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곱 번째 계명: 방패
일곱 번째 계명을 지키는 것은 참으로 생명을 지키는 방패를 드는 것과 같습니다! 그 방패를 낮추거나 잃어버린다면, 너무도 절실한 하늘의 축복을 잃게 됩니다.
형제 자매 여러분, 여러분과 함께 저는, 예언자로서의 힝클리 대관장님의 사명을 새롭게 깨달았습니다. 저는 그 분이 아주 오래 전에 예임되었다는 것을 간증드리며, 우리는 그 사실을 기뻐합니다.
저는 야곱이 음란과 부정의 문제들, 일부 사람들이 일곱 번째 계명이라 하는 것을 어긴 죄에 관해 기록하면서 내키지 않아 하던 그 느낌을 갖고 있습니다. 야곱은 그의 말을 듣는 사람들이 “지극히 온화하고, 정숙하며, 우아한”(야곱서 2:7) 마음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걱정했고, “이미 상처받은 자들의 상처를 싸매 주거나 아물게 하는 대신 더 크게 하”(야곱서 2:9)기를 원하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도덕의 혹독한 결과에 대한 야곱의 말은 명쾌한 진단일 뿐만 아니라 시적입니다. “많은 처자들이 깊은 상처를 입고 죽었도다.”(야곱서 2:35) 오늘날, 우리는 상처를 입은 채 걸어다니는 수많은 사람들 사이에 살고 있으며, 피해자 명단은 늘어나고 있습니다.
따라서,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진실로 회개하는 사람은 “눈과 같이 희어질”(이사야 1:18) 것이라고 위안을 주는 복음은 마땅히 강조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러나 회개의 고됨과 풍성한 보상에 대해 말씀을 드리려는 것은 아닙니다. 또한 미국 사회에서, 혼전 관계가 잘못되었다고 믿는 사람들이 점점 줄어드는 이 상황에 순결과 정절을 지키는 많은 용감한 청소년들과 성인들에게 마땅한 찬사를 드리려는 것도 이 말씀의 취지는 아닙니다. 그러므로, 저는 계명에 순종하는 신앙을 가진 분들을 칭송하며 아울러 계명을 어겼더라도 “회개할 수 있는 신앙”(앨마서 34:15)을 가진 분들을 격려합니다.
의심할 여지없이, 음란과 부정은 사생아의 출생과 같은 파문을 일으키며 끝나지 않을지도 모를 문제를 가져올 뿐만 아니라 질병이나 가족의 풍비박산을 초래합니다. 너무나 많은 결혼이 “가느다란 실에 매달려” 있거나 이미 그 실이 끊어졌습니다. 이 고요하지만 심각한 위기는 우리 시대에 전쟁을 위시하여 골치가 아픈 국제 위기와 공존합니다. 예수님은 말일에 대해 “땅에서는 민족들이 … 혼란한 중에 곤고하리라”(누가복음 21:25; 교리와 성약 88:91; 45:26 참조)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일곱 번째 계명을 지키는 것은 참으로 생명을 지키는 방패를 드는 것과 같습니다! 그 방패를 낮추거나 잃어버린다면, 너무도 절실한 하늘의 축복을 잃게 됩니다. 그러한 축복들이 없다면 어떠한 개인이나 국가도 오랫동안 번영할 수 없습니다.
너무도 이상한 것은, 자격에 대한 집착이 가득한 이 시대에 사람들은 하늘의 축복을 받기 위해 자격을 갖추는 일에는 거의 관심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보다는 오히려, 궁극적인 불멸에 대해 쇠퇴하는 신앙을 가진 자들이 “사람은 죽으면 그만인 것이라고 말하며 … 많은 사람들을 [끌어내어]”(앨마서 30:18) 눈 앞에 있는 부도덕을 한층 심화 시켜 왔을 따름입니다. 어느 일본 사색가는 쾌락 중심의 서구 사회를 보며 거의 도전적인 평가를 했습니다.
“죽음 너머 아무것도 없다면, 주어진 짧은 생애 동안 쾌락에 완전히 몰입하는 것이 무슨 잘못인가? ‘저 세상’에 대한 신앙의 상실은 현재 서구 사회를 치명적인 도덕 문제로 옭아매고 있다.”(Takeshi Umehara, “The Civilization of the Forest: Ancient Japan Shows Postmodernism the Way,” in At Century’s End, ed. Nathan P. Gardels, ALTI Publishing, [1995], 190쪽)
그러므로, 선한 시민이 되는 것에는 이웃을 탐내는 것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 사이의 명확한 차이를 아는 선한 사람이 되는 일도 포함됩니다. 매튜 아놀드는 현명한 말을 했습니다. “자연은 정절에 대해 전혀 유의하지 않지만, … 인간 본성은 … 그것에 대해 대단히 유의한다.”(Philistinism in England and America, vol. 10 of The Complete Prose Works of Matthew Arnold, ed. R. H. Super [1974], 160쪽) 신의 본성은 그보다 더 무한히 유의한다고 저는 덧붙이겠습니다.
