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리는 무엇인가?
사랑하는 형제자매인 사랑스런 젊은 친구 여러분, 오늘 여러분과 함께할 수 있는 특권에 감사합니다. 교회 청년 성인들과 함께 어울릴 때면 언제나 제 마음이 즐겁습니다. 여러분을 보면 영감을 얻게 되어 이렇게 선언하게 됩니다. “시온이여 아름답게 일어나라” 여러분은 전 세계 곳곳에 살고 있으며 여러분이 대표하는 교회의 미래와 힘은 아름답게 빛납니다. 구주를 따르고자 하는 여러분의 의로운 소망과 결심 때문에 이 교회의 미래는 밝아 보입니다.
토마스 에스 몬슨 회장님의 사랑과 축복을 여러분께 전해드립니다. 제일회장단은 여러분을 위해 자주 기도합니다. 우리는 언제나 주님께 여러분을 축복하시고 지켜주시며 인도해 주시라고 간구합니다.
장님과 코끼리
백여 년 전에, 한 미국 시인이 고대 우화를 시로 옮겼습니다. 그 시의 첫 소절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배우기를 아주 좋아하는
힌두스탄의 여섯 남자가
코끼리를 보러 떠났네
(하지만 이들은 모두 장님이었네)
이들은 각자 체험을 통해
만족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네.
이 시에서 이들은 각자 코끼리의 다른 부위를 만져보고는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이 발견한 것에 대해 설명합니다.
그들 중 한 사람은 코끼리 다리를 만져보고는 나무처럼 둥글고 거친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다른 한 사람은 상아를 만져본 다음 코끼리가 창처럼 생겼다고 묘사합니다. 세 번째 사람은 꼬리를 붙잡고는 코끼리가 밧줄 같다고 주장합니다. 네 번째 사람은 코를 만져본 다음 코끼리가 큰 뱀 같다고 주장합니다.
각자가 진실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진실은 개인적인 경험을 통해 얻은 것이기 때문에 각자가 자신이 아는 것을 안다고 주장합니다.
그 시의 결론은 이렇습니다.
그래서 이들 힌두스탄 사람들은
오랫동안 목청 높여 다투었다네.
각자 자신의 의견을
한 치의 양보도 없이 강력히 주장했다네.
이들 각자는 부분적으로는 옳았지만
모두 틀렸는데도 말이네!1
우리는 더 큰 관점에서 이 이야기를 지켜보며 미소 짓게 됩니다. 어쨌든 우리는 코끼리가 어떻게 생겼는지 압니다. 우리는 코끼리에 대해 읽었고, 영화에서도 보았으며, 우리들 중 많은 사람들은 눈으로 직접 본적도 있습니다. 우리는 코끼리가 무엇인지에 대한 진실을 안다고 믿습니다. 진실의 한 측면에만 근거하여 판단하고 그것을 전체에 적용하는 것은 터무니없어 보일 뿐 아니라 심지어 믿기지가 않습니다. 한편, 이들 여섯 장님에게서 우리 자신의 모습을 볼 수 있지 않습니까? 그들과 다름없는 잘못을 저지르는 우를 범한 적이 한 번도 없습니까?
이 이야기가 아주 많은 문화권에서 아주 오랜 세월 동안 대중적으로 잘 알려진 이유는 보편적으로 적용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도 바울은 이 세상에서의 빛은 희미하며 우리는 마치 “ [희미한] 거울로 보는 것 같이”2 단지 진실의 한 면만을 본다고 말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완전하고 때로는 오도하는 경험에 근거하여 사람, 정치, 그리고 신앙심에 대해 추정하는 것이 우리 인간의 타고난 속성 가운데 한 측면인 것처럼 보입니다.
60년 동안 결혼하여 함께 살아온 어떤 부부에 관한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그들은 그 세월 동안 거의 다툰 적이 없었고 함께한 나날들은 행복하고 만족스럽게 지나갔습니다. 모든 것을 나눴으며 둘 사이에는 어떤 비밀도 없었습니다. 다만 한 가지 예외가 있었습니다. 그 부인에게는 선반 꼭대기에 둔 상자 하나가 있었습니다. 결혼할 때 남편에게 절대 상자 안을 들여다봐서는 안 된다고 말했습니다.
