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동이 인격을 결정합니다
“대부분의 만남에서, 우리는 반응할 방식을 결정함으로써 자신이 겪게 될 경험의 종류를 결정할 수 있습니다.”
여러 해 전에, 가족과 함께 휴가를 보내면서 큰 교훈을 얻는 경험을 했습니다. 어느 토요일에 저는 아내와 함께 아이들을 데리고 드라이브나 하며 필요한 물건들을 사기로 했습니다. 드라이브를 하는 동안 아이들은 잠에 골아 떨어졌고, 저는 자는 아이들을 깨우고 싶지 않아 아내가 가게에 들어가 물건을 사는 동안 차에 남아 있겠다고 자청했습니다.
기다리는 동안, 앞에 주차해 있던 차가 눈에 띄었습니다. 차에는 아이들이 잔뜩 타고 있었는데, 모두들 저를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예닐곱 살 되어 보이는 어린 소년과 눈이 마주쳤습니다. 눈이 마주치자 그 아이는 즉시 혀를 내밀었습니다.
마음속에 즉각 떠오른 반응은 저도 아이에게 혀를 내미는 것이었습니다. 내가 뭘 어쨌길래 저러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다행스럽게도, 저는 반응을 보이기 전에, 그 전 주에 열렸던 연차 대회에서 마빈 제이 애쉬튼 장로가 가르친 원리를 기억했습니다. (Conference Report, 1970년 10월, 36~38쪽; or Improvement Era, 1970년 11월호, 59~60쪽 참조) 그는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에 단순히 반응하기보다 능동적으로 행동하는 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가르쳤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 어린아이에게 손을 흔들었습니다. 그 아이는 다시 한 번 혀를 내밀었습니다. 저는 미소를 지으며 다시 손을 흔들었습니다. 이번에는 그 아이도 손을 흔들었습니다.
곧 이어 어린 동생들도 합세하여 그 아이와 함께 열렬하게 손을 흔들었습니다. 저도 힘껏 손을 흔들어 주었는데 마침내 팔이 저려 왔습니다. 이윽고 저는 팔을 운전대에 올려놓고 생각해 낼 수 있는 갖가지 독창적인 손 흔들기를 계속했습니다. 그러는 동안 마음으로는 내내 아이들의 부모나 제 아내가 어서 돌아왔으면 하고 간절히 바랐습니다.
마침내 그 아이들의 부모가 돌아와, 차를 몰고 떠나갔는데, 저의 새로 만난 친구들은 보이지 않을 때까지 계속해서 손을 흔들었습니다.
단순한 경험이었지만, 대부분의 만남에서, 우리는 반응할 방식을 결정함으로써 자신이 겪게 될 경험의 종류를 결정할 수 있다는 사실을 실제로 느낄 수 있었습니다. 제 어린 친구의 어린아이같은 행동에 친절하게 대응하기로 선택했던 것이 참으로 즐거웠습니다. 그렇게 행함으로써 본능에 따랐다면 느꼈을 부정적인 느낌을 피할 수 있었습니다.
니파이 백성들에게 구세주께서는 이렇게 가르치셨습니다.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너희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가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니파이삼서 14:12)
만일 모든 사람이 이 “황금률”을 실행한다면 세상에 어떤 영향이 미칠지 생각해 보십시오. 그러나 그렇게 행하는 것은 인간의 타고난 본성과는 반대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베냐민 왕은 “무릇 육으로 난 인간은 … 하나님의 적”이며 “성신이 인도하시는 대로 맡겨 육으로 된 자기를 버리고 … 유순하고 온유 겸손하며 인내하며 사랑이 충만”(모사이야서 3:19) 할 때까지는 그러한 상태에 있게 될 것이라고 선언했습니다.
급변하는 오늘날의 세상에서 사람들이 서로를 공격적으로 대하는 경향은 더욱 짙어지는 듯합니다. 어떤 이들은 실제적인 모욕이나, 모욕으로 여겨지는 언동에 대해 쉽게 성을 내고 분노를 표출합니다. 우리 모두는 운전하는 동안의 폭력적인 언동이나, 무례하고 배려심 없는 다른 행위들의 예를 듣거나 직접 겪습니다.
불행하게도 일부 이러한 행동들이 우리의 가정에도 들어와 가족들 가운데서 갈등과 긴장을 일으키기도 합니다.
