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차 대회
평강의 왕을 따르는 사람들
2023년 4월 연차 대회


13:35

평강의 왕을 따르는 사람들

우리는 구주와 같은 성품을 발전시키려고 노력할 때 그분이 세상에 주시는 화평을 가져오는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스가랴에게 주어진 예언을 성취하시며,1 나귀를 타고 당당하게 거룩한 성으로 들어오셨습니다. 문헌에 따르면 나귀는 “유대의 왕권을 뜻하는 고대의 상징”2이었으므로 이는 참으로 왕 중의 왕, 평강의 왕에 걸맞은 모습이었습니다.3 기쁨에 찬 한 무리의 제자들이 예수님이 지나가시는 길을 따라 자신들의 겉옷과 종려나무 잎과 여러 잎사귀를 펴 놓고 그분을 둘러쌌습니다. 그들은 큰 소리로 다음과 같이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이르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는 영광이로다.”4 그리고 또 이렇게 외쳤습니다.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5 오늘날 우리가 종려 주일로 기념하는 이 장엄한 사건은 구주의 이타적인 희생과 빈 무덤이라는 위대한 기적으로 절정에 이르는 그 운명적인 한 주 동안 일어날 극심한 고통의 사건들을 여는 기쁨의 서막이었습니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우리는 그분의 덕을 선포하도록 부름받은 그분의 소유가 된 백성이자6 그리스도와 그분의 속죄 희생을 통해 참으로 관대히 주어지는 화평을 도모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러한 평안은 마음을 구주께로 돌이키고 의롭게 생활하는 모든 이들에게 약속된 은사입니다. 이러한 평안을 통해 우리는 필멸의 삶을 향유할 힘을 얻고 지상 여정에서 맞닥뜨리는 고통스러운 시련들을 견딜 수 있게 됩니다.

1847년에 주님은 개척자 성도들에게 구체적인 지침을 주셨습니다. 그들은 서부로 향하는 길에서 예기치 못한 어려움에 직면하여, 평정심을 유지하고 계속 단합하기 위해 평안이 필요했습니다. 그중에서도 주님은 특히 성도들에게 “서로 다투기를 그치라. 서로 험담하기를 그치라.”7라고 명하셨습니다. 경전에는 의의 일을 행하고 주님 영의 온유함으로 걷기 위해 노력하는 이들에게는 우리가 오늘날 살고 있는 혼란스러운 시대를 살아 나가는 데 필요한 화평이 약속되었다고 나옵니다.8

평강의 왕의 제자로서 우리는 “단합과 서로에 대한 사랑 가운데 … 마음이 함께 맺어지[는]”9 삶을 살도록 가르침 받았습니다. 우리의 사랑하는 선지자 러셀 엠 넬슨 회장님은 최근에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다투는 것은 구주께서 수호하시고 가르치신 모든 것에 위배됩니다.”10 또한 우리의 선지자는 우리에게 “현재 [우리]의 마음과 삶에서 격렬하게 일어나고 있는 개인적인 갈등 상황을 종식시키기 위해 최선을 다해 주[기를]”11 간청하셨습니다.

이러한 원리들을 우리를 향한 그리스도의 순수한 사랑, 그분을 따르는 자로서 우리가 서로에 대해 지녀야 할 성품이라는 관점에서 생각해 봅시다. 경전에서는 이러한 사랑을 charity[채리티] 즉, 자애라고 정의합니다.12(charity는 자애, 자선, 사랑 등으로 번역될 수 있음—옮긴이) Charity[채리티]라는 영어 단어는 보통 ‘자선’을 뜻하는데, 우리는 그 말을 들을 때 신체적, 물질적, 또는 정서적 곤경을 겪고 있는 이들의 고통을 덜어 주기 위한 관대한 행동과 기부를 떠올리곤 합니다. 그러나 이 charity[채리티]는 우리가 누군가에게 기부하는 무언가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구주의 성품 중 하나이며 우리의 성품이 될 수도 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완전과 평화의 띠”인 “사랑의 띠”13로 몸을 두르라고 가르치신 것은 놀랄 일이 아닙니다. 이 사랑이 없다면 우리는 아무것도 아니며14 주님이 우리를 위해 하늘 아버지의 거처에 예비하신 처소도 기업으로 얻을 수 없습니다.15

