금 났다. 그녀는 이렇게 혼잣말을 했다. ‘이건 지극히 미국적인 생각이야.’
한 자매 선교사는 [야나기다 자매]가 십일조를 바친다면 집을 마련하는 목표를 달성할 수 있을 것이라고 약속했다. [야나기다 형제와 자매]는 순종하고 싶었다. 그래서 그들은 십일조를 바치고 축복을 신뢰해 보기로 했다. …
[그들은] … 축복을 목격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시내에 있는 적당한 가격의 부지를 매입하고 집을 짓기 위한 설계도를 그렸다. 그런 다음, 그들은 새로운 정부 제도를 활용하여 주택 자금 융자를 신청했으며, 건축 허가가 나자 기초 작업을 시작했다.
과정은 순조로웠다. 그러나 건축 감독관이 그 부지에 소방차가 진입할 수 없다는 점을 발견한 뒤로 상황이 달라졌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이 땅은 집을 지을 수 있는 땅이 아닙니다. 더는 공사를 진행할 수 없어요.’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던 [야나기다 형제와 자매]는 선교사들에게 이 일을 알렸다. 한 장로가 말했다. ‘저희 여섯 명이 여러분을 위해 금식하고 기도하겠습니다. 여러분도 그렇게 해 주세요.’ 다음 이틀 동안, 야나기다 부부는 선교사들과 함께 금식하고 기도했다. 또 다른 감독관이 그 부지를 다시 평가하러 왔다. 처음에 그는 야나기다 부부에게 심사를 통과하리라는 희망을 주지 않았다. 그러나 부지를 살펴보던 중 그는 해결책을 떠올렸다. 가까운 곳에 세워진 울타리를 치우기만 하면 비상시에 소방차가 그 부지로 진입할 수 있었다. 그렇게 야나기다 부부는 마침내 집을 지을 수 있게 되었다.
그 감독관은 이렇게 말했다. ‘두 분은 그동안 좋은 일을 많이 하며 살아오셨나 보군요. 제가 원래 이렇게 협조적인 사람은 아니거든요.’ [야나기다 형제와 자매]는 뛸 듯이 기뻐했다. 그들은 금식하고 기도하고 십일조를 바쳤다. 그리고 그 자매 선교사가 약속한 대로, 그들은 자기 집을 장만할 수 있었다.”17
전 세계의 성도들이 십일조를 바치면서 이와 비슷한 경험을 해왔습니다. 주님은 충실하고 순종적인 당신의 백성을 축복하십니다. 그리고 전 세계에 성전이 세워지는 것도 충실하게 십일조를 바쳤기 때문입니다.
렌런드 자매: 십일조의 법에 따라 생활함으로써 저는 우리의 삶이 감지하기 어려우면서도 의미심장한 방식으로 축복받았다는 것을 압니다. 때때로 축복은 우리가 기대하는 것과 달라서 쉽게 간과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진짜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경험했습니다.18
『성도들』에서 제가 가장 좋아하는 또 다른 이야기는 최초의 자매 선교사들이 어떻게 전임 선교사로 봉사하도록 부름을 받았는지에 관한 것입니다. 1890년대 후반 영국에서는 후기 성도 여성이 독립적으로는 생각조차 제대로 못하는 속이기 쉬운 얼뜨기라는 소문이 돌고 있었습니다. 그때 마침 솔트레이크시티의 후기 성도 엘리자베스 맥큔과 그녀의 딸이 장기간의 방문을 위해 런던에 왔습니다.
그들이 런던에서 열린 교회 대회에 참석했을 때 엘리자베스는 “오전 모임에서, 선교부 회장단의 보좌인 조셉 맥머린은 … 후기 성도 여성에 대해 비호의적인 발언을 … 문제 삼았다. [그리고 그는] ‘유타에서 오신 숙녀 한 분이 지금 이곳에 참석하고 계십니다.’라고 알렸다. ‘우리는 맥큔 자매님에게 오늘 저녁 모임에서 유타에서의 경험을 말씀해 달라고 부탁할 것입니다.’ 그런 후, 그는 대회에 참석한 모든 사람에게 친구들과 함께 그녀의 설교를 들으러 오라고 격려했다.”
“모임 시간이 다가오자, 사람들은 집회장을 꽉 채웠다. 엘리자베스는 마음속으로 기도를 하고 연단에 섰다.” 그녀는 군중에게 자신의 신앙과 가족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복음의 참됨을 담대하게 간증했습니다. 그녀는 또한 “우리 종교는 아내가 남편과 동등하다고 가르칩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모임이 끝나자 낯선 사람들이 엘리자베스와 악수를 나누었습니다. 누군가는 ‘여기에 당신네 여성들이 더 많이 이곳에 온다면 훌륭한 일을 아주 많이 하게 될 텐데요.’라고 말했다.”
