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 역사
하나님과 같이 됨


하나님과 같이 됨

서양이나 동양을 막론하고 종교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가장 흔한 이미지 중 하나는 신을 아버지나 어머니로, 인간을 신의 자녀로 묘사하는 것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신을 아버지나 어머니로 여기며 신께 기도드리고, 평화를 증진하기 위해 모든 사람들 간의 형제애와 자매애를 기원하며, 신의 모든 자녀는 큰 가치를 지니고 있다는 강한 신념 아래 지치고 힘든 사람들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민다.

하지만 다양한 종교의 사람들은 신과 인간 사이의 부모 자식 관계를 서로 다른 방식으로 이해한다. 어떤 이들은 “하나님의 자녀”라는 말을, 마치 육신의 아버지의 인도를 받아들이는 것처럼, 하나님의 인도를 받아들이는 사람들만을 위한 명예로운 칭호라고 이해한다. 많은 이들이 신과 인간의 관계를 부모 자식 관계로 표현하는 것에 대해, 자신의 창조물에 대한 신의 사랑과 그분의 지지와 보호에 의지하는 인간의 모습을 묘사하는 비유라고 생각한다.

후기 성도는 모든 사람을 완전하고 온전한 의미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본다. 후기 성도는 모든 사람이 그 태생과 본성과 잠재력에서 신성하다고 여긴다. 각 사람에게는 영원한 본질이 있으며, 그들은 모두 “하늘 부모의 사랑하는 영의 아들과 딸”1이다. 사람은 각자 신성한 잠재력을 지니고 있으며, 그에 융화하는 삶을 살 것인지 아니면 반하는 삶을 살 것인지를 선택해야 한다. 모든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를 통해 “완전을 향해 발전하여 궁극적으로 …… 자신의 신성한 운명을 실현”2할 수 있다. 자녀가 시간이 흐름에 따라 부모의 품성을 발현할 수 있게 되는 것처럼, 인간이 물려받은 신성한 본성은 발전하여 하나님 아버지의 신성과 같이 될 수 있다.

자녀들에게 있는 그 신성을 함양하려는 하나님의 소망은 교회 회원들에게 가장 많은 영감을 주고, 동기가 되며, 그들을 겸손하게 하는 그분의 속성 중 하나이다. 하나님의 사랑 넘치는 부모 역할과 인도를 통해, 자발적이고 순종적인 자녀는 각각 그분의 충만함과 영광을 받을 수 있게 된다. 이러한 사실은 후기 성도가 다른 사람들을 바라보는 방식을 변화시킨다. 남성과 여성에게 하나님과 같은 상태로 승영할 수 있는 잠재력이 있다는 가르침은 분명히 대부분의 현대 기독교에서 이해하고 있는 바를 뛰어넘는 것이며, 성경의 가르침을 토대로 한 후기 성도의 간절한 바람을 나타낸다. 그 바람은 바로 하나님께서 사시는 대로 살며, 그분께서 사랑하시는 대로 사랑하며, 사랑하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자녀들에게 바라시는 모든 것을 위해 준비하는 것이다.

성경에는 인간의 신성한 잠재력에 대해 어떻게 나와 있는가?

인간이 하나님과 같이 될 수 있음을 시사하는 몇몇 성경 구절이 있다. 인간이 하나님을 닮았다는 것은 창세기 1장에 다음과 같이 강조되어 있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 우리가 사람을 만들[자] …… 하시고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니라]”3 아담과 이브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은 뒤,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우리 중 하나 같이 되었으니”4라고 말씀하셨으며, 이는 하나님과 같이 되는 과정이 이미 시작되었음을 암시한다. 구약전서 후반에 있는 시편을 보면 “내가 말하기를 너희는 신들이며 다 지존자의 아들들이라”5는 구절이 있다.

신약전서에도 역시 이 교리를 가르치는 구절들이 있다. 예수께서는 “네가 사람이 되어 자칭 하나님이라 함이로라”라는 이유로 신성을 모독했다는 비난을 받으실 때 시편을 인용하며 이렇게 대답하셨다. “너희 율법에 기록된 바 내가 너희를 신이라 하였노라 하지 아니하였느냐”6 예수님은 산상수훈에서 제자들에게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7고 명하셨다. 또한 사도 바울은 우리가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될 수 있다는 구주의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8을 언급하였다. 사도 바울은 우리가 “하나님의 소생”이라고 가르쳤으며,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이며] ……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9임을 강조했다. 요한계시록에는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 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 10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약속이 나와 있다.

