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2019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
2019년 4월 연차 대회


11:46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

구주의 속죄는 그 범위 면에서 무한할 뿐만 아니라 개개인에게 개별적으로 그 영향력을 미칩니다.

이 부활 절기에 우리는 구주의 속죄를 특별히 더 기뻐하고 그에 대해 생각합니다. 속죄는 이 세상이나 우주에서 이제까지 알려진 것 중 가장 신성하고, 의식을 확장시키는, 강렬한 교리입니다. 속죄는 우리 삶에 희망과 목적을 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란 무엇입니까? 어떤 의미에서 그것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시작되어 십자가 위로 이어졌으며 구주께서 무덤에서 부활하신 것으로 마무리된 일련의 신성한 사건들입니다. 이는 우리 각자를 향한, 인간의 이해력으로는 가늠할 수 없는 사랑에서 우러나온 것이었습니다. 속죄가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죄가 전혀 없고, 죽음을 포함한 모든 만물을 관장할 무한한 권능을 지녔으며, 우리의 모든 죄와 질고의 결과를 감내할 수 있는 한없는 능력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실제로 만물 아래로 자신을 낮춘 존재가 필요했습니다.1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사명이었고, 이것이 그분의 속죄였습니다.

그렇다면 속죄의 목적은 무엇이었습니까?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면전으로 돌아가, 그분과 같이 되고, 충만한 기쁨을 누릴 수 있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다음의 네 가지 장애물을 극복함으로써 이루어졌습니다.

  1. 육체적 사망

  2. 아담과 우리의 죄로 말미암은 영적 사망

  3. 우리의 고난과 연약함

  4. 우리의 약점과 불완전함

그런데 구주께서는 어떻게 공의의 법을 깨뜨리지 않으면서 이를 성취하실 수 있었을까요?

장비 없이 비행기에서 뛰어내리기

어떤 사람이 짜릿한 공중 낙하를 느끼고 싶어서 별 생각없이 소형 비행기에서 즉흥적으로 뛰어내렸다고 생각해 봅시다. 뛰어내리자마자 그는 곧 자신의 행동이 어리석었음을 깨닫습니다. 안전하게 착륙하고 싶지만 한 가지 장애물이 있습니다. 중력의 법칙입니다. 날아오르려고 팔을 아주 빠르게 움직여 보지만 소용이 없습니다. 부유하거나 활강하여 낙하 속도를 줄여 보려고 자세를 잡아 보지만, 중력의 법칙은 멈출 줄 모르고 무자비하게 그를 끌어당깁니다. 그는 이 기본적인 자연 법칙을 설득해 보려고 합니다. “이건 실수였어요. 다시는 그러지 않을 겁니다.” 하지만 그의 애원을 듣는 사람은 없습니다. 중력의 법칙에는 그 어떤 연민이나 예외도 없습니다. 그런데, 운 좋게도 이 사람은 갑자기 자신의 등에 무언가가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습니다. 비행기에 함께 탔던 그의 친구가 이 어리석음의 순간을 감지하고, 그가 뛰어내리기 직전에 낙하산을 매어 준 것입니다. 그는 낙하산 줄을 찾아서 당깁니다. 안도의 한숨을 쉬며 그는 안전하게 지상으로 낙하합니다. 우리는 이런 질문을 할 수 있을 겁니다. “이건 중력의 법칙을 거스른 것인가? 아니면 중력의 법칙 안에서 낙하산이 작동하여 안전하게 착륙한 것인가?”

낙하산을 타고 안전하게 착륙하기

죄를 지을 때, 우리는 비행기에서 뛰어내린 그 어리석은 사람과 같습니다. 우리가 스스로 그 어떤 일을 하더라도, 우리를 기다리는 것은 추락과 곤두박질뿐입니다. 우리는 공의의 법의 지배를 받게 되어 있으며, 그것은 중력의 법칙처럼 정확하고 냉혹합니다. 우리가 구원받을 수 있는 것은 오직 구주께서 자비롭게도 그분의 속죄를 통해 우리에게 영적 낙하산과 같은 것을 제공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을 가지고 회개한다면(즉 우리가 해야 할 부분을 하고 낙하산 줄을 당긴다면), 구주의 보호하는 힘이 우리에게 작용하여 우리는 영적으로 무사히 착륙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는 구주께서 우리의 영적 진보를 막을 수 있는 네 가지 장애물을 극복하셨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1. 사망. 주님은 그분의 영광스러운 부활을 통해 사망을 극복하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가르쳤습니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2

2. 죄 구주께서는 회개하는 모든 사람을 위해 죄와 죄책감을 극복하셨습니다. 이사야가 “너희의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라고 약속했던, 구주의 깨끗하게 하는 권능은 참으로 심오하고도 광범위합니다.3

저는 이따금 자신을 용서하는 것을 힘들어 하는 훌륭한 성도들을 만나곤 하는데, 그들은 고의는 아니지만 구주의 구속하는 권능에 제한을 두는 잘못을 하고 있었습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 그들은 무한한 속죄를 어떤 이유에서든 자신의 특정한 죄나 약점에는 미치지 못할 유한한 속죄로 바꾸어 버립니다. 하지만 모든 죄와 약점을 아우르며, 다른 사람에게서 받은 학대나 고통마저도 포함하는 속죄에는 한계가 없습니다.

