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 후기 성도들이 경험한 평화와 폭력
예수 그리스도 후기 성도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기초를 두고 있다. 교회의 교리와 실천 면에서 중심이 되는 것은 평화와 사랑 및 용서라는 덕성이다. 후기 성도는 신약전서와 몰몬경에 나오는 구주의 선언을 믿는다.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1 주님은 후기 성도 경전에서 그분을 따르는 자들에게 “전쟁을 거부하고 평화를 선포하[라]”고 명하셨다.2 후기 성도인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돌이킨 자들은 “서로 상하게 하려는 마음을 갖지 아니할 것이며, 도리어 평화롭게 살려 [할]” 것이라고 가르친 몰몬경의 선지자이자 왕인 베냐민의 권고를 따르고자 힘쓴다.3
초기 후기 성도들은 이러한 이상을 품었음에도 쉽게 평화를 누리지 못했다. 그들은 믿음 때문에 박해를 받았으며, 종종 폭행을 당하기까지 했다. 그리고 애석하게도 19세기의 어느 시점에서 교회의 일부 회원은 적으로 인식되는 사람들에 대항해 마운틴 메도우즈에서 벌어진 대학살로 잘 알려진 끔찍한 폭력 행위에 가담했다. 이 글에서는 후기 성도에 가해진 폭력과 아울러 후기 성도가 저지른 폭력에 관해 다루고자 한다. 역사적 맥락은 이런 폭력 행위에 대한 이해를 밝히는 데 도움이 될지언정 그런 행위를 정당화하지는 못한다.
1830년대와 1840년대의 종교적 박해
교회가 조직된 후 처음 20년 동안 후기 성도들은 종종 폭력의 희생양이 되었다. 1830년에 조셉 스미스가 뉴욕에서 교회를 조직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조셉과 교회 회원들은 뉴욕 서쪽의 오하이오와 미주리 및 일리노이에 있는 지역에 정착하기 시작했다. 성도들은 몇 차례에 걸쳐 하나님을 예배하고 평화롭게 살 수 있는 시온 사회를 건설하려고 힘썼지만, 강압적이고 폭력적인 근절 조치로 그런 희망이 산산조각이 나는 것을 지켜봐야 했다. 폭도들은 1833년에 미주리 주 잭슨 군에서, 그리고 1838년 10월 하순 주지사가 몰몬들을 주에서 추방 또는 “근절시킨다”는 명령을 내리자 1839년 미주리 주에서,4 또 1848년에는 일리노이 주 나부 시에서 후기 성도들을 쫓아냈다. 후기 성도들은 나부에서 쫓겨난 후 대평원을 가로질러 유타로 가는 힘겨운 여정에 나섰다.5
이런 어려움에 직면하면서도 후기 성도들은 조셉 스미스에게 주어진 계시, 곧 주위 사람들과 평화롭게 지내라는 권고대로 살려고 힘썼다. 그렇지만 오하이오와 미주리 및 일리노이의 적대자들은 성도들의 믿음과 사회적, 경제적 관행이 다른 점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또한 적대자들은 성도들의 수가 계속 늘어나자 몰몬들이 현지의 선거를 갈수록 더 좌지우지할 수 있다는데 위협을 느꼈다. 이러한 반대자들은 처음에는 말로, 그 다음에는 물리적으로 성도들을 공격했다. 또 조셉 스미스를 비롯한 교회 지도자들에게 타르를 칠하고 깃털을 꽂고 구타를 가했으며 부당하게 투옥했다. 교회의 다른 회원들도 폭력적인 범죄의 희생양이 되었다. 가장 악명높은 사건인 혼즈밀 학살에서는 적어도 17명에 이르는 9세부터 78세까지의 소년이나 성인 남자가 살해당했으며,6 미주리에서 박해 받던 기간에는 일부 후기 성도 여성이 강간 또는 성추행을 당했다.7 민병대와 폭도들은 집을 파괴하고 재산을 훔쳤으며, 성도들의 반대자 중에는 법적으로 자기 소유가 아닌 토지와 재산을 자기 것으로 만든 사람도 많았다.89