받은 것을 그대로 다시 갚아 줌으로써 상황에 반응하는 것이 당연한 듯 보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되어야 할 필요는 없습니다. 전시에 자신이 겪은 잔혹한 체험을 숙고하며, 빅토르 프랭클은 이렇게 회상했습니다. “포로 수용소에서 생활했던 우리는, 간이 막사들을 돌아다니며 다른 사람들을 위로하고 자신에게 남은 마지막 빵을 주던 사람들을 기억한다. 비록 그 수는 얼마되지 않았지만 그들은 인간에게서 모든 것을 앗아갈 수 있어도 단 하나만은 결코 앗아갈 수 없음을 보여 주는 충분한 증거였다. 그 하나는 바로 인간에게 남은 마지막 자유, 주어진 어떤 환경 속에서도 자신의 태도를 선택할 수 있는 자유, 곧 자신의 길을 택하는 자유였다.” (Man’s Search for Meaning. New York: Washington Square Press, 1985 [1959], 86쪽; emphasis added)
그것은 고귀한 행동이며 높은 기대이지만, 예수님은 그보다 낮은 것을 기대하지 않으십니다. 그분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마태복음 5:44)
애창되는 한 찬송가에 이러한 가르침이 한층 강력하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형제여 네 느낌을 다스리고
네 뜨거운 마음의 충동을 다스리며
네 감정을 숨막혀 죽게 하지 말며
다만 지혜의 음성이 그것을 다스리게 하라
(“School Thy Feelings,” Hymn, 336쪽)
우리가 내리는 결정과 행동하는 방식이 궁극적으로 우리의 인격을 형성하게 됩니다. 찰스 에이 홀은 이러한 시구로 그 과정을 능숙하게 묘사합니다. “생각을 심고 행동을 거두며, 행동을 심고 습관을 거두며, 습관을 심고 성품을 거둔다.”(quoted in The Home Book of Quotations, sel. Burton Stevenson [1934], 845쪽)
우리의 행동이 가장 중요한 의미를 갖는 곳은 바로 가정입니다. 그곳은 우리의 행동이 좋게든 나쁘게든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곳입니다. 때로 우리는 너무 편한 나머지 말을 삼가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단순한 예절마저 잊습니다. 그러나 삼가하지 않는다면, 서로를 비난하고, 화를 내거나, 이기적으로 행동하는 습관에 빠져들 수 있습니다. 우리의 배우자들과 자녀들이 우리를 사랑하기 때문에 쉽게 용서할 수도 있겠지만, 종종 그들은 보이지 않는 상처와 말로 표현하지 못할 가슴의 아픔을 묵묵히 안고 지내기도 합니다.
자녀들이 부모를 두려워하거나 아내가 남편을 두려워하는 가정이 너무나도 많이 있습니다. 우리의 지도자들은 “아버지는 자신의 가족을 사랑과 의로움으로 다스”릴 것을 상기시켜 주었으며 또 “배우자나 자녀를 학대하 … 는 사람들은 언젠가 하나님 앞에 책임지게”(가족: 세상에 전하는 선언문, 8, 9 문단) 될 것이라고 경고했습니다. 악마는 가정에서 다툼과 분쟁과 두려움의 분위기를 촉진하면, 주의 영이 슬퍼하고 또 가족을 하나로 묶어 주어야 할 유대가 약해진다는 점을 알고 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친히 이렇게 선언하셨습니다.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서로 다투는 정신을 가진 자는 내게 속한 자가 아니요, 악마에게 속한 자니 악마가 분쟁의 아비가 됨이라. 저가 사람의 마음을 책동하여 서로 성내게 하며 다투게 하는도다.” (니파이삼서 11:29)
가정에서 분노나 다툼이 일어난다면, 어떤 권세가 우리의 생활을 지배하며 사탄이 어떤 일을 획책하고 있는지 즉시 인식해야 합니다. 솔로몬은 다음과 같은 현명한 공식을 우리에게 주었습니다. “유순한 대답은 분노를 쉬게 하여도 과격한 말은 노를 격동하느니라”(잠언 15:1)
가정은 가족 모두가 안전을 느끼고 보호와 사랑을 받으며 세상에서 흔히 직면하는 거친 비난과 다툼으로부터 절연된 이상적인 안식처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스도는 모든 상황 속에서도 자신의 감정을 다스리는 완전한 모범을 보이셨습니다. 가야바와 빌라도 앞에서 사람들은 그분을 주먹으로 치고 손바닥으로 때리며 침을 뱉고 조롱했습니다.(마태복음 26장, 누가복음 23장 참조) 참으로 역설적인 사실은 그들이 자신들에 대한 사랑으로 그러한 고난을 받으시는 창조주를 조롱했다는 것입니다.
이토록 불의한 학대를 겪으면서도 예수님은 평정을 지키시며, 불친절하게 행동하시기를 거부하셨습니다. 심지어 십자가에 달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고통을 겪으시면서도,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누가복음 23:34) 하고 간구하셨습니다.
그분은 우리에게 같은 것을 기대하십니다. 그분을 따르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요한복음 13:35)
친절과 사랑의 방법으로 우리의 가정을 강화하여 그분의 제자됨을 보이도록 합시다. “유순한 대답은 분노를 쉬게” 한다는 점을 기억하여 우리가 갖는 관계와 만남 속에서 구세주께서 인정하실 만한 인격을 형성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완전한 모범이십니다. 그분은 우리의 구세주이며 구속주이십니다. 그분에 관해 간증드립니다. 우리는 오늘날 살아 계신 예언자에 의해 인도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말씀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