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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장: 오하이오 주 커틀랜드에서 왕국을 건설함


“제3장: 오하이오 주 커틀랜드에서 왕국을 건설함,” 우리의 유산: 예수 그리스도 후기 성도 교회 약사 (1996), 20–36

“제3장,” 우리의 유산, 20–36

제3장

오하이오 주 커틀랜드에서 왕국을 건설함

선지자의 오하이오 주 도착

1831년 2월의 어느 추운 날, 선지자 조셉 스미스와 당시 쌍둥이를 임신한 지 6개월 된 그의 아내 에머 스미스는 뉴욕 주에서 오하이오 주 커틀랜드까지 장장 400킬로미터나 되는 거리를 여행했다. 그들은 썰매 마차를 타고 길버트 앤드 휘트니 상점에 도착했다. 다음 발췌문은 뉴얼 케이 휘트니와 선지자와의 만남에 대해 기록한 것이다.

“[썰매 마차]에 타고 있던 남자 가운데 젊고 용감해 보이는 사람이 내리더니 계단을 성큼성큼 뛰어 올라가 상점 안으로 들어간 뒤 나이가 더 젊어 보이는 사람이 서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뉴얼 케이 휘트니씨! 당신이 바로 그분이군요!’ 그는 이렇게 말하면서 마치 오래전부터 알고 지내던 사람처럼 다정하게 손을 내밀었다.

‘잘 몰라 뵙겠는데, 누구신지요?’ 하고 그 사람이 상대의 내민 손을 무의식적으로 잡으면서 물었다. ‘저는 선생님의 성함을 잘 모르겠는데요.’

‘저는 선지자 조셉입니다. 당신이 이곳에서 기도하셨지요? 이제 제게서 무엇을 원하십니까?’ 하고 그 낯선 사람이 미소를 머금고 말했다.”1

사실 얼마 전에 뉴얼과 그의 아내인 엘리자베스는 열렬한 기도로써 주님께 인도를 간구한 적이 있었다. 그때 기도에 대한 응답으로 성령이 임하고 구름이 그들의 집에 그림자를 드리우더니, 그 구름 속에서 “주님의 말씀을 받을 준비를 하라. 그 말씀이 임할 것이니라!”라고 하는 음성이 들렸었다.2 그런 일이 있은 직후에 인디언들을 가르치도록 부름받은 선교사들이 커틀랜드에 온 데다 이제는 선지자까지 도착한 것이었다.

뉴얼의 손자인 올슨 에프 휘트니는 후에 이 사건에 대한 느낌을 이렇게 이야기했다. “이 탁월한 분인 조셉 스미스는 어떤 능력이 있길래 전에 한번도 본 적이 없는 사람을 알아보았을까? 왜 할아버지인 뉴얼 케이 휘트니는 그분을 알아보지 못했을까? 그것은 바로 조셉 스미스가 선견자, 그것도 훌륭한 선견자이기 때문이었다. 그는 실제로 커틀랜드로 오는 문제에 대해 수백 킬로미터나 떨어진 곳에서 무릎 꿇고 기도하던 중에 할아버지인 뉴얼 케이 휘트니를 본 적이 있었다. 기적과 같은 일이지만 거짓이 아니다!”3

선지자가 옴으로써 주님의 말씀이 커틀랜드에 임하게 되었으며, 이곳에서 교회의 중요한 요소들이 많이 자리를 잡았다. 교회 행정의 기본적인 조직이 나타났고, 선교사들이 외국으로 파송되었으며, 첫 번째 성전이 건립되었고 중요한 계시가 많이 주어졌다. 성도들은 심한 핍박을 받았으며, 그들이 신앙과 용기와 주님의 기름 부음 받은 선지자를 따르고자 하는 의지를 나타내 보일 것인지를 알아보기 위한 시련도 주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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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틀랜드 성전

교회 활동의 두 중심지

성도들은 오하이오 주로 집합하라는 부름을 받음과 동시에 그들이 시온을 건설할 수 있을 때를 고대하기 시작했다. 1831년 6월, 선지자 조셉 스미스는 자신과 시드니 리그돈과 28명의 다른 장로들에게 미주리 주로 선교 사업을 떠나 그곳에서 교회의 다음 대회를 열라고 지시하는 계시를 받았다.( 교리와 성약 52편 참조) 미주리는 당시 미 합중국의 서부 변경에 있었으며 커틀랜드로부터 서쪽으로 약 1,600킬로미터가 넘는 곳에 있는 지역이었다. 주님은 조셉에게 미주리 주 잭슨 군에서 성도들이 유산을 받고 시온을 세우게 될 것이라는 계시를 주셨다.

조셉과 다른 선교사들과 얼마 후에 뉴욕 주 콜스빌에서 온 성도들 모두는 1831년 여름 동안에 잭슨 군으로 여행하여 정착촌을 세우기 시작했다. 선지자와 다른 지도자들이 커틀랜드로 돌아왔지만 교회의 많은 회원들은 미주리 주에 정착했다.

