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명서와 복수결혼의 종료
19세기 대부분의 기간 동안 예수 그리스도 후기 성도 교회의 상당수 회원들이 복수결혼, 즉 한 명의 남성이 한 명 외에 그 이상의 여성과 결혼했다. 복수결혼의 시작과 종료는 하나님께서 선지자들을 통해 주신 계시에 따른 것이었다. 처음에는 복수결혼을 시행하라는 명령이 이 교회의 첫 번째 선지자이자 회장인 조셉 스미스를 통해 왔다. 1890년에 윌포드 우드럽 회장이 성명서를 발표했고, 결국 이 교회에서의 복수결혼은 종료되었다.
복수결혼이 종료되기까지 개개의 회원들과 교회 지도자들은 큰 신앙을 발휘하고 때로는 복잡하고, 고통스러우며, 매우 개인적인 결단을 내려야만 했다. 교회에서 복수결혼을 시작했을 때와 마찬가지로 종료 또한 한 번의 사건이라기보다 과정이었다. 계시는 “말씀에 말씀을, 교훈에 교훈을 더하여”1 왔다.
반일부다처제 법과 시민 불복종
1840년대 초반부터 반세기 동안 교회 회원들은 복수결혼을 하나님의 계명, 즉 주님을 위해 의로운 자손을 “일으키[는]”2 데 기여하는 명령으로 여겼다. 교회의 모든 회원에게 복수결혼이 허락된 것은 아니었지만 그것을 시행한 사람들은 자신들이 그런 참여를 하는 것에 대한 축복을 받게 될 것이라고 믿었다. 1850년대와 1880년대 사이에 많은 후기 성도들은 남편, 아내, 또는 자녀로서 복수의 가족을 이루며 살았다.3
세계의 여러 지역에서는 일부다처제가 사회적으로 용인되었으며 법적으로도 허용되었다. 하지만 미국에서는 대부분 사람들이 그런 행위를 도덕적으로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런 거부감은 결과적으로 일부다처제를 종식시키려는 입법 활동으로 이어졌다. 1862년을 시작으로 미국 정부는 후기 성도들이 복수결혼을 단념하도록 강제하기 위해 일련의 법률을 통과시켰다.4
이런 법적 조치에 직면하자 후기 성도들은 복수결혼이 미국 헌법이 보장하는 종교적 원리라고 주장했다. 교회에서는 강력한 법적 항변을 개시하여 그 사안이 미국 대법원에 상정되기에 이르렀다. 레이놀즈 대 미국(1879년) 소송에서 대법원은 후기 성도들에게 불리한 판결을 내렸다. 즉 종교적 믿음은 법률의 보호를 받았으나, 종교적 관행에 대해서는 그렇지 못했던 것이다. 법원의 견해에 따르면, 결혼은 정부에서 규정한 민사적 계약이었다. 그리고 정부가 인가한 유일한 결혼 형태는 일부일처제였다. 법원은 “일부다처제가 유럽의 북부 및 서부 지역 국가들 사이에서 늘 혐오해 온 제도”5라고 설명했다.
후기 성도들은 미국을 그 기반이 신성한 나라로 여겼기 때문에 진정으로 충성스러운 국민이 되기를 원했다. 하지만 그들은 또한 복수결혼을 하나님이 주신 계명으로 받아들였기에 자신들이 하나님의 계명을 따를 권리를 법원이 부당하게 박탈했다고 여겼다.
이런 모순적인 충성에 직면하자 교회 지도자들은 회원들에게 인간보다는 하나님께 순종하도록 권했다. 많은 후기 성도들은 1880년대 동안 계속 복수결혼 생활을 하고 또한 새로 복수결혼을 함으로써 시민 불복종 운동을 시작했다.6 연방정부는 이에 응하여 처벌을 더욱 강화하는 법률을 제정했다.