이 구절들은 다른 방식으로 해석될 수 있다. 하지만 조셉 스미스가 받은 명확한 계시를 통해 이 구절들을 볼 때, 후기 성도는 이 구절들이 인간의 신성한 본질과 잠재력을 직접 나타낸다고 이해한다. 다른 많은 기독교인들은 이 동일한 구절을 훨씬 은유적으로 해석하는데, 이는 그들이 신약전서에 설명된 시기 이후 오랜 시간에 걸쳐 전개된 교리적 해석을 통해 성경을 대하기 때문이다.

기독교사에서 신성에 관한 관념은 어떻게 바뀌어 왔는가?

후기 성도의 믿음은 많은 현대 기독교인들에게보다는 초기 세대의 기독교인들에게 좀 더 익숙하게 느껴질 수 있다. 초기 기독교 시대의 영향력 있는 신학자 및 교사들은 인간이 신성한 존재가 될 수 있다는 관념에 찬성했다. 현대의 한 학자는 그리스도의 사망 이후 1세기 동안 있었던 “신화론의 편재”, 즉 인간이 하나님이 될 수 있다는 가르침을 언급했다.11 서기 202년경에 사망한 고대 교부 이레네우스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분의 무한한 사랑을 통해 우리가 그분과 같은 상태가 될 수 있게 하시려고 우리와 같은 상태가 되셨다”12고 가르쳤다.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서기 약 150~215년경)는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이 될 수 있는지를 배우게 하시려고 하나님의 말씀이 사람이 되셨다”13고 기록했다. 바실리우스(서기 330~379년) 역시 이 가능성, 즉 단지 “하나님과 같이 되는 것”이 아니라 “가장 높으신 하나님이 되는 것”14을 높이 평가하고 가르쳤다.

초기 교부들이 말한 하나님이 될 수 있다는 것의 정확한 의미는 해석하기 나름이지만,15 신이 될 수 있다는 가르침이 로마 후기 시대에 좀 더 논쟁거리가 되었으며, 중세 시대에 이르러서는 흔치 않은 일이 되었음은 분명하다. 신이 될 수 있다는 가르침에 대한 교부의 반박이 처음 알려진 것은 5세기였다.16 6세기에 이르러서는 “하나님이 될 수 있다”는 가르침은 위() 디오니시우스(서기 약 500년경)가 내린 다음 정의에 나온 것처럼 그 범위가 좁게 한정되어 나타난다. “신이 될 수 있다는 것은 …… 가능한 만큼 하나님을 닮아 그분과 하나가 되는 것이다.”17

이러한 믿음은 왜 점차 자취를 감추게 되었는가? 세상의 창조에 관한 관점이 바뀜에 따라 인간의 잠재력에 대한 시야도 점차 좁혀졌을 수도 있다. 창조에 관한 초기 유대인 및 기독교 기록을 보면 하나님께서 기존 물질들로 세상을 조직하셨다고 간주하며, 그러한 생명을 유지하는 체계를 갖추신 하나님의 선하심을 강조하고 있다.18 하지만 2세기에 갑자기 등장한 새로운 철학적 사고는 하나님께서 ex nihilo(무에서) 우주를 창조하셨다는 교리의 발전으로 이어졌다. 이는 결국 기독교 세계에서 창조에 관한 지배적인 가르침이 되었다.19 하나님의 권능을 강조하기 위해 많은 신학자들은 그분께서 존재하셨던 한 아무것도 존재할 수 없었다고 주장했다. 기독교계에서는 하나님께서 원래 철저히 혼자이셨음을 주장하는 것이 중요하게 되었다.

Creation ex nihilo(무로부터의 창조)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간격을 더욱 넓히게 되었다. 세상이 있기 전에 인간의 영혼이 존재했다거나 인간이 장차 하나님의 속성을 온전히 물려받고 발현할 수 있음을 가르치는 것은 드문 일이 되었다.20 점차적으로, 인간의 도덕적 타락과 창조주와 피조물 간의 엄청난 간극이 점점 더 강조됨에 따라 신이 될 수 있다는 개념은 서양 기독교에서 그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21 하지만 이는 기독교의 3대 주요 교파 중 하나인 동방 정교회의 중심 교리로 남아 있다.22

신이 될 수 있다는 개념은 후기 성도에게 어떻게 소개되었는가?

초기 후기 성도는 거의 영어권 개신교도들이 주류를 이루는 사회에서 나왔다. 이들 대부분은 ex nihilo creation(무로부터의 창조)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에 나온 하나님에 대한 정의, 즉 하나님을 “육체도, 지체도, 감정도 없는”23 존재로 받아들인 자들이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성역 이후 1세기 동안 나타난 다양한 기독교 믿음에 대해서도 하나님이 될 수 있다는 초기 기독교인들의 가르침에 대해서도 거의 혹은 전혀 알지 못했던 듯하다. 하지만 조셉 스미스가 받은 계시는 당시의 지배적인 개념에서 벗어났으며, 어떤 이들에게는 하나님의 본질과 창조, 그리고 인간에 대한 논쟁을 재점화하는 것이었다.

