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라인 전용
첫째 계명을 첫 번째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당신을 사랑하라고 명하시는 것은 그렇게 할 때 우리에게 도움이 되리라는 것을 아시기 때문입니다.
공관 복음서인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은 각기 율법에서 가장 큰 계명에 대해 예수께 드린 하나의 질문을 다룹니다. 마태복음을 보면 질문자는 주님을 유혹하려는 불순한 동기를 가진 율법사입니다.(마태복음 22:35~36 참조) 마가복음에서 질문을 하는 사람은 서기관인데, 그는 진심으로 알고 싶어 하는 듯이 보입니다.(마가복음 12:28~34 참조) 누가복음에서 우리는 다시 “일어나 예수를 시험[하는]” “어떤 율법교사”로 돌아옵니다.(누가복음 10:25)
법조계에서 전문적인 경력을 쌓아 온 저이지만, 저는 이 이야기에 나오는 율법사를 변호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의 동기가 어떠했든 적어도 그가 한 질문만큼은 인정합니다. 왜냐하면 그에 대한 구주의 답변이 너무도 놀랍고 심오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그가 뒤이어 던진 질문에도 감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니이까.” (누가복음 10:29) 그 질문은 구주의 감동적인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로 이어졌습니다.(누가복음 10:30~37 참조) 그 율법사는 본인이 원했던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얻었고, 우리는 값을 매길 수 없는 것을 얻었습니다.
예수님의 그 답변이 나오는 마태복음의 이야기는 여러분 모두에게 친숙할 것입니다.
“선생님 율법 중에서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마태복음 22:36~40)
마음과 목숨과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에 마가와 누가는 “힘을 다하여”(마가복음 12:30; 누가복음 10:27)라는 말을 더하였습니다.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인]” 두 가지 큰 계명의 위엄과 첫째 되는 계명이 첫 번째인 이유를 깊이 생각해 보시기를 간청합니다. 그 순서는 우리에게 어떤 중요성을 갖습니까?
둘째 계명은 인간 관계를 위한 훌륭한 지침입니다. 둘째 계명이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지켜지는 세상이 어떨지 생각해 보십시오. 어떤 일들이 일어나지 않을지도 생각해 보십시오. 무엇보다도 폭력 범죄나 학대, 사기, 박해나 괴롭힘, 뒷말, 그리고 확실히 전쟁은 없을 것입니다. 둘째 계명은 본질적으로 황금률입니다.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마태복음 7:12; 또한 누가복음 6:31; 제3니파이 14:12 참조) 제자로서 둘째 계명대로 살기 위해 주님께서 우리 이웃이라 정의하신 사람들, 즉 모든 사람에게 사랑과 공감을 품고 다가갈 때는 신중해야 합니다.
“율법이요 선지자”,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 확립하시고 선지자들이 가르치는 진리와 계명의 주요 내용을 뒷받침하기 위해서는 첫째 계명과 둘째 계명이 필요하며, 이 둘은 함께 작용합니다. 그런데 첫째 계명이 무엇보다 중요한 우선순위를 차지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적어도 세 가지 이유가 머리에 떠오릅니다.
첫째는 이 첫째 계명의 근본적인 본질입니다. 둘째 계명은 훌륭하고 필수적이긴 하지만, 우리 삶에 필수적인 기초를 제공하지는 않으며 그런 의도로 주어진 것도 아닙니다. 둘째 계명에 순종하면 좋은 사람이 됩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는 것에는 무슨 목적이 있을까요? 우리 존재의 핵심은 무엇입니까? 목적과 방향과 의미를 찾기 위해 우리는 반드시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첫째 계명을 첫 번째로 둔다고 해서 둘째 계명을 지키는 우리의 능력이 감소되거나 제한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와 반대로, 그 능력은 증폭되고 강화됩니다. 그것은 신성한 목적과 권능에 닻을 내리게 함으로써 우리의 사랑을 증진시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자신의 힘만으로는 결코 보지 못했을 방법으로 나아가도록 영감을 주는 성신이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면 다른 이들을 사랑하는 우리의 능력이 향상되어 더욱 충만하고 온전해집니다. 이는 하나님의 자녀를 돌보는 일에서 우리가 그분과 진정한 동반자가 되기 때문입니다.
