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장: 현대의 교회,” 우리의 유산: 예수 그리스도 후기 성도 교회 약사 (1996), 132–43
“제11장,” 우리의 유산, 132–43
제11장
현대의 교회
에즈라 태프트 벤슨 회장
스펜서 더블유 킴볼 회장이 서거한 후, 에즈라 태프트 벤슨 장로가 교회 회장이 되었다. 그는 재임 초기에 몰몬경을 읽고 공부하는 것의 중요성을 크게 강조했다. 그는 “몰몬경은 인간을 그리스도에게로 데려다 줍니다.”라고 강조하고, 이 책이 “우리 종교의 종석이고, (인간이) 다른 어떠한 책보다도 이 책의 교훈 대로만 살아 간다면 하나님 앞으로 더욱 가까이 갈 수 있다.”1고 역설한 조셉 스미스의 말씀을 재확인했다.
1986년 연차 대회에서, 벤슨 회장은 이렇게 말씀했다. “주님께서는 그분의 종 로렌조 스노우에게 재정적인 구속으로부터 교회를 구원하기 위해 십일조의 원리를 재강조하라는 영감을 주셨습니다. …… 이제, 우리 시대에 주님은 몰몬경을 재강조해야 할 필요성을 계시하셨습니다. …… 여러분에게 약속드리건대, 우리가 매일 그 책을 펴들고 그 교훈에 따라 생활한다면, 하나님께서는 시온의 모든 자녀와 교회에 이제까지 알려지지 않은 축복을 부어 주실 것입니다.”2 전 세계 수백만의 사람들이 그 제의를 받아들여 약속된 축복을 받았다.
벤슨 회장은 교만을 피하는 것의 중요성에 대해서도 강조했다. 1989년 4월 연차 대회에서, 그는 교회 회원들에게 니파이 민족이 멸망 당한 원인으로 “교만”을 꼽고 “교만을 정복하여 그릇의 안을 깨끗이” 할 것을 촉구했다. 그는 “교만의 해독제는 겸손, 곧 온유함과 순종”3이라고 권고했다.
에즈라 태프트 벤슨 회장은 십이사도 정원회의 일원으로 봉사하던 중에 복음 생활의 모범을 보일 수 있는 특별한 기회를 갖게 되었다. 1952년, 데이비드 오 맥케이 회장의 격려에 힘입어, 그는 미국의 드와이트 디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농무부 장관의 직책을 수락했다. 십이사도 정원회의 일원이 미국 대통령의 각료로 일한 것은 교회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는 8년 동안 그 자리에서 일하면서, 미국 정부의 농업 정책을 지도하며 수행해 나가는 전문적인 능력을 지닌 데다 고결한 인품까지 갖추어 국내외로부터 폭넓은 존경을 받았다. 그는 각국의 지도자들과 접촉하는 가운데 전 세계에 있는 교회의 대표들에게 문을 열어 주었다.
벤슨 회장의 지도하에, 교회는 전 세계적으로 중요한 면에서 발전했다. 1987년 8월 28일에, 그는 독일 연방 공화국(서독)에서 프랑크푸르트 성전을 헌납했는데, 1964년에서 1965년까지 프랑크푸르트에 본부를 둔 유럽 선교부의 선교부 회장으로 봉사했던 그로서는 뜻깊은 특권이 되었던 셈이다.
