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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하고 행하십시오


기억하고 행하십시오

세미나리 및 종교 교육원 위성 방송•2015년 8월 4일

말린 케이 젠슨 장로는 연차 대회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가 경전에 나오는 기억하다라는 단어의 쓰임에 대해 좀 더 주의를 기울여본다면 하나님께서 뜻하시는 방식으로 ‘기억하는 것’은 복음의 기본 원리이자 구원의 원리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기억하는 것이 “복음의 기본 원리이자 구원의 원리” 역할을 어떻게 하는 것일까요? 젠슨 장로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이것은 기억하라는 선지자의 권고가 종종 행동하라, 즉 들으라, 보라, 순종하라, 행하라, 회개하라는 외침이기 때문입니다.”1

몰몬경에는 이에 대해 기록된 사례가 나옵니다. 힐라맨은 두 아들을 니파이와 리하이라고 이름 짓고는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볼지어다, 내가 예루살렘 땅에서 나온 우리 시조의 이름을 너희에게 주었으니 내가 이렇게 한 것은 너희가 너희의 이름을 기억할 때 그들을 기억하게 하려 함이요, 너희가 그들을 기억할 때 그들의 행한 바를 기억하게 하려 함이요, 너희가 그들의 행한 바를 기억할 때, 어떻게 그 행한 바가 선하였다 일컬음이 되고 또 기록되었는가를 너희로 알게 하려 함이니라.

그러므로 나의 아들들아, 나는 너희가 선한 것을 행하[기를] … 원하노라”2

이것은 기억하는 것이 기본 원리와 구원 원리의 역할을 할 수 있는 한가지 방법입니다. 즉 우리가 적절하고 의롭게 행동하도록 도와줄 수 있습니다. 이런 연유로 교회에서는 우리 앞에 살았던 사람들, 즉 우리 가족 역사와 교회 역사, 그리고 경전에 나오는 분들, 특히 무엇보다도 바로 구주를 기억하라고 권고합니다.

제2차 세계대전의 박해 시기에 죽은 한 젊은 유대인 여성은 과거에 살았던 사람들이 우리 인생을 얼마나 축복할 수 있는지에 대해 다음과 같이 아름답게 설명했습니다. “오래전에 사라졌지만 여전히 땅 위에 찬란한 광채를 발하는 별들이 있다. 오래전에 죽었지만 여전히 자신의 찬란함을 땅 위에 비추는 사람들이 있다. 이런 빛들은 어두운 밤일수록 특히 밝게 빛난다. 그 빛은 인류가 가야 할 길을 비춘다.”3

이런 원리는 세미나리 및 종교 교육원의 역사에도 적용됩니다. 우리 역사에도 기억할만한 가치가 있는 것들이 많습니다. 이런 연유로 세미나리 및 종교 교육원의 역사가 기록되어 왔습니다. 조만간 이런 역사가 책으로 인쇄되거나 온라인으로 이용가능하게 되리라는 것을 발표하게 되어 기쁩니다. 그 역사가 널리 읽혀지고 우리 개인이나 여러 사람들의 연구에서 중요한 자료가 되기를 바랍니다. 이 역사는 현재 세미나리 및 종교 교육원을 만든 여러 사람들에게서 배울 수 있게 도와줍니다. 우리는 그들에게 많은 빛을 졌으며 그들이 남긴 풍성한 유산을 누립니다. 많은 사람들이 오래 전에 죽었건만, 그들은 여전히 미래를 향해 나아가는 우리를 인도하는 등불의 역할을 할 수 있습니다. 그분들을 기억할 때, 그분들의 업적을 기억하고 행동으로 옮길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 아침, 잠시 저는 우리 역사에 있었던 몇 가지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데 이 이야기를 들으시며 우리가 빚을 진 분들을 기억하고 그분들의 소망과 노력을 본받고자 하는 마음이 깃들기를 바랍니다.

제이 르우벤 클라크 회장님께서는 “교회 교육의 진로”라는 말씀에서 말하길 종교 교육자에게 필요한 첫째 요건은 “예수가 그리스도이며, 조셉 스미스가 하나님의 선지자”4였다는 개인적인 간증이라고 했습니다. 이런 간증은 많은 충실한 종교 교육자들과 그 가족들이 어렵고 또 불편한 임무 지명을 받아들이고 개인적인 야망과 안락함의 많은 부분을 희생할 수 있는 동기를 부여해 줍니다. 그들은 고든 비 힝클리 회장님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 것의 본보기가 됩니다. “어떤 일이든지 무릎 꿇고 도움을 구한 다음에 일어나서 수행하러 가는 것 외에 달리 이룰 수 있는 방법을 모릅니다.”5 레이 엘 존스가 바로 그런 사람인데, 그는 교회에서 새벽반 세미나리 프로그램을 시작해달라는 요청을 받았습니다.