“엘리자베스가 청중에게 미치는 영향력을 본 선교부 지도자 조셉 맥머린은 [교회 회장]에게 편지를 썼다. ‘똑똑하고 지적인 많은 여성들이 영국으로 선교사 부름을 받는다면 매우 훌륭한 결과를 얻게 될 것입니다.’” “여성들을 선교사로 부르기로 결정한 데에는 엘리자베스 맥큔의 설교도 일부분 영향을 끼쳤다.”19
1898년 4월 22일, 이네즈 나이트와 제니 브림홀은 영국 리버풀 항구에 들어섰습니다. 그들은 교회의 “여성 선교사”로 성별 받은 최초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맥머린 회장과 다른 선교사들과 함께 리버풀 동쪽 마을로 갔습니다. 저녁에는 많은 무리가 선교사들과 함께하는 거리 모임에 참석했습니다. “맥머린 회장은 다음 날 특별 모임이 있을 거라고 발표하면서, 모두에게 와서 ‘실제 몰몬 여성들’의 설교를 들어 보라고 권했다.’”20 이것은 이네즈 나이트의 선교사 일지입니다. 그녀는 이렇게 썼습니다. “저녁에 두려움 가운데 떨린 마음으로 말했지만 나 자신도 놀랐다.”21 그녀는 나중에 “저녁에 많은 무리에게 말씀을 전했지만 다른 선교사들의 기도로 축복을 받았다.”라고 쓰면서 자신이 하늘의 도움을 받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22 이들 “실제 몰몬 여성들”은 집집마다 돌아다니고 거리 모임에서 자주 간증을 전하면서 맡은 소임을 훌륭히 해냈습니다. 그들은 곧 영국 전역에서 일하는 다른 자매 선교사들과 합류했습니다.
렌런드 장로: 시작은 나이트 자매와 브림홀 자매가 했지만, 이 경륜의 시대에 수십만 명의 자매들이 선교사로 봉사했습니다.23 제가 자매 선교사들에게 놀란 것 중 하나는 그들이 자신의 참모습일 때 더 효과적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진정한 후기 성도 여성입니다. 나이트 자매나 브림홀 자매처럼 그들은 사람들에게 자신이 누구이며 왜 그렇게 믿는지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자매 선교사들이 이스라엘의 집합에 미친 영향은 범상치 않았습니다. 최근에 한 젊은 장로가 저에게 질의응답 시간에 자신의 선교부에 있는 와드에서 자매 선교사를 선호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질문했습니다. 제 대답은 간단했습니다. “자매님들은 그 일에 마음과 영혼을 바치기 때문입니다. 회원들은 어떤 것도 주저하지 않고 그렇게 하는 모든 선교사를 사랑합니다.”
선교사 부름에 응하는 자매 선교사들은 복음 전파에 큰 몫을 담당해 왔으며 지금도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넬슨 회장님께선 지난 4월 연차 대회에서 “우리는 자매 선교사들을 사랑하며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여러분이 이 사업에 기여하는 바는 참으로 놀랍습니다!” 라고 하셨습니다.24
렌런드 자매: 저는 또한 선교사로 부름을 받지도 않았고 따로 성별 되지도 않은 맥큔 자매가 행한 선행에도 깊은 인상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이 사랑스러운 자매가 이런 일을 성사시킨 것도 자신의 믿음 때문이었습니다.25
우리는 이를 통해 『성도들』 제3권의 또 다른 놀라운 측면을 보게 됩니다. 우리는 가장 힘든 상황에서도 제자됨을 보여준 성도들의 사례들을 발견합니다. 이전의 원수들은 예수 그리스도께 의지하면서 적개심을 극복하고 하나가 되었습니다.
제2차 세계 대전 후, “네덜란드는 5년간의 [독일 나치 정권의] 점령이 끝난 후에도 여전히 비참한 상황이었다. 20만 명 이상의 네덜란드 사람들이 전쟁 중에 목숨을 잃었고, 수십만 채의 집이 파손되거나 파괴되었다. 네덜란드의 … 많은 성도는 독일인”과 서로에게 원한을 품었습니다. 어떤 이들은 점령군에게 저항했지만 어떤 이들은 그들에게 협조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분열은 뚜렷했습니다.
렌런드 장로: “선교부 회장 코넬리우스 자피는 네덜란드 정부가 제공한 씨감자를 이용하여 감자 재배 프로젝트를 시작함으로써 지부들이 그들의 식량 공급을 보충하도록 격려했다.” 이러한 격려와 함께 “네덜란드의 지부는 … 뒤뜰, 화원, 공터, 도로 중앙 분리대 등 찾아낼 수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감자밭을 만들어 감자를 재배하기 시작했다.