트루먼 지 매드슨은 우리에게 위안을 주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여러분 중에 속임을 당해 여러분이 너무 멀리 와 버렸으며 … 죄의 독성에 중독되어 다시는 여러분이 될 수 있었던 존재가 될 수 없다고 믿게 된 분이 계시다면 제 말을 들어 보십시오.

저는 여러분이 예수 그리스도라는 빛과 그 광범위한 지성이 닿을 수 없을 만큼 깊이 추락할 수는 없다는 점을 간증드립니다. 아주 작더라도 회개하고 노력하려는 의지가 있다면, 그분은 우리 곁에 계시다는 것을 간증합니다. 그분은 여러분이 처한 상태가 아닌 그 아래로 내려가셨으며, 그렇기에 ‘만물 안에 그리고 만물을 통하여 … 진리의 빛이 되’셨습니다.[교리와 성약 88:6]”4

구주의 속죄와 그 무한한 영향력을 이해하는 것이 그토록 중요한 한 가지 이유는 속죄에 대한 이해가 커질 때 자신과 다른 이들을 용서하려는 소망도 커지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정결케 하는 권능을 믿는다고 하더라도 종종 이런 의문이 생깁니다. “내가 지은 죄를 용서받았는지를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우리가 영을 느낀다면 바로 그것이 우리가 용서받았다는, 또는 정결케 하는 과정이 시작되었다는 증거입니다. 헨리 비 아이어링 회장님은 이렇게 가르치셨습니다. “여러분이 성신의 영향력을 느꼈다면 … 속죄가 여러분의 삶에 작용하고 있다는 증거로 보아도 무방합니다.”5

막다른 길

어떤 이들은 “내가 용서받았다면, 왜 여전히 죄책감을 느끼는가?”라고 질문합니다. 아마도 하나님의 자비 안에서 죄책감에 관한 기억은 경고이자 일종의 영적인 ‘정지 신호’로서, 적어도 한동안은 또다시 유혹이 닥쳐올 때 “그 길로 가지 마. 그 길을 갈 때 찾아올 고통이 어떤지 알잖아.”하고 외칠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죄책감은 형벌이 아닌 보호 장치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죄를 기억하면서도 죄책감을 벗어버리는 것이 가능할까요?

앨마는 회개하고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도 자신의 죄를 기억했습니다. 하지만 예수께 자비를 구하고 난 후에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더 이상 내 고통을 기억할 수 없었노니, 참으로 나는 더 이상 내 죄의 기억으로 괴로움을 당하지 아니하였느니라.”6

그는 어떻게 자신의 죄를 기억하면서도 고통이나 죄책감에서는 벗어날 수 있었을까요? 그것은 바로 우리가 회개할 때 “하나님에게서 태어”나기 때문입니다.7 경전에서 말하는 것처럼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됩니다.8 한 점 부끄럼 없이 우리는 “나는 과거에 그런 죄를 저질렀던 사람이 아닙니다. 새롭게 변화된 존재입니다.”라고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3. 우리의 고난과 연약함. 앨마는 그리스도께서 “나아가사, 온갖 고통과 고난과 시험을 당하”실 것이라고 예언했습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그의 심정을 자비로 충만하게 하사, 육체를 따라, 자기 백성을 그들의 연약함을 좇아 어떻게 도울지 아시고자 하”셨기 때문입니다.9

그분은 이를 어떻게 성취하십니까? 그분은 때때로 우리가 겪는 고난을 없애 주시고, 때로는 우리가 이를 견딜 수 있도록 우리를 강하게 하시며, 어떤 때는 우리가 그 고난의 일시적인 속성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도록 영원한 관점을 갖게 해 주십니다. 약 두 달 동안 리버티 감옥에 투옥되었던 조셉 스미스는 결국 이렇게 외쳤습니다. “오 하나님이시여, 당신은 어디 계시나이까?”10 하나님께서는 즉각적으로 그를 고난에서 구해 주시는 대신 이렇게 응답하셨습니다. “내 아들아, 네 영혼에 평강이 있을지어다. 네 역경과 네 고난은 잠시 뿐이리니, 그러고 나서 만일 네가 이를 잘 견디어내면, 하나님이 너를 높이 들어 올리실 것이요.”11

