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장
“광범위한 활동 영역”
1866년 12월 26일, 제일회장단과 십이사도 정원회는 브리검 영 회장이 인도하는 가운데 모임을 열었다. 모임을 마칠 무렵, 제2대 교회 회장인 영 회장은 교회 전역에 상호부조회 조직을 재건하겠다는 뜻을 밝혔다.1
이듬해에 영 회장은 궁핍한 사람을 찾아 돕는 책임을 수행하는 감독들에게 조력자가 필요함을 더욱 절실히 느꼈다. 영 회장은 모든 와드에 상호부조회를 재건하는 이 일을 시작하면서 감독들에게 다음과 같이 권고했다. “[자매들에게] 여러 와드에서 여성 상호부조회를 조직하게 합시다. 우리 가운데에는 재능 있는 여성들이 많으니 그들에게 도움을 얻으시기 바랍니다. 혹자는 이 일을 사소한 일로 여길지 모르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자매들이 바로 이 운동을 주도할 원동력이라는 사실을 머지않아 깨달을 것입니다. 여러분의 지혜와 경험으로 자매들에게 조언하고, 영향력을 미치며, 그들을 현명하게 인도하고 잘 이끄십시오. 그러면 자매들은 가난한 사람들이 지낼 수 있는 보금자리를 찾고 그들을 도울 물자를 확보하는 일에 감독보다 열 배는 더 빨리 움질일 것입니다.”2
조셉 스미스가 “하나님께서 [그들] 가슴 속에 심어 주신 연민을 행동으로 옮길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되었[다.]”3라고 말했던 그때처럼 자매들은 다시 한 번 신권 권세에 따라 조직될 참이었다. 자매들은 가족과 궁핍한 사람들을 현세적으로, 또한 영적으로 강화할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봉사를 통해 자신의 신앙과 의로움이 커질 것이다. 엘리자 알 스노우 자매는 자매들이 상호부조회를 통해 “세련되고 고양될 것이며, 무엇보다도 복음을 믿는 신앙 안에서 강화되고 그렇게 함으로써 하나님의 도구가 되어 많은 사람들을 구원할 것”4이라고 가르쳤다.
각 와드에 조직된 상호부조회
영 회장은 스노우 자매에게 교회 전역을 여행하며 감독을 도와 상호부조회를 조직하는 일에 봉사하도록 부름을 주었다. 스노우 자매는 이렇게 말했다. “영 회장님은 감독들에게 각 와드마다 여성 상호부조회를 조직하라고 지시하셨고, … 자매들에게 가난을 구제하는 일뿐 아니라 선하고 고결한 모든 일을 이룰 수 있도록 상호부조회에 가입하라고 촉구하시며, 모든 정착지까지 그 범위를 넓혀 그 요청을 반복하셨습니다.”5
스노우 자매는 일리노이 주 나부에서 최초로 조직된 여성 상호부조회의 서기로 봉사하면서 조셉 스미스의 가르침들을 비롯하여 모임 회의록을 상세하게 작성했다.(2장 참조) 스노우 자매는 나부에서 솔트레이크밸리로 이주해 오는 동안 그 회의록을 잘 간수했다. 그녀는 그러한 모임에서 자매들이 배운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았다. 뿐만 아니라 상호부조회가 어떻게 구성되어야 하는지 알았고, 어떤 원리에 기초하여 설립되어야 하는지도 기억했다. 스노우 자매는 예수 그리스도 후기 성도 교회에서 이 조직이 중요한 부분임을 이해했다. 그녀는 이렇게 설명했다. “이런 성격의 조직으로 함께 모인다는 것은 결코 평범한 일이 아닙니다. 그리스도 교회의 조직이 완전한 형태로 갖추어진 경륜의 시대라면 언제나 교회 안에는 이 조직이 있습니다.”6 그렇기에 스노우 자매는 와드를 두루 돌아다니며 회의록에 기록된 내용을 가르치고 또 가르쳤다.
시야와 영향력을 넓혀 가는 자매들
영 회장은 스노우 자매에게 각 와드 신권 지도자들과 협력하라는 요청에 더해 더 큰 임무를 주었다. 영 회장은 “자매들을 가르치시기 바랍니다.”7라고 부탁했다. 스노우 자매는 1880년이 될 때까지 제2대 본부 상호부조회 회장으로 성별되지 않았지만, 그녀가 받은 임무는 주님께서 에머에게 주신 “나의 영이 네게 주는 바에 따라 경전을 해설하며 교회 회원을 권면할지니라.”8라는 책임과 다르지 않았다.
영 회장이 직접 교회 여성들에게 권고를 하기도 했다. 자매들은 영 회장의 권고와 스노우 자매의 가르침에 힘입어 가정에서나 교회에서, 그리고 세상에 나아가 선을 행하는 자신의 힘을 더 큰 시야로 보게 되었다. 스노우 자매는 이렇게 말씀했다.
