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2009
“두려워하지 말라 우리와 함께 한 자가 … 많으니라”
2001년 10월


“두려워하지 말라 우리와 함께 한 자가 … 많으니라”

“아이를 기르고 사랑하고 인도하는 이 신성한 의무는 혼자서 감당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보다 큰 기쁨은 없습니다. 모든 희생을 할 만한 가치가 있는 일입니다.”

우리는 청소년의 부모요 지도자들로서 신앙을 잃게 되거나 청소년들과 세상에 대한 근심으로 비통해지기 쉽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의 상황이 유례없거나 절망적인 것은 아닙니다. 에녹이 예언자였을 때, 세상의 사악함으로 인해 하늘이 울었습니다.(모세서 7:28~37 참조) 오늘날에도 하늘이 울고 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예언자 엘리사는 그를 죽이기로 작정한 수리아의 전군대에 의해 포위되었습니다. 수리아인들의 머릿수를 세며 두려워하는, 곁에 있던 유일한 시종에게 그는 주님의 편에 서면 적의 숫자나 세상의 권세에 관계없이 다수의 편에 있는 것이라고 안심시켰습니다. 저는 엘리사가 그의 젊은 친구에게 준 위안의 말씀, 곧 “우리와 함께 한 자가 그들과 함께 한 자보다 많으니라”(열왕기하 6:16)는 말씀이 오늘날에도 참되다는 것을 간증드립니다. 주님은 엘리사에게 하셨던 것처럼, 우리의 젊은이들을 열정적으로 사랑하고 이끄는 부모님, 조부모님, 이모, 고모, 삼촌, 이웃, 지도자 또는 친구의 모습을 한 불마차로 그들을 둘러싸고 보호하실 것입니다.

지난 4년간 저는 청녀에 관련된 일에 열중했습니다. 세계 곳곳을 방문하여 그들을 만나면서 그들이 가진 희망과 꿈과 두려움과 실망에 대해, 어느 정도 알게 되었습니다. 이 세대는 “교회가 가진 가장 훌륭한 세대”(처치 뉴스, 1997년 2월 15일자, 3쪽)라고 하신 힝클리 대관장님의 말씀을 반복하고자 합니다. 전체적으로 이들 청소년들은 용맹스럽고 힘차게 선과 고상함을 지키고 있습니다.

비록 우리의 청소년들이 강하고 선할지라도, 우리의 도움을 필요로 합니다. 그리고 그 도움은 준비되어 있습니다. 청녀 개인 발전 프로그램, 아론 신권 하나님에 대한 의무, 부모와 청소년 지도자를 위한 지침서, 그리고 개정판 청소년의 힘을 위하여 등은 부모와 지도자들이 날로 기울어가는 도덕성의 저울을 바로잡는 일에 적극적이고 직접적으로 참여하는 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청소년들은 하숙집 주인 이상의 사람을 원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을 사랑하고 이끌어 줄 사람들을 원합니다.

그런 사랑을 하는 데 필수적인 부분은 귀를 기울이는 일입니다. 저는 축복된 경험으로 인해 그것이 진정 어떤 것인지를 알고 있습니다.

저는 아버지와 농장에서 일하곤 했습니다. 그 일이 늘 제게 즐거운 것은 아니었지만 점심 때면 큰 백양나무 그늘 아래서 점심을 먹으며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아버지는 이 순간을 딸의 잘못을 교정하고 규칙을 세우는, 훈계의 시간으로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이런 저런 모든 것에 대해서 그저 얘기했습니다.

그 시간엔 질문을 할 수 있었습니다. 너무 편한 나머지 간혹 아버지를 화나게 하는 질문도 할 수 있었습니다. 이런 질문을 던진 일이 기억납니다. “지난 주 늦도록 밖에 있었을 때 왜 절 데리러 오셔서 친구들 앞에서 창피하게 만드셨어요?”

아버지의 대답은 사랑의 또다른 측면을 보게 해주었습니다. 아버지는 변덕스럽지 않으셨습니다. 제게 기대하시는 확실한 행동 표준이 있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늦게까지 나가 있으면 걱정이 된다. 무엇보다도 네가 안전하길 바래.” 저는 아버지의 사랑이, 잠자고 싶은 욕구나 옷을 입고 저를 찾아서 차를 타고 나서야 하는 불편함보다 훨씬 크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곳이 풀밭이든 다른 편한 장소이든 간에 함께 보내는 그런 시간들은 한가롭지 않거나 평온하지 않은 시기에 대비해 마음의 창고를 채워 줄 수 있습니다. 관계는 엄격한 가르침과 교정에도 불구하고 — 어떤 경우에는 그런 가르침 덕택일 수도 있지만 — 이런 투자로 인해 유지됩니다.

사랑은 한밤중이건, 세미나리에 가는 새벽이건, 급한 일로 바쁜 시간이건 간에, 청소년들이 말할 준비가 되었을 때 귀를 기울이는 것입니다. 깜깜한 침실을 보여 주는 교회 텔레비전 광고를 본 적이 있습니까? 문이 열리고 어린아이가 책을 들고 들어와서는 곤히 잠자는 아빠에게 묻습니다. “아빠, 이야기책 읽어 주세요.” 아빠는 눈도 안 뜨고 잠결에 중얼거립니다. “얘야, 아빠는 너무 피곤하단다. 엄마한테 물어 보렴.” 어린 소녀는 엄마가 자는 곳으로 종종걸음으로 달려가 묻습니다. “엄마, 아빠가 저한테 책 읽어 줘도 돼요?” 아빠의 눈이 번쩍 떠지고, 그 다음 장면에선 세 사람이 모두 모여 아빠가 이야기책을 읽어 줍니다.

