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토마스 에스 몬슨 회장, 선지자이자 친구
토마스 에스 몬슨 회장 추도문


추도문

토마스 에스 몬슨 회장, 선지자이자 친구

“두려워하지 말고 기뻐하십시오. 미래는 여러분의 신앙만큼 밝습니다.”1

웃고 있는 몬슨 회장

사진: 스코트 지 윈터튼, 데저렛 뉴스

솔트레이크시티 병원의 의사와 직원들은 한 응급실 환자를 퇴원시켜야 할지 고민하고 있었다. 치료는 이미 끝났고 남자도 다 회복이 된 것처럼 보였지만, 그의 남루한 차림새와 불안정한 생활 환경을 고려하면 퇴원을 시켜도 괜찮을지 우려되는 상황이었다. 의사가 물었다. “치료를 계속할 수 있도록 도와줄 가족이나 친구가 있으십니까?” “아니요.” 그 환자는 이렇게 대답했다가 갑자기 누군가가 생각이 난 듯 말했다. “사실은, 가끔 저를 돌봐 주는 친구가 한 명 있긴 합니다. 톰 몬슨이라는 친구입니다.”2

그의 오랜 친구가 말하듯, 토마스 스펜서 몬슨 회장은 “약자들과 불우한 사람들의 특별한 친구”였다.3 그는 제일회장단의 일원으로서 막중한 책임을 다하던 30년이 넘는 시간을 포함하여 온 생애 동안 연로한 벗들과 낯선 이들을 개인적으로 방문하는 일을 매우 중요하게 여겼다. 그는 중요한 모임이 있더라도 영의 속삭임을 느끼면 아픈 어린이들에게 신권 축복을 주고자 시간을 냈다. 그는 운동 경기를 관람할 때 유명한 관계자나 공적인 인사들을 초대하는 대신 어린 시절에 가난한 동네에서 함께 자란 친구들을 데려가곤 했다. 그는 또한 웨스트 고등학교의 동창회 모임에 빠짐없이 참석했는데, 그때마다 “톰 몬슨”이라고 적힌 이름표를 달고 나갔다. 그의 아들의 말에 따르면, 토마스 몬슨은 “절대로 사회적 지위와 외양, 또는 겉으로 드러난 업적 등으로 사람을 차별하지 않았다. 그는 소박한 50년 지기에게도 주지사나 상원 의원, 혹은 유명한 사업가에게만큼, 혹은 그보다 더 큰 관심을 쏟는 사람이었다.”4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교회 안팎에 있는 수백만의 친구들과 추종자들은 예수 그리스도 후기 성도 교회의 제16대 회장의 서거로 충실한 친구를 한 사람 잃게 되었다. “저는 언제나 주님의 도움이 필요했고 언제나 그분의 도움을 구했습니다.”5라는 입장을 지녔던 몬슨 회장은 인도주의적인 지원을 하고, 교회 웹 페이지의 명료성을 더 높여서 회원들이 복잡한 사안들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고, 세계가 교회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홍보 캠페인을 벌이며, 주님의 사업을 진척시키는 데 목적을 둔 혁신적인 움직임을 도입함으로써 널리 세계로 발돋움하는 두드러진 치적을 남겼다. 이러한 것 중에는 전임 선교사로 봉사하는 젊은이들의 연령을 낮추고, 선교사들이 사람들에게 다가갈 수 있는 방안을 확대(기술 활용 포함)하며, 전 세계 곳곳의 회원들이 교회 지도자들과 함께 인터넷으로 실시간 대화를 나누는 온라인 포럼 등이 있다. 그의 재임 기간 동안 그리스도의 제자로서의 본분을 강조하는 새로운 교회 지침서가 편찬되었다. 가족 역사 사업이 간소화되어, 대리 침례 및 구원을 위한 기타 의식들을 받기 위해 이름을 찾아 성전에 제출하는 것이 더 쉬워졌다.

토마스 에스 몬슨과 델마 페처

몬슨 회장이 2010년 100세 생일을 맞은 자신의 친구 델마 페처에게 축하 인사를 건네고 있다. 몬슨 회장은 연로한 벗들과 낯선 이들을 자주 방문했다.

몬슨 회장이 이룬 여러 가지 중요한 업적 가운데서, 그가 남긴 가장 중요한 유산은 강인한 모범이라는 데는 별 이견이 없을 것이다. 그가 좋아한 성구 중 하나인 사도행전 10장 38절은 나사렛 예수를 “두루 다니[며] 선한 일을 행하[는]” 사람으로 묘사하고 있다. 몬슨 회장은 구주께서 우리에게 권고하신 대로 언제나 선한 일을 행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는 주린 이에게 음식을 대접하고, 나그네를 영접했으며, 헐벗은 이를 입히고, 병든 이를 방문했으며, 외로운 이들이 고독과 절망에 갇혀 있는 감옥으로 걸어 들어갔다.(마태복음 25:34~40 참조) 몬슨 회장이 지닌 인도주의 정신과, 일보다는 사람을 중시하며, 영을 따르고자 헌신하는 모습에 이끌려 수십 년 동안 그에 대한 기사를 썼던 기자는 이렇게 기록했다. “나는 다른 사람을 북돋우고 위로와 위안을 주며 응원하기 위해 그토록 노력하는 사람을 별로 만나 보지 못했다.”6 토마스 에스 몬슨은 어려움 가운데 기회를 찾고 봉사하며, 가족을 위한 삶을 통해 그리스도와 같은 성역의 모범을 유산으로 남길 수 있었다.

너그러운 가정

세발자전거를 탄 어린 토마스 에스 몬슨, 가족 소장 초상화

조지 스펜서와 글래디스 콘디 몬슨 부부는 솔트레이크시티를 가로지르는 철로에서 그다지 멀리 떨어지지 않은 사우스 500번가와 웨스트 200번가가 만나는 모퉁이 지점에서 살고 있었다. 그들은 대공황을 겪으며, 스코틀랜드에서 온 개척자들의 후손인 글래디스의 친척들에 둘러싸여 가정을 꾸려 나갔다. 조지의 조부모는 스웨덴과 영국에서 교회의 회원이 된 뒤에 미국으로 이민을 와서 솔트레이크시티에 정착하였다. 1927년 8월 21일, 조지와 글래디스의 둘째이자 장남이 태어났다. 아들의 이름은 외조부인 토마스 샤프 콘디와 부친의 이름을 따서 토마스 스펜서 몬슨이라고 지었다.

친인척들과 가까이 살았던 몬슨 가족은 다른 많은 사람과도 사랑을 나눴다. 몬슨 회장은 후에 회고하기를, 그 지역에서는 마을을 지나는 나그네들이 심심찮게 문을 두드리곤 했는데, 글래디스 몬슨은 그들을 집으로 들여 “그들이 마치 초대받은 손님인 것처럼” 음식을 대접했다고 한다.7 또한, 글래디스는 일요일이면 이웃에 살던 “밥 할아버지”에게 드릴 음식을 톰에게 들려 보냈는데, 그럴 때마다 밥 할아버지는 톰에게 10센트짜리 동전 한 닢을 주었다. 그러면 속 깊은 톰은 이렇게 답했다. “돈은 받을 수 없어요. 엄마가 야단을 치실 테니까요.”8 일요일이면 톰의 부친은 관절염으로 다리를 절던 자신의 동생 일라이어스를 1928년식 올즈모빌 자동차에 태우고 톰과 함께 도시 곳곳을 달리곤 했다.