수십 년이 흐른 후, 드디어 남편은 그 상자를 내려놓으며 그 안에 무엇이 들었는지 봐도 되겠냐고 물어보는 순간이 찾아왔습니다. 아내가 허락하자, 남편은 상자를 열었습니다. 그 안에는 실로 뜨개질 한 작은 접시 깔개 두 개와 2만 5천 달러가 들어있었습니다. 남편이 아내에게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묻자, 아내는 이렇게 답했습니다. “우리가 결혼할 때, 내 어머니께서 내가 당신에게 화가 날 때나 당신이 내가 좋아하지 않는 어떤 일을 할 때마다, 작은 접시 깔개를 뜨개질하고 그 후에 그것에 대해 같이 이야기를 나누라고 말씀하셨어요.
남편은 이 감미로운 이야기에 감동하여 눈물을 흘렸습니다. 결혼 생활 60년 동안 아내가 접시 깔개를 겨우 두 개만 뜨개질 할 정도 밖에 자신이 아내의 마음을 상하게 하지 않았다는 점이 놀라웠습니다. 자신에 대해 심히 자부심을 느끼면서 그는 아내의 손을 잡고 말했습니다. “접시 깔개는 설명이 되었고, 그럼 2만 5천 달러는 무엇이죠?”
아내는 다정하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습니다. “그건 지난 세월 동안 뜨개질해서 만든 접시 깔개들을 팔아서 모은 돈이랍니다.”
이 이야기는 결혼 생활의 갈등에 대처하는 흥미 있는 방법을 알려 줄뿐 아니라 제한된 정보를 근거로 성급하게 결론을 내리는 것의 어리석음을 분명히 보여줍니다.
“진실”이라고 말하는 것들이 그저 진실의 조각들에 불과한 경우가 허다하며, 때로는 전혀 진실이 아닌 경우도 있습니다.
오늘 저는 진리에 대해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전하는 말씀을 들으며 몆가지 중요한 질문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첫 번째 질문은 “진리는 무엇인가?”입니다.
두 번째 질문은 “진리를 아는 것은 정말 가능한가?”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 질문은 “전에 배운 진리에 모순되는 것에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가?”입니다.
진리는 무엇인가?
무엇이 진리입니까? 구주께서는 생의 마지막 시기에 본디오 빌라도 앞에 끌려가셨습니다. 유대인의 장로들은 예수님이 로마에 대항해 선동과 반역을 꾀했다고 고소하며 사형에 처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빌라도는 갈릴리 사람과 대면하자 “네가 왕이냐?”라고 물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답하셨습니다. “내가 이를 위하여 세상에 왔나니 곧 진리에 대하여 증언하려 함이로라. 무릇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음성을 듣느니라.”3
저는 빌라도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어떤 생각을 했는지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교육을 잘 받았고 세상을 두루 경험한 사람이었으리라 추정합니다.
빌라도의 대답에서는 싫증 내는 냉소가 느껴집니다. 그의 말에서는 한 때 이상주의자였으나-인생 만사를 경험한 후에-약간 강퍅해지고 심지어 피곤해 하는 듯한 사람의 음성을 듣게 됩니다.
“진리가 무엇이냐?”4라는 단순한 세 단어로 빌라도가 대답했을 때에는 대화를 나누고 싶어서 그렇게 말한 것이 아니었다고 믿습니다.
부연하자면, 그가 실제로 묻고자 했던 것은 “누가 감히 진리를 알 수 있다는 말이냐?”가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바로 모든 시대와 모든 사람을 위한 질문입니다.
누가 진리를 알 수 있는가?
자 누구든지 진리를 알 수 있습니까? 지상에 살았던 몇몇 위대한 지성들이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시도해 왔습니다. 진리의 규정하기 힘든 속성 때문에 역사상 위대한 시인들과 작가들이 가장 좋아하는 주제가 되어 왔습니다. 특히 셰익스피어는 이 주제에 관심이 많았던 것 같습니다. 다음에 셰익스피어의 비극을 읽을 기회가 있을 때면, 이야기의 전개가 얼마나 자주 중요한 진실에 대한 오해로 치닫는지 주목해 보시기 바랍니다.
