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라인 전용
후기를 살아가는 우리를 인도하시기 위하여
2020년 2월 18일에 열린 BYU 하와이 영적 모임에서 발췌.
선지자를 따르는 것은 언제나 약속된 축복과 개인적인 성장으로 이어질 것이다.
삶의 어려움을 헤쳐 나갈 때, 선지자의 인도는 우리에게 더욱 소중해진다.
우리는 선지자들의 지시를 따를 때 큰 축복을 받는다. 나는 아내 질과 결혼한 지 3주도 채 지나지 않았을 때 겪었던 매우 중요한 일을 기억한다. 우리는 당시 교회 회장이셨던 스펜서 더블유 킴볼 회장님께서 결혼에 대해 말씀하시는 영적 모임에 참석했다.1 그분은 마치 우리에게 직접 말씀하시는 것만 같았다. 그 한 번의 말씀은 우리가 결혼과 가족을 시작할 때 몇 가지 표본을 세우고, 주님께서 그에게 경고하도록 영감을 주셨던 함정을 피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나는 지난 몇 년 동안 우리가 이처럼 중요한 시기에 그 인도를 받았다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이었는지를 생각해 보았다. 47년이 지난 지금, 우리는 젊은 부부 시절에 받은 권고 덕분에 여전히 축복을 받고 있다.
선지자를 따를 때 우리는 축복받는다
나는 여러분 각자가 선지자를 따름으로써 축복을 받았을 때의 경험을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선지자들이 가르치도록 영감받은 것을 따른다고 해서 우리가 조롱 또는 박해에서 면제되거나, 순종하는 것으로 다른 어려움을 피하리라는 보장을 받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기꺼이 하는 순종은 결국 “이 세상에서는 평화를, 장차 올 세상에서는 영생을” 가져다준다.(교리와 성약 59:23)
니파이와 리하이의 가르침을 따르는 리하이와 이스마엘의 가족들은 중대한 어려움에 직면했지만, 그들은 약속된 땅에서 “행복[의 방식을 따라]”(니파이후서 5:27) 살았다. 컴퓨터 검색이 0.62초 이상 걸리는 것을 참지 못하는 우리에게 미래에 약속된 축복을 기다리고 믿는 것은 어려운 일일 수 있다.
사회가 표류하기 시작하면 많은 사람이 선지자의 권고를 거부한다
어렸을 때 나는 몰몬경에 나오는 사람들이 왜 선지자들을 거부하는지 궁금했다. 내가 보기엔 거의 제정신이 아닌 것만 같았다. 그들은 어떤 결과가 있을지 몰랐던 것일까? 어떻게 하면 사람들이 선지자의 메시지를 거부하고 심지어 선지자들을 배척하고 미워하게 되는 것일까?
몇 해 전에 나는 선지자들의 메시지에 대한 반응을 연구하기로 결정했다. 때때로 사람들은 선지자들과 그들의 권능을 질투해서 그들을 거부했다.
제3니파이에서 니파이가 큰 권능으로 성역을 행했을 때, 그들은 “그가 자기들보다 더 큰 권능을”(제3니파이 7:18) 지녔기 때문에 화가 났다. 사람들은 니파이가 죽은 자 가운데서 그의 형제를 살리는 것을 보았다. “백성이 그것을 보고 그것을 증거하고, 그의 능력으로 인하여 그에게 노하였[다].”(제3니파이 7:20)
토머스 마쉬가 불만을 품었다가 교회로 다시 돌아왔을 때, 그는 자신에게 일어났던 일을 설명했다.