둘째, 첫째 계명을 무시하거나 첫째 계명과 둘째 계명의 순서를 뒤바꾼다면 삶의 균형을 잃거나 행복과 진리의 길에서 벗어나 파괴적인 일탈로 빠지게 되는 위험을 초래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분께 순종하면 미덕을 극단까지 몰아 더럽히려는 우리의 성향에 맞설 힘을 갖게 됩니다. 예를 들어, 설사 자초한 것이라 할지라도 이웃의 괴로움을 측은히 여기는 것은 고결하고 선합니다. 그런데 그런 연민을 어느 선에서 억제하지 않으면 우리는 앨마의 아들 코리앤톤처럼 하나님의 공의에 의심을 품게 되고 그분의 자비를 오해하게 됩니다.(앨마서 42:1 참조)
예를 들어, 다른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은 죄를 옹호하거나 묵과하는 방식으로 하나님의 법을 비틀거나 무시해야 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믿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제프리 알 홀런드 장로님은 이런 잘못된 생각에 대해 이렇게 가르치셨습니다.
“사랑이 우리의 모토라면, 또 그렇게 되어야 하겠지만, 그렇다면 사랑의 결정체인 그분의 말씀에 따라 우리는 범법을 버리고, 또한 … 범법을 옹호한다는 어떤 암시도 주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현대 문명에서 많은 사람이 잊고 있는 것을 분명히 이해하셨습니다. 그것은 죄를 용서하라(그분은 그렇게 하실 무한한 능력이 있습니다.)는 계명과 죄를 묵과하는 것(그분은 한 번도 그렇게 하신 적이 없습니다.)에 대한 경고 사이에는 중대한 차이가 있다는 것입니다.”1
앨마가 코리앤톤에게 설명했듯이, 우리는 공의와 자비가 모두 필요합니다. 그리고 그 두 가지는 오직 하나님의 사랑을 통해, 그분 아들의 은사와 그분 아들이 주시는 회개의 은사 안에서만 가질 수 있습니다.(앨마서 42:13~15, 22~24 참조)
셋째, 첫째 계명이 첫 번째가 되어야 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진리에 기초하지 않고 사랑을 전하려 할 때 우리가 돕고자 하는 사람 또는 사람들에게 해를 끼칠 위험이 있기 때문입니다. 러셀 엠 넬슨 회장님은 이렇게 가르치셨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께서는 우리를 무한하고 완벽한 사랑으로 사랑하시기에, 그리고 그분들이 보는 모든 것을 우리가 볼 수 없다는 것을 아시므로, 우리를 인도하고 보호할 율법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그분의 율법 간에는 강한 관계가 있습니다.”2
이것들이 첫째 계명이 첫 번째이어야 하는 세 가지 이유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쩌면 한 가지 이유를 보태야 할 것 같습니다. 실제로 그 이유는 그 자체로 자명합니다. 첫째 계명이 첫 번째인 것은 하나님께서 그것을 첫 번째로 두셨기 때문입니다.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은 삶을 위한 참된 패러다임입니다. 에즈라 태프트 벤슨 회장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모든 것보다 앞세울 때, 다른 모든 것들은 그들의 적당한 위치로 가게 되거나 우리 생활에서 떨어져 나가게 됩니다. 주님에 대한 우리의 사랑은 우리의 애정과 시간을 바치는 것과 우리가 추구하는 관심사 및 우선순위 등 모든 것을 지배할 것입니다.”3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 우리에게 “그분처럼 진보할 특권”을 주심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그분을 사랑하라고 명하시며,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요한1서 4:19 참조)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존재의 지금 이 시점까지 여러분과 제게 무엇을 의미했으며 또 무엇을 예고하는지 잠시 생각해 보십시오. 