“1950년 4월 연차 대회 동안 로스앤젤레스 지역에서 온 10개 스테이크의 회장들이 조셉 필딩 스미스 장로와 만나 그 지역에서 청소년들을 위한 세미나리 프로그램의 개시 가능성에 대해 논의했습니다.” 캘리포니아 주에서는 세미나리 휴식반이 허용되지 않기 때문에 어떻게 해야할지 몰랐습니다.

교회 교육 총감이었던 프랭클린 엘 웨스트는 유타에서 학교 수업이 있기 전에 세미나리 수업이 열린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고, 아마 이 방법이 남부 캘리포니아 지역의 요청에 대해 가능한 해결책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총감은 “유타 로건의 세미나리 교장이었던 레이 엘 존스에게 부탁해 캘리포니아로 가서 프로그램을 시작할 수 있는지 물었습니다. 자신의 현재 임무를 잘하고 있었고 또 새로 장만한 집에 만족했던 존스 형제는 그 일에 자신이 적임자인지 의아했습니다.”

그 프로그램을 시작하고 싶었던 웨스트 총감은 “존스 형제가 로건에 있는 가족을 떠나 1,100킬로미터가 넘는 거리에 있는 로스앤젤레스까지 정기적으로 ‘통근’을 해달라고 제의했던 것입니다. 존스 형제는 결국 그 일에 대해 기도해보기로 동의했습니다. 얼마간 심사숙고한 끝에 그는 아예 로건에 있는 자기 집을 떠나 로스앤젤레스로 이사해서 프로그램을 시작하기로 결정했습니다.”6

마치 “나는 내가 해야 할 일을 미리 알지 못한 채 영에 의해 이끌렸느니라”7라고 말한 니파이처럼, 레이 엘 존스는 남부 캘리포니아를 향해 떠났습니다.

교회는 여비도 마련해주지 못했기에 존스 형제는 유타에서 캘리포니아로 가축을 운송하는 차량의 운전을 돕는 일자리를 잡았습니다. 그는 결국 가족을 로스앤젤레스로 이주시켜 그곳에서 교육위원회의 조직을 도왔습니다. 그 지역의 스테이크 회장이었던 하워드 더블유 헌터 형제가 위원장으로 봉사했고, 그 뒷얘기는 다들 아시는 대로입니다.8 1950년에 일곱 반에서 195명으로 시작했는데, 65년이 지난 지금은 136개국에서 25만명 이상의 학생이 참여하는 프로그램으로 성장했습니다.

세상 모든 곳에서 종교 교육자들은 이런 헌신과 희생의 정신을 마음 속에 다들 갖고 있습니다. 다음은 몽골의 한 종교 교육자에 관한 이야기인데, 그는 신권 지도자에게서 권고를 듣고 뭔가를 해내기에는 참으로 어려운 여건 속에서 일하게 되었습니다.

교회 개종자였던 오키르자브 오쉬라브는 산림학 박사학위를 받았고 몽골에서 연구원으로 일하고 있을 때, 세미나리 및 종교 교육원 코디네이터로서 전임 교원으로 일해달라는 요청을 받았습니다. 처음에는 그 제의에 망설였지만 결국 승낙했습니다. 2008년 11월에 오키르자브 형제와 그의 지역 책임자인 패트릭 체우크 형제는 선교부 회장과 만났습니다. 선교부 회장은 몽골에서 새벽반 세미나리 수업을 하지 못하고 있는 이유를 물었습니다. 오키르자브 형제는 “회장님, 여기는 몽골입니다. 날씨가 춥고, 해도 짧고, 사나운 개들이 있고, 대중교통도 없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일년 후에 그 세 사람이 다시 만났고, 선교부 회장은 같은 질문을 던졌습니다. 오키르자브 형제는 “날씨가 춥고, 해도 짧고, 사나운 개들이 있고, 대중교통도 없습니다.”라고 똑같이 답변했습니다. 모임이 끝난 후, 체우크 형제가 오키르자브 형제를 따로 불러 말했습니다. “오키르자브 형제님, 신권 지도자가 어떤 일을 해달라고 요청하면, 해보셔야 합니다!” 오키르자브 형제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패트릭 형제님, 몽골은 어둡고, 날씨가 춥고, 해도 짧고, 사나운 개가 많고, 대중교통이 없다는 점을 이해 못하시는군요!” 이렇게 대화가 끝났습니다.

