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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장: 만방에 기를 세움


“제7장: 만방에 기를 세움,” 우리의 유산: 예수 그리스도 후기 성도 교회 약사 (1996), 81–91

“제7장,” 우리의 유산, 81–91

제7장

만방에 기를 세움

평원을 가로질러 성도들의 첫 번째 일행을 성공적으로 유타로 인도해 온 브리검 영 회장은 이제 사막에 하나님의 왕국을 건설하는 일에 관심을 돌렸다. 그의 비전과 지도력으로, 한때 허허벌판이었던 사막이 성도를 위한 번성하는 문명과 안식처가 되었다. 그의 솔직담백한 지시는 성도들이 새로운 터전에 대한 가능성을 꿈꾸게 하였으며 그들이 하나님의 왕국을 건설하기 위해 길을 찾아 떠나는 데 도움이 되었다.

첫 번째 성도들의 일행이 도착한 지 이틀 후, 브리검 영 회장과 몇 명의 십이사도는 영 회장이 나부를 떠나기 전에 시현으로 보았던 산 중턱에 있는 둥그런 절벽으로 올라갔다. 그들은 절벽 아래로 펼쳐진 광활한 계곡을 내려다 보면서 세계의 열방이 이곳에서 환영받을 것이며 성도들이 번영과 평화를 누릴 곳이 바로 여기라는 예언을 했다. 그들은 그 언덕을 엔사인(기호)이라고 이름지었는데, 이는 다음과 같은 이사야의 약속의 말씀에서 딴 것이다. “여호와께서 열방을 향하여 기치를 세우시고 이스라엘의 쫓긴 자들을 모으시며”( 이사야 11:12).1

영 회장의 첫 번째 공식적인 업무는 1847년 7월 28일에 성전을 건축할 중심 부지를 선정하고 사람들에게 성전의 설계와 건축에 대한 계획에 착수하도록 한 것이었다. 그는 자신의 지팡이를 선정한 부지에 꽂고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곳이 바로 우리가 하나님께 바칠 성전을 지어야 할 곳입니다.” 이 선언은 바로 얼마 전 나부를 떠날 때 강제적으로 성전 예배 의식을 중단해야 했던 성도들에게 큰 위안을 주었음에 틀림없다.

8월에 교회의 지도자들과 첫 번째 개척자 중 대부분의 사람이 이듬해에 가족을 계곡으로 데려갈 준비를 하기 위해 윈터쿼터스로 돌아왔다. 그들이 돌아온 직후에, 브리검 영과 십이사도 정원회는 제일회장단을 재조직할 때가 되었다는 강한 느낌을 받았다. 십이사도 정원회의 회장이었던 브리검 영이 교회 회장으로 지지받았다. 그는 히버 시 킴볼과 윌라드 리차즈를 보좌로 선택했으며, 성도들은 지도자들을 만장일치로 지지했다.

계곡에서의 첫 번째 해

1847년 여름이 가기 전에 두 그룹의 성도들의 일행이 솔트레이크 밸리에 더 도착했으며, 약 2,000명의 회원들로 솔트레이크 스테이크가 조직되었다. 때늦게 곡식을 심어 수확이 아주 적었으므로, 이듬해 봄까지 많은 사람이 부족한 식량 때문에 어려움을 겪었다. 당시 어린 소년이었던 존 알 영은 이렇게 기록했다.

“초목이 자랄 때까지 기근으로 고통은 극심했다. 몇 달 동안 우리는 빵 한 조각 없이 지냈다. 쇠고기, 우유, 돼지풀, 백합 뿌리, 엉겅퀴가 우리의 일상 식품이 되었다. 나는 가축을 치는 일을 맡았고, 가축들을 지켜보면서 엉겅퀴 줄기를 먹곤 하였다. 마치 소처럼 배가 꽉 찰 때까지 먹었다. 마침내 굶주림이 너무 극심하면 아버지께서는 나뭇가지에 걸려 새들이 쪼아댄 오래된 소가죽을 걷어서 요리를 해 주셨는데, 그것은 맛있는 수프가 되었다.”2 정착민들은 서로 돕고 가진 것을 함께 나누었는데, 이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그러한 힘든 시기를 이기고 살아갈 수 있었다.