예수님은 특히 순교하시기 전에 있었던 몇몇 고통스러운 일들에 직면했을 때 이 완전과 평화의 띠를 소유하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를 완벽하게 보여 주셨습니다. 바로 그날 밤에 당신을 배신할 사람이 그들 중에 있다는 것을 아시면서도 겸손히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던 예수님의 마음을 잠시 짐작해 보시기 바랍니다.16 혹은 몇 시간 뒤, 배반자 유다와 함께 당신을 체포하러 온 자의 귀를 자비로이 치유해 주실 때 예수님의 마음을 헤아려 보시기 바랍니다.17 더 나아가,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부당하게 고발당하여 빌라도 앞에 서서도 당신에 대한 거짓 고발에 대해 한마디도 하지 않아 그 로마인 총독의 놀라움을 자아냈던 그때의 구주의 마음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18

구주께서는 이 세 비극적인 사건으로 압도적인 슬픔과 중압감을 느끼면서도 “사랑은 오래 참고 …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18함을 모범으로 가르치셨습니다.

제가 강조하고자 하는 또 다른 중요한 측면이자, 우리가 제자의 길을 걷고 구주께서 주시는 화평을 도모하는 방식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한 가지는 우리가 서로를 대하는 방식입니다. 구주께서는 지상에서 성역을 베푸실 때 특히 사랑, 자애, 인내, 겸손, 동정의 미덕에 초점을 두고 가르치셨는데, 이는 그분과 더 가까워지고자 하고 그분이 주시는 평안을 도모하는 이들에게 꼭 필요한 성품입니다. 이러한 품성은 하나님에게서 오는 은사로서, 이를 발전시키려고 노력할 때 우리는 이웃들의 다른 점과 약점을 더 공감하는 마음으로, 더 세심하게 존중과 아량으로 바라보기 시작할 것입니다. 우리가 구주께 더 가까이 나아가고 있고 좀 더 그분과 같이 되고 있음을 알 수 있는 가장 확실한 징표 중 하나는 우리가 어떤 상황에 있든 이웃을 사랑과 인내, 친절로 대하는 모습을 통해서입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성품, 약점, 생각에 대해 이러니저러니 하며 나누는 부정적이고 경멸적인 대화에 관여하는 사람들을 자주 접하게 되는데, 주로 그런 일은 그런 성품이나 생각이 자신의 행동 방식이나 생각과는 다르거나 대립하는 것일 때 일어납니다. 이런 사람들이 그런 대화 내용을 다른 이들에게 전하고, 이를 들은 사람들이 모든 정황을 제대로 알지도 못한 채 자기가 들은 말을 또 옮기는 모습은 매우 흔히 볼 수 있는 일입니다. 안타깝게도 소셜미디어는 상대적 진리와 투명성이란 명목으로 이러한 행동을 조장합니다. 규제 없는 디지털상에서의 대화는 인신공격과 격렬한 논쟁으로 이어지며 사람들에게 실망감을 안기고 가슴에 상처를 주며 극도의 적개심을 퍼뜨리기도 합니다.