“얼마 후 오키르자브 형제가 교리와 성약 85편 8절을 일고 있었는데, ‘법궤를 흔들리지 않게 하려고’라는 표현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그는 ‘법궤를 흔들리지 않게 하려고’ 애쓰는 사람들은 영적으로 곧 죽게 될 것이라고 데이비드 오 맥케이 회장님이 한 말씀을 종교 교육원 교재에서 읽었습니다. 오키르자브 형제는 나중에 이렇게 적었습니다. ‘영을 잃고 싶지 않았기에 저는 몽골에서 세미나리 새벽반 프로그램을 시작했습니다. 놀랍게도 우리 신권 지도자들은 이 일에 대해 아주 열성적이었습니다.’”9 2009년 9월에 그들은 140명의 학생들과 함께 시작했고 3월경에는 30년 만에 아주 혹독한 추위가 찾아와 평균 기온이 섭씨 영하 25도인 겨울에도 352명이 참석했습니다.

연차 대회에서 빅터 엘 브라운 감독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세상의 많은 조직과 정부는 물론 심지어 교회와 가정도 그 생명력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사람들에게 희생을 요구하기를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는 것이 반드시 필요합니다.”10

잠시 시간을 내서 여러분 모두가 하고 계신 희생에 대해 집행부를 대신해 감사를 드리고 싶습니다. 여러분이 젊은이들을 축복하기 위해 하는 대부분의 뜻깊은 일들은 널리 알려지지 않으며, 또 보고서에도 나타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런 봉사와 희생이 우리 조직에서 계속 늘어가는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우리가 부르는 한 찬송가 가사처럼, 여러분의 희생이 여러분과 여러분이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하늘 축복을 가져[다 주기를]”11 간구합니다.”

성공적인 세미나리 및 종교 교육원 프로그램은 언제나 종교 교육자들에게 부모와 신권 지도자, 학교 관계자 및 지역 사회 주민을 포함한 여러 사람과 좋은 협력 관계를 맺을 것을 요구해 왔습니다. 우리의 행실과 협력 관계는 언제나 그리스도의 영과 그분의 복음의 예시가 되어야 합니다.

로버트 디 헤일즈 장로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이름을 짊어지고 또 그분을 늘 기억한다면, 가족이나 이웃들, 직장 동료들 또한 우리가 만나는 모든 사람들을 우리가 어떻게 대하는가가 나타날 것입니다.”12 그런 모범을 종교 교육원 초대 원장이었던 제이 와일리 세션스 형제의 모범에서 볼 수 있습니다.

남아프리카 선교부의 회장으로 칠 년을 봉사했던 세션스 형제 부부는 제일회장단으로부터 아이다호 주의 모스코로 이사해서 종교 교육원 프로그램을 시작하라는 요청을 받았습니다. “아이다호 주 모스코의 교회 회원들은 세션스 형제 부부와 그 가족을 환영했지만, 지역사회의 일부 주민들은 그들을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보았습니다. 모스코에서 그가 맡은 임무의 본질을 잘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불신은 더 커졌습니다. 그 지역 사업계의 여러 사람들은 한술 더 떠 그를 감시하고 그가 대학교를 “몰몬화”하지 못하게 하려고 위원회를 만들었습니다.”

세션스 형제는 “가만히 있으면 그에게 말도 걸고 싶어하지 않을 사람들에게 다가서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지역사회의 여러 단체에 가입했습니다. 상공회의소에서 2주마다 계속 개최되는 만찬회에서 그는 자신의 임무를 방해할 목적으로 만들어진 위원회의 수장 옆에 앉으려 애썼습니다. 한 만찬회에서 그 사람이 말했습니다. ‘당신은 참 재미난 사람이군요. 저는 모스코에서 당신을 쫒아내기 위한 위원회에 속한 사람인데, 내가 당신을 볼 때마다 당신은 살갑게 다가오니 당신을 더는 미워할 수가 없구려.’ 세션스 형제는 ‘저도 마찬가지이니 서로 친구가 되면 좋겠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세션스 형제는 자기가 모스코에 거주하는 동안, 그 사람이 가장 친한 친구가 되었다고 훗날 회상했습니다.”13

교리와 성약에서 주님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겸손하고 사랑이 가득[한] … 자가 아니면, 아무도 이 일을 도울 수 없느니라.”14 우리의 동기가 사랑, 즉 주님과 가족, 우리 학생, 또 우리와 함께 일하는 사람들에 대한 사랑이 아니라면 우리는 종교 교육자의 일을 할 수가 없습니다.