조셉 스미스에게 주어진 초기 계시들에 따르면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으며, 하나님은 그분의 자녀들을 직접 보살피신다. 몰몬경에서 한 선지자는 “주의 손가락을 보[고]” 인간의 육체적 형상이 참으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들어졌음을 알고 크게 놀랐다.24 또 다른 초기 계시에 따르면 (성경에서 “하나님과 동행[했던]”25) 에녹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창조물로 인해 우시는 것을 보았다. “어찌 당신께서 우실 수 있나이까?” 하고 물었던 에녹은 인간의 고통에 대한 하나님의 동정심이 그분의 사랑에 반드시 필요한 요소임을 알게 되었다.26 조셉 스미스 역시 다음과 같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자녀들이, 그분이 받은 것과 똑같은 승영의 상태를 얻기를 바라신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보라, 사람에게 불멸과 영생을 가져다 주는 것 - 이것이 곧 나의 일이요, 나의 영광이니라.”27

1832년, 조셉 스미스와 시드니 리그돈은 사후 세계에 관한 시현을 경험했다. 그 시현에서 그들은 의로운 자들과 불의한 자들이 모두 보편적인 부활을 통해 불멸을 얻게 되지만 “신앙으로써 승리한 자요, …… 약속의 성령으로 인봉된 자들”만이 하나님의 영광의 충만함을 얻고 “신들이요, 참으로 하나님의 아들들”28이 될 것임을 알게 되었다. 곧 이어 또 다른 계시를 통해 “성도들은 그의 영광으로 충만하게 되고, 그들의 기업을 받아 그와 동등하게 되리라”29는 것을 확인했다. 후기 성도에게 승영이라는 단어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완전한 상속을 받는 영광스러운 보상을 나타낸다. 이는 복음의 법과 의식에 순종함으로써 그리스도의 속죄를 통하여 받을 수 있다.30

모든 인간의 잠재적인 미래에 관한 이 놀라운 관점에는 인간의 과거에 대해 계시된 가르침이 수반되었다. 조셉 스미스는 계속적인 계시를 통해 인간 영혼의 중심에 있는 빛이나 예지는 “창조되거나 지음을 받지 아니하였[으며], 참으로 그리될 수도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하나님은 각 인간의 영의 아버지이시며, 오직 “영과 원소는 불가분하게 결합되어 충만한 기쁨을 받[기]” 때문에 그분께서는 인간이 충만한 기쁨을 얻기 위해 육체를 얻고 필멸의 경험을 통해 발전하도록 계획을 마련하셨다. 그렇다면, 지상에서의 출생은 한 인간의 삶에 있어서 시작이 아니다. “사람도 또한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있었느니라.”31 마찬가지로, 조셉 스미스는 물질 세계에는 영원한 토대가 있으며, 이는 creation ex nihilo(무에서의 창조)의 개념을 완전히 부인하는 것이다. 조셉 스미스는 1839년 한 설교를 통해 “육지, 물, 기타 등등 이 모든 것들은 영원히 원소의 형태로 존재했었다”32고 전했다. 하나님께서는 기존의 원소들로 이 세상을 조직하셨다.

조셉 스미스는 생애 마지막 2년 동안 신성한 본질과 승영이라는 주제에 대해 계속해서 계시를 받았다. 승영과 영원한 결혼의 관계에 대해 1843년 7월에 기록된 한 계시에서 주님께서는 영원한 결혼의 성약을 포함해 성약을 지키는 자들은 “모든 높음과 깊음”을 상속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또한 이 계시에는 “그때에 그들은 신이 되리니, 이는 그들에게 끝이 없음”이며, 그들은 “영원무궁하도록 자손이 …… 계속되[리라]”33고 나와 있다.