1831년부터 1838년 사이에 교회 회원들이 모인 중심지는 두 곳이었다. 조셉 스미스, 십이사도 평의회의 회원들, 많은 성도들이 오하이오 주 커틀랜드 지역에서 생활하는 한편, 교회의 다른 많은 성도는 임명된 신권 지도자들의 관리 하에 미주리 주에서 생활하였다. 중요한 사건들이 두 지역에서 같은 시기에 발생했으며, 교회의 역원들은 필요할 때마다 한 지역에서 다른 지역으로 여행하였다. 여기에서는 이 7년 동안 커틀랜드에서 일어난 사건들을 먼저 다룬 다음, 미주리에서 같은 기간에 일어난 사건들을 다룰 것이다.

오하이오 주로 집합하는 과정에서 성도들이 치른 희생

오하이오 주로 온 많은 성도들은 큰 희생을 치르었다. 가족들로부터 의절 당한 사람도 있었고, 예전 친구들로부터 버림받은 사람들도 있었다. 브리검 영은 선지자의 집합하라는 부름에 응함으로써 어떤 희생을 치렀는지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우리가 [1833년 9월에] 커틀랜드에 도착했을 당시, 저에게는 돌보아야 할 자녀가 둘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전부였습니다. 저는 홀아비였습니다. 만일 성도들과 함께 집합했던 사람들 가운데 저보다 더 가난한 사람이 있었다면 그는 그야말로 완전히 아무것도 없는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 ‘브리검 영 형제님, 신발은 있었습니까?’ 아니오, 빌린 장화 한 켤레 말고는 없었습니다. 입은 지 3, 4년 되는, 손으로 만든 외투 말고는 겨울에 입을 옷도 없었습니다. ‘바지는요?’ 없었습니다. ‘어떻게 했습니까? 바지도 없었단 말입니까?’ 네. 바지 하나를 구할 때까지 빌려 입었습니다. 저는 여행하면서 전도하는 가운데 제 모든 재산을 다 썼습니다. 전도를 시작할 당시만 해도 약간의 재산이 있었습니다. …… 여행하면서 전도하는 동안 제게는 아무것도 남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조셉이 ‘나아가십시오.’라고 했을 때 저는 최선을 다해 나아갔습니다.”4

다른 많은 충실한 성도들이 커틀랜드로 왔을 때, 이미 이곳에 와 있던 성도들이 그들을 맞아 주었으며 얼마 되지 않았지만 그들이 가진 것을 기꺼이 나누어 주었다. 그처럼 용감무쌍한 사람들이 교회의 눈부신 성장과 발전의 초석을 놓았던 것이다.

커틀랜드 지역에서 받은 계시들

선지자 조셉은 커틀랜드 지역에 사는 동안 많은 계시를 받았으며, 그 가운데 65가지가 교리와 성약에 포함되어 있다. 이들 계시에서는 복지, 표적을 구하는 것, 도덕적인 행위, 음식 섭취의 원리, 십일조, 신권의 권세, 선지자의 역할, 영광의 세 가지 등급, 선교 사업, 재림, 헌납의 법 및 다른 많은 주제와 관련된 주님의 뜻이 가르쳐지고 있다.

조셉 스미스 역 성경

1830년 6월, 조셉 스미스는 하나님의 지시 아래 킹 제임스(영어) 판 성경을 영감에 따라 수정하는 작업을 시작했다. 이 작업은 조셉 스미스 역 성경으로 알려져 있다. 1830년 6월부터 1833년 7월 사이에 선지자는 이 성경에 많은 변경을 가했는데, 여기에는 성경의 용어를 수정하고 교리를 분명히 하고 역사 및 교리적 자료를 복원하는 일 등이 포함되었다.

조셉은 이 작업을 하는 동안 자주 성경 구절을 깊이 생각하다가 주님께 질문하곤 했는데 그 응답으로 많은 계시를 받았다. 조셉과 시드니 리그돈이 요한복음 5장 29절을 번역한 뒤인 1832년 2월 16일에도 그러한 계시 하나가 주어졌다. 그들은 이 구절에 대해 깊이 생각했으며, “주께서 [그들]의 이해의 눈을 만지시니, 우리의 이해의 눈이 열리고 주의 영광이 주위에 두루 비[쳤던]”( 교리와 성약 76:19) 일도 있었다. 그들은 역사상 있었던 위대한 시현 중 하나를 받았던 것이다. 그것이 현재 교리와 성약 76편에 기록되어 있다. 그들은 아버지와 아들을 보았으며, 하나님의 자녀들의 거룩한 운명에 대해서 배웠고, 어떤 사람이 세 가지 영광의 왕국에 거하게 되는가에 대한 영원한 진리들을 배웠다.

계시들을 출판함

1831년 11월에 오하이오 주 하이럼에서 열린 특별 대회에서 교회 회원들은 선지자에게 주어진 약 70가지의 계시를 담은 계명의 책 출판 문제를 가결했다. 이 대회 동안에 주님은 조셉 스미스에게 계명의 책의 서문이자 부록이 되는 계시를 주셨다.(이것이 후에 교리와 성약 1편133편이 되었다.)

책을 인쇄하는 임무가 미주리 주 잭슨 군에서 인쇄 기기를 갖고 있던 윌리엄 더블유 펠프스에게 주어졌다.(계명의 책에 관한 더 자세한 내용은 40쪽을 참조한다.) 계명의 책에 포함된 계시들은 다른 계시들과 함께 후에 교리와 성약이라는 한 권의 책으로 인쇄되었는데, 1835년 커틀랜드에서 출판되었다. 선지자 조셉이 약간의 수정을 가한 몰몬경 제2판도 커틀랜드에서 인쇄되었다.