“이스라엘 딸들과 어머니들 중 현재 자신의 활동 영역이 조금이라도 [제한적이라고] 느끼는 사람이 있다면, 이제는 자매들이 선을 행하는 모든 힘과 능력을 풍성하게 부여받음으로써 그 활동 영역이 충분히 커졌음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 영 회장님께서 열쇠를 사용하여 더욱 폭넓고 광범위한 활동 영역과 유용성에 대한 문을 여셨습니다.”9
1800년대 후반에 상호부조회의 모습을 규정하는 가르침과 활동들을 돌아보면, 다시 설립된 상호부조회를 통해 후기 성도 여성들이 얼마나 큰 시야로 의로운 영향력을 발휘했는지 알 수 있다.
사랑
조셉과 에머 스미스가 나부에서 세운 원리에 따라서 상호부조회 자매들이 영적으로나 현세적으로 실천해야 할 모든 일은 언제나 사랑에 기초를 두었다. 영 회장은 이렇게 가르쳤다.
“우리 종교에는 이 모든 것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모든 선한 말과 행위, 현세적이거나 영적인 모든 일, 하늘의 일과 땅의 일, 그리고 땅 아래의 일들이 우리 종교의 테두리 안에 있습니다. … 우리가 이 일들을 행하며 의를 실천하는 것을 기뻐한다면 영원히 변치 않을 이 산등성이처럼 [확고하고] 흔들림 없이 우뚝 설 것입니다. 우리는 의로운 원리에 관한 것을 [제외한] 그 어떤 것도 소망해서는 안 됩니다. 정의를 원한다면 다른 사람들에게도 그렇게 대합시다. 모든 사람에게 친절을 베풀고, 넘치는 사랑으로 대합시다.”10
세상의 영향력을 등지고
브리검 영 회장은 가정에서 딸들에게 “악하고 무가치한 모든 것을 삼가고, 선하고 아름다운 모든 것을 키우라”11고 가르쳤다. 삼간다라는 말은 어떤 것을 버린다는 의미이다. 영 회장이 딸들에게 삼가라고 가르친 것은 세상적이고 경솔하고 정숙하지 못한 행동과 옷차림을 피하라는 뜻이었다. 그는 교회의 모든 회원들에게도 그러한 것들을 삼가고 삶을 개선하라는 가르침을 전했다.
영 회장은 성도들에게 세상의 방식을 버리라고 권고하면서 주로 일상 생활과 관련된 실질적인 조언을 주었다. 그는 검소하고 근면하게 생활하도록 장려했다. 예를 들면 상호부조회 자매들에게는 식사와 가사 방식을 개선하라고 권고했다. 하지만 삼간다는 것은 단지 더 단순한 생활 방식을 택하는 것 이상을 의미했다. 그것은 마음이 변화하는 것을 의미한다. 세상의 것으로부터 성별되고 참으로 성도, 곧 주님의 백성이 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엘리자 알 스노우 자매는 이렇게 말씀했다. “무엇을 삼가고 버려야 하겠습니까? 바로 무지와 하나님께 속하지 않은 모든 것입니다.”12
개인적인 계시
스노우 자매는 신권 지도자들의 권고를 따랐고, 상호부조회 자매들에게도 그렇게 한다면 축복을 받을 것이라고 약속했다. 또한 각자 자신의 삶에서나 가정 생활, 교회에서 맡은 책임을 수행하면서 그들을 인도해 줄 영감을 받을 수 있다고 가르쳤다. 스노우 자매는 이렇게 말했다. “자매들에게 겸손한 마음으로 나아가서 자신의 의무를 충실히 이행한다면, 그 일을 하는 도중에 하나님의 영이 임하여 축복이 올 것이라고 전해 주세요. 권능을 구하지 말고 지혜를 구하라고 하세요. 그러면 지혜를 행사하는 데 필요한 모든 권능을 얻을 것입니다.”13
스노우 자매의 영감에 찬 가르침은 상호부조회 자매들이 인생에서 겪는 시련을 극복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그녀는 자매들이 끊임없이 성신의 인도와 위안을 구한다면, 역경 속에서도 평안을 누릴 수 있다고 가르쳤다. 스노우 자매는 성신은 “사람이 마음에 품은 모든 간절한 소망을 이루어 주고, 부족한 부분을 모두 채워 준다.”라고 말하며 이렇게 덧붙였다. “영으로 충만할 때면 제 영혼은 기쁨으로 가득 차서 그날의 사소한 문제들이 전혀 걸림돌로 여겨지지 않게 된다고 진심으로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영과 복음의 힘을 붙잡지 못하고 세상의 정신을 조금이라도 받아들이면 걱정거리가 생겨납니다. 뭔가가 잘못되었기 때문입니다. 시험에 빠진 저에게 무엇이 위안이 되겠습니까? 오직 하늘의 샘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면 그 무엇도 불멸의 영혼을 만족시키는 위안을 제게 줄 수 없습니다. 우리 영혼으로 끊임없이 흘러 들어오는 이 위안을 느끼며 살아가는 것은 참으로 우리의 특권이 아니겠습니까?”14
복수 결혼을 옹호하다
교회 초기에 조셉 스미스는 복수 결혼을 시행하는 것에 관한 계시를 받았다.15 처음에는 많은 사람들이 이 계시를 받아들이기 어려워 했지만, 충실한 성도들은 조셉 스미스가 하나님의 선지자였음을 알았다. 그들은 선지자에게 계시된 대로 주님의 뜻을 따랐으며 하나님과 성약을 맺고 그 성약을 굳건하고 신실하게 지켜나갔다.