8,000명이 넘는 후기 성도가 연루된 미주리에서의 추방10이 일어난 시기는 겨울철이어서 충분한 식량과 피난처가 부족했던 수천 명의 피난민에게 고통이 가중되었으며, 그들은 때로 전염병에 노출되기도 했다.11 1839년 3월, 미주리 감옥에 수감된 조셉 스미스는 추방당한 후기 성도들의 고충에 관한 보고를 받자 “오 하나님이시여, 당신은 어디 계시나이까?”라고 외쳤으며, “오 우리 하나님이시여, 고통을 겪고 있는 당신의 성도들을 기억하시옵소서.”라고 기도했다.12
성도들은 미주리에서 쫓겨난 후, 처음에는 인접한 일리노이 주민들에게 환대를 받았으며 한동안 나부에서 평화를 되찾았다. 하지만 결국 비몰몬과 교회를 저버린 자들이 공격을 재개하자 다시금 충돌이 일어났다. 조셉 스미스와 그의 형 하이럼 스미스는 수감 중에 보호받으리라는 주지사의 약속이 있었음에도 폭도들에게 잔인하게 순교 당했다.13 이로부터 18개월 후인 1846년 2월, 성도들의 본대는 엄청난 강압 탓에 차가운 날씨 속에서 나부를 떠나야만 했다. 그들은 아이오와와 네브라스카 평원 위에 세워진, 오늘날의 피난민 수용소라 부를 만한 임시 야영지에 머물렀다. 이들 막사에 있던 성도 12명당 1명이 첫해에 사망한 것으로 추산된다.14 연로하거나 병약한 일부 성도는 처음에는 나부에 남아 나중에 성도들의 본대와 합류하기를 바랐다. 그러나 1846년 9월 폭도들은 이들을 쫓아냈으며, 그런 후 성전을 더렵혔다.15 이 성도들의 야영지를 지나던 어느 비회원은 그로부터 얼마 되지 않아 이렇게 적었다. “더디 지나가는 하루의 낮과 밤의 더위와 추위에 지쳐버린 이들은 거의 모두 불구가 된 병자들이었다. …… 그들은 병자의 연약한 호소조차 들어 줄 수 없는 형편이었고 배고파 우는 어린 아이의 시장기를 달래 줄 빵 한 조각조차 없었다.16 종교적인 집단에 가한 이런 폭력의 범위는 미합중국 역사상 전례가 없는 일이었다.
교회 지도자와 회원들은 현지 정부와 주 정부에게서 물질적인 보상을 받고자 계속 노력했다. 이러한 청원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그들은 지난 잘못을 바로잡고 미래에 보호를 받기 위해 연방 정부에 호소했지만, 소용이 없었다.17 후기 성도들은 그동안 겪은 박해와 아울러 자신들을 보호해주지도 않고 또 공격한 자들을 기소하기를 탐탁지 않게 여긴 정부 당국을 오랫동안 잊지 못했다. 성도들은 종교의 자유가 약속된 나라에서 종교적 박해를 당했다는 사실에 수시로 통탄을 금치 못했다.18 이런 박해가 이어지자 1838년을 기점으로 일부 성도는 어떤 경우에 방어적인 대처를 했으며, 때에 따라서는 자기 나름대로 보복 조치를 하기도 했다.
19세기 미합중국 내의 폭력과 자경주의
19세기 미국 사회에서 공동체의 폭력 행위는 흔한 일이었으며 종종 용납되기도 했다. 폭력의 상당수는 당시에 존재했으며, 법의 지배를 받지 않는 자경주의라는 미국 전통에 따라 성도들에 의해, 또는 성도들에 맞서 자행되었다. 이런 전통 아래서 시민들은 정부의 조치가 지나치거나 미흡하다고 여겨질 때 집단을 이루어 자기들 손으로 정의를 집행하기도 했다. 자경단원들은 보통 소수 집단, 또는 죄가 있거나 사회적으로 용납할 수 없다고 생각되는 사람들을 목표로 삼았다. 때로는 종교적으로 설득력 있는 연설이 그런 행위를 부추기기도 했다.19
공동체에 기반을 둔 민병대의 존재도 이런 자경주의 문화에 일조했다. 1792년 미 의회는 18세부터 45세 사이의 신체적 능력이 있는 모든 남성에게 지역 민병대 가입을 요구하는 법을 통과시켰다.20 시간이 흐르자 민병대는 주 방위군에 편입되었지만, 초창기 미국에서 이들은 공동체의 적으로 간주되는 개인이나 집단에 폭력 행위를 자행하기도 했다.