세계 역사상 어느 시대도 오늘날 우리처럼 많은 정보에 손쉽게 접할 수 있었던 적은 없었습니다. 그러한 정보 가운데 일부는 참되고, 일부는 그릇되며, 대다수의 많은 정보는 부분적으로만 참됩니다.
따라서, 세계 역사상 어느 시대도 지금처럼 정확하게 사실과 오류를 분별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 더 중요한 적은 없었습니다.
진리를 탐구하는 과정에서 직면하는 문제 가운데 하나는 우리가 너무나도 자주 인간의 지혜에 실망해 왔다는 점입니다. 인류가 한때 참되다고 “알았”으나 오류로 증명된 예들이 너무도 많습니다.
예를 들어, 한 때 모두가 절대적이라 할 만큼 그렇게 믿었지만, 지구는 평평하지 않습니다. 별들은 지구 주위를 돌지 않습니다. 토마토를 먹으면 즉사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당연하지만 사람은 날 수 있으며, 심지어 음속보다 빨리 날 수 있습니다.
경전에는 “진리”를 그릇되게 해석한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가 가득합니다.
구약전서에서, 발람은 모압 왕이 제의한 “[불의]의 삯”5을 물리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새로운 진리를 믿도록 자신을 납득시킨 다음, 이스라엘 백성들이 부도덕과 불순종을 통해 스스로를 저주하게 함으로써 모압인들을 도왔습니다.6
배도자 코리호어는 많은 사람을 이끌어 진리로부터 벗어나게 한 후에, 사탄이 자신을 꾀어 자신이 하는 말이 참되다고 스스로가 실제로 믿게 되기에 이르렀다고 고백했습니다.7
몰몬경에서 니파이인들과 레이맨인들은 모두 서로에 대한 그들 자신의 “진실”을 만들었습니다. 니파이인들이 보는 레이맨인들에 관한 “진실”은 그들이 “거칠고, 흉포하며, 피에 목마른 백성”8이어서 결코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다는 것이었습니다. 레이맨들이 보는 니파이인들에 관한 “진실”은 니파이가 형의 장자권을 훔쳤으며, 니파이의 후손들은 마땅히 그들 레이맨이들의 것을 계속 도적질하고 있는 거짓말쟁이들이라는 것이었습니다.9 이러한 “진실”은 마침내 그들 모두를 파멸로 몰아갈 때까지 서로에 대한 혐오심을 키워갔습니다.
두말할 나위도 없이, 몰몬경에는 이러한 고정 관념들과 상충되는 예들이 많이 나옵니다. 그럼에도, 니파이인들과 레이맨인들은 이러한 “진실”을 믿었고, 이러한 믿음은 한 때 강성했던 이 아름다운 백성의 운명을 결정지었습니다.
인간의 속성과 진리
어떤 면에서 우리는 모두 그러한 이상한 생각에 취약합니다.
우리가 매달리는 “진리”는 우리 개인의 인격뿐 아니라 우리가 속한 사회의 품격을 형성합니다. 이러한 “진리들”이 흔히 불완전하고 부정확한 증거에 근거하며, 종종 그것들은 매우 이기적인 동기로 이용되는 것이 다반사입니다.
어리석은 판단을 하는 이유 가운데 하나는 믿음과 진리 사이의 경계를 모호하게 하려는 인간의 성향 때문입니다. 우리는 어떤 것이 말이 되거나 편리하기 때문에 그것이 진리임에 틀림없다고 생각하며 너무나도 자주 믿음과 진리를 혼동해 합니다. 반대로, 우리가 진리를 받아 들인다면 우리가 변화해야 하거나 우리가 틀렸다는 것을 인정해야 하기 때문에 때로 진리를 믿지 않거나 거절합니다. 진리가 이전 경험과 일치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거부하는 일이 흔히 일어납니다.
다른 사람의 의견이나 “진실”이 우리 자신의 의견과 상충될 때,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을 보강하거나 보충해줄 수도 있는 유용한 정보가 있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고려하는 대신, 우리는 자주 다른 사람이 잘못 알고 있고, 정신 장애가 있거나, 심지어 의도적으로 속이려 한다고 성급히 결론을 내리거나 추정합니다.
