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성에게 끌리는 성향
로리의 이야기


“로리의 이야기”, 동성에게 끌림: 회원들의 이야기 (2020)

“로리의 이야기”, 동성에게 끌림: 회원들의 이야기

로리의 이야기

로리는 언제나 복음이 참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든 것이 순조로운 것은 아니었습니다. 사실 복음에 관한 지식은 그녀의 삶에서 중요했던 여러 선택을 훨씬 어렵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그 숱한 시련과 눈물로 얼룩진 세월이 지나고 난 뒤, 로리는 자신이 구주와 그분의 복음에 헌신하고 있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로리의 이야기

제 이름은 로리 캠벨입니다. 현재 남편과 아들과 함께 캘리포니아주 오션사이드에서 살고 있습니다.

저는 광고 카피라이터입니다. 따로 사무실이 있는 건 아니고, 그냥 의자를 가지고 해변에 앉아서 노트북 컴퓨터를 제 무릎 위에 얹어 놓으면 바다 풍경이 정말 멋진데, 그게 제 사무실이 되는 거죠. 4년 동안 미생물학을 전공했었는데, 의료계에 종사하는 가족의 바람과는 다르게 예술로 전공을 바꾸고 캘리포니아로 건너갔죠. 그러고는 4년 동안 예술 대학을 다녔습니다.

솔직히 말하자면 정말 후련했습니다. 정신 건강을 유지하는 건 정말 어려웠고, 제가 진행하기로 한 타일 프로젝트는 문자 그대로 제가 제정신으로 버틸 수 있게 도와줬습니다. 고등학교에 다닐 때는 우울증과 불안증이 심해 힘들었어요. 그것 때문에 술과 마약을 접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처음으로 누군가를 많이 좋아하게 되었는데, 학교 운동팀 코치였어요. 여자였죠. 그렇지만 서로 좋아한 것도 아니었고, 당연히 저는 회원이니까 그런 감정을 행동으로 옮기지도 않았습니다.

저는 하나님께서 저를 도와주실 것을 알고 있었기에 도와달라고 기도했어요. 그런데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죠. 어떤 일이 일어나게 해 달라고 기도하면 다른 일이 일어나고, 단 하루도 더 나아갈 수 없다고 생각한 때에도 하루를 더 버텨 내야 했습니다. 대학에 진학할 즈음에는 그냥 이 죄책감이 지긋지긋했어요. 그래서 여자들과 데이트하기 시작했고, 기분이 좋았지요. 결국 저는 한 여성과 사랑에 빠졌고, 제 인생을 그녀와 함께하고 싶다고 느꼈습니다. 그게 옳은 일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렇지만 여전히 하나님께서는 제가 그렇게 살기를 원하지 않으신다는 걸 종종 느꼈어요. 총을 제 입속으로 들이밀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어떤 사람을 너무도 사랑하는데, 하나님께서 원하시지 않는 일이기에 헤어져야 한다는 감정의 충돌이 너무도 극심했습니다. 헤어지기 정말 싫었습니다.

제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두 가지가 서로 극심하게 상충한다는 그 사실을 마주하기가 정말 힘들었습니다. 그냥 살고 싶지가 않았죠. 술과 마약을 끊는 일은 쉽지 않은 일이었고, 많은 노력을 요구했습니다. 실패도 많이 했지요. 한동안 금주 프로그램에 참여하기도 했습니다. 우선순위를 하나님께 두면서 하나님의 뜻에 따르자는 생각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다시 교회에 나가고 싶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저는 복음을 믿었으니까요. 마치 작은 불빛이 깜빡거리는 것 같았죠. 그리스도께서 촛불을 들고 계시는 것처럼요. 그것도 아주 작은 촛불이요. 마치 저에게 “넌 할 수 있단다. 쉽지는 않겠지. 그렇지만 넌 할 수 있어.”라고 속삭여 주는 것처럼 느꼈습니다. 그리고 정말로 쉽지 않았습니다. 저는 여전히 그녀를 너무도 사랑했고 그녀와 함께하는 삶을 원했습니다. 그렇지만 그녀에게 이렇게 말했죠. 내가 믿는 것이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우리의 관계이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께서 그 관계를 원치 않으신다는 것이라고. 그러고는 나는 이제 하나님이 원하는 걸 하겠다고 말했습니다. 남자와 데이트하는 데는 엄청난 신앙이 필요했습니다. 정말 어려웠죠. 남자와 데이트하면서도 ‘난 레즈비언인데 이게 도대체 무슨 상황이야.

이건 정말 못하겠어. 정말 별로야. 도와줘!’라고 생각하곤 했습니다.

성적 지향성은 사람들을 분류하는 한 방법이고, 많은 사람들에게 중요한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저한테는 그게 방해물이었어요. 저는 꼬리표로 느껴지던 그것을 원치 않았어요. 그 당시에도 저에게 도움이 되지 않았던 건 사람들이 이렇게 말하는 거였어요. “교회가 입장을 바꿀 거야. 결국은 동성 관계를 받아들이게 되겠지.” 그런 말이 제겐 큰 상처가 되었습니다. 그게 사실이라면 전 트레이시와 헤어질 필요가 없었던 건데, 무슨 힘으로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겠어요?