1848년 6월까지 정착민들은 5~6천 에이커의 땅을 경작했으며, 계곡은 점차 녹색으로 변해가고 수확도 풍성해졌다. 그러나 성도들은 식량 위에 내려앉은 거대한 메뚜기 떼 때문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성도들은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다 동원하였다. 그들은 도랑을 파서 물줄기를 메뚜기 떼로 돌려 놓기도 하고, 메뚜기 떼를 막대기와 빗자루로 쳐서 죽이거나 불에 태워 버리려 하였으나 이 모든 노력이 다 소용없었다. 메뚜기 떼는 계속해서 엄청나게 몰려왔다. 솔트레이크 스테이크 회장인 축복사 존 스미스는 하루 동안 금식하고 기도하도록 요청했다. 얼마 있지 않아서 거대한 무리의 갈매기 떼가 하늘에서 나타나 메뚜기 떼 위로 내려왔다. 수잔 노블 그랜트는 자신의 경험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놀라고 있는 사이에 그 갈매기들은 거의 굶주린 것처럼 메뚜기 떼들을 마구 휘저으며 마구 잡아먹기 시작했습니다.”3 성도들은 기쁨과 경이의 눈으로 그것을 지켜보았다. 그들의 생명을 구제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솔트레이크 계곡

성도들은 그들의 어려운 상황에도 불구하고 신앙으로 힘을 내어 열심히 일했기 때문에, 곧 큰 발전을 가져왔다. 1849년 9월 캘리포니아로 여행하던 한 여행가가 솔트레이크시티를 지나면서 다음과 같은 찬사를 보냈다. “저는 이전에 이분들보다 더 질서있고, 성실하며, 근면하고 예의 바른 사람들을 본 적이 없습니다. 그렇게 짧은 기간 동안에 황무지인 이곳에서 그들이 이처럼 많은 일을 해 왔다는 것은 믿을 수 없는 일입니다. 4~5천 명이 거주하는 이 도시에서, 저는 단 한 명의 게으른 사람도, 그리고 부랑자와 같은 그 어떤 사람도 본 적이 없습니다. 곡식 수확에 대한 그들의 전망은 좋았으며, 모든 면에서 영과 힘이 있었는데, 이는 제가 가 보았던 그 어떤 곳에서도 볼 수 없었던 것입니다.”4

탐험

1848년 늦은 여름, 브리검 영 회장은 윈터쿼터스로부터 솔트레이크 밸리로 다시 여행했다. 솔트레이크 밸리에 도착했을 때, 그는 성도들이 자신들의 새로운 환경에서 어떠한 자원이 유용한 것인지 배워야 할 필요성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대부분 많은 것들을 그 지역에 살고 있던 인디언들로부터 구했지만, 영 회장은 또한 교회 회원들을 탐험대로 보내 약초와 이용 가능한 천연 자원을 발견하도록 하였다.

그는 다른 정착지를 알아보도록 다른 탐험대도 보냈다. 탐험대는 이렇게 여행하는 동안 정착지로 적합한 지역뿐 아니라 광물 자원과 풍부한 목재와 수원과 초원 지대 등을 발견했다. 땅 투기를 방지하기 위해, 선지자는 성도들에게 자신들에게 할당된 토지의 일부를 떼어 타인에게 매매하는 것에 대해 경고했다. 땅은 그들에게 주어진 청지기 직분이었으므로, 재정적인 이득을 위해서 사용해서는 안 되었으며, 현명하고 부지런하게 잘 관리해야 했다.