교회가 조직된 지 몇 개월 후에 주님은 선지자의 아내인 에머에게 거룩한 찬송가를 선곡하는 일을 시작하도록 명하심으로써 교회에서의 음악의 비중을 강조하셨다.( 교리와 성약 25:11 참조) 그녀가 편집한 찬송가가 커틀랜드에서 출판됨으로써 성도들이 다음과 같이 주님의 약속된 축복을 받을 수 있는 길이 열렸다. “이는 나의 영혼이 마음의 노래를 기뻐함이라, 그러하도다. 의인의 노래는 내게 기도가 되나니, 그들의 머리 위에 축복으로 응답하리라.”( 교리와 성약 25:12)

선지자 학교

1832년 12월과 1833년 1월에, 선지자 조셉은 나중에 교리와 성약 88편이 된 계시를 받았다. 이 계시에서는 다른 내용들과 함께, 형제들에게 복음 교리와 원리, 교회 업무 및 기타 사항들을 가르치기 위해 “선지자 학교”( 교리와 성약 88:127)를 설립하라는 지시가 주어졌다.

1833년 겨울 동안, 선지자 학교가 자주 열렸으며, 조셉과 에머 스미스는 형제들이 습관적으로 담배를 피우는 문제, 특히 모임 중에 담배 연기가 자욱해지고, 씹는 담배 때문에 주위가 불결해지는 문제에 대해 염려하게 되었다. 조셉 스미스는 이 문제에 대해 주님께 여쭌 결과, 지혜의 말씀이라고 하는 계시를 받았다. 이 계시에서는 몸과 영을 돌보라는 주님의 계명이 주어졌으며, 이 계명에 순종하는 사람들은 “지혜와 지식의 큰 보화, 참으로 감추인 보화도”( 교리와 성약 89:19) 찾는 영적인 축복을 받게 될 것이라는 약속을 받았다. 지혜의 말씀에는 당시 의학계나 과학계에 알려져 있지 않았던 건강에 관한 내용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것은 후에 매우 유익한 것으로 밝혀졌으며, 술이나 담배를 취하지 않도록 권고하기에 이르렀다.

헌납의 법

1831년, 주님은 의롭게 따르면 가난한 후기 성도들의 생활에 축복이 될 것이라는 영적, 세상적인 제도인 헌납의 법에 관해 여러 가지 점들을 밝혀 주시기 시작하셨다. 이 율법에 따라 교회 회원들은 모든 재산을 교회의 감독에게 헌납, 즉 양도 증서를 바치라는 권고를 받았다. 대신 감독은 회원들에게 유산, 즉 청지기 직분을 부여해 주었다. 가족들은 최선을 다해 청지기 직분을 수행하였다. 연말에 가서 재산이 불어난 사람은 이것을 궁핍한 사람들을 돌보는 데 사용하도록 감독에게 불어난 만큼을 바쳤다. 주님으로부터 교회의 초대 감독으로 부름받은 사람은 에드워드 파트리지였다.

헌납의 법은 회원들을 영적으로 강화하고 경제적인 면에서 비교적 평등하게 함으로써 탐욕과 가난을 제거하기 위한 원리와 방법들로 구성되어 있다. 일부 성도들은 이 법을 잘 지키며 생활함으로써 자신과 다른 사람들에게 축복이 되기도 했으나, 이기적인 욕망을 이기지 못한 회원들도 있었기 때문에, 결국 이 율법은 교회에서 철회되고 말았다. 1833년에 주님은 십일조의 법을 계시해 주셨으며(교리와 성약 119편 참조), 이는 오늘날 교회의 재정의 법으로 지속되고 있다.

신권의 강화

신권 직분에 대한 계시

교회 회원의 수가 늘어남에 따라 선지자는 계속해서 신권 직분에 대한 계시를 받았다. 그는 주님의 지시에 따라 자신을 회장으로 하고 시드니 리그돈과 프레드릭 지 윌리엄스를 보좌로 하는 제일회장단을 조직했다. 그는 또한 십이사도 정원회와 칠십인 제일 정원회도 조직했다. 그는 감독과 감독 보좌, 대제사, 축복사, 고등 평의회, 칠십인 및 장로를 부르고 성임했다. 또한 교회의 첫 번째 스테이크를 조직했다.

침례를 받은 지 얼마 되지 않아 경험이 없던 회원들은 봉사하라는 부름에 몹시 당황하는 경우도 있었다. 예를 들면, 뉴얼 케이 휘트니는 에드워드 파트리지가 미주리 주 성도들의 감독으로 부름받았을 때 커틀랜드에서 봉사하도록 1831년 12월에 교회의 두 번째 감독으로 부름받았다. 뉴얼은 바로 선지자로부터 주님께서 계시로써 그에게 부름을 주셨다는 말을 듣기는 했지만 그 직분이 요구하는 바를 잘 수행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래서 선지자는 그에게 “스스로 나아가서 아버지께 간구하십시오.”라고 권고했다. 뉴얼은 나아가 무릎을 꿇고 겸손하게 간구하는 동안 하늘로부터 “너의 힘이 내 안에 있느니”5라고 하는 음성을 들었다. 그는 그 부름을 받아들이고 18년 동안 감독으로 봉사했다.