제게 가장 큰 도움이 되었던 것은 이해심 많은 감독님이었습니다. 그분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제가 사실 이런 사안에 관해서는 경험이 없습니다. 그렇지만 어떻게 해야 할지 함께 헤쳐 나가 봅시다.” 장장 3년 동안, 저는 감독님과 계속해서 만나서 이야기했습니다. 친구들과 교회가 중요하게 작용했고, 기도하고 경전 읽는 것도 중요했습니다. 그리고 저는 제 삶에 대해 쓴 원고를 완성했었죠. 그즈음에 친구 중 한 명이 다시 교회에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그 친구와 어울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전혀 육체적으로 제게 뭔가를 하려고 시도하지도 않았고, 저도 전혀 그럴 생각이 없었기에 딱 좋았습니다.

트레이시를 사랑했을 때 말고는 혼자 있는 것을 즐겼기 때문에, 저는 제가 결혼하지 않을 거라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 친구가 이렇게 말하더군요. “난 이 관계가 좀 더 깊어졌으면 좋겠어.” 저는 당황했죠. 그래서 저는 제가 써 놓았던 150쪽짜리 인생 이야기 원고를 가져왔어요. 그러고는 이렇게 말했죠. “내 생각에는 네가 나에 관해 좀 더 알아야 할 것 같아. 이걸 가져가서 한번 읽어 봐.” 제 친구들은 그때 “그걸 읽고 떨어져 나가라고 그에게 원고를 쥐어 준 거냐”면서 저를 놀렸었죠. 그 말에 저는 “나도 잘 모르겠어”라고 했었습니다. 아무튼 저는 그에게 그 원고를 툭 던져 주고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걸 읽고 난 후에도 여전히 나랑 만나고 싶으면 이번 일요일 저녁 6시에 저녁 먹으러 와. 안 오더라도 난 정말 이해해. 전화도 안 해도 돼. 정말 괜찮으니까.”

일요일 6시에 그는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한 채로 나타났습니다. 울면서 이렇게 말하더군요. “이런 경험을 했다니 정말 힘들었겠다. 정말 힘든 일을 겪었구나. 이렇게 힘들 때, 네가 어렸을 때, 내가 같이 있어 줄 수 있었다면 좋았을 걸. 함께 이야기할 누군가가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그 말에 저는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제 마음은 눈 녹듯 녹아내렸습니다. 그는 저를 꼭 안아 주면서 눈물을 흘렸습니다. 저도 함께 울었습니다. 그 책에는 제가 술 마신 것, 마약 한 것, 여자와 사귀었던 것이 다 적혀 있었는데, 그걸 읽고 그가 보인 반응이 그것이었습니다. 우리는 서로를 꼭 안아 주었고, 저는 다른 누구와도 느껴 보지 못했던 일체감을 느꼈습니다. 그런 느낌은 어떤 남성이나 어떤 여성에게서도 느껴 보지 못했습니다. 살면서 한 번도 느껴 보지 못한 느낌이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전히 나와의 관계를 발전시켜 보는 걸 고려해 준다면 영광으로 여길게.” 그건 정말 기적이었어요.

그런데 그렇게 결혼도 하고 가족도 생기고 해서 문제가 다 해결되었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생각해도 그건 정말 바보 같은 생각이었어요. 불안증이나 우울증은 자녀들에게 무슨 일이 생길 때마다 돌아왔습니다. 그렇지만 그건 제가 결혼을 하고 자녀를 가졌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이잖아요. 어떤 사람들은 제게 이렇게 말합니다. “넌 사실은 그냥 레즈비언일 뿐이야. 그런데 남자랑 결혼했잖아. 넌 너 자신에게 충실하지 못한 삶을 살고 있는 거야.” 사람들이 그렇게 말하는 이유를 이해합니다. 저도 그렇게 느낀 적이 있으니까요. 그렇지만 과거의 저에게 진리였던 것은 사실 완전한 진리가 아니었어요. 앞으로 닥칠 일들이 쉽지 않을 것이라는 점을 인정하고, 또 주님이 우리를 인도해 주실 것이라고 저는 믿어야 했습니다.

계속되는 로리의 이야기

제가 여자인 운동팀 코치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 건 제가 고등학생이었던 1970년대였는데, 그 당시는 게이나 레즈비언이 위험하고 불명예스러운 것으로 여겨지는 때였습니다. 자신의 성적 지향을 밝히는 것이 너무 많은 상처로 이어졌기에 그 시절에는 성적 지향을 밝히는 사람이 거의 없었습니다. 고등학교 때 속했던 운동팀에는 레즈비언 친구들이 몇몇 있었기에 도움이 되었습니다. 그 친구들을 좋아한 적은 없었지만, 다른 사람과 어울리는 것보다는 그 애들과 어울리는 것이 더 편했어요.

저는 10살 때 사촌으로부터 성추행당했고, “가족의 친구”였던 남자에게 성폭행을 당했었기 때문에 교회에 가면 죄책감을 느끼곤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순결의 법에 관해 가르치던 교회 공과가 제 마음에 깊은 상처를 주었어요. 제 죄목을 알아낸 총살형 집행대가 연속으로 제게 총을 쏴 대는 것 같았습니다. “한번 순결을 잃고 나면 절대로 다시 되돌릴 수 없습니다.” “중고차를 사시겠어요, 아니면 새 차를 사시겠어요?”

