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물러서지 …... 않[기를]”(교리와 성약 19:18)
청년 독신을 위한 CES 영적 모임, 2013년 3월, 텍사스 알링턴 대학교
전 세계 교회 젊은이들과 함께 이 영적 모임에 참여할 수 있게 되어 감사합니다. 저는 여러분을 사랑하며, 함께 예배하는 이 소중한 기회에 감사드립니다.
수잔은 여러 중요한 원리에 대해 말씀하고 간증했습니다. 각자 그 가르침을 일상생활에 한결같이 적용한다면 축복받고 강화될 것입니다. 수잔은 의로운 여성이며, 택함을 받은 여인이며, 평생 함께할 제 사랑입니다.
저는 오늘 밤 여러분에게 어떻게 하면 가장 도움이 될 수 있을지를 알고자 깊이 생각하며 하나님 아버지께 간절히 간구했습니다. 성신의 권능이 우리 각자와 함께하셔서 생각해야 할 것을 생각하게 하고, 느껴야 할 것을 느끼게 하고, 배워야 할 것을 배우게 하여, 우리가 알기에 해야 하는 일을 할 수 있게 되고, 궁극적으로는 주님께서 바라시는 사람이 될 수 있기를 간구합니다.
헌신적인 제자이자 움츠러들지 않은 모범
닐 에이 맥스웰 장로님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 받는 제자이십니다. 그분은 십이사도 정원회 일원으로 1981년부터 2004년까지 23년간 봉사하셨습니다. 맥스웰 장로님의 가르침에 담긴 영적인 힘과 충실한 제자로서 보이신 모범은 구주의 회복된 교회 회원들에게, 그리고 전 세계 사람에게 놀라운 방식으로 축복이 되었으며, 계속해서 축복이 되고 있습니다.
1997년 10월에 저는 아내와 함께 브리검 영 대학교 아이다호에서 맥스웰 장로님 부부를 모신 적이 있습니다. 맥스웰 장로님은 학생들과 교직원, 교사진이 모이는 영적 모임에서 말씀하시기로 되어 있었습니다. 교내 모든 사람이 맥스웰 장로님의 방문을 간절히 기다렸고, 그분의 메시지를 진지하게 받아들일 준비를 했습니다.
그 해 초반에 맥스웰 장로님은 백혈병으로 46일간 밤낮을 가리지 않고 심신을 쇠약하게 하는 화학 치료를 받으셨습니다. 치료가 끝나고 병원에서 퇴원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 4월 연차 대회에서 짧게 말씀을 전하기도 하셨습니다. 봄과 여름 내내 이어진 재활과 치료로 상당히 호전되셨지만, 그럼에도 렉스버그에 오실 당시 그분의 신체적인 힘과 기력은 상당히 제한되어 있었습니다. 수잔과 저는 맥스웰 장로님 내외를 공항에서 맞은 후 휴식을 취하시도록 저의 집으로 모셨고, 영적 모임 전에 가벼운 점심 식사를 함께했습니다.
그날 대화를 나누면서 저는 장로님께 병고를 겪으시며 어떤 교훈을 배우셨는지를 여쭈었습니다. 저는 가슴을 파고드는, 조금도 틀림이 없는 그분의 대답을 언제까지나 기억할 것입니다. "데이브, 움츠러들지 않는 것이 생존하는 것보다 중요하다는 것을 배웠다네."