몬슨 회장은 이렇게 말했다. “저는 이 시기에 어머니 아버지가 하시는 일을 보고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그분들이 교회에는 거의 참석하지 않는다는 것은 깨닫지 못했습니다.”9 또한, 몬슨 회장은 아량과 온정이 흐르던 분위기를 떠올리며 이렇게 말했다. “아버지께서 다른 사람을 두고 부정적인 말씀을 하시는 것을 들어 본 적이 없습니다. 사실, 누군가가 다른 사람에게 무례하거나 부정적인 말을 하면 아버지는 그 자리를 뜨는 분이었습니다.”10

이런 태도와 행동은 당연히 톰에게도 영향을 주었다. 어느 성탄절, 전동 기차 세트를 선물로 받고 매우 기뻐하던 톰은 그러면서도 이웃에 살던 편모 가정의 아이에게 주기로 했던 덜 좋은 기차 세트에서 기차 하나를 빼 달라고 어머니를 졸랐고, 결국 기차 하나를 더 얻었다. 나중에 어머니와 함께 그 선물을 가져다주러 간 톰은 변변찮은 기차 세트를 보고도 그저 기뻐하는 소년을 보며 양심의 가책을 느꼈다. 톰은 집으로 달려가 세트에서 빼낸 기차만이 아니라 자신의 기차 세트도 가져왔다.11 나중에 톰은 칠면조나 닭도 먹어 보지 못한 친구의 가족에게 성탄절 만찬으로 자신이 기르던 토끼 두 마리를 내놓기도 했다.12 한 여성이 톰과 친구들이 이웃에서 야구를 하다가 친 공이 자신의 마당을 넘어오는 것을 문제 삼자(그녀는 자주 그 공들을 낚아채 가져가 버리곤 했다) 톰은 그 상황을 수습하고자 했다. 톰은 묵묵히 여름이면 그녀의 마당에 정기적으로 물을 주고, 가을이면 그녀의 잔디밭에서 낙엽을 쓸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는 톰에게 집으로 들어오라고 해 우유와 쿠키를 주며, 야구공이 가득 담긴 상자를 내주었다.13

그러나 몬슨 회장은, 자신이 어린 시절에 선한 일만 한 것이 아니라 야단을 맞을 만큼 짓궂은 일도 했다고 자주 시인했다. 한번은 사촌과 함께 동네에 있던 길 잃은 개들을 모아서 뒤뜰에 있는 석탄 창고에 몰아넣어 두었는데, 톰의 아버지가 창고 문을 열자 그중 여섯 마리가 아버지를 향해 뛰어든 일도 있었다.14 어느 날 오후에는 초등회 회장이 톰을 살짝 불러 초등회 개회 모임에서 많은 소년들이 소란스러운 행동을 한 탓에 마음이 언짢았다고 말했다. 이에 톰은 초등회 회장의 조력자가 되기로 했고, “초등회의 규율 문제는 바로 해결되었습니다.”라고 그는 회상했다.15 그러나 유혹은 계속되었다. 어느 날 오후에 톰은 친구를 설득하여 초등회 공과를 빼먹기로 했다. 톰은 주머니에서 1페니짜리 동전 하나를 꺼내서 프라이머리 어린이병원을 위한 모금함에 집어넣었고, 그런 뒤 둘은 바로 교회를 나섰다. 그런 다음, 주머니에 남은 10센트로 해치 데어리에 가서 아이스크림을 사 먹으려고 했다. 그러나 계획은 틀어지고 말았다. 알고 보니 톰이 실수로 1페니가 아니라 10센트를 모금함에 넣어버린 것이었다. 그리하여 둘은 교회로 돌아왔고 톰은 하는 수 없이 1페니마저 모금함에 넣어야 했다. 나중에 몬슨 회장은 이렇게 말했다. “한동안 저는 제가 프라이머리 어린이병원에 가장 큰돈을 투자한 사람이었다고 느꼈습니다.”16

톰은 프로보 캐니언에 있는 가족 별장을 자주 방문했기에 평생 오리 사냥과 야영, 낚시, 강에서 하는 수영을 즐겼다. 한번은 톰이 위태로운 소용돌이에 휩쓸린 소녀를 구한 일도 있었다.17 그는 그 가족 별장 근처의 풀밭에다 친구와 함께 어리석게도 불을 지른 일화를 언급하기도 했다. 언제나 그랬듯, 그는 이야기를 주요 복음 원리를 전하는 틀로 삼았다.18

톰은 솔트레이크시티에 있던 집 인근 채프먼 공립 도서관을 일주일에도 여러 차례 다니면서 책과 작가들을 좋아하게 되었다. 덕분에 그는 나중에 워즈워스, 롱펠로, 브라이언트, 테니슨, 셰익스피어같이 자신이 좋아하는 시인들의 시 일부를 길게 인용할 수 있었다.19

톰은 비둘기를 기르는 데 특별히 흥미를 보였는데, 청소년 시기에 시작된 이 취미는 성인이 되어서도 계속되었다. 어느 날 아론 신권 정원회 고문이 톰에게 비둘기 한 마리를 주었는데, 이 비둘기가 계속해서 그 고문의 집으로 돌아간 탓에 톰은 매주 신권 접견을 하게 되었고, 그는 이 일로 청지기 직분에 대한 교훈을 얻었다.20 톰은 자신에게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간증의 기초를 마련해 준 사람은 사랑하는 주일학교 교사인 루시 게르취라고 말했다. 소란스럽기 짝이 없던 소년들은 자신들을 사랑하던 게르취 자매의 영으로 가득한 성경 공과를 들으며 제멋대로였던 태도를 바꾸게 되었다.21

주일학교에 참석한 어린 토마스 에스 몬슨

성인으로 자라나

대공황의 경제적인 압박 탓에 톰은 열두 살의 나이에 부친이 경영하던 인쇄소에서 일을 시작해야 했다.22 그러나 톰이 고등학교에 다니는 동안, 제2차 세계 대전이 대공황 때보다 더 큰 그림자를 드리웠다. 몬슨 회장은 자신의 십 대 시절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젊은이들은 [전쟁]이 계속된다면 자신들도 군에 입대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23 역사를 사랑하는 우수한 학생이었던 그는 17세에 유타 대학교에 입학했다.24 역사 교사가 되는 것을 진지하게 고려했으나, 그 대신 경영학을 공부하며 로웰 베니언 박사와 티 에드거 라이언 박사가 가르치던 종교 교육원 수업도 즐겨 들었다.25

대학에서 그는 평생 사랑할 사람을 만났다. 신학기 무도회에서 프랜시스 존슨을 소개받은 뒤로, 톰은 계속 그녀를 찾아갔다. 후에 그는 떠들썩하던 자신의 가정과 존슨 가를 비교하며, “저는 [그녀의 집]에 흐르던 품위와 조용한 분위기에 어울리지 않았습니다.”라고 회상했다.26 프랜시스의 부친은 몬슨이라는 이름에 관심을 보이더니, 톰의 종조부인 일라이어스가 스웨덴에서 존슨 가족에게 복음을 소개한 사람임을 알게 된 뒤, 눈물을 흘리며 톰을 끌어안았다.27 톰과 프랜시스는 대규모 악단의 연주를 즐겼으며, 토미 도시나 글렌 밀러 같은 주자들이 연주하는 무도회에 자주 갔다.28

해군 군복을 입은 토마스 에스 몬슨

1945년이 되자 톰은 미 해군 예비군에 입대했다. 톰은 나중에 우스갯소리로, 신병 훈련소에서 지낸 첫 3주 동안 “저는 제 삶이 위험에 처했다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해군은 저를 훈련하려 하는 것이 아니라 저를 죽이려고 했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 어려운 시간 중에도 영적인 경험이 함께했다. 어느 일요일, 선임 하사관이 병사 전원을 정렬시키더니 가톨릭교도와 유대인, 그리고 개신교도들을 집회 장소로 안내한 다음에 톰에게 다가와 물었다. “자네들은 자신을 뭐라고 부르나?”