소아성애자였던 그 “가족의 친구”는 성폭행을 당한 건 제 잘못이었다고 세뇌시켰습니다. 그리고 누구에게든 이 사실을 말하면 제가 곤란해질 거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죄책감을 느꼈습니다. 아주 끔찍한 죄책감이었죠. “살인 다음으로 가장 나쁜 죄”를 저질렀다고 생각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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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변에 서 있는 여성

저는 대학에 가서도 운동팀에 들어갔고, 레즈비언 친구들과 어울리며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습니다. 하지만 복음에 대한 간증이 있었기에 대학교 1학년 때는 누군가와 사귀지는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2학년으로 올라가고 나서는 교회도 더이상 나가지 않았고, 술도 마셨으며 마약도 하기 시작했습니다. 죄책감을 느끼는 것이 지긋지긋해진 거죠. 더는 교회에 나가거나 지혜의 말씀을 지키지 않았으니, 이제 여성과 만나도 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그것도 다 한때뿐일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살다 보면 언젠가는 여자와 만나는 것도 정리하고 교회로 돌아가리라 여겼죠. 그런데 예상치 못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사귀던 여성과 사랑에 빠진 것이었습니다. 저에게는 그게 놀라운 일이었는데, 저는 제가 사랑에 빠질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여자랑 사귀고 있으면서도 그런 일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니 제가 무슨 생각을 했던 건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녀에 대한 사랑의 감정이 깊었지만, 제 안에 있는 간증 역시 제게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갈등만큼이나 복음에 대한 확신도 컸거든요.

사귄 지 1년 반 만에 우리는 헤어졌습니다. 이별을 극복하려고 더 많은 여성들과 만났지만, 별로 소용은 없었습니다. 제가 다른 주로 이사하게 되었을 때, 이사가는 곳의 와드가 어디인지 알아보고 감독님을 만나 이야기해 봐야겠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정작 감독님과 만났을 때는 뭐라고 해야 할지도 몰랐죠. 그냥 그 자체가 중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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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를 바라보는 여성

지나고 나서 보니 그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저는 진정 그리스도와 같은 감독님을 만났습니다. 그분은 저를 위해 이 신성한 계획에서 계획된 대로 신권 권능을 사용하셨습니다. 그분은 “신권으로 말미암아 어떠한 권능이나 영향력도 유지될 수 없고 또 되어서도 아니 되며, 다만 설득으로, 오래 참음으로, 온화함과 온유함으로, 그리고 거짓 없는 사랑으로”(교리와 성약 121:41) 행하는 삶을 사는 분이셨습니다.

감독님은 거의 3년 동안 저와 만나 이야기하셨습니다. 제가 한동안 제 여자 친구와 다시 만나게 되었을 때조차요.

제가 옛 생활로 돌아갔을 때, 그분은 오히려 더 많은 인내와 오래 참음과 거짓 없는 사랑을 보이셨습니다.

여성과 사랑에 빠졌을 때는 “이게 맞다”는 느낌이 정말 강했고, 그 관계가 정말 좋았습니다. 그래서 “이건 잘못된 것이다”라는 느낌을 믿기가 힘들었고, 그걸 실행에 옮기기는 더 힘들었습니다. 실제로는 맞다고 느낀 것이 잘못된 것이었고, 틀렸다고 느꼈던 것이 옳은 것이었습니다. 종종 그 갈등이 너무나 극심해지면 자살 충동을 느끼곤 했습니다. 제가 여전히 살아있다는 것이 정말 축복이라고 느낍니다.

신앙을 유지하기 힘든 상황에서도 저는 감독님의 도움을 받아 매일 경전을 읽기 시작했고, 좀 더 자주 교회에 참석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이 계심을 느끼지 못했던 적도 많았습니다. 기도는 대화라기보다는 혼잣말에 훨씬 가까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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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에 잠긴 여성

저는 언제나 우리 각자가 인생에서 감당해야 할 고통에는 한계가 있다고 생각했어요. 감당할 수 있는 것 이상은 주어지지 않는다고 배워 왔으니까요. 그렇지만 정말 더 이상은 견딜 수 없다고 생각한 그 시점에 이르렀을 때, 가장 극심했던 그 고통, 저를 규정하고 정련하는 그 고통이 다른 어떤 것도 할 수 없었을 방식으로 저를 일으켜 세우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제 선택의지를 사용해 복음의 계획을 선택할 수 있는 힘을 얻기 시작했습니다.

여전히 쉬운 결정은 아니었습니다.

행복한 미래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남자와 평생을 보내고 싶은 마음은 조금도 없었습니다. 영원은 말할 것도 없고요.

저에겐 한 가지 선택지밖에 없었습니다. 평생을 독신으로 사는 것이었죠. 제가 글을 쓰거나 사진을 찍으러 다니며 혼자 있는 시간을 즐겨 왔다는 것이 정말 다행이었죠.

저는 몰몬경이 참되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참되다는 것도 알고 있었습니다. 지상에 살아 계신 선지자가 있다는 것 역시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계속해서 그 방향으로 나아갔습니다.

그렇다고 교회가 항상 편했던 것은 아닙니다. 아는 사람도 없었고, 여전히 술도 마시고, 담배도 피우고, 마약도 끊지 못했었고, 게다가 제 성적 지향 역시 숨기고 있었습니다. 교회에 있는 다른 모든 이들이 누리고 있을 “의로운 생활”이 제게는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제 스스로가 외국에 온 이방인 같다고 느꼈습니다.