육으로 난 사람의 성향은 일곱 번째 계명에 대적하는 것이며 이 성향은 “육욕적이고, 관능적이며, 악독한”(모사이야 16:3; 모사이야서 3:19; 모세서 5:13 참조) 자기 파괴적 욕망을 수반합니다. 만약 이 세 단어가 귀에 너무 거슬렸다면, 악마가 추구하는 끔찍한 목적을 생각해 보십시오. “만민을 자기처럼 비참하게 만들고자 함이라”(니파이이서 2:27) 비참함은 실로 누군가와 함께하고 싶어합니다!
“육으로 난 자기를 버리는” 가장 좋은 방법 가운데 하나는 육으로 난 사람을 굶기는 것입니다.(모사이야서 3:19) 그가 약해지면, 훨씬 쉽게 몰아낼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그는 유혹의 열차에 올라타 모든 정착역마다 기차표에 구멍을 뚫으려고 강력히 주장할 것입니다. 슬프게도, 옳은 말들은 보편적으로 육으로 난 사람에게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욕정이 “들어와 말씀을 막기”(마가복음 4:19) 때문입니다.
불행히도, 일곱 번째 계명을 어기는 일은 교활한 궤변론자들이 사람은 “무엇을” 하든지 정녕 “죄가 되지 않는다”(앨마서 30:17)고 설득할 때 더욱 쉬워집니다. 그 중에는 귀가 가려운 자들이 있어, 실제로 진리에 미치지 못하는 어떤 것을 듣고 싶어하며, 예리하게 날이 선 지키기 불편한 계명들을 무디게 하고자 하는 사람들의 뒤를 따릅니다.(디모데후서 4:3 참조) 그럼에도 불구하고, 잠언은 변함없이 진리를 그대로 전해 줍니다. “부녀와 간음하는 자는 무지한 자라”(잠언 6:32) 계명은 그 이외의 다른 데에 마음을 쏟는 사람들에 의해 무시됩니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작품 속의 한 인물을 통해 이렇게 말합니다. “세월은 계속 흘러가며, 인류는 그들이 내세우는 현자의 입을 통해 범죄란 없고, 따라서 죄도 없으며, 오직 굶주림만이 있을 뿐이라고 주장할 것이다.”(Fyodor Mikhailovich Dostoevsky, The Brothers Karamazov, trans. Constance Garnett, [1952], 130~131쪽)
악마는 또한 프라이버시라는 개념을 인위적으로 부풀려, 개인의 책임으로부터 미끄러져 나가는 활주로에 윤활유를 치고 있습니다. 결국, 컴퓨터에서 마우스를 몇 차례 클릭하면 여권 검사를 거치지도 않고 적의 영토로 은밀하고 재빨리 넘어갈 수 있습니다. 남아 있는 유일한 억제력은 둔감해진 양심이란 검문소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실내용과 실외용의 두 가지 십계명을 갖고 계시지 않습니다. 회개에 이르는 두 가지 길이 승인된 것도 아닙니다. 안식일의 뉘우침이 약간의 “저주 받은 자의 슬픔”을 생기게는 하지만,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슬픔”이 가져오는 “큰 변화”를 일으키지는 못합니다.(몰몬서 2:13; 모사이야서 5:2; 고린도후서 7:10; 앨마서 5:13~14 참조)
그렇습니다. 우리 필멸의 인간은 여전히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습니다. 이전에 우리의 도덕적인 의지를 보존하려는 전쟁이 하늘에서 치러졌습니다. 그러나, 이 지상에서는 그 위대한 자유의지의 은사가 종종 작은 훌쩍거림조차 없이 정복당합니다!