1860년대 후반에 상호부조회가 다시 조직될 당시 복수 결혼은 여전히 교회 회원들의 생활 중 일부였다. 그러나 미국 내 많은 사람들이 복수 결혼 율법에 따라 생활하는 여성들을 타락한 여자 혹은 학대받는 여자로 여겼다. 후기 성도와 그들의 믿음에 대한 사람들의 오해로 미국 정부는 일부다처 형태의 결혼을 금지하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후기 성도 여성들은 이러한 입법 조치에 대응하여 1870년 1월에 솔트레이크시티에서 모임을 개최했다. 미국 각 지역으로부터 신문 기자들이 참석한 이 자리에서 자매들은 살아 있는 선지자와 교회에서 시행하는 그 관행을 지지하는 의사를 표명했다. 자매들은 자신과 그들의 남편을 옹호했고 자신의 신앙과 성약에 대해 선포했다. 엘리자 알 스노우 자매는 이렇게 말씀했다. “지금이 바로 우리가 받은 부름에 대해 당당하게 일어나서 우리 자신을 변호할 때입니다. … 세상은 우리를 알지 못하며, 그렇기에 형제들과 우리가 받은 진리와 정의의 요구에 응하여 우리는 입을 엽니다. … 우리는 세상의 여성들보다 결코 표준이 낮지 않으며, 그렇게 비쳐지기를 원하지 않습니다.”16
한 후기 성도 여성은 다음과 같은 말로 많은 이들의 목소리를 대변했다. “이 넓은 세상에서 이곳 유타만큼 여성들을 친절과 사랑으로 대하고 여성들의 권리를 성스럽게 지켜 주는 곳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우리가 이 자리에 참석한 목적은 서로를 아끼는 마음을 표현하고 하나님 아버지께 헌신하는 우리의 모습을 온 세상에 알리기 위해서이며, 복음이 요구하는 바를 기꺼이 따르겠다는 의지를 보여 주기 위함입니다. 해의 왕국의 결혼에 관한 율법은 바로 우리가 존중하고 가르치고 실천하기로 결심한 복음에서 요구하는 것 중 하나이며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그렇게 할 수 있도록 힘을 주실 것입니다.”17
신문기자들은 이 일을 두고 “주목할 만한 모임”18이라고 언급했다. 한 기자는 이렇게 기록했다. “몰몬 종교의 소위 타락한 여성들은 … 논리나 수사법이 동양 여성들과 거의 동일하다.”19 그 이후 몇 달간 그런 모임이 곳곳에서 열렸으며 더 많은 여성들이 참여했다.
1890년, 제4대 교회 회장인 윌포드 우드럽 회장은 교회 내에서 복수 결혼 관행을 중단하게 하는 계시를 받았다. 우드럽 회장은 이 계시를 문서화했고 이것은 공식 선언으로 알려졌다. 우드럽 회장은 이 공식 선언을 작성하는 일에 관해 이렇게 말씀했다. “제가 한 이 일은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서 명하신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제게 이 일을 하도록 명하신 그 순간이 왔을 때, 모든 것이 명확해졌습니다. 저는 주님 앞에 나아갔으며, 주님께서 제게 기록하라고 명하신 것을 기록했습니다.”20
당시에 사람들은 복수 결혼을 시행하라는 선지자의 권고를 받아들여 성약을 맺고 지키던 상황이었기에 이 새로운 계시를 받아들이는 데는 다시 한 번 많은 어려움이 뒤따랐다. 하지만 충실한 후기 성도들은 이번에도 선지자를 따르기로 결심했다. 교회 회원들이 그 공식 선언이 발표되는 것을 듣고 그것을 지지했을 때, 당시 제3대 본부 상호부조회 회장으로 봉사하던 지나 디 에이치 영 자매는 이렇게 말했다. “오늘 모두의 마음이 시험받았지만 우리는 하나님을 바라보았고 순종했습니다.”21
계시로 복수 결혼을 받아들이고, 이후에 또다시 계시로 그 공식 선언을 받아들인 교회 여성들은 충분히 존중받고 인정받을 만하다. 이들은 자신이 맺은 성약과 살아 있는 선지자의 권고에 철저히 순종했다. 오늘날 이 여성들의 모범을 충실히 따르는 후대 사람들은 이들을 진심으로 존경해 마지않는다.