영으로 존재하기 이전에 우리는 창조되지 않은 예지 또는 예지들로 존재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지들 가운데로 내려 오셔서 우리의 진보를 위한 계획을 마련하셨습니다. 선지자 조셉 스미스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분이 영들 [또는 예지들]과 영광 가운데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아셨으며, 그분이 다른 영들보다 높은 지성을 가진 존재임을 스스로 아셨기 때문에, 모든 사람이 그분과 같이 발전할 수 있는 특권을 가질 수 있도록 율법을 제정하는 것이 옳다고 보셨습니다.”4
아시다시피, 그분의 계획에는 우리가 그분 영의 자녀가 되는 것이 포함되었으며, 그것은 바로 “첫째 지체”가 되는 영광스러운 단계였습니다.(아브라함서 3:26) 그런 후 그분께서는 우리가 영적인 것에 더해진 물질적인 것, 곧 “둘째 지체”(아브라함서 3:26)를 받을 수 있게 하는 길을 확립하셨습니다. 이 둘째 지체는 하나님께서 누리시는 충만함의 존재와 영광을 얻는 데 필수적입니다. 둘째 지체를 위해, “시험의 상태”(앨마서 12:24), 영적인 사망과 육체적 사망, 우리를 구속하고 부활시킬 구주가 있는 환경으로서 지구를 창조해야 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이 모두를 행하시는 가운데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선택의지를 주셨고 우리의 선택에 따라 크고 작은 결과들과 축복들을 준비하셨습니다.
따라서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우리가 예지의 원시 상태에 있을 때부터 그분과 그분 일의 중심을 우리에게, 그리고 우리의 불멸과 영생에 두셨습니다. 그분께서는 그렇게 하는 것을 그분의 일과 영광이라고 보십니다.(모세서 1:39 참조) 저는 그분께서 굳이 그렇게 하셔야 할 필요가 없었다고 믿는데, 왜 그분께서는 우리를 위해 그렇게까지 하셨을까요? 그분의 동기는 무엇일까요? 사랑 외에 다른 것이 있을 수 있을까요? 이에 대한 명백한 증거는 바로 그분의 아들이라는 은사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한복음 3:16)
그에 대한 보답으로 우리에게 하나님을 삶의 중심에 두고, 그분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우리의 온 마음과 영혼과 뜻과 힘을 다하여 그분을 사랑하라고 요구하시는 것이 지나친 것일까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우리 자신의 행복에 이르게 하는 열쇠임을 알면서 어떻게 우리를 향한 그분의 사랑에 저항하고 그분께 우리의 사랑을 드리지 않을 수 있을까요?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 구주의 모범
온 마음과 영혼과 뜻과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우리는 그분이 바라시는 바를 이루는 것에 삶의 초점을 두게 될 것입니다. 물론 어느 누구도 우리의 본보기이신 예수 그리스도보다 더 온전하고 완전하게 그것을 이룬 사람은 없습니다.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하시도다 나는 항상 그가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므로 나를 혼자 두지 아니하셨느니라.”(요한복음 8:29) 그분의 최우선 순위는 과거에도 현재도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그런 최우선 순위와 그런 최고의 충실함이 있었기에 그분은 속죄가 끝까지 완성되는 것을 보셨고, 가장 쓴 잔의 마지막 한 방울까지 마실 수 있으셨습니다. 구주께서는 이 가장 위대한 (말 그대로 초인적인) 희생을 겪으시며 감내하셨던 고난의 강도를 이렇게 설명하셨습니다. “만유 가운데 가장 큰 자 곧 하나님인 나 자신을 고통으로 말미암아 떨게 하였고 모든 구멍에서 피를 쏟게 하였으며, 육체와 영이 모두 고난을 겪게 하여—내가 그 쓴잔을 마시지 않고 물러서려 하게 하였느니라.”