1850년과 1896년 사이에 유타는 미국 정부의 준주였다. 그 말은 워싱턴 디시에 있는 연방 관리들이 현지 사안에 대해 커다란 지배력을 행사했음을 의미했다. 1882년에 미국 의회는 에드먼즈 법을 통과시켜, 불법 공동 생활(한 명 외의 그 이상의 아내와 함께 생활하는 남성으로 해석됨)에 대해 6개월 간의 구금과 300달러의 벌금형을 내릴 수 있게 되었다. 1887년에 의회는 교회 회원이 아닌 교회 자체를 처벌하기 위해 에드먼즈 터커 법을 통과시켰다. 그 법에 따라 교회 법인이 해체되었으며 5만 달러 이상의 모든 교회 자산은 정부에서 몰수했다.
정부의 이 반대 조치로 성도들은 자신들이 부당하다고 여기는 법에 대해 저항하겠다는 의지를 더욱 굳히게 되었다. 일부다처제를 하는 남성들은 피신을 했는데 때로는 한 번에 수년간 숨어서 지내기도 하고, 집마다 옮겨 다니며 친구 및 친척들과 함께 지내기도 했다. 또 다른 이들은 가명을 사용하며 유타 남부, 애리조나, 캐나다, 멕시코의 벽지로 이주했다.7 많은 이들은 기소를 면했지만, 체포되었을 때 유죄를 인정하며 벌금형과 감금을 받아들인 이들도 많았다.
이 반일부다처제 운동은 몰몬 사회에 큰 분열을 일으켰다. 남편들이 떠나자 뒤에 남은 아내와 아이들은 농장과 사업체를 돌보아야 했기에 수입은 감소하고 경기는 후퇴하기 시작했다. 또한 반일부다처제 운동으로 가족들은 압박감에 시달리게 되었다. 새로 복수결혼을 한 아내들은 결혼한 남편과 떨어져 살아야 했으며, 그들의 은밀한 결혼은 소수의 사람들에게만 알려졌다. 임신한 여성들은 종종 몸을 숨겨야 했는데, 소환장을 받아 법정에서 남편에게 불리한 증언을 하는 위험보다는 외딴 장소로 숨는 쪽을 택한 것이었다. 자녀들은 자신의 가족들이 해체되거나 자신의 부모에게 불리한 증언을 하도록 강요당할까 봐 두려움에 떨며 살았다. 어떤 자녀들은 몸을 숨기고 가명을 사용하며 살았다.8
셀 수 없이 많은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많은 후기 성도들은 반일부다처제 운동이 하나님의 목적을 성취하는 데 유용했다고 확신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과거 시대에 그러하셨듯이 그분의 성약의 백성들을 겸손하게 하시고 정결하게 하셨다고 간증했다. 유타 주 프로보의 감독인 마이런 태너는 “부모들에게 드리운 탄압의 손이 그 어떤 것보다도 우리 자녀들에게 몰몬이즘의 진리를 확신시키는 데 더 많은 기여를 하고 있다”9라고 느꼈다. “양심 때문에” 투옥된 사람들은 결과적으로 많은 이들을 교화하는 역할을 했다. 제일회장단의 보좌 조지 큐 캐넌은 유타 교도소에 5개월간 수감되었다가 석방된 후 이렇게 기록했다. “내 감방은 천국의 한 장소 같았으며, 천사들이 그곳에 있었음을 느낀다.”10
반일부다처제 운동이 진행되는 동안 두 개의 성전을 완공하여 헌납하였으며, 그것은 놀라운 성취였다.11 그러나 연방 정부의 탄압이 격렬해지면서 교회 행정의 여러 필수적인 부분들이 축소되었으며, 시민 불복종은 점점 더 장기적인 해결책이 될 수 없는 것으로 여겨졌다. 1885년과 1889년 사이에 대부분의 사도와 스테이크 회장들은 피신하거나 수감되어 있었다. 연방정부 요원들이 에드먼즈 터커 법에 따라 교회 자산을 압류하기 시작한 이후로 교회 관리는 더욱 어려워지게 되었다.12
성명서