복수 결혼 율법에 따라 살았던 헬렌 마 휘트니 자매는 이렇게 기록했다. “사람들은 역사를 읽으면서 순교자와 위대한 정복자와 훌륭하고 선량한 수많은 남녀에 관한 이야기를 접한다. 그렇지만 이스라엘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신앙으로 자기 자신을 이기고 그분의 더 높은 율법에 순종하고 그분의 종들을 도와 지상에 그 율법을 확립시킨 고귀한 여성들, 곧 아름다운 시온의 딸들의 역사는 … 천사들이 그 행적을 기록해 놓았으며, 그 기록이 영원의 책에 황금빛 글자로 새겨져 있을 것이라는 확신이 든다.”22
자신의 믿음을 표명하는 자매들
엘리자 알 스노우 자매는 글재주가 뛰어난 데다가 훌륭한 웅변가였다. 스노우 자매는 영어를 구사하는 탁월한 능력 때문에 “시온의 여류 시인”으로 널리 칭송받았다.23 그녀는 박식하고 체계적인 데다 충실하고 지칠 줄 모르는 열의가 있었으며, 지혜롭고, 생각을 명확히 표현할 줄 알았고, 주님의 왕국을 건설하는 일을 도울 때에는 영의 속삭임을 따랐다. 그녀는 자주 자신의 지식과 간증을 나누었다. 또한 후기 성도 여성들에게 늘 타인에게서 가르침을 받기만 하지 말고 자신의 지식을 나누라고 상호부조회 모임에서 권고했다.
일부 여성들은 사람들 앞에서 말하기를 주저하고 선뜻 나서지 않으려 했다. 스노우 자매는 그런 자매들에게 다음과 같이 권고했다. “처음부터 끝까지 회장이 모든 것을 말하도록 만들지 마십시오. …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언변이라는 은사를 주시지 않으셨습니까? … 여러분이 하나님의 영을 받았다면 아무리 간단한 생각을 나누더라도 그것은 듣는 이들을 교화할 것입니다.”24
에밀리 에스 리차즈 자매는 자신이 회중 앞에서 말하는 능력을 키울 수 있도록 스노우 자매가 도와주었다고 했다. “[스노우 자매님이] 처음 제게 모임에서 말씀해 달라고 부탁했을 때 저는 그 제의를 수락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분은 ‘괜찮아요, 하지만 다음번에 부탁드릴 때는 할 말을 생각해 두었다가 시도해 보세요.’ 하고 말씀해 주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렇게 했습니다.”25 리차즈 자매는 그 능력을 계속 발전시켜 1889년에는 워싱턴 디시에서 열린 전국 여성 참정권 협회 모임에서 연설을 하기도 했다.
한 기자는 당시 리차즈 자매 모습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수많은 사람들의 시선을 받아 약간 떨리는 목소리였지만 절제되고 침착한 어조로 위엄 있게, 그러면서도 천사처럼 순수하고 다정하게 [이야기했다.] 모든 사람의 마음을 감동시킨 것은 연설 내용이 아니라 그 말에 실린 온화한 정신이었다.”26
오늘날 상호부조회 자매들은 스노우 자매와 리차즈 자매를 비롯한 초기 상호부조회 자매들이 보인 모범에 따라 부지런히 복음 지식을 추구하고 그 지식을 다른 사람과 나눈다. 그렇게 하는 과정에서 자매들은 후기 선지자들의 권고를 따른다. 제12대 교회 회장인 스펜서 더블유 킴볼 회장은 다음과 같이 말씀했다.
“저는 모든 여성이 경전을 공부해야 할 중대한 필요성을 … 강조하고자 합니다. 우리는 여러분이 독신이든 기혼자이든, 나이가 많든 적든, 미망인이든, 가족들이 함께 살든 간에 경전 지식에 해박하기를 바랍니다. 그리한다면 우리의 가정은 축복을 받을 것입니다.