수확기를 앞둔 시점에, [자피 회장]은 로테르담에서 선교부 대회를 열었다. 그는 동독 선교부 회장과 대화를 나누면서 “독일의 많은 성도들이 심각한 식량 부족으로 고통을 받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도움이 되는 일을 하고 싶었던 [자피 회장]은 네덜란드 현지 지도자들에게 감자 수확량의 일부를 독일 성도들에게 흔쾌히 내 줄 수 있겠는지를 물었다.
“’이 전쟁의 결과로 여러분이 맞닥뜨렸던 가장 철천지원수 중 일부는 독일인이었’음을 그는 인정했다. ‘하지만 그들은 지금 여러분보다 훨씬 더 궁핍한 처지에 있습니다.’”
처음에 일부 네덜란드 성도들은 그 계획에 반대했다. 왜 자신들의 감자를 독일인들과 나누어야 한단 말인가? [일부는] 독일군의 폭격으로 집을 잃거나, 독일 점령군에게 식량을 빼앗겨 사랑하는 이들이 굶어 죽는 것을 [지켜보았다.]
자피 회장은 이전에 전쟁 포로였으며 암스테르담에 있는 교회 지부의 지도자인 피터 플람에게 “네덜란드 전역에 있는 지부를 방문하여 그 계획을 지지하도록 격려”해 달라고 요청하며 나치 정권과 독일 국민은 다르다고 했습니다. “피터는 경험이 많은 교회 지도자였으며, 그가 독일군 수용소에 부당하게 투옥된 것은 많은 이가 아는 사실이었다. 그 선교부에 네덜란드 성도들이 사랑하고 신뢰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바로 피터 플람이었다.”
피터는 지부를 다니면서 회원들에게 “자신이 감옥에서 겪었던 어려움을 넌지시 이야기했다. ‘저는 그 일을 겪었습니다.’ 그는 말했다. ‘제가 겪은 것을 여러분도 아시죠.’ 그는 회원들에게 독일인들을 용서하라고 촉구하며 이렇게 말했다. ‘그들을 사랑하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압니다. 만약 그들이 우리의 형제와 자매라면, 우리는 그들을 우리의 형제와 자매로 대해야 합니다.’
렌런드 자매: 성도들은 그의 말과 다른 지부 회장들의 말에 감동을 받았으며, 독일 성도들을 위해 그들이 감자를 수확하는 동안 많은 이들의 분노가 녹아내렸다. 여러 지부 내에 존재하는 불화가 사라진 것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성도들은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함께 일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한편, [자피 회장]은 감자를 독일로 운송하기 위한 허가를 받기 위해 노력했다. 몇몇 관리들이 수송 계획을 막으려고 하자, [자피 회장]은 이렇게 말했다. ‘이 감자는 주님의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뜻이라면, 이 감자는 독일로 가게 될 것입니다.’
마침내 1947년 11월, 네덜란드 성도들과 선교사들은 헤이그에서 만나 70톤이 넘는 감자를 열 대의 트럭에 실었다. 얼마 후, 성도들에게 나누어 줄 감자가 독일에 도착했다. …
감자 프로젝트 소식은 곧 제일회장단에게도 전해졌다. 데이비드 오 맥케이 회장은 놀라워하며 이렇게 말했다. ‘이 일은 제가 이제까지 본 가장 위대하고 진정한 기독교적인 행위 중 하나입니다.’”26
렌런드 장로: 다음 해에 네덜란드 회원들은 다시 독일인들에게 많은 양의 감자 작물을 보냈습니다. 청어도 추가해 선물은 더욱 풍족해졌습니다. 몇 년 후인 1953년 북해가 범람하면서 네덜란드의 상당 부분이 침수되었고, 네덜란드 회원들은 곤경에 빠졌습니다. 이번에는 독일 성도들이 네덜란드에 원조를 보내 도움이 필요한 시기에 그들을 도왔습니다. 네덜란드 성도들의 자선 행위는 여러 해 동안 반향을 일으켰으며, 평범한 사람들이 첫 번째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다음으로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할 때, 심지어 원수 사이에서도 사랑과 자애가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지속적인 증거를 제공합니다.