불행히도, 이러한 성향은 스포츠에서 가족 관계, 그리고 종교에서 정치에 이르는 우리 삶의 모든 분야로 확산될 수 있습니다.
이그나즈 세멜웨이스
이 성향을 보여주는 한 비극적인 예가 19세기 중반에 의술을 행했던 헝가리인 의사 이그나즈 세멜웨이스의 이야기입니다. 의사 일을 시작한 초기에 세멜웨이스 박사는 인근 병원에서는 산욕열에 의한 사망률이 4 퍼센트 이하인 반면 자신이 일하는 병원에서는 사망률이 10 퍼센트에 달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는 왜 그런지 알아보기로 결심했습니다.
두 병원을 조사한 끝에, 세멜웨이스 박사는 자신이 일하는 병원이 시체를 검시하는 임상 병원이라는 사실이 중요한 차이점이라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는 의사들이 부검을 끝내고는 곧 바로 아기를 받으러 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는 어쩌면 시체를 만진 의사의 손이 오염되었고 죽음에 이르게 하는 열을 유발했을 수도 있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가 의사들에게 손을 클로르 석회로 문질러 씻을 것을 권하기 시작했는데, 모두가 그를 무시하거나 심지어 멸시하기까지 했습니다. 그의 결론은 다른 의사들의 “진리”와 상충되었습니다. 일부 동료들은 심지어 의사의 손이 불결하거나 병을 유발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터무니 없다고 믿었습니다.
하지만 세멜웨이스는 굽히지 않고 아기를 받기 전에는 손을 씻어야 한다는 것을 병원 내의 모든 의사들이 준수해야 할 방침으로 만들었습니다. 그 결과, 사망률이 곧바로 90 퍼센트나 떨어졌습니다. 세멜웨이스 박사는 자신이 주장한 바가 옳다는 것이 입증되었기 때문에 이제 곧 전 의료계에서 이를 실시할 것이라 확신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생각은 보기좋게 빗나가고 말았습니다. 심지어 극적인 결과가 나타났는데도 불구하고 그 당시의 많은 의사들의 마음을 바꿔 놓는 데는 역부족이었습니다.
진리를 아는 것은 가능한가?
진리는 믿음을 초월하여 존재합니다. 심지어 아무도 믿지 않는다 하더라도 참됩니다.
서쪽이 북쪽이고 북쪽이 서쪽이라고 온종일 말할 수 있고 심지어 온 마음으로 그렇게 믿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예를 들어, 에콰도르 키토에서 미국 뉴욕으로 비행하고자 한다면, 그렇게 할 수 있는 방향은 오직 하나이며, 그것은 북쪽입니다. 서쪽으로 가서는 결코 뉴욕에 닿을 수 없습니다.
물론, 이것은 비행의 예를 든 간단한 비유입니다. 하지만, 정말 그와 같이 절대적인 진리가 있습니다. 절대 무너지지 않고 변하지 않는 진리 말입니다.
진리는 믿음과는 다릅니다. 소망과도 다릅니다. 절대적 진리는 대중의 의견이나 인기에 달려 있지 않습니다. 투표로도 흔들 수 없습니다. 심지어 저명 인사의 지지가 갖는 무한한 권위도 진리를 바꿀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진리를 어떻게 찾을 수 있을까요?
저는 자녀들이 재능과 지적 능력을 활용하여 진리를 찾아내기 위해 열심히 노력할 때 하나님 아버지께서 기뻐하신다고 믿습니다. 수세기에 걸쳐 많은 현명한 남성들과 여성들이 논리, 추리, 과학적 질문, 그리고 영감을 통해 진리를 발견해 왔습니다. 이러한 발견으로 인류는 풍요로워지고, 우리의 삶은 향상되었으며, 기쁨과 감탄, 그리고 경외심이 고취되었습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우리가 한때 알았다고 생각한 것들이 진리를 이해하고자 노력하는 진취적인 학자들에 의해 지속해서 향상되고, 수정되거나, 심지어 부정받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가 알다시피, 우리 자신의 경험에서 진리를 가려내는 일은 너무나 어렵습니다. 설상가상으로,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는 [마귀인]” 10대적이 우리를 막아섭니다.
