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회와 결심에 관하여
거룩함과 행복을 추구하는 일에 전념할수록 후회의 길 위에 있게 될 확률은 낮아집니다.
후회에 관하여
몬슨 회장님, 우리는 회장님을 사랑합니다. 새로운 성전 건축과 선교 사업에 관한 역사적이고 영감 어린 발표에 감사드립니다. 저는 이 일을 계기로 우리와 앞으로 올 많은 세대가 큰 축복을 받으리라고 확신합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사랑하는 친구 여러분! 우리는 모두 필멸의 존재입니다. 부디 이 사실을 알고 놀라는 분이 없기를 바랍니다.
우리 중 누구도 지상에 그리 오래 거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일정 기간의 소중한 시간을 보내지만, 영원한 관점에서는 거의 눈 깜박할 시간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런 뒤에 우리는 떠납니다. 우리의 영혼은 “[우리]에게 생명을 주신 그 하나님께로 데려감을 입[습니다.]”1 우리는 육신을 남겨 두고 이 세상의 것들을 뒤로한 채 우리 존재가 거할 다음 장소로 이동합니다.
어릴 적에는 이생이 꼭 영원할 것만 같습니다. 수평선 위로 해가 끊임없이 떠오를 것으로 생각하며, 미래는 우리 앞에 끝없이 계속되는 길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나이가 들수록 우리는 점점 더 뒤를 돌아보게 되고, 실제로는 그 길이 너무나 짧다는 것을 알고 놀라워합니다. 시간이 어찌 그리 빨리 지나갔는지 놀라울 뿐입니다. 그리고는 지난날에 우리가 내린 선택과 한 일들을 생각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면서 우리 영혼을 행복하게 해 주고 마음에 기쁨을 주는 여러 소중한 순간을 떠올립니다. 그러나 우리는 후회스러운 순간들도 기억하게 됩니다. 다시 돌아가 되돌리고 싶은 순간들 말입니다.
병으로 죽음을 앞둔 사람들을 돌보는 한 간호사는 환자들이 생을 마감할 준비를 하는 것을 보며 종종 이런 단순한 질문을 했다고 합니다.
“후회하는 것이 있으세요?”2
필멸의 마지막 날에 가까워지면 종종 생각은 명료해지고 사물을 바로 보는 시각과 통찰력이 생깁니다. 그래서 후회하는 것에 관해 물었을 때 그 사람들은 마음을 열고 솔직하게 답해 주었습니다. 그들은 시간을 되돌릴 수만 있다면 바꾸고 싶은 것들에 대해 곰곰이 생각했습니다.
그들이 털어놓은 이야기를 살펴보면서 저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기본 원리들이, 그것들을 적용하기만 한다면, 우리의 인생 진로에 얼마나 큰 영향을 주는지를 깨닫고 놀랐습니다.
복음 원리는 신비스러운 것이 전혀 아닙니다. 우리는 그것을 경전에서 공부해 왔고, 주일학교 시간에 토론했으며, 교회 모임에서 자주 들어 왔습니다. 이 신성한 원리와 가치들은 직접적이고 분명하며, 아름답고, 심오하고, 강력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장차 후회할 일을 피하는 데 확실히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이들과 더 많은 시간을 보냈다면 좋았을 텐데
죽음을 앞둔 환자들의 제일 보편적인 후회로는 사랑하는 사람들과 더 많은 시간을 보냈어야 한다는 것을 꼽을 수 있을 것입니다.
특히 남성들은 다음과 같은 보편적인 슬픔을 토로했습니다. 그들은 “[매일같이 돌아가는] 직장이라는 쳇바퀴에 너무 많은 시간을 소모한 것을 깊이 후회했습니다.”3 가족과 친구와 함께 시간을 보내면서 특별한 추억을 공유할 기회를 놓쳐 버린 사람들이 많았던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에게 가장 의미 있는 사람들과의 관계를 돈독히 할 기회를 잃었습니다.
사실 우리는 종종 너무 바쁘지 않습니까? 슬픈 얘기지만, 심지어 우리는 바쁘다는 것을 무슨 훈장마냥 달고 다니기도 합니다. 바쁘다는 것 자체가 어떤 성취나 높은 생활 수준을 의미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정말 그렇습니까?
저는 우리 주님, 완전한 본보기이신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갈릴리와 예루살렘 백성과 함께하신 그분의 짧은 생을 생각해 봅니다. 그리고 그분이 여러 모임 사이에 바쁘게 다니시거나 목록에 적힌 급한 일들을 처리하기 위해 한 번에 여러 가지 일을 처리하시는 모습을 상상해 보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상상이 가지 않습니다.