이 대답은 맥스웰 장로님이 항암화학치료 동안 수많은 일을 겪으시며 직접 체득하신 원리였습니다. 1997년 1월, 항암치료를 위해 병원으로 가신 맥스웰 장로님과 자매님은 주차장에 차를 주차한 후 잠시 둘 만의 시간을 보내셨습니다. 맥스웰 장로님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아내를 바라보았습니다. 그분은 아내의 손을 잡으며 말했습니다. …… '내가 움츠러들지 않길 바랄 뿐이오.'”(Bruce C. Hafen, A Disciple’s Life: The Biography of Neal A. Maxwell [2002], 16)
맥스웰 장로님은 1977년 10월 연차 대회에서 “그리스도의 속죄의 피의 효험을 미치사”라는 말씀으로 다음과 같이 가르치셨습니다. "우리에게 닥친 …… 시련들을 겪게 될 때, 예수님이 하셨던 것처럼 '물러서려'(교리와 성약 19:18), 다시 말해 물러서거나 움츠러들지 않을 수 있도록 우리도 하나님께 간청할 수 있습니다. 물러서지 않는 것이 살아남는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합니다. 또한 쓴 잔을 쓰지 않게 마실 때 우리는 예수님과 같이 행하는 것입니다."(성도의 벗, 1998년 1월호, 22쪽)
제 질문에 대한 맥스웰 장로님의 대답을 듣고서 저는 십이사도 정원회 일원으로 봉사하신 올슨 에프 휘트니 장로의 가르침을 떠올리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겪는 어떠한 고통이나 시련도 헛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고통에서 배우며, 인내와 신앙, 불굴의 정신, 겸손 등과 같은 성품을 키울 수 있습니다. 우리가 겪는 모든 것과 견뎌내는 모든 것은, 특히 인내심을 갖고 견뎌낼 때, 품성을 키우고, 마음을 정화하며, 영혼이 넓어지게 하여 우리가 더욱 다정하고, 너그러우며, 하나님의 자녀라 불리기에 더욱 합당한 사람이 되게 합니다. …… 우리가 지상에 와서 배워야 하는 가르침들은 슬픔과 고통, 고생, 시련을 통해서 전해집니다.” (Spencer W. Kimball, Faith Precedes the Miracle [1972], 98에서 인용)
이러한 생각 끝에, 구주께서 무한하고도 영원한 희생을 치르며 겪어야 하셨던 고통을 알려주는 다음 성구들이 제게 더욱 가슴 아프고도 의미 있게 다가왔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네게 회개하기를 명하노니 - 회개하라, 회개하지 아니하면 두렵건대, 내 입의 막대기로, 또 나의 진노로, 또 나의 분노로 너를 쳐서 네 고난이 극심할까 하노라- 얼마나 극심한지 너는 알지 못하며, 얼마나 격렬한지 너는 알지 못하나니, 참으로, 얼마나 견디기 힘든지 너는 알지 못하느니라.
이는 보라, 만일 그들이 회개하면, 고난을 겪지 않게 하려고 나 하나님이 모두를 위하여 이러한 일을 겪었음이니라.
그러나 만일 그들이 회개하지 아니할진대, 그들은 나처럼 고난을 겪어야만 하나니,
그 고난은 만유 가운데 가장 큰 자 곧 하나님인 나 자신을 고통으로 말미암아 떨게 하였고 모든 구멍에서 피를 쏟게 하였으며, 육체와 영이 모두 고난을 겪게 하여-내가 그 쓴 잔을 마시지 않고 물러서려 하게 하였느니라-
그러할지라도 아버지께 영광이 있을지어다. 나는 마셨고 사람의 자녀들을 위한 나의 준비를 마쳤느니라."(교리와 성약 19:15~19)
구주께서는 겟세마네 동산에서나 골고다에서 물러서려 하지 않으셨습니다.
맥스웰 장로님 역시 움츠러들지 않으셨습니다. 이 강한 사도는 조금도 흔들림 없이 앞으로 나아갔으며 이 세상에서 사랑하고, 봉사하고, 가르치고, 간증하도록 필멸의 상태에 머물 시간을 더 받았습니다. 그분의 생애를 마감하는 몇 년 간의 삶은 말과 행동을 통해 모범적으로 보여온 헌신적인 제자의 삶을 강조하는 느낌표였습니다.