나중에 몬슨 회장은 이렇게 회상했다. “그때야 비로소 저는 제 옆에나 뒤에 누군가가 서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우리는 거의 동시에 ‘몰몬이라고 부릅니다!’하고 대답했습니다.”29

성탄절을 앞둔 어느 날 밤, 맞닿은 막사의 침상에 있던 톰의 후기 성도 친구인 리랜드 메릴이 고통스럽게 신음을 하기 시작했다. 리랜드는 목소리를 낮추고 필사적으로 톰을 불렀다. “이봐, 몬슨, 너 장로지?” 그러더니 그는 신권 축복을 부탁했다. 그것은 톰이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는 일이었다. 톰은 도움을 구하며 조용히 기도했을 때, “배낭 바닥을 살펴보라.”라는 응답을 받았다. 새벽 두 시에 톰은 배낭 바닥에서 선교사 지침서를 찾았으며 병자를 축복하는 법을 알게 되었다. 나중에 그는 이렇게 말했다. “60여 명의 수병이 호기심 어린 눈으로 지켜보는 가운데 저는 병자 축복을 했습니다. 꺼내 놓은 물건들을 다시 배낭에 집어넣기도 전에 메릴은 어린아이처럼 잠들어 있었습니다.”30 톰은 군에서 복무하는 동안 다른 사람들에게서도 배웠는데, “우리 몰몬 젊은이들이 침상에 누워서 기도할” 때, 매일 밤 무릎을 꿇고 기도하던 한 젊은 가톨릭교 신자를 존경했다.31

톰은 일 년을 군에서 복무한 뒤, 집으로 돌아와 교회 소유의 데저렛 뉴스에서 홍보 책임자로 일하면서 유타 대학교를 우등으로 졸업했다. 졸업하고 몇 달 뒤, 그는 1948년 10월 7일에 솔트레이크 성전에서 프랜시스 존슨과 결혼했다. 몬슨 자매는 그들의 신혼 생활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저는 상당히 일찍부터 자립하는 법을 배웠습니다.”32 주님께서는 거의 즉시 젊은 몬슨 형제와 자매가 하나님의 왕국을 세우는 일에 열정적으로 참여하도록 하셨다.

토마스와 프랜시스 몬슨과 그들의 자녀들

토마스는 군 복무를 마친 후 프랜시스 존슨을 만나 결혼했다. 그들은 슬하에 토머스 리, 클라크 스펜서, 앤 프랜시스, 이렇게 세 자녀를 두었다.

개인적인 성역

1950년 5월, 톰과 프랜시스의 감독인 존 알 버트가 스테이크 회장단에 부름받았다. 버트 감독은 자신을 대신하여 감독으로 봉사해야 할 사람을 묻는 말에 한동안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스테이크 회장]님께 저를 대신해서 감독을 맡아 줄 사람으로 22살 난 청년이 생각나는 이유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궁리하고 있었습니다.”33 이렇게 하여 젊은 토마스 에스 몬슨은 85명의 미망인이 소속된, 당시에 교회의 복지 사업이 가장 절실하던 템플 뷰 6~7와드에서 봉사하기 시작했다. 톰은 바로 이 와드에서 감독으로 봉사하면서 자선을 베풀고자 하는 강한 본성을 더욱 굳건히 다지게 되었다. 그는 성탄절기가 돌아오면 사탕, 책, 통닭구이 등을 선물로 들고 미망인 한 사람 한 사람을 방문했다.34 “자신의 미망인들”을 가까이서 살피던 그는 감독직에서 해임된 뒤에도 오랫동안 해마다 그중 여럿을 방문했으며, 총관리 역원으로 재임하는 동안 그 85분의 장례식에서 모두 말씀을 전하기도 했다.35 그는 감독으로 봉사했던 5년을 돌아보며 “저는 부족한 사람이었던 덕에 겸손해질 수 있었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어려서부터 연령이나 상황과 관계없이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향해 동정심을 느낄 수 있었던 것”에 감사했다.36 그는 종교가 다른 사람을 포함해 자신의 와드 경계 내에 사는 모든 이를 돌보고, 저활동 회원들을 찾았다. 한 청남에게 정원회 모임으로 돌아오라고 격려하기 위해 어느 일요일 아침 그가 일하는 주유소까지 찾아가기도 했다.37

이 특별한 부름은 어려운 교훈도 가르쳐 주었다. 스테이크 지도자 모임에 참석 중이던 몬슨 감독은 당장 자리에서 일어나 보훈 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있던 와드의 연로한 회원을 방문해야 한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 공교롭게도 스테이크 회장이 말씀을 전하는 중이었으므로 젊은 몬슨 감독은 스테이크 회장이 말씀을 마칠 때까지 안절부절못하며 자리를 지키다가 말씀이 끝나자 서둘러 병원으로 달려갔다. 그 형제의 병실로 뛰어 들어가려는데 간호사가 그를 멈추게 하고는 “몬슨 감독님이신가요?”하고 물으며 이렇게 전했다. “환자분이 돌아가시기 직전에 감독님을 불러 달라고 하셨어요.”38 그날 밤 몬슨 감독은 차를 몰고 집으로 돌아오면서 앞으로는 반드시 성신의 음성에 따라 행동하겠다고 다짐했다. 그는 그 후로 교회에서 봉사하는 동안 끊임없이 이 다짐을 되새겼다.

스테이크 회장단 보좌 시절의 토마스 에스 몬슨

그는 27세에 스테이크 회장단 보좌로 봉사했으며, 31세 되던 1959년에는 캐나다의 선교부 회장으로 부름받았다. 그가 이끌던 선교사들은 자신들의 지도자가 영에 매우 민감한 사람이었다고 기억하며, 어떤 선교사가 잘못을 저지르려고 할 때면 몬슨 회장이 영의 느낌에 따라 그 직전에 그 선교사의 집을 방문한 적이 많았다고 한다.39 그는 선교사들에게 집중해서 모든 선교사의 이름을 외우고, 선교사들의 문제와 고민에 관해 권고하며, 특히 조기 귀환이나 선도 평의회가 열리는 일이 생기지 않도록 최선을 다했다. 이 무렵, 몬슨 가족은 식구가 늘어 토마스 리와 앤 프랜시스라는 두 자녀가 있었다. 세 번째 자녀인 클라크 스펜서는 캐나다에서 태어났다. 몬슨 가족은 선교 사업을 하면서 전보다 더 많은 시간을 함께 보냈다. 톰은 캐나다를 매우 좋아해서 2010년에 교회 회장으로서 캐나다 밴쿠버 성전을 헌납할 때 캐나다 국기를 옷깃에 달고 개회 찬송 대신 캐나다 국가를 부르게 할 정도였다.40

인쇄기 옆에 선 토마스 에스 몬슨

솔트레이크시티의 집으로 돌아온 뒤, 톰은 데저렛 출판사의 부장이 되었고, 프랜시스는 자녀를 양육하고 와드의 부름을 수행하며, 교회 본부 신권 위원회에서 봉사하는 남편을 내조하느라 분주한 시간을 보냈다.