스펜서 더블유 킴볼
여러분이 어떤 상황에 놓여 있든지 경전 진리를 더 많이 공부하고 익힐수록 두 번째로 큰 계명인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씀을 점점 더 효과적으로 지키게 될 것입니다. 경전에 해박한 전문가가 되시고, 다른 사람을 깎아내리지 말고 고양시켜 주십시오! 무엇보다도, 많은 양육과 교육을 담당하는 여성과 어머니만큼(필요할 순간에 바로 활용할 수 있도록) 복음 진리를 ‘보배롭게 간직’해야 하는 사람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킴볼 회장은 상호부조회 자매들이 “생활 속에서 의로움을 나타내고 분명한 목소리를” 낼 때 “세상의 선한 여성들”에게 선한 영향력을 강하게 행사하게 될 것이라고 간증했다.27
스노우 자매와 킴볼 회장과 여러 교회 지도자들은 상호부조회가 발휘할 수 있는 선한 영향력을 내다보았다. 자매들이 자신의 믿음을 말과 행동으로 분명히 나타내 보일 때, 그들은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을 서로 강화할 수 있다. 또한 하나님 아버지께서 마련하신 행복의 계획에서 우리에게 예비된 모든 축복을 받을 준비를 하도록 서로 도울 수 있다.
현세적 자립
후기 성도들은 숱한 박해를 받고, 그들이 일군 가정과 지역 사회에서 수 차례 내쫓기며 솔트레이크밸리로 모이게 되었다. 브리검 영 회장은 먼 길을 여행하여 이 고립된 사막으로 이주해 온 그들이 이제는 오래도록 거주할 수 있는 집을 짓고 번영할 수 있기를 바랐다. 영 회장은 성도들이 외부 침입으로부터 안전하고, 그들의 신앙과 간증을 해치는 세상의 영향으로부터 그것들을 지켜내기를 바랐다. 또한 성도들이 현세적으로나 영적으로나 세상의 영향력으로부터 완전히 독립하기를 원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성도들이 필요한 것들을 스스로 해결할 수 있도록 기술을 배워야 할 필요가 있었다. 영 회장은 이러한 노력에서 여성들의 역량과 재능, 충실함과 자주성을 크게 신뢰했다. 그는 상호부조회 자매들에게 가정에서 남편과 자녀들에 대한 의무를 다해야 한다고 상기시켰다.28 또한 현세적 자립에 대한 다른 의무들도 가르쳤는데, 그중 몇 가지를 소개하자면 다음과 같다. 현세적인 의무에 대한 여러 가지 세부 사항은 오늘날과 다르지만, 이러한 의무 저변에 깔린 원리들은 오늘날까지도 지속된다. 지금도 후기 성도는 자신과 가족이 생활하는 데 필요한 현세적인 것들을 마련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라는 권고를 받는다.
바느질. 영 회장은 자매들에게 자신과 가족들이 입을 옷을 직접 바느질하라고 권고했다. “저는 자매님들께 … 우리에게 맞는 옷차림을 창조하고 외부 영향에 현혹되지 않고 자신에게 만족스러운 옷을 직접 만들어 입으시기를 부탁합니다.”29 엘리자 알 스노우 자매가 기록한 바에 따르면, 영 회장은 또한 자매들에게 “우리가 실제로 그러하듯 세상의 머리에 서 있는, 분별력 있고 세련되고 지적인 여성들이 입을 만한 합당한 옷차림 유형”30을 확립하라고 권고했다.
실크. 영 회장은 데저렛 실크 협회(Deseret Silk Association)를 설립하고, 지나 디 에이치 영 자매에게 협회장 직을 맡겼다. 이 단체는 뽕나무 잎을 먹여 누에를 길러 냈다. 영 자매는 벌레라면 기겁을 했고 심지어 악몽까지 꿀 정도였지만, 그 임무에 순종하여 직접 양잠소를 마련하고 누에를 부화시켜 길렀으며, 다른 사람에게 그 기술을 가르치기도 했다. 데저렛 실크 협회는 영 자매의 지휘에 따라 그 후로 20년이 넘도록 양잠을 했다. 그 일로 수입을 벌어들인 것은 아니었지만 그들은 직접 사용할 아름다운 실크를 자아낼 수 있었다.
밀. 영 회장은 자매들에게 “곡식과 밀가루를 비축하고 먹을 것이 부족할 때를 대비해 저장하는 등 생계를 이어가는 법을 터득하[라.]”31고 권고했다. 훗날 제5대 본부 상호부조회 회장이 된 에밀린 비 웰즈 자매가 당시에 중앙 밀 위원회(central wheat committee)를 맡아서 운영했다.
이러한 모험에서, 굶주림으로부터 가족을 지켜내고자 하는 어머니의 마음은 여성들에게 커다란 동기가 되었다. 웰즈 자매는 이렇게 말했다. “어머니만큼 이러한 것들을 가슴 깊이 느낄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어린 자녀가 먹을 것을 달라고 울고 있다면 어떤 심정일지 상상해 보십시오.”32
와드 상호부조회 회장들이 정기적으로 모임을 열어 곡식을 확보하고 저장할 방법을 논의했다. 솔트레이크시티 와드 상호부조회 회장인 사라 하워드 자매가 보여 준 결의는 당시 많은 자매들의 마음을 대변한다. 하워드 자매는 이렇게 말했다. “저는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특권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한마음으로 이 일에 매진할 것입니다. 이를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미 수확 시기가 지났지만 우리가 곡식을 얻을 수 있도록 주님께서 길을 열어 주시리라는 느낌이 듭니다.”33 다른 와드에서 상호부조회 회장으로 봉사하던 사라 엠 킴볼 자매는 미리 곡식 저장 계획을 세워서 모임에 참석했다. 이 계획을 시행한 첫해에 그녀가 이끄는 와드 상호부조회는 밀 27톤을 저장할 수 있는, 화재에도 안전한 곡물창고를 지었다.