1849년 가을, 영 회장의 지시하에 영구적인 이주 기금이 제정되었다. 그것의 목적은 교회의 중심지로 합류하기 위해 여행하는 데 재정적인 여력이 없는 가난한 사람들을 돕기 위한 것이었다. 큰 희생으로 많은 성도들이 그 기금을 조성하는 데 공헌하였으며, 그 결과 수천 명의 성도들이 솔트레이크 밸리까지 여행해 올 수 있었다. 솔트레이크 밸리까지 올 수 있게 되면, 도움을 받았던 성도들은 자신들이 받았던 재정적인 도움을 다시 갚도록 되어 있었다. 이 기금은 계속해서 다른 사람들을 돕는 데 사용되었다. 이러한 상호 부조의 노력으로 성도들은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의 삶을 축복할 수 있었다.

선교사들이 부름에 응함

일이 활기를 띠고 생활이 점차 안정되자, 브리검 영 회장은 관심을 교회로 돌렸다. 1849년 10월 6일 연차 대회에서, 그는 새로 부름받은 선교사들과 함께 몇몇 십이사도 회원들에게 외국에서 선교 사업을 행하도록 임무를 주었다. 그들은 가족들과 새 집, 그리고 아직 마치지 않은 일들을 남겨 두고 떠나야 했지만 이 부름을 받아들였다. 에라스터스 스노우와 몇몇 장로들은 스칸디나비아에서 선교 사업을 시작했으며, 로렌조 스노우와 조셉 터론토는 이탈리아로 갔다. 애디슨과 루시아 번즈 프랫은 소사이어티 군도에 있는 애디슨의 이전 선교 지역으로 돌아갔다. 존 테일러는 프랑스와 독일로 부름받았다. 선교사들은 동쪽으로 여행하는 동안, 로키 산맥에서 새로운 시온으로 향하는 성도들을 만났다.

선교 지역에서 선교사들은 기적을 보았으며 많은 사람에게 침례를 주어 교회로 인도했다. 훗날 교회 회장이 된 로렌조 스노우는 이탈리아에서 복음을 전하던 중에, 세 살짜리 사내아이가 거의 죽음 직전에 이른 것을 보았다. 그는 이 기회가 그 어린이를 고쳐 주어 그 지역에 있는 사람들의 마음을 열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다. 그날 밤 그는 하나님 아버지의 인도를 구하기 위해 오랫동안 열심히 기도했다. 다음 날 그와 동반자는 그 사내 아이를 위해 금식하고 기도했다. 그날 오후 그들은 그 아이에게 병자 축복을 해 주었으며, 그들의 사업을 도와주시도록 조용히 기도드렸다. 그 아이는 밤새 평온하게 잠이 들었으며 기적적으로 완쾌되었다. 아이를 고쳐 주었다는 소문이 이탈리아 피드몬트 지역의 여러 계곡으로 퍼져 나갔으며 선교사들에게 문이 열리고 그 지역에서 첫 번째 침례가 나왔다.5

1852년 8월, 솔트레이크시티에서 열린 특별 대회에서, 106명의 장로들이 전 세계로 선교 사업을 나가라는 부름을 받았다. 이 선교사들은 후에 부름받은 선교사들처럼 남미, 중국, 인도, 스페인, 오스트레일리아, 하와이 그리고 남태평양 지역에서 복음을 전하였다. 초기에는 대부분의 지역에서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그렇지만 그들이 뿌려 놓은 씨앗들로 말미암아 훗날 선교 사업을 통해 많은 사람이 교회로 들어오게 되었다.