이듬해 4월, 그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지금보다 더 가까웠던 적이 없었음”34을 느끼며 교회 대회에 모인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본질과 인간의 미래에 대해 말씀했다. 이때 조셉 스미스는 한 달 전에 예기치 않게 세상을 떠난 킹 폴렛트라는 교회 회원의 죽음에 대해서 회고하는 기회도 가졌다. 그가 말씀하기 위해 일어났을 때 바람이 불고 있었고, 이에 조셉은 성도들에게 “주의를 기울이고” “주님께서 [자신의] 폐를 강하게 하시[어]” 말씀을 마칠 때까지 바람을 잔잔하게 해 주시도록 기도해 달라고 부탁했다.35

“하나님은 어떤 존재이십니까?”하고 그는 물었다. 그는 “만일 인간이 하나님의 성품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그들 자신에 대해서도 이해하지 못[하기]”36 때문에 인간은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그 표현을 통해 선지자 조셉 스미스는 수 세기에 걸친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간극에 대한 혼란을 종식했다. 인간의 본성은 근본적으로 신성하다. 하나님은 “한때 우리와 같았으며”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보내신 모든 영들”은 똑같이 “발전할 수 있는 여지가 있다.” 조셉 스미스는 세상이 만들어지기 훨씬 이전에 하나님께서 이러한 존재들 “가운데 직접” 거하셨으며, “그 존재들이 자신과 같이 발전”37하여 자신과 함께 “승영”38할 “특권을 가질 수 있도록 법을 제정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보셨음”을 가르쳤다.

조셉은 모인 성도들에게 “여러분은 신이 되는 법을 스스로 배우셔야 합니다.”39라고 말씀했다. 그렇게 하기 위해 성도들은 하나님의 성품, 즉 하나님과 같이 되는 법을 배워야 했다. 이는 계속 진행되는 과정이며, 인내심, 신앙, 지속적인 회개, 복음 계명에 대한 순종, 그리스도에 의지하는 것 등을 필요로 한다. 사다리를 오르는 것처럼 “복음의 첫째 되는 원리”를 배우고, 때가 되면 “복음의 마지막 원리를 배울” 수 있을 때까지 필멸의 지식의 한계를 넘어서 계속되어야 한다.40 “이 지상에서 모든 것을 다 이해할 수는 없습니다.”라고 조셉은 말했다.41 “모든 것을 이해하려면 죽음 이후에도 오랜 시간이 걸릴 것입니다.”42

선지자 조셉이 대회에서 말씀한 것은 이것이 마지막이었다. 석 달 뒤, 카테지 감옥을 기습한 폭도들로 인해 조셉과 그의 형 하이럼은 순교했다.

조셉 스미스 이후 교회에서는 신성한 본질에 대해 어떻게 가르쳐 왔는가?

킹 폴렛트 설교로 알려진 그 가르침 이후, 교회에서는 인간이 승영 및 하나님과 같은 성품으로 발전할 수 있다는 교리를 가르쳐 왔다. 제5대 교회 회장인 로렌조 스노우는 대구법을 사용해 다음과 같은 유명한 시를 지었다. “하나님도 한때는 지금 우리와 같은 인간이셨으니 우리 인간도 언젠가는 하나님이 될 수 있으리”43 이 시의 전반부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진 바가 없으며, 따라서 거의 가르쳐지지도 않았다. 1997년, 한 기자로부터 이 주제에 관한 질문을 받은 고든 비 힝클리 교회 회장은 이렇게 대답했다. “그것은 우리가 잘 알지 못하는 아주 심오한 신학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인간의 신성한 잠재력에 관한 믿음에 대해 질문을 받자 힝클리 회장은 이렇게 답했다. “인간은 하나님과 같이 될 수 있습니다. 저희는 영원한 발전을 믿습니다. 그것도 아주 강하게 믿고 있습니다.”44

교회 지도자이자 시인인 엘리자 알 스노우는 우리가 완전하고도 절대적인 의미에서 하나님의 자녀라는 교리를 기뻐하며 다음과 같은 시를 지었다. “당신이 우리 아버지인 줄 성령으로 아나이다 지식의 열쇠 회복되기 전 참 그 이유 몰랐으매” 후기 성도는 또한 하늘의 부모에는 하늘 아버지뿐만 아니라 하늘 어머니도 포함된다는 사실에 깊은 영향을 받아 왔다. 엘리자 알 스노우는 그 진리에 대해 “하늘의 부모가 홀몸[인가?]”라고 물으며, 아니오라는 대답을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어머니 역시 계심을 [영원한 진리] 말하네”45 이 지식은 후기 성도의 믿음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십이사도 정원회의 댈린 에이치 옥스 장로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의 신학은 하늘 부모에게서 시작되었고, 가장 큰 소원은 그분들처럼 되는 것입니다.”46

인간의 신성한 본질과 승영을 위한 잠재력은 연차 대회 말씀, 교회 잡지 및 기타 교회 자료들을 통해 계속 가르쳐지고 있다. “신성한 성품”은 교회 청녀 프로그램의 여덟 가지 핵심 가치관 중 하나이다. 인간의 신성한 혈통, 본질 및 잠재력에 관한 가르침은 “가족: 세상에 전하는 선언문”에 잘 나와 있다. 신성한 본질과 승영은 교회의 필수적이면서도 소중한 가르침이다.