당시 십이사도 정원회 일원이었던 존 테일러 회장은 유타 케이스빌에 살던 형제들에게 이 일을 하는 자매들을 도우라고 권유했다. 그는 “씀씀이가 헤프고 부주의한” 남편을 둔 여성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 여성은 매주 생활비에서 돈을 조금씩 떼어 몰래 가족 성경책 안에 넣어 두었다. “몇 년이 지나 재정적으로 위기가 찾아왔고, 남편은 곤경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아내는 남편의 얼굴빛이 좋지 않은 것을 즉시 알아채고는, 고민하는 이유가 뭔지 말해 달라고 했습니다. 남편은 곧 만기가 돌아오는 [어음]이 있는데 아무래도 돈을 마련하지 못할 것 같다고 대답했습니다. 아내는 신앙으로 하나님을 믿으라며 남편을 격려하고, 낡은 성경책을 펼쳐서 읽으면 조금 위로가 될 거라고 다독였습니다. 아내가 건네주는 성경책을 펼쳐서 책장을 넘기자 [돈]이 떨어져 나왔습니다.” 테일러 회장은 다음과 같은 말로 이야기를 마쳤다. “우리 자매님들이 저장하는 이 밀이 필요할 때가 찾아올지도 모릅니다. 우리 일에 대한 지나친 확신은 삼가고 자매들을 돕기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합시다.”34
에밀린 비 웰즈 자매는 자매들이 부지런히 실천한다면 “긴급한 때에 이 백성들에게 현세적 구원”35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1898년과 1899년 유타 남부에 극심한 가뭄이 들었을 때 상호부조회가 저장해 둔 밀을 식량으로 사용함으로써 웰즈 자매의 말이 실현되었다.
후기 성도 여성들은 부지런히 밀을 저장한 덕분에 자신의 가족과 성도들뿐 아니라 더 많은 사람들에게 봉사할 수 있었다. 교회는 상호부조회가 비축한 밀을 유타에 거주하는 아메리카 인디언들에게 보냈고, 1906년 캘리포니아 주 샌프란시스코에서 발생한 끔찍한 지진과 화재 속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에게도 이 밀을 보냈으며, 1907년 기근으로 고통받던 중국 사람들에게도 보냈다.36 또한 상호부조회는 제1차 세계 대전이 한창이던 때에 미국 정부에 밀을 약 5,400톤 가량을 팔았고, 그것은 수많은 사람들에게 식량으로 공급되었다.37 이러한 비축과 봉사의 전통은 지금까지도 이어져 전 세계에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 찾아가 인도주의적 지원을 제공하는 교회 활동의 발판이 되었다.
보건과 의료 교육. 1873년 9월, 엘리자 알 스노우 자매는 브리검 영 회장이 “상당수의 [자매들에게] 일반 교양 교육을 받은 후에 의학 관련 학위를 받을 것을”38 권했다고 기록했다.
지나 디 에이치 영 자매는 의료 분야에서 많은 봉사를 한 대표적인 상호부조회 자매이다. 영 자매는 축복사의 축복을 받으면서 자신이 병을 고치는 은사를 받았다는 말을 들었다. 그래서 그녀는 이 은사를 잘 활용하기 위해 출산을 다루는 의학 분야인 산과학 과정을 이수했다. 그녀는 솔트레이크밸리에서 수많은 출산을 도왔다. 그녀는 그러한 봉사에서 자신의 은사와 더불어 자신이 실제로 교육받은 것으로 환자들에게 간호와 정신적인 치유, 정서적인 위로까지 해 줄 수 있었다. 에밀린 비 웰즈 자매는 영 자매에 대해 이렇게 언급했다. “영 자매님은 병상 주변 사람들마저 신앙과 용기를 잃어 가는 상황에서 … 마치 자신의 힘이 아닌 더 높은 권능으로 영감을 받은 것처럼 환자들을 보살핀 적이 수도 없이 많습니다. 그럴 때 그 자매님은 환자를 보살피는 자비로운 천사처럼 보였습니다.”39
영 자매는 영적인 은사와 간단한 과정을 이수하여 그러한 모든 봉사를 해 왔지만, 유타 인구가 점점 늘어났기에 그 많은 사람들에게 필요한 의료 기술을 모두 제공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는 점을 정확하게 인식했다. 그래서 그녀는 다른 후기 성도 여성들도 영 회장의 권고에 따라 의료 교육을 받도록 장려했다.