조셉은 이제 이 쓰라린 경험이 영원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하나의 점에 지나지 않음을 이해했습니다. 이 깊어진 이해를 바탕으로 조셉은 같은 감방 안에서 성도들에게 이런 편지를 썼습니다. “지극히 사랑하는 형제들아, 우리의 능력 안에 놓여 있는 모든 일을 기쁘게 행하자. 그러고 나서 우리가 최대한의 확신을 가지고 가만히 서서 하나님의 구원을 보 … 기를 바라노라.”12 구주의 속죄 덕분에 우리는 우리가 겪는 시련에 의미를 부여해 주는 영원한 관점과, 그 시련이 거두어질 것이라는 소망을 가질 수 있습니다.

4. 우리의 약점과 불완전함. 구주께서는 그분이 치르신 속죄를 통해 가능하게 하는 힘을 가지셨습니다. 때로 은혜13라고 일컬어지는 이 힘은 우리가 약점과 불완전함을 극복하도록 도울 수 있으며, 따라서 좀 더 그분과 같이 되고자 하는 과정에 도움이 됩니다.

그래서 모로나이는 이렇게 가르쳤습니다. “그리스도에게로 나아와, 그의 안에서 온전하게 되고, … 그의 은혜로 너희가 그리스도 안에서 온전하게 될지라.”14 우리를 발전시키고 온전하게까지 할 수 있는 그 가능하게 하는 힘을 받는 방법에는 최소한 두 가지가 있는 것 같습니다.

첫 번째, 구원 의식입니다. 경전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므로 그것의 의식으로 경건의 능력이 나타나느니라.”15 가끔 우리는 의식을 마치 점검표처럼 생각합니다. 각 의식은 승영에 필요한 것이지만, 참으로 우리에게 좀 더 그리스도와 같이 되게 하는 신성한 능력을 줍니다.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 우리가 침례를 받고 성신의 은사를 받을 때 우리는 깨끗해지며, 그러므로 조금 더 하나님 아버지와 같이 거룩해집니다.

  • 그에 더하여, 성신을 통해 우리의 생각은 밝아지며 우리의 마음은 부드러워져서 좀 더 주님과 같이 생각하고 느낄 수 있습니다.

  • 우리가 부부로서 인봉받을 때,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선물인 “왕위와 왕국과 통치권과 권세”를 받을 권리를 상속받습니다.16

이 가능하게 하는 힘을 얻는 두 번째 방법은 영의 은사입니다. 그리스도의 속죄 덕분에 우리는 성신의 은사와 그에 동반되는 영적 은사를 받을 자격을 갖추게 되었습니다. 이런 은사는 신성한 성품이며, 따라서 우리는 어떤 영의 은사를 얻을 때마다 좀 더 하나님과 같이 됩니다. 경전에서 여러 번에 걸쳐 우리에게 이런 은사를 구하라고 명한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17

조지 큐 캐넌 회장님은 이렇게 가르치셨습니다. “‘아, 도리가 없어. [이게 내] 천성인걸.’ 이라고 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 [우리의 약점을] 뿌리 뽑을 은사를 주시기로 약속하셨기 때문에, 그것은 정당한 이유가 되지 못합니다. … 우리 중 누구라도 결점이 있다면, 우리가 할 일은 자신을 온전하게 할 은사를 간구하는 것입니다.”18

요약하자면, 구주의 속죄는 우리에게 죽음 대신 삶을 주며, “화관을 주어 그 재를 대신하며”19, 상처 대신 치유를, 약함 대신 온전함을 줍니다. 이것은 이 세상의 방해물과 어려움을 해결할 하늘로부터 온 방책입니다.

구주께서는 그분의 필멸의 삶 마지막 주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20 구주께서 속죄를 이루셨기에, 우리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기만 한다면, 그 어떤 외부적인 힘이나 사건, 또는 사람도, 그 어떤 죄나 죽음, 이혼도 우리가 승영을 이루는 것을 방해할 수 없습니다. 그런 지식이 있다면 우리는 기쁜 마음으로, 또한 본향을 향한 이 여정에서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확고한 믿음을 가지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저는 구주의 속죄의 영향력이 그 범위 면에서 무한할 뿐만 아니라 개개인에게 개별적으로 미치고, 우리를 하나님 면전으로 돌아가게 해 줄 뿐만 아니라 우리가 그분과 같은 자가 되게 해 준다는 것과,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속죄가 가진 궁극의 목적임을 간증드립니다. 이 모든 말씀을 제 감사와 확신을 담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