대부분 우리는 맥스웰 장로님과 같은 영적인 역량과 경험, 위상을 지니신 분은 하나님께서 주신 행복의 계획에 대한 이해에서 비롯되는 확신을 지니고 품위와 위엄을 지키며 중병이나 죽음을 맞을 것이라고 기대할 것입니다. 물론 그분은 그러셨습니다. 그러나 오늘 저는 그러한 축복이 총관리 역원이나 교회의 선택된 일부 회원에게만 국한되어 따로 마련된 것이 아님을 증명하려 합니다.
맥스웰 장로님의 죽음으로 생겨난 십이사도 정원회 공석을 충원하기 위해 부름받은 이후, 저는 지명된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세계 각지를 여행하면서 충실하고, 용감하며, 용맹한 후기 성도들을 만나볼 수 있었습니다. 저는 한 젊은 남성과 여성에 관해 말씀드리고자 하는데, 그들은 제 삶에 축복이 되었으며, 제가 움츠러들지 않고 우리 개인의 뜻이 "아버지의 뜻 안에 삼키운 바 되[게]"(모사이야서 15:7) 하는 것에 대해 영적인 중대한 교훈을 함께 배운 사람들입니다.
이는 실재 인물의 이야기가 담긴 실화입니다. 그렇지만 관련 인물의 실명을 사용하지는 않겠습니다. 젊은 남성은 존, 젊은 여성은 헤더라고 부르겠습니다. 저는 또한 허락을 받아 그들의 개인 일지 일부를 인용하겠습니다.
내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존은 합당한 신권 소유자이며 전임 선교사로서 충실하게 봉사했습니다. 선교 사업을 마치고 귀환한 후 의롭고 훌륭한 헤더라는 젊은 여성과 데이트를 했고 마침내 결혼을 했습니다. 주님의 집에서 현세와 영원토록 함께 인봉이 되던 날, 존은 23세였고 헤더는 20세였습니다. 존과 헤더의 나이를 기억하며 앞으로 펼쳐질 이야기를 들어주시기 바랍니다.
성전 결혼을 하고 약 3주가 지난 후에 존은 골수암 진단을 받았습니다. 폐에서도 암 덩어리가 발견되었는데, 진단 결과가 좋지 않았습니다.
존은 일지에 이렇게 적었습니다. "오늘은 내 인생에서 가장 무서운 날이다. 암이 있다는 말을 들어서도 그렇지만 이제 막 결혼했는데 남편으로서 실패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우리 새 가족의 부양자이자 보호자이다. 그 역할을 시작한 지 3주가 지난 지금, 실패했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 생각이 어리석다는 것을 알지만, 위기의 순간에 마음속에 그런 말도 안 되는 생각이 떠올랐다."
헤더는 이렇게 적었습니다. "청천벽력같은 소식이었다. 그 때문에 우리의 관점이 얼마나 바뀌었는지를 나는 기억한다. 나는 남편의 검사 결과를 기다리며 병원 대기실에서 결혼식 감사장을 적고 있었다. 남편이 암에 걸렸다는 것을 알게 되고는 그릇이며 조리 기구가 더는 중요하게 여겨지지 않았다. 내 인생 최악의 날이었지만, 그날 밤 잠자리에 들면서 성전 인봉을 받은 것에 대해 감사드렸다. 의사들은 남편의 생존율이 30퍼센트에 불과하다고 했지만, 나는 우리가 충실하다면 영원히 함께할 가능성은 100퍼센트라는 것을 알았다."
한 달 후, 존은 항암치료를 시작했습니다. 존은 그 경험을 이렇게 적었습니다. “치료를 받자 내 평생에 없었던 고통이 찾아왔다. 머리카락이 빠졌다. 체중은 19킬로그램이나 줄었다. 몸이 산산조각이 되어가는 듯하다. 항암화학요법은 정서적으로, 정신적으로, 영적으로 영향을 미쳤다. 항암화학요법 동안 내 삶은 높았다, 낮았다, 온갖 요동을 치는 롤러코스터 같아졌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을 겪으면서도 헤더와 나는 하나님께서 나를 낫게 해 주실 것이란 신앙을 지켰다. 우리는 단순히 그렇게 되리라는 것을 알았다."
