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인가 되어야 하는 과제”
세상의 제도는 우리에게 뭔가를 알도록 가르치는 반면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우리에게 뭔가가 되도록 권유합니다.
사도 바울은 주님의 가르침과 교사가 주어진 이유를, 우리가 모두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의 충만함]”(에베소서 4:13)을 얻게 하기 위함이라고 가르쳤습니다. 이 과정에는 그저 지식을 얻는 것 이상의 많은 것들이 필요합니다. 복음의 진실성에 대한 확신을 갖게 된 것 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복음대로 행동하고 생각하여 그로 인해 완전히 개심해야 합니다. 세상의 제도는 우리에게 뭔가를 알도록 가르치는 반면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우리에게 뭔가가 되도록 권유합니다.
성경이나 현대의 여러 경전에는 최후의 심판 때에 사람들이 모두 자신의 행위와 일과 마음의 소망에 따라 보상 받게 된다고 가르치는 많은 성구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또 다른 경전에서는 우리가 이룩한 상태에 의해 심판된다는 귀결로 이 점을 부연 설명하고 있습니다.
예언자 니파이는 우리가 무엇이 되었는가 하는 관점에서 최후의 심판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저들의 행위가 더러웠다면 저들도 더러운 것이라. 저들이 더러울진대 하나님의 왕국에 거할 수 없으리라.”(니파이일서 15:33) 이에 모로나이는 이렇게 확언했습니다. “더러운 자는 더러운 것으로 의로운 자는 의로움으로 남을 때가 올 것[이라]”(몰몬서 9:14; 또한 요한계시록 22:11~12; 니파이이서 9:16; 교리와 성약 88:35 참조) 이와 똑같은 원리가 “이기심”이나 “불순종” 또는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자격과 일치하지 않는 모든 개인적인 성품에 그대로 적용됩니다. 앨마는 최후의 심판 때에 악한 자들이 놓이게 될 “처지”에 대해 가르치면서 우리의 말과 행위와 생각이 우리의 허물을 드러내면, “우리가 흠없이 서지 못할 것이요, … 이토록 무서운 지경에서 하나님을 우러러 보지 못할 것이”(앨마서 12:14)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가르침으로부터 우리가 내릴 수 있는 결론은 최후의 심판이 단순히 선행과 악행의 총합, 즉 우리가 무엇을 하였는가에 대한 평가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그것은 우리의 행위와 생각의 최종 결과, 즉 우리가 무엇이 되었는가에 대한 판정이라 할 것입니다. 따라서 어느 누구라도 통과 의례를 치르듯 몸짓 만을 따라가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복음에서 요구되는 계명이나 의식이나 성약들은 하늘의 어느 예금 계좌에 적립해야 할 예금 목록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되기를 바라시는 그러한 존재가 될 수 있는 방법들을 보여주는 하나의 계획입니다.
이러한 이해를 보다 명확히 보여주는 한 비유가 있습니다. 한 부유한 아버지에게 한 아이가 있었는데 아직 어려 필요한 지혜와 덕성을 갖추지 못하였기에 재산을 나눠 준다면, 아마도 그 유산을 탕진하고 말 거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아버지는 아이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내가 가진 모든 것, 재산은 물론 사람들 속에서 내가 차지하는 위치와 명성까지도 네게 물려주고 싶구나. 내가 가진 것을 주는 것은 쉬운 일이지만, 나와 같이 되려면 네 스스로 그렇게 되어야 한단다. 내가 배워온 바를 배우고, 내가 살아온 대로 산다면 유업을 받을 자격을 갖추게 될 것이다. 나는 내가 지혜와 덕성을 익힐 수 있었던 율법과 원리들을 네게 알려 주겠다. 나의 모범을 따라 내가 터득한 대로 터득하면, 나와 같이 될 것이며, 내가 가진 모든 것이 네 것이 되리라.”
이 비유는 하늘의 방식에 상응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비할 데 없는 영생의 유산과 아버지의 충만하심을 약속하며, 그것을 얻을 율법과 원리를 알려줍니다.