1830년대와 1840년대에 오하이오, 미주리, 일리노이 및 유타에 있던 후기 성도 공동체는 모두 미합중국의 서부 변경 지역에 자리 잡고 있었는데 이들 지역에서는 공동체의 폭력 행위가 이미 용인되고 있었다.
몰몬 미주리 전쟁과 단 지파
일부 후기 성도가 별도로 저지른 폭력 행위는 일반적으로 19세기 미국 변방에서 자행되던 광범위한 폭력 행위의 일부로 볼 수 있다.21 1838년, 조셉 스미스와 교회 회원들은 오하이오의 폭도들로부터 달아나 후기 성도들이 이미 정착지를 세운 미주리로 이동했다. 조셉 스미스는 불과 2년 전에 크나큰 희생을 치르고 완공한 성전이 있는 오하이오 커틀랜드의 공동체를 교회에서 배도한 자들과 그 외 적대자들이 약화시키고 결국은 무너뜨렸다고 믿었다. 1838년 여름에 이르자 교회 지도자들은 미주리에 평화로운 공동체를 만들고자 하는 목표에 이와 같은 위협이 커지는 것을 목격했다.
서부 맨 끝에 있는 정착지에서는 일부 지도자와 회원들이 단 지파로 알려진 무장 단체를 조직했다. 이 단체의 목적은 배도한 자나 파문된 후기 성도뿐 아니라 미주리인으로부터 공동체를 지키려는데 있었다. 역사가들은 조셉 스미스가 단 지파를 승인하기는 했으나 아마 이들의 모든 계획을 보고받지 못했으며, 활동 전체를 승인하지는 않았을 것이라는데 일반적으로 동의한다. 단 지파는 한 예로 일부 적대자들에게 콜드웰 카운티를 떠나라고 경고하는 등 교회의 적대자들과 미주리인들을 위협했다. 1838년 가을이 되자 지금은 몰몬 미주리 전쟁으로 알려진 기간 동안 긴장이 고조되어 단 지파는 대다수가 후기 성도로 구성된 민병대에 흡수되었다. 이 민병대는 미주리의 반대자들과 충돌하여 양쪽에 사망자가 발생하기도 했다. 이 밖에도 다수의 단 지파를 비롯한 몰몬 자경단원들은 집을 태우고 재물을 빼앗는 행위 같은 반몰몬 활동의 중심지로 생각되는 두 마을을 공격했다.22 단 지파의 존재는 그리 오래가지 못했으나 몰몬 자경단원이라는 비밀 결사에 관한 오래되고 과장이 심한 이야기들을 낳는 결과를 초래했다.
미주리에서 이들이 겪은 일의 결과로서 후기 성도들은 일리노이로 이주한 후 자신들을 지키기 위해 규모가 크고 주의 승인을 받은 민병대인 나부 부대(Nauvoo Legion)를 만들었다. 이 민병대는 후기 성도를 적으로 보는 많은 사람에게 두려움을 안겼다. 하지만 이 부대는 공격적이거나 보복적인 행동은 피했다. 폭도들이 1844년 6월에 조셉 스미스와 그의 형 하이럼 스미스를 살해하게 한 위기 상황이나 그 후 잇따른 사건 속에서도 대응을 하지 않았다. 일리노이 주지사가 부대를 해산하라고 명령했을 때도 성도들은 그 지시를 따랐다.23
유타 준주에서의 폭력
유타에서는 정착이 시작된 첫 10년 동안(1847~1857) 적으로 간주하는 사람들에 대한 성도들의 공격이나 보복 행위가 가장 빈번하게 일어났다. 이전에 받은 박해와 로키 산맥으로의 여정에 따른 상처가 개인적으로 아직도 생생하게 남아 있는 사람이 많았기 때문이다. 성도들은 유타 사막에서 삶을 개척하는 동안 여전히 어려움에 직면했다. 후기 성도가 유타에서 성공리에 과업을 이루기까지에는 여러 가지 방해 요소가 작용했다. 몰몬들의 정착과 확산으로 쫓겨난 아메리카 인디언과의 갈등, 특히 1852년에 있었던 복수결혼에 관한 공식 발표 후 생긴 미합중국 연방 정부의 압력, 불확실한 토지 소유권 문제, 그리고 급속히 팽창하는 인구 문제 등이 그것이었다. 공동체 지도자들은 교회의 영적 복지뿐 아니라 회원들의 물리적 생존에 관해서도 끊임없이 책임감을 느꼈다. 교회 회장이자 준주 지사인 브리검 영을 비롯한 여러 지도자는 교회 직분과 공직을 동시에 지니고 있었다.