시온 진영에서의 지도자 훈련

교회는 시련을 거치고 경험을 쌓고 충실한 것으로 입증되었으며 어떤 상황에서도 주님과 선지자에게 진실하게 생활할 신권 지도자들을 매우 필요로 했다. 시온 진영이 행군하게 됨에 따라 힘든 상황에서 순종하는지를 증명할 수 있고, 선지자 조셉 스미스로부터 개인적으로 훈련 받을 수 있는 기회가 마련되었다.

시온 진영은 종교적인 신념 때문에 심하게 핍박받고 있던 미주리 주의 성도들을 돕기 위해 조직되었다. 많은 성도가 집에서 쫓겨났다.(더 자세한 내용은 39~45쪽 참조) 1834년 2월 24일, 주님은 조셉 스미스에게 일단의 남자들을 조직하여 커틀랜드에서 미주리까지 행군해 가서 성도들에게 그들의 땅을 회복시켜 주는 일을 돕게 하라는 계시를 주셨다.( 교리와 성약 103편 참조) 주님은 그분이 그들과 함께할 것이며 그들의 “모든 승리와 영광은” 그들의 “부지런함과 충실함 그리고 신앙의 기도를 통하여”( 교리와 성약 103:36) 이루어질 것이라고 약속하셨다. 십이사도 정원회와 칠십인 정원회의 초기 회원들은 대부분 이 경험을 통해 장래의 책임을 수행할 준비가 되었다.

시온 진영은 1834년 5월 6일에 오하이오 주 뉴 포티지에서 공식적으로 조직되었다. 최종적으로 이 시온 진영에는 207명의 남자와 11명의 여자와 11명의 어린이들이 포함되었는데, 선지자는 이들을 10명과 50명씩 부대로 분리하여 각 부대마다 대장을 뽑도록 지시하였다. 신병인 조셉 홀브룩은 이 진영이 “고대 이스라엘의 반차에 따라서”6 조직되었다고 보고했다. 그들은 45일 동안 약 1,600킬로미터 이상 떨어진 미주리 주 클레이 군으로 함께 행군했다. 그들은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가능한 한 빨리 행군했다. 음식을 충분히 먹는다는 것은 매우 힘든 일이었다. 남자들의 경우에는 조악한 빵과 고약한 냄새가 나는 버터와 옥수수 죽과 진한 꿀과 날 돼지고기와 부패한 햄과 구더기까지 끓는 베이컨과 치즈 등을 제한된 양밖에 먹을 수 없는 때도 자주 있었다.

후에 사도가 된 조지 에이 스미스는 배고픔을 자주 느꼈다고 기록했다. “너무 지치고 배고프고 졸려서 길을 걷는 동안 시원한 그늘을 드리운 나무가 서 있는 옆으로 아름다운 개울물이 흐르고 맛있게 보이는 빵 한 조각과 우유 한 병이 우물가에 펼쳐진 보자기 위에 놓여 있는 꿈을 꾸기까지 했다.”7

이 진영은 영성과 계명에 대한 순종을 많이 강조했다. 주일이 되면 그들은 모임을 하고 성찬을 나누었다. 선지자는 왕국의 교리들을 자주 가르쳤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계셨으며, 그분의 천사들이 우리를 앞서 갔으며, 우리 작은 부대의 신앙은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천사들이 우리와 함께 하고 있었다는 것을 압니다. 바로 우리가 그들을 보았기 때문입니다.”8

그러나 시온 진영의 어려운 문제들 때문에 시온 진영에 참여한 사람들은 많은 희생을 치르기 시작했다. 이 정련하는 과정 때문에 불평하는 사람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들은 순종심이 없는데다 자주 자신들의 문제로 조셉을 비난했다. 5월 17일에 선지자는 반항적인 마음을 가진 사람들에게 “주님 앞에 스스로를 낮추고 하나가 되어 벌을 받는 일이 없도록”9 하라고 권고했다.

시온 진영은 6월 18일에 미주리 주 클레이 군에 도착했다. 그러나 미주리 주의 주지사인 대니얼 던클린은 성도들로 구성된 군대가 집에서 쫓겨난 교회 회원들의 집을 다시 찾아 주는 일을 돕겠다는 약속을 지키려 하지 않았다. 시온 진영의 일부 사람들에게는 이 부대의 목표가 실패로 돌아간 것이 그들의 신앙을 마지막으로 시험하는 계기가 되었다. 실망하고 분노한 일부 사람들은 공개적으로 반항의 뜻을 나타냈다. 결국 선지자는 주님께서 그들에게 파괴적인 벌을 내리실 것이라고 경고했다. 얼마 있지 않아서 콜레라라는 처참한 역병이 시온 진영에 퍼졌다. 콜레라가 끝나기 전에 조셉 스미스를 포함해 이 진영의 3분의 1이나 되는 사람들이 감염되어 이후에 14명이 숨졌다. 7월 2일, 조셉은 다시 주님 앞에 스스로를 낮추고 그분의 계명을 지키겠다는 성약을 맺도록 진영에 경고하고, 그렇게 하면 그 순간부터 역병이 사라지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사람들이 손을 들어 성약을 맺었으며, 역병은 끝나게 되었다.