승영을 믿는 후기 성도는 다신론자인가?

인간이 신이 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교리는 일부 사람들에게 신위를 다투는 고대 판테온을 연상시킬 수도 있다. 그러한 이미지는 후기 성도 교리와 맞지 않는다. 후기 성도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언제나 그분을 섬길 것을 믿는다. 우리의 발전은 우리 아버지이자 하나님이신 그분의 정체성을 결코 바꾸지 않을 것이다. 실제로 우리가 승영하여 아버지와 누리는 영원한 관계는 그분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충만한 기쁨”의 일부가 될 것이다.

후기 성도는 또한 근본적으로 신의 화합을 강하게 믿는다. 그들은 아버지 하나님과 아들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성신이 별개의 존재이기는 하지만 목적과 교리에서 하나가 된다고 믿는다.47 후기 성도는 예수님이 그분의 제자들을 위해 드린 다음 기도를 그와 같은 의미로 조명한다.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소서]”48

인간이 하나님의 선하심에 부합되지 않는 삶을 산다면 그들은 하나님의 영광에 이를 수 없다. 조셉 스미스는 “하늘의 권능은 의의 원칙이 아니고서는 통제되거나 다루어질 수 없다”고 가르쳤다. 인간이 하나님의 이타적인 목적과 표준을 저버릴 때, “여러 하늘은 스스로 물러가며, 주의 영은 심히 슬퍼하[게 된다.]”49 교만은 발전과 양립할 수 없으며, 승영을 이룬 존재들 간의 분열은 불가능하다.

후기 성도는 승영을 어떻게 바라보는가?

현실에 대한 인간의 개념은 어쩔 수 없이 필멸의 세계에 제한되어 있기 때문에, 여러 종교들은 영원한 영광에 대한 자신들의 비전을 적절하게 설명하려고 노력한다. 사도 바울이 기록한 것처럼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에 생각하지도 못하였다”50 이러한 한계 때문에 구원에 대한 이미지는 대중 문화상에서 표현될 때 희화되기 쉽다. 예를 들어, 구원이 가져다 주는 깊은 평화와 넘치는 기쁨에 대한 경전 구절은 잘 알려진 대로 죽은 뒤 구름 위에 앉아 하프를 연주하는 사람의 이미지로 흔히 묘사되곤 한다. 후기 성도의 승영에 대한 교리 역시 마찬가지로 미디어상에서 각자 자기의 행성을 받는 사람들의 우스꽝스러운 이미지로 곧잘 격하된다.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이 영감에 찬 음악을 통해 영원한 구원에 대한 기쁨을 조금이나마 느낄 수 있다고 할지라도 구름과 하프가 영원한 기쁨을 나타내기에는 만족스러운 이미지라고 할 수 없다. 마찬가지로, 후기 성도를 자신의 행성을 가진 풍자화로 표현하는 것에 동의하는 극히 소수의 회원들이 있을지라도, 대부분의 후기 성도는 하나님의 창조물에 대한 경외감이 영원한 세상에서 발휘하게 될 우리의 잠재되어 있는 창조력을 암시한다는 데 동의할 것이다.

후기 성도는 필멸의 경험에서 거룩한 것들에 대한 관점으로 승영을 바라본다. 그들은 자녀를 낳고 양육하는 기쁨과 그 자녀들에 대해 느끼는 강한 사랑 안에서, 타인에 대한 온정적인 봉사를 통해 도움의 손길을 전하려는 자연스러운 욕구 안에서, 예기치 않게 세상의 아름다움과 질서에 마음을 빼앗긴 순간에, 신성한 성약을 맺고 지킴으로써 얻는 확고한 느낌을 통해 신성의 씨앗을 확인한다. 교회 회원들은 승영에 대해 그들이 무엇을 얻게 될지보다는 지금 그들이 맺고 있는 관계와 그 관계가 어떻게 정화되며 발전할 수 있는지를 더 생각한다. 경전에는 이러한 가르침이 나온다. “여기에서 우리 가운데 존재하는 것과 똑같은 사귐이 그 곳에서도 우리 가운데 존재하리라. 다만 그 사귐에는 지금 우리가 향유하지 못하는 영광, 곧 영원한 영광이 수반되리라.”51

승영에 관한 가르침이 전반적으로 후기 성도들의 믿음에 얼마나 중요한가?