법률 수정에 대한 교섭이든 그 비참한 결과를 피하려는 것이든 간에 20년 간 노력을 해왔던 교회 지도자들은 새로운 대안을 강구하기 시작했다. 1885년과 1886년에 그들은 일부다처제를 시행하는 가족들이 미국 법의 관할권 밖에서 평화롭게 살 수 있도록 멕시코와 캐나다에 정착촌을 세웠다. 교회 지도자들은 자신들의 입장을 완화하면 적개심이 줄어들 것이라는 바람으로 복수결혼을 한 남편들에게 그들의 아내 중 한 명하고만 공개적으로 생활하도록 권했으며, 복수결혼을 공개적으로 가르치지는 않는다고 주장했다. 1889년에 교회 당국은 유타에서 새로 복수결혼을 시행하는 것을 금지했다.13
교회 지도자들은 기도하는 마음으로 주님의 인도를 구했으며 자신들이 무엇을 해야 할지를 알고자 애썼다. 존 테일러 회장과 윌포드 우드럽 회장 모두 현재의 상황을 계속 유지하고 복수결혼을 단념하지 말라는 주님의 지시를 느꼈다.14
이 영감은 법적 보상의 길이 여전히 열려 있는 상황에서 주어졌다. 그 길은 1890년 5월에 미국 대법원이 에드먼즈 터커 법의 합법성을 확정하며 교회 자산을 몰수하도록 허가함으로써 닫히고 말았다. 그러자 우드럽 회장은 교회의 성전들과 그 의식이 위험에 처했음을 알게 되었다. 그 위협으로 마음이 무거워진 그는 그 문제에 대해 집중하여 기도했다. 그는 이후에 복수결혼에 대해 언급하며 이렇게 말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이 실행을 중지하지 않으면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인가를 시현과 계시로서 내게 정확하게 보여 주셨습니다. …… 모든 성전을 우리 손에서 떠나가게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내게 해야 할 바를 정확히 말씀해 주셨으며, 우리가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어떤 결과를 맞이하게 될지도 알려주셨습니다.”15
1890년 9월 25일, 우드럽 회장은 일지에 자신이 “교회의 현세적 구원을 위해 행동할 필요가” 있었다고 기록했다. 그는 이렇게 언급했다. “나는 주님께 기도하고 그분의 영을 통해 영감을 받은 후에 …… 선언문을 발표했다.”16 현재 교리와 성약에 공식선언 1로 실린 이 선언문은 9월 25일에 공표되었으며 성명서로 알려지게 되었다.17
이 성명서는 미국 정부와의 직접적인 충돌에 대처하기 위해 신중하게 단어를 사용했다. 우드럽 회장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일부다처제 또는 복수결혼을 가르치고 있지 아니하고, 어떠한 자에게도 이의 실행을 허용하고 있지 아니하며, …… 복수결혼을 금하는 법률이 의회에 의하여 제정되었고 그 법률이 대법원에 의하여 합헌이라고 선언된 만큼, 이로써 본인은 그 법률에 따르고자 하며, 본인이 감리하는 교회 회원들도 똑같이 행하도록 그들에 대한 나의 영향력을 행사하겠다는 본인의 뜻을 선언하는 바이다.”18
십이사도 정원회의 회원들은 그 성명서에 대해 다양한 반응을 보였다. 프랭클린 디 리차즈는 그것이 “주님의 일”임을 확신했다. 프랜시스 엠 라이먼은 “그는 처음 그 성명서를 들었을 때 온전히 찬성했다”19라고 전했다. 십이사도 전원이 곧바로 그 성명서를 받아들인 것은 아니었다. 존 더블유 테일러는 처음에는 “그것이 정말로 옳다고 여기지는 않았다”20라고 말했다. 존 헨리 스미스는 “그 성명서를 듣고 마음이 무척 어지러웠으며” 자신은 아직도 “약간 확신이 서지 않았다”라고 솔직하게 인정했다.21 그러나 일주일이 채 지나기 전에 십이사도 전원이 그 성명서에 지지 의사를 표시했다.
