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우리 영혼에 쉼을 얻는 것에는 마음과 정신의 평안이 포함됩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교리를 배우고 따를 때 나타나는 결과입니다.
스웨덴 예테보리 중심가에는 양편으로 아름다운 나무들이 서 있는 넓은 가로수길이 있습니다. 어느 날 저는 거대한 나무 한 그루가 몸통에 구멍이 나 있는 것을 보고 호기심 어린 눈으로 안을 들여다 보았습니다. 그 나무는 속이 완전히 비어 있었습니다. 속은 비었지만 그렇다고 아무것도 없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 안은 온갖 쓰레기로 가득했습니다.
나무가 그렇게 서 있는 것이 신기할 정도였습니다. 위를 올려다 보니 나무의 몸통 상부에 걸쳐진 널따란 철제 띠가 보였습니다. 그 띠에 달린 쇠줄 여러 가닥은 인근 건물에 단단하게 고정되어 있었습니다. 멀리서 보면 그 나무는 여느 나무들과 다르지 않았습니다. 안을 들여다 봐야만 강하고 단단한 몸통은 없고 속이 텅 비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아주 오래 전에 어떤 일이 일어나 여기저기서 조금씩 나무의 몸통을 약화시키는 일이 시작되었을 것입니다. 하루 밤새 일어난 일이 아니었습니다. 묘목이 조금씩 자라 튼튼한 나무가 되듯이, 우리는 우리 위치에서 한 걸음씩 성장하여 안에서부터 채워나가야만 속이 빈 나무와 달리 단단해질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에 담긴 치유의 힘을 통해 크고 강해져서 빛과 이해력, 기쁨과 사랑으로 우리 영혼을 가득 채울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그들 모두에게 그에게로 나아와 그의 선하심에 참여하도록 권하시며, 또 그는 그에게로 나아오는 자는 …… 아무도 거절하지 아니하[십니다.]”(니파이후서 26:33) 주님께서는 이렇게 약속하셨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마태복음 11:28~29)
이런 쉼에 관해 조셉 에프 스미스 회장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목적과 그분의 계획을 믿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여, 우리가 바른 길을 걷고 있고, 다른 것을 추구하지 않으며, 모든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치 않고, 속이려는 자들의 속임수에 넘어가지 않는 것을 뜻합니다. 우리는 그것이 하나님의 교리임을 알고 있으며, 우리는 이에 대하여 누구에게 어떠한 질문도 하지 않습니다. 물론 견해와 생각과 변덕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깊이 믿어 모든 의심과 두려움을 물리쳐 버린 사람은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간 사람[입니다.]”(교회 회장들의 가르침, 조셉 에프 스미스[1998년], 56쪽)
우리 영혼에 쉼을 얻는 것에는 마음과 정신의 평안이 포함됩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교리를 배우고 따르며 또한 그리스도의 베푸는 손길이 되어 다른 사람에게 봉사하고 도움을 주었을 때 나타나는 결과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분의 가르침을 따를 때 굳건한 소망이 생기며, 이런 소망은 우리 영혼의 견고한 닻이 됩니다. 굳건하여 흔들리지 않게 됩니다. 내적 평안을 끊임없이 누릴 수 있습니다. 주님의 안식으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빛과 진리에서 돌아선다면 속이 빈 나무처럼 우리 영혼의 가장 깊숙한 곳까지 공허함이 자리할 것이며, 그 빈자리를 영속적이지 않은 무가치한 것으로 채우려 할 것입니다.
우리가 지상으로 오기 전에 영의 자녀로 있었을 때와 이 다음에 갈 불멸의 세상을 생각해 볼 때, 이 지상 생활은 참으로 짧습니다.
이 시기는 비록 시험의 날이긴 하지만 우리의 시험의 날을 허비하지 말라는 권고를 따른다면 또한 우리에게 기회의 날이 되기도 합니다.(니파이후서 9:27 참조) 머릿속에 머무는 생각, 마음속에 품는 감정, 하겠다고 선택한 행동, 이 모든 것들은 이생과 내세에서 우리 삶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입니다.