후기 성도와 아메리카 인디언과의 관계
접경 지역의 다른 정착민들처럼 후기 성도들 역시 아메리카 인디언이 이미 거주하던 지역을 점령했다. 유럽에서 이주한 정착민들과 미합중국의 군사 및 정치 조직이 여러 인디언 부족을 괴멸하고 다른 사람들을 유린한 비극적인 역사는 역사가들이 잘 기록해 왔다. 일부 후기 성도를 비롯한 정착민들은 19세기 내내 수많은 분쟁을 겪는 동안 인디언들을 학대하고 죽였으며, 그들을 살기 좋은 땅에서 보호 구역으로 내몰았다.
후기 성도들은 대다수의 다른 미국인과는 달리, 인디언들을 택함 받은 백성이자 몰몬경에 나오는 백성의 후손인 동료 이스라엘 민족으로 보며, 따라서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상속자로 간주한다. 브리검 영은 교회 회장이자 준주 지사, 그리고 인디언 문제의 관리자로서 인디언 거주 지역에 몰몬 정착지를 개척하는 동안 평화 정책을 추구했다. 후기 성도들은 인디언 언어를 배우고 교역 관계를 이룩했으며, 복음을 전파하고 일반적으로 인디언들과 사이좋게 지내고자 힘썼다.24 그렇지만 이런 정책이 계속 유지되거나 적용되지는 못했다.25
후기 성도와 인디언 간의 평화로운 공존은 모범적이면서도 이상적인 일이었다. 하지만, 어떤 경우 교회 회원들은 인디언들과 격렬하게 충돌하기도 했다. 이 두가지 문화, 즉 유럽인과 아메리카 인디안 사이에는 토지와 재산 사용에 관한 추정 방식에 엄청난 차이가 있어 서로를 잘 이해하지 못했다. 몰몬들은 이따금 인디언들을 절도죄로 고소하기도 했다. 한편, 인디언들은 몰몬들이 인디언 부족의 땅에서 생산한 물자와 가축을 공유할 책임이 있다고 믿었다. 인디언들은 몰몬들이 정착한 지역에서 유럽인들을 상대한 경험은 이전에 사냥꾼이나 모피상과 더불어 상호 유익이 되는 거래를 한 것이 대부분이었다. 이들은 인디언 구역을 통과하거나 잠시 머물렀을뿐, 몰몬들이 그랬던 것처럼 토지에 대한 영구적인 소유권이 있다고 주장하지는 않았다. 이러한 오해로 두 백성 간에는 마찰과 폭력이 발생하게 되었다.26
1849년 말, 한 몰몬이 셔츠를 훔쳤다고 고소했던, Old Bishop으로 알려진 한 우트 인디언을 살해하자 몰몬과 우트 족 간의 긴장이 고조되었다. 그 몰몬과 무리 두 명은 그 당시 희생자의 시신을 프로보 강에 숨겼다. 적어도 처음에는 살인에 관한 자세한 내용이 브리검 영과 다른 지도자들에게 알려지지는 않은 것 같다. 그렇지만 포트유타 정착민들은 인디언들의 정착민에 대한 총기 발사와 가축 및 작물 갈취를 비롯하여 인디언들로 인해 생긴 다른 어려움을 보고했다. 브리검 영은 ”여러분의 요새를 지키고 자기 일만 신경 쓰십시오. 인디언의 일은 인디언에게 맡기십시오.