헤더는 생각과 느낌을 매일 기록해 나갔습니다. "남편이 병원에서 밤을 홀로 보내게 한다는 것을 견딜 수가 없었다. 그래서 매일 밤 병실에 있는 작은 침상에서 쪽 잠을 잤다. 낮에는 많은 친구와 가족들이 오갔다. 하지만 밤이 가장 힘든 시간이었다. 나는 천장을 바라보며 우리를 위한 하나님 아버지의 계획이 무엇인지를 생각하며 의아해하기도 했다. 때로 우울한 생각에도 빠져들고, [존]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휩싸이기도 했다. 그러나 나는 이러한 생각이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온 것이 아님을 알았다. 나는 더욱 자주 위안을 구하는 기도를 드렸고, 주께서는 내게 나아갈 수 있는 힘을 주셨다."
3개월 후 존은 다리에서 커다란 종양을 떼는 수술을 받았습니다. 존은 일지에 이렇게 적었습니다. "우리에게 그 수술은 매우 중요했다. 종양이 얼마나 살아 있는지, 암이 얼마나 죽었는지 보기 위해 떼어낸 종양 조직에 병리 검사를 하기 때문이다. 이 분석 결과를 통해 화학요법이 효과적인지 알 수 있으며 앞으로 얼마나 강한 강도로 치료를 받아야 하는지가 결정된다."
수술 후 이틀째 되는 날에 저는 병원에 있는 존과 헤더를 방문했습니다. 우리는 선교 임지에서 처음 존을 만났던 이야기, 그들의 결혼, 암, 현세의 삶에서 겪는 시련으로 배우는 중요한 교훈 등에 관해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이야기를 마치고 일어서려는데, 존이 제게 신권 축복을 해줄 수 있는지를 물어왔습니다. 저는 기쁜 마음으로, 축복을 줄 수는 있지만 먼저 몇 가지 질문을 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런 후 물을 계획도 없었고 전에는 생각해 보지도 않았던 몇 가지 질문을 했습니다. "[존], 낫지 않아도 받아들일 신앙이 있습니까? 만일 젊은 나이에 죽어 영의 세계로 옮겨져 그곳에서 계속 봉사해야 하는 것이 하나님 아버지의 뜻이라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낫지 않을 신앙이 있습니까?"
자 형제 자매 여러분, 저는 솔직히 이 부부에게 물어야 한다고 마음에 떠오른 그 질문들에 놀랐습니다. 경전에서 주님 또는 그분의 종들은 자주 치유하는 영적 은사(고린도전서 12:9;교리와 성약 35:9; 46:20 참조)를 행하셨고, 그분들은 사람들에게 치유될 만한 신앙이 있는지를(사도행전 14:9; 제3니파이 17:8; 교리와 성약 46:19 참조) 인지하셨습니다. 저는 존과 헤더와 함께 이러한 문제를 논의하고 함께 이해하려고 애쓰면서 만일 하나님의 뜻이 이 선한 젊은이가 치유되는 것이라면, 그 축복은 이 용감한 부부가 먼저 낫지 않을 신앙이 있을 때에만 받을 수 있는 것임을 점차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존과 헤더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를 통해 우리 모두에게 있는 "육에 속한 사람"(모사이야서 3:19)의 성향인, 우리가 원하고 마땅히 받아야 한다고 믿는 축복을 조급하고 쉴 새 없이 고집하는 성향을 극복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저는 모든 헌신적인 제자에게 적용되는 한 원리를 인식했습니다. 구주를 믿는 강한 신앙이란 그 결과가 우리가 희망했거나 원했던 것이 아닐지라도 삶에서 그분의 뜻과 시간대를 유순하게 받아들이는 것을 말합니다. 존과 헤더는 분명히 능력과 생각과 힘을 다하여 치유를 바라고, 갈망하고, 간청할 것입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주께서 합당하게 여겨 그에게 내리시는 모든 것에 기꺼이 복종하고자 하기를, 아이가 참으로 그 아버지에게 복종함같이"(모사이야서 3:19) 하는 것이었습니다. 참으로 기꺼이 "[자신들의] 영혼을 그에게 예물로 드리고[자]"(옴나이서 1:26) 하며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누가복음 22:42)라고 겸손하게 기도해야 했습니다.