에드워드 스티븐슨 장로는 스페인 지브롤터 선교부로 부름받았다. 이 부름은 그가 태어났던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을 의미하였는데, 그는 그곳에서 그의 고향 사람들에게 담대하게 회복된 복음을 전하였다. 그는 복음을 전했다는 죄목으로 체포되었으며, 그가 간수들에게 복음을 전하여 그중 한 명이 거의 개종될 단계에 이른 것이 당국에 발견될 때까지 얼마 동안 감옥에서 보냈다. 석방된 후에 그는 두 명에게 침례를 주었고, 1854년 1월까지 열 명의 회원을 둔 지부를 조직했다. 그해 7월에는 여섯 명의 회원이 아시아에 주둔한 영국 군대로 군복무를 하기 위해 떠났지만, 한 명의 칠십인, 한 명의 장로, 한 명의 제사, 한 명의 교사를 포함한 열여덟 명의 회원들이 계속 있었고, 이는 교회가 계속 성장하는 데 필요한 지도력을 제공하는 데에는 충분했다.6

1852년, 프랑스령 폴리네시아의 지방 정부는 선교사들을 추방했다. 그러나 개종한 성도들은 1892년에 전도 활동이 재개될 때까지 교회를 계속 유지해 나갔다. 티호니 장로와 마이헤아 장로가 특히 용감했는데, 그들은 신앙을 부인하기보다는 오히려 감옥 생활과 다른 많은 시련들을 견뎌냈다. 그들 각자는 성도들이 활동적이고 복음에 충실하도록 돕기 위해 노력했다.7

미국 이외의 지역에서 교회에 가입한 회원에게는 이 시기가 시온으로 집합하는 시기였고, 그것은 성도들이 배를 타고 미국으로 가는 것을 의미했다. 엘리자베스와 찰스 우드 부부는 1860년에 남아프리카로부터 항해해 왔고, 이 항해를 위한 돈을 마련하기 위해 몇 년 동안 열심히 일했다. 엘리자베스는 한 부잣집에서 가정부로 일했으며 남편은 필요한 돈을 마련할 때까지 벽돌 공장에서 일했다. 엘리자베스는 아이를 낳은 지 24시간 후에 바로 배를 탔으며, 선장이 자신의 침실을 그녀에게 내 주어 좀 더 편하게 여행할 수 있었다. 그녀는 여행 동안 병이 들었으며, 두 번이나 죽을 고비를 넘겼으나, 마침내 유타 주 필모어에 도착해 그곳에서 정착해 살았다.

선교사들은 자신들이 봉사한 나라의 성도들에게 매우 친절하게 대했다. 조셉 에프 스미스는 1857년 하와이에서의 선교 사업이 끝나갈 무렵, 심한 열병에 걸려 3개월 동안이나 선교 사업을 할 수가 없었다. 그는 다행히 하와이의 충실한 성도인 마 마후히이 자매의 간호를 받게 되었다. 그녀는 조셉을 마치 자신의 친자식처럼 극진히 돌보았으며, 이 두 사람은 강한 유대감이 형성되었다. 후에 조셉 에프 스미스가 교회 회장이 되었을 때, 그는 호놀룰루를 방문하게 되었다. 호놀룰루에 도착한 바로 직후에 그는 한 눈먼 여인이 인도되어 오는 것을 보았는데, 그녀는 선물로 줄 탐스러운 바나나를 들고 있었다. 그는 그녀가 “이오세파, 이오세파(조셉, 조셉)” 하고 부르는 것을 들었다. 그는 즉시 그녀에게로 달려가 그녀를 껴안으며, 그녀의 볼에 수차례 입맞춤을 하고,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어머니, 어머니, 오 사랑하는 나의 어머니.”8

개척지로의 부름

연차 대회에서 부름받은 개인이나 가족들이 유타, 남 아이다호, 그리고 후에 애리조나, 와이오밍, 네바다 및 캘리포니아 지역에 많은 공동체를 세웠다. 브리검 영 회장은 수천 명의 새로운 정착민들이 농사를 지으며 살아갈 수 있는 이러한 공동체를 설립하도록 지시하였다.