독일 민주 공화국(동독)에 있는 프라이버그 성전은 1985년 6월 29일에 헌납되었다. 이 헌납이 가능할 수 있었던 것은 성전 건축을 가능케 한 기적이 많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1968년 당시 십이사도 정원회 일원이었던 토머스 에스 몬슨 장로는 독일 민주 공화국을 처음 방문했을 때 그곳의 성도들에게 이렇게 선포했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계명에 참되고 충실하게 생활하신다면, 다른 나라의 교회 회원들이 누리는 모든 축복을 여러분도 누릴 수 있게 될 것입니다.” 1975년에 임무 지명을 받아 그 나라에 다시 방문한 몬슨 장로는 그 땅을 헌납하는 자리에서, “아버지시여, 이 시간이 이 땅에 있는 당신의 교회 회원들에게 새로운 날의 시작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라고 영감을 받아 주님께 기도했다. 그는 “성전의 축복을 받기를” 원하는 성도들의 진심어린 소망이 이루어질 수 있기를 간구했다. 그의 영감에 찬 약속과 예언의 뜻이 담긴 헌납 기도 내용은 실현되었다.4
1989년 3월 마지막 날에, 후기 성도 선교사들에게 독일 민주 공화국에 입국이 허락되었다. 1989년 11월 9일에, 많은 성도들의 신앙과 기도가 응답되어 동서 유럽에 놓여 있던 장벽이 붕괴되기 시작했으며, 개종자의 침례와 교회 건물의 건축이 증가되기 시작했다. 1990년 5월 1일에 독일 드레스덴에 새로 완성된 예배당의 일반 공개 때 방문해 보고 교회에 대하여 처음 알게 된 개종자가 있었다. 선교사와 공부를 하고 침례를 받은 지 일주일도 되지 않아, 그는 몰몬경을 처음부터 끝까지 두 번 읽었으며, 복음의 진실성에 대한 강한 간증을 받았다.5
1991년 6월 24일, 모스크바에서 있었던 몰몬 태버내클 합창단의 연주회를 마친 후에 열린 연회에서, 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공화국의 부통령은 그 나라에서 공식적으로 교회를 인정한다는 발표를 했다. 이로써 교회는 이 거대한 공화국 내에서 대중적 기반을 얻게 되었다. 1990년대에, 수많은 소비에트 연방 국가들과 중부 및 동부 유럽 제국들, 즉 알바니아, 아르메니아, 벨라루스, 불가리아, 에스토니아, 헝가리, 라트비아, 리투아니아, 루마니아, 러시아 및 우크라이나 등이 복음 전파를 위해 헌납되었다. 이들 국가에서 임대 또는 신축 교회 시설물이 자리잡기 시작했으며, 많은 사람이 충만한 복음의 간증을 얻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이래로 폴란드에 처음으로 세워진 후기 성도 집회소의 헌납식에서, 십이사도 정원회의 러셀 엠 넬슨 장로는 집회소가 “고통받는 영혼들에게 평화의 대피소가 되고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들에게 희망을 주는 안식처”6가 될 수 있기를 기도했다. 이 축복은 많은 나라에서 복음의 평화와 기쁨을 찾은 성도들의 생활에서 성취되고 있다.
교회의 회원 수가 급격히 증가하고 벤슨 회장이 선교 사업을 강조한 결과, 그의 임기 말에는 약 48,000명의 선교사들이 295개 교회 선교부에서 봉사하기에 이르렀다.
또한 그의 재임 기간 동안에, 교회 복지 프로그램을 통해 전 세계의 다른 종교를 믿는 회원들에 대한 인도주의적 원조를 더욱 늘려 나가기 시작했다. 이러한 원조는 고통을 구제하고 장기적인 면에서 자립심을 키워 주는 것이었다. 많은 양의 식량, 의복, 의료품, 담요, 현금 및 기타 물품이 가난한 사람들에게 전달되었으며, 보건 사업, 문맹 퇴치 교육 및 기타 봉사 업무를 펴는 장기적인 사업이 제공되었다. 이 자선 사업은 오늘날 세계 여러 곳에 있는 수많은 사람들을 위해 시행되고 있다.
연로하여 병약해진 데다 사랑하는 아내 플로라를 잃고 상심한 벤슨 회장은 주님의 선지자로서의 사명을 담대하게 마치고 1994년 5월 30일에 94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그의 뒤를 당시 십이사도 정원회의 회장으로 봉사하던 하워드 더블유 헌터 장로가 승계했다.
하워드 더블유 헌터 회장
1994년 6월 6일, 회장으로 부름받은 뒤 열린 첫 번째 기자 회견에서, 하워드 더블유 헌터 회장은 그의 교회 관리와 관련하여 몇 가지 중요한 주제를 발표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저는 모든 교회 회원들에게 주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와 모범, 특히 주님께서 보여 주신 사랑과 소망과 자비에 그 어느 때보다도 더 관심을 가지고 생활하시기를 권고드립니다.
저는 우리가 서로 더욱 친절하고, 더욱 예의 바르고 더 겸손하고 인내하고 용서하는 마음으로 대하기를 간구합니다.”
그는 또한 교회의 회원들에게 촉구했다. “주님의 성전을 회원 됨의 위대한 상징으로서 그리고 가장 성스러운 성약을 위한 거룩한 장소로 정하십시오. 제 마음속의 가장 깊은 바람은 교회의 모든 회원이 성전에 가기에 합당하게 되는 것입니다.”7 수많은 교회 회원들이 이러한 메시지를 그들의 생활에 실천하여 더욱 깊이 있는 영성으로 축복받았다.