“나는 마음에서 주님의 영을 잃어버렸음이 틀림없다. …
나는 선지자를 시기하기 시작했고 … 모든 옳은 것을 간과하기 시작했으며, 나의 모든 시간을 나쁜 것을 찾는 데 썼다. … 나는 조셉 형제의 눈에서 들보를 보았다고 생각했지만, 그것은 단지 진흙에 불과했고, 내 눈은 들보로 가득 찼다. … 나는 화가 났고, 다른 모든 사람들이 화를 내기를 바랐다. 나는 브리검 영 형제와 히버 시 킴볼 형제와 이야기를 나누었고, 그들이 나처럼 화를 내기를 바랐다. 나는 그들이 화를 내지 않는 것을 보았고, 그들이 화를 내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여전히 화가 났다. 브리검 영 형제는 조심스러운 표정으로 ‘토머스 형제님, 형제님이 이 교회의 지도자이십니까?’라고 물었다. 나는 아니라고 답했다. 그러자 그는 이렇게 말했다. ‘그런데 왜 그렇게 그 문제에서 헤어나오지 못하십니까?’”2
사람들이 선지자들의 권고를 따르지 않는 다른 이유도 있다. 가장 일반적인 이유 중 하나는 선지자들이 사람들의 죄를 간증하고 회개하도록 설교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많은 사람에게 불편한 감정을 일으킨다. 몰몬경의 첫 구절 전에 니파이가 기록한 니파이전서에 대한 간략한 소개에서 우리는 이 주제가 등장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니파이는 이렇게 기록했다. “리하이가 백성들에게 그들의 죄악에 관하여 예언하매 백성들이 그의 생명을 멸하려 하므로, 주께서 리하이에게 예루살렘 땅 밖으로 떠나도록 경고하심.” 이 양상은 경전에서 반복된다.(예를 들어, 니파이전서 16:2, 모사이야서 13:4, 앨마서 35:15, 힐라맨서 8:4; 13:26~28 참조)
우리는 대부분 우리가 잘못되었다는 말을 듣고 싶어 하지 않는다. 우리는 잘못을 바로잡는 것도 좋아하지 않는다. 사회가 하나님의 가르침과 계명에서 점점 멀어질수록 이것은 더욱 어려워진다. 의로운 사회에서는 죄에 빠진 사람들이 비정상으로 여겨지지만, 주님의 가르침을 무시하거나 거부하는 사회에서는 계명을 지키는 사람들이 비정상적으로 여겨지고 강한 압박을 받게 된다.
몰몬경에 나오는 노아 왕의 백성, 앰몬아이하의 백성 또는 조램인들과 같이, 사람들이 거짓 철학과 죄에 가장 깊이 빠져 있던 사회에서는 선지자들의 메시지에 가장 부정적으로 반응할 가능성이 높았다. 사회가 방향을 잃고 표류함에 따라 크고 넓은 건물은 개인에게 더 강한 영향을 미친다. 그것은 점점 더 커지는 것 같다. 조롱은 더 강렬하고 신랄해 보이고 더 많은 사람이 손가락질을 하는 것 같은데, 이는 그들의 수가 실제로 많기 때문이다. 우리는 길과 나무의 열매에서 멀어지라는 압력뿐만 아니라 길에 머물려고 하는 사람들을 조롱하고 공격하는 데 동참해야 한다는 압력을 받는다.
무엇이 그러한 사회들이 선지자들을 거부하고 심지어 그들의 피를 갈망하도록 했던 것일까? 거짓 철학과 교리는 어떻게 백성들의 마음속에 스며들게 되었는가? 그들이 겸손에서 교만으로, 순종에서 적개심으로 나아가게 된 요인은 무엇인가? 아마 이는 다른 기회에 다뤄야 할 주제일 것이다.
선지자들과 주님으로부터 돌아서는 이러한 사회와 개인들을 바라보면서, 우리는 이제 와서 그 결과를 알 수 있다. 앰몬아이하 성은 하루 만에 파괴되었다. 노아의 백성들은 속박되었고, 많은 사람이 죽임을 당했다. 조램인들은 복음을 받아들인 그들 중 일부 가난한 사람들이 여어숀 땅에서 따뜻한 환영을 받는 것에 분노했다. 이것은 그들이 니파이 민족에 맞서 전쟁에 참전하는 계기가 되었다.
우리는 선지자를 따르거나 따르지 않는 것을 개인적으로 선택한다
우리에게는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의 상태가 어떻든 선지자를 따를 수 있는 선택권이 있다. 우리는 사회로부터 선지자의 메시지를 무시하거나 거부하라는 압력을 느낄 수 있지만, 여전히 선택할 수 있는 능력은 우리에게 남아있다. 우리가 성약을 지키고 주님과 가까이 지내면, 선지자를 따르는 것이 훨씬 쉬워질 것이다. 우리는 우리를 인도하고 주님의 뜻에 순종하겠다는 결심을 굳게 할 영을 갖게 될 것이다. 그런 다음 우리는 주님의 축복을 받는 사람이 된다.
몇 년 전에 나는 정치적 논란거리인 특정 주제로 대화를 나눈 적이 있다. 그 주제는 교회나 선지자가 실제로 다뤘던 적이 없는 것이었다. 그 사람은 만일 선지자가 우리가 논의하고 있는 사항을 우리에게 요구한다면 따르지 않을 것이며, 이는 그에게 그 선지자가 더는 참된 선지자가 아니라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했다. 나는 당황했고 그것이 매우 성급한 결정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 대화가 끝난 후에 나는 궁금해졌다. 내가 선지자를 거부하게 만들 수 있을 만큼 충분히 강력하게 느꼈거나 사회의 현재 흐름에 강하게 반대되는 무언가가 있었을까?
