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에 싸인 밤에”
예수 그리스도의 빛은 우리가 그분을 믿는 신앙을 가지고 그분을 따르며 순종한다면 이 세상에서 우리가 부딪치는 어떤 어둠보다도 강합니다.
열 살이었던 조수아 데니스는 버려진 폐광의 깜깜한 어둠 속에서 5일 동안 갇혀 있었습니다. 마침내 구조대원이 도움을 외치는 그의 희미한 소리를 듣고 그를 공포의 어둠 속에서 끌어내었을 때 조수아는 전혀 방향 감각이 없었고 추위에 떨고 있었으며 탈진 상태였습니다. 사람들이 놀란 것은 조수아가 두려워하지 않았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조수아는 모든 시간을 잠을 자거나 도움을 외치거나 기도하면서 보냈습니다. 조수아는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누군가가 나를 보호하고 있었어요. 난 사람들이 나를 찾으러 올 줄 알았어요.”
조수아의 단순하지만 깊은 신앙은 부모님으로부터 배운 것입니다. 그의 부모님은 조수아에게 언제든지 그가 있는 곳을 알고 계시는 하나님이 계심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부모님은 조수아가 그리스도의 빛을 지니고 태어났음을 가르치셨습니다. 실로 조수아는 빛과 진리 가운데서 양육되었습니다.(교리와 성약 93:40 참조) 그래서 자신이 광산의 6백 미터 깊이 아래에 떨어져 있음을 알게 되었을 때에도 그 빛에 의존하여 자신을 지탱하고 위로 받으며 용기와 희망을 얻었습니다. 조수아는 아빈아다이가 가르친 바, “그리스도는 세상의 빛이요 또한 생명이라. 참으로 끝없는 빛이라 결코 어두워지지 아니하겠고.”(모사이야서 16:9)라고 말한 것을 경험했습니다.
구세주께서 베들레헴에서 탄생하셨을 때 서반구에 기이한 빛이 있었음은 참으로 타당한 일입니다. 그분이 탄생하실 때, “해는 지나 어둠이 덮이지 아니하였으므로 사람들은 밤이 어둡지 아니하매”(니파이삼서 1: 15, 19) 놀랐습니다. 이러한 빛의 의식은 그분이 십자가 상에서 돌아가실 때 “심히 짙은 암흑이 땅 위에 덮여, 주민들이 … 이 암흑의 안개를 느낄 수 있었”(니파이삼서 8: 20~23)던 것과는 완전히 대조적이었습니다.
이 세상에는 온갖 종류의 어둠이 있습니다. 죄로부터 오는 어둠이 있고, 낙심과 실망과 절망에서 오는 어둠이 있으며, 외로움과 부족감에서 오는 어둠이 있습니다. 조수아 데니스의 마음에서 불타는 빛이 그를 삼켜 질식시킬 것 같던 어둠보다 더 강했던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빛은 우리가 그분을 믿는 신앙을 가지고 그분을 따르며 순종한다면 이 세상에서 우리가 부딪치는 어떤 어두움보다도 강합니다. 예언자 요셉 스미스는 이렇게 계시 받았습니다. “만일 너희가 나의 영광만을 전념하여 구하면 너희 온 몸은 빛으로 충만하게 되어 너희 속에 어두움이 없으리니.”(교리와 성약 88:67)
그리스도의 빛, 그리고 빛과 구원의 복음 메시지는 우리가 불순종하고 신앙이 부족할 때만이 우리 자신의 삶에서 어두워질 수 있습니다. 반대로 우리가 계명을 지키고 계속해서 그분과 같이 되려고 노력할 때 구세주의 빛은 강해집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으로 말미암은 것은 빛이라, 빛을 받아들이며, 하나님 안에서 끊임없이 빛을 받아들이는 자는 빛이 더욱 밝아지고 점점 더 밝아”(교리와 성약 50:24)지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모습과 마음속에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복음의 빛이 점점 밝아질수록 세상이 제공하는 겉치레와 진정한 가치를 구별하는 일이 수월해집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하사 기꺼이 우리의 죄를 짊어지신 것을 알게 되면 인간의 권세에 대한 무모한 믿음이나 교만 따위는 그 필요성을 잃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죄로 인해, 그리고 인생의 여로에서 자칫 발을 헛디뎌 잃게 되는 모든 것을 속죄가 회복시켜 준다는 믿음은 일시적인 쾌락과 이 생의 순간적인 전율보다 더 큰 소망을 만들어 줍니다.