헌터 회장은 잘 준비된 정신의 소유자였다. 이는 교회에 큰 가치를 가져다주었다. 1970년대 후반에 그는 자신의 모든 기량을 요구하는 임무를 지명 받았다. 그는 성지에 교회에서 역점을 둔 브리검 영 대학교 예루살렘 근동 연구 센터를 설립할 대지를 구입하기 위해 협상하고 이 건물의 건축을 감독하는 등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이 센터는 감람 산에서 뻗어나온 스코프스 산에 위치해 있다. 그곳에는 이 선택 받은 땅과 그 백성들(유대인과 아랍인), 그리고 예수님과 고대 선지자들이 걸었던 장소에 대하여 깊이 있게 연구하는 학생들이 거주하고 연구 활동을 하는 건물이 들어서 있다. 이 센터는 그 안에서 연구하는 사람들에게 큰 도움을 주고 있으며, 건물의 아름다움은 그곳을 방문하는 사람들에게 영감을 주고 있다.
헌터 회장은 또한 하와이 라이에에 있는 브리검 영 대학교-하와이 캠퍼스에 인접해 있는 폴리네시안 문화 센터의 개발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그는 교회에서 소유하고 운영하는 이 문화 센터의 재단 이사장으로 재직했다. 이 센터는 42에이커에 달하는 방대한 규모로 방문자들의 많은 사랑을 받아왔다. 이 문화 센터는 폴리네시아의 문화를 보전하고 학생들에게 취업의 기회를 주고자 하는 취지에서 세워진 것이었다. 1963년에 세워진 이 아름다운 곳은 현재 매년 백만 명 가까운 사람들이 방문하여, 폴리네시아 제도의 음악과 춤과 미술품과 수공예품을 즐기고 있다.
헌터 장로는 교회 회장이 되기 전에, 현재의 가족 역사부의 전신인, 유타 계보 협회의 회장으로 8년 간 봉사했다. 이 시기에, 그 협회에서는 1969년에 개최된 기록에 대한 세계 대회를 후원했는데, 그 자리에서 그는 이 대회를 통해 “교회에 대한 인식이 대단히 좋아졌고 온 세계에 우리의 사업을 위한 문호가 열렸다.”8고 말했다. 그는 산자와 죽은 자 모두에게 크나큰 사랑을 보였으며, 우리 모두가 하나의 대가족에 속해 있다고 자주 가르쳤다. 그는 그리스도와 같은 사랑을 지닌 사람으로 알려졌다.
헌터 회장은 일생 동안 많은 시련을 겪었다. 그는 신앙과 강인함으로, 위중한 건강상의 문제와 장기간의 만성 질병과 첫 번째 부인과의 사별 및 기타 다른 여러 가지 어려움을 견뎌내었다. 이러한 장애에도 불구하고 그는 적극적으로 주님께 봉사했으며, 교회의 업무를 관장하며 수없이 여행하고 많은 일을 했다. 그의 모범은 다음과 같은 그의 메시지와 일치했다. “빗나간 자녀 때문에 가정에서 고난을 당하고 있다면, 재정적인 곤란과 감정적인 긴장으로 가정과 행복이 위협당한다면, 생명이나 건강을 잃어야 하는 경우, 여러분의 영혼에 평안이 있기를 빕니다. 우리는 감당할 수 있는 능력 이상의 시험을 받지는 않습니다. 그러한 우회하는 길과 절망은 주님께 이르는 협착하고 좁은 길과 같습니다.”9
헌터 회장이 1994년 11월 11일에 멕시코의 멕시코시티에서 교회의 2,000번째 스테이크의 창설을 관장한 것은 교회 역사에서 중요한 이정표가 되었다. 그곳에 모인 회중에게 그는 이렇게 말했다. “주님은 그분의 종을 통하여 이 기적을 이루셨습니다. 이 사업은 힘차고 활기 있게 앞으로 계속 나아갈 것입니다. 선조 리하이와 그의 자녀에게 주신 그들의 후손에 관한 약속은 멕시코에서 성취되었으며 계속되어 나갈 것입니다.”10 헌터 회장이 총관리 역원으로 봉사한 기간 동안에 라틴 아메리카의 교회는 극적으로 성장했었다. 그가 교회 회장이 되었을 때, 멕시코, 브라질 및 칠레 등의 국가에는 150만명 이상의 후기 성도들이 있었으며, 그것은 당시 유타에 살고 있던 교회 회원들보다 더 많은 수였다.
헌터 회장은 단 9개월 동안 교회 회장으로 봉사했으나, 그의 자비심과 오래 참음과 그리스도와 같은 생활을 하는 훌륭한 모범으로 그를 기억하는 성도들에게 강력한 영향을 미쳤다.