니파이는 후기에 대적이 맹위를 떨쳐 사람들이 선한 것에 대하여 노하도록 그들을 충동할 것이라고 예언했습니다.20 경전에서는 이렇게 가르칩니다. “무릇 선을 행하도록 하며,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를 섬기도록 이끌며 권유하는 것은 모두 하나님의 영감으로 말미암은 것이니라.”21 반대로, “악한 것은 악마에게서 오나니, 이는 악마가 하나님의 원수요, 끊임없이 하나님을 대적하여 싸우며, 또 죄를 범하도록 또 끊임없이 악을 행하도록 꾀며 유혹함이라.”22

이러한 선지자의 가르침을 숙고할 때, 대적의 책략 중 하나가 하나님 자녀들의 마음에 적대감과 미움을 부추기는 것이라는 사실은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 사탄은 사람들이 서로를 비난하고 조롱하고 모략할 때 기뻐합니다. 이러한 행동은 한 사람의 성품과 평판, 자긍심을 망가뜨릴 수 있는데 특히 그 사람이 부당한 판단을 받을 때 더욱 그렇습니다. 이런 태도를 우리 삶에 허용할 때, 우리는 사탄의 탐욕스러운 함정에 빠질 위험을 감수하게 되며 대적이 우리 가운데 불화의 씨앗을 심도록 마음에 자리를 내주는 것임을 인지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의 생각과 말과 행동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우리는 대적의 간교한 술책에 현혹되어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관계를 망치는 결과에 이르게 될지도 모릅니다.

형제 자매 여러분, 주님의 소유가 된 백성이자 그분의 화평을 도모하는 우리는 이러한 사탄의 책략에 마음을 빼앗겨서는 안 됩니다. 감정을 상하게 하며 관계를 망치고 심지어 삶을 파괴하는 그러한 해로운 짐을 짊어져서는 안 됩니다. 복음은 큰 기쁨의 좋은 소식입니다.

물론 우리 중 누구도 완벽한 사람은 없으며, 때로 우리가 이런 행동을 하도록 현혹되기도 한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입니다. 온전한 사랑을 지니고 인간의 성향을 모두 다 아시는 구주께서는 언제나 우리에게 그러한 위험을 경고하려 하십니다. 그분은 이렇게 가르치셨습니다. “너희가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23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우리는 구주와 같은 성품을 발전시키려고 노력할 때 그분이 몸소 보여 주신 방법을 따라 그분이 세상에 주시는 화평을 가져오는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저는 여러분에게 다른 사람을 북돋고 돕기 위해 자신을 변화시킬 방법을 생각해 보시기를 권유드립니다. 이해심과 용서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 “무엇이든지 유덕하고 사랑할 만하거나 혹 듣기 좋거나 혹 칭찬할 만한 일이 있으면 우리는 이것들을 구하여 마지않[는다]”24는 사실을 늘 기억하면서 다른 사람들에게서 좋은 점을 찾는 사람 말입니다.

저는 우리가 이러한 성품을 추구하고 발전시킬 때, 이웃의 어려움을 더욱 살뜰하고 세심히 살피며25 기쁨과 평안, 영적인 발전을 경험하게 될 것임을 약속드립니다.26 주님께서는 분명히 우리의 노력을 인정해 주시고 우리가 서로의 차이점과 약점, 불완전함을 더 큰 아량으로 인내하는 데 필요한 은사들을 주실 것입니다. 더 나아가 우리는 화내고 싶은 충동과 우리에게 상처 준 사람을 성나게 하고 싶은 욕구를 더 잘 이겨 내게 될 것입니다. 우리를 부당하게 대하거나 비방하는 사람들을 구주께서 용서하신 것처럼 용서하고자 하는 우리의 소망이 분명히 커질 것이며 그 소망은 우리의 성품 중 일부가 될 것입니다.

이제 빈 무덤의 기적이 있었던 다음 주 일요일을 기릴 준비를 하면서, 오늘 이 종려 주일에 평강의 왕의 발자취를 따라 걸으며 사랑의 겉옷과 자애의 종려나무 잎을 펼칩시다. 그리스도를 믿는 형제 자매로서, 기쁜 마음으로 다음과 같이 선언합시다.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27

저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살아 계시며, 그분의 속죄 희생을 통해 보여진 그분의 온전한 사랑이 그분과 함께 걸으며 이생과 다음 생에서 그분이 주시는 평안을 누리고자 하는 모든 사람에게 펼쳐져 있음을 간증드립니다. 이 모든 것을 구주이자 구속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한 이름으로 말씀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