그 성명서는 1890년 10월, 솔트레이크 태버내클에서 개최된 반연차 대회에서 교회 회원들에게 정식으로 발표되었다. 10월 6일 월요일에 솔트레이크시티의 감독인 올슨 에프 휘트니는 연단에 서서 신앙개조를 낭독했는데, 거기에는 후기 성도들이 “법률을 순종하고 존중하며 지지할 것”을 믿는다는 문구가 포함되어 있었다. 이 신앙개조는 거수로 지지되었다. 그런 다음 휘트니는 그 성명서를 낭독했으며, 십이사도 정원회의 회장인 로렌조 스노우는 그 성명서를 “권위가 있으며 지켜야 할 의무가 있는 것”으로 받아들일 것을 제안했다. 그런 후 그 모임에서 그 제안을 표결에 부쳤다. Deseret News에서는 그 표결이 “만장일치”였다고 보도했다. 즉, 몇몇 사람은 기권했지만 대부분은 찬성 표시를 했다.22
후기 성도 평회원들은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유보적으로 그 성명서를 받아들였다. 많은 이들은 복수결혼을 종식시킬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본부 상호부조회 회장인 지나 디 에이치 영은 그 성명서가 교회 회원들에게 발표된 날에 쓴 일지에서 그 순간의 괴로움을 이렇게 기록했다. “오늘 모든 이들의 마음이 시험을 받았지만 모두 하나님을 바라보고 순종했다.”23 그 성명서는 향후 일부 관계들에 대한 불확실성을 불러일으켰다. 유지니아 워시번 라슨은 자신을 포함하여 다른 아내들과 아이들이 남편들에게 “내쫓기는” 일을 상상하면 “앞이 캄캄하다”고 토로하며 최악의 상황을 두려워했다.24 그러나 복수 결혼을 한 다른 아내들은 그 성명서에 대해 “큰 안도감”을 보였다.25
성명서 이후
후기 성도들은 주님께서 그분의 뜻을 “말씀에 말씀을 더하고, 여기에서 조금 저기에서 조금”26 계시해 주신다는 것을 믿는다. 프랭클린 디 리차즈의 말에 따르면 1890년에 살던 교회 회원들은 그 성명서가 “주님의 일”임을 대체로 믿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 성명서에 담긴 취지가 처음에는 완전히 드러나지 않았다. 그 범위가 정해져야 했으며, 그 일을 어떻게 착수하는 것이 가장 좋은가에 대한 견해도 당국자들마다 각각 달랐다. 사도인 히버 제이 그랜트는 이렇게 설명했다. “우리는 조금씩 현재의 위치에 이르게 되었습니다.”27 시간이 흐르고 연속적인 계시를 받고자 노력하는 가운데 교회 회원들은 그 성명서를 진행시키는 것에 관해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를 “점차” 알게 되었다.