(교리와 성약 19:18)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버지를 향한 그분의 사랑과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려는 그분의 열망은 도무지 알 길이 없는 무한한 고통을 뛰어넘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직접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할지라도 아버지께 영광이 있을지어다. 나는 마셨고 사람의 자녀들을 위한 나의 준비를 마쳤느니라.”(교리와 성약 19:19; 강조체 추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우리의 운명과 불멸과 영생이 저울에 올려졌고, 우리의 존재 자체의 의미를 결정짓는 순간에 마음과 영혼과 뜻과 힘을 다한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저울 추를 우리에게 유리한 쪽으로 기울게 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다른 모든 것과 다른 모든 사람보다도 하나님에 대한 충성심, 어느 때나 모든 일에서 하나님 앞에서 져야 할 책임에 대한 자각, 그분의 뜻을 알고 행하려는 열망과 같은 모범의 패턴을 봅니다. 다음은 결정을 내리는 데 도움이 되는 지침입니다. 하나님 사랑하기를 최우선으로 할 때, 우리는 다른 사람 (심지어 소셜 미디어 인플루언서)의 눈을 통하기보다는 그분의 눈을 통해 세상과 우리의 삶을 보게 됩니다.
그렇다면 첫째 계명을 첫 번째로 둔다는 것은 어떤 모습일까요? 저는 하나님을 다른 무엇보다도 사랑하는 것에 수반되는 모든 것을 열거할 수는 없으나, 몇 가지 예를 들고 싶습니다.
첫째 계명을 첫 번째로 둠: “나의 계명을 지키라”
확실히 첫째 계명을 지키는 데에서 가장 중요한 측면 중 하나는 하나님을 향한 철저한 순종입니다. 구주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요한복음 14:15; 또한 교리와 성약 42:29 참조) 예수께서는 아버지의 계명을 하나도 빠짐없이 지키기로 정하셨고 하나님께 순종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실제 삶으로 보여 주셨습니다.
제 친한 친구는 하나님의 계명과 관련해서라면 합리화부터하려 하는 보편적인 경향을 언급한 적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그는 자신의 관찰과 경험을 통해 “하나님께서 내가 … 하는 것을 정말로 신경 쓰실까?”라는 질문에 언제나 “아니오”라는 대답이 따라나온다는 점을 주목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가 상대적으로 사소할 것이라 생각하는 것에 확실히 신경을 쓰지 않으실 것이라고 우리 스스로를 납득시키는 것은 거의 모든 것을 변명할 수 있는 편리한 방법입니다. 그러나 제 친구는 그것이 잘못된 질문이라고 말했습니다. 중요한 것은 주님께서 신경을 쓰시느냐가 아니라 우리가 약속한 것을 행할 것인가에 관한 것입니다. 질문은 다음과 같아야 합니다. “나는 하나님에 대한 내 사랑을 어떻게 나타낼 것인가?” 또는 “그분의 계명과 성약을 정확하고 존귀하게 지킨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물론 첫째 계명을 지키는 데에서 가장 중요한 측면 중 하나는 형제 자매를 사랑하라는 둘째 계명을 지키는 것입니다. 요한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 (요한1서 4:20) 또한 우리에게 잘 알려진 구주의 이 말씀이 있습니다.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요한복음 13:35)
첫째 계명을 첫 번째로 둠: “내 양을 먹이라”
하나님의 계명에 대한 규율 잡힌 순종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은 그분과 그분의 대의를 위한 봉사입니다. 주님께서는 베드로에게, 그리고 우리에게 세 차례 반복해서 물으십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요한복음 21:15~17) 베드로처럼 우리의 대답은 다음과 같아야 합니다. “그러하나이다 내 경력, 어떤 것, 그 누구보다도 주님을 사랑하나이다.” 그리고 우리 각자는 목자의 이런 음성을 듣습니다. “내 어린 양을 먹이라.”(요한복음 21:15) “내 양을 먹이라.”(요한복음 21:16~17)5