“라고 말하며 인내심을 발휘하라고 권고했다.27 그럼에도 포트유타에서의 긴장이 고조된 부분적인 이유는 현지의 몰몬들이 Old Bishop의 살해 사건에 연루된 자들을 우트 족에게 넘겨주지도 않고 물질적인 보상마저 거부했기 때문이다. 1849년과 1850년 사이의 겨울에는 몰몬 정착민에게서 우트 족 야영지에 퍼진 유행성 홍역으로 많은 인디언이 목숨을 잃고 긴장은 극에 달했다. 1850년 1월 31일, 솔트레이크시티에서 있었던 교회 지도자 평의회에서 포트유타의 지도자는 우트 족의 행동과 의도가 갈수록 공격적이 되어 간다며 이렇게 보고했다. ”저들은 우리 소들을 사냥할 생각입니다. 더 나아가 다른 인디언들로 하여금 우리를 죽이라고 설득할 것이라고 말합니다.“28 영 지사는 이에 응하여 우트 족에 대한 군사 행동을 승인했다. 1850년 2월, 일련의 전투로 수십 명의 우트 족과 몰몬 한 명이 죽었다.29 이 사건과 아울러 다른 일로 일부 후기 성도는 원주민들에게 과도한 폭력도 불사하겠다고 다짐했다.30
이런 일이 있긴 했으나 성도들은 대부분 미 서부의 다른 지역 정착민보다 인디언들과 더 원만한 관계를 유지했다. 브리검 영은 몇몇 아메리칸 인디언 지도자와 돈독한 관계를 맺었으며 백성에게 가능한 한 인디언 이웃과 평화롭게 지내라고 가르쳤다.31 어떤 인디언들은 우호적이라고 간주한 ”Mormonees“을 ”Mericats“로 알려진 다른 미국 정착민들과 구별 짓기도 했다.32
”개혁“과 유타 전쟁
1850년대 중반에는 교회 내의 ”개혁“과 더불어 유타의 후기 성도와 미 연방 정부 사이의 갈등으로 후기 성도에게 피포위 심리(항상 적들에게 둘러싸여 있다고 믿는 강박 관념-옮긴이)를 불러일으키고 박해 받는 느낌을 일깨워 교회 회원들로 하여금 몇 가지 폭력적인 사건을 저지르게 했다. 성도들의 영적 태만을 염려한 브리검 영과 교회 지도자들은 회개하고 영적 다짐을 새로이 하라는 일련의 설교를 했다.33 이런 개혁으로 더 나은 사람이 되겠다고 간증하는 성도가 많았다.34
19세기 미국인들은 종교적으로나 다른 면에서 폭력적인 언어에 익숙해 있었다. 부흥 운동가들은 이 세기 동안 격한 수사적 표현을 사용하여 개심하지 않은 사람들에게 회개를 권유하고 영적으로 게으른 사람들에게 개혁을 촉구했다.35 이런 개혁의 시기에 영 회장과 그의 보좌인 제데디아 엠 그랜트 및 그 외 지도자들은 격앙된 설교로 교회로부터 등을 돌리거나 교회를 반대한 자들의 죄악을 경고하곤 했다. 지도자들은 성서에 나오는 구절, 특히 구약전서를 사용하여 어떤 죄는 너무나 심각하므로 용서를 받으려면 범법자가 피를 흘려야만 할 것이라고 가르쳤다.36 이러한 설교는 연방 정부에서 임명한 관리들을 비롯한 상대적으로 소수인 비몰몬과 후기 성도 간의 긴장을 고조시켰다.