처음에는 교회의 많은 지도자들이 그 성명서를 단순히 복수결혼을 무기한으로 “연기”하는 것으로 믿었다.28 그토록 오랫동안 복수결혼에 따라 생활하고, 가르치고, 그것을 감당해 왔기 때문에 그것이 없는 세상은 상상하기가 힘든 것이었다. 제일회장단의 보좌인 조지 큐 캐넌은 그 성명서를 성도들이 미주리에서 추방된 이후 1830년대에 그 주에서 성전들을 지으라는 계명을 주님께서 유예하셨던 것에 비유했다. 그 성명서가 연차 대회에서 지지된 직후, 캐넌은 설교를 하면서 주님은 그분의 계명을 수행하려고 열심히 노력하는 자들에게는 그들의 원수들에게서 방해를 받을 경우에만 다음과 같이 그 책임을 면제해 주신다는 성구를 인용했다. “보라, 그 사람의 아들들의 손에 더 이상 그 일을 요구하지 아니[함이] …… 내게 마땅하도다.”29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실질적인 문제들이 해결되어야만 했다. 그 성명서에는 기존에 복수결혼을 했던 가족들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언급은 없었다. 그 성명서의 결과로 자발적으로 헤어지거나 이혼하는 부부들도 있었지만, 그 밖의 남편들은 모든 아내와 공동 생활하기를 중단하고 그중 한 명하고만 함께 살되 모든 부양가족에게 재정적 및 정서적 지원을 계속 제공했다.30 현지 지도자들과 갖는 비공식적인 모임에서 제일회장단은 그 성명서를 구실 삼아 자신의 아내들을 떠난 남성들을 꾸짖었다. 우드럽 회장은 그 남성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저는 여러분이 아내들과 자녀들을 버리게 될 것이라고 약속하지도 않았으며, 할 수도 없으며, 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도의상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31
교회 지도자들을 포함하여 많은 남편들은 무엇보다도 자신이 하나님과 그리고 배우자와 함께 맺은 성약을 지켜야 한다고 믿었기 때문에 20세기까지 복수의 아내들과 함께 공동 생활을 하고 아버지로서 자녀들을 돌보았다.32 공동 생활을 계속하는 부부들은 그 성명서가 발표되기 전과 마찬가지로 기소당할 위협에 노출되었다. 하지만 이런 위협은 1890년 이후로 현저하게 감소했다. 그 성명서가 발표되면서 연방정부 및 국가와 새로운 관계가 형성되었다. 특히, 1893년에 미국 대통령 벤자민 해리슨이 일부 다처주의자들에게 일반사면을 내리자 일부다처제를 실행하는 사람들에 대한 기소가 감소했고, 복수결혼을 했던 아내들은 피신처에서 나와 남편의 성을 다시 사용하게 되었으며, 남편들은 좀 더 자유롭게 가족들과 교류하게 되었다.33 그리고 3년 후, 유타는 일부다처제를 금하는 규약을 받아들이고 하나의 주가 되었다.
그 성명서에는 미국의 법을 따르겠다는 우드럽 회장의 의향이 표명되었다. 그러나 거기에는 다른 국가들의 법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이 없었다. 멕시코와 캐나다에 정착지가 설립된 이래로 교회 지도자들은 그 나라들에서 복수결혼을 시행했으며, 1890년 10월 이후에도 그곳에서는 계속해서 복수결혼이 조용히 시행되었다.34 보통으로 이런 결혼들은 교회 지도자들이 장려하지는 않았으며 승인을 받기도 어려웠다. 일반적으로 이런 혼인을 하는 배우자들은 둘 중 하나 또는 두 사람 모두 캐나다 또는 멕시코에만 머물러 있겠다고 동의해야만 했다. 이례적인 상황으로, 1890년과 1904년 사이에 미국에서 적은 수의 사람들이 새로 복수결혼을 행했는데, 미국 내에서 그런 결혼을 하도록 허가를 받았는지에 대해서는 불분명하다.35
이 기간에 미국 안팎에서 새로 시행된 복수결혼의 정확한 수는 알려져 있지 않다. 이 기간에 작성된 인봉 기록에는 일반적으로 그 인봉이 일부일처인지 아니면 복수인지 여부가 명시되어 있지 않아 정확한 계산이 어렵다. 그러나 교회 서기들이 연대순으로 작성한 결혼 및 인봉 원장을 보면 그 숫자를 대략적으로 가늠해 볼 수 있다. 1880년대 후반과 1900년대 초반 사이에, 성전이 몇 개 없는데다 그 거리도 멀고 여정도 힘들었기 때문에 성전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살았던 후기 성도 부부들은 성전 밖에서 결혼하여 인봉되는 것이 허락되었다.