저는 우리 하나님 아버지와 그분의 사랑하는 아들께서 여러분의 개인적인 친절을 기뻐하실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도움을 필요로 하는 이 광대한 세상에서 그것들이 아무리 제한적이거나 사소해 보일지라도 말입니다. 모든 행위와 모든 헌납은 중요합니다. 저는 또한 그분들께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후기 성도 교회로서, 그리고 다른 이들과 연합하여 함께 하고 있는 일들을 기뻐하신다고 확신합니다. 한 가지 예로, 최근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일어난 전쟁의 고통을 완화하기 위한 원조 활동은 진정 그리스도와 같은 행위입니다. 우리는 당면한 필요 사항에 지속적으로 초점을 맞추려고 노력하며 왼손이 하는 일을 오른손이 모르게 하려 합니다. 그러나 저는 여러분이 그리스도의 몸에 속한 일부로서 그분의 양을 먹이는 일에 어떻게 참여하고 계신지 더 잘 알 수 있도록 교회 차원에서 앞으로 더 포괄적인 설명을 제공해 드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첫째 계명을 지키는 것은 또한 주님의 대의를 세상에 널리 알리고 하나님 아버지의 자녀들이 영생을 이루도록 돕는 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저는 여러분 대다수가 해 왔고 또한 앞으로 하게 될 선교 사업보다 더 좋은 예가 생각나지 않습니다. 우리 십이사도는 선교사들과 함께하는 모든 기회를 갈망합니다. 하나님의 양과 어린 양을 먹이는 일에 매우 긴급하게 참여하고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 영이 고양되고 새로워지는 것을 느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시대에 지상과 영의 세계에서 하나님의 성약의 백성을 모으는 일은 러셀 엠 넬슨 회장님이 강조하셨듯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을 지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는 것에서 핵심적인 부분입니다.
첫째 계명을 첫 번째로 둠: 그분께 간구한다, 그분의 말씀을 흡족히 취한다
우리가 첫째 계명을 첫 번째로 두는 또 다른 방법은 꽤 명백합니다. 그것은 하나님께 기도로 간구하고 이해와 인도를 얻기 위해 그분의 말씀을 흡족히 취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분께서 바라시는 바를 알고 행하기를 원합니다. 우리는 그분께서 아시는 바를 알기를 원합니다. 우리는 그분께서 제자인 우리에게 가르쳐 주실 모든 것을 배우기를 원합니다. 우리는 개인적인 계시를 원합니다.
앰율레크는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나님께 자비를 베풀어 주시기를 부르짖고, 가족을 위해 부르짖으며, 우리의 밭과 가축을 위해 부르짖으라고 촉구합니다. 그는 우리에게 적들의 힘과 악마의 영향력에 맞서 하나님께 부르짖으라고 촉구합니다. “또한 너희가 주께 부르짖지 아니할 때는, 너희의 마음으로 충만하게 하여, 너희의 복리와, 또한 너희 주위에 있는 이들의 복리를 위해 끊임없이 그에게 기도하는 데 너희 마음을 기울이도록 하라.”(앨마서 34:27)6
니파이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을 흡족히 취하라 … 이는 보라, 그리스도의 말씀은 너희가 무엇을 행하여야 할지 모든 것을 너희에게 일러 주심이니라.”(니파이후서 32:3) 손가락만 움직이면 다양한 형식과 언어로 출판된 하나님의 수많은 말씀과 선지자들과 사도들의 현재 가르침을 개인적으로 언제나 찾아볼 수 있게 된 점은 우리 시대의 놀라운 축복입니다. 이와 같은 일은 세계 역사상 다른 어느 시대에도 없었습니다. 자문해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시는 의도는 무엇일까요?