7월 초에 진영의 대원들은 선지자에 의해 명예롭게 해산되었다. 이 여행의 결과로 누가 주님 편에 있고 누가 지도자 직분에서 봉사하기에 합당한지가 판명되었다. 선지자는 후에 행군의 결과를 이렇게 설명했다. “하나님은 여러분이 싸우기를 바라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이 자신의 삶을 바치고 아브라함과 같이 큰 희생을 한 많은 사람들 중에서 택하지 않으셨다면 지상의 나라들에 복음 문을 열 열두 사람과 그들의 지시를 받아 그들의 길을 좇을 칠십 명으로 왕국을 세우는 일을 하실 수 없었을 것입니다.”10

시온 진영의 일원이자 후에 제4대 교회 회장이 된 윌포드 우드럽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다른 방법으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경험을 했다. 우리는 선지자의 얼굴을 볼 수 있는 특권을 누렸으며, 그와 함께 약 1,600킬로미터를 여행하였고, 그에게 하나님의 영이 역사하시는 모습과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가 주어지는 것과 그 계시가 성취되는 모습을 볼 수 있는 특권도 누렸다.”11

시온 진영이 해산된 지 5개월 후인 1835년 2월에 십이사도 정원회와 칠십인 제일 정원회가 조직되었다. 두 정원회의 직책 82개 가운데 79개가 시온 진영의 행군에서 시험받고 인정받은 사람들로 채워졌다.

조셉 스미스는 커틀랜드에서 장래의 지도자들을 훈련하는 일을 계속했다. 후에 교회 회장이 된 브리검 영, 존 테일러, 윌포드 우드럽 및 로렌조 스노우가 커틀랜드 시절에 침례를 받았으며, 그 후 그들은 1901년까지 교회를 이끌었다. 더욱이 그다음에 부름받아 1951년까지 교회를 이끈 세 명의 교회 회장인 조셉 에프 스미스, 히버 제이 그랜트와 조지 앨버트 스미스는 용감한 커틀랜드 개척자들의 직계 후손이다.

선교 사업이 진척됨

성도들이 커틀랜드에서 생활하는 동안 많은 선교사들이 집을 멀리 떠나 복음을 전파하라는 부름을 받았으며, 이들은 대부분이 개인적으로 큰 희생을 치렀다. 선교사들은 미국의 여러 주와 캐나다 일부 지역과 대서양을 건너 영국에까지 파송되었다. 이러한 선교 사업을 통해 많은 사람이 복음이 참되다는 간증을 얻었다. 그들은 용감한 회원이 되어 조직된 지 얼마 되지 않은 교회에 큰 힘이 되었다.

커틀랜드에서 기록된 많은 계시 가운데는 회원들에게 세상에 나아가 복음을 전파하라고 한 계명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둘씩 짝이 되어 나의 영의 권능으로 나아가 나의 이름으로 나의 복음을 전파하며, 나팔 소리같이 너희 음성을 높이며 하나님의 천사들처럼 나의 말을 선포할지니라.”( 교리와 성약 42:6) 그다음 해에 주님은 이렇게 명하셨다. “경고를 받은 각 사람은 저마다 자기 이웃에게 경고하는 것이 마땅하니라.”( 교리와 성약 88:81)

초기 오하이오 개종자들의 사명

오하이오 주 출신의 개종자인 지라 펄시퍼는 회복에 관한 메시지를 열성적으로 전한 사람들의 본보기이다. 그는 1832년 1월에 교회에 가입하였으며 그 직후에 자신이 “장로의 직분에 성임되고 선교 사업을 나가 국내외에서 상당한 성공을 거두었다”12고 기록했다. 그와 또 다른 선교사인 엘리야 체니는 뉴욕 주 리치랜드라는 조그만 마을로 여행하여, 그곳의 마을 학교에서 전도하기 시작했다. 리치랜드에서 펄시퍼 장로로부터 침례 받은 첫 번째 개종자 중에는 후에 교회 역사상 가장 성공적인 선교사 가운데 한 명이었으며 제4대 교회 회장이 된 윌포드 우드럽이라는 젊은 농부도 있었다. 한 달 사이에 이 두 명의 선교사는 많은 사람에게 침례를 주었으며, 리치랜드에 교회의 지부를 조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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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사들

이웃에게 경고하라는 부름을 받은 많은 선교사가 그에 응답하여 어떤 상황에서건 선교 사업을 나갔다. 그들 중에 상당수가 이미 결혼을 하여 가장의 책임을 지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추수 절기에도, 혹한의 겨울에도, 개인적으로 융성해지던 시기에도, 경제적으로 침체해 있던 시기에도 선교 사업을 나갔다. 선교 지역으로 들어갈 당시 그들은 대부분이 매우 가난한 상태에 있었다. 선지자 자신도 약 24,000킬로미터가 넘는 거리를 여행하는 가운데 1831년부터 1838년까지 미국의 여러 주와 캐나다에서 14회의 단기 선교 사업을 수행했다.

