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지자 학교와 엔다우먼트
1834년 봄, 조셉 스미스는 오하이오 주 커틀랜드에 있는 신권 소유자가 모두 모인 자리에서 교회의 숙명에 대한 자신의 전망을 밝혔다. 그것은 모임에 참석한 누구도 상상하지 못한 내용이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여러분은 이 교회와 왕국의 운명에 대해 어머니의 무릎에 있는 아기만큼밖에 모릅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예언했다. “여러분은 오늘 밤 이곳에서 신권 형제 몇 명만을 보고 계실지 모르지만, 이 교회는 남미와 북미를 가득 채울 것입니다. 세상을 가득 채울 것입니다.”1
이는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에게는 흥분되면서도 버거워 보일 만한 예언이었음이 분명하다. 그들은 미국과 캐나다의 여러 지역에서 사람들에게 침례를 주며 선교 사업에서 이미 많은 성과를 거두고 있었다. 그러나 자신들이 온 세상에 복음을 전하게 되리라는 것을 생각하면, 그들은 분명 한계를 느꼈을 것이다. 겨우 몇 명 되지 않는 회원으로 이루어진 이 교회가 어떻게 전 세계적인 종교로 발돋움할 수 있다는 것인가? 주님의 뜻이 성취되도록 교회의 장로들이 어떻게 도울 수 있을까?
신성한 도움을 약속받다
예수께서는 신약전서에서 사도들이 앞으로 나아가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할]” 때, 하늘에서 도움을 주겠다고 약속하시고,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으로 입혀질 때까지 [예루살렘] 성에 머물라.”2라고 지시하셨다. 1831년, 주님께서는 성도들에게 이와 비슷한 약속을 주셨다. 바로, 성도들은 오하이오에 집합한 후 “높은 곳에서 오는 권능을 부여받[을 것이며]” 그런 뒤 복음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 세상에 보내지리라는 것이었다.3 훗날에는 이 권능을 부여받는다는 말, 즉 엔다우먼트는 나부 성전에서, 그리고 그 이후에 다른 성전들에서 집행되는 일련의 의식으로 이해되었지만[endowment의 동사형인 endow는 주다, 부여하다라는 뜻임—옮긴이], 1830년대에는 이것이 오순절에 강한 영이 임했던 것처럼, 복음을 전하러 가는 사람들에게 말 그대로 기적적인 권능이 부여되거나 주어지는 것으로 이해되었다.4
현재는 교리와 성약 88편이 된, 1832년 12월 하순과 1833년 1월 초에 받은 계시에서 주님께서는 세상 사람들에게 증언하고 경고하게 하시고자 “[당신께서] 또다시 [그들을] 보[내실] 때에 [그들이] 모든 일에 준비가 되어 있[도록]” 그들이 해야 할 일을 세세하게 언급하셨다.5 주님은 계시에서 교회 회원들에게 조직을 갖추고, “서로 가르치[며,]” “하나님의 집”을 지으라고 명하셨다. 또한 신약전서에서 명하셨던 것과 같이 장로들에게 이르시기를, 커틀랜드에 “머물[러]” 학교에서 교육받고 강화되어, “마지막으로 이방인 가운데 나아가서 … [그들]의 성역에서 온전하게 되[라.]”6라고 하셨다.
선지자 학교에서 배우다
성도들은 이 계시에 따라 커틀랜드에 “선지자 학교를 세우기”7 시작했다. 선지자 학교라는 개념은 후기 성도만의 전유물은 아니다. 17세기와 18세기에 하버드와 예일은 성직자를 훈련하는 신학대학이었으며, 두 학교 모두 선지자 학교로 불리기도 했다. 훗날, 제2차 대각성 운동(19세기 초 미국에서 일어난 광범위한 종교 부흥운동)과 관련된 개혁 운동이 일어나자 성직자를 양성하는 사립 학교들이 같은 이름으로 설립되었다.8
초기의 후기 성도들은 대부분 학교의 설립자들만큼 재원이 있거나 교육을 받은 사람들은 아니었지만, 그들은 신앙으로 전진했다. 성도들이 모일 주님의 집도 없던 때였으면서도, 1833년 1월 22일과 23일에 그들은 커틀랜드의 뉴얼 케이 휘트니 상점 위층 작은 방에서 선지자 학교를 공식적으로 조직했다. 1월 22일 모임에는 남성과 여성이 모두 참석했지만, 학교는 원래 신권에 성임된 남성들을 위해 마련된 것이었다. 첫 모임에 참석한 사람들은 방언으로 말하는 등 “성령이 신성하게 임재하는 것”9을 경험했다.