저는 기도를 사랑합니다. 저는 경전을 사랑합니다. 저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제게 주시고자 하는 모든 빛과 진리를 원합니다. 저는 그분께서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않으시며 우리 스스로 받기 위해 준비하는 모든 것을 여러분과 제게 주실 것임을 압니다. 하나님을 순전히 사랑하여 그분께서 정하신 수단을 통해 그분과의 끊임없는 소통을 추구하십시오. 넬슨 회장님의 모범을 기억하십시오. 성령을 통해 받은 것을 기록하고 그에 맞게 행동하십시오.
첫째 계명을 첫 번째로 둠: 하나님에 대한 보고 책임
우리 삶에서 첫 번째 계명을 첫 번째로 삼아 소중히 지키는 방법을 한 가지 더 말씀드리겠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책임감, 즉 우리 삶의 방향과 우리 삶의 하루하루에 대한 책임감을 가지고 사는 것입니다. 그것은 유혹을 물리치고 이겨내며, 회개하고 용서하며, 이기심과 싸우고, 그리스도의 이름을 짊어지고, 그리스도의 성품을 키우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우리의 행동뿐 아니라 우리의 생각과 말까지도 경계하는 것을 의미합니다.(모사이야서 4:30과 앨마서 12:14 참조) 그것은 “성령의 이끄심”을 따르며, “어린아이와 같이 되고, 유순, 온유, 겸손, 인내하며, 사랑이 충만하게 되어, 주께서 합당하게 여겨 그에게 내리시는 모든 것에 기꺼이 복종하고자 하기를, 아이가 참으로 그 아버지에게 복종함같이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모사이야서 3:19)
그것은 여러분을 짓누르는 부담스러운 책임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은 성취와 궁극적인 기쁨에 이르는 길을 아시는, 현명하시고 우리를 아끼시며 자상하신 아버지께서 주시는 인정하심입니다. 우리가 스스로 만들어 낼 수 없고 그분의 도움 없이는 달성할 수 없는 기회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제공해 주셨음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내려주시는 많은 자비와 축복을 매일 감사드림으로 생활”하는 것입니다.(앨마서 34:38) 그리고 이러한 책임감의 맥락에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기쁘게 여기신다는 것을 느낍니다. 우리는 그분께서 우리가 그분을 온 마음과 영혼과 뜻과 힘을 다하여 사랑하기 위해 기울이는 가장 작은 노력에도 기뻐하신다는 것을 이해하기에 이릅니다. 하나님 아버지와 구속주께서 여러분과 여러분의 인생 행로를 기뻐하신다고 성령이 여러분의 영에게 주는 증거보다 더 큰 안심과 평안이 있겠습니까?
결론은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는 것이 우리에게 도움이 된다는 것을 아시기에 우리에게 그분을 사랑하라고 명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분께서는 같은 이유로 우리에게 서로 사랑하라고 명하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를 변화시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서로에 대한 우리의 사랑을 변화시킵니다. 이 사랑은 우리가 유일하신 참 하나님이신 그분과 그분이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 가기 위한 전제 조건입니다.(요한복음 17:3 참조) 그것이 우리가 그분과 같이 되는 열쇠입니다.
저는 여러분을 향한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이 참되고 끝이 없다는 것을 압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은 그분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통해 가장 강력하게 나타납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섬기려고 노력할 때 하나님의 사랑이 여러분을 감싸주시도록 축복합니다. 그분의 사랑을 느끼고, 그 사랑이 여러분의 삶에 가장 큰 영향력이 되도록 축복합니다. 저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살아 계시며, 그분의 아들이자 부활하신 주님도 살아 계시며, 은혜의 전령이신 성령이 살아 계시다는 것을 알며 확신할 수 있습니다. 저는 그것을 알며 여러분도 그것을 온전히 알게 되기를 간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