브리검 영 회장의 생애 동안, 솔트레이크 밸리의 모든 곳과 주변의 많은 지역이 개척되었다. 브리검 영 회장이 세상을 떠난 1877년까지, 350여 곳 이상의 개척지가 건설되었으며, 1900년까지는 거의 500여 곳에 달했다. 초기에 교회의 관리 역원이었던 브리검 헨리 로버츠는 몰몬들이 개척지를 성공적으로 건설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영 회장이 주었던 부름을 수행하면서 보여 주었던 “지도자에 대한 충성심과 그들 각자의 비이기적이고 헌신적인 희생”9에서 비롯된 것이었다고 기록했다. 개척자들은 주님의 선지자를 따르기 위하여 물질적인 안락함이나 친구들과의 교제 그리고 때로는 그들의 생명까지도 희생했다.

연차 대회에서, 영 회장은 외진 곳으로 이주할 부름을 받게 될 형제들과 가족들의 명단을 읽었다. 이 개척자들은 선교사로 부름받은 것으로 이해하였으며, 그들이 해임될 때까지 지명된 곳에 남아 있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들은 자신들이 사용할 생필품을 가지고 자비를 들여 새로운 터전으로 갔다. 그들의 성공 여부는 얼마나 효율적으로 주변에 있는 자원을 활용하는가에 달려 있었다. 그들은 그 지역을 조사하고, 땅을 개간하며, 방앗간을 짓고, 대지로 물을 끌어 들이기 위해 관개 수로를 파고, 가축을 보호하기 위해 목장 둘레에 울타리를 치며, 새로운 길을 닦았다. 그들은 곡물을 재배하고 채소를 가꾸며, 교회와 학교를 짓고, 인디언들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들은 출생이나 사망, 그리고 결혼식뿐 아니라 병이 들었을 때에도 서로 도우며 살아갔다.

1862년, 찰스 워커는 남 유타에 정착하라는 부름을 받아들였다. 그는 부름받은 사람들을 위한 모임에 참석해서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나는 이곳에서 오랫동안 잊을 수 없었던 원리를 배웠다. 그것은 내게 순종이 하늘 아래나 땅 위에서 얼마나 위대한 원리인가를 보여 주었다. 나는 이곳에서 지난 7년 동안 무더위나 추위, 굶주림과 열악한 환경을 이겨내며 생활하였으며, 마침내 곧 탐스러운 수확을 하게 될 많은 과실수가 있는 집을 갖게 되었다. 그러나 이제 나는 그러한 모든 것을 남겨 두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두려워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행하기 위하여 떠나야 한다. 나는 하나님 앞에서 합당한 태도로 내게 요구되는 것을 성취할 수 있는 힘을 주시도록 하나님께 기도한다.”10

십이사도 정원회의 일원인 찰스 시 리치 또한 개척지로 가라는 부름을 받았다. 브리검 영은 그와 몇몇 다른 형제에게 그들의 가족을 데리고 솔트레이크시티에서 북쪽으로 약 240킬로미터 떨어진 베어 레이크 밸리에 정착하라는 부름을 주었다. 그 계곡의 정상은 매우 높았으며, 겨울 동안에는 눈이 덮여 있는 매우 추운 곳이었다. 리치 형제는 최근 유럽에서 선교 사업을 마치고 돌아왔으며, 가족을 떠나 다시 한번 그 어려운 환경 속에서 살아가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그러나 그는 그 부름을 받아들였으며, 1864년 6월, 베어 레이크 밸리에 도착했다. 이듬해 겨울부터 봄까지 혹독한 추위 속에서 생활했는데, 다른 몇몇 형제들은 그곳을 떠나기로 결심했다. 리치 형제는 이 추위 속에서 살아간다는 것이 쉽지 않은 것임을 알고 있었지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제까지 많은 어려움이 따랐습니다. 제가 인정하는 것은 …… 우리가 이것들을 함께 도우며 이겨내 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다른 곳으로 가고 싶다면, 그것은 여러분의 자유입니다. 저는 여러분에게 그것을 빼앗고 싶지 않습니다. …… 그러나 저는 저 혼자만 남게 되더라도 이곳에 남아 있어야 합니다. 영 회장님이 저를 이곳으로 부르셨기 때문입니다. 그분이 저를 해임하고 이곳을 떠나라고 하실 때까지 저는 이곳에 남아 있겠습니다.” 리치 형제는 가족과 함께 실제로 그곳에 남았으며, 그 이후 몇 십 년 동안 번영하는 공동체의 지도자가 되었다.11 수많은 다른 사람들처럼, 그는 주님의 왕국을 건설하는 일을 돕기 위해 기꺼이 지도자들에게 순종했다.