방패가 되어 주는 일곱 번째 계명을 굳게 자리잡도록 하는 방법은 참으로 많습니다. 교훈이 되는 예를 들자면, 다윗의 타락은 적어도 부분적으로, 자신의 의무가 있는 곳에 있지 않았기 때문에 더욱 용이했습니다. “그 해가 돌아와 왕들이 출전할 때가 되매 … 다윗은 예루살렘에 그대로 있더라”(사무엘하 11:1~2) 여러분도 알다시피 그는 곧 이어 지붕에서 욕망을 일으키는 광경을 보았고 모든 슬픔이 뒤따랐습니다. “거룩한 곳에 서라”는 가르침에 함축된 의미는 태만하게 머물러 있는 일을 피하는 것입니다.(교리와 성약 87:8; 마태복음 24:15 참조)
“행복의 방식을 좇아”(니파이이서 5:27) 사는 사람들은 또한 방어적이고 영적인 몸가짐을 지혜롭게 개발합니다. 이러한 몸가짐은 그들의 바람직한 옷차림, 언어, 유머, 음악 등에 나타나는데, 그로 인해 결연한 제자의 모습을 나타내 보이게 됩니다.(잠언 23:7 참조)
더욱이, 추후에 있을 어려움을 피하는 방법 중 하나는 배우자들에게 불평등한 “멍에를 같이”(고린도후서 6:14) 메게 하는 회개하지 않은 죄를 진 채 결혼하지 않는 것입니다. 또한, 남편과 아내는 자신의 충절을 느슨하게 하기를 단호히 거부하고, 폭포로 흘러가는 급류에 휩싸이지 않음으로써 서로에게서 멀어지는 것을 의도적으로 피할 수 있습니다. 그에 못지 않게 피해야 할 것은 자기 연민이 괴어 있는 늪입니다. 그 안에 사로잡히면, 사람은 양심과 성약이란 억제력을 모두 옆으로 밀어내어 그나마 남아 있는 책임감마저 손쉽게 합리화시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 앞에 미움을 받는 것[을 위해] 사람들 앞에서 [그들 스스로를] 옳다 하려고”(누가복음 16:15 참조) 노력합니다.
관능의 기만적 질주의 본질을 간파하는 것도 또다른 필수적인 보호책입니다. 예를 들어, 부도덕한 생활 방식으로 일곱 번째 계명을 경멸하는 자들 가운데 일부는 아벨을 살해함으로써 여섯 번째 계명을 어긴 후 “나는 자유롭도다”고 선언한 가인과 같습니다.(모세서 5:33 참조) 자유에 대한 그와 같이 그릇된 생각에 대해 베드로는 이러한 경고의 음성을 남겼습니다. “누구든지 진 자는 이긴 자의 종이 됨이라”(베드로후서 2:19; 니파이이서 2:26~32 참조) 귀에 거슬리는 소리를 내는 사람들은 속박과 죄악 속에서도 거짓으로 웃지만, 또다른 잠언이 그런 자에게 적용됩니다. “웃을 때에도 마음에 슬픔이 있고 즐거움의 끝에도 근심이 있느니라”(잠언 14:13)
광고의 진실성에 대해 걱정하는 이 시대에, 어떤 기만적인 상표들은 지적으로 너무도 모욕적입니다. *엑스터시는 비참함이라고 불려야 합니다. *레이브는 난폭하게 날뛰는 관능적 쾌락에서 흘러나오는 음울한 중얼거림입니다. 예를 들면, 어떤 참여자들은 어리석게도 그들의 음란한 춤이 전혀 해롭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무지한 가운데 죄를 [짓는]”(니파이삼서 6:18) 것이 아닙니다. 적을 모방하고 과소평가함으로써, 그들은 자신을 더럽히는 한편 친구들을 실망시키고 혼란스럽게 합니다.
왜 자주, 관능적인 장면의 특징이 반짝였다가 희미해지는 불빛이 되는지 의아하게 생각해 본 적 있습니까? 또는 왜 그토록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는지, 또는 왜 그 모든 소음을 음악으로 가장하는지 아십니까? 그 이유는, 새벽을 두려워하는 악이 밝은 진리의 흔들림없는 빛을 감당할 수 없으며, 영혼을 꿰뚫는 고요한 반성을 견딜 수 없기 때문입니다!
소속감과 사랑을 갈구하는 적법한 필요에 불법적으로 반응함으로써 무감각의 북소리는 영혼의 미뢰(혀의 미각 기관)를 마비시키고, 약탈자와 희생자는 슬프게도 “무디어져”(니파이일서 17:45; 에베소서 4:19; 모로나이서 9:20)갑니다.