그러다가 결국 교회에서 감독님 외에 친구를 한 명 만나게 되었습니다. 제 방문 교사였죠. 방문 교사 자매님의 사랑과 관용과 지지 덕분에 저는 마음이 훨씬 편해졌습니다. 마침내 교회에서 저를 알아 주고, 제가 한 모든 잘못된 행동들을 알고도 제가 나쁜 사람이라거나 변태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친구를 만난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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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둣가와 바다가 보이는 노을

그 후로도 몇 년이 지나서야 저는 마약, 술, 담배로부터 해방될 수 있었고, 다른 여성과 사귀지 않고도 마음의 평안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서른 살이 되었을 때, 저는 성전에 갈 준비가 되었습니다. 저는 제가 남은 일생 동안 순결을 지키겠다는 결심을 하는 것이라 생각했고, 해낼 수 있는 신앙이 있다고 느꼈습니다.

그렇지만 남성과 데이트하는 노력을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고, 데이트를 하게 되면 항상 저는 확실히 레즈비언이고 남자와는 만날 수 없다는 확신만 다시금 느끼곤 했습니다. 시간이 지난 뒤, 저는 제가 편안하게 만날 수 있는 한 남성을 만났습니다. 아주 똑똑한 사람이었고 이야기를 나누면 즐거운 사람이었죠. 그가 우리의 관계를 발전시키고 싶다는 말을 하기 전까지 우리는 친구로 지냈습니다. 그때 당시 저는 제 인생에 관한 책을 쓰고 있었는데, 제 인생에서 제가 범한 가장 나쁜 죄가 낱낱이 적혀 있는 그 책을 그에게 건네주었습니다.

그리고 다시는 그를 볼 수 없으리라 생각했지요. 그런데 그는 그 주 일요일 저녁 식사에 나타났습니다.

그는 제 과거를 받아들였을 뿐만 아니라, 그 과거로 인해 마음이 크게 움직였던 것입니다.

그는 눈물을 흘리며 제가 어렸을 때 옆에서 도와줄 수 없었다는 것에 마음이 아프다고 말했습니다.

저는 진심으로 놀랐으며 무척 감동받았습니다. 그 순간 그를 향한 제 감정은 변화했습니다. 그 순간부터 저는 그가 바로 저를 위한 사람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가장 놀라운 점은 그가 남자라는 사실이었습니다.

요즘도 종종 상황이 허락한다면 동성에게 끌리는 것에 대한 이해를 높이고 성도들 가운데서 소속감을 찾고 싶어하는 LGBT 후기 성도에 관한 인식을 높이기 위해 교육적인 의도로 사람들에게 제 배경을 알려 주곤 합니다. 실제로 차별을 겪기도 하고, 사람들이 저를 피하거나 멀리하려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런 경우보다는 오히려 더 깊은 우정을 나누게 된 적이 더 많고, 제가 생각한 것보다 사람들과의 공통점을 더 많이 발견하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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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 위의 노을을 바라보는 부부

물론 사람들이 “당신은 결혼했으니까 의롭게 생활할 수 있는 거겠죠. 훨씬 쉬운 상황이잖아요”라고 말할 때면 마음이 아픕니다. 최근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도 겪은 데다, 저마다의 고충으로 힘들어하는 세 자녀를 키우느라 힘든 상황에서 그런 말을 들으면 정말 속상합니다. 자녀로 인해 겪는 어려움이 더 힘들더군요. 자녀들의 고통을 견뎌 내는 것이 저 자신의 고통을 견디는 것보다 힘들었습니다. “제발 우리 아이들 대신에 제가 힘들게 해 주세요!”라고 생각하곤 했습니다.

제 신앙은 많은 면에서 성장했습니다. 적어도 이제는 가장 어려운 시기는 이미 지났다는 생각할 만큼 어리석진 않아요. 제 옆에서 저를 사랑하고 지지해 주며 함께 많은 일을 겪어 온 남편이 있음에 감사드립니다. 어려움이 있을 때도, 그리고 어떤 상황에서든 남편과 함께 아이들을 양육했기에 삶이 좀 더 쉬웠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제 신앙은 이제 더 확고합니다. 저는 모든 일에 있어서 주님께 의지하고, 또 언젠가 어떻게든 이 모든 일이 진정으로 우리에게 경험이 된다는 것을 신뢰할 만큼 성장했습니다. 제 삶에서 여러 번 지옥의 문턱이 저를 삼킬 듯했음에도 불구하고, 저는 이 모든 것이 저에게 유익이 될 것이라는 완전한 지식을 가지고 있습니다.(교리와 성약 122:7 참조)

구주와 그분의 복음을 향한 제 사랑과 헌신은 다시는 무너질 수 없으며 무너지지 않을 것입니다.

댈러스의 이야기: 로리의 남편

댈러스는 언제나 자신의 부모님이 보여 주셨던 관계를 가질 수 있기를 바랐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가능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로리를 만나기 전에는 말입니다. 그녀의 과거는 정말 충격적이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로리가 자신의 불완전함을 알고도 자신을 받아들여 줄 수 있다면, 자신도 그렇게 할 수 있다는 사실을 빠르게 깨달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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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엌에 앉아 있는 남성

한번은 큰형이 성찬식 말씀을 하면서 부모님이 다투시는 걸 한 번도 본 적이 없다고 말하고 나서 있었던 작은 소란이 기억납니다. 어떤 사람들은 형이 과장하고 있다고 생각했고, 또 어떤 사람들은 그게 가능할 리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저희는 그게 뭐가 어쨌다는 건지 이해가 안 갔습니다. 부모님들은 다들 그런 것 아닌가 싶었지요. 저희는 부모님이 서로를 사랑하고 존중하며, 자녀인 저희를 사랑하는 환경에 익숙해져 있었습니다. 부모님이 어떻게 그렇게 하실 수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정말 훌륭한 환경이었습니다. 시작이 좋았으니까 제 삶이 아주 훌륭했을 거라고 생각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았습니다.