1978년에 고든 비 힝클리 장로님은 교회 교육 관계자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랑이 여러분의 길잡이가 되게 하십시오. 그것이 지상에서 가장 큰 힘입니다. …

여러분이 가르치는 [학생들], 특히 다가서기 어려워 보이는 학생에 대한 사랑을 키우십시오. 그들은 여러분을 절실히 필요로 하며, 여러분이 격려와 친절의 정신으로 그들과 함께 일할 때, 그들 생활 속에 찾아올 기적은 여러분 인생 내내 여러분에게 기쁨과 만족을 또한 그들에게는 힘과 신앙과 간증을 가져다 줄 것입니다.”15

어떤 학생이나 같이 일하는 어떤 사람을 사랑하기가 힘들 때도 있을 것입니다. 그 때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우리 역사를 보면 함께 일할 사람들을 사랑하기가 어려웠던 교육감에 관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결국은 이분이 어떻게 사랑을 갖게 되었는지 다음 이야기를 잘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교회가 국제적으로 한참 커나가고 있을 때, 세미나리 및 종교 교육원도 새로운 나라와 문화, 언어권 속에서 종교 교육을 제공할 때 어려움에 직면했습니다. 1970년대 초에 세미나리 및 종교 교육원 집행부가 개편되어 교육감보가 국제 지역을 감독하는 책임을 맡게 되었습니다.

교육감보 중 한 분이었던 프랭크 데이는 제2차 세계대전 때 해병대에서 복무하며 남태평양 전투에 참전했고 적군을 증오하라고 배웠습니다. 당시 데이 형제는 자신이 아시아 사람들과 함께 일하게 될까 걱정이 되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부총감이었던 조 제이 크리스텐슨 형제는 그에게 남태평양과 아시아를 감독해달라고 요청했습니다. “비행기를 타고 태평양을 건너 일본으로 가면서, 전쟁터에서 있었던 느낌들이 사라지게 해달라고 간절히 기도했건만 그 느낌들이 마음속에서 꿈틀거렸습니다. 착륙 준비를 하면서 데이 형제 마음은 큰 두려움으로 가득했습니다. 공항을 빠져 나와 선교부 회장에게 다가갔습니다. 선교부 회장의 얼굴을 쳐다보면서, 그는 사랑을 보았고, 자신도 사랑의 느낌이 솟아났습니다.” 그가 조금 전까지도 들었던 부정적인 느낌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습니다.16

데이 형제는 자신이 간절히 기도했고 또 자기 마음에 원래는 없었던 사랑을 주님의 영이 가져다 주었다고 말했습니다. 우리도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몰몬은 “마음의 힘을 다해 아버지께 기도하여, … 이 사랑으로 충만하게 되[라]”고 권고했습니다.17

우리가 혼자라거나, 인정 받지 못한다거나, 용기를 잃는 순간에 바로 그 영이 또한 우리에게 용기를 주고 들어올릴 수 있습니다.

밥과 그웬다 아놀드는 과테말라로 가서 세미나리 및 종교 교육원 프로그램을 시작하라는 임무를 받았습니다. 아놀드 형제는 그 임무를 완수하고 집으로 장거리 운전을 해서 돌아올 때의 느낌을 이렇게 묘사했습니다. “밤 12시 30분이나 한 시경이었을 겁니다. 그 때 내가 있는 곳을 세상에서 아는 사람은 없을 것이라는 지독한 외로움이 엄습했습니다. 내 가족은 내가 어딘가에서 자고 있을 것이라 생각할 테고, 미국 사람들은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관심도 없을 것이란 느낌이었어요. 정말 외로웠습니다. 총총히 빛나는 별들이 가득한 하늘 아래로 아름다운 [산림 지대]를 운전하면서, 위를 바라보니 영이 속삭였습니다. ‘난 네가 있는 곳을 안단다.’ 외로움이 사라졌고, 집으로 오면서 무척 울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나와 내가 하고 있는 일을 알고 계시다는 것을 아니 기쁨과 평안의 느낌이 찾아왔습니다.”18

세미나리 및 종교 교육원의 역사에서 우리가 배울 것이 있다면, 충실하고 믿음을 지닌 교회 청소년들과 함께 교류하는, 우리가 지닌 그 엄청난 특권에 대해 감사하는 것도 반드시 포함되어야 합니다. 세상 곳곳에서 이런 학생들은 신앙과 희생의 정신을 보여줍니다. 예를 들어, 한 청남은 매일 새벽 3시 15분에 일어나 제 시간에 세미나리에 옵니다. 그는 버스 정류장으로 걸어가서, 15분 동안 버스를 타고, 다시 다른 버스로 환승했다가, 그 버스를 타고, 네 블록을 걸어 교회 건물에 도착합니다. 비가 오고 날씨가 추워도 이렇게 했습니다. 그 해 말에 그는 90퍼센트 출석에 지각도 없었습니다.