우리는 개심의 과정을 통해 영생을 위한 자격을 갖게 됩니다. 이곳에서 사용되었듯이, 많은 의미를 지닌 이 개심이란 말은 단지 믿음을 주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충심에서 우러나오는 본성의 변화를 의미합니다. 예수께서 수제자이던 베드로에게 간증과 개심의 차이를 가르치실 때 바로 이 의미를 사용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물으셨습니다.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아느냐” (마태복음 16:13) 그런 후에 다시 물으셨습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마태복음 16:15~17)
베드로는 간증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는 예수가 그리스도이시며 약속된 메시야이심을 알았으며, 그 사실을 확고히 말했습니다. 간증한다는 것은 이처럼 알고 선언하는 것입니다.
후에 예수는 제자들에게 간증보다 훨씬 중요한 개심에 대해 가르치셨습니다. 제자들이 누가 천국에서 가장 크냐고 묻자, “예수께서 한 어린 아이를 불러 저희 가운데 세우시고
“가라사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 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그이가 천국에서 큰 자니라”(마태복음 18:2~4)
후에 구세주께서는 개심하는 것의 중요성을 재차 확인하셨습니다. 심지어 진리에 대한 간증을 가진 사람에게도 그 중요성이 조금도 덜하지 않다는 것을 가르치셨습니다. 최후의 만찬에서 주어진 숭고한 가르침 중에, 그가 시몬 베드로에게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누가복음 22:32)
그의 형제들을 굳게 하기 위해 — 하나님의 양을 돌보고 인도하기 위해 — 삼년이나 예수를 따랐고, 거룩한 사도의 권능을 받았고, 그리스도 복음의 용감한 교사요 증언자로서, 그의 간증으로 말미암아 주님으로부터 복되다는 칭찬을 받은 그였지만, 여전히 그러한 그도 개심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예수께서 하나님의 왕국에 들어갈 자들에게 요구하신 개심에는(마태복음 18:3 참조) 그저 복음이 진실함을 증거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훨씬 많은 것이 요구됩니다. 간증한다 함은 알고 선언한다는 뜻입니다. 복음은 우리에게 “개심”할 것을 권유하는 데, 그렇게 하려면 행함과 됨됨이가 요구됩니다. 우리 가운데 어느 누구라도 전적으로 복음 지식과 간증에만 의지하는 사람이 있다면, 예수님께 “개심”하도록 권유받았던 사도들과 마찬가지로 축복은 받았으나 여전히 미완의 상태로 남아 있게 될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강한 간증은 갖고 있으나 그 간증을 좇아 행동하지 않음으로써 개심하지 않는 누군가를 알고 있습니다. 예를 들자면, 귀환 선교사 여러분, 여러분은 아직도 개심하게 되기를 구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세상의 방법들을 따라가고 있습니까?
복음에 의한 개심은 경전에서 “거듭남”이라 일컫는 예비 경험(예를 들면, 모사이야서 27:25; 앨마서 5:49; 요한복음 3:7; 베드로전서1:23)과 더불어 시작됩니다. 침례의 물에서 나와 성신의 은사를 받음으로써,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영으로 난 “아들과 딸”이 되며, “하늘 나라를 상속받”을 수 있는 “새 것”이 됩니다.(모사이야서 27:25~26)
니파이인들을 가르치시며, 구세주께서는 그들에게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는가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구세주는 그들에게 회개하여 침례를 받고 성신을 받아 정결케 되어, “마지막 날에 내 앞에 흠 없이 서도록 하라.”(니파이삼서 27:20)고 권유하였습니다. 그분은 이렇게 결론지었습니다. “이에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하겠느냐?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거니와 나와 같은 자라야 하느니라.”(니파이삼서 27:27)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마땅히 되어야 할 존재가 될 수 있도록 마련된 계획입니다. 이 흠 없고 완전해진 상태는 성약 및 의식, 행위, 올바른 선택 등의 꾸준한 연속과 계속되는 회개로부터 오는 결과입니다. “이 생은 하나님을 만나는 길을 준비하는 시간이요”(앨마서 34:32)