스노우 자매는 이렇게 말했다. “여기 계신 자매님들 중 시온을 위해 이 공부를 맡아 줄 만큼 포부가 크며, 그것을 절실하게 느끼시는 분들이 계십니까? 어떤 사람들은 사람을 간호하는 일에 타고난 재능이 있습니다. 그런 분들은 의학 공부를 잘 해낼 수 있을 것입니다. … 만약 혼자 힘으로 학비를 충당할 수 없다면 지원을 받을 방법이 있습니다.”40
이러한 격려에 힘입어 몇몇 상호부조회 자매들이 미국 동부에서 의학 공부를 했다. 그들은 의사가 되어 유타로 돌아왔고, 조산술과 가정 간호에 관한 강의를 했다. 유타에서 그 강의에 참석했던 에머 앤더슨 릴젠퀴스트는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그 [강의]는 아주 좋았다. 그리고 사도인 존 헨리 스미스 장로님과 몇몇 분들에게서 성별을 받고 일을 하러 집에 돌아왔다. 나는 의롭게 생활한다면 어떤 어려운 상황에서도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알 수 있으리라는 약속을 받았다. …
그 약속은 문자 그대로 성취되었다. … 내 환자 상태가 심각하게 악화될 때면 나는 하나님 아버지께 도움을 구했고, 그때마다 응답을 받았다. 한번은 갓 출산을 한 산모가 갑자기 심한 출혈을 일으켰다. 그녀의 남편은 의사를 부르긴 했지만 얼마나 위험한 상황인지는 깨닫지 못했다. 나는 … 주님께 도움을 간구했다. 출혈이 멎자 나는 그녀에게 꼭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몇 가지 조치를 취했다. 의사가 도착해서 그 이야기를 듣고는 믿을 수 없는 일이라고 하면서 자기였더라도 내가 한 것과 똑같이 조치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
… 나는 천 명이 넘는 아기들이 [세상에] 태어나도록 도와주었다. 도움과 힘을 주신 하나님 아버지께 다시 한 번 감사드린다. 그분의 도움이 없었다면 나는 우리 자매들과 지역 사회에 이런 봉사를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출산에 관해 내가 깊은 감동을 받은 일 하나는 임산부가 자기 몸보다도 아기를 먼저 걱정한다는 점이었다.”41
1882년에 상호부조회는 데저렛 병원을 설립했다. “그곳은 주님의 백성 중 병든 사람들이 찾아와 전문 치료만이 아니라 [신권 축복과 같은] 교회 의식도 받을 수 있는 곳이었다.”42 데저렛 병원은 10여 년간 그런 역할을 계속 수행하다가 병원 운영비가 기부금을 초과하고 사람들이 이용할 수 있는 다른 병원들이 세워질 때쯤 문을 닫았다.
여성 참정권(투표권)
1870년 2월, 유타 지역 정부는 여성에게 정부 선거에 참여할 수 있는 투표권을 부여했다. 당시 미국 내에서 여성에게 이러한 권리를 부여한 곳은 와이오밍 지역밖에 없었다. 이후 중앙 정부는 복수 결혼 율법대로 생활한 데 대한 처벌 중 하나로 후기 성도 여성들에게만 이 특권을 무효화했다. 그러나 후기 성도 여성들은 여전히 목소리를 높여 자신의 권리를 분명하게 주장했다. 많은 자매들이 여성 참정권, 즉 투표권을 되찾기 위해 적극 노력했다. 그들 스스로 강하고 위엄 있고 고결한 여성임을 나타내 보여야 하는 상황이 닥쳤을 때, 자신의 생각을 분명하게 말하는 능력을 키운 것이 축복으로 작용했다. 자매들은 열심히 노력한 끝에 유타가 미합중국의 주로 승격되었을 때 마침내 투표권을 되찾았다. 또한 그들이 보인 노력은 미국과 세계 여러 나라에서 일어나던 여성 운동 단체로부터 존경을 받았다.
