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주님의 뜻과 그분이 정하신 시기를 받아들이는 것
August 2016


주님의 뜻과 그분이 정하신 시기를 받아들이는 것

2013년 3월 3일 텍사스 대학교 알링턴 캠퍼스에서 열린 교회 교육 기구 영적 모임에서 전한 말씀, “우리가 ‘물러서지 … 않[기를]’”에서 발췌함.

구주를 믿는 강한 신앙이란 우리 삶에서 그분의 뜻과 그분께서 정하신 시기를 순종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비록 그 결과가 우리가 바랐거나 원했던 것이 아닐지라도 말입니다.

겟세마네에 계시는 그리스도

겟세마네의 그리스도, 해리 앤더슨

닐 에이 맥스웰(1926~2004) 장로님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받는 제자셨습니다. 그분은 십이사도 정원회 일원으로 1981년부터 2004년까지 23년간 봉사하셨습니다. 맥스웰 장로님의 가르침에 담긴 영적인 힘과 충실한 제자로서 보이신 모범은 구주의 회복된 교회 회원들에게, 그리고 전 세계 사람들에게 놀라운 방식으로 축복이 되었으며, 계속해서 축복이 되고 있습니다.

1997년 10월에 저는 아내와 함께 브리검 영 대학교 아이다호 캠퍼스(당시 릭스 대학)에서 맥스웰 장로님 부부를 모신 적이 있습니다. 맥스웰 장로님은 학생들과 교직원 및 교수진이 모이는 영적 모임에서 말씀하시기로 되어 있었습니다.

그해 초반에 맥스웰 장로님은 백혈병으로 46일간 밤낮을 가리지 않고 심신을 쇠약하게 하는 화학 치료를 받으셨습니다. 봄과 여름 내내 이어진 재활과 치료로 상당히 호전되셨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렉스버그에 오실 당시 그분의 신체적인 힘과 기력은 상당히 떨어져 있었습니다. 수잔과 저는 맥스웰 장로님 내외를 공항에서 맞이한 후 휴식을 취하시도록 저의 집으로 모셨고, 영적 모임 전에 가벼운 점심식사를 함께 했습니다.

저는 장로님께 병고를 겪으며 어떤 교훈을 배우셨는지를 여쭈었습니다. 저는 가슴을 파고드는, 조금도 틀림이 없는 그분의 대답을 언제까지나 기억할 것입니다. “데이브, 겁을 먹고 물러서지 않는 것이 생존하는 것보다 더 중요하다는 것을 배웠다네.”

이 대답은 맥스웰 장로님이 항암 화학 치료 동안 수많은 일을 겪으시며 직접 체득하신 원리였습니다. 1997년 1월, 1차 항암 치료를 시작하기로 예정되었던 날, 맥스웰 장로님은 아내를 바라보며 손을 잡으시고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겁을 먹고 물러서지 않길 바랄 뿐이오.”

맥스웰 장로님은 1977년 10월 연차 대회에서 다음과 같이 가르치셨습니다. “우리에게 닥친 시련들을 겪게 될 때, 우리도 예수님이 하셨던 것처럼 ‘물러서[지 않도록]’(교리와 성약 19:18), 즉 물러서거나 움츠러들지 않을 수 있도록 하나님께 간청할 수 있습니다. 물러서지 않는 것이 살아남는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합니다! 더군다나 쓴 잔을 쓰지 않게 마시는 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와 같이 행하는 것입니다.”1

구주께서 무한하고도 영원한 희생을 치르며 겪어야 하셨던 고통을 알려 주는 성구들이 제게 더욱 가슴 아프고도 의미 있게 다가왔습니다.

“이는 보라, 만일 그들이 회개하면, 고난을 겪지 않게 하려고 나 하나님이 모두를 위하여 이러한 일을 겪었음이니라.

그러나 만일 그들이 회개하지 아니할진대, 그들은 나처럼 고난을 겪어야만 하나니,

그 고난은 만유 가운데 가장 큰 자 곧 하나님인 나 자신을 고통으로 말미암아 떨게 하였고 모든 구멍에서 피를 쏟게 하였으며, 육체와 영이 모두 고난을 겪게 하여—내가 그 쓴 잔을 마시지 않고 물러서려 하게 하였느니라—

그러할지라도 아버지께 영광이 있을지어다. 나는 마셨고 사람의 자녀들을 위한 나의 준비를 마쳤느니라.”(교리와 성약 19:16~19)

구주께서는 겟세마네 동산에서나 골고다에서 물러서려 하지 않으셨습니다.