처음에는 존과 헤더, 그리고 제게 당황스러웠던 그 질문은 복음 구석구석에 스며 있는 역설적인 패턴을 이해하는 고리가 되었습니다. 구주의 이 훈계를 깊이 생각해 보십시오.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마태복음 10:39) 주님은 또한 이렇게 선언하셨습니다. "그러나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마태복음 19:30) 주님은 후기의 제자들에게도 이렇게 권고하셨습니다. "또 네 말로 인하여 많은 높은 자들이 낮아질 것이요, 또 네 말로 인하여 많은 낮은 자들이 높아질 것임이니라."(교리와 성약 112:8) 따라서 낫지 않을 신앙을 갖는 것은 지식과 이해를 받으려면 구하고, 찾고, 두드리라고 요구하신(제3니파이 14:7 참조) 강력한 역설적 패턴에 적절하게 들어맞는 듯 보입니다.
충분한 시간 동안 제 질문을 깊이 생각하며 헤더와 이야기를 나누는 도중, 존이 제게 이렇게 말해왔습니다. "베드나 장로님, 전 죽고 싶지 않습니다. [헤더]를 남겨두고 떠나고 싶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저를 영의 세계로 데려가시는 것이 주님의 뜻이라면 기꺼이 받아들이겠습니다." 이 어린 부부가 모든 영적 투쟁 중에서도 가장 힘겨운 투쟁인, 자신의 뜻을 내려놓고 기꺼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려는 것을 보면서 제 마음은 감사와 감탄으로 부풀어 올랐습니다. 이 부부가 치유받고자 하는 자신의 강렬하고 이해할 만한 소망을 "아버지의 뜻 안에 삼키운 바"(모사이야서15:7) 되도록 하려는 것을 목격하면서 제 신앙도 강화되었습니다.
존은 우리의 대화에 자신이 어떻게 반응했으며 어떤 축복을 받게 되었는지를 적었습니다. "베드나 장로님은 생존하는 것보다 움츠러들지 않는 것이 더 좋은 것이라는 맥스웰 장로님의 생각을 우리와 나누셨다. 그런 후 베드나 장로님은 우리에게 물으셨다. '낫고자 하는 신앙이 있는 것을 알겠습니다. 그런데 낫지 않아도 받아들일 신앙이 있습니까?' 내게 이 개념은 생소했다. 본질적으로 베드나 장로님이 묻고자 하신 것은 만일 내가 낫지 않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그 뜻을 받아들일 신앙이 있는지, 만일 죽음을 통해 영의 세계로 가야 할 시간이 다가온다면, 순종하고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느냐는 것이었다."
존은 계속해서 이렇게 적었습니다. "낫지 않아도 받아들일 신앙을 갖는 것은 언뜻 생각하면 본능에 반하는 듯하다. 그러나 그러한 관점으로 보게 되면서 나와 아내는 생각하는 방식이 변화하기 시작했고, 우리를 위해 마련된 하나님의 계획을 완전히 신뢰하게 되었다. 결과가 어떻든 주님께서 주관하시며, 주님께서 우리가 있는 곳으로부터 우리가 있어야 할 곳으로 이끌어 주실 것이라는 신앙을 가질 필요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우리의 기도는 '온전히 낫게 해주세요.'에서 '저를 위해 계획한 것이 무엇이든 받아들일 신앙을 주시옵소서.'로 바뀌었다.