로리를 만났을 때는 제가 선교 사업을 갔다 온 지 16년이 지난 뒤였습니다. 제 친구가 몇 개월 동안 저를 교회로 다시 데리고 오려고 노력하던 중, 로리와 저를 서로 소개시켜 주었습니다. 저는 로리가 아주 매력적이고, 또 고집이 세다고 생각했습니다. 만만한 사람이 아니었죠. 그때의 로리는 아주 길고도 어려운 여정을 거쳐 온 상태였고, 신앙을 되찾고 성전에 가려고 노력하는 중이었습니다. 그녀는 경험을 통해 무엇이 중요한지 깨달았던 사람이었고, 저는 그 정도 수준이 되지 않았었습니다.

저희는 한동안 “한 달에 한번 만나는” 정도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저는 로리의 성격을 아주 좋아했습니다. 그녀는 다른 사람들과 달랐습니다. 저에게는 새로운 유형의 사람이었지요. 몇 개월이 지난 후에도 저는 로리와 보내는 시간을 항상 고대하곤 했습니다. 그동안 로리도 저에 관해 알아보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별로 좋은 평가는 안 나왔을 겁니다. 어느 날 로리는 그녀에게 복음이 얼마나 중요한지, 그리고 우리가 복음에 관해 같은 관점을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을 염려하고 있음을 이야기하면서, 제게 더 많은 것을 바라고 있다고 알려 주었습니다. 그때 저는 확실히 깨달았습니다. 로리와 이야기를 나누면서 저는 갑자기 로리와 함께라면 부모님이 보여 주셨던 관계를 쌓을 수 있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예전에는 그런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었습니다. 가능하다고 생각하지도 않았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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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지를 적고 있는 손

저는 로리에게 우리의 관계를 지금보다 좀 더 발전시키고 싶다고 이야기했습니다. 그러자 로리는 그녀의 삶의 이야기가 담긴 문서를 제게 건네더군요. 저는 그녀가 다른 지역에 갔다 오는 주말 동안 그것을 읽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그렇지만 집에 갔을 때, 그걸 읽고 싶지가 않았습니다. 그 문서는 꼬박 하루 동안 그 자리에 놓여 있었고, 자꾸 제 신경을 건드렸죠. 그렇지만 저는 로리와 더 깊은 관계를 맺길 바랐기에 결국 책을 열어 읽기 시작했습니다. (그 책을 읽기 전에는 로리가 글을 그렇게 잘 쓰는지도 몰랐습니다.) 그날 밤에 제가 읽었던 것은 제가 읽었던 그 어떤 책보다도 가슴 아픈 것이었습니다. ‘내가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이런 엄청난 비극을 겪었는데, 나는 그걸 어떻게 모를 수가 있었는가’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책에는 그녀가 동성에게 끌리는 것에 대해, 그리고 지혜의 말씀을 지키기 어려워했던 것 역시 적혀 있었습니다. 계속 읽다가 저는 예상치 못한 한 문장에 다다랐습니다. “내 삶의 방식이 얼마나 편안한지, 얼마나 편리한지, 얼마나 만족스러운지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 만약 그 삶이 나를 구주께로 더 가까이 데려가지 않는다면, 그 삶은 의미가 없다.”

제가 로리에게 느낀 감정을 쐐기라고 한다면, 그 문장은 망치와도 같았습니다. 그 망치는 제 마음의 문을 부수어 활짝 열었으며, 저는 삶과, 세상과, 고통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저는 제 앞에 선택이 놓여 있음을 확실히 알게 되었습니다. 지금 이대로 살다가 죽거나, 아니면 삶을 선택할 수 있었습니다. 저는 그 벼랑 너머를 바라보고는, 온 마음을 다해 삶을 택했습니다.

그 순간 저는 제가 로리의 삶에 들어가기에 합당치 않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렇지만 저는 그녀를 사랑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최대한 빠르게 변화하려 노력했습니다. 변화는 위대한 행복의 계획의 한 부분입니다. 저는 변화가 불러오는 축복에 감사드립니다.

로리와 결혼하기 전에 걱정하던 때도 있었습니다. 이제 로리가 어떤 삶을 살았는지 알게 되었는데, 내가 정말 그녀와 함께할 수 있을까?

두려웠습니다. 결국 저는 남자인데, 로리는 남자를 좋아하지 않았으니까요.

그렇지만 걱정이 몰려올 때마다 저는 재빨리 저 자신이 완벽하지 않음을 상기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있는 그대로의 저를 받아들여 준 로리에게 감사를 느꼈습니다. ‘로리가 기꺼이 그렇게 해 주었다면, 나도 그렇게 할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는 의식적으로 로리의 과거에 대한 걱정을 접어 두는 선택을 했습니다. 그리고 그 결정은 오늘까지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함께한 지 20년이 지난 지금, 놀랍게도 제가 실제로 걱정한 시간보다는 왜 더 걱정하지 않아도 되었는지를 생각한 시간이 더 많습니다. 적어도 로리의 과거에 관해서는 걱정할 이유가 전혀 없었던 것이죠.