대신, 목적 있게 하루하루를 살아가시는, 인정 많고 사려 깊은 하나님의 아들이 그려집니다. 그분이 주위 사람들과 교제하실 때면, 사람들은 자신이 중요한 존재이며 사랑받는다고 느꼈습니다. 그분은 자신이 마주치는 사람들의 무한한 가치를 아셨고, 그들을 축복하고 돌보셨습니다. 그들을 들어 올리고 치유해 주셨습니다. 주님은 그분의 시간이라는 소중한 선물을 그들에게 주셨습니다.
우리 시대에는 누군가와 시간을 보내고 있다고 가장하기가 쉽습니다. 마우스만 클릭하면 수천 명의 “친구들”과 “연결”될 수 있습니다. 그중 한 사람과도 얼굴을 마주할 필요 없이 말입니다. 기술은 훌륭한 것이며, 사랑하는 사람들과 멀리 떨어져 있을 때 매우 유용합니다. 제 아내와 저는 사랑하는 가족과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그게 어떤 건지 저는 잘 압니다. 그러나 우리가 사랑하는 가족이나 친구들과 교류하는 주된 방식이 우스운 사진을 올리거나 별것 아닌 이메일을 전달하거나 웹 사이트 주소를 공유하는 것이라면, 저는 우리가 개인으로서나 사회적으로 잘못된 방향으로 가고 있다고 믿습니다. 이런 활동이 무조건 나쁜 것은 아니겠지만, 우리는 여기에 얼마나 많은 시간을 소비하려 합니까? 우리에게 정말로 중요한 사람들에게 자신을 온전하게 내주고 진실된 시간을 함께하지 않는다면, 언젠가 우리는 후회할 것입니다.
의미 있는 시간을 보내고, 활동을 같이 하며, 소중한 추억을 만들어 감으로써 그들을 소중히 여기겠다고 결심합시다.
내 잠재력을 실현했다면 좋았을 텐데
사람들이 들려준 또 다른 후회는 자신이 될 수 있고 되어야 했던 사람이 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삶을 돌아보면서 자신의 잠재력을 실현하지 못했으며 많은 일을 완수하지 못했음을 깨달았습니다.
직업 분야에서 성공해야 한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러한 성공이 이 세상에서 제아무리 우뚝 솟아 있는 듯 보여도,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위대하고도 영원한 여정에서는 그저 스쳐 지나가는 바람 같은 것일 뿐입니다.
그보다, 저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이신 하나님이 바라시는 그런 사람이 되는 것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어느 시인이 말했듯이, 우리는 전세에서부터 “영광의 구름을 가르며”4 이 세상에 왔습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우리의 진정한 잠재력을 보십니다. 그분은 우리에 대해서 우리도 모르는 것들을 아십니다. 그분은 우리가 창조의 목적을 이루고, 의롭게 생활하며, 그분의 면전으로 돌아올 것을 우리의 일생에 걸쳐 촉구하십니다.
그렇다면, 왜 우리는 그렇게 덧없고 사소하고 피상적인 것들에 우리의 시간과 정력을 그렇게나 많이 바칩니까? 우리는 하찮고 일시적인 것들을 추구하는 어리석음을 직시하기를 거부하고 있습니까?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둑질도 못하[는 하늘에 우리의 보물을 쌓아 두는 것]”5이 더 현명하지 않겠습니까?
어떻게 하면 그렇게 할 수 있을까요? 구주의 모범을 따르고, 그분의 가르침을 일상 생활에 적용하며, 하나님과 이웃을 진심으로 사랑하면 됩니다.
마지못해 발을 질질 끌면서, 얼마나 더 해야 하는지 조급해하면서, 해야 하는 일들에 불평하면서는 절대로 그리스도의 제자가 될 수 없습니다.