선지자의 사촌인 조지 에이 스미스는 미국 동부 지역에서 봉사하도록 부름을 받았을 당시 너무나 가난해서 필요한 옷과 책을 구입할 재산이 없었기 때문에 선지자 조셉과 형인 하이럼이 그에게 얼마의 회색 천을 주었으며, 엘리자 브라운은 그에게 외투와 조끼와 바지를 만들어 주었다. 브리검 영이 그에게 신발 한 켤레를 주었으며, 스미스의 아버지는 소형 성경책을 한 권 주었고, 선지자는 몰몬경 한 권을 주었다.

1836년 봄에 에라스터스 스노우 장로와 존 이 페이지 장로도 선교 지역으로 떠날 당시 매우 가난한 상태였다. 스노우 장로는 펜실베이니아 주 서부 지역으로 선교 사업을 하러 출발할 당시의 상태에 대해 이렇게 적었다. “나는 도보로 혼자서 커틀랜드를 떠났으며, 당시 교회 서적 몇 권과 양말 한 켤레를 담은 작은 가방을 손에 들고 갔으며 주머니에는 5센트밖에 들어 있지 않았다. 그것이 내가 가진 세속적인 재산의 전부였다.” 페이지 장로는 선지자에게 입을 옷이 없어서 전도하라는 부름을 받아들일 수 없노라고 말했다. 그에게는 외투 하나도 없었다. 그 말을 들은 선지자는 외투를 벗어서 페이지 장로에게 주었다. 그는 페이지 장로에게 선교 사업을 나가면 주님께서 많은 축복을 주실 것이라고 말했다.13 이 선교 사업에서 페이지 장로는 수백 명의 사람들에게 복음을 가르쳐 교회에 들어오게 하는 축복을 받았다.

십이사도 정원회의 사명

1835년에 십이사도 정원회의 일원들은 미국 동부 지역 및 캐나다에서 선교 사업을 하라는 부름을 받았다. 이 때가 교회 역사상 유일하게 십이사도 정원회 일원 12명 모두가 동시에 선교 사업 부름을 받은 시기였다. 그들이 귀환한 뒤, 히버 시 킴볼은 그들이 하나님의 권능을 느꼈으며 병든 자들을 고치고 사탄을 쫓아낼 수 있었다고 간증했다.

영국으로 선교 사업을 나감

커틀랜드 시절 후반부에, 교회 내에 위기가 생겼다. 몇몇 지도자들을 포함한 일부 회원들이 시련과 박해를 참지 못하고 선지자 조셉과 다른 교회 지도자들을 비난하기 시작함으로써 배도한 사건이 일어났던 것이다. 주님은 조셉 스미스에게 그분의 교회를 구원하기 위한 어떤 새로운 일이 수행되어야 한다고 계시하셨다. 그 어떤 일이란 영국 사람들을 교회에 들어오게 하는 것이었다. 1837년 6월 4일 일요일, 선지자는 커틀랜드 성전에서 히버 시 킴볼 장로에게 다가가 이렇게 말했다. “히버 형제님, 주님의 영이 저에게 ‘나의 종 히버를 영국으로 가서 나의 복음을 선포하고 그 나라에 구원의 문을 열게 하도록 하라’고 속삭였습니다.”14

히버 시 킴볼이 선교 사업을 위해 성별되고 있는 동안, 올슨 하이드 장로가 그 방으로 들어왔다.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들은 올슨은 마음이 움직여 선지자를 비난하는 사람들 편에 섰던 자신의 잘못을 회개하였다. 그는 선교사로 봉사하겠다고 제안하여, 그도 역시 영국으로 떠나도록 성별되었다.

히버 시 킴볼은 그 타국 땅에서 복음을 전파하기를 몹시 열망하였기 때문에, 영국 리버풀에 도착했을 때 배가 항구에 정박하기도 전에 배에서 부두로 펄쩍 뛰어 내려가 자신이 회복에 관한 메시지를 가지고 바다 건너 그 땅에 처음으로 도착한 사람이라고 외쳤다. 7월 23일까지 이 두 선교사는 수많은 군중에게 복음을 전파하였으며, 7월 30일에 첫 번째 침례 의식 일정을 잡았다. 조지 디 와트는 프레스턴의 리블 강에 도보 경주로 가장 먼저 도착하였고, 이로써 영국에서 맨 처음으로 침례 받는 영광을 얻게 되었다.

8개월 내에 수백 명의 개종자가 교회에 가입하고 여러 지부가 조직되었다. 이러한 거대한 영혼의 수확에 대해 회고하면서, 히버는 선지자와 그의 보좌들이 “저의 머리에 손을 얹고 …… 하나님께서 그 나라에서 사람들을 개심시켜 그분 앞으로 데려가는 일을 하는 저를 강하게 만들어 주실 것이며 천사들이 저를 호위하고 높이 들어 올려 제 발이 결코 미끄러지지 않게 될 것이며 제가 큰 축복을 받아 수많은 사람이 구원을 얻게 하는 원천이 될 것이라는 말을 했습니다.”15라고 말했다.

초기의 많은 선교사들이 개인적인 희생을 무릅쓰고 순종하는 마음으로 선교 사업의 부름을 받아들였기 때문에 영국의 수많은 개종자들이 회복된 복음을 듣는 축복을 누릴 수 있었다. 그들은 시온에 집합하였으며 앞에 놓인 중대한 시기를 대비해 교회를 매우 강하게 하였다.