선지자의 권고가 우리의 개인적인 감정, 욕망 또는 신념과 충돌하거나, 사회에 대해 널리 주장되는 견해를 반대할 때, 우리는 어떻게 반응하는가? 조셉 스미스는 이렇게 말했다. “저는 여러 해 동안 성도들이 마음으로 하나님의 것들을 받을 준비가 될 수 있도록 노력해 왔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사업을 위해 모든 고난을 겪은 후, 그들의 관습에 반대되는 것이 오면 그 즉시 유리처럼 깨지고 마는 사람들을 종종 봅니다. 그들은 결코 연단하는 불을 견딜 수 없습니다.”3
제일회장단 제2보좌인 헨리 비 아이어링 회장은 선지자들의 권고에 대한 응답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선지자의 말씀이 반복된다고 느낄 때, 그것에 주의를 기울이고, 이런 축복된 시대에 살고 있다는 감사하는 마음으로 우리 마음을 가득 채워야 합니다.
선지자의 권고에서 안전에 이르는 길을 찾는다는 것은 신앙이 강한 사람에게나 통하는 이야기입니다. 선지자가 말씀하실 때, 신앙이 별로 없는 사람은 그저 현명한 사람이 좋은 충고를 하는 정도로 생각해 버리고 맙니다. 그래서 만일 선자자의 권고가 자신이 받아들이기에 편안하고 적절하며, 자신이 바라는 바와 일치한다고 생각되면 받아들이고, 그렇지 않으면 잘못된 충고라고 간주해 버리거나 자신의 입장은 그 권고에는 해당되지 않는다고 치부해 버립니다. 신앙이 없는 사람들은 이기적인 동기를 유발시키려고 하는 사람들의 말만 듣고 있다는 생각을 할 수도 있습니다. …
… 선지자의 권고를 받아들이지 않게 되면 장차 영감 어린 권고를 받아들일 수 있는 힘이 떨어지게 됩니다. …
선지자들의 권고를 듣고, 기도를 통해 그 권고를 확신하고 따랐을 때마다 저는 제가 더욱 안전하게 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
때때로 우리는 신중하게 기도하거나 깊이 생각해도 제대로 이해할 수 없거나 우리에게 적용되지 않는 것 같은 권고를 받을 경우가 있습니다. 그 권고를 거부하지 말고 깊이 명심하십시오. 만약 여러분이 신뢰하는 사람이 여러분에게 겉으로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모래더미를 건네며 그 안에 황금이 들어 있다고 말한다면, 여러분은 아마 현명하게 손에 한동안 들고 있으면서 그것을 부드럽게 흔들어 볼 것입니다. 제가 선지자께서 권고하신 대로 행할 때마다, 얼마 후에 금 조각이 나타나기 시작했고 저는 그에 감사해했습니다.”4
눈먼 인도자들은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와 떨어뜨리려 노력한다
레이맨인 사무엘은 백성들에게 선지자들을 거부하고 대신에 “[그들의] 눈의 자긍을 따라 행하며, 무엇이든지 [그들의] 마음이 원하는 것을 행하라”라고(힐라맨서 13:27) 가르치는 이들의 말을 들은 후, 마음을 꿰뚫는 두 가지 질문을 던졌다. “어느 때까지 너희가 어리석고 맹인 된 인도자들에게 이끌리고자 하느냐?” 그리고 “어느 때까지 너희가 빛보다 어둠을 택하려 하느냐?”(힐라맨서 13:29)
아무도 그들이 맹인 된 인도자들의 안내를 받고 싶어 한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것이다. 그릇된 가르침을 받은 사람들은 그릇된 철학을 가르친 사람들을 “맹인 된 인도자”로 지칭하지 않을 것이다. 사실, 오해를 불러일으킨 사람들은 종종 계몽적이고, 미래지향적이며, 명석하고, 사회적으로 깨달음을 얻은 사람으로 여겨졌을 것이다.
나는 몰몬경 속 그 맹인 된 인도자 중 일부가 오늘날 어떻게 받아들여질지 궁금하다. 시렘이 유식하여 백성들의 언어를 완벽히 알았기에 많은 언변의 능력을 구사할 수 있었던 사실을 생각해 본다. 그 정도 언어 구사력이라면 그는 틀림없이 트위터 세계에서 큰 인기를 얻을 것이다. 그는 이목을 끄는 언변과 가시 돋친 말을 하는 방법을 알기에 흥미를 끄는 기발한 트윗을 양산해서 리트윗되게 할 것이다.
니허는 큰 힘과 값비싼 의복, 그리고 사람들의 눈길을 끄는 능력으로 계명의 제약이 없는 “훌륭한 삶”을 본보기 삼아 인스타그램에서 많은 팔로워를 모으고 자신의 패턴을 쫓아 교회와 그 가르침을 비난할 것이다.