베드나 장로님은 사도시기 때문에 내 몸의 원소들이 재구성되어 병상에서 벌떡 일어나 춤을 추게 하시거나 극적인 뭔가가 일어나게 하실 것이라고 확신했었다! 그런데 그날 베드나 장로님이 축복해 주셨을 때 그분이 전하는 축복의 말씀이 아버지와 장인, 선교 회장님이 하셨던 축복과 거의 같아서 깜짝 놀랐다. 머리 위로 누구의 손이 올려지든 궁극적으로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나님의 권능은 변하지 않으며, 그분의 뜻은 우리에게 개인적으로, 또한 그분의 권한을 받은 종들을 통해 알려진다."
헤더는 이같이 적었습니다. "오늘은 여러 가지 감정으로 가득한 날이다. 베드나 장로님이 남편의 머리에 손을 얹고 암을 완전히 낫게 해 주실 것이라고 굳건히 믿었다. 나는 남편이 신권 권능으로 치유될 수 있다는 것을 알았으며, 그런 일이 일어나기를 몹시 간절히 바랐다. 그분이 우리에게 낫지 않아도 받아들일 신앙에 대해 가르치셨을 때 두려움이 엄습했다. 단 한 번도 남편을 잃는 것이 주님의 계획일 수도 있다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내 신앙은 내가 원하는 결과에 의지했다. 어떤 의미에서 보면 일차원적인 신앙이다. 처음에는 두려웠지만, 낫지 않더라도 받아들일 신앙을 갖는 것에 대해 생각하자 마침내 내 마음에서 걱정이 사라졌다. 그런 신앙이 생기자 하나님 아버지께서 내가 나 자신을 아는 것보다 훨씬 더 나를 잘 아시며, 나와 존을 위해 가장 좋은 일을 하실 것임을 완전하게 신뢰하게 되었다."
축복을 준 후, 여러 주, 여러 달, 여러 해가 흘렀습니다. 존의 암은 기적적으로 차도를 보였습니다. 존은 대학을 졸업하고 좋은 직장을 찾았습니다. 존과 헤더는 계속 관계를 강화시켜 나갔고 함께하는 삶을 즐거워했습니다.
얼마 간의 시간이 흐른 후 저는 존과 헤더로부터 암이 재발하여 항암화학요법이 재개되었고, 수술 날짜가 잡혔다는 편지를 받았습니다. 존은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헤더]와 저는 이 소식을 접하고 실망스러웠을 뿐 아니라 혼란에 빠졌습니다. 처음에 배우지 못했던 것이 있습니까? 주님께서 우리에게 더 많은 무엇을 기대하셨습니까? 후기 성도로 자라 오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모든 시련은 우리의 유익을 위한 것이다.'라는 말을 교회에서 흔하게 들었습니다. 솔직히 저는 이것이 제게 어떻게 유익이 되는지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저는 왜 암이 재발했는지를 명확하게 이해하도록 도와주시도록 주님께 간구하기 시작했습니다. 어느 날, 신약을 읽다가 대답을 찾았습니다. 바다에서 태풍이 일었을 때 그리스도와 사도 간에 있었던 이야기를 읽었습니다. 배가 전복될까를 두려워하며 제자들은 구주께로 가서 여쭈었습니다. '선생님이여 우리가 죽게 된 것을 돌보지 아니하시나이까' 제 심정이 바로 그랬습니다! 제가 암에 걸렸는데도 돌보지 아니하시니이까? 우리가 가족을 이루기를 원하는데 돌보지 아니하시니이까? 그런데 이야기를 계속 읽어 나가다가 대답을 찾았습니다. 주님께서는 그들을 보시며 이르셨습니다.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 그리고 그분은 손을 뻗어 바다를 잠잠하게 하셨습니다.