인간에게 신성한 본질과 미래가 있다는 가르침은 후기 성도가 핵심 교리를 바라보는 방식에 영향을 미친다. 아마도 가장 중요한 것은, 신성한 본질에 대한 믿음 덕분에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에 더욱 깊이 감사하게 된다는 것이다. 많은 기독교 신학자들이 인간의 부패 행위를 강조함으로써 구주의 속죄의 위대함을 드러낸 반면, 후기 성도는 구주의 속죄를 통해 가능하게 된 인간의 엄청난 잠재력이라는 면에서 그리스도의 속죄의 위대함을 이해한다. 그리스도의 속죄는 죄 사함과 사망의 극복을 가능케 할 뿐 아니라, 불완전한 관계를 회복하고, 성장을 저해하는 영적 상처를 치유하며,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성품을 키우도록 강화한다.52 후기 성도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를 통해서만 영원한 영광에 대한 확실한 소망을 가질 수 있으며,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 회개, 침례, 성신의 은사를 받음,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모범을 따르며 끝까지 견딤으로써만 그분의 속죄의 권능이 온전하게 적용될 수 있다고 믿는다.53 이로써, 하나님과 같이 되어 그분의 영광의 충만함에 이른 자들은 “예수 곧 자신의 피 흘림을 통하여 이 완전한 속죄를 이루신 새 성약의 중보자 예수를 통하여 온전하게 된”54 자들로 묘사된다.

인간의 신성한 잠재력에 대한 인식은 또한 후기 성도가 신성한 계명의 중요성, 성전의 역할, 개인의 도덕적 선택의지의 존엄성 등과 같은 복음 원리를 이해하는 데 영향을 미친다. 인간이 실제로 하나님의 자녀라는 믿음은 또한 후기 성도의 행동과 태도를 변화하게 한다. 예를 들어, 가벼운 혼전 성관계가 용인되는 사회에서도 후기 성도는 인간의 성관계에 대해 하나님이 주신 유대감과 생식력을 깊이 경외하고, 그러한 거룩한 능력을 사용할 때 더 높은 표준을 따르겠다고 다짐한다. 연구에 의하면 후기 성도는 결혼 생활과 부모로서의 역할에 특별히 최우선 순위를 둔다고 한다.55 이는 하늘 부모에 대한 강한 믿음과 그 신성을 성취하고자 하는 다짐에서 어느 정도 기인한 결과이다.

결론

모든 인간은 사랑 충만한 하늘 부모의 자녀이며, 그들에게는 신성의 씨앗이 내재되어 있다. 무한한 사랑을 지닌 하나님께서는 자녀들에게 하나님의 은혜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를 통해 그 영원한 잠재력을 함양하도록 권고하신다.56 하나님 아버지와 같이 되는 인간의 영원한 잠재력에 관한 교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중심이 되며, 충실한 후기 성도들의 마음속에 사랑과 소망, 그리고 감사의 마음을 불어넣는다.

  1. “가족: 세상에 전하는 선언문”, 리아호나, 2010년 11월호, 129쪽.

  2. “가족: 세상에 전하는 선언문”, 129쪽.

  3. 창세기 1:26~27.

  4. 창세기 2:17; 3:22.

  5. 시편 82:6.

  6. 요한복음 10:33~34.

  7. 마태복음 5:48. 마태복음 5:48에 나오는 온전하다라는 단어는 멀리 떨어진 목표와 계속되는 집중적 노력을 수반하는 완전하다로 번역될 수 있다.(러셀 엠 넬슨 장로, “언젠가는 실현될 온전함”, 리아호나, 1996년 1월호, 86쪽 참조.)

  8. 베드로후서 1:4.

  9. 사도행전 17:29; 로마서 8:16~17.

  10. 요한계시록 3:21.

  11. Norman Russell, The Doctrine of Deification in the Greek Patristic Tradition (2004), 6.

  12. Irenaeus, “Against Heresies,” in Alexander Roberts and James Donaldson, eds., The Ante-Nicene Fathers: Translations of the Writings of the Father Down to A.D. 325 (1977), 1:526.

  13. Clement, “Exhortation to the Heathen,” in Roberts and Donaldson, Ante-Nicene Fathers, 2:174.

  14. Saint Basil the Great, “On the Spirit,” in Philip Schaff and Henry Wace, eds., A Select Library of Nicene and Post-Nicene Fathers of the Christian Church, 2nd series (1994), 8:16.

  15. 교부들의 생각과 후기 성도의 가르침 간에는 유사점은 물론 중요한 차이점도 있을 것이다. 후기 성도들이 이해하는 승영과 동방 정교회에서 이해하는 신화에 관한 교부들의 성명 간의 유사점과 차이점에 대한 논고를 보려면 다음을 참조한다. Jordan Vajda, “Partakers of the Divine Nature: A Comparative Analysis of Patristic and Mormon Doctrines of Divinization,” Occasional Papers Series, no. 3 (2002). maxwellinstitute.byu.edu에서 열람 가능.