사탄은 속임수의 명수입니다. “형제들을 참소하는 자”11이며, 모든 거짓의 아비12로서 우리를 넘어뜨리기 위해 끊임없이 속이려13 합니다.
대적은 교활한 전략을 다양하게 전개하여 사람들이 진리에 이르지 못하게 합니다. 그는 진리란 상대적인 것이라고 믿게 하려 합니다. 우리의 관대함과 공정함에 호소하여, 그는 한 개인의 “진리”가 다른 사람의 진리만큼이나 정당한 것이라고 주장함으로써 참 진리를 감춥니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어딘가에 절대적 진리가 있기는 하지만 그것을 아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믿도록 유혹합니다.
이미 진리를 받아들인 사람들을 상대하는 그의 기본적인 전략은 의심의 씨앗을 뿌리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그는 전에 배웠던 것과 상충되는 것처럼 보이는 정보를 발견할 때 실족함에 이르도록 많은 교회 회원들을 유혹해 왔습니다.
만일 여러분이 그러한 순간을 겪게 된다면, 이 정보의 시대에는 언제 어디서나 무엇에 대해서든지 의심을 조성하고 보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심지어 아직도 지구가 평평하고, 달은 홀로그램이고, 어떤 유명 영화 배우들은 실제로 다른 행성에서 온 외계인들이라는 증거가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을 보게 될 것입니다. 인쇄물로 나왔다고 해서, 인터넷에 나온다고 해서, 자주 언급된다고 해서, 영향력 있는 그룹이 추종한다고 해서 그 어떤 것이 참된 것이 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언제나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때로는 거짓된 주장이나 정보가 상당히 신빙성 있게 보이는 방식으로 전달됩니다. 하지만 계시된 하나님의 말씀과 상충하는 정보와 맞닥뜨리게 되었을 때는, 코끼리 우화에서 장님들은 결코 온전한 진실을 정확히 설명할 수 없었다는 점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정말로 모든 것을 알지 못하며, 모든 것을 볼 수 없습니다. 지금은 모순되게 보이는 것도 더 신뢰할 만한 정보를 구하고 얻는다면 완벽하게 이해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흐릿한 유리잔을 통해 사물을 보고 있습니다. 따라서 모든 것을 분명하게 보시는 주님을 신뢰해야 합니다.
맞습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혼동으로 가득합니다. 그러나 결국에는 우리가 가진 모든 질문들이 응답될 것입니다. 모든 의심은 확실함으로 대체될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완전하고 정확하며 변하지 않는 한 진리의 근원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사물의 현재와 과거와 미래에 대한 지식인 진리를 알고 계십니다.14 그분은 “만물을 이해하시며, …… [그분은] 만물 위에 계시고, …… 만물은 그[분으]로 말미암아 또 그[분으]로 인하여 있[습니다.]”15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필멸의 삶을 살아가는 자녀들인 우리에게 그분의 진리를 주십니다.
그렇다면 이 진리는 무엇입니까?
이 진리는 바로 그분의 복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이신 그분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십니다.16
우리에게 단지 그분의 길을 걸어갈 용기와 신앙만 있다면, 마음과 정신에 화평을, 삶에 영속하는 의미를, 이 세상에서의 행복을, 그리고 다가올 세상에서의 기쁨을 갖도록 이끌어 줄 것입니다. 구주께서는 “우리 각 사람에게서 [결코] 멀리 계시지 [아니하십니다].”17 부지런히 그분을 찾고자 구한다면 그분을 찾게 될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18
진리를 찾아야 하는 우리의 의무
그렇지만 이 “진리”가 다른 진리와 다른지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어떻게 이 “진리”를 신뢰할 수 있습니까?
주님을 신뢰하라는 권유가 주어졌다고 해서 스스로 알아 봐야 하는 책임이 면제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기회 이상의 것입니다. 그것은 의무인 것입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우리가 이 지상에 온 이유 가운데 하나입니다.