좋은 습관을 들이면 매일 우리의 시야가 높아져서 우리가 계획하고 행하는 일들에 대해 영원한 관점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특히 우리가 현재인 오늘 해야 한다고 알고 있는 일들을 미래인 내일까지 미루는 경향이 있는 경우는 더더욱 그렇습니다.
생활하면서 우리는 영의 영향력을 통해 선택하는 데 도움을 받을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있는 빛과 이해력에 어긋나게 행하기로 한다면, 양심에 가책을 받을 것입니다. 그것은 물론 좋은 느낌이 아닙니다. 하지만 지금이 바로 회개할 때라는 것을 즉시 알게 된다는 점에서 양심의 가책은 축복입니다. 우리가 겸손하고 또 옳은 일을 소망할 때에는 우리의 방식을 즉시 바꾸고 싶겠지만, 교만하고 또 “스스로에게 율법이 되기를”(교리와 성약 88:35) 구하는 사람은 회개의 영이 그 마음속에 찾아오지 않는 한 사탄에게 “아마 줄로 목을 매어 그들을 이끌기를 그의 강한 줄로 그들을 영원히 결박하기까지”(니파이후서 26:22) 허용하기 마련입니다. 악한 영향력을 따르면 절대로 평안을 느낄 수 없습니다. 간단히 말해 평안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선물이며, 오직 하나님의 영을 통해서만 오기 때문입니다. “간악함은 결코 행복이 아[닙니다.]”(앨마서 41:10)
우리가 일상에서 하는 작고 단순한 일이 영향을 오래도록 미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앨마서 37:6~7 참조) 우리가 하는 말, 하는 행동, 대응하는 방법이 우리 자신뿐만 아니라 주변 사람들에게도 영향을 줄 것입니다. 발전할 수도 있고 아니면 퇴보할 수도 있습니다. 저희 할머니에 관한 이야기는 단순하고 좋은 사례라고 생각합니다. 할머니는 어린 자녀에게 달걀 몇 알을 사오라고 심부름을 보내셨습니다. 그 착한 자녀는 즐거운 발걸음으로 길을 걸어서 집으로 돌아왔는데, 도착해서 보니 그만 달걀이 대부분 깨져 있었습니다. 그 자리에 있던 가족의 친구 한 사람이 아이가 잘못을 했으니 야단을 쳐야 한다고 옆에서 말했습니다. 그런데 할머니께서는 차분하고 지혜롭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닙니다. 야단친다고 해서 달걀이 다시 온전해지지는 않습니다. 깨진 달걀로 팬케이크를 만들어서 맛있게 먹어야겠습니다.”
작고 단순한 일상적인 일을 현명하고 신선한 방법으로 처리하는 방법을 배우면, 서로 화합하는 마음이 굳건해지고, 주변 사람들을 발전시키고 강화하는 좋은 영향력을 낳게 됩니다. 이는 선을 행하도록 이끄는 것은 모두 “그리스도의 권능과 은사로 말미암아 보냄을 받은 것이라, 그런즉 [우리]는 그것이 하나님께 속한 것인 줄을 완전한 지식으로 알”(모로나이서 7:16)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여러분께 말씀드린 그 속이 빈 나무는 이제 그곳에 없습니다. 어떤 청소년들이 폭죽을 그 안에 넣어서 불이 났기 때문입니다. 나무를 살릴 수 없었기 때문에 결국 나무는 뽑히고 말았습니다. 크든 작든 안에서부터 파괴하는 것들을 부디 조심하시기 바랍니다. 그 파괴력은 폭발적이어서 영적인 죽음을 초래할 수 있습니다.
마음과 정신의 평안을 유지할 수 있는 것들에 집중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면전에서 [우리의] 확신이 점점 강하여[질]” 것입니다.(교리와 성약 121:45) 주님의 안식으로 들어가고, 평안의 은사를 받는 약속은 순간적이고 세상적인 만족과는 거리가 멉니다. 참으로 이는 하늘에서 온 천상의 은사입니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요한복음 14:27) 주님께는 영혼을 치유하고 북돋아주시는 힘이 있습니다. 그분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이 모든 것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증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