출판
상호부조회는 엘리자 알 스노우 자매의 지도를 받아 여성의 전형(Woman’s Exponent)라는 신문 발행을 도왔다. 이 신문은 후기 성도 여성들이 자신들의 일과 삶과 역사를 배우도록 돕기 위해 만들어졌다. 에밀린 비 웰즈 자매는 신문이 발행되던 대부분 기간 동안 편집자로 일했다. 그녀는 일지에 이렇게 기록했다. “여성들이 처한 상황을 향상시키기 위해 능력이 닿는 데까지 최선을 다해 일하고 싶다.”43 이후에 그녀는 또 이렇게 기록했다. “나는 여성들이 교육적인 면뿐 아니라 도덕적, 영적인 면에서도 발전하고 지상에서 하나님의 사업을 전진시키는 일들에 온 마음을 다하여 참여하기를 소망했다.”44
여성의 전형(Woman’s Exponent)은 42년간 발행되다가 1914년에 폐간되었다. 상호부조회는 바로 다음 해에 상호부조회 잡지(Relief Society Magazine)를 발행하기 시작했다. 이 잡지에는 매주 열리는 상호부조회 모임 공과가 실려 있었다. 자매들에게 이 잡지는 중요한 자료였다. 그들은 이 책을 소중히 간직했으며, 내용을 공부하고 서로에게 가르쳤다. 1971년에 이르러 상호부조회 잡지(Relief Society Magazine)와 교회 내 영어를 사용하는 성인 회원들을 위한 다른 잡지들이 하나로 합쳐져 엔사인(Ensign)이라는 새로운 잡지가 탄생했다. 그 이후로 엔사인(Ensign)은 상호부조회 자매들에게 가르침과 영감을 주는 기사를 제공해 오고 있다.
교회는 1800년대 중반 이후부터 영어가 아닌 다른 언어로 된 잡지를 발행하기 시작했다. 이 중 많은 잡지들이 선교부 회장의 지도에 따라 발행되었다. 이 잡지들은 1967년에 동일한 형식과 내용으로 통합되어 여러 언어로 번역되었다. 이 국제적인 잡지는 현재 리아호나라고 불리며, 늘 자매들이 복음에 따라 생활하는 데 도움이 되는 기사들을 제공한다.
1987년부터는 리아호나와 엔사인(Ensign)에 방문 교육 메시지가 실렸다. 교회가 조직된 지 얼마 되지 않아 회원수가 적은 지역에는 방문 교육 메시지만 따로 발행되어 배부되기도 한다.
어린이와 청녀를 하나님 왕국에서 봉사하도록 준비시키는 일
1800년대 후반에는 신권 및 상호부조회 지도자들이 어린이와 청녀들의 삶을 개선하기 위해 조직적인 노력을 기울였다. 개선하고 삼가라는(45쪽 참조) 브리검 영 회장의 요청에 따라 상호부조회 지도자들은 1870년에 중·고등부 근신 연합 젊은 여성부(Young Ladies Department of their Cooperative Junior and Senior Retrenchment Association)를 설립했다. 이는 오늘날 청녀 조직으로 이어진다. 어린이들을 위한 초등회는 1878년에 조직되었다. 초기에는 상호부조회 지도자들이 신권 지도자들의 지시를 받아 이들 조직이 하는 일을 감독했다. 1880년에 제3대 교회 회장인 존 테일러 회장이 본부 상호부조회 회장단, 본부 청녀 회장단, 본부 초등회 화장단 부름을 각각 부여하고 조직들의 활동을 구분했다.
그때 이후로 상호부조회 자매들은 늘 청녀와 초등회 조직에서 인도하고 봉사하는 역할을 해 왔다. 자매들은 또한 주일학교나 세미나리 및 종교 교육원과 같은 다른 조직에서 봉사하며 자라나는 세대들이 복음 안에서 더욱 굳건하게 뿌리내리도록 도왔다.
앞으로 나아가며
상호부조회가 다시 조직되면서 후기 성도 자매들에게는 더욱 큰 책임과 더 많은 기회가 돌아오게 되었다. 엘리자 알 스노우 자매는 이렇게 선언했다.
“우리의 활동 범위가 더 커진 것이 보이지 않으십니까? 우리는 계속해서 활동 영역을 넓혀 갈 것이므로, 시온의 자매들은 자신의 영역이 너무 좁다고 한탄할 필요가 없습니다.
자매 여러분, 하나님의 축복이 함께하셔서 여러분이 빛으로 충만하기를 바라고 오직 시온의 복리 외에는 아무것에도 관심이 없음을 여실히 보여 주십시오. 여러분이 가정에서 수행해야 하는 본분을 최우선으로 여기십시오. 그러나 여러분은 지혜로운 청지기인 만큼, 사회적 의무를 수행할 시간도 내실 것입니다. 이것이 시온의 딸과 어머니인 우리가 해야 할 일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의무를 다하려고 노력하다 보면 여러분의 능력은 커질 것이며, 여러분은 자신이 성취할 수 있는 일들에 놀랄 것입니다.”45
스노우 자매가 자신의 신앙과 낙관을 개인적으로 표현한 글들은 후기 성도 모두에게 귀감이 된다.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앞으로 나아가겠다. 거센 폭풍 속에서도 밝게 웃으며 두려움 없이 파도가 몰아치는 바다를 의기양양하게 헤쳐 나가겠다. … ‘예수님에 대한 간증’은 등불이 되어 불멸의 문으로 향하는 길을 밝힐 것이다.”4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