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2019
주여 당신께서 제 눈을 열어주시기를 원하나이다
2017년 10월


12:45

주여 당신께서 제 눈을 열어주시기를 원하나이다

우리는 구주의 눈으로 다른 이들을 보아야 합니다.

라이언 킹은 아프리카 대초원에 관한 대표적인 애니메이션 영화입니다. 선왕이 아들을 구하고 죽자 어린 왕자는 쫓겨나고 포악한 새 왕은 대초원의 균형을 파괴합니다. 어린 사자는 조언자의 도움으로 왕국을 되찾습니다. 그는 대초원의 거대한 삶의 순환 고리에 필요한 균형에 눈을 뜨게 됩니다. 왕의 자리를 되찾는 과정에서 어린 사자는 “마음의 눈으로 보라”는 조언을 받습니다.1

우리 아버지께서 가지신 모든 것에 대한 상속자가 되는 법을 배우며, 우리는 복음을 통해 보이는 것의 이면을 보라는 가르침을 얻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의 이면을 보기 위해서 우리는 구주의 눈으로 다른 이들을 보아야만 합니다. 복음 안에는 참으로 다양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세상은 물론 교회 회원들, 심지어 가족 조차도 완전히 다 알지는 못하므로 그들이 내리는 결정과 심리적 배경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경솔한 추측과 고정 관념을 넘어 우리 자신의 경험에 국한된 좁은 시야를 넓혀야 합니다.

저는 30년 전에 선교부 회장으로 봉사하면서 “눈에 보이는 것의 이면을 보는” 시야를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눈에 불안이 가득한 젊은 선교사가 도착했습니다. 접견하는 동안 그는 “집으로 가고 싶습니다”라고 힘없이 말했습니다. 저는 마음속으로 “음, 해결할 수 있을 거야”라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그에게 일주일 동안 열심히 일하고 이 문제에 대해 기도한 후에 제게 전화하라고 했습니다. 정확히 일주일 후, 그가 전화를 했는데 여전히 집에 가고 싶어했습니다. 저는 다시 그에게 기도하고, 열심히 일하라고 조언하고, 일주일 후에 다시 전화하라고 했습니다. 다음 접견에서도 상황은 그대로였습니다. 그는 계속해서 집에 가겠다고 고집했습니다.

그를 집에 돌려보내지 않을 작정이었기에, 저는 그에게 그가 받은 부름의 성스러운 본질에 대해 가르치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그에게 “자신을 잊고 나가서 봉사하라”고 격려했습니다.2 하지만 제가 제시한 어떤 방법도 그의 마음을 바꿀 수 없었습니다. 마침내 제가 큰 그림을 놓치고 있다는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그 순간 그에게 이런 질문을 해야 한다는 영의 속삭임을 느꼈습니다. “장로님, 어려운 점이 무엇인가요?” 그가 한 말이 제 마음을 찔렀습니다. “회장님, 저는 읽을 줄 모릅니다.”

제가 그에게 아주 중요하다고 여긴 현명한 권고는 그의 어려움을 해결하는 데에는 전혀 적절하지 않은 것이었습니다. 그가 제게서 가장 필요로 했던 것은 성급한 판단을 내리는 대신, 영의 도움을 받아 그 장로의 마음을 진정으로 이해하는 것이었습니다. 그에게 필요한 것은 제가 그를 올바르게 보고 희망의 이유를 제시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저는 무신경하게 그를 상처 주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 용감한 장로는 읽는 법을 배워 순수한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그 덕분에 저는 “내가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사무엘상 16:7)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에 눈 뜨게 되었습니다.