하지만 결혼 생활을 시작하자 걱정할 다른 일들이 많이 생겨났습니다. 자녀, 재정, 자녀, 건강, 자녀 걱정이었죠. 가족과 관련된 필요 사항이 우선순위가 되면서 예전에는 가장 염려되었던 것이 순위에서 가장 아래로 밀려났습니다. 복음 안에서 자신을 세우고자 애썼던 경험은 로리의 신앙을 더욱 강하고 현실적으로 만들어 주었습니다. 저는 로리의 신앙에서 위안을 받습니다. 극심한 우울증으로(또는 다른 의학적 문제들로) 인해 로리가 영의 느낌을 잃었을 때는 우리 두 사람 모두에게 정말 힘든 시기였습니다. 그렇지만 로리는 모든 역경에도 불구하고 신앙을 지켰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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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를 바라보는 부부

로리와 함께하는 것은 축복입니다. 우리는 어려웠지만 좋은 삶을 함께 걸어왔습니다. 제 부모님이 보여 주셨던 모범만큼 이루지는 못했지만, 노력해 왔습니다. 우리만의 방식으로 우리의 세상을 함께 찾았습니다. 로리가 “복음은 내가 남자를 좋아하게 만들어 주지는 않았지만, 단 한 사람의 남자를 좋아하게 만들어 주었다”라고 말하는 걸 들을 때면 기분이 정말 좋습니다. 그 남자가 바로 저니까요. 제가 바랄 수 있는 것 이상의 축복입니다.

로리의 친구 이야기

회개로 향하는 길은 어렵지만 반드시 필요한 것입니다. 로리에게는 단지 격려가 필요했습니다. 그런 격려는 지금 그녀의 행동이나 그녀가 내리는 결정과는 상관없이 항상 곁에 있어 줄 친구만이 줄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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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접 촬영한 꽃

로리(저는 사실 로리를 ‘립’이라고 부릅니다)를 처음 만났을 때는 그녀가 제가 속해 있던 청년 독신 와드를 가끔씩 나오기 시작했던 때였습니다. 로리가 간증에서 자신이 대학생이었을 때의 방문 교사에 관해 아주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려준 후에 저는 로리를 좋게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방문 교사에 관해 들어 본 이야기 중에서 제일 재미있고 감동적인 이야기였습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저는 운명적으로 로리의 방문 교사가 되도록 부름받았습니다.

로리의 유머 감각 덕분에 저는 아주 빠르게 로리와 친해졌습니다. 우리는 친구가 되었고, 로리는 일상적으로 저에게 자신의 어려움이나 힘든 일들을 털어놓았습니다. 저는 그녀의 다양한 어려움에 공감하고 또 연민을 느끼면서 이야기를 들어주었습니다.

로리는 자신이 여성과 사귀는 것뿐만 아니라 지혜의 말씀에 대한 문제 등 여러 부분에서 자신의 행동을 바로잡고 싶어했습니다. 그렇지만 그건 정말 쉽지 않은 일이었고, 로리는 여러 번 슬픔에 빠졌습니다.

저는 그때의 로리의 행동이나 이어지는 결정이야 어떻든 그녀의 친구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알고 지낸 지 1년 정도가 되었을 때, 저는 로리에게 같이 점심을 먹으러 가자고 했습니다. 특별히 뭔가를 계획했던 것은 아니었고, 단지 즐거운 방문 교육이 되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우리 둘 다 그날을 생각하면 웃곤 합니다. 음식을 주문하고 나서, 로리는 회개에 자꾸 걸림돌이 되는 여러 방해물에 관해서 제게 불평을 늘어놓았습니다. 로리는 그러다가 어느 순간에 농담조로 이렇게 말했죠. “결국 지금 회개해야 할 이유는 없는 거 아냐? 벌 받으려면 아직 한참 남은 거잖아.”

그 순간 저는 잠시 침묵했다가, 제가 뭐라고 하는지를 깨닫기도 전에 로리에게 이제는 주님께 반항하며 회개를 미루는 일은 그만둬야 할 시간이 왔다고 말했습니다. 또한 그녀가 아주 명석하고 자신의 결심에 대한 충분한 이해를 가지고 있기에 주님께서는 이제 그녀에게 고통과 슬픔을 야기하는 일들을 그만두기 바라신다고도 말했습니다.

저는 정말 냉정하게 말했습니다. 제가 하는 말을 그녀가 들어야만 한다는 그런 느낌이 아니었다면 그렇게 하지 않았을 만큼 냉정했었지요. 음식점에 있는 동안 로리는 음식에 손도 대지 않았습니다. 저는 로리에게 어떤 일로도 그렇게 비판적이고 심각하게 이야기한 적이 없었습니다.

그때만 해도 그 일이 어떤 방향으로 흘러갈지 전혀 몰랐습니다. 그렇지만 로리의 마음 가장 깊은 곳까지 닿아야 한다는 것은 알고 있었죠. 로리는 “좀 더 있다가 그만두고 회개하겠다”는 그녀의 태도에 제가 그렇게 가혹할 정도로 솔직하게 회개를 권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었습니다.

즉각적인 변화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로리는 제가 한 이야기를 매우 진지하게 받아들였습니다. 로리가 걸어갈 길은 쉬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제는 완전히 다른 이유로, 그녀 앞에 놓인 길은 여전히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로리는 변화하고 싶어했고, 행동에 옮기지 않고 말로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마침내 깨달았습니다.