고든 비 힝클리 회장
헌터 회장이 운명한 다음 고든 비 힝클리 장로가 교회 회장이 되었을 때, 그는 제일회장단의 중점 사항이 무엇이 될 것이냐는 질문을 받았다.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나아가세! 이것에 초점을 맞추겠습니다. 그렇습니다. 저희는 앞서 사셨던 분들이 더욱 크게 이루셨던 위대한 사업들을 계속해 나아가자는 것에 역점을 둘 것입니다. 가족의 가치를 세우십시오. 그렇습니다. 교육에 온 힘을 모으십시오. 그렇습니다. 온 세상 사람들에게 인내와 관용의 정신을 보이십시오.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십시오.”11
교회의 지도자로서 힝클리 회장이 광범위하게 경험을 쌓은 것은 제일회장단에서 봉사하는 데 좋은 준비가 되었다. 그는 1961년에 십이사도 정원회의 일원으로 지지되었으며, 1981년부터는 스펜서 더블유 킴볼 회장, 에즈라 태프트 벤슨 회장, 하워드 더블유 헌터 회장의 보좌로 봉사했다. 제일회장단 보좌로 봉사하는 동안에, 회장들이 연로하였기 때문에 그는 매우 막중한 임무를 수행했다.
젊은 시절, 고든 비 힝클리 장로가 영국에서 선교 사업을 하고 있었을 때, 그가 받은 몇 가지 권고의 말씀은 어려운 책무를 수행해 나간 그 기간에 그에게 큰 힘이 되었다. 다소 실망을 하고 있던 그는 부친에게, “저는 제 시간과 아버지의 돈을 낭비하고 있습니다. 제가 왜 여기에 있어야 하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라고 편지를 올렸다. 얼마 후에 그는 아버지로부터 다음과 같은 짧은 서신을 받았다. “사랑하는 고든, 얼마 전에 네가 보낸 편지를 받아 보았다. 단 한 가지만 충고하마. 네 자신을 잊고 일하러 나가거라. 사랑을 전하며 아버지가.”
힝클리 회장은 그 당시의 일을 이렇게 말했다. “다음 날 아침, 우리는 다음과 같은 주님의 위대한 말씀을 읽었습니다.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마가복음 8:35>). 저는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아버지의 편지와 연결되어 그 말씀, 그 약속은 저를 이층으로 올라가 …… 무릎을 꿇고, 저 자신을 잊어버리고 일하러 가겠노라고 주님과 성약을 맺게 했습니다. 제가 그때 그러한 결심을 한 이후로 선한 모든 일이 제게 일어났습니다.”12
힝클리 회장은 항상 하나님과 미래를 믿는 불굴의 낙천주의자로 유명하다. 힝클리 회장의 다음과 같은 말은 그가 가족과 친구들, 그리고 지인들에게 가장 많이 되풀이 했던 말이다. “만사가 잘 될 것입니다. 계속 노력하십시오. 믿음을 가지십시오. 낙담하지 마십시오. 행복한 사람이 되십시오. 만사가 잘 될 것입니다.”13
어떤 기자가 교회가 당면하고 있는 가장 큰 어려움이 무엇이냐고 질문하자,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우리가 당면한 가장 중대한 문제요 또한 가장 훌륭한 문제는 성장에 따르는 문제입니다.” 그는 교회가 크게 성장함에 따라 더 많은 성전을 포함하여, 더 많은 건물이 필요하게 된다고 설명한다. “지금은 성전 건축 면에서 교회 역사상 가장 위대한 시대입니다. 성전 건축이 현재와 같은 추진력으로 시행되어 나갔던 적은 한번도 없었습니다. 우리는 47개의 성전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설계부터 건축까지의 과정에 있는 성전은 13개입니다. 우리는 성전을 계속해서 지을 것입니다.”14 교회가 계속 성장해 감에 따라 몰몬경을 여러 나라 말로 번역할 필요성이 생겼다.
힝클리 회장은 교회의 극적인 성장에 개인적으로 연관된 경험이 많다. 1967년, 일본 오사카에서 열린 대회에 참석했을 때, 그는 많은 젊은이들이 섞여 있는 청중을 보면서 이렇게 말했다. “여러분에게서 나는 일본 내의 교회의 미래를 봅니다. 위대한 미래를 봅니다. 우리는 겨우 시작 단계에 있는 상태입니다. 그러나 저는 오랫동안 느껴왔던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는데, 그것은 이 위대한 나라에 시온의 스테이크가 설 날이 그리 멀지 않았다는 것입니다.”15 한 세대도 지나지 않아, 일본에는 100,000여 명의 후기 성도와 수많은 스테이크와 선교부, 지방부 및 성전이 들어섰다.