용서하려는 의지가 네덜란드 회원들에게 치유를 가져다주었습니다. 저는 이것이 저 자신에게도 해당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원한을 품으면 영혼이 슬퍼하게 됩니다. 화를 내면 다른 사람을 대하는 행동에서 덜 친절해지고 덜 그리스도처럼 됩니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아파르트헤이트 정책을 배경으로 한 앨런 패튼의 1953년 소설 “Too Late Phalarope”의 한 등장인물이 이런 진리를 다음과 같이 아름답게 서술하고 있습니다. “누군가 우리에게 깊은 상처를 입힌 경우 그를 용서할 때까지 우리는 절대 회복할 수 없다는 … 엄격한 법이 있어요.”27
렌런드 자매: 이 기간 동안 교회 역사에서 영감을 주는 이야기가 『성도들』 제3권에 아주 많이 실려 있습니다. 어쩌면 여러분은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케이프타운에서 여러 해 동안 고립되어서도 충실하게 봉사한 윌리엄 다니엘스에 대해 알고 싶으실 것입니다. 그는 비록 신권 직분에 성임되지는 않았지만 열렬한 간증을 갖고 충실하게 봉사했습니다.28
렌런드 장로: 아니면 멕시코에서 신앙 때문에 순교한 라파엘 몬로이와 비센테 모랄레스와, 계속되는 위협에도 불구하고 가족과 지역 사회를 용감하게 이끌었던 라파엘의 어머니 헤수시타와 아내 과달루페의 이야기도 있습니다.29
렌런드 자매: 또는 알마 리차즈가 후기 성도 최초로 올림픽 메달을 딴 것은 부분적으로 그가 지혜의 말씀대로 살기로 선택했기 때문입니다.30
렌런드 장로: 또는 히리니 황가는 충실한 아내 메레의 지원을 받아 고국인 뉴질랜드로 돌아와 선교사로서 말씀을 전하고 성전 사업을 위해 이름을 모았습니다.31
렌런드 자매: 또는 나치 독일에서 젊은 여성 후기 성도였던 헬가 메이추스는 옛날 친구, 교사, 학교 지도자들의 따돌림에도 불구하고 신앙을 지켰습니다.32
렌런드 장로: 또는 상호부조회에서 고용한 사회 복지사인 에벌린 호지스는 대공황 기간 동안 가족들이 다시 일어설 수 있도록 도왔습니다.33
렌런드 자매: 이제 더 이상 강조할 시간이 없지만, 저는 여러분이 모두 이 『성도들』 제3권을 직접 읽고 싶어 하시리라는 것을 압니다.
렌런드 장로: 제가 보기에 교회 역사에서 이 시기에 가장 적합한 노래는 합창단이 모임을 폐회하기 위해 부를 “들어라 만방 하늘 음성”입니다.34 “들어라 만방 하늘 음성”은 루이스 에프 묀히가 쓴 곡입니다. 그는 독일 출신으로 1864년 솔트레이크시티를 여행하다가 교회에 가입했습니다. 그는 후에 스위스와 독일에서 교회 선교사로 봉사했습니다. 이 선교 사업을 하는 동안 그는 “들어라 만방 하늘 음성”을 비롯해 많은 자료를 독일어로 출판했습니다. 이 찬송가는 독일어를 사용하는 후기 성도들에게 가장 사랑받는 찬송가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이 찬송가는 1890년 독일에서 처음 출판되었습니다. 그것은 영어로 번역되어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찬송가 1985년판의 일부로 출판되었습니다. 그 판에는 오늘 합창단이 부를 3절이 생략되어 있습니다.
이 3절에서는 우리가 앞서 이야기했던 성도들이 그 시대에 무엇을 했는지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유일하고 참되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찬미[했습니다]. 그분께 [나아와] 침례[받고] 쇠막대를 [잡으며]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신앙으로 [그들의] 마음을 거룩하신 분 예수님께 [드렸습니다.]”
『성도들』을 읽으면서 교회 역사를 배우고 이해하며 회원들의 모범을 통해 배우시기 바랍니다. 『성도들』은 철저히 고증되어 신뢰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지금도 계속되는 예수 그리스도 교회의회복에 대한 증언입니다. 우리의 역사는 영감을 불어넣습니다. 우리가 이러한 초기 개척자의 후손이든, 후대의 개척자든, 또는 신앙의 개척자든 이 역사는 우리가 공유하는 유산입니다.
왜 이게 중요한가요?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는데 시간을 쓸까요? 왜냐면 삶의 예를 통해 우리는 우리의 구주에 대해 배우는 것의 힘을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살아 계시며 하나님의 권능으로 무장하시고 위대한 영광으로써 이 교회를 인도하시며 당신의 성약의 백성을 돌보신다는 것을 압니다. 삶에서 구주의 사랑을 느끼고 그분과 그분의 교회에 가까이 가는 축복이 여러분에게 임하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구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