우리 학생들이 어떻게 신앙으로 가득 차고 헌신할 수 있는지에 대한 예를 하나 더 들겠습니다.

전에 교육감보였던 스티브 케이 이바는 필리핀에서 선교사로 봉사한 적이 있었고, 몇 년 후에 세미나리 개시를 돕기 위해 다시 필리핀으로 갔습니다. 그는 선교사 시절에 알았던 한 가족을 방문했던 얘기를 들려주었습니다. 그 가족에는 “12살 먹은 쾌활한” 마리아라는 딸이 있었습니다. 이바 형제는 이렇게 적었습니다.

“콘크리트 블록으로 만든 허름한 집 문을 두드렸고, … 어머니가 나왔습니다. … 저는 돌아온 이유를 말했고 세미나리 가정학습 프로그램에 대해 설명했습니다.

열아홉 살쯤 되었을 것 같은 마리아에 대해 물어보았는데, 어머니는 방을 갈라 쳐놓은 커튼을 들었고 거기에 있던 간이 침대에 마네킹 인형처럼 깡말라 25킬로그램 정도 되는 마리아가 누워 있었는데, 말기 암 상태였습니다. 제가 그 옆으로 가자 그녀는 예쁜 미소로 환하게 웃었고 눈은 초롱초롱했습니다.

그녀는 세미나리를 시작할 수 있는지 물었습니다. 앞으로 살 날이 여섯 달 밖에 남지 않았는데, 영의 세계에서 친척들을 가르칠 준비를 더 하고 싶어 했습니다. 저는 자료가 마닐라에 도착하면 제일 먼저 가져다 주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일주일 후 다시 들렀을 때, 마리아는 학습할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지금은 회원이 되어 지부회장인 그녀의 부친은 거울을 딸 아이의 머리 위로 세워서 그녀가 보고 읽고 쓸 수 있게 했습니다. 날로 쇠약해지는 상태로 인해 그녀는 일어나 앉을 수가 없었습니다. 죽기 일 주일 전에 …… 마리아는 몰몬경 가정학습 마지막 연습문제를 마쳤습니다. 이렇게 해서 아홉 달의 과정이 끝났고, 천 페이지가 넘는 분량 속에서도, 낱말 하나, 빈 칸 하나도 놓치지 않았습니다.”19

이 역사가 전달되면, 여러분이 읽고 또 거기에 담긴 교훈을 자기 것으로 만들기를 바랍니다. 계속 이어지는 우리 역사에서 우리도 튼튼한 중간 고리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디이터 에프 우흐트도르프 회장님은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때로 우리는 … 복음의 회복을 이미 완성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회복은 지속되는 과정이며, 우리는 지금 그 과정 속에 살고 있습니다. …

이 시대는 세계 역사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시기입니다!”

그런 맥락에서 우흐트도르프 회장님은 “회복이 진행되는 동안 잠들지”20 말라고 권고했습니다. 회복이라는 지속적인 이야기 속에서 한 페이지를 장식하도록 돕는 성스러운 특권을 받았다는 점에 우리는 감사하고 겸손해야 합니다.

우리 모두는 주님께서 “구원 사업을 어떻게 서두르고” 있는지에 대한 증인입니다. 쿠엔틴 엘 쿡 장로님은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산 자와 죽은 자를 위한 구원 사업을 서두르면서 어려운 일의 상당 부분은 앞으로 여러분 젊은이들이 하게 될 것입니다.”21 종교 교육자로서 우리는 그들이 그 어려운 일을 하도록 준비시키는 일을 도울 수 있습니다. 몇 년 전에 아이어링 회장님께서 제언하셨듯이, 그들에게 더 적게가 아니라 더 많이 요청해서 우리는 잘 도울 수 있습니다.22

학생들이 정기적으로 수업에 참석하고, 수업이 끝나도 경전을 읽고, 평가에 참여해서 학습의 수준을 높일 때, 그들은 과거의 어느 세대보다 더 잘 준비될 것입니다.