복음대로 사는 것에 관해서, 우리는 물속에 발가락만 담그고서 수영을 했다고 우기는 어린아이 같아서는 안 되겠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의 아들과 딸로서 훨씬 많은 것을 이룰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선한 의도만으로는 충분치 않습니다. 우리는 행동해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복음에 관한 간증을 선포하는 것은 훌륭합니다. 그러나 회복된 복음의 살아 있는 실례가 되는 것은 더 훌륭합니다. 우리가 맺은 성약에 더 충실하고자 바라는 것도 훌륭합니다. 그러나 실제로 덕스러운 삶을 사는 것을 포함하여 성스러운 성약에 충실하고, 지혜의 말씀을 지키며, 십일조와 헌금을 바치고, 궁핍한 사람들에게 봉사하는 것이 훨씬 더 훌륭합니다. 가족 기도, 경전 공부, 건전한 가족 활동에 시간을 더 내겠다고 선언하는 것 역시 훌륭한 일입니다. 그러나 이런 일을 실제로 꾸준히 행할 때, 우리 삶에는 하늘 축복이 임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거룩함과 행복을 추구하는 일입니다. 그것은 가장 훌륭하고 행복한 자기 자신에 이르는 여정입니다.
구주를 따르고, 마땅히 되어야 할 사람이 되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겠다고 결심합시다. 성령의 속삭임을 듣고 그 음성에 순종합시다. 그렇게 할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 자신에 대해 우리가 몰랐던 것들을 알려 주실 것입니다. 그분은 우리 앞에 놓인 길을 보여 주시고, 우리가 모르는, 아마 상상도 못했던 재능을 인식하도록 도와주실 것입니다.
거룩함과 행복을 추구하는 일에 전념할수록 후회의 길 위에 있게 될 확률은 낮아집니다. 우리가 구주의 은혜에 의지할수록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마련하신 올바른 길 위에 있다는 느낌은 더욱 강해집니다.
나 자신이 더욱 행복했다면 좋았을 텐데
죽음을 목전에 둔 사람들이 들려준 또 다른 후회는 다소 놀라운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이 더 행복했다면 좋았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너무 자주 우리는 손을 내밀면 닿을 듯한 어딘가에 우리를 행복하게 해 줄 무언가, 즉 더 나은 가족 여건, 더 풍족한 생활, 또는 힘든 시련의 끝이 있을 것이라는 환상에 사로잡힙니다.
나이가 들수록, 우리는 좀 더 자주 뒤를 돌아보며, 외적인 상황은 우리의 행복을 결정짓지 못하며, 결코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이며, 우리의 행복을 결정하는 것은 우리 자신입니다.
바로 여러분과 제가 우리의 행복을 궁극적으로 결정짓는 것입니다.
제 아내 해리엇과 저는 자전거 타기를 좋아합니다. 야외로 나가서 자연의 아름다움을 만끽하는 것은 참 즐겁습니다. 좋아하는 자전거 길도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다른 사람에 비해 얼마나 멀리 또는 빨리 달리느냐에 크게 신경 쓰지 않습니다.
그러나 종종 저는 우리가 조금 더 경쟁하며 타야 한다는 생각을 합니다. 심지어는 조금만 더 노력하면 더 빠른 속도로 자전거를 타며 더 좋은 시간을 보낼 것이라는 생각도 합니다. 그리고 가끔 저는 이런 생각을 제 훌륭한 아내에게 이야기하는 큰 실수를 범합니다.
저의 이런 제안에 대한 아내의 대답은 언제나 매우 친절하면서도 분명하고 직설적입니다. 아내는 웃으며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디이터, 이건 경기가 아니잖아요. 그냥 달리는 거예요. 순간을 즐기세요.”
정말 맞는 이야기 아닙니까!
우리는 살면서 때때로 무엇인가를 이루는 데 너무 열중한 나머지 그 여정에서 기쁨을 찾지 못합니다. 제가 아내와 자전거를 타는 이유는 무엇인가를 완수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아내와 함께하는 그 시간이 감미롭고 즐겁기 때문입니다.
끝나는 시점만을 보느라 눈앞에 있는 즐겁고 기쁜 순간들을 망쳐 버리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 아닙니까?
아름다운 음악을 들을 때 마지막 음이 울리고 나서야 그 음악을 진정으로 감상하고 즐깁니까? 아닙니다. 우리는 작품 전체에 흐르는 다양한 음과 선율, 화음을 듣고 이으며 감상합니다.
기도할 때, “아멘”이라는 기도의 끝 부분만 생각합니까? 물론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께 더 가까이 나아가기 위해, 그분의 영과 그분의 사랑을 느끼기 위해 기도합니다.