맥스웰 장로님 역시 물러서지 않으셨습니다. 이 강한 사도는 조금도 흔들림 없이 앞으로 나아갔으며, 그 결과 필멸의 세상에 조금 더 머물 수 있는 시간을 축복받아 사랑하고, 봉사하고, 가르치고, 간증했습니다. 생애를 마감하던 마지막 몇 년간의 그분의 삶은 말과 행동을 통해 모범적으로 보여 온 헌신적인 제자의 삶을 더욱 강조하는 느낌표와도 같았습니다.

대부분 우리는 맥스웰 장로님과 같은 영적인 역량과 경험, 위상을 지니신 분은 하나님께서 주신 행복의 계획을 이해하고, 자신감 있고 품위 있게, 그리고 위엄을 지키며 중병이나 죽음을 맞을 것이라고 기대할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그러한 축복이 총관리 역원이나 교회의 선택된 일부 회원에게만 국한되어 예비되는 것이 아님을 증명하려 합니다.

십이사도 정원회에 부름받은 이후, 저는 지명된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세계 각지를 여행하면서 충실하고, 용감하며, 용맹한 후기 성도들을 만나 볼 수 있었습니다. 저는 한 젊은 남성과 여성에 관해 말씀드리고자 하는데, 그들은 제 삶에 축복이 되었으며, 저는 그들과 함께 겁을 먹거나 물러서지 않고 우리의 뜻이 “아버지의 뜻 안에 삼키운 바 되[게]”(모사이야서 15:7) 하는 것에 대해 영적으로 중대한 교훈을 함께 배웠습니다.

이는 실제 인물의 이야기가 담긴 실화입니다. 그렇지만 관련 인물의 실명을 사용하지는 않겠고, 허락을 받아 그들의 개인 일지 일부를 인용하겠습니다.

“내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존은 합당한 신권 소유자이며 전임 선교사로서 충실하게 봉사했습니다. 선교 사업을 마치고 귀환한 후 의롭고 훌륭한 헤더라는 젊은 여성과 데이트를 했고 마침내 결혼을 했습니다. 주님의 집에서 현세와 영원에 걸쳐 함께 인봉이 되던 날, 존은 23세였고 헤더는 20세였습니다.

성전 결혼을 하고 약 3주가 지난 후, 존은 골수암 진단을 받았습니다. 폐에서도 암 덩어리가 발견되었기 때문에 예후가 좋지 않았습니다.

존은 일지에 이렇게 적었습니다. “오늘은 내 인생에서 가장 무서운 날이다. 암이 있다는 말을 들어서도 그렇지만, 이제 막 결혼했는데 남편으로서 실패했다는 생각이 들어서이기도 했다. 나는 우리 새 가족의 부양자이자 보호자이다. 그 역할을 시작한 지 3주가 지난 지금, 실패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헤더는 이렇게 적었습니다.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었다. 그 때문에 우리의 관점이 얼마나 바뀌었는지를 나는 기억한다. 나는 남편의 검사 결과를 기다리며 병원 대기실에서 결혼식 감사장을 적고 있었다. 그러나 남편이 암에 걸렸다는 것을 알게 되고는 그릇이며 조리 기구가 더는 중요하게 여겨지지 않았다. 내 인생 최악의 날이었지만, 그날 밤 잠자리에 들면서 성전 인봉을 받은 것에 대해 감사드렸다. 의사들은 남편의 생존율이 30퍼센트에 불과하다고 했지만, 나는 우리가 충실하다면 영원히 함께할 가능성은 100퍼센트라는 것을 알았다.”

병원 침상에 있는 존

삽화: 벤 소워즈

한 달 후, 존은 항암 치료를 시작했습니다. 존은 그 경험을 이렇게 적었습니다. “치료를 받자 내 평생에 없었던 고통이 찾아왔다. 머리카락이 빠졌다. 체중은 19킬로그램이나 줄었다. 몸이 산산조각이 나는 것 같았다. 항암 화학 요법은 정서적으로, 정신적으로, 영적으로 영향을 미쳤다. 항암 화학 요법으로 치료를 받는 동안 내 삶은 높은 곳과 낮은 곳을 오르내리며 요동치는 롤러코스터 같았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을 겪으면서도 헤더와 나는 하나님께서 나를 낫게 해 주실 것이란 신앙을 지켰다. 우리는 그냥 그렇게 되리라는 것을 알았다.”