그 순간 저는 저 자신에게 이렇게 물어야 했습니다. '나는 이 경전 구절을 정말 믿는가?' 그날 구주께서 바다를 잠잠하게 하셨음을 정말 믿는가? 아니면 그냥 읽기 좋은 이야기에 불과한가?' 그 질문에 대한 제 대답은 이러했습니다. 저는 그것을 믿으며, 그분께서 바다를 잠잠케 하셨음을 알기에, 그분께서 저를 낫게 하실 수 있다는 것을 순간 알게 되었습니다. 이 순간까지도 저는 피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뜻과 그분을 믿는 저의 신앙을 조화롭게 받아들이는 데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저는 그 둘을 별개로 생각했고, 그분이 저를 낫게 할 수 있다는 신앙을 갖는 것이 때로는 그분의 뜻을 신뢰하는 것과 모순된다고 느꼈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반드시 이뤄져야 한다면, 신앙은 왜 가져야 하느냐란 의문이 들었습니다. 이 경험 후에 저는 신앙을 갖는 것이란 적어도 제 상황에서는, 그분이 저를 낫게 하리라는 것을 아는 것이 아니라 그분께서 저를 낫게 하실 수 있다는 것을 아는 것임을 깨달았습니다. 그분께서 그렇게 하실 수 있으며 실제로 이뤄질지는 그분에게 달려 있다는 것을 믿어야 했습니다.
제 삶에 예수 그리스도께 초점을 맞춘 신앙과 그분의 뜻에 완전히 순종하는 두 가지 원리가 공존하게 하면서 더 큰 위안과 평안함이 찾아왔습니다. 우리 삶에 미치는 주님의 손길을 보는 것은 참으로 놀라웠습니다. 모든 것이 제자리를 찾았으며, 기적들이 일어났고, 계속해서 우리를 위한 주님의 계획이 펼쳐지는 것을 보며 겸손해졌습니다.”
존이 한 말을 강조하기 위해 다시 한번 말씀드립니다. "제 삶에 예수 그리스도께 초점을 맞춘 신앙과 그분의 뜻에 완전히 순종하는 두 가지 원리가 공존하게 하면서 더 큰 위안과 평안함이 찾아왔습니다.”
만약 산을 옮기는 것이 주님의 목적을 이루는 것이며 주님의 뜻에 맞는 것이라면, 의로움과 신앙은 분명, 산을 옮기는 데 중요한 몫을 합니다. 병든 자나 귀머거리, 절름발이를 고치시는 것이 주님의 목적을 이루고 주님의 뜻에 맞는 것이라면, 의로움과 신앙은 분명 그러한 치유를 받는 데 중요한 몫을 합니다. 따라서 강한 신앙이 있다 하더라도 많은 산이 옮겨지지는 않을 것입니다. 병들고 아픈 모든 사람이 치유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만일 모든 상대되는 것이 축소된다면, 모든 병폐가 제거된다면, 아버지 계획의 주된 목적들은 좌절될 것입니다.
필멸의 삶에서 배우게 될 많은 교훈은 경험을 하고 때로 고통을 겪게 하는 것들을 통해서만 받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그분께 도움을 받으며 이 필멸의 세계에서 원수와 맞서면서 배워야 할 것들을 배우고 궁극적으로 영원한 세계에서 되어야 할 존재가 되도록 배우게 되기를 기대하시고, 또한 신뢰하십니다.
모든 것의 의미
존과 헤더의 이 이야기는 평범하면서도 놀랍습니다. 이 젊은 부부는 소망의 완전한 밝은 빛과 그리스도를 믿는 굳건한 신앙을 지니고 협착하고 좁은 길을 힘차게 나아가는, 충실하게 성약을 지키는 전 세계 후기 성도를 상징합니다. 존과 헤더는 교회에서 눈에 띄는 지도자 직책에 있지도 않으며, 총관리 역원과 인척도 아니고, 때로는 의심도 하고 두려움도 느낍니다. 이러한 많은 점에서 그들의 이야기는 상당히 평범합니다.
