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2019
세심함 vs. 소홀함
2019년 4월 연차 대회


12:23

세심함 vs. 소홀함

세상의 영향력이 점점 더 악과 결탁할수록, 우리는 구주께로 안전히 인도하는 길에 굳건히 남아 있도록 전력을 다하여 노력해야 합니다.

저는 한 상점 창문에 이런 글귀가 붙어있는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 “행복, 15달러.” 저는 15달러로 행복을 얼마만큼 살 수 있는지 호기심이 생겨 상점 안으로 들어가 보았습니다. 그곳에는 값싼 장신구와 기념품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중 어떤 것도 글귀에서 암시한 종류의 행복을 제게 줄 수 있을 것 같지 않았습니다. 수 년 동안 저는 그 글귀에 대해서 많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리고 값싸거나 일시적인 것에서 행복을 찾기가 얼마나 쉬운지도 생각해 보았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후기 성도 교회의 회원으로서, 진정한 행복을 어디서 어떻게 찾을 수 있는지 알 수 있는 축복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주님이자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복음을 세심하게 실천하고, 더욱 그분을 닮아가도록 노력하는 데서 행복을 찾습니다.

제 친한 친구 중 한 명은 열차 기관사였습니다. 어느 날 늘 다니던 노선으로 열차를 운행하던 친구는 앞쪽 선로에 차 한 대가 멈춰 서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는 차가 선로에 끼여서 건널 수 없는 상황이라는 것을 곧 알아차렸습니다. 그는 즉시 열차를 비상 모드로 전환했고, 6,500톤의 화물을 싣고 기관차 뒤를 따르던 화물 차량 하나하나에 제동이 걸렸습니다. 그러나 화물 차량들의 전체 길이는 1.21킬로미터에 달했습니다. 물리적으로 자동차와 충돌하기 전에 열차가 멈출 가능성은 없었고, 결국 열차는 자동차를 들이받았습니다. 다행히도 차에 타고 있던 사람들은 열차의 경적을 듣고 충돌이 있기 전에 차에서 빠져나왔습니다. 기관사가 수사하러 온 경찰과 이야기를 하고 있을 때 잔뜩 화가 난 한 여인이 그들에게 다가왔습니다. 그 여인은 큰 소리로 자신이 사고를 전부 다 목격했다며, 기관사가 자동차를 피하려고 방향을 틀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고 증언했습니다.

만약 기관사가 사고를 피하기 위해 방향을 틀어 선로를 벗어났더라면, 분명히 그와 열차는 탈선하여 길을 잃었을 것이며, 전진하던 열차는 급정차하고 말았을 것입니다. 다행히 그 열차 바퀴는 선로의 레일 덕에 앞에 있던 장애물과 관계없이 목적지를 향해 계속 나아가게 되었습니다. 우리 역시 다행스럽게도 선로 위에 있습니다. 그 선로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후기 성도 교회의 회원으로 침례 받았을 때 맺었던 성약의 길입니다. 도중에 장애물을 만날 때도 있겠지만, 우리가 그 길에 굳건히 남아 있는다면 그 길은 우리의 소중하고 영원한 목적지로 우리를 계속 나아가게 할 것입니다.

생명나무에 관한 리하이의 시현

생명나무의 시현은 우리가 소홀할 때 어떻게 성약의 길에서 멀어질 수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협착하고 좁은 길, 즉 성약의 길과 쇠막대는 충실한 자들이 구주와 그분의 속죄가 가져다주는 모든 축복을 얻을 수 있는 생명나무까지 곧바로 이어져 있다는 점을 생각해 보십시오. 시현에는 세상의 더러움을 상징하는 “물이 흐르는 강”도 등장합니다. 경전에 따르면 이 강은 길을 따라 “흘러가”긴 했지만, 나무 “가까이에” 있었을 뿐, 나무까지 흐르지는 않았습니다. 이 세상은 택함 받은 자들도 미혹할 수 있는 방해 요소들로 가득합니다. 미혹당한 이들은 성약에 따라 생활하는 데 소홀하게 되어 나무 가까이는 가더라도 나무까지 가지는 못합니다. 정확하게 성약을 지키기 위해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우리는 소홀함으로 결국 금단의 길로 떨어지거나, 이미 크고 넓은 건물에 들어간 사람들과 합류할지도 모릅니다. 주의하지 않으면 더러운 깊은 물에 빠져 죽을 수도 있습니다.1

복음대로 생활하는 것을 포함하여 모든 일을 하는 데는 세심한 방식과 소홀한 방식이 있습니다. 구주와 맺은 성약을 보면, 우리는 세심하게 행합니까? 아니면 소홀하게 여깁니까? 우리가 지닌 필멸의 본성 때문에 우리는 때로 자신의 행동이 좋은 것은 아니지만 나쁘지도 않다고 하거나 좋은 것과 나쁜 것을 적당히 섞어 가며 자신의 행위를 합리화하지는 않습니까? 선지자이신 지도자들의 권고를 따르는 일이나 세심하게 복음을 실천하는 일과 관련하여 “하지만”이라든가 “~를 제외하고”라는 조건을 붙인다면, 그때마다 우리는 “그 권고는 나에게 해당하지 않습니다.”라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는 원하는 대로 얼마든지 합리화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중요한 사실은 옳지 않은 일을 하는 올바른 방법은 없다는 것입니다!

2019년 청소년 주제인 요한복음 14장 15절에서 주님께서는 이렇게 가르치십니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 우리가 주장하는 것처럼 정말 그분을 사랑한다면, 그분의 계명을 좀 더 세심하게 실천함으로써 그 사랑을 보일 수 있지 않을까요?