완전하지는 않지만 “성전 밖에서 행해진 결혼 및 인봉” 원장에는 1890년 10월 17일과 1903년 9월 8일 사이에 행해진 결혼이 315건으로 기록되어 있다.36 조사에 따르면 그 원장에 기록된 315건의 결혼 중 25건(7.9%)은 복수결혼이고 290건(92.1%)은 일부일처 결혼이었다. 기록되어 있는 거의 모든 일부일처 결혼은 애리조나 또는 멕시코에서 행해졌다. 25건의 복수결혼 중 18건은 멕시코에서, 3건은 애리조나에서, 2건은 유타에서, 그리고 콜로라도와 태평양 선상에서 각각 1건이 있었다. 종합적으로, 그 기록은 복수결혼 시행이 감소되고 있었으며 교회 지도자들은 그 성명서의 조항을 자신들이 이해한대로 지키며 올바른 양심에 따라 행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37
이런 결혼이 승인된 정확한 과정은 여전히 불분명하다. 한동안, 성명서 후의 복수결혼은 제일회장단 일원의 승인이 요구되었다. 그러나 제일회장단이 함께 그 결정을 내렸다는 결정적인 증거는 없다. 예를 들어 우드럽 회장은 새로 복수결혼을 하도록 허락해 달라는 요청을 캐넌 회장에게 맡겨 개인적으로 고려하게 했다.38 1890년대 후반까지 인봉을 집행할 권세가 있는 남성들 중 적어도 몇 사람은 분명히 제일회장단과는 관계없이 자기 재량으로 복수결혼 요청을 받아들이거나 거부할 수 있다고 여겼다. 예를 들어 사도인 히버 제이 그랜트는 자신이 1900년에 멕시코에 있는 몰몬 정착지를 방문하는 동안 하루 만에 복수결혼을 요청하는 신청서를 10건이나 받았다고 전했다. 그는 그 모든 신청을 거절했다. 그는 한 친구에게 이렇게 말했다. “이런 문서[이를테면, 그 성명서]에 위배되는 일을 하는 것은 내 본성에 맞지 않아.”39
두 번째 성명서
그 성명서 이후에 새로 행한 복수결혼은 처음에는, 교회 밖의 사람들에게 대부분 알려지지 않았다. 이런 결혼이 알려지고 특히 조지 큐 캐넌 회장이 1899년에 New York Herald와 가진 인터뷰에서 캐나다와 멕시코에서는 복수결혼이 새로 행해질 수도 있다는 언급을 한 이후로 많은 미국인들이 동요했다.40 칠십인 제일 평의회의 일원이었던 비 에이치 로버츠가 미국 의회에 출마한 선거 이후에 그에게 세 명의 부인이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게 되었는데, 그중 한 명은 그 성명서 이후에 결혼한 아내였다. 로버츠가 의석을 얻지 못하게 하라는 7백만 명의 서명이 담긴 청원서가 제출되었다. 의회는 그 요청을 수락했으며, 로버츠는 공직에서 제명되었다.41
비 에이치 로버츠의 축출로 몰몬의 결혼 시행에 대한 철저한 조사가 새로 재개되었다. 교회 회장인 로렌조 스노우는 교회에서 새로 행해진 복수결혼은 이미 중단되었으며 그 성명서는 세상의 모든 지역에 확대 적용되며, 개인들에게 사적으로 그 조언을 되풀이했음을 분명하게 밝히는 성명을 발표했다. 그렇기는 하지만 필시 스노우 회장이 모르거나 또는 승인을 받지 않은 채 소수의 복수결혼이 계속해서 새로 행해졌다. 1901년에 조셉 에프 스미스가 교회 회장이 된 후, 그가 성역을 베풀던 초기 몇 년 동안에도 소수의 복수결혼이 새로 행해졌다.42
1903년 교회의 사도인 리드 스무트가 미국 상원 의원으로 선출되자 이 복수결혼에서의 교회 역할이 심각한 논쟁거리가 되었다. 스무트는 일부일처주의자였음에도 사도의 신분이었기 때문에 나라에 대한 충성도를 철저하게 조사받았다. 어떻게 스무트는 역원 중 몇 사람이 복수결혼을 새로 행했거나, 찬성했거나, 관여한 교회의 법을 지지하는 동시에 복수결혼을 불법으로 규정한 나라의 법을 지지할 수 있었을까? 입법자들은 공청회에서 이 질문을 놓고 4년이라는 오랜 시간 동안 논쟁을 벌였다.