변화하는 데는 몇 년이나 걸렸습니다. 그렇지만 로리는 그때부터 말로 하는 것은 그만두고, 가장 중요하고 영속적이며 삶을 변화시키는 행동과 함께 새로운 길을 구축해 나가겠다는 결심을 했다고 생각합니다.

로리가 변화하든 그렇지 않든 우리는 여전히 친구였고, 로리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아주 오랜만에 만나더라도 서로가 전혀 어색하지 않은 그런 친구였습니다.

우리는 둘 다 다른 곳으로 이사하게 되었고, 이사 후에는 새로운 전화번호를 서로 몰랐기 때문에 (소셜 미디어 전의 세대였습니다) 서로 연락할 방법이 없었습니다. 서로가 어디에 살고 있는지 찾으려고 해 봤지만, 너무 멀리 떨어진 곳에 있었기에 쉽지가 않았죠. 로리는 마침내 저를 찾았습니다.(저는 여전히 제가 로리를 찾은 게 아니라, 로리가 저를 찾았다며 놀려 대곤 합니다) 이제 서로 연락이 끊어지는 일은 절대 없을 것 같습니다. 우리는 8년 만에 만났는데도 바로 어제 만난 것처럼 느껴졌죠. 로리 덕분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한 제 간증은 더욱 깊어졌습니다. 로리는 저의 영웅이고, 제가 존경하는 사람입니다.

우리 사이에는 존경과 사랑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런 것만으로 우리의 우정이 지속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 둘 다 서로에게 농담하는 데는 도가 텄거든요. 우리는 웃고, 서로를 놀리고, 또 돕습니다. 우리는 서로의 생각을 귀 기울여 듣고, 서로가 가진 다른 관점을 존중합니다. 그러면서 서로에게 항상 배우죠.

우리 사이에 서로를 판단하는 일이 한 번도 없었다는 사실에 정말 감사합니다. 로리는 진정한 친구입니다. 저는 로리로부터 정말 많이 배웠고, 제가 언급했듯이 수 년 전 그날로부터 그녀가 전혀 변화하지 않았더라도 여전히 진정한 친구일 것입니다. 우리 둘은 모두 성장했고, 여전히 가족과 함께 올바르게 성장하려 노력하고 있습니다. 로리는 몰랐겠지만, 그녀는 여러 번 제 기도의 응답이 되어 주었습니다. 정말 훌륭한 사람입니다.

옳다고 믿는 것을 행하려는 소망을 통해, 로리는 자신이 그만두어야 한다는 걸 알고 있는 그 행동들을 극복할 수 있었습니다. 만일 로리가 변화하고 싶어하지 않았더라면, 우리는 그날 점심때 결코 그런 대화를 나누지 않았을 겁니다. 로리에게든 다른 누구에게든, 무언가를 해야 한다고 말하거나, 회개하고 싶어하지 않는 일에 대해 회개하라고 말하는 건 저로서는 꿈도 꾸지 못할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날 제가 로리에게 그런 말을 했던 건 저에게도 충격이었죠.

아시다시피 우리는 다른 이들을 함부로 판단하고 비난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자신에 관한 일에서 옳고 그름을 선택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있죠. 그렇지만 다른 누군가에게 우리의 믿음을 강제할 수는 없습니다.

제 부모님은 제가 아주 어렸을 때부터 다른 사람들을 함부로 판단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교회에서 옆에 앉은 사람한테서 담배 냄새가 나더라도 그건 제가 신경 써야 할 일이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맞은 편에 앉아 거짓말을 하고 있을지도 모를 누군가를 함부로 판단할 능력도 없다고요. 즉, 어느 누구도 함부로 판단해서는 안 된다고 가르치셨습니다. 우리에게는 그런 판단을 내릴 지성이나 공정함이 없으니까요. 함부로 판단해서는 안 될 뿐만 아니라 그런 자세 역시 가져서는 안 됩니다. 그보다 우리의 역할은 용기를 내어 다른 이들에게 사랑을 베푸는 것입니다.

자신의 삶에 저를 받아들여 준 로리와 다른 많은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그분들은 저와는 다른 삶을 경험했지만 그 삶을 저와 함께 나누어 주었으며, 우리는 함께 더 나아질 수 있었습니다.

로리의 감독님 이야기

교회의 지도자들은 그들과 소통하는 이들이 구주의 사랑을 느끼도록 돕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이해심과 인내심은 그 핵심 요소입니다. 하지만 무슨 일이 있더라도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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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두와 바다를 바라보고 있는 여성