인디언과의 관계

개척자들은 변방 쪽으로 더 나아가면서 인디언들과 자주 교류했다. 서부의 다른 정착민들과는 달리, 브리검 영 회장은 회원들에게 원주민인 인디언 형제 자매들에게 음식을 나누어 주고, 그들을 교회에 데려오기 위해 노력하도록 가르쳤다. 인디언 사이에서의 선교 사업이 아이다호 준주에 있는 새먼 강 지역의 포트 림하이와 유타 주 경계 지역 내의 콜로라도 강 상류에 있는 엘크 마운틴에서 시도되었다. 영 회장은 또한 상호부조회 자매들에게 바느질을 하여 인디언 형제 자매들을 위한 의복 등을 만들도록 권고하였으며, 인디언들에게 음식을 제공하기 위해 돈을 모금하도록 지시했다.

성도들과 매우 가깝게 지낸 비회원 인사였던 토머스 엘 케인의 아내 엘리자베스 케인이 유타 주를 여행하고 있었을 때, 그녀는 몸과 마음이 지쳐 있는 한 몰몬 여인의 집에 머물렀다. 엘리자베스는 자신이 직접 그 몰몬 여인이 인디언들을 어떻게 대하는지를 보기 전까지는 그 여인에 대해 별로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 여인은 준비한 저녁 식사에 손님들을 부르면서, 또한 기다리고 있던 인디언들에게도 뭐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엘리자베스는 그 여인이 인디언들에게 무슨 말을 했는지 그 여인의 아들에게 물어보았는데, 그 아들이 대답하기를, “이 손님들이 먼저 오셨습니다. 이분들께 드릴 음식만 차렸는데, 지금 여러분의 음식도 준비 중이니까 다 되면 부르겠습니다.”라고 했다. 엘리자베스는 믿을 수가 없었으며, 그 여인이 그 인디언들에게 정말 음식을 줄 것인지를 물어보았다. 그 아들은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어머니께서는 아주머니에게 대접해 드린 것과 똑같이 저들을 위해 식탁에 자리를 마련해 주실 것입니다.” 그 여인은 인디언들이 식사를 하는 동안 시중을 들며 그들을 대접했다.12

신권 조직 및 보조 조직의 기능

영 회장은 말년에, 몇 가지 중요한 신권 책임을 설정하고 공표했다. 그는 십이사도들에게 모든 스테이크에서 대회를 열도록 지시했다. 그 결과, 유타 전역에 7개의 새로운 스테이크와 140여 개의 새로운 와드가 생겨났다. 스테이크 회장단, 고등평의원, 감독단 및 정원회 회장단들의 임무가 분명히 정의되었으며, 수백 명의 형제들이 이 직책에 부름받았다. 그는 교회 회원들이 십일조와 금식 헌물과 기타 다른 헌금을 바치고 질서있게 생활해 가도록 권고했다.

1867년 선지자는 조지 큐 캐넌을 주일학교 책임자로 불렀으며, 수년 내에 주일학교는 교회의 영구적인 조직이 되었다. 1869년 영 회장은 그의 딸들을 모아 놓고 검소하게 살도록 특별한 지침을 주기 시작했다. 그는 1870년 검약회 설립과 함께 이러한 권고를 교회의 모든 청녀들에게 적용했다. 이것이 청녀 조직의 시초이다.1877년 7월 그는 첫 번째 스테이크 상호부조회를 조직하기 위하여 유타 주 옥든으로 여행했다.