헤더는 생각과 느낌을 매일 기록해 나갔습니다. “남편이 병원에서 밤을 홀로 보낸다는 사실을 나는 견딜 수 없었다. 그래서 매일 밤 병실에 있는 작은 침상에서 쪽잠을 잤다. 낮에는 많은 친구와 가족들이 오갔다. 하지만 밤이 가장 힘든 시간이었다. 나는 천장을 바라보며 우리를 위한 하나님 아버지의 계획이 무엇인지를 생각하며 의아해하기도 했다. 때로 우울한 생각에도 빠져들고, 존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휩싸이기도 했다. 그러나 나는 이러한 생각이 하나님 아버지에게서 온 것이 아님을 알았다. 나는 더욱 자주 위안을 구하는 기도를 드렸고, 주께서는 내게 나아갈 수 있는 힘을 주셨다.”

3개월 후 존은 다리에서 커다란 종양을 떼어 내는 수술을 받았습니다. 수술 후 이틀째 되는 날에 저는 병원에 있는 존과 헤더를 방문했습니다. 우리는 선교 임지에서 처음 존을 만났던 이야기, 그들의 결혼, 암, 현세의 삶에서 겪는 시련으로 배우는 중요한 교훈 등에 관해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이야기를 마치고 일어서려는데, 존이 제게 신권 축복을 해 줄 수 있는지를 물어왔습니다. 저는 기쁜 마음으로, 축복을 줄 수는 있지만 먼저 몇 가지 질문을 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런 후 물을 계획도 없었고 전에는 생각해 보지도 않았던 몇 가지 질문을 했습니다. “존, 병이 치유되지 않아도 괜찮다는 신앙이 있습니까? 만일 젊은 나이에 죽어 영의 세계로 옮겨져 그곳에서 계속 봉사해야 하는 것이 하나님 아버지의 뜻이라면, 하나님의 뜻에 순응하여 낫지 않더라도 이를 받아들일 신앙이 있습니까?”

경전에서 주님 또는 그분의 종들은 치유하는 영적 은사를 자주 행하셨고(고린도전서 12:9; 교리와 성약 35:9; 46:20 참조), 그분들은 사람들에게 치유되리라는 신앙이 있다는 것을 인식하셨습니다.(사도행전 14:9; 제3니파이 17:8; 교리와 성약 46:19 참조) 저는 존과 헤더와 함께 이러한 문제를 논의하고 함께 이해하려고 애쓰면서 만일 이 선한 젊은이가 치유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그 축복은 먼저 이 용감한 부부가 낫지 않아도 괜찮다는 신앙이 있을 때만 받을 수 있는 것임을 점차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존과 헤더는 우리가 원하고 마땅히 받아야 한다고 믿는 축복을 조급하게 요구하고 쉴 새 없이 고집하는 “육에 속한 사람”(모사이야서 3:19)이라는, 우리 모두에게 내재되어 있는 성향을 주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를 통해 극복할 필요가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모든 헌신적인 제자에게 적용되는 한 가지 원리를 인식했습니다. 그것은 바로 구주를 믿는 강한 신앙이란 그분의 뜻과 그분이 정하신 시기를 순종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비록 그 결과가 우리가 바랐거나 원했던 것이 아닐지라도 말입니다. 존과 헤더는 분명 능력과 생각과 힘을 다하여 치유를 바라고, 갈망하고, 간청할 것입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주께서 합당하게 여겨 그[들]에게 내리시는 모든 것에 기꺼이 복종하고자 하기를, 아이가 참으로 그 아버지에게 복종함같이”(모사이야서 3:19) 하는 것이었습니다. 참으로 기꺼이 “[자신들의] 영혼을 그에게 예물로 드리고[자]”(옴나이서 1:26) 하며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누가복음 22:42)라고 겸손하게 기도해야 했습니다.

처음에는 존과 헤더, 그리고 제게 당혹스럽게 느껴졌던 그 질문은 복음 원리들 가운데 겉으로는 모순되게 보이는 것들의 일부가 되었습니다. 구주의 이 훈계를 깊이 생각해 보십시오.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마태복음 10:39) 주님은 또한 이렇게 선언하셨습니다. “그러나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마태복음 19:30) 주님은 후기의 제자들에게도 이렇게 권고하셨습니다. “또 네 말로 인하여 많은 높은 자들이 낮아질 것이요, 또 네 말로 인하여 많은 낮은 자들이 높아질 것임이니라.”(교리와 성약 112:8) 따라서 낫지 않아도 괜찮다는 신앙을 갖는 것은 겉으로는 모순되어 보이는 이러한 복음 원리들의 강력한 실례에 적절하게 들어맞는 듯 보입니다. 물론 이러한 역설적인 복음 원리들에 대한 지식과 이해를 얻기 위해서 우리는 구하고, 찾고, 두드려야 합니다.(제3니파이 14:7 참조)