톰은 성인 협의 위원회, 선교사 위원회, 계보 위원회 등 교회의 여러 위원회에 깊이 관여하고 있었기 때문에, 데이비드 오 맥케이 회장의 집무실로 오라는 연락을 받았을 때, 그것은 아마 당시 자기가 맡은 임무와 얼마쯤 관련이 있는 일 때문이리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렇지 않았다. 맥케이 회장은 제일회장단 보좌로 부름받은 엔 엘돈 태너 장로의 자리를 대신하기 위해 톰에게 십이사도 정원회의 일원으로 봉사하도록 부름을 주었다. 톰은 당황하고 놀란 나머지 말을 이을 수 없었다. 마침내, 그는 맥케이 회장에게 다음과 같은 말로 확신을 전했다. “저에게 축복된 재능은 어떤 것이라도 주님의 사업에 쓰일 것이며 필요하다면 제 목숨이라도 내놓을 것입니다.”41

이 성스러운 부름을 아내를 제외하고 모든 사람에게 비밀에 부치기로 동의한 몬슨 회장은 1963년 10월 4일 연차 대회가 열리기 전날 밤을 뜬눈으로 지새웠다. 대회에 도착한 그는 자신이 봉사하고 있던 신권 가정 복음 위원회의 위원들 사이에 자리를 잡았다. 옆자리에 있던 친구인 휴 스미스가 이상한 우연에 관해 이야기했다. 총관리 역원이 부름을 받았던 지난 두 차례의 대회에서 자기 옆자리에 앉은 사람이 그 부름을 받았다는 것이었다.42 토마스 몬슨의 이름이 호명되자, “휴 스미스는 저를 바라보며 놀랍다는 듯이 말했습니다. ‘기막힌 우연이 세 번이나 일어나다니.’ 청중석에서 일어나 연단으로 걸어나가던 그 길이 제 생애에서 가장 긴 길이었을 것입니다.”43

사도 부름 발표를 기다리는 토마스 에스 몬슨

십이사도 정원회 일원으로서의 봉사

36세에 십이사도 정원회 일원이 된 토마스 에스 몬슨은 1910년 조셉 필딩 스미스 회장이 33세로 십이사도 정원회에 부름받은 이래 최연소 십이사도가 되었다. 그는 1963년부터 에즈라 태프트 벤슨 회장을 도와 제일회장단에서 봉사하도록 부름받은 1985년까지 22년 동안 십이사도 정원회에서 봉사했으며, 이에 겸하여 교회의 모든 주요 위원회에서 봉사했고, 그중 여러 차례 의장으로 봉사하기도 했다.44 이 기간 동안 교회 회원은 미국 서부를 기점으로 전 세계의 매우 다양한 지역으로 퍼져 나갔다.45 데이비드 오 맥케이 회장에게서 사도로 부름받은 그는 계속하여 1970년부터 1972년까지 조셉 필딩 스미스 회장 아래 봉사했고, 1972년부터 1973년까지는 해롤드 비 리 회장 아래 봉사했다. 스펜서 더블유 킴볼 회장이 재임하던 1973년부터 1985년까지 몬슨 회장이 이끌던 경전 출판 위원회는 1979년에 경전 안내서와 성경 사전 및 새로운 각주 방식이 들어간 2,400쪽 분량의 흠정역 성경을 출판하였다. 몬슨 회장은 킴볼 회장과 함께 합당한 남성 회원은 모두 신권을 받을 수 있다는 기념비적인 계시를 받기도 했다.46

그러나 제2차 세계 대전 후 철의 장막 너머에 갇힌 교회 회원들에게 십이사도 정원회 일원으로서 몬슨 회장이 행한 가장 커다란 업적은 동유럽의 성도들을 돌본 일이었다. 독일 출신의 제일회장단 일원인 디이터 에프 우흐트도르프는 이렇게 말했다. “실제로 몬슨 회장님이 독일을 비롯해서 유럽에 가져다주신 축복은 너무나 현실적이고 중요하며 가치 면에서도 매우 뛰어나서, 저는 참으로 주님께서 몬슨 회장님을 독일의 역사를 바꿀 도구로서 예비하셨다고 믿습니다.”47 독일 민주 공화국의 공산주의 정부는 종교적인 의식을 극심히 탄압했으나, 교회 회원들은 집회를 한다는 이유로 차별을 당하고, 직장과 교육의 기회를 잃고, 잦은 감시를 당하면서도 충실함을 잃지 않았다. 몬슨 회장은 그들을 자주 방문했으며, 한번은 동독으로 넘어가서 교회 지침서 모두를 다시 타이핑하겠다는 의도로 교회 지침서를 공부한 적이 있었다. 동독에는 교회 자료를 가져가는 것이 금지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지부 회장실로 들어가서 이 작업을 시작했는데, 여러 쪽을 마친 뒤 주변을 살피다가 뒤편의 책장에서 지침서 한 권을 발견했다.48 몬슨 회장은 소수의 성도들이라도 연차 대회에 참석하고 국외에 있는 성전을 방문할 수 있도록 쉴 새 없이 동독의 관료들을 설득했으나 동독의 성도들은 전 세계의 다른 회원들이 누리는 것과 동일한 기회를 고대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1978년에 킴볼 회장은 몬슨 회장에게 “주님께서는 합당한 [동독의] 회원들에게 성전 축복을 금하지 않으실 것입니다.”라고 약속의 말씀을 한 뒤, 빙그레 웃으며 “방법을 찾아보십시오.”라고 덧붙였다.49 몬슨 회장과 동독의 교회 지도자인 헨리 버크하트는 한 번에 여섯 쌍이 스위스 성전을 방문할 수 있게 해 달라고 계속하여 정부에 청원하던 중에 정부 지도자에게서 놀라운 제안을 받았다. “여기에 성전을 짓는 건 어떻습니까?” 1982년 10월, 제일회장단은 독일 민주 공화국의 프라이베르크에 공산주의 국가 최초로 성전이 세워질 것이라는 소식을 발표했다. 이는 상상할 수 없을 만큼 기적적인 일이었다. 이와 더불어 일어난 놀라운 일은 후에 몬슨 회장과 당시 십이사도 정원회의 러셀 엠 넬슨 장로, 그리고 동독의 교회 지도자들이 정부 관료 및 국가 원수인 에리히 호네커와 기적적인 협약을 맺어 동독에 선교사들이 들어가고 베를린 장벽이 붕괴되기 전에 나온 것이었다.50 몬슨 회장은 이렇게 기록했다. “저는 한때 공산주의가 지배했던 국가에 있는 교회의 회원들을 돌보는 일에 주님의 손길이 어떻게 영향을 미쳤는지를 본 산 증인입니다.”51

독일에서 신권 지도자들과 함께 있는 토마스 에스 몬슨

새로 설립된 동독 드레스덴 선교부에서 열린 신권 모임을 마치고 함께 사진을 찍은 몬슨 장로와 지도자들.

그러나 몬슨 회장은 세상을 바꾸는 사건들이 벌어지는 가운데 관리 역원으로서 막중한 의무를 다하면서도 성신의 속삭임과 개개인에게 손을 내미는 일에 끊임없이 초점을 맞추며 봉사했다. 몬슨 회장은 보훈 병원에 있는 친구에게 축복을 베푼 뒤에, “교회 본부에서 일주일 내내 모임에 참석할 때보다 더 큰 일을 해냈다”고 느꼈다.52 그가 자신을 기다리는 병들고 외로운 사람들을 방문하고자 총관리 역원의 임무에서 물러나 병실과 양로원, 사택의 침상을 찾았던 이야기들은 넘쳐나게 많다. 루이지애나주 슈리브포트에 사는 시한부 선고를 받은 한 소녀가 몬슨 회장에게 축복을 부탁했으나, 그는 빠듯한 스테이크 모임 일정 탓에 소녀를 방문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토요일 저녁에 열린 스테이크 지도자 모임 중에 다음과 같은 일이 일어났을 때 그는 소녀를 만나러 갈 준비가 되어 있었다. “저는 영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그 메시지는 간단했는데, ‘어린 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마가복음 10:14)라는 익숙한 말씀이었습니다.”53 몬슨 회장은 이튿날 아침에 크리스털 메스빈의 집까지 130킬로미터를 이동하여 영으로 가득한 집에서 소녀를 축복했다. 그리고 크리스털은 나흘 뒤 세상을 떠났다.