상원에서는 여러 증인을 불러 증언을 하게 했다. 교회 회장인 조셉 에프 스미스는 증인으로 호출되어 1904년 3월에 상원 본회의장에 서게 되었다. 질문을 받은 그는 자신의 가족 관계를 옹호하며 청문회 위원들에게 자신이 1890년 이래로 자신의 아내들과 함께 공동 생활을 해왔으며, 아버지로서 자녀들을 돌보았다고 말했다. 그는 자신이 아내들과 그리고 하나님과 맺은 성스러운 성약을 어긴다면 불명예스러운 일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1890년 이래로 행해진 새로운 복수결혼에 대한 질문을 받자 스미스 회장은 교회에서 인가하고 교회의 여러 평의회와 대회에서 재가한 행위와, 교회의 개별 회원들이 자체적으로 행한 행위를 신중하게 구별했다. 그는 이렇게 증언했다. “그 성명서 이래로 교회에서 승낙했거나 인가했거나 알았거나 승인한 복수결혼은 결코 없습니다.”43
이 청문회 자리에서 스미스 회장은 진실을 언급하는 동시에 교회를 보호하려고 애썼다. 그의 증언은 교회 지도자들이 오랫동안 이해해 왔던 한 가지 뚜렷한 차이점을 전달했다. 즉, 그 성명서는 교회가 집단적으로 복수결혼을 지지하고 옹호하게 된 신성한 계명은 제하였지만 현재에 이르도록, 개개인이 종교적 양심의 문제로서 복수결혼을 계속 시행하거나 집행하는 것을 금지하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이해를 바꿀 적절한 시기가 온 것이었다. 대다수의 몰몬 결혼은 늘 일부일처였으며, 유일하게 승인된 결혼 형태로서 일부일처제로의 전환은 오랫동안 진행되었다. 1889년에는 평생 일부일처주의자였던 회원 한 사람이 십이사도 정원회로 부름 받았으며, 1897년 이후에는 십이사도 정원회로 새로 부름 받은 모든 사도가 한 명을 제외하고는 그 지명 당시에 일부일처주의자였다. 44 교회 지도자들이 회원들에게 이전처럼 유타로 이주하기보다는 자국에 머물러 있으면서 그곳에서 “시온을 건설”하도록 촉구했던 1890년대를 시작으로 하여 일부일처제 법을 지키는 것이 회원들에게 중요한 일이 되었다.