충분한 시간 동안 제 질문을 깊이 생각하며 헤더와 이야기를 나누는 도중, 존이 제게 이렇게 말해 왔습니다. “베드나 장로님, 전 죽고 싶지 않습니다. 헤더를 남겨두고 떠나고 싶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저를 영의 세계로 데려가시는 것이 주님의 뜻이라면 기꺼이 받아들이겠습니다.”

이 어린 부부가 모든 영적 투쟁 중에서도 가장 힘겨운 투쟁인, 자신의 뜻을 내려놓고 기꺼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려는 것을 보면서 제 마음은 감사와 감탄으로 부풀어 올랐습니다. 이 부부가 치유받고자 하는 자신의 강렬하고 이해할 만한 소망을 “아버지의 뜻 안에 삼키운 바”(모사이야서15:7) 되도록 하려는 것을 목격하면서 제 신앙도 강화되었습니다.

존은 우리의 대화에 자신이 어떻게 반응했으며 어떤 축복을 받게 되었는지를 적었습니다. “베드나 장로님은 생존하는 것보다 겁을 먹고 물러서지 않는 것이 더 좋은 것이라는 맥스웰 장로님의 생각을 우리와 나누셨다. 그런 후 베드나 장로님은 우리에게 물으셨다. ‘나을 것이라는 신앙이 있는 것을 알겠습니다. 그런데 낫지 않아도 괜찮다는 신앙이 있습니까?’ 내게 이 개념은 생소했다. 본질적으로 베드나 장로님이 묻고자 하신 것은, 만일 낫지 않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나에게 그 뜻을 받아들일 신앙이 있는지, 만일 죽음을 통해 영의 세계로 가야 할 시간이 다가온다면, 순종하고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느냐는 것이었다.”

존은 계속해서 이렇게 적었습니다. “낫지 않아도 괜찮다는 신앙을 갖는 것은 언뜻 생각하면 본능에 반하는 듯하다. 그러나 그러한 관점으로 보게 되면서 나와 아내의 생각하는 방식에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고, 우리를 위해 마련된 하나님의 계획을 완전히 신뢰하게 되었다. 결과가 어떻든 주님께서 주관하신다는 신앙, 그리고 주님께서 우리가 있는 곳으로부터 우리가 있어야 할 곳으로 이끌어 주실 것이라는 신앙을 가질 필요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우리의 기도는 ‘온전히 낫게 해 주세요.’에서 ‘저를 위해 계획하신 것이 무엇이든 그것을 받아들일 신앙을 주시옵소서.’로 바뀌었다.

베드나 장로님은 사도이시기 때문에 그분이 축복하시면 내 몸의 원소들이 재구성되어 병상에서 벌떡 일어나 춤을 추게 되거나 극적인 뭔가가 일어날 것이라고 확신했었다! 그런데 그날 베드나 장로님이 축복해 주셨을 때 그분이 전하는 축복의 말씀이 아버지와 장인, 그리고 선교부 회장님이 하셨던 축복과 거의 똑같아서 깜짝 놀랐다. 머리 위로 누구의 손이 올려지든 궁극적으로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나님의 권능은 변하지 않으며, 그분의 뜻은 우리에게 개인적으로, 또한 그분의 권한을 받은 종들을 통해 알려진다.”

남편의 가슴에 기댄 아내

헤더는 이같이 적었습니다. “오늘은 여러 가지 감정으로 가득한 날이다. 나는 베드나 장로님이 남편의 머리에 손을 얹고 암을 완전히 낫게 해 주실 것이라고 굳건히 믿었다. 남편이 신권 권능으로 치유될 수 있다는 것을 알았으며, 그런 일이 일어나기를 간절히 바랐다. 낫지 않는다 해도 그 결과를 받아들일 신앙에 대해 그분이 우리에게 가르치셨을 때 두려움이 엄습했다. 단 한 번도 남편을 잃는 것이 주님의 계획의 일부일 수도 있다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내 신앙은 내가 원하는 결과가 일어나느냐에 달려 있었다. 어떤 의미에서 보면 일차원적인 신앙이다. 처음에는 두려웠지만, 낫지 않더라도 괜찮다는 신앙을 갖는 것에 대해 생각하자 마침내 내 마음에서 걱정이 사라졌다. 그런 신앙이 생기자, 하나님 아버지께서 내가 나 자신을 아는 것보다 훨씬 더 나를 잘 아시며, 나와 존을 위해 가장 좋은 일을 하실 것임을 완전하게 신뢰하게 되었다.”