동독의 빈곤한 회원들을 만날 때면, 몬슨 회장은 자신의 양복과 신발, 계산기는 물론 읽은 표시가 된 경전까지도 나눠 주곤 했다.54 또한 그는 6~7와드의 회원들을 절대 잊지 않았고, 에드 에릭슨처럼 연로하고 빈곤한 벗들을 돌봤다. 에드 에릭슨을 자신의 가족 모임에 초대하고, 그의 생일 축하 모임을 시작한 몬슨 회장은 2009년 말씀을 통해 다음과 같이 가르쳤다. “주위의 사람들을 판단하고 비판하는 것을 자제할 용기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을 받아들이고 그들이 사랑받는 귀중한 사람이라는 것을 그들이 느끼게 해 줄 용기를 가지시길 부탁드립니다.”55

아이티 어린이들과 함께하고, 통가 선교부를 방문한 토마스 에스 몬슨

정직하고 친절한 몬슨 회장 덕분에 교회는 다양한 종교와 시민 단체 및 지역 지도자들과 관계를 형성할 수 있었고 그들을 향한 선의를 싹 틔울 수 있었다. 다양한 배경을 가진 이웃들 사이에서 성장했으며, 종교가 다른 친척들에게 친밀감을 느꼈던 몬슨 회장은 진심을 담아 이렇게 말씀했다. “어디에든 좋은 사람들이 있는 것 같습니다.”56 그는 다른 사람들과 어울리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좋은 사람들 중에 많은 이들이 교회 회원은 아니지만, 그들 모두 공동체 정신과 시민 의식을 지닌 사람들입니다.”57 가톨릭 신자이자 솔트레이크 트리뷴의 전 발행인과 같은 지역 사회 지도자들은 다음과 같이 톰에 대한 감사를 표했다. “만일 톰 몬슨과 한 번이라도 만난 적이 있다면, 그는 이미 당신의 친구입니다. … 교회는 톰 몬슨을 제일회장단 일원으로 부름으로써 우정으로 이 지역 사회를 특별히 단합시켰습니다.”58 솔트레이크 지역의 한 변호사는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후기 성도 교회가 비영리계에 얼마나 많이 관여하는지를 사람들이 아는지 모르겠습니다. 몬슨 회장은 무엇이 필요한지를 아주 잘 알고 있습니다.”59 다른 종교의 한 지도자는 몬슨 회장에게 이러한 글을 보냈다. “회장님은 항상 구세군의 필요 사항과 요청 사항을 들어주시고자 마음을 열어 두고 계십니다. 회장님과 회장님 교회의 사람들의 온정과 은혜의 정신에 저희는 놀랐습니다.”60 몬슨 회장은 1993년에 솔트레이크시티에서 열린 매들린 대성당 재건 및 헌납식 부대 행사에 참석하여 연설했으며 가까운 벗들의 가톨릭 장례식에서도 조사를 전했다.61

비둘기와 토마스 에스 몬슨

몬슨 회장은 비둘기 기르기와 같은 취미 덕분에 의무라는 무게를 잊고 잠시 숨을 돌릴 수 있었으며, 손주들은 몬슨 회장을 “비둘기 할아버지”라고 부르곤 했다. 비둘기 기르기에 대한 몬슨 회장의 열정은 그가 미국 보이스카우트 연맹이 수여하는 비둘기 기르기 공훈 배지를 받은 것에서도 드러났다. 그는 1969년에 전미 스카우트 상임 이사회에서 봉사하기 시작했으며 여러 해에 걸쳐 실버 비버상(Silver Beaver Award, 봉사상의 일종—옮긴 이), 실버 버팔로상(Silver Buffalo Award, 국가에 두드러진 봉사를 한 사람에게 주는 봉사상—옮긴 이)을 수상했고, 1993년에는 국제 스카우트 연맹에서 수여하는 최고상인 브론즈 울프상(Bronze Wolf)을 수상했다. 그러나 스카우트 이사회의 전임 의장인 로이 윌리엄스는 몬슨 회장이 비둘기 기르기 공훈 배지 수여를 중지하기로 한 스카우트 연맹의 결정을 뒤집을 수는 없었다고 농담 삼아 이야기했다.62

몬슨 회장은 다방면에 흥미가 있었다. 십이사도 정원회 일원으로 봉사하며 경영학 석사 학위를 받았고, 다른 곳을 방문할 때면 군인들의 묘역을 즐겨 찾았다. 묘역은 “산산이 부서진 꿈과 이루지 못한 소망과 비탄에 젖은 마음, 전쟁이라는 날카로운 낫에 베여 끊어진 삶”에 대한 상념에 젖게 하는 신성한 장소라고 그는 말했다.63 몬슨 회장은 제2차 세계 대전에 대해 공부하는 것을 좋아했으며, 다른 한편 밤이면 텔레비전에서 재방영하는 페리 메이슨이라는 프로그램을 즐겨 보기도 했다. 간혹 잠이 들어 끝을 놓치는 경우도 있었지만 말이다.64 그는 뮤지컬도 즐겼다. 몬슨 회장은 연차 대회에서 “아내 프랜시스의 말 대로라면 저는 ‘쇼 중독자’입니다.”라고 말한 적이 있었다.65 사람들과 함께 새해 첫날에 벌어지는 미식축구 경기를 관람하는 것도 좋아하던 그는 “두 팀 사이에서 중립을 유지하고 경기를 보기 시작하지만 몇 분 지나지 않아 이겨야 한다고 생각하는 팀을 고르게 됩니다.”라고 말했다.66 그는 비행기 옆 좌석에 앉은 사람과 비행 내내 닭을 주제로 대화할 수 있는 사람이었고, 1989년 백악관에서 열린 미국 보이스카우트 조찬 기도회에서는 조지 부시 미국 대통령과 대화 중에 잉글리시 스프링어 스패니얼[영국 사냥개의 일종—옮긴 이]을 좋아한다는 공통점을 발견하기도 했다.67

아들인 클라크와 낚시 여행을 간 토마스 에스 몬슨

물론 그의 가장 큰 관심사는 가족이었다. 그의 가족은 여덟 명의 손주와 열두 명의 증손주로 구성원이 늘어났다. 몬슨 회장이 집에서 지낸 시간은 많지 않았지만, 그의 자녀들은 아버지와 함께 게임, 낚시, 오리 사냥, 정원 풀 뽑기, 영화 보러 가기, 수영, 썰매 타기 등을 한 것들을 기억한다.68 몬슨 회장의 아들 톰에게는 두 가지 각별한 기억이 있다. 어린 시절 아버지와 함께 체커 게임을 하던 것과 기초 군사 훈련 중에 폐렴에 걸린 자신을 축복하기 위해 아버지가 켄터키주 루이빌까지 비행기를 타고 왔던 것이다.69 딸인 앤은 일요일 저녁이면 교회 일을 마치고 돌아온 아버지가 가족들에게 들려주던 이야기를 좋아했다. 클라크는 아버지가 차를 돌려, 가던 길에서 65킬로미터나 떨어진 유타 랜돌프 근처까지 가서 매 둥지를 보게 했던 날을 특별하게 기억한다.70 몬슨 회장은 잔디 깎는 일을 좋아했으며, 집 지하실에서 벌이는 가족 탁구 경기에 참여하는 것도 즐겼다.71

제일회장단의 일원

제일회장단인 에즈라 태프트 벤슨과 고든 비 힝클리, 그리고 토마스 에스 몬슨

고든 비 힝클리 회장과 에즈라 태프트 벤슨 회장을 비롯해 세 분의 교회 회장 보좌로 봉사한 몬슨 회장.