브리검 영 회장의 죽음과 유산

지도자로서 브리검 영 회장은 실천적이고 정열적이었다. 그는 성도들에게 가르침과 용기를 주기 위해 교회의 모든 정착지를 여행했다. 말씀과 모범으로써 그는 회원들이 교회에서 부름에 충실하도록 가르쳤다.

자신의 삶을 돌이켜 보며, 영 회장은 뉴욕의 한 신문 편집자에게 다음과 같은 답장을 썼다.

“지난 26년 동안 저의 노력의 결과를 간단히 요약해서 말씀드리자면, 약 10만 명 정도의 후기 성도들이 이 경계 내에 거주하고 있고, 200여 개의 크고 작은 도시들을 세워 우리 성도들이 거주하고 있으며 …… 우리의 공동체를 향상시키고 이롭게 하기 위해 학교와 공장과 제분소와 기타 필요한 시설을 세웠습니다.”

“저는 온 생애를 바쳐 전능하신 하나님께 봉사했습니다.”13

1876년 9월, 영 회장은 구주에 대해 강한 간증을 하였다. “저는 예수께서 이 세상의 그리스도이시며, 구주요 구속주라는 것을 간증드립니다. 저는 그분의 말씀에 순종해 왔고, 그분의 약속을 저의 삶에서 확실히 이해했으며, 이 세상의 지혜로 얻을 수도 없고, 이 세상의 지식이 빼앗아 갈 수도 없는 그분에 대한 지식을 갖고 있습니다.”14

1877년 8월, 영 회장은 매우 심한 병에 걸렸으며, 의사의 간호에도 불구하고 며칠 만에 세상을 떠났다. 그때 그의 나이 76세였으며, 교회를 이끌어 온 지 33년이 되는 해였다. 오늘날 우리는 그를 현대의 이스라엘을 약속의 땅으로 인도한 정열적인 선지자로 기억하고 있다. 그의 설교는 하루 하루 삶의 모든 면을 다루었으며, 종교가 매일 우리가 경험하는 삶에서 일부분이라는 점을 확실히 해 주었다. 그는 서부 변경 지역에 대한 이해와 현명한 지침으로, 하늘의 축복으로써 사막에 하나님의 왕국을 건설한 것과 같은 불가능하게만 보였던 과업을 성취하도록 성도들에게 영감을 불어넣어 주었다.

  1. 설교집, 13:85~86.

  2. 존 알 영, 존 알 영의 비망록(1920년), 64쪽.

  3. 카터 이 그랜트, 회복된 하나님의 왕국(1955년), 446쪽.

  4. 비 에이치 로버츠, 존 테일러의 생애(1963년), 202쪽에서 인용.

  5. 프란시스 엠 기본스, 로렌조 스노우: 영적인 거인, 하나님의 선지자(1982년), 64쪽.

  6. “스페인과 지브롤터에서의 교회”, 프렌드, 1975년 5월호, 33쪽.

  7. 알 레이니어 브리치, 바다의 섬을 향해서: 태평양에서의 후기 성도 역사(1986년), 21~22.

  8. 찰스 더블유 니블리, “조셉 에프 스미스 회장의 회상”, 임프르브먼트 이라, 1919년 1월호, 193~194.4

  9. 러셀 알 리치, 열방의 기호(1972년), 349쪽.

  10. 찰스 로웰 워커의 일기, 에이 카알 라슨 및 캐더린 마일스 라슨 편, 2권(1980년), 1:239쪽.

  11. 레오나드 제이 애링턴, 찰스 시 리치(1974년), 264쪽.

  12. 엘리자베스 우드 케인, 열두 몰몬 가정이 유타를 통해 애리조나로 가는 여로에 연달아 방문(1974), 65~66쪽.

  13. 고든 비 힝클리, 회복된 진리(1979), 127~128쪽에서 인용.

  14. 브리검 영, 설교집, 18:23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