축복을 준 후, 여러 주, 여러 달, 여러 해가 흘렀습니다. 존의 암은 기적적으로 차도를 보였습니다. 존은 대학을 졸업하고 좋은 직장을 찾았습니다. 존과 헤더는 계속 관계를 강화시켜 나갔고 함께하는 삶을 즐거워했습니다.

얼마 간의 시간이 흐른 후 저는 존과 헤더로부터 편지를 받았습니다. 암이 재발하여 항암 화학 요법이 재개되었고, 수술 날짜가 잡혔다는 소식이었습니다. 존은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헤더와 저는 이 소식을 접하고 실망스러웠을 뿐 아니라 혼란에 빠졌습니다. 첫 번째 경험에서 저희가 배우지 못했던 무언가가 있었을까요? 주님께서 저희에게 더 기대하시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래서 저는 왜 암이 재발했는지를 명확하게 이해하도록 도와주시기를 주님께 간구하기 시작했습니다. 어느 날, 신약성서를 읽다가 답을 찾았습니다. 바다에서 태풍이 일었을 때 그리스도와 사도들 사이에 있었던 이야기를 읽었습니다. 배가 전복될까를 두려워하며 제자들은 구주께로 가서 여쭈었습니다. ‘선생님이여 우리가 죽게 된 것을 돌보지 아니하시나이까’? 제 심정이 바로 그랬습니다! 제가 암에 걸렸는데도 돌보지 아니하시니이까? 우리가 가족을 이루기를 원하는데 돌보지 아니하시니이까? 그런데 이야기를 계속 읽어 나가다가 대답을 찾았습니다. 주님께서는 그들을 보시며 이르셨습니다. ‘믿음이 작은 자들아.’ 그리고 그분은 손을 뻗어 바다를 잠잠하게 하셨습니다.

그 순간 저는 저 자신에게 이렇게 물어야 했습니다. ‘나는 이 기사를 정말 믿는가? 그날 구주께서 바다를 잠잠하게 하셨음을 정말 믿는가? 아니면 그것은 그냥 읽기 좋은 이야기에 불과한가?’ 그 질문에 대한 제 대답은 이러했습니다. 저는 그것을 믿으며, 그분께서 실제로 바다를 잠잠케 하셨음을 알기에, 그분께서 저를 낫게 하실 수 있다는 것을 그 순간 알게 되었습니다. 이전에 저는 피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뜻을 받아들이는 것과 그분을 믿는 신앙을 가져야 하는 필요성 사이에서 그 둘을 조화롭게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그 둘을 별개로 생각했고, 때로는 그 두 가지가 서로 모순된다고 느꼈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반드시 이뤄져야 한다면, 신앙은 왜 가져야 하는가 하는 의문이 들었습니다. 이 경험 후에 저는 신앙을 갖는 것이란, 적어도 제 상황에서는, 그분이 저를 낫게 하실 것이라는 것을 아는 것이 아니라 그분께서 저를 낫게 하실 수 있다는 것을 아는 것임을 깨달았습니다. 그분께서 그렇게 하실 수 있으며, 실제로 이뤄질지는 그분에게 달려 있다는 것을 믿어야 했습니다.

제 삶에서 예수 그리스도께 초점을 맞춘 신앙과 그분의 뜻에 완전히 순종하는 두 가지 원리가 공존하게 되면서 더 큰 위안과 평안함이 제게 찾아왔습니다. 우리 삶에 미치는 주님의 손길을 인식하게 된다는 것은 참으로 놀라웠습니다. 모든 것이 제자리를 찾았으며, 기적들이 일어났고, 계속해서 우리를 위한 주님의 계획이 펼쳐지는 것을 보며 저는 겸손해졌습니다.”

만약 산을 옮기는 것이 주님의 목적을 이루는 것이며 주님의 뜻에 맞는 것이라면, 의로움과 신앙은 분명, 산을 옮기는 데 중요한 몫을 합니다. 병든 자와 귀먼 자, 걷기 힘든 자를 고치시는 것이 주님의 목적을 이루고 주님의 뜻에 맞는 것이라면, 의로움과 신앙은 분명 그러한 치유를 받는 데 중요한 몫을 합니다. 따라서 강한 신앙이 있다고 해서 많은 산이 옮겨지지는 않을 것입니다. 병들고 아픈 모든 사람이 치유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만일 모든 상대되는 것이 축소된다면, 모든 병폐가 제거된다면, 아버지 계획의 주된 목적들은 좌절될 것입니다.