토마스 에스 몬슨 회장은 22년 동안 제일회장단에서 봉사했다. 1985년에 에즈라 태프트 벤슨 회장의 제2보좌로 처음 부름받아서 1994년 하워드 더블유 헌터 회장 때까지 제일회장단 제2보좌로 봉사했다. 또한, 1995년부터 2008년까지 13년 동안 자신을 제1보좌로 부른 고든 비 힝클리 회장 곁에서 봉사했다.72 몬슨 회장은 제일회장단 재임 시절에 교회 관리 부서에서 쌓았던 다양한 이력을 활용했으며 업무량이 많아 사무실을 떠나기가 어려울 정도였다. 고든 비 힝클리 회장은 교회 역사상 가장 많은 곳을 다녔던 회장이었으며, 이 관리 업무는 극도로 분주한 일이었다. 소규모 성전으로 성전 건축 속도가 급격히 빨라졌으며, 수천 명의 회원들이 연차 대회 및 다른 행사들에 참석할 수 있도록 대형 컨퍼런스 센터가 건립되었고, 위성 방송을 통해 전 세계 훈련 모임이 시작되었으며, 유타 대학교의 라이스-에클스 스타디움에서 열린 축하의 날에는 솔트레이크밸리와 와이오밍에서 온 42,000명의 청소년이 조셉 스미스 탄생 200주년을 기념하는 공연을 펼쳤다.73

그러나 십이사도 정원회의 로널드 에이 래스번드 장로의 말처럼, 몬슨 회장은 “사람을 앞에 두고 바쁜 적은 없었다.”74 2000년 겨울, 그는 아내와 함께하기 위해 모든 것을 잠시 중단했다. 프랜시스가 크게 넘어지는 사고를 당한 뒤, 몬슨 회장은 여러 주 동안 아내의 병실을 지키며 업무를 보았고 마침내 의식이 돌아온 프랜시스가 처음으로 한 말은 “이번 분기 세금을 냈어야 하는데 깜빡했어요.”였다고 한다.75 그는 처치 뉴스의 기자인 게리 아반트에게도 친절을 베풀었다. 몬슨 회장의 방문 기사를 자주 작성했던 게리 아반트에게 한번은 몬슨 회장이 “일을 열심히 한다”며 자신들과 함께 관광하자고 권하기도 했다.76

교회 회장

고든 비 힝클리 회장이 2008년 1월 27일에 서거했다. 제일회장단이 해체되고 몬슨 회장은 십이사도 정원회 회장으로 돌아왔다. 철로 근처에서 자랐으며, 어린 시절에는 짓궂은 장난을 꾸미곤 했고, 대공황기 때조차도 변변찮은 것이나마 자신이 가진 것들을 기꺼이 나누던 그 사람이 곧 전 세계 수백만 후기 성도의 지도자가 될 터였다. 그는 2008년 4월 연차 대회 중에 열린 성회에서 교회 회장으로 지지받기 직전에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살면서 인생이 어떻게 흘러갈지를 생각해 본 적이 없습니다. 힝클리 회장님께서 저보다 오래 사실 수도 있었습니다. 저는 항상 이런 생각으로 살아왔습니다. ‘부름받았던 곳이나 부름받게 될지도 모르는 곳이 아니라 부름받은 곳에서 봉사하자. 부름받은 곳에서 봉사해야 한다.’”77

기자 회견을 하는 토마스 에스 몬슨과 보좌들

2008년 2월 3일 월요일에 교회의 제16대 회장으로 성별되고 성임된 토마스 에스 몬슨 회장은 제1보좌로 헨리 비 아이어링 회장을 지명했다. 제2보좌로는 여러 언어를 사용하는 독일 출신 개종자로 2004년부터 십이사도 정원회의 일원으로 봉사했던 디이터 에프 우흐트도르프 회장을 지명했다. 새로운 제일회장단은 확장하는 교회의 범세계적인 성격을 상징적으로 드러냈다.78 2008년 2월 4일 화요일 기자 회견에서, 몬슨 회장은 기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전했다. “우리 교회는 교회 회원들에게만 손을 내밀지 않습니다.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에 뿌리를 둔 형제애 정신으로 전 세계 있는 선한 사람들에게도 손을 내밉니다.”79

이러한 인류애와 타인에게 내미는 손길은 몬슨 회장의 교회 운영의 전형적인 특징이 되었다. 교회 지도자들은 인도주의 사업 및 도덕적 대의 수호를 위해 가톨릭, 복음주의 기독교, 여타 종교 및 지역 단체들과 정기적으로 협력했다. 교회 지도자들은 다른 종교의 지도자들을 초대하여 교회 대학에서 연설하도록 부탁했고 온라인 자료를 활용하여 종교의 자유에 대한 지원을 강화했다.80 또한, 몬슨 회장과 십이사도 정원회 일원들은 교회 회원들에게 종교가 다른 사람들에게도 손을 내밀어 봉사하며 지역 사회를 구축하도록 격려했으며, 전 세계 이재민 및 난민들의 막대한 필요 사항을 해결하는 차원에서 기존의 다른 기관들과 인도주의 관계를 강화하였다. 몬슨 회장의 재임 첫 5년 동안, 교회는 아이티의 지진과 일본의 쓰나미, 태국의 홍수 여파 속에서 구호 활동을 벌였다. 또한, 오지에 깨끗한 물을 공급하고 국제적인 식량난을 완화하며 미국 내에서 재난 구호 활동을 벌이는 등 개발도상국 국민들의 면역력 증강에도 힘을 보탰다. Slate.com은 교회의 이러한 국제적인 구호 활동과 영향력을 인정하여 2009년에 미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80세 이상의 80인 가운데 몬슨 회장을 1위로 선정하였다.81

퍼레이드에서 손을 흔들고, 마들렌 성당에서 연설을 하는 토마스 에스 몬슨

한편, 몬슨 회장의 지도 아래, 교회는 다른 사람들에게 다양한 후기 성도들에 대해 더 널리 알리려는 홍보 활동을 시작했다. “저는 몰몬입니다” 캠페인은 할리 데이비슨, 미국 의회 도서관, 록 밴드 등 다양한 조직에서 일하는 후기 성도의 모습을 담아냈다. 교회 본부는 청소년과 일반 사람들을 위한 웹사이트를 개설했으며, 교회 소유의 BYUtv 채널 및 웹사이트에서는 다양한 시청자들에게 다가가고자 평론가들의 호평을 받은 프로그램을 제작하기 시작했다. 교회 웹사이트에는 다른 종교를 믿는 사람들도 감상할 수 있도록 신약에 나오는 이야기들을 담은 여러 편의 고화질 영상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다른 온라인 자료에는 복잡한 사안들을 명확하고 학술적으로 다루고자 고안되어 수록된 여러 복음 주제 글이 있고, 동성애자인 후기 성도와 그 가족들의 개인적인 이야기 및 관련 교회 가르침을 제공하는 몰몬과 동성애자 웹사이트도 있다.

그러나 몬슨 회장 재임기에 일어난 가장 큰 변화는 역사적으로도 놀라울 만큼 관리 방식이 발전된 일일 것이다. 이 중대한 변화는 교회가 인도하고, 기능하고, 가르치며, 전도하는 방식에 영향을 미쳤다. 교회는 2009년에 복지 원리를 다루는 DVD와 팸플릿을 배부했으며, 2010년에는 교회 지도자들이 사용할 새로운 지침서를 발행했고, 그와 함께 전 세계에 두 차례의 훈련 모임을 방송했다. 새로운 지침서에서는 개방적이고 진솔한 토론을 통해 평의회에서 일하는 것과 위임을 통해 감독의 부담을 더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도 교회 회원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참된 제자가 되도록 돕는 것 등이 강조되었다. 또한, 2010년에는 십이사도 정원회 회원들이 이끄는 전 세계 훈련 모임에 인도주의 봉사, 복지 필요 사항, 선교 사업, 성전 사업을 포괄적으로 살펴보는 신권 지도자 대회 및 지역 검토가 도입되기 시작했다.