후기 성도들은 들은 모든 것을 맹목적으로 받아들이라고 요구받지 않습니다. 스스로 생각하고 진리를 찾아 내도록 권장하고 있습니다. 숙고하고, 연구하고, 평가함으로써 개인적으로 진리를 알아가는 것을 당연하게 여깁니다.
브리검 영은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저는 …… 이 백성들이 지도자들을 너무 신뢰한 나머지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인도하고 계신지 여쭤보기를 하지 않지나 않을까 걱정입니다. 저는 그들이 맹목적인 자신 안전의 상태에 안주하지나 않을까 두렵습니다. … 모든 남성과 여성이 하나님의 영의 속삭임을 통해 그들의 지도자들이 주님이 인도하시는 길로 걸어가고 있는지를 스스로 알게 합시다.”19
우리는 진리를 찾을 수 있는 어느 곳에서나 진리를 구합니다. 선지자 조셉 스미스는 이렇게 가르쳤습니다. “몰몬이즘은 진리입니다. …… 거룩한 우리 종교의 첫째 되고 기본이 되는 원리는 우리가 제한 없이 혹은 …… 인간들의 신조나 미신적인 관념에 의해 제지당하지 않는 가운데, 모든 것과 모든 진리를 받아들일 권리가 있다고 믿는 것입니다.”20
물론 우리에게는 충만하고 영원한 복음이 있지만, 그렇다고 우리가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실제로, 회복된 복음의 원리 가운데 하나는 하나님께서 “앞으로도 … 많은 위대하고도 중대한 것들을 계시하실 [것]”21이라는 우리의 믿음입니다. 그것이 우리가 믿고 있는 바가 아닙니까?
예수 그리스도 복음의 회복은 진리를 구하는 겸손한 마음과 영민한 지력을 가진 한 젊은이 때문에 이루어졌습니다. 조셉 스미스는 연구한 다음 그에 따라 행동했습니다. 그는 사람이 지혜가 부족하다면 하나님께 구할 수 있고 진리가 정말 그 사람에게 주어질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22
위대한 회복의 기적은 그저 잘못된 관념과 왜곡된 교리를 바로 잡은 것이 전부가 아니었습니다. 물론 회복이 그렇게 한 측면도 있지만, 회복으로 인해 하늘의 휘장이 활짝 열려 새로운 빛과 지식이 지속적으로 쏟아지게 되었으며 오늘날에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계속하여 모든 좋은 책들과 다른 건전한 자료들을 통해 진리를 구해야 합니다. “”무엇이든지 유덕하고 사랑할 만하거나 혹 듣기 좋거나 혹 칭찬할 만한 일이 있으면 우리는 이것들을 구하여 마지 [않습니다].”23 이런 방식으로 우리는 악마의 속임수에 대항할 수 있습니다. 이런 방식으로 우리는 “말씀에 말씀을 더하고, 교훈에 교훈을 더하여”24 진리를 배웁니다. 또한 우리는 “예지는 예지와 결합하며, 지혜는 지혜를 받아들이며, 진리는 진리를 [안는다]”25는 것을 배울 것입니다.
젊은 친구 여러분, 열린 마음과 겸손한 가슴으로 진리를 구하는 책임을 받아들일 때, 다른 사람들에게 더 관대하고, 더 열린 마음으로 듣고, 더 이해할 준비가 되고, 무너뜨리기 보다는 세우고 싶어지고, 주님께서 여러분이 가기를 바라시는 곳으로 더 기꺼이 갈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성신-모든 진리에 대한 우리의 안내자
그것에 대해 생각해 보십시오. 지속적으로 진리를 구하는 이 여정에 강력한 동반자이자 믿을 수 있는 안내자가 실제로 여러분과 함께 합니다. 그분은 바로 누구입니까? 바로 성신입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우리가 지상 생활을 하는 동안 우리의 마음을 차지하고자 경쟁하는 모든 소음들을 추려내어 진리를 찾는 것이 얼마나 어려울지 아셨습니다. 그분은 우리가 단지 진리의 일부분만을 보게 되리라는 것을 아셨고, 사탄이 우리를 속이려 할 것임을 아셨습니다. 그래서 그분께서는 하늘로부터 오는 은사인 성신의 은사를 주셨습니다. 성신은 우리의 마음을 밝혀 주고, 우리를 가르치며, 우리에게 진리를 증거해 줍니다.