휠체어를 탄 아들과 함께 있는 어머니

필멸의 삶에서 배우게 될 많은 교훈은 경험을 하고 때로 고통을 겪음으로써만 배울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이 필멸의 세상에서 그분의 도움을 받는 가운데 원수와 맞서고 배워야 할 것들을 배우기를 바라시며, 이로써 우리가 궁극적으로 영원한 세상에서 되어야 할 존재가 되기를 기대하시고, 또한 신뢰하십니다.

모든 것의 의미

존과 헤더의 이 이야기는 평범하면서도 놀랍습니다. 이 젊은 부부는 소망의 완전한 밝은 빛과 그리스도를 믿는 굳건한 신앙을 지니고 협착하고 좁은 길을 힘차게 나아가며 충실하게 성약을 지키는 전 세계 후기 성도를 상징합니다.(니파이후서 31:19~20 참조) 존과 헤더는 교회에서 눈에 띄는 지도자 직책에 있지도 않았고, 총관리 역원과 인척도 아니며, 때로는 의심도 하고 두려움도 느끼던 평범한 사람들입니다. 이러한 많은 점에서 그들의 이야기는 상당히 평범합니다.

그런데 이 젊은 부부는 역경과 고난을 통해 영원의 시간을 지나는 데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교훈을 놀라운 방식으로 배우도록 축복받았습니다. 여러분 대다수와 다를 바가 없는 존과 헤더가 단순히 생존하는 것보다 겁을 먹고 물러서지 않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이해하게 되었기에 저는 이 이야기를 여러분과 나눴습니다. 따라서 그들의 경험은 삶과 죽음에 관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무엇인가를 배우고, 살아가고, 어떤 존재가 되어 가는 과정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그들의 이야기는 많은 사람들에게 이미 일어났던 이야기이거나, 또는 앞으로 일어날 수도 있는 이야기입니다. 여러분은 생활 속에서 존과 헤더와 같은 용기와 영적인 관점을 지니고 그와 같은 어려움을 겪어 보았거나, 겪고 있거나,또는 겪게 될 것입니다. 어째서 어떤 사람은 영원의 교훈을 시련과 고통을 통해 배우는 반면, 또 다른 사람들은 비슷한 교훈을 구조와 치유를 통해 배우게 되는지 저는 모릅니다. 저는 모든 이유를 알지는 못하며, 모든 목적을 알지도 못하며, 주님께서 정하신 시간에 대한 모든 것을 알지는 못합니다. 니파이가 그랬듯이 여러분과 저는 “모든 것의 의미를 알지는 못하나이다[.]”(니파이전서 11:17)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것들은 확실하고도 분명히 압니다. 저는 우리가 사랑하시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영으로 낳으신 아들딸임을 압니다. 영원하신 아버지가 바로 행복의 계획을 지으신 분이심을 압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구주이자 구속주이심을 압니다. 예수께서 무한하며 영원한 속죄를 통해 아버지의 계획을 가능하게 하셨다는 것을 압니다. 우리를 위해 “피흘려 고난을 받으[신]”2 구주께서는 “자기 백성을 그들의 연약함을 좇아”(앨마서 7:12) 도우시고 강하게 하실 수 있음을 압니다. 우리가 필멸의 삶에서 누릴 수 있는 가장 위대한 축복 한 가지는 물러서지 않고 자신의 뜻을 “아버지 뜻에 삼키운 바”(모사이야서 15:7) 되게 하는 것임을 압니다.

비록 이러한 축복들이 언제, 어디서, 어떻게, 왜 일어나는지에 대해 모든 것을 알지는 못하지만, 이러한 축복이 실재한다는 것을 저는 증거합니다. 또한, 여러분이 생활 속에서 그리스도를 믿는 굳건한 신앙으로 힘차게 나아간다면, 물러서지 않는 역량을 축복으로 얻게 된다는 것을 저는 압니다.

  1. 닐 에이 맥스웰, “그리스도의 속죄의 피의 효험을 미치사”, 성도의 벗, 1998년 1월호, 22쪽.

  2. “나사렛 예수는 구주며 왕”, 찬송가, 119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