코리호어도 자유롭게 믿는 자들을 비웃고 “속된 생각에 기쁨이 되”는(앨마서 30:53) 것들을 가르치며 자기 유튜브 채널에서 수백만의 구독자를 얻을 것이다. 그는 “크게 부풀린 말을 하고, [선지자와 교회의 지도자들을] 거스려 욕”할(앨마서 30:31) 것이다. 그는 “사람이 하는 일은 무엇이든지 범죄가 아니라”는(앨마서 30:17) 메시지를 전하며 더 많은 구독자를 모으고자 했을 것이다.
물론, 그들의 모든 의사 소통의 근본적인 흐름은 그리스도가 없다는 것이다. 그들의 가르침은 그렇게 현대적이거나 독창적이지 않다. 그들은 거짓으로 지어낸 말을 표절했을 뿐이다. 최후에 코리호어는 사탄이 그에게 무엇을 말할지 알려 주었다고 인정했다.(앨마서 30:53 참조)
개인이나 사회가 선지자들을 통해 받는 주님의 가르침에서 자신을 분리할 때, 그들은 성가신 죄책감 없이 그들이 원하는 방식으로 살 수 있는 다른 가르침을 찾는다.
십이사도 정원회의 제프리 알 홀런드 장로님은 이렇게 설명하셨다. “청소년 여러분, 참 유감스럽게도 현대인들은, 혹 신을 원한다 해도, 너무 많은 것을 요구하지 않는, 편안하고 부드러운 신을 바란다는 특징이 있습니다. 즉, 유유자적하면서, 옳은 방향을 제시하지도 않고, 우리를 안심시키며 웃게 해 주고, 가서 재미있게 놀라고만 하는 그런 신 말입니다.”5
맹목적이고 어리석은 인도자는 결코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실 기쁨과 축복으로 우리를 인도하지 못할 것이다. 선지자들을 따를 때, 우리는 비록 많은 사람이 그렇게 하지 않더라도 경멸과 박해 앞에서 옳은 것을 위해 기꺼이 일어설 필요가 있다.
선지자들은 구주께 나아오라고 우리에게 손짓한다
맹인 된 인도자와 세상의 경멸이 우리를 하나님과 그분의 축복에서 멀어지게 하려고 할 때, 선지자들은 우리에게 구주께로 나아오라고 손짓한다. 선지자들은 우리가 그들을 경배하도록 설득하려고 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를 경배하도록 손짓하여 하나님 아버지와 그분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 더 가까이 나아가게 한다.(예를 들어, 니파이전서 8:12의 리하이 참조)
몇 년 전, 질과 내가 러셀 엠 넬슨 회장님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였다. 회장님은 우리에게 다른 임무를 받아들일 의사가 있는지 물으셨다. 넬슨 회장님은 항상 우리에게 매우 친절하셨으며, 질을 큰 사랑과 존중으로 대하셨다. 우리의 의지에 대해 묻는 회장님의 질문에 질은 “넬슨 회장님, 우리는 당신을 위해 무엇이든 할 것입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회장님은 즉시 “주님을 위해 그 일을 하십시오.”라고 대답하셨다. 그 말씀은 나와 질 두 사람 모두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회장님은 우리에게 큰 교훈을 주셨다. 넬슨 회장님은 우리가 올바른 동기를 갖고, 바라봐야 할 곳을 바라보길 원하셨다.
선지자들의 인도를 받을 때 우리는 실제로 그분, 즉 구주 때문에 그들의 권고를 따른다. 구주의 은혜는 우리 각자에게 족하다.
결론
우리는 넬슨 회장님이 평생 동안 선지자들을 기꺼이 따르고자 하셨다는 것을 안다. 그분은 선지자의 권고 때문에 권위 있는 직업 기회를 포기하셨다. 그분은 대가족을 둔 매우 바쁜 외과의사였지만 중국어를 할 수 있는 교회 회원이 필요하다는 선지자의 말을 듣고서 중국어를 공부하셨다. 우리는 토마스 에스 몬슨 회장님이 교회 회원들에게 몰몬경을 공부하라고 하셨을 때, 넬슨 회장님이 바로 공부를 시작하셨다는 것을 안다. 우리 각자가 넬슨 회장님처럼 선지자를 기꺼이 따르고자 한다면, 교회나 세상은 어떤 모습이 될까?
우리는 주님께서 그분의 선지자들을 통해 주시는 인도를 따를 때 엄청난 축복이 있음을 안다. 만약 그들이 하는 말이 사회의 현재 추세와 상충한다면, 용기를 내어 그들을 따르고, 지지하고, 옹호하자. 그것은 때로 순조로운 항해로 이어지지 않기도 하겠지만, 언제나 약속된 축복과 개인적인 성장으로 우리를 이끌어 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