형제 자매 여러분, 그런데 이 젊은 부부는 역경과 고난을 통해 영원을 위해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교훈을 놀라운 방식으로 배우도록 축복받았습니다. 여러분 대다수와 다를 바가 없는 존과 헤더가 생존보다는 움츠러들지 않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이해하게 되었기에 저는 이 이야기를 여러분과 나눴습니다. 그들의 경험은 삶과 죽음에 관한 것이 아닌, 오히려 배움과 삶과 됨됨이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한 이름을 믿고 의지하는 신앙과 그분의 뜻과 시간대에 온유하게 순종하는 것, "지치지 아니하는 부지런함"(힐라맨서 15:6)으로 힘써 나아가는 것, 모든 것에 그분의 손길이 미침을 인정하는 것 등이 하나로 결합한 강력한 영성은 기쁨과 영생을 가져다주는 하나님 왕국의 평화로운 것들을 내줄 것입니다.(교리와 성약 42:61 참조) 이 부부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을 듯한 어려움에 직면해서도 "모든 경건과 단정함으로 …… 평안한 생활"(디모데전서 2:2)을 했습니다. 그들은 사람들의 자녀들과 더불어 그들 안에서 화평한 중에 행했습니다.(모로나이서 7:4 참조)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빌립보서 4:7)
많은 사람에게 그들의 이야기는 자신의 이야기이거나 이야기였고, 또는 이야기일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생활 속에서 존과 헤더와 같은 용기와 영적인 관점을 지니고 그와 같은 어려움을 겪고 있거나 겪어 왔거나 겪게 될 것입니다. 어째서 어떤 사람은 영원의 교훈을 시련과 고통을 통해 배우는 반면, 또 다른 사람들은 비슷한 교훈을 구조와 치유를 통해 배우게 되는지는 저는 모릅니다. 저는 모든 이유를 알지는 못하며, 모든 목적을 알지도 못하며, 주님의 시간대에 대해 모든 것을 알지는 못합니다. 니파이가 그랬듯이 여러분과 저는 "모든 것의 의미를 알지는 못하나이다"(니파이전서 11:17)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것들은 확고부동하게 분명히 압니다. 저는 우리가 사랑하시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영으로 낳으신 아들딸임을 압니다. 영원하신 아버지가 바로 행복의 계획을 지으신 분이심을 압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구주이자 구속주이심을 압니다. 예수께서 무한하며 영원한 속죄를 통해 아버지의 계획을 가능하게 하셨다는 것을 압니다. "우리를 위해 멍들고, 상하시고, 찢기신"("나사렛 예수는 구세주", 찬송가 119장- 우리말 찬송가에 이 구절이 번역되어 있지 않아 번역함-옮긴이) 구주께서는 "자기 백성을 그들의 연약함을 좇아"(앨마서 7:12) 도우시고 강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필멸의 삶에서 누릴 수 있는 가장 위대한 축복 한 가지는 물러서지 않고 자신의 뜻을 "아버지 뜻에 삼키운 바"(모사이야서 15:7) 되게 하는 것임을 압니다.
비록 이러한 축복들이 언제, 어디서, 어떻게, 왜 일어나는지에 대해 모든 것을 알지는 못하지만, 이러한 축복이 실재한다는 것은 알며 그에 대해 증거합니다. 이러한 모든 것은 참되며, 우리가 성신의 권능을 통해 그것의 신성함과 실재성, 유효성에 대해 분명한 간증을 드릴 수 있을 만큼 충분히 안다는 것을 간증합니다. 형제 자매 여러분, 생활 속에서 그리스도를 믿는 굳건한 신앙으로 힘차게 나아간다면 움츠러들지 않는 역량을 얻게 되는 축복을 받게 될 것입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성스러운 이름으로 증거하며, 이 축복을 드립니다. 아멘.
© 2013 by Intellectual Reserve, Inc. 판권 소유. 영어 승인: 8/12. 번역 승인: 8/12. That We Might “Not … Shrink의 번역.” Korean. PD50045417 3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