커틀랜드 성전

성도들의 희생

1832년 12월 27일, 성도들은 주님께서 성전을 건설하라고 명하신 사실을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교리와 성약 88:119 참조) 1833년부터 1836년 사이에 교회가 커틀랜드에서 가장 우선 순위로 삼은 사업은 바로 성전 건축이었다. 이는 당시 필요한 노동력과 돈이 부족한 성도들에게 큰 도전이었다. 엘리자 알 스노우는 이렇게 설명했다. “당시 …… 성도들은 수도 얼마 안 되는데다 대부분이 몹시 가난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형태를 보여 주시고 규모를 정해 주시면서까지 그분의 이름으로 집을 지어야 한다고 분명하게 명하지 않으셨다면, 당시 상황에서 그러한 성전을 지으려고 하는 것은 도저히 상식 밖의 일이라는 말들이 터져 나왔을 것이다.”16

선지자 조셉 스미스와 성도들은 하나님께서 필요한 도움과 재물을 주실 것이라는 믿음을 갖고 필요한 희생을 하기 시작했다. 존 태너는 주님께서 성전 건축을 위한 재물을 마련하는 일을 돕기 위해 준비하신 사람이었다. 1834년 12월에 뉴욕 주 볼튼에서 개종한 존은 “밤에 꿈, 즉 시현을 통해 누군가가 그를 필요로 하기 때문에 즉시 서부에 있는 교회로 가야 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

그는 커틀랜드에 도착하자마자 즉시 교회로 가야 한다는 느낌을 받은 바로 그 시간에 선지자 조셉과 몇몇 형제들이 기도 모임을 하며 주님께 성전을 지을 농장 부지에 걸려 있는 저당권을 해제시켜 줄 재물을 가진 형제나 몇 명의 형제들을 보내 주시도록 간구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커틀랜드에 도착한 다음 날 …… [그는] 전술한 농장 부지를 구입하면서 생긴 빚을 갚지 않으면 저당권자가 곧 그 농장을 차압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가 선지자에게 2천 달러를 빌려 주고 선지자로부터 원금과 함께 이자를 돌려주겠다는 각서를 받음으로써, 그 농장에 대한 저당권은 해제될 수 있었다.”17

커틀랜드 성도들이 기울인 엄청난 노력은 시간과 재능과 재물을 희생하고 헌납한 사례이다. 그들은 3년 동안 성전 건축을 위해 일했다. 남자들이 건축 기술과 노력을 제공하는 동안 여자들은 일하는 사람들을 입히기 위해 방적일과 뜨개질을 했다. 후에 그들은 각 방을 구분하는 커텐도 만들었다. 성전을 파괴하겠다는 폭도들의 위협 때문에 건축이 더욱 힘들어졌으며, 사람들은 낮에 일하고 밤에 성전을 지켜야 했다. 이렇듯 성도들이 시간과 재물을 막대하게 희생한 후, 마침내 성전이 1836년 봄에 완공되었다.

성전 헌납

성전이 완공됨으로써 주님은 시현과 천사들의 도움과 함께 커틀랜드의 성도들에게 영적으로 큰 축복을 부어 주셨다. 조셉 스미스는 이 시기를 “우리에게 희년의 해요, 기쁨의 시기”18라고 불렀다. 대니얼 타일러는 이렇게 간증했다. “모두들 천국을 미리 맛본 느낌을 가졌다. …… 복천년이 시작되었는가 하고 의아해 할정도였다.”19

이처럼 영이 부어지는 것이 절정을 이룬 것은 바로 성전 헌납식에서였다. 약 1천 명의 사람들이 기쁜 마음으로 1836년 3월 27일에 성전에 모였다. 헌납식 찬송가들이 불려졌다. 그 중에는 윌리엄 더블유 펠프스가 이 헌납식을 위해 만든 “타는 듯한 하나님의 영”도 포함되었다. 성찬이 집행되고, 시드니 리그돈과 조셉 스미스 및 다른 사람들의 말씀이 이어졌다.

조셉 스미스는 계시로 받은 헌납 기도문을 읽었다. 이 기도문은 현재 교리와 성약 109편에 기록되어 있다. 이 기도문에서 그는 주님께 오순절에 하셨던 것처럼 백성들에게 축복을 내려 주실 것을 간구했다. “그리고 급하고 강한 바람으로 하심같이 당신의 영광으로 당신의 집이 가득 차게 하여 주시옵소서.”( 교리와 성약 109:37) 많은 사람이 선지자가 성전에서 신권 정원회의 회원들과 만났던 그날 밤에 이 기도가 실현되었다고 기록했다.

엘리자 알 스노우는 이렇게 적었다. “그 헌납식은 반복할 수도 있겠지만, 어떤 인간의 언어로도 그 기념할 만한 날의 거룩한 표현만큼은 묘사할 수 없을 것이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천사들이 나타났는가 하면 모든 참석자들은 하나님의 영이 임재하신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으며, 각자 마음에 ‘형언할 수 없는 기쁨과 충만한 영광’을 담고 있었다.”20 헌납 기도가 끝난 후, 모든 회중이 일어나 손을 높이 들고 여러 차례 호산나라고 외쳤다.