라모나이 왕의 경험을 생각해 보십시오. 절대적 권력과 세상의 큰 보물들과 시종 드는 하인들이 있었지만 그는 영적인 암흑 속에서 살았습니다. 암몬이 그에게 복음을 가르치도록 왕이 기꺼이 허락했을 때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라모나이는 “죽어 넘어가듯 땅에 엎드러”(앨마서 18:42)졌습니다. “암몬은 … 왕이 하나님의 능력 아래 놓여 있음을 알았음이니, 불신앙의 검은 장막이 왕에게서 거두어지고, 왕의 마음을 비쳐 준 … 영광의 빛인 그 빛이 왕의 영혼에 그토록 놀라운 기쁨을 불어 넣어”(앨마서 19:6) 주었음을 알았습니다.
하나님의 영광과 영생의 빛만이 인간을 완전히 압도하는, 불신앙의 검은 장막을 제거하기에 충분한 심오한 기쁨을 만들어 냅니다.
경전을 통하여, 그리고 실로 수세기에 걸친 사려깊은 기독교인들의 저술을 통하여 우리는 그리스도의 빛과 구원에 관한 메시지가 어떻게 영적으로나 육체적으로 우리를 지탱해 주는지에 관한 예를 보게 됩니다. 1833년 이탈리아를 여행하던 영국인 젊은 성직자인 존 헨리 뉴먼은 그곳에서 병을 얻어 몇 주 동안 묶여 있으면서 신체적 정서적 어둠과 부닥쳤습니다. 심히 낙담하여 눈물을 흘리는 그를 본 간호사가 무슨 일이냐고 물었습니다. 그의 대답은 단지 하나님께서 그에게 영국에서 시키실 일이 있음을 확신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 마음 아팠지만 그는 결국 작은 배의 승선권을 구했습니다.
그 배가 항해를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짙은 안개가 깔리더니 주변의 험한 절벽을 식별하지 못할 만큼 어두워졌습니다. 망연하고 희미한 어둠 속에 갇힌 채 그 배는 며칠째 오도 가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뉴먼은 구세주의 도움을 간구하면서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찬송가 “어둠에 싸인 밤에”의 가사를 작사했습니다.
어둠에 싸인 밤에 빛으로써 이끄소서
내 갈길 멀고 밤은 깊사오니 인도하소서
내 갈길 모두 보기 원치 않으니
발 앞에만 비추어 주옵소서
(찬송가, 79장)
이 찬송가는 우리의 마음이 알고 있는 진리를 반영합니다. 시련으로 인해 다른 빛의 근원이 소진될지라도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갈 길”을 비추시며 집으로 가는 길을 보여 주십니다. 구세주께서는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요한복음 8:12) 할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우리는 때때로 어둠 속에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어리석은 선택을 하고, 해로운 영향력을 삶에 끌어들이고, 세상적인 것을 조금이라도 더 받아들이기 위해 복음의 빛에서 멀어질 때, 우리는 어두운 영적인 동굴 속을 방황할 수 있습니다. 처음에는 해롭지 않게 보일지 모르나 조금만 더 빠져들면 그것으로 끝입니다. 이 사실을 알아차리기도 전에 우리는 이미 빛에서 멀어져 어둠 속에 홀로 남게 될 수 있습니다. 구원의 불빛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데 왜 어둠 속에 남아 있겠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의해 따뜻하게 비춰지는 빛을 쪼입시다. 구세주의 친절한 빛이 한 번에 한 걸음씩 인도하게 하십시오. 성약과 계명을 지켜 하늘 집으로 가는 복음 길을 안전히 따라가도록 하십시오.
어린 조수아 데니스를 기억하십니까? 그는 이제 데니스 장로가 되어, 자기를 가두었던 어두운 광산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선교사로 봉사하고 있습니다. 지금 데니스 장로는 온두라스의 좁고 낯설은 길을 따라 걸으며 소망과 구원과 빛의 메시지를 전하고 있습니다. 그가 매일 가르치는 것은 광산에서 실종된 어린 소년으로서 경험했던 것과는 역설적인 것입니다. 어둠에 싸인 가장 절망스런 상황 속에서도 희망과 화평과 위안을 느낄 수 있는 것은 모든 어둠을 능가하는 빛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빛이 있기 때문입니다.
제 자신의 경험으로 저도 조수아가 경험에서 알고 있는 것처럼 놀라운 빛의 근원이신 우리 구세주를 알고 있습니다. 이 빛에 따라 생활하여 우리 길을 밝히고 하늘의 집으로 인도되기를 기원하며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말씀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