1857년 초, 제임스 뷰캐넌 미 대통령은 영 지사와 유타의 후기 성도들이 연방 정부 당국에 반역을 획책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보고서를 받았다. 유타의 입법 기관이 연방 정부에 보낸 보고서는 강한 어조로 쓰여져 있어서 연방 정부 관리들로 하여금 그 보고서가 사실이라고 믿게 했다. 뷰캐넌 대통령은 브리검 영을 지사 직에서 축출하기로 마음먹고 그의 후임자를 호위하기 위해 유타에 군대를 보냈는데 이 사건은 유타 전쟁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후기 성도들은 이미 주둔 중인 약 1,500명의 군대에 증원군까지 오게 되면 미주리와 일리노이에서 자행되었던 약탈이 재개되고 집에서 쫓겨날까 봐 두려움을 금치 못했다. 게다가 십이사도 정원회의 일원인 팔리 피 프랫이 1857년 5월 아칸소에서 살해되었다. 살해 소식과 아울러 이 범죄를 찬양한 미 동부의 신문 보도가 1857년 6월 말에 유타에 전해졌다.37 이런 일들이 발생하자 브리검 영은 준주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멀리 떨어진 지역에 있는 선교사와 정착민에게 유타로 돌아오라고 지시했으며 군대에 저항할 준비를 이끌었다. 브리검 영과 교회 지도자들의 저항적인 설교는 군대가 도착할 날이 임박했다는 사실과 더불어 유타에 두려움과 의혹이 가득한 분위기를 조성했다.38
마운틴 메도우즈 대학살
이런 긴장이 최고조에 이르렀던 1857년 9월 초, 유타 남부의 준주 민병대 지부(전원이 몰몬으로 구성된) 한 곳이 인디언을 일부 채용하여 아칸소에서 캘리포니아로 가는 이주민들의 마차 행렬을 포위했다. 이 마차 행렬이 솔트레이크시티에서 남쪽으로 이동하는 동안 이주민들은 가축에게 풀을 먹일 장소 문제로 현지 몰몬들과 심한 말다툼을 했다. 이 마차 행렬 중 어떤 이들은 절실하게 필요한 곡물이나 다른 물자들을 현지 정착민에게서 구매하기 어렵자 크게 낙담했다. 이 정착민들은 전시에 취하는 정책에 따라 곡물을 비축하라는 지시를 받은 터였다. 분개한 어떤 이주민들은 성도들과 싸우러 오는 군대에 합류하겠다고 위협했다.39
일부 성도들은 이런 위협에 개의치 않았으나 유타 시더시티의 일선 지도자들과 회원들은 무력 사용을 촉구했다. 스테이크 회장이자 민병대 지도자였던 아이작 시 하이트는 이주 행렬에 대한 공격을 이끌도록 민병대 소령인 존 디 리를 보냈다. 이 스테이크 회장이 평의회에 공격 계획을 보고하자 다른 지도자들은 이에 반대했으며 공격을 취소하고 그 대신 솔트레이크에 있는 브리검 영에게 파발을 보내어 인도를 구하자고 했다. 그러나 이주민을 공격하라고 하이트가 보낸 사람은 공격하지 말라는 명령을 받기 전에 계획을 행동에 옮기고 말았다. 이주민들은 싸우다 후퇴했으며 곧이어 포위되었다.
그 후 며칠 동안 상황은 더욱 긴박해졌고 몰몬 민병대원들은 의도적으로 학살을 계획하고 이를 실행에 옮겼다. 이들은 휴전을 알리는 백기를 거짓으로 올려 이주민들로 하여금 방어를 위해 원을 지은 마차 대열에서 물러나게 한 후, 고용한 파이우트 인디언들의 도움을 받아 이주민들을 살육했다. 첫 번째 공격과 마지막 살육 사이에 학살자들은 마운틴 메도우즈로 알려진 분지에서 120명에 이르는 남녀와 어린이의 목숨을 앗아갔다. 너무 어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알리지 못할 것으로 생각되는 아주 어린 아이들만 살아남았다. 파발은 학살이 있은 지 이틀 후에야 돌아왔다. 그는 현지 지도자들에게 이주민들을 ”건드리지 말고“ 남부 유타 통과를 허락하라는 브리검 영의 서신을 들고 왔다.40 민병대원들은 일부가 교회 회원이었던 현지의 파이우트 족에게 모든 잘못을 덮어씌우고 범죄 사실을 숨기려 했다.
마침내 후기 성도 두 명이 그 일로 교회에서 파문되었으며, 후기 성도들이 포함된 대배심원들은 아홉 사람을 기소했다. 이 중 한 사람인 존 디 리는 브리검 영이 학살을 명령했다는 거짓 주장을 퍼트리다가 결국 유죄 선고를 받고 처형되었다.