지금 이 순간이야말로 우리 각자가 자신의 개심을 향해,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되기를 간절히 바라시는 그러한 존재가 되는 것을 향해 일할 때입니다. 그렇게 하는 중에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은 우리들의 가족 관계가, 심지어 교회 부름보다도 더, 개심을 향해 나아가는 발전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들이 일어날 수 있는 무대라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이뤄야 할 개심은 우리로 하여금 훌륭한 남편이자 아버지, 또는 훌륭한 아내이자 어머니가 될 것을 요구합니다. 성공적인 교회 지도자가 되는 것 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승영이란 영원한 가족 경험이며, 지상에서의 가족 경험이야말로 우리가 그것을 위해 준비하는 데 가장 적합하도록 마련된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우리가 어떠한 존재가 되어야 하는가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 것은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나심이 되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계신 그대로 볼 것을 인함이니”(요한일서 3:2; 또한 모로나이 7:48참조)
저는 우리 지역 지도자들이 개심과 됨됨이의 중요성을 깊이 통감하여 활동의 통계 수치에 대한 관심을 줄이고, 우리 형제 자매들이 누구인지, 그들이 무엇이 되고자 하는지에 관해 더욱 많은 관심을 갖게 되기를 희망합니다.
오늘 아침 헤일즈 장로님이 너무나 아름답게 가르쳐 주신 것처럼, 우리가 필요로 하는 개심은 흔히 안락과 평온보다는 고통과 역경을 통해 보다 쉽게 이루어집니다. 부친 리하이는 그의 아들 야곱에게 하나님께서 “[그]의 고난을 성별하사 [그]의 유익이 되게 하실 것이”라고 약속하였습니다.(니파이이서 2:2) 예언자 요셉은 다음과 같은 약속을 받았습니다. “네 불행, 네 곤고는 잠시 동안이니, 만일 네가 이를 잘 견디어 내면 하나님께서 너를 높이 받들어 올릴 것이요, 너는 네 원수를 모두 이기리라.”(교리와 성약 121:7~8)
우리들 대부분은 경전에서 말하는 “고난의 풀무”(이사야서 48:10; 니파이일서 20:10)를 어느 정도 경험하고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불우한 가족을 돌보는 일에 빠져 있습니다. 또 다른 이들은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이나, 결혼 혹은 자녀 양육과 같은 의로운 목표를 잃거나 연기해야 하는 아픔을 겪기도 합니다. 더구나 개인적인 장애나 소외감, 미숙함, 우울함 등의 감정에 빠져 힘겨워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사랑의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공의와 자비를 통해 우리가 그분이 바라시는 존재가 되도록 그러한 경험을 통해 정련되고 성결케 되게 도와 주실 것입니다.
우리는 개심의 과정을 통해 영생이라 일컫는 지위와 상태로 나아 오도록 권유 받았습니다. 영생을 이루려면 그저 올바른 일을 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고 올바른 이유, 곧 그리스도의 순수한 사랑으로 올바른 일을 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사랑”의 중요성에 대한 그의 유명한 가르침에서 이 점을 명확히 보여주고 있습니다.(고린도전서 13장 참조) 사랑은 결코 부족하지 않으며 그가 열거한 어떤 선행보다도 더 큰 이유는 “그리스도의 순수한 사랑”(모로나이서 7:4)인 박애의 사랑이 하나의 행위가 아니라 존재의 지속적인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개심의 결과를 가져오는 행위들의 연속을 통해 얻게 됩니다. 사랑이란 사람이 되어 가는 그 무엇이라 하겠습니다. 따라서, 모로나이가 선포했듯이, “사람이 바로 그 사랑을 갖지 아니할진대” 아버지의 전당에 마련된 처소를 “상속으로 얻지 못할 것”입니다.(이더서 12:34 참조)
이 모든 것은 구세주께서 천국이 어떠한 것인지 설명하기 위해 주신 포도원에서 일하는 일꾼들의 비유가 갖는 중요한 의미를 이해하도록 도움이 됩니다. 알다시피 포도원의 주인은 그 날의 각기 다른 시간에 나가서 일꾼들을 고용합니다. 어떤 이는 아침 일찍 포도원에 보내졌고, 또 다른 이들은 각기 삼시와 육시와 구시에 보내졌습니다. 마지막으로 십일 시에 또 다른 이들을 포도원으로 보내며 “상당하게”(마태복음 20:7) 지불할 것을 약속했습니다.