주님의 영이 우리 시야를 넓혀주시는 것은 얼마나 큰 축복입니까. 선지자 엘리사가 잠에서 깨어 아람 군대가 말과 병거로 성읍을 둘러싼 것을 보았던 일을 떠올려보십시오. 그의 사환이 두려워하며 엘리사에게 그런 난관에 처했으니 어찌해야 하냐고 물었습니다. 엘리사는 그에게 걱정하지 말라 하고 다음과 같은 인상적인 말을 남겼습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우리와 함께 한 자가 그들과 함께 한 자보다 많으니라”(열왕기하 6:16) 사환은 선지자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는 육신의 눈으로 보는 것 이상을 볼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엘리사는 수많은 천군이 선지자의 백성을 위해 싸울 준비를 갖춘 것을 보았습니다. 엘리사가 주님께 간구하여 그 청년의 눈이 열렸습니다. “그가 보니 불말과 불병거가 산에 가득하여 엘리사를 둘렀더라.”(열왕기하 6:17)

엘리사와 하늘 군대

우리는 종종 외견상의 차이점으로 우리와 다른 이들을 구분짓습니다. 우리는 생각하고 말하고 옷 입고 행동하는 방식이 우리와 비슷한 사람과 함께 할 때 편안함을 느끼며 환경이나 배경이 다른 사람과 있을 때 불편함을 느낍니다. 실제로 우리는 모두 다른 나라 출신이고 다른 언어를 사용하지 않습니까? 우리 자신의 극히 제한적인 삶의 경험을 통해 세상을 바라보지 않습니까? 선지자 엘리사와 같이 영적인 눈으로 바라보고 말하는 사람이 있는 반면 제가 문맹인 선교사와 경험했던 것처럼 육적인 시각으로 바라보고 소통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우리는 비교와 비난, 결점 찾기와 꼬리표 붙이기가 만연한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우리는 소셜 미디어의 렌즈를 통해 보는 대신, 우리 각자가 얻을 수 있는 신의 속성을 찾기 위해 내면을 들여다보아야 합니다. 이러한 신성한 특성과 열망은 핀터레스트나 인스타그램에 게시되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이들을 받아들이고 사랑하는 것이 그들의 사상까지도 수용하라는 뜻은 아닙니다. 우리는 분명히 진리에 가장 충실해야 하지만, 그로 인해 친절함을 잃어서는 결코 안 됩니다. 다른 사람을 진실로 사랑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결코 온전히 알 수 없을 한계와 경험을 지닌 사람들이 기울인 최선의 노력을 받아들이기 위해 계속해서 노력해야 합니다. 눈에 보이는 것 이상을 보려면 의식적으로 구주께 초점을 맞춰야 합니다.

4륜 산악 오토바이

2016년 5월 28일, 열 여섯 살인 보우 리치와 그의 친구인 오스틴은 콜로라도에 있는 가족 농장에 있었습니다. 보우와 오스틴은 종일 신나는 모험을 할 기대에 부풀어 각자의 4륜 산악 오토바이에 올라탔습니다. 얼마 가지 못한 지점에서 상황이 위태로와졌고, 비극이 닥쳤습니다. 보우가 몰던 차량이 갑자기 전복되면서 180킬로그램이 넘는 쇳덩어리에 깔려 움직일 수 없게 된 것입니다. 친구 오스틴이 도착했을 때 보우는 생사의 갈림길에서 고전하고 있었습니다. 오스틴은 모든 힘을 짜내어 친구를 오토바이 밑에서 꺼내려 했지만 오토바이는 꿈쩍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보우를 위해 기도한 다음, 정신없이 도움을 청하러 갔습니다. 마침내 구조대원이 도착했으나 몇 시간 뒤 보우는 세상을 떠났습니다. 필멸의 삶을 마친 것입니다.

망연자실한 그의 부모가 도착했습니다. 그들이 보우의 사랑하는 친구와 가족들과 함께 작은 병실에 서 있을 때 한 경찰관이 들어와 보우의 휴대전화를 어머니에게 전했습니다. 휴대전화를 받아들자 알람이 울렸습니다. 그녀는 휴대전화를 열어 보우의 알람을 보았습니다. 그녀는 잘 놀고 모험을 즐기던 십 대 아들이 매일 읽으려고 설정해 놓은 메시지를 소리 내어 읽었습니다. “오늘도 예수 그리스도를 네 삶의 중심에 둘 것을 기억하자.”