최근 여러해 동안 교회는 이 학살에 관해 가능한 모든 사실을 파악하고자 부단히 힘써왔다. 2000년대 초, 예수 그리스도 후기 성도 교회의 교회 역사부에 소속된 역사가들은 역사 기록을 위해 미국 전역에 있는 기록 보관소들을 샅샅이 뒤졌으며, 학살에 관한 교회의 모든 기록도 정밀하게 조사했다. 이 조사의 결과물로 2008년에 옥스포드 대학교 출판부에서 발간한 책에서 공동 저자인 로널드 더블유 워커, 리차드 이 털리 이세 및 글렌 엠 레오나드는 브리검 영과 조지 에이 스미스 및 그 외 교회 지도자들이 외부인들에 관해 다소 지나친 설교를 하여 적개심을 부추기는 결과를 낳긴 했으나 브리검 영은 학살을 명령하지 않았다고 결론 내렸다. 그보다는 유타 전쟁 및 적대자들과의 갈등 등 특수한 상황에 처해 있던 남부 유타 정착민과 마차 행렬에 속한 사람들 간의 말다툼이 크나큰 공포 분위기를 조성했다. 남부 유타에서 행정적, 군사적 지도력을 발휘하며 민병대를 이끌던 지역 교회 지도자들이 내린 일련의 비극적인 결정이 대학살에 이르게 했던 것이다.41
마운틴 메도우즈 대학살 외에도 몇몇 후기 성도는 소수의 반대자나 외부인에게 폭력적인 행위를 저질렀다. 일부 후기 성도는 특히 유타 준주에서 두려움과 긴장감이 팽배했던 1850년대에 법의 영역을 벗어난 폭력 행위를 자행하기도 했다. 반대자들을 겨냥한 교회 지도자들의 과열된 설교는 이런 몰몬들로 하여금 그런 행위가 정당하다고 믿게 만들었을 수도 있다.42 이런 범죄를 저지른 자들은 대개 처벌받지 않았다. 그렇기는 해도, 그런 폭력 행위에 관한 주장의 상당수는 근거 없는 주장이었으며, 반몰몬 작가들은 초기 유타의 미해결된 여러 범죄와 의문사의 책임을 교회 지도자들에게 돌렸다.43
결론
19세기에는 후기 성도를 폭력적인 사람으로 부당하게 규정하는 사람이 많았다. 하지만 19세기에 살았던 대다수의 후기 성도는 지금과 마찬가지로 이웃이나 가족과 더불어 평화롭게 지냈으며, 소속된 공동체에서 평화를 찾았다. 19세기의 여행자들은 유타와 그 외 다른 곳에 자리 잡고 있던 평화와 질서를 흔히 목격하곤 했다.44 그럼에도 비교적 소수인 후기 성도의 행위는 사상자를 낳고 공동체 관계를 훼손시켰으며 몰몬이 평화로운 백성이라는 인식에 손상을 입혔다.45
예수 그리스도 후기 성도 교회는 폭력적인 언행을 규탄하며 온 세상에서 평화를 조성하겠다는 결의를 다시 확인한다. 마운틴 메도우즈 대학살에 관해 언급하며 당시 십이사도 정원회의 일원이었던 헨리 비 아이어링 회장은 이렇게 말씀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옹호하는 우리는 피도 눈물도 없이 무고한 남녀와 어린이의 피를 앗아간 살인 행위를 혐오합니다. 복음은 참으로 평화와 용서를 지지합니다. 오래 전 이곳에서 교회 회원들이 저지른 일은 기독교적 가르침과 행위에 어긋나는 끔찍하고도 용납할 수 없는 행위였습니다.“46
교회 역사를 통틀어 교회 지도자들은 그리스도의 제자가 가야 할 길은 평화의 길이라고 가르쳤다. 십이사도 정원회의 러셀 엠 넬슨 장로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후기 성도의 신앙에 대해 이웃을 사랑하고 모든 사람과 더불어 적극적으로 평화를 추구하는 것과 연관 지어 다음과 같이 말씀했다. ”세상의 희망은 평강의 왕이십니다. … 이제 예수 그리스도 후기 성도 교회 회원인 우리에게 주님이 기대하고 계신 것은 무엇입니까? 교회 전체로 우리는 ‘싸움을 버리고 평화를 선포해야’ 합니다.’ 한 개인으로서 우리는 ‘화평의 일을 세우는 일에 힘써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 개인의 삶에 있어 화평케 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4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