스미스 회장은 상원에서 증언하는 동안 복수결혼에 대한 교회의 입장을 분명히 할 것임을 공개적으로 약속했다. 1904년 4월 연차 대회에서 스미스 회장은 두 번째 성명서로 알려진 강제성을 지닌 성명서를 발표했는데, 다음과 같이 복수결혼을 하면 처벌을 한다는 내용이 덧붙여졌다. “교회의 어떤 역원이나 회원이라도 그런 결혼을 집행할 권세를 취하거나 행한다면 그 사람은 교회에 대해 범법한 것으로 간주될 것이며, 관련 규정에 따라 다루어지고 그것을 통해 파문될 것입니다.”45 이 성명서는 교회의 여러 주요 평의회에서 승인되었으며, 연차 대회에서 권위가 있고 교회에 구속력이 있는 것으로서 만장일치로 지지되었다.46
그 두 번째 성명서는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새로 행하는 복수결혼은 하나님과 교회의 승인을 받지 못하게 된다는 사실이 처음으로 교회 회원들에게 통고된 것이었다. 이 두 번째 성명서는 첫 번째 성명서의 유효 범위와 목적을 상술한 것이었다. 십이사도 정원회의 회장인 프랜시스 엠 라이먼 장로는 이렇게 설명했다. “[그 성명서가] 발표되었을 때, 그것은 단순히 성도들에게 더 이상 복수결혼을 할 필요가 없음을 알리는 통고였지만 1904년 4월 6일에 솔트레이크시티에서 개최된 대회에서 취한 조치[두 번째 성명서]는 복수결혼을 금지하는 것이었습니다.”47
교회 지도자들은 이 공표의 중대성을 모든 위치의 지도자와 회원들에게 전했다. 라이먼 회장은 제일회장단의 지시에 따라 십이사도 정원회의 각 회원에게 서신을 보내, 두 번째 성명서가 “엄격하게 시행될” 것임을 알렸다.48 그러나 그 지시에 반하여, 두 사도인 존 더블유 테일러와 마티아스 에프 카울리는 두 번째 성명서 이후에도 계속해서 복수결혼을 새로 행하고 또한 장려했다. 결국 그 두 사람은 십이사도 정원회에서 제명되었다.49 이후 테일러는 복수결혼을 계속 행하는 것이 정당하다는 주장을 굽히지 않아 교회에서 파문되었다. 카울리는 신권 사용에 제한을 받았으며 이후에 자신이 “완전히 잘못”했음을 인정했다.50
1890년과 1904년 사이에 복수결혼을 했던 몇몇 부부들은 두 번째 성명서 이후에 별거했지만, 그 밖의 많은 부부들은 1930년대와 그 이후까지도 조용히 공동 생활을 했다.51 두 번째 성명서를 거부하고 계속해서 복수결혼을 공공연히 옹호하거나 복수결혼을 새로 행한 교회 회원들은 교회의 선도 평의회에 소환되었다. 파문당한 몇몇 사람들은 연합하여 독립 운동을 조직했으며, 종종 근본주의자로 불린다. 예수 그리스도 후기 성도 교회는 이런 단체들과 제휴를 맺거나 후원하지 않는다. 조셉 에프 스미스의 성역 이래로 교회 회장들은 교회와 그 회원들이 복수결혼을 행하는 것을 더 이상 인정하지 않는다는 점을 반복해서 강조해 왔으며, 그 진정성을 강조하기 위해 현지 지도자들에게 그것을 따르지 않는 회원들을 교회의 선도 평의회에 소환하도록 촉구해 왔다.
결론
하나님께서 그분의 선지자 조셉 스미스를 통해 선언하셨듯이 달리 공표하지 않는 한, 한 남성과 한 여성 간의 결혼은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표준 결혼 형태이다. 그 성명서는 일부일처제로 되돌아가는 시작점을 알린 것이며, 이 일부일처제가 오늘날 교회의 표준이다.52 그 성명서가 발표된 직후 열린 연차 대회에서 조지 큐 캐넌 회장은 말씀을 전하면서 그 성명서가 나오게 된 계시적 과정에 대해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교회의 회장단도 여러분이 경험하듯이 경험해야 합니다. 그들도 여러분이 진보하듯이 진보해야 합니다. 그들은 자신들에게 오는 하나님의 계시에 의지해야 합니다. 주님은 처음부터 끝까지를 보시지만, 그들은 그렇게 하지 못합니다.” 캐넌은 제일회장단에 관해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하나님의 생각과 뜻을 구하는 것이며, 그것이 우리에게 주어질 때는 우리가 이전에 받은 모든 느낌과 반대되는 것이라 할지라도 우리에게는 하나님께서 가리키시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그분을 신뢰하는 것 외에 다른 선택권이 없습니다.”5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