미래의 어떤 순간에 다다를 때까지 행복을 기다려선 안 됩니다. 그 순간이 오면 행복은 언제나 우리 곁에 있었음을 깨닫게 됩니다! 지난날을 돌아볼 때에만 인생의 행복을 느낄 필요는 없습니다. 시편의 저자는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이 날은 여호와께서 정하신 것이라 이 날에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리로다”6
형제 자매 여러분, 지금 상황이야 어떻든, 어떤 어려움이나 시련을 겪고 있든 간에 우리의 하루하루에는 무엇인가 누리고 소중하게 간직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그것을 보고 느끼려 하기만 한다면, 매일매일에는 감사와 기쁨을 느끼게 할 무엇인가가 있습니다.
아마도 육신의 눈으로는 조금 덜 보고 마음의 눈으로 더 많은 것을 봐야 할지 모릅니다. 저는 이 글귀를 좋아합니다. “마음으로 볼 때만 분명하게 볼 수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눈에는 보이지 않거든.”7
우리는 “범사에 감사를 드리[라는]”8 명을 받았습니다. 그러니 우리의 현 상황에서 부정적인 것에만 초점을 맞추기보다는 감사드릴 만한 것이라면 작은 것이라도 우리의 눈과 마음으로 찾아보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
주님은 이렇게 약속하셨습니다. “모든 것을 감사함으로 받는 자는 영화롭게 될 것이요, 이 지상의 것들이 그에게 더하여지리니, 백 배[가] …… 더하여지리라.”9
형제 자매 여러분, 하나님 아버지께서 주시는 풍성한 축복으로, 그분이 마련하신 관대한 구원의 계획으로, 회복된 복음의 신성한 진리로, 그리고 이 필멸의 여정에 속한 수많은 아름다움으로, “우리에게 기뻐할 만한 이유가 있지 [않습니까?]”10
그러므로 우리의 상황과 상관없이 행복해지기로 결심합시다.
결심에 관하여
언젠가 우리는 피할 수 없는 순간을 맞아 이 필멸의 세상을 건너 다음 세상으로 갈 것입니다. 언젠가는 인생을 뒤돌아보며 더 잘할 수는 없었는지, 더 나은 선택을 할 수는 없었는지, 또는 시간을 더 현명하게 사용할 수는 없었는지 생각할 것입니다.
인생에서 느낄 수 있는 가장 큰 몇 가지 후회에서 벗어나려면, 오늘 몇 가지를 결심하는 것이 현명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렇게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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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사람들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내기로 결심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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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서 바라시는 사람이 되고자 더 진지하게 노력하기로 결심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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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처한 상황과 관계없이 행복을 찾기로 결심합시다.
내일 찾아올 수 있는 매우 깊은 후회 중 상당수는 오늘 구주를 따를 때 사라질 수 있다는 것을 간증드립니다. 죄를 지었거나 실수를 했거나, 과거에 내린 어떤 결정 때문에 지금 후회하고 있습니까? 우리에게는 그리스도의 속죄라는 귀중한 은사가 있으며 이를 통해 우리는 용서받을 수 있습니다. 시간을 거슬러 과거를 바꿀 수는 없지만, 회개할 수는 있습니다. 구주께서는 우리가 흘리는 후회의 눈물을 씻어 주실 수 있으며11, 죄의 짐을 내려놓도록 우리를 도우실 수 있습니다.12 그분의 속죄는 우리가 과거를 뒤로하고 깨끗한 손과 청결한 마음과13 더 잘하겠다는 결의, 특히 더 나아지겠다는 다짐으로 나아가게 해 줍니다.
그렇습니다. 이생은 순식간에 지나갑니다. 지상에서 보내는 나날은 빠르게 사라지며, 때때로 죽음은 무섭게 느껴집니다. 그러나 우리의 영은 계속해서 살 것이며 언젠가 우리의 부활한 육신과 결합하여 불멸의 영광을 받을 것입니다. 자비로우신 그리스도 덕분에 우리 모두는 다시, 그리고 영원히 살게 될 것임을 엄숙히 간증드립니다. 우리의 구주요 구속주이신 그분으로 말미암아 언젠가 우리는 “사망의 쏘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 삼키운 바 되었[다.]”14는 말씀의 진정한 의미를 이해하고 이를 기뻐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과 딸로서 우리가 받은 신성한 운명을 성취하는 길은 영원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사랑하는 친구 여러분, 우리는 바로 오늘 그 영원한 길을 걷기 시작해야 합니다. 단 하루도 허비해서는 안 됩니다. 참되게 살아가는 법을 배우는 일을 죽음을 목전에 두기까지 기다리지 않기를 간구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성스러운 이름으로 말씀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