사랑은 자연스레 할 수도 있지만, 인도하는 것은 어쩌면 우리가 그리 심각하게 여기지 않을 수도 있는 연마된 기술입니다. 우리는 무엇보다도 모범을 통해 더욱 강하게 인도할 수 있습니다. 청소년의 부모와 지도자에게 그것은 매우 무거운 짐입니다.

청소년들이 우리가 행동하고 말하고 기도하는 방식을 보며 우리가 주님을 사랑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까? 우리와 함께할 때의 느낌으로 인해 그들이 하늘의 아버지가 사랑의 하나님이란 것을 알 수 있습니까? 모든 교훈의 풍조나 사회적 압력 및 세상의 인정이란 유혹에 요동하지 않는 우리를 보며 그들은 안전을 느낄 수 있습니까?(에베소서 4:14 참조)

의로움 속에서 인도하고자 한다면, 우리가 서 있는 위치에 의혹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조그만 불확실함을 갖는다면, 아이들은 보다 커다란 불확실함을 가질 수 있습니다.

어머니로서 우리는 종종 자녀들에게 그들이 인기 있고 인정 받아야 한다는 중압감을 느끼게 하지 않나 하는 의문이 들곤 합니다. 우리의 표준이 곧 주님의 표준이 되도록 우리의 소망을 잘 다스릴 때 주님의 왕국에는 이중 표준이 없다는 명확한 메시지를 보일 수 있습니다.

지난해 11월 힝클리 대관장님께서 청소년들에게 말씀을 주신 후에, 한 청녀는 어머니에게 자신의 청녀 지도자가 귀고리 두 쌍 중의 한 쌍을 떼버렸다고 말했습니다. 관찰력이 좋은 청소년들은 이같이 주목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여러분의 치마 길이가 얼마나 되는지, 또는 블라우스를 입으려고 가먼트를 접어 핀으로 꼽았는지, 앞마당에서 일할 때 무엇을 입고 (또는 무엇을 입지 않았는지), 영화관에서 어떤 영화 줄에 서 있는지를 눈 여겨 봅니다.

우리는 주님과 성약을 맺었으며, 인도하는 것은 종종 그러한 성약에 대한 우리의 결의를 시험하기도 합니다.

한 젊은 어머니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훌륭한 부모가 되려면 엄청난 시간과 힘이 듭니다. 방을 치우는 동안 아이들이 텔레비전 앞에서 잠들게 내버려 두었다가 침대에 눕히는 것이, 그들에게 경전을 읽어 주고 기도하고, 이야기를 해준 뒤, 재우는 것보다 쉽습니다. 그러나 아이들은 밤에 갖는 이러한 행사를 고대합니다. 피곤해서 움직이기조차 힘들 때도 있지만, 저는 이러한 투자가 영원한 배당금을 주리라는 것을 압니다.” 청소년이 현명한 선택을 하고 그들에 대한 우리의 신뢰를 증대시키는 데에는 지속적인 인도가 도움이 됩니다.

열 여섯 살이었을 때 저는 어머니와 아버지가 하시는 말씀을 우연히 들었습니다. 어머니는 제가 내린 어떤 결정들을 걱정하셨습니다. 저는 단지 청소년으로서 미성숙한 것이었을 뿐 다른 심각한 죄를 짓지 않았는데, 어머니는 걱정하셨습니다. 그때 아버지의 한 말씀이 제 마음을 뜨겁게 했습니다. “걱정하지 말아요. 나는 새론을 믿어요. 그 애는 올바른 일을 할거요.” 풀밭에서 보낸 시간들이 그 순간 그곳에서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그 순간부터 저는 사랑과 신뢰를 가진 부모님께 굳게 결속되었습니다.

부모들과 지도자들에게 가장 큰 시험의 하나는 사랑할 수 없을 것 같은 아이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힘든 의무입니다. 우리의 인내심과 무조건적인 사랑의 능력이 시험을 받습니다. 비탄에 잠긴 부모가 도움을 간구할 때, 그 도움은 종종 사랑하는 아이의 주변에 있는 천사 같은 고모나 이모, 삼촌, 할아버지, 할머니, 좋은 친구 등을 통해 옵니다. 그들은, 우리가 간구해 왔던 길로 아이들을 인도할 수 있는 바로 그 메시지를 전해 줄 수 있습니다.

부모가 되는 벅찬 기쁨을 누릴 수 있도록 다음 세대를 준비시키면서, 현명하게 사랑하고 목적을 갖고 인도함으로써 악의 물결을 저지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처음으로 성찬을 전달하는 12살 난 아들을 보고, 아들의 목소리로 성찬 기도를 듣는 그 기쁨들을 결코 잊지 못합니다. 딸이 구세주에 대해 간증하는 것을 듣거나 청녀 메달을 받는 모습을 바라보는 느낌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합당한 동반자와 함께 제단에 마주하고 무릎 꿇은 우리의 자녀를 성전에서 볼 때 우리는 천국의 단면을 봅니다. 그들은 우리에게서 양육을 받아 약속과 성취의 삶을 함께 시작할 준비가 되었습니다. 그때가 바로 추수의 시기입니다.

끝으로 아이를 기르고 사랑하고 인도하는 이 신성한 의무는 혼자서 감당하는 것이 아님을 간증드립니다. 그보다 큰 기쁨은 없습니다. 모든 희생과 불편한 시간과 모든 인내와 개인적 수양과 견딤이 가치 있는 일임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증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