보우가 그의 구속주에게 초점을 맞추었다 해서 그의 부재를 느끼는 사랑하는 이들의 슬픔이 줄어들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그 메시지는 보우의 삶과 선택에 큰 희망과 의미를 부여합니다. 그의 가족과 친구들은 그 메시지를 통해 그의 때이른 죽음에 대한 슬픔을 넘어 다음 생에 실재하는 기쁨을 볼 수 있습니다. 아들의 눈을 통해 그가 가장 소중히 여기는 것을 본 일은 보우의 부모에게 얼마나 깊은 자비입니까.

교회 회원으로서 우리는 필멸의 눈으로만 바라보며 구원에서 멀어질 때 우리에게 경고하는 개인적인 영적 알람을 은사로 받았습니다. 성찬식은 우리가 매주 예수 그리스도께 집중하도록 상기해 주어 우리가 항상 그를 기억하고 항상 그의 영과 함께 하도록 해줍니다.(교리와 성약 20:77 참조) 그렇지만 우리는 때때로 이런 암시와 경고의 느낌을 무시합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 삶의 중심에 둘 때, 그분은 우리가 혼자서 이해할 수 있는 것보다 더 큰 가능성을 보도록 우리의 시야를 넓혀 주실 수 있습니다.

저는 어느 충실한 자매님에게서 자신이 받은 보호 경고에 관한 재미있는 편지를 받았습니다. 그 자매님은 남편에게 자기 감정을 이해시키려고, 자신에게 거슬렸던 남편의 말과 행동을 휴대전화에 저장하기 시작했다고 했습니다. 그녀는 적당한 때에 모아 놓은 증거 자료를 남편에게 보여 주어 남편이 자신의 방식을 바꿔야겠단 생각이 들게 하려고 했답니다. 하지만 어느 일요일 성찬을 취하며 구주의 속죄에 집중하는 동안, 그녀는 남편에 대한 부정적인 감정을 기록하는 것이 자신을 영에서 멀어지게 하며 남편을 결코 변화시킬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마음속에서 영적인 알람이 울렸고, “더는 문제 삼지 말자. 모두 너그럽게 생각하자. 도움이 되지 않는 그 메모를 삭제해 버리자.”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펀지는 이렇게 이어졌습니다. “’모두 선택’을 누르기까지 시간이 좀 걸렸습니다. ‘삭제’를 누르는 데에는 시간이 더 걸렸죠. 하지만 전부 다 지우자, 모든 부정적인 느낌이 사라져 버렸어요. 제 마음은 남편에 대한 사랑과 주님에 대한 사랑으로 가득 찼답니다.” 다메섹으로 가던 사울처럼, 그녀의 시각이 달라졌습니다. 왜곡의 비늘이 그녀의 눈에서 떨어져 나갔습니다.

구주께서는 자주 육체적으로나 영적으로 눈먼 자들의 눈을 뜨게 하셨습니다. 문자 그대로, 또 비유적으로, 신성한 진리에 눈을 뜨는 일은 우리가 필멸의 근시안을 고칠수 있게 해줍니다. 우리가 삶의 궤도를 수정하거나 더 넓은 영원한 관점으로 바라볼 필요가 있음을 알려주는 영적인 “알람”에 주의를 기울일 때, 우리는 성찬의 약속에 따라 주님의 영을 동반할 수 있습니다. 이 일은 조셉과 올리버가 커틀랜드 성전에서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강력한 진리들을 가르침 받을 때 있어났습니다. 주님은 필멸의 한계라는 “휘장”이 “[그들의] 마음에서 걷히고 [그들의] 이해의 눈이 열[리리라]”(교리와 성약 110:1)고 약속하셨습니다.

저는 예수 그리스도의 권능을 통해 우리가 문자 그대로 보는 것을 넘어서 영적으로 볼 수 있게 된다는 것을 간증합니다. 그분을 기억하고, 그분의 영이 우리와 함께할 때, 이해하는 우리의 눈이 열릴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의 위대한 실재하심이 우리 각자의 마음속에 더욱 강하게 새겨질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말씀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