힝클리 회장은 또한 필리핀에서의 교회 성장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갖고 있었다. 이 나라에서는 1973년, 마닐라에 스테이크가 처음 세워졌다. 20년 후, 그가 교회 회장이 되었을 때는 300,000명 이상의 필리핀 회원들이 복음의 축복을 받았으며, 그 나라에 성전도 들어섰다. 힝클리 회장은 한국과 중국 및 동남 아시아를 포함한 아시아 각국에서의 교회의 성장에도 큰 관심을 보여 왔다.
아시아에서 영성을 지닌 회원들이 얼마나 많은가는 필리핀의 어느 스테이크에서 새로운 스테이크 회장을 부르도록 지명받은 한 총관리 역원의 경험만으로도 잘 알 수 있다. 여러 명의 신권 소유자들을 접견하고 난 그는 이십 대 중반의 형제를 스테이크 회장으로 불러야겠다는 영감을 받았다. 그는 젊은 형제에게 옆방으로 가서 잠시 시간을 갖고 보좌들을 선택하라고 말했다. 그 형제는 30초만에 돌아 왔다. 총관리 역원은 그가 잘못 안 것이 아닐까 하고 생각했으나, 새로운 스테이크 회장은 이렇게 말했다. “아닙니다. 저는 주님의 영을 통해서 제가 스테이크 회장이 되리라는 것을 한 달 전에 알았습니다. 저는 이미 제 보좌들을 선택해 놓았습니다.”
전 세계에 교회 설립을 돕기 위해 그처럼 많은 일을 한 힝클리 회장이 그의 재임 기간에 다음과 같은 말씀을 한 것은 오히려 당연한 일이다. “통계 전문가들은 현재 추세가 계속된다면, 앞으로 몇 개월 남지 않은 1996년 2월에는 미국 밖의 회원들이 미국 안의 회원들보다 더 많아질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변화는 참으로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그것은 엄청난 노력의 결실을 의미하는 것입니다.”16
힝클리 회장이 교회 관리에서 가장 역점을 두고 있는 것은 훌륭한 가정 생활의 중요성인데, 그것은 흔히 가족이 중요하다는 것을 지지하지 않는 이 세상에서 더욱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그의 지도하에, 제일회장단과 십이사도 평회회는 가족을 주제로, 세상에 특별 선언문을 발표했는데, 그 일부는 다음과 같다.
“가족은 하나님이 제정하여 주신 것이다. 남녀간의 결혼은 그의 영원한 계획에서 반드시 필요한 요소이다. 자녀들은 결혼의 테두리 안에서 태어나 결혼 서약을 완전하고 성실하게 지키는 부모에게 양육받을 권리가 있다. 가족 생활의 행복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근거를 둘 때 가장 훌륭하게 성취될 수 있다. ……
우리는 순결에 관한 성약을 어기거나, 배우자나 자녀를 학대하거나, 가족의 책임을 이행하지 않는 사람들은 언젠가 하나님 앞에 책임지게 되리라는 것을 경고한다. 더 나아가서 우리는 가족이 붕괴할 때 개인과 지역 사회와 국가에 고대와 현대의 선지자들이 예언했던 재난이 닥칠 것이라는 사실을 경고한다.”17
1995년 4월 연차 대회에서, 힝클리 회장은 훌륭하게 봉사한 교회의 지역 대표들이 1995년 8월 15일에 해임되고, 새로운 직분, 곧 지역 관리 역원이 신설될 것이라고 발표했다. 지역 관리 역원은 스테이크 대회를 감리하고, 스테이크를 재조직 또는 창설하며, 스테이크 회장, 선교부 회장 및 지방부 회장을 훈련시키는 책임을 맡는다. 이 새로운 직책은 교회 지도자들이 회원들과 더욱 가깝게 생활하면서 일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전 세계적으로 교회의 성장을 촉진시키는 일을 맡는다.
어느 총관리 역원은 모든 성도들이 힝클리 회장을 어떻게 가장 잘 보필할 수 있는지 설명했다. “선지자요, 선견자요, 계시자요, 감리 대제사이자 예수 그리스도 후기 성도 교회 회장이라는 거룩한 직분에 부름받은 그분을 지지하기 위해 우리가 행할 수 있는 가장 최상의 일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나아가세, 나아가세, 나아가세!’라고 말하며 중단하지 않고 계속 전진하는 것이다.”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