저 자신의 이야기 이외에도 동성과의 관계를 정리하고 교회로 완전히 돌아오는 제 여정에서 든든한 지원을 보내 준 가족, 친구, 교회 지도자의 이야기를 제출하도록 부탁받았습니다. 구주와 제 하늘 부모님 외에 이 여정에서 가장 큰 영향을 주었던 한 사람은 바로 제 감독님입니다. 그분은 이미 돌아가셨기 때문에 그분께서 저를 돕고, 또 저를 하나님의 무리로 부드럽게 인도해 주셨던 것들을 기록으로 남기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중요하고도 성스러운 청지기 직분을 수행하며 제 감독님께서 하셨던 것과 같이 사람들을 돌보고 싶어하는 교회의 지도자들에게 이 기록이 도움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감독님을 처음 만났을 때 저는 제가 이때까지 여성들과 만났다는 사실, 그 당시에도 여성과 만나고 있다는 사실, 그리고 술과 마약을 하고 있다는 사실까지 모두 말씀드렸습니다. 처음 접견을 했을 때는 시간이 많이 없어서 그 다음 주에 좀 더 길게 접견하기로 일정을 잡았습니다. 제 생각에는 다시 접견을 하기 전에 감독님께서는 스테이크 회장님께 연락해서 인도를 구하셨던 것 같습니다. 다음 접견에서는 제가 그 관계에 얼마나 깊게 연관되어 있는지를 확인하는 다른 질문들을 하셨었거든요. 이 일이 있었던 것은 80년대 초반이었기 때문에 교회의 지도자들은 동성에게 끌리는 느낌을 받는 이들에 관해서는 아는 바가 거의 없었습니다. 그 질문들을 듣는 동안 저는 마음이 불편해졌습니다. 다행히도 그걸 알아차린 감독님께서는 잠시 질문을 멈추고는 크게 숨을 들이마셨었죠. 그런 다음 성신의 인도를 기다리셨습니다. 사실 그 다음에 감독님께서 뭐라고 하셨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습니다. 제가 기억하는 건 감독님에게서 느껴지던 영의 느낌, 그리고 하늘 부모님과 감독님이 저를 아주 사랑하신다는 느낌이었습니다.

감독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던 건 기억납니다. “제가 이런 사안에 관해서는 잘 모릅니다. 어쩌면 자매님께서 제가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주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저는 주님께서 자매님을 사랑하시며, 자매님께서 회개하고 삶을 변화시키기를 소망한다는 사실에 고마워하신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자매님께서 교회로 돌아오시는 것에 대해서라면 무엇이든지 기꺼이 도와드리겠습니다.”

저희 둘 다 그로부터 거의 삼 년 동안 매주 만나서 이야기하게 되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우리 앞에 놓인 여정이 얼마나 길고 어려울 것인지 미리 알았다면, 우리가 그토록 열심히 노력하지는 못 했을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감독님께서는 제가 포기했을 때조차도 절대로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제가 희망을 느낄 수 없을 때면 감독님께서는 저를 격려하시고, 설득하시고, 희망을 북돋아 주셨습니다. 나중에 말씀해 주셨지만, 저만큼 감독님께 인내를 배우게 했던 사람은 없었다고 하시더군요. 인내에 관해서는 저도 정말 많이 배웠습니다.

감독님께서 저를 위해, 그리고 실제로는 주님을 위해 그리스도의 참된 제자로서 훌륭한 모습을 보이신 것 이외에도 제게 무척 도움이 되었던 행동이 몇 가지 있습니다.

  1. 우리가 함께 만나 이야기를 나눌 때면 항상 기도를 했습니다. 가끔씩은 시작하면서도 기도하고, 끝내면서도 기도했습니다.

  2. 우리 둘 다 제 앞에 놓인 여정에 관해 잘 알지 못했지만, 감독님은 주님께서 그 길을 아시리라는 확신으로 앞으로 나아가셨습니다.

  3. 감독님은 저를 섣불리 판단하지 않으셨고, 오히려 부드럽게 설득하셨습니다.

  4. 감독님은 제가 사랑했던 여성과의 관계로 다시 돌아갔을 때도 인내하셨습니다.

  5. 감독님은 제가 당시에 잘 통제할 수 없었던 의롭지 못한 행동에 집중하시기보다는, 오히려 매일 경전 읽기나 매주 교회 참석하기같이 제가 할 수 있는 의로운 행동에 초점을 맞추셨습니다.

  6. 감독님은 제가 할 수 있었던 일들을 칭찬해 주시면서 제가 자신감을 가질 수 있게 도우셨습니다.

  7. 감독님은 언제나 영의 인도를 따르셨습니다. 항상 “자연스럽게” 영의 느낌에 반응하시면서 시작하셨고, 또 잠시 멈추고 영의 인도를 기다리셨습니다.

  8. 감독님은 항상 제게 도움이 될 만한 경전 구절을 적어도 하나씩 읽어 주셨습니다. 종종 이야기를 하시면서 영감을 느끼면 더 많이 나누시기도 했지요.

  9. 영의 속삭임이 느껴질 때면 제게 신권 축복을 주셨습니다.

  10. 감독님은 기도를 통해 방문 교사를 배정해 주셨고, 그 방문 교사도 제게 무척 헌신적이었습니다.

  11. 제가 교회를 빠진 날이면 감독님께서는 전화로 교회에 오지 못한 이유를 물으셨고, 그다음 주에는 꼭 오라고 격려해 주셨습니다.

  12. 가장 중요한 것은 제가 무슨 일을 하든, 무슨 일을 했든, 그분께서는 저를 사랑하셨다는 것입니다.

감독님께서 돌아가신 후 몇 년 동안 저는 여러 번 그분께서 제 곁에 계신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습니다. 휘장 건너편에서는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저는 잘 모릅니다. 그렇지만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유대는 죽음으로 단절되지 않는다는 사실은 알고 있습니다. 저는 우리가 휘장의 양편에서 모두 도움을 받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저는 감독님께서 눈에 보이지 않는 방법으로 계속해서 저를 축복하시고 있다는 사실에 감사드립니다. 하나님의 비밀은 그 대부분이 비밀에 가려져 있다 하더라도 경이롭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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