날이 저물어 포도원의 주인은 모든 일꾼들에게, 심지어 십일 시에 온 일꾼들에게 조차도 똑같은 임금을 주었습니다. 온종일 일한 일꾼들이 이것을 보고, “집 주인을 원망”(마태복음 20:11)했습니다. 주인은 이에 굴하지 않고, 각 사람에게 약정한 금액을 지불하면서 아무에게도 잘못한 것이 없음을 지적하였습니다.
다른 비유들과 마찬가지로 이 비유에서도 여러 가지 다양하고 가치 있는 원리를 배울 수 있습니다. 오늘 제 말씀의 주제와 부합되는 교훈은 최후의 심판 때에 주님은 우리가 포도원에서 얼마나 오랫동안 일했는가를 보고 보상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출근부에 도장 찍는 것으로 하늘 보상을 얻지 못합니다. 본질적인 것은 주님의 일터에서 행한 우리의 노력으로 인해 우리가 어떤 사람이 되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 중에는 다른 사람들보다 더 많은 시간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결국 중요한 것은 우리의 노고로 말미암아 우리가 무엇이 되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십일 시에 들어온 많은 사람들은 포도원에서 정식 채용되기 전에 다른 방법들로 정련되고 준비되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일꾼들은 마치 물만 부으면 되는 컵라면과 같이 온전케 하는 의식인 침례와 성신의 은사만 있으면 됩니다. 그것만 더하면 십일 시에 들어온 일꾼들도 포도원에서 오랫동안 일한 일꾼들과 마찬가지로 같은 발전의 상태에 있으며 같은 보상을 받을 자격을 갖게 됩니다.
이 비유에서 우리는 사랑하시는 아버지께서 바라시는 대로 되려는 발전의 증거이기도 한 훌륭한 성품을 가진 가족이나 친구들에 대한 희망과 사랑의 관계를 결코 포기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배울 수 있습니다.(모로나이서 7:5~14 참조) 마찬가지로 속죄의 권세와 회개의 원리는 현재 많은 그릇된 선택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우리의 사랑하는 사람들을 결코 포기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다른 사람에 대해 비판하는 태도를 갖는 대신에, 우리는 자신에 대해 염려해야 합니다. 결코 희망을 버려서는 안됩니다. 결코 노력하기를 중단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이며, 따라서 우리가 하나님께서 되기를 바라시는 사람이 되는 일은 가능한 일입니다.
어떻게 우리의 발전을 측정할 수 있겠습니까? 경전에는 여러 방안이 나와 있지만, 저는 이 자리에서 두 가지만 말씀 드리겠습니다.
베냐민 왕의 위대한 설교를 듣고 많은 사람들이 주님의 영이 “우리 곧 우리 마음 가운데 큰 변화를 갖게 하시어 다시는 악을 좇으려 하지 않게 하시며 계속하여 선행을 하게 하시나이다.”라고 외쳤습니다.(모사이야서 5:2) 만일 우리가 악을 행하려는 욕망을 잃어 간다면, 우리는 숭고한 목표를 향해 진보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영을 받은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마음”(고린도전서 2:16)을 지녔다고 말했습니다. 저는 이 말씀을 필요한 개심을 향해 나아가는 사람들이 사물을 하늘에 계신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시는 그대로 보기 시작했다는 의미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세상의 소리에 귀 기울이기 보다는 그분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세상의 방법대로 하기 보다는 그분의 방법대로 합니다.
저는 이 교회의 주인이며 우리의 구세주요 구속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간증합니다. 저는 구세주의 부활과 속죄를 통하여 우리가 불멸에 대한 확신과 영생을 위해 되어야 할 존재가 될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게 한 아버지의 계획에 감사를 드립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증 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