몬슨 회장의 지도 아래 가장 극적으로 발전한 일 중 하나는 2012년 10월 연차 대회에서 발표된 지침으로, 이때 몬슨 회장은 남성은 만 18세, 여성은 만 19세가 되면 전임 선교사로 봉사할 수 있다고 공표했다. 이렇게 유례없이 선교사 연령 제한을 낮춤으로써 선교 정책에 변화가 생기자 선교 사업에 대한 열의가 번졌고, 그 결과 역사상 가장 많은 남성과 특히 여성들이 전임 선교사로 봉사하게 되었다. 선교사들의 숫자가 증가하면서 새로운 선교사 훈련원과 새로운 선교부가 문을 열었고, 2014년 말 선교사 수는 85,000명에 달했다. 회원들도 선교 사업을 위해 가정에서 자녀들을 더욱 잘 준비시키고 지역의 선교사 프로그램에 더욱 온전히 참여하며 “구원 사업을 서두르는 일”에 동참했다.(교리와 성약 88:73 참조) 선교사로 봉사할 수 있는 연령이 변경된다는 발표로 진보적이고 혁신적이며 활력이 넘치는 분위기가 조성된 데 더해 지도자 격인 자매 선교사를 뜻하는 “자매 훈련 지도자”가 생겼고, 기술 및 온라인을 활용한 전도도 시작되었다.

젊은 여성들이 더 어린 나이에 선교사로 봉사하게 된 것은 몬슨 회장 재임기에 여성들을 지도자의 역할 및 의사 결정, 그리고 와드 및 스테이크 평의회에 더 깊이 관여하게 하려는 지속적인 노력과 꼭 들어맞았다. 모든 경륜의 시대에, 특히 구주께서 성역을 베푸시던 때와 1830년부터 현재까지 회복의 기간에, 복음에서 자매들이 맡았던 막중한 역할을 후기 성도 여성과 남성들이 더 깊이 이해할 수 있도록, 교회는 내 왕국의 딸들을 펴내어 가정과 상호부조회, 그리고 청녀 및 여러 정원회에서 이 책을 활용할 것을 권장했다. 2014년에는 상호부조회 총회와 청녀 총회를 대체하는 연차 대회 여성 총회가 시작되었으며, 8세 이상의 모든 여성이 매년 두 차례 열리는 이 모임의 참여 대상이다.

무엇보다도 청소년들을 온전히 복음에 참여할 수 있도록 돕는, 더 나은 그리고 더 많은 상호 작용 교수법이 또한 몬슨 회장의 행정 혁신에서 높은 우선순위가 되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온전히 돌이키고자 노력하는 청소년들을 축복하고자”82 2013년에 도입한 청소년 교과 과정인 와서 나를 따르라는 교사와 청소년 모두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방법으로 가르치는 더 나은 방법을 제시했다. 이 교과 과정은 온라인 자료와 청소년들의 참여, 그리고 영으로 인도되는 토론을 활용하여 신앙을 기르고 복음을 이해하도록 이끌었다. 교회 내 모든 가르침을 향상하고자 하는 비슷한 노력으로 2016년에 새 자료인 구주께서 보여 주신 방법으로 가르침과 와드 월례 교사 평의회 모임이 도입되었다.

성전 초석을 놓는 의식에 참여한 토마스 에스 몬슨

성전 초석에 회반죽칠을 한 몬슨 회장과 한 소녀 필리핀 세부시티 성전 정초식에서 몬슨 회장의 피아노 연주를 즐겁게 듣고 있는 필리핀 회원들.

몬슨 회장이 재임하는 동안에도 계속하여 전 세계에 건축될 새로운 성전이 발표되었다. 몬슨 회장은 필리핀 세부, 브라질 쿠리치바, 우크라이나 키예프, 파나마 파나마시티, 미주리 캔자스시티 등을 포함해서 세계의 여러 지역을 다니며 성전 헌납식과 재헌납식에 참석했다. 2013년에 회원들이 조상을 찾는 데 도움이 될 온라인 자료가 소개되자, 회원들이 성전 의식을 위해 제출하는 가족 이름이 11퍼센트 증가했으며, 2013년은 “성공적인 가족 역사의 해”로 불렸다.83

십이사도 정원회의 제프리 알 홀런드 장로는, 토마스 몬슨이라는 교회 지도자는 아무리 시간이 빠듯해도 “평사원의 장례식에 미리 알리지도 않고 나타나는 사람이었는데, 개인에 대한 그런 관심보다 몬슨 회장의 성역을 더 잘 설명할 말은 없을 것이다.”84라고 말했다.

토마스 에스 몬슨, 그리고 그의 아내와 딸

연차 대회 모임을 마치고 나서는 몬슨 회장 부부와 딸.

2013년 5월 23일, 몬슨 회장은 5월 17일에 솔트레이크 병원에서 생을 마감한 사랑하는 아내 프랜시스의 장례식을 감리했다. 그는 장례식에서 “아내는 결혼하던 그날부터 저를 지지해 주었습니다.”라고 말하며 아내를 “이상적인 아내이자 어머니”로 칭했다.85 몬슨 회장은 아내 없이 회장 재임을 마쳤고 특별한 행사에는 딸인 앤을 동반하기도 했다.

몬슨 회장이 재임하는 동안,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을 강화하기 위해 안식일을 더욱 온전히 준수해야 된다는 점이 강조되었다. 2015년부터 교회의 모든 조직과 가정에서는 회원들이 주님께 집중하고 그분과 맺은 성약에 집중함으로써 “안식일을 즐거운 날”로(이사야 58:13) 만들어 충실한 사람들이 약속된 축복을 받을 수 있도록 촉구하는 통합적이며 지속적인 노력을 쏟기 시작했다.

몬슨 회장은 교회에서 멀어진 사람들도 늘 염두에 두었으며 절대로 그들을 왕국에 적합하지 않은 사람으로 대하지 않았다. 20년 동안 교회에서 멀어져 있던 한 노인이 교회로 돌아오는 문제를 두고 조언을 구하려고 한 총관리 역원을 찾아왔을 때, 그는 교회로 돌아오겠다는 자신의 소망에 불을 지핀 편지를 꺼내 들었다. “형제님은 충분히 오랫동안 교회에서 멀어져 있었습니다. 이제 돌아올 시간이에요, 톰 드림.”86 몬슨 회장에 따르면, “모든 사람은 아주 조금이라도 성도가 될 자질이 있습니다. 저는 그런 것을 찾으려고 합니다.”87

교회의 회장으로서도 몬슨 회장은 다른 이들과 우의가 돈독했다. 십이사도 정원회의 엘 톰 페리(1922~2015) 장로는 이렇게 전했다. “그분을 만나면, BYU 경기나 유타 재즈[유타주가 연고지인 농구팀-옮긴 이] 이야기를 하실 겁니다. 대단한 스포츠 팬이시거든요. 그러고는 업무 이야기를 시작하실 겁니다.”88 또한, 몬슨 회장은 항상 유머 감각을 잃지 않았다. 몬슨 회장은 2009년 몰몬 태버내클 합창단원들과 만난 자리에서 초대형 오르간 앞에 앉아 초보자용 피아노 교본에 나오는 “To a Birthday Party”를 연주했다.89 2013년, 교회는 “스카우트 100주년”을 기념하며 일평생 스카우트를 지원한 몬슨 회장에게 경의를 표하는 프로그램도 함께 진행했다. 스카우트 활동은 몬슨 회장의 여러 관심사 중 하나로서 끊임없이 자신과 친구들을 이어 주는 일이었으며, 친구들을 위로하고 행복하게 해 주기를 좋아했던 몬슨 회장은 종교와 관계없이 스카우트에 몸담은 모든 사람이 그 일에 동참하기를 권고했다.