헨리 페어리는 “대체로 욕정에 젖은 사람의 생활 중심에 있는 끔찍한 공허함은 어떻게 드러나는가” 하는 문제에 대한 글을 썼습니다.(Henry Fairlie, The Seven Deadly Sins Today [Washington, D.C., New Republic Books, 1978], 187쪽) 여전히, 일부 순진한 청소년들은 유독성 기억이라는 모래와 자갈 찌꺼기만 남고 텅텅 비워질 “물통을 채운다”고 말합니다. 페어리는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육욕이란 상대에게 관심을 갖는 것이 아니라 그 자신의 열망을 만족시키는 것에만 관심을 갖는다. … 육욕은 새벽에 사라진다. 육욕이 밤에 다시 돌아와 있을 만한 곳을 찾을 때, 그 자신의 과거는 이미 지워진 상태이다.”(Henry Fairlie, The Seven Deadly Sins Today [Washington, D.C., New Republic Books, 1978], 175쪽)
아무리 옷을 차려 입고 화장을 했다 하더라도, 육욕은 사랑의 대용품이 아닙니다. 형제 자매 여러분 사실, 육욕은 참된 사랑을 질식시켜 몰아내어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식게 합니다.(마태복음 24:12 참조) “격정을 다스려 사랑으로 차고 넘치게 하라”(앨마서 38:12)는 말씀은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스며 나오는 격정이 차지할 수 있는 영혼의 모든 공간을 채우고, 이중 점유는 전혀 가능하지 않습니다.
예전에는 지나친 개인 행동을 제어해 주는 가족이나 교회, 학교 등과 같은 세심하고 유익한 균형 및 억제 장치가 사회에 흔했습니다. 하지만 이제, 이러한 장치들이 결여되거나 기능 장애를 보이고 모호한 태도를 취합니다.
더욱이, 앞서 말한 경향들은 개인이 어떤 잘못을 하더라도 뭔가 칭찬할 만한 일을 하면 용서될 수 있다는 최신 유행의 무심판주의 의해 더욱 가속화되고 있습니다. 어찌 되었건, 뭇솔리니는 기차가 제 시간에 운행되도록 하지 않았습니까? 일곱 번째 계명의 위반자들이 여전히 유익한 공헌을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은밀하고, 개인적인 대가를 치릅니다.(앨마서 28:13 참조) 모리앤톤 왕에 대해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것을 읽을 수 있습니다. “그는 백성들에게는 의를 베풀었으나 저 스스로는 그러하지 아니하였으니 곧 많은 음행을 행하였음이라.”(이더서 10:11) 분명히, 공정하고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않는 지도자였던 모리앤톤은 자신을 존중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에게 입힌 상처들은 부유함과 건물들이라는 외양적인 장식으로 가렸습니다.(이더서 10:10~12 참조)
앞서 말한 모든 것들은 너무나 진지한 것들이 때문에 뒤이어 한 가지 더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회개하지 않는 죄인들은 어느날 그들이 개인적으로 하나님의 충만한 정의를 경험해야 할 때 그들 자신의 죄에 해당하는 분량 만큼, 우리를 위해 “[예수님께서] 겪으신 것같이 고난을 겪어야”(교리와 성약 19:16~18) 할 것입니다. 한편, 종종 마약에 흠뻑 젖은 부도덕한 드라마를 다양한 방법으로 조장하고 공고히 한 자들은 — 그들이 프로모터든 그 일을 가능케 한 자든, 촉진자든, 혹은 악덕업자든 간에 — 그때가 이르면,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사람들에게 그들이 초래한 모든 불행을 직접 겪고 느끼게 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형제 자매 여러분, 어떤 시기나 상황 속에서, 참된 제자가 되기 위해 기꺼이 홀로 서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순간 이곳에서 기꺼이 그렇게 하려는 우리의 마음은 예수께서 그때, 그곳 겟세마네 동산에서 홀로 무릎을 꿇으셨던 것과 일관됩니다. 속죄의 마지막 과정에서는 “[그분과] 함께 하는 자는 아무도 [없었습니다]”(교리와 성약 133:50; 마태복음 26:38~45 참조)
그럼에도 불구하고, 충실한 자는 그처럼 홀로 있게 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필요에 의해, 겟세마네 동산에서 힘을 북돋아 주기 위해 그리스도 곁에 섰던 천사도 그분을 떠나야 했습니다.(누가복음 22:43 참조) 우리가 하나님과 그분의 계명을 믿는 신앙의 방패를 높을 치켜든다면, 그분의 천사들이 “[우리를] 둘러 있어 [우리를] 감싸” 주며 “[우리를] 지킬”(교리와 성약 84:88; 109:22) 것입니다. 이 약속에 대해 저는 간증드립니다. 그러므로 형제 자매 여러분, 저는 우리 영혼의 날씨의 다이얼은 우리가 맞추는 것임을 간증드립니다. 현세와 내세에 있어서의 행복의 정도는 그렇게 우리가 결정합니다. 우리가 일곱 번째 계명을 포함한 하나님의 계명을 지킬 때 하나님의 손길은 다이얼을 맞추는 우리의 손과 함께 하신다는 것을 또한 간증드립니다. 그 손길은, 가진 모든 것을 주고 싶어하시는 바로 그분의 손길입니다.(교리와 성약 84:38 참조)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말씀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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