세심하게 복음을 실천한다는 말이 꼭 엄격하거나 고리타분하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그에 걸맞은 생각과 행동을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복음을 세심하게 실천하는 것과 소홀히 대하는 것의 차이를 곰곰이 생각해 볼 때 몇 가지 고려해 볼 점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매주 안식일 예배에 임하고 성찬을 취할 준비를 할 때 세심한 주의를 기울입니까?

우리는 더욱 세심한 태도로 기도와 경전 공부를 하거나 와서 나를 따르라—개인 및 가족 학습에 더욱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습니까?

우리는 성전 예배를 드릴 때 세심한 주의를 기울입니까? 우리가 침례를 받을 때 맺은 성약과 성전에서 맺은 성약을 세심하고 진지하게 지킵니까? 우리는 특히 성스러운 장소와 상황에서 용모에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고 정숙한 옷차림을 합니까? 우리는 성스러운 성전 가먼트 착용과 관련하여 세심한 주의를 기울입니까? 아니면 세상의 유행에 이끌려 격식을 무시하지는 않습니까?

우리는 다른 사람들에게 성역을 베풀고 교회 부름을 수행할 때 세심한 주의를 기울입니까? 아니면 부름에 무관심하거나 소홀합니까?

우리는 읽는 것과 텔레비전 및 모바일 기기에서 보는 것에 세심한 주의를 기울입니까? 아니면 부주의합니까? 우리는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를 세심하게 선택합니까? 아니면 상스럽고 저속한 것들을 별생각 없이 받아들입니까?

청소년의 힘을 위하여 소책자에는 세심히 따르면 풍성한 축복을 가져다주고 우리를 성약의 길에 남아 있도록 도와줄 표준들이 나와 있습니다. 이 책자는 청소년들의 유익을 위하여 쓰였지만, 거기에 나온 표준들은 청남 청녀에게만 해당되는 것은 아닙니다. 이러한 표준은 우리 모두에게 항상 적용됩니다. 이 표준들을 살펴보면 우리가 더욱 세심하게 복음 생활을 할 수 있는 다른 방법들이 떠오를 수 있습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과 어울리거나 누군가의 마음을 편하게 해 주려고 우리의 표준을 낮추지 않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다른 사람들도 더욱 큰 축복을 받을 수 있도록 더 높고 거룩한 곳으로 그들을 끌어올리고 고양하는 일을 합니다.

저는 우리 모두가 자신이 맺은 성약에 더욱 세심하게 부응하기 위해, 삶에서 어떤 부분을 변화시켜야 하는지 알 수 있도록 성신의 인도를 구하기를 권유합니다. 또한 이렇게 같은 여정을 걸어가는 다른 이들을 비판하지 말기를 간곡히 부탁합니다. “심판이 내 것이요[라고], … 주께서 말씀하”셨습니다.2 우리는 저마다 성장과 변화의 과정을 밟고 있습니다.

저는 몰몬경에 나오는 애믈리싸이인에 대한 이야기가 흥미롭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교회에 속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이기 위해 모두가 볼 수 있도록 이마에 뚜렷한 붉은 표시를 했습니다.3 이와 반대로, 또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우리는 어떤 표시를 할 수 있을까요? 다른 이들이 우리의 얼굴에서 쉽게 그분의 형상을 볼 수 있을까요? 신중하게 삶을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을 보며 우리가 누구를 대표하는지 알 수 있을까요?

성약의 백성으로서 우리는 나머지 세상 사람들과 같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소유가 된 백성이라고 불렸습니다.4 이 얼마나 멋진 찬사입니까! 세상의 영향력이 점점 더 악과 결탁할수록, 우리는 세상의 영향으로부터 더욱 멀어져 성약대로 생활하면서, 우리의 구주께로 안전히 인도하는 길에 굳건히 남아 있도록 전력을 다하여 노력해야 합니다.

저는 영속적인 행복을 얻는 것에 대해 생각해 볼 때, 우리가 가끔 잘못된 선택을 합리화할 때가 있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성약의 길을 걸어갈 때 어둠의 안개는 피할 수 없습니다. 유혹과 소홀함은 우리의 경로를 미묘하게 돌려 성약의 길에서 벗어나게 하여 우리를 세상의 어둠으로 이끌 수 있습니다. 우리의 사랑하는 선지자 러셀 엠 넬슨 회장님은 만일 이러한 일이 일어난다면 신속히 성약의 길로 다시 돌아오라고 강력하게 권고하셨습니다. 저는 회개의 은사와 구주의 속죄의 권능에 대단히 감사드립니다.

완벽한 삶을 사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오직 한 분만이 이 별의 세상에서 온전한 삶을 사실 수 있었습니다. 그분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형제 자매 여러분, 우리는 비록 완전하지는 못할지라도 성찬을 취하고, 성전 축복을 받고, 개인적인 계시를 받기에 합당해질 수는 있습니다.

베냐민 왕은 세심하게 구주를 따르는 자들에게 주어지는 축복과 행복에 대해 이렇게 간증했습니다. “또 더욱이 나는 너희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자들의 복되고 행복한 상태를 깊이 생각해 보기를 바라고자 하노니, 이는 보라, 그들은 현세적이거나 영적인 모든 일에 복됨이요, 만일 그들이 끝까지 충실히 견디면 하늘에 영접되나니, 그로 인해 하나님과 함께 결코 끝이 없는 행복한 상태에 거하게 되리라.”5

15달러로 행복을 살 수 있을까요? 그럴 수 없습니다. 목적의식을 지니고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대로 생활할 때 비로소 충만하고 영속적인 행복이 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말씀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