1주일 후인 1836년 4월 3일, 후기 성도 역사상 가장 중요한 사건 몇 가지가 일어났다. 그날 성전에서 구주께서 친히 조셉 스미스와 올리버 카우드리에게 나타나 이렇게 말씀하신 것이다. “보라, 내가 이 집을 받아들였고 내 이름이 여기에 있을 것이며, 내가 이 집에서 자비 가운데 나의 백성에게 나 자신을 나타낼 것임이니라.”( 교리와 성약 110:7) 모세와 일라이어스와 엘리야가 신권 열쇠를 추가로 회복하기 위해 나타남으로써 다른 위대하고 영광스러운 시현이 뒤따랐다. 모세는 이스라엘의 집합에 관한 열쇠들을 부여해 주었으며, 일라이어스는 조셉과 올리버에게 아브라함 복음의 경륜의 시대를 맡겼고, 엘리야는 인봉 열쇠를 회복해 주었다.( 교리와 성약 110:11~16 참조) 이렇게 추가로 주어진 모든 열쇠는 마지막 경륜의 시대에 주님의 왕국을 발전시키는 데 필요한 것들이었다.

성전에서 집행되는 충만한 신권의 축복들은 커틀랜드 시기 동안에는 나타내지거나 집행되지 않았다. 이러한 축복들은 몇 년 후 나부 성전이 건축되는 동안에 선지자 조셉을 통해 교회에 나타내졌다.

커틀랜드 탈출

성전 건물이 많은 축복을 가져다주었으나, 1837년과 1838년에 충실한 성도들은 배도와 박해로 야기된 문제들에 직면해야 했다. 이로써 커틀랜드에서의 교회 시대가 종언을 더 빨리 고하게 되었다.

미국이 재정적인 공황을 겪고 있는 동안, 그 여파는 교회에도 밀어닥쳤다. 일부 회원 중에는 일확천금에 사로잡혀 빚을 지게 된 사람들도 있었고 커틀랜드 세이프티 소사이어티가 붕괴하는 등 경제적인 붕괴가 만연한 암울한 시기를 영적으로 극복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커틀랜드 세이프티 소사이어티는 커틀랜드의 교회 회원들이 설립한 것이었는데, 이와 관련되어 일어난 문제로 일부 회원들은 부당하게 조셉 스미스를 비난했다.

그 지역 사회의 주민들과 교회에서 파문당했거나 배도한, 원한을 품은 회원들이 조직적으로 박해를 가하고 폭력을 휘둘렀다.

성도들과 지도자들에 대한 폭력이 늘어남에 따라, 성도들은 더는 커틀랜드에서 안전한 생활을 할 수 없게 되었다. 목숨이 위태로워진 선지자는 1838년 1월에 커틀랜드를 떠나 미주리 주 파웨스트로 피신했다. 1838년 한 해 동안, 대부분의 충실한 성도들도 떠나야 했다. 그들은 신앙과 헌신과 희생의 기념비인 성전을 남겨 둔 채 떠날 수밖에 없었다. 또한 그들은 주님의 기름 부음 받은 지도자들에 대한 충실한 순종과 주님의 사업을 위해 기꺼이 바친 희생이라는 영원 불변의 유산을 남겼다.

  1. 올슨 에프 휘트니, “뉴얼 케이 휘트니”, 컨트리뷰터지, 1885년 1월호, 125쪽.

  2. 엘리자베스 앤 휘트니, 에드워드 더블유 튤리지, 몰몬의 여인들 [1877년], 42쪽에서 인용.

  3. 올슨 에프 휘트니, Conference Report, 1912년 4월, 50쪽.

  4. 브리검 영, 설교집, 11:295.

  5. 올슨 에프 휘트니, “뉴얼 케이 휘트니”, 126쪽.

  6. 조셉 홀브룩, 제임스 엘 브래들리, 시온의 진영 1834년: 남북 전쟁의 서곡 (1990년), 33쪽에서 인용.

  7. 조지 앨버트 스미스, “조지 앨버트 스미스의 역사, 1834~1871년”, 후기 성도 교회 기록 보관소.

  8. 교회 정사, 2:7.

  9. 교회 정사, 2:68.

  10. 조셉 영 일세, 칠십인 조직의 역사(1878), 14쪽.

  11. 윌포드 우드럽, 데저렛 뉴스, 1869년 12월 22일, 543쪽.

  12. “지라 펄시퍼 기록집, 1858~1878”, 5쪽; 후기 성도 교회 기록 보관소.

  13. “존 이 페이지의 역사”, 데저렛 뉴스, 1858년 6월 16일, 69쪽.

  14. 올슨 에프 휘트니, 히버 시 킴볼의 생애, 3판(1945년), 104쪽.

  15. 올슨 에프 휘트니, 히버 시 킴볼의 생애, 105쪽.

  16. 엘리자 알 스노우: 불멸(1957년), 54쪽.

  17. “장로의 일상 스케치”, 자서전 모음집(1883년), 12쪽.

  18. 교회 정사, 2:430.

  19. 대니얼 테일러, “경험한 사건”, 자서전 모음집, 32쪽.

  20. 엘리자 알 스노우, 튤리지, 몰몬의 여인들, 95쪽에서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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