스카우트 대원들 및 지도자와 함께한 토마스 에스 몬슨

몬슨 회장은 1997년 인터뷰에서, “주님께서 팔꿈치로 슬쩍 찌르시는 듯한 느낌, 바로 영의 속삭임”이 자신에게 가장 큰 기쁨을 가져다준다고 말했다. 특히, 병원에 있는 아버지를 문병 갔다가 다음 모임에 참석하려고 서두르던 중인데도 엘리베이터 근처에서 기다려야 한다는 느낌을 받았던 때가 그런 경우였다. 그는 사경을 헤매는 어머니를 축복해 달라는 한 가족의 부탁을 들어주었다. 그날 늦게, 몬슨 회장은 그가 축복한 뒤 그 가족들 모두가 어머니에게 입을 맞추고 평화롭게 작별 인사를 나눈 다음에 그 어머니가 숨을 거뒀다는 소식을 들었다.90

몬슨 회장은 이렇게 말했다. “영의 속삭임에 귀 기울인 덕분에 제 인생에는 늘 그런 일이 일어났습니다.” 토마스 몬슨을 만났던 사람들의 이야기 중에는 회자된 것도 있고 그렇지 못한 것도 있겠지만, 이 놀라운 사람과 하나님의 관계를 증명할 수 있는 사람은 셀 수 없이 많다. 다음 말씀은 몬슨 회장에게 반영되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여러분이 누구인지 알고 계시다는 것에 더욱 감사하십시오. 그러면 그분은 ‘자, 가서 나를 위해 이를 행하거라.’라고 말씀하실 것입니다. 저는 항상 그분께 감사드립니다.”91

몬슨 회장은 언제나 변함없이 세상에 이렇게 증언했다. “제 온 마음을 다해 영혼의 간절함으로, 저는 특별한 증인으로서 하나님께서 살아 계시다는 것을 소리 높여 간증드리고 선언합니다.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아버지의 독생자이십니다. 그분은 우리의 구속주이시며, 우리와 아버지 사이의 중보자이십니다. 우리 죄를 속죄하시려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것은 그분이시며, 그분은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습니다. 그분께서 돌아가셨기 때문에 모든 사람이 다시 살게 될 것입니다. 아, 이 말은 얼마나 따뜻한 기쁨을 전해 줍니까! ‘내 구주 살아 계시다.’[찬송가, 68장] 온 세상이 이 사실을 알고 그 지식에 따라 생활할 수 있기를 … 간구합니다.”92

  1. 토마스 에스 몬슨 회장, “기뻐하라”, 리아호나, 2009년 5월호, 92쪽.

  2. 그레고리 파킨 박사와 주고받은 이메일, 2008년 9월 2일.

  3. “A Life Guided by Service”, Deseret News, general conference special supplement, Apr. 1, 2008, 4; 또한 제프리 알 홀런드, “주의 심부름꾼 토마스 에스 몬슨”, 성도의 벗, 1986년, 10월호, 17쪽 참조.

  4. 아들 Tom MonsonJoshua Perkey에게 보낸 이메일, Church Magazines, Feb. 19, 2008.

  5. Heidi S. Swinton, To the Rescue: The Biography of Thomas S. Monson (2010), 518.

  6. Gerry Avant, “President’s Heartfelt Efforts Universal”, Deseret News, Feb. 7, 2008, M6.

  7. “A Life Guided by Service”, 4.

  8. “Speaking from Experience”, Deseret News, Feb. 7, 2008, M4.

  9. Carrie A. Moore, “LDS Leader Has Fond Memories of Growing Up in the S.L. Area,” Deseret News, Feb. 5, 2008, M3.

  10. Gerry Avant, “On Lord’s Errand since His Boyhood”, Church News, Feb. 9, 2008, 5.

  11. 이 글에 나오는 대부분의 일대기 정보는 스윈튼의 To the Rescue에서 발췌했다.

  12. Swinton, To the Rescue, 50–51 참조.

  13. Heidi S. Swinton, “Baseballs and Service,” Friend, Sept. 2012, 2 참조.

  14. Swinton, To the Rescue, 35 참조.

  15. 제프리 알 홀런드, “토마스 에스 몬슨 회장: 주님의 발자취를 따라”, 리아호나, 2008년 6월호, 특별 부록 8쪽.

  16. “In His Own Words”, Deseret News, general conference special supplement, Apr. 1, 2008, 7.

  17. Swinton, To the Rescue, 58 참조.

  18. 토마스 에스 몬슨, “순종은 축복을 가져옵니다”, 리아호나, 2013년 5월호, 89~90쪽.

  19. Moore, “LDS Leader Has Fond Memories,” M3; “A Life Guided by Service,” 5 참조.

  20. Swinton, To the Rescue, 74–75 참조.

  21. Swinton, To the Rescue, 63–65 참조.

  22. Swinton, To the Rescue, 78 참조.

  23. Moore, “LDS Leader Has Fond Memories”, M3.

  24. Swinton, To the Rescue, 79, 87 참조.

  25. Swinton, To the Rescue, 89, 288 참조.

  26. Moore, “LDS Leader Has Fond Memories”, M3.

  27. Swinton, To the Rescue, 90 참조.

  28. Swinton, To the Rescue, 92 참조.

  29. 토마스 에스 몬슨, “용감하게 홀로 서라”, 리아호나, 2011년 11월호, 60쪽, 번역 수정.

  30. “Speaking from Experience”, M5.

  31. Swinton, To the Rescue, 99.

  32. Moore, “LDS Leader Has Fond Memories”, M3.

  33. “A Life Guided by Service”, 5.

  34. Swinton, To the Rescue, 144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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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6. Swinton, To the Rescue, 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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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9. Gary Bell, in “Recollecting,” Deseret News, Feb. 5, 2008, M3 참조.

  40. Swinton, To the Rescue, 175–76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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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5. Swinton, To the Rescue, 224 참조.

  46. Swinton, To the Rescue, 530–32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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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8. Swinton, To the Rescue, 293–94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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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0. Swinton, To the Rescue, 309, 313, 333–34 참조.

  51. Swinton, To the Rescue, 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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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3. 제프리 알 홀런드, “토마스 에스 몬슨 회장: 주님의 발자취를 따라”,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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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2. Joseph F. Dougherty, “LDS Leader Also Lifelong Scouter,” Deseret News, Feb. 7, 2008, M6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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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5. 토마스 에스 몬슨, “인생 여정에서 기쁨을 찾음”, 리아호나, 2008년 11월호, 85쪽.

  66. Swinton, To the Rescue, 4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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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0. Jeffrey R. Holland, “Man of Action, Man of Faith,” 17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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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2. Swinton, To the Rescue, 532–33 참조.

  73. Swinton, To the Rescue, 471, 472, 478, 484, 485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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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7. Gerry Avant, “Church President to Be Sustained in Solemn Assembly,” Church News, Apr. 5, 2008, 3–4; 또한 lds.org/church/news/oct-4-is-president-monsons-50-year-anniversary-as-apostle 참조.

  78. Swinton, To the Rescue, 496 참조.

  79. Thomas S. Monson, “The Lord’s Work,” Church News, Feb. 9, 2008, 3.

  80. “교회가 종교의 자유에 관한 새로운 자료를 내보내다”, mormonnewsroom.org/article/religious-freedom-resources 참조.

  81. Swinton, To the Rescue, 515 참조.

  82. 제일회장단 서신, 2012년 9월 12일.

  83. Paul G. Nauta, “2013 Was a Banner Year for Family History[2013년, 성공적인 가족 역사의 해]”, lds.org/church/news/2013-was-a-banner-year-for-family-history.

  84. Swinton, To the Rescue, 502.

  85. Gerry Avant, “Sister Frances J. Monson Was ‘the Ideal Wife and Mother,’” lds.org/church/news/sister-frances-j-monson-was-the-ideal-wife-and-mother.

  86. Swinton, To the Rescue, 504.

  87. Swinton, To the Rescue, 504.

  88. Swinton, To the Rescue, 512.

  89. Swinton, To the Rescue, 515 참조.

  90. Gerry Avant, “Oct. 4 Is President Monson’s 50-Year Anniversary as Apostle,” lds.org/church/news/oct-4-is-president-monsons-50-year-anniversary-as-apostle.

  91. Gerry Avant, “Oct. 4 Is President Monson’s 50-Year Anniversary as Apostle,” lds.org/church/news/oct-4-is-president-monsons-50-year-anniversary-as-apostle.

  92. 토마스 에스 몬슨, “내 구주 살아 계시다!리아호나, 2007년 5월호, 25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