성신은 계시자입니다. 그는 보혜사이며, 우리에게 “만물에 대한 [진리를 가르치고] …… 만물을 알고 지혜, 자비, 진리, 정의, 심판에 따라 모든 권능을 [지니고]”26 있습니다.
성신은 하나님을 찾는 사람이면 누구에게나 그들이 혼동과 모순이 가득한 곤경의 바다를 헤쳐나갈 때 도움을 주는 확실하고 안전한 안내자입니다.
모든 곳, 즉 이 지상의 어느 곳에서나 누구든지 성신을 통해 진리에 대한 증거를 받을 수 있습니다. 마음을 다해 진리를 연구하고,27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을 가지고, 진정한 의도를 지니며, 진실한 마음으로 [간구하며 진리를 구하는 사람은 누구나] … 성신의 권능으로 [진리를]”28 알게 될 것입니다.
또한 침례를 받고 성신의 지속적인 동반을 받을 수 있도록 합당하게 생활하는 모든 사람에게 주어지는 추가적이며 말로는 표현 못할 놀라운 성신의 은사가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랑하시는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여러분을 이 세상에서 어둠 속에서 헤매도록 결코 홀로 내버려두지 않으실 것입니다. 여러분은 속임을 당할 필요가 없습니다. 여러분은 이 세상의 어둠을 극복하고 신성한 진리를 찾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진리는 구하지 않고 다투려고만 하려 합니다. 그들은 진지하게 배우려고 하기 보다는 자신의 학식을 뽐내고자 논쟁하고 싶어 하기 때문에 다툼을 유발합니다. 그들은 사도 바울이 디모데에게 한 다음과 같은 권고를 무시하거나 거부합니다. “어리석고 무식한 변론을 버리라 이에서 다툼이 나는 줄 앎이라”29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우리는 그런 다툼이 우리가 진리를 찾을 때 의지하는 영과는 완전히 상반된다는 것을 압니다. 구주께서는 니파이인들에게 다음과 같이 경고하셨습니다.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거니와, 다투는 정신을 가진 자는 내게 속한 자가 아니요 분쟁의 아비인 악마에게 속한 자임이라.”30
영을 따른다면, 진리를 찾고자 하는 개인적인 탐구가 필연적으로 여러분을 주님이자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께로 인도해 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분이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시기]”31 때문입니다. 그것이 가장 쉬운 길은 아닐 수도 있습니다. 어쩌면 사람들의 발길이 드문 길일 것입니다. 그리고 그 길에서는 높은 산을 오르고 물살이 센 강을 건너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 길은 그분의 길, 즉 구주께서 마련하신 구속의 길입니다.
주님의 사도로서 예수는 그리스도이시며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제 간증을 더합니다. 제 온 가슴과 마음으로 이 것이 진실함을 압니다. 저는 이 사실을 성신의 증거와 권능으로 압니다.
여러분 스스로가 이 진리를 알게 되기까지 탐구하는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기를 당부합니다. 왜냐하면, 이 진리가 여러분을 자유케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32
사랑하는 젊은 친구 여러분, 여러분은 이스라엘의 희망입니다. 주님께서는 여러분을 아시며, 사랑하십니다. 우리도 여러분을 사랑합니다. 주님은 여러분을 크게 신뢰하십니다. 큰 확신을 지니고 계십니다. 그분께서는 여러분의 성공을 아십니다. 또한, 여러분의 어려움들과 인생의 질문들에 관해 알고 계십니다.
진지하게 그리고 끊임없이 진리를 구하고자 하는, 맑고 달콤하며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33 즉 모든 진리의 샘에서 마시고자 하는 갈망이 여러분 마음에 가득하기를 기도합니다.
지금 그리고 전 생애 동안 주님에 대한 확신과 진리와 오류를 올바로 분별하고자 하는 뿌리 깊은 욕구가 여러분 마음 속에 자리하기를 축복합니다. 제 간구와 축복을 성스러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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