기독교 저술가이며 옹호자인 C. S. 루이스는 “모든 시대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들은 역사책에 기록되지 않았다.”라고 적었습니다.23 백 년이 넘는 세미나리 및 종교 교육원 역사에는 젊은이들을 그리스도에게 데려오기 위해 말없이 수고하고 희생했던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분들 대다수와 그 이야기들은 앞으로도 책으로 만들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분들이 그냥 무시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우리 일[을] 천사가 다 기록[할]” 것이며,24 여러분의 행동을 비롯해 주님이 그분의 사업을 성취하는데 도움이 되는 일과 행동 하나하나가 기록되는 책이 따로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우리 역사에 대해 몇 가지를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나 미래를 향해 바라보면서 제임스 이 탈매지 장로의 다음 말씀을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예언은 일이 벌어지기 전에 대한 기록이다. 역사는 사건이 일어난 뒤에 대한 기록이다. 이 둘 중에서 그 정확도 면에서는 예언이 역사보다는 더 신뢰할만하다.”25

우리 미래에 대해 예언은 무엇이라고 합니까? 선지자 조셉 스미스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어떤 신성하지 않은 손도 이 사업이 전진하는 것을 막지 못할 것입니다. … 하나님의 진리는 모든 대륙에 퍼지고 모든 지역을 찾아가고 모든 나라를 휩쓸며 모든 귀에 울릴 때까지 담대하고 고결하고 굳세게 전진할 것이며, 마침내 하나님의 목적이 성취되고 위대하신 여호와께서 사업이 이루어졌다고 말씀하실 것입니다.”26

우리가 주님 사업의 영광스러운 승리를 가져오기 위해 도우면서, 우리 역사를 활용해 기억하고 행동하려 노력할 때 주님께서 우리 하나하나를 축복해주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구합니다. 아멘.

  1. 말린 케이 젠슨 장로, “기억하여 멸망치 말지어다”, 리아호나, 2007년 5월호, 36쪽.

  2. 힐라맨서 5:6~7.

  3. Hannah Senesh, quoted in Danel W. Bachman, “Joseph Smith, a True Martyr,” in Susan Easton Black and Charles D. Tate Jr., eds., Joseph Smith: The Prophet, the Man (1993), 330.

  4. 제이 르우벤 클라크 이세, “교회 교육의 진로”(1994), 6

  5. 고든 비 힝클리, 러셀 엠 넬슨의 “영적인 능력”, 성도의 벗, 1998년 1월호, 16쪽에서 인용

  6. By Study and Also by Faith: One Hundred Years of Seminaries and Institutes of Religion (2015), 124.

  7. 니파이전서 4:6.

  8. By Study and Also by Faith, 125–26 참조

  9. By Study and Also by Faith, 397–99.

  10. 빅터 엘 브라운, “아론 신권 사업의 참된 목적”, 성도의 벗, 1976년 2월호, 68쪽.

  11. 찬송가, 18장, “찬양해 여호와와 대화한 사람”.

  12. 로버트 디 헤일즈, “예수님을 기억하며”, 성도의 벗, 1998년 1월호, 25쪽.

  13. By Study and Also by Faith, 66–67.

  14. 교리와 성약 12:8.

  15. Gordon B. Hinckley, “Four Imperatives for Religious Educators” (address to religious educators, Sept. 15, 1978), 3–4, si.lds.org.

  16. By Study and Also by Faith, 237–38 참조

  17. 모로나이서 7:48.

  18. Robert B. Arnold, quoted in By Study and Also by Faith, 244.

  19. Stephen K. Iba, “Our Legacy of Religious Education” (undated and unpublished talk), 8; spelling and punctuation standardized.

  20. 디이터 에프 우흐트도르프, “회복이 진행되는 동안 잠자고 있습니까?”, 아호나, 2014년 5월호, 59, 62쪽.

  21. 쿠엔틴 엘 쿡 장로, “뿌리와 가지”, 리아호나, 2014년 5월호, 46쪽.

  22. Henry B. Eyring, “Raising Expectations” (Church Educational System satellite training broadcast, Aug. 4, 2004), si.lds.org 참조

  23. C. S. Lewis, The Dark Tower and Other Stories (1977), 17.

  24. 찬송가, 177장, “의의 일하세”.

  25. James E. Talmage, The Great Apostasy (1958), 35.

  26. Joseph Smith, in History of the Church, 4:5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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