  16. Vladimir Kharlamov, “Rhetorical Application of Theosis in Greek Patristic Theology,” in Michael J. Christensen and Jeffery A. Wittung, eds., Partakers of the Divine Nature: The History and Development of Deification in the Christian Traditions (2008), 115 참조.

  17. Russell, Doctrine of Deification, 1쪽에서 인용. 이탤릭체 추가.

  18. 2세기의 교부 유스티누스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태초에 하나님께서 그분의 선하심으로 인간을 위해 완전히 형성되지 않은 물질에서 모든 것을 창조하셨다고 가르쳐 왔다.”(The First Apology of Justin, in Roberts and Donaldson, Ante-Nicene Fathers, 1:165; 또한 Frances Young, “‘Creatio Ex Nihilo’: A Context for the Emergence of the Christian Doctrine of Creation,” Scottish Journal of Theology 44, no. 1 [1991]: 139–51; Markus Bockmuehl, “Creation Ex Nihilo in Palestinian Judaism and Early Christianity,” Scottish Journal of Theology 66, no. 3 [2012]: 253–70 참조.)

  19. creation ex nihilo(무로부터의 창조)라는 개념의 시초가 되었던 2세기의 정황에 관해 알아보려면, 다음을 참조한다. Gerhard May, Creatio Ex Nihilo: The Doctrine of ‘Creation out of Nothing’ in Early Christian Thought (2004).

  20. Terryl L. Givens, When Souls Had Wings: Pre-Mortal Existence in Western Thought (2010) 참조.

  21. 서양 기독교에서 신이 될 수 있다는 교리가 케임브리지 플라톤 학파라고 하는 17세기 영국 성직에 있는 학자들 사이에서 소소하게 부활했다.( Benjamin Whichcote, “The Manifestation of Christ and the Deification of Man,” in C. A. Patrides, ed., The Cambridge Platonists [1980], 70 참조.)

  22. “The Place of Theosis in Orthodox Theology”에서 앤드류 라우스는 동방 정교회를 “창조에서부터 신이 될 수 있다는 개념까지를 아우르는 좀 더 넓은 범위의 발전”에 중점을 두었다고 설명하고, 가톨릭과 개신교 신학은 “타락에서부터 구속까지를 아우르는 좀 더 부분적이고 좁은 범위”에 중점을 두며 이로써 전체 범위를 배제했다고 여긴다.(in Christensen and Wittung, Partakers of the Divine Nature, 35)

  23. Westminster Confession of Faith, chap. 2 (1646).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은 1646년, 웨스트민스터 회의에서 영국 국교회의 교리, 예배 및 관리에 대한 표준으로 작성했다. 그 내용은 작성 이래로 다수의 개신교 교회의 교의적 안내서 역할을 해 왔다.

  24. 이더서 3:6; 또한 교리와 성약 130:22; 모세서 6:8~9 참조. 하나님의 형상에 관한 조셉의 가르침을 보려면, 다음을 참조한다. David L. Paulsen, “The Doctrine of Divine Embodiment: Restoration, Judeo-Christian, and Philosophical Perspectives,” BYU Studies 35, no. 4 (1995–96): 13–39. byustudies.byu.edu에서 열람 가능.

  25. 창세기 5:22.

  26. 모세서 7:31~37 참조. 이러한 모습의 심오한 의미에 대해 알아보려면, 다음을 참조한다. Terryl Givens and Fiona Givens, The God Who Weeps: How Mormonism Makes Sense of Life (2012).

  27. 모세서 1:39.

  28. 교리와 성약 76:53, 58.

  29. 교리와 성약 88:107.

  30. 댈린 에이치 옥스,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두지 말라”, 리아호나, 2013년 11월호; 러셀 엠 넬슨, “구원과 승영”, 리아호나, 2008년 5월호 참조; 또한 신앙개조 제3조 참조.

  31. 교리와 성약 93:29, 33.

  32. Joseph Smith, remarks, delivered before Aug. 8, 1839, in Andrew F. Ehat and Lyndon W. Cook, eds., The Words of Joseph Smith: The Contemporary Accounts of the Nauvoo Discourses of the Prophet Joseph (1980), 9; josephsmithpapers.org에서도 열람 가능.

  33. 교리와 성약 132:19~20.

  34. 윌포드 우드럽 일지, 1844년 4월 6일, 교회 역사 도서관, 솔트레이크시티.

  35. 1844년 4월 7일 설교, 윌리엄 클레이튼이 기록함, josephsmithpapers.org에서 열람 가능. 킹 폴렛트 설교가 신성한 본질과 승영에 관한 조셉 스미스의 논고 중 가장 상세하게 알려진 것이기는 하지만, 설교가 있었던 날 바람과 필기 기술의 제한으로 인해 설교에서 조셉이 사용했던 정확한 혹은 완전한 표현에 대해서는 불확실하게 남아 있다는 점을 기억하는 것이 중요하다. 불완전하기는 하지만, 네 명의 증인이 작성한 부분적인 기록과 초기에 출판된 기록을 통해 조셉이 그날 무엇을 가르쳤는지에 대한 기록을 알 수 있으며, 그가 가르쳤던 것은 여러 경전 구절의 의미에 통찰력을 더해 준다. 하지만 남아 있는 설교 원문은 정경으로 인정되지 않으며, 그 안에 담긴 내용은 물론 그 자체로서도 교리적 표준으로 간주되지 않는다. 윌라드 리차즈, 윌리엄 클레이튼, 토마스 불럭, 윌포드 우드럽의 기록 및 1844년 8월 15일자 Times and Seasons를 보려면, 조셉 스미스 기록 모음집 웹사이트에서 “Accounts of the ‘King Follett Sermon’”을 참조한다.

  36. 1844년 4월 7일 설교, 윌라드 리차즈가 기록함, josephsmithpapers.org에서 열람 가능, 철자는 현대식으로 수정함.

  37. 1844년 4월 7일 설교, 윌리엄 클레이튼이 기록함, josephsmithpapers.org에서 열람 가능.

  38. 1844년 4월 7일 설교, 윌포드 우드럽이 기록함, josephsmithpapers.org에서 열람 가능, 철자는 현대식으로 수정함.

  39. 1844년 4월 7일 설교, 윌리엄 클레이튼이 기록함, josephsmithpapers.org에서 열람 가능.

  40. 1844년 4월 7일 설교, 토마스 불럭이 기록함, josephsmithpapers.org에서 열람 가능.

  41. 1844년 4월 7일 설교, 윌리엄 클레이튼이 기록함, josephsmithpapers.org에서 열람 가능.

  42. 1844년 4월 7일 설교, 윌포드 우드럽이 기록함, josephsmithpapers.org에서 열람 가능.

  43. Eliza R. Snow Smith, Biography and Family Record of Lorenzo Snow (1884), 46. 이 시는 정식으로 편찬된 적은 없으며, 조금씩 다른 방식으로 표현되어 왔다. 다른 예를 보려면, 다음을 참조한다. The Teachings of Lorenzo Snow, ed. Clyde J. Williams (1996), 1–9.

  44. Don Lattin, “Musings of the Main Mormon,” San Francisco Chronicle, Apr. 13, 1997; 또한 David Van Biema, “Kingdom Come,” Time, Aug. 4, 1997, 56 참조.

  45. 먼저 시로 출판되고, 나중에 유명한 찬송가가 되었다.(Eliza R. Snow, “My Father in Heaven,” Times and Seasons, Nov. 15, 1845, 1039; “오 높은 영광 보좌”, 찬송가, 139장; 또한 Jill Mulvay Derr, “The Significance of ‘O My Father’ in the Personal Journey of Eliza R. Snow,” BYU Studies 36, no. 1 [1996–97]: 84–126 참조, byustudies.byu.edu에서 열람 가능.) 하늘 어머니에 대한 후기 성도의 견해를 보려면, 다음을 참조한다. David L. Paulsen and Martin Pulido, “‘A Mother There’: A Survey of Historical Teachings about Mother in Heaven,” BYU Studies 50, no. 1 (2011): 70–97. byustudies.byu.edu에서 열람 가능.

  46. 댈린 에이치 옥스, “배도와 회복”, 리아호나, 1995년 7월호, 84쪽.

  47. 교리와 성약 130:22 참조.

  48. 요한복음 17:21.

  49. 교리와 성약 121:36~37.

  50. 고린도전서 2:9.

  51. 교리와 성약 130:2.

  52. 앨마서 7:11~12 참조.

  53. 니파이후서 31:20; 신앙개조 제4조 참조.

  54. 교리와 성약 76:69.

  55. “Mormons in America—Certain in Their Beliefs, Uncertain of Their Place in Society,” Pew Research, Religion and Public Life Project, Jan. 12, 2012 참조, pewforum.org에서 열람 가능.

  56. 모로나이서 10:32~33; 경전 안내서 “은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