정해진 장소에서 계획된 일정에 따라 학기제로 운영되는 통상적인 학교와 달리, 선지자 학교는 장소를 바꿔가며 간헐적으로 열렸다. 커틀랜드와 같은 농촌 지역은 겨울철이 되면 교육 등의 활동에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할 수 있었다. 첫 번째 열린 선지자 학교는 약 석 달 정도 계속되다가 4월에 끝이 났다.10 다음으로 “선지자 학교”, “나의 사도들의 학교”, “장로 학교” 등 여러 이름으로 불렸던 학교들이 같은 해 여름에 미주리에서, 1834년 가을에 다시 커틀랜드에서, 그리고 1835년부터 1836년 사이의 겨울에 교회 인쇄소 또는 공사가 끝나지 않은 커틀랜드 성전의 다락방에서 열렸다.11
1832년 12월의 계시에서는 선지자 학교의 교과 과정에 대해 구체적인 지침이 주어졌는데, 이는 종교적인 주제와 세상적인 주제가 모두 다뤄져야 한다는 것이었다. 참가자들은 “복음의 이론, 원리, 교리, 그리고 율법”에 정통해야 했고, 하늘과 땅, 그리고 땅속을 아울러 세상에 관한 모든 것을 배워야 했다. 그들은 선지자의 계시를 통해 미래를 바라보는 관점으로 역사를 배우고 현재 일어나는 사건들을 배워야 했으며, 외국에 대해서도 배워야 했다. 선지자 학교에서는 정식 임명된 교사만이 아니라 참석자들도 가르치면서, “모두가 모두에게서 교화[될]” 수 있도록 돌아가며 말씀을 전하는 식으로 가르침을 주고받았다.12
현재는 교리와 성약 90편이 된 1833년 3월 8일에 주어진 계시를 통해 새로 임명된 교회의 제일회장단에게 선지자 학교를 관리하는 “열쇠”가 주어졌다. 조셉 스미스는 시드니 리그돈의 도움을 받아 영적인 것을 다루는 과목을 이끌었던 것으로 보인다. 선지자 학교는 현재 신앙강좌로 알려진 일곱 개의 신학 강의가 이뤄진 곳이다. 이들 강의는 교리와 성약의 초기 판본들에 포함되어 있었는데, 당시 교리와 성약은 이 강의의 내용이 “교리”로 지정되어 전반부에 수록되었고, 후반부에는 “성약”, 즉 계시가 수록되어 있었다. 신앙강좌는 1830년대 초에 신학적으로 중대한 공헌을 한다.13
영문법을 필두로 한 언어 학습은 조금 더 전통적인 교육의 주된 부분이 되었다. 선지자 학교에 참석했던 장로들 대부분은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 못한 사람들로, 조셉가 그랬듯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읽기, 쓰기, 기초 산술만 겨우 배웠다”고 해도 무리가 아닌 사람들이었다.14 올슨 하이드는 어려서 고아가 되어 정규 교육을 거의 받지 못한 사람이었지만, 터득하는 것에 재능이 있었던 그는 교사로 임명되었다.15 조셉 스미스는 저녁에 집으로 돌아가면 가족들을 곁으로 불러 모아 그날 선지자 학교에서 배웠던 문법 강의를 그대로 가르치기도 했다.16 1836년에 진행된 히브리어 과정은 인근 대학에서 온 유대인 교수가 가르쳤으며, 선지자 학교의 많은 학생이 이 수업에 참석했다.
깨끗하게 되고 단합하여
초기 성도들은 선지자 학교 덕분에 기존에 접하던 것보다 더 많은 교육을 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선지자 학교는 사실과 개념을 배우는 것 이상의 것을 목적으로 하는 곳이었다. 1세대 후기 성도들은 개인적인 명예를 매우 중시하고, 겉으로 드러나든 드러나지 않든 모욕을 받으면 강경하게 대처하는 것을 당연히 여기며, 또 그렇게 하도록 부추기는 문화에서 성장했다. 선지자 학교의 질서로서 계시된 내용에는 참가자들이 그런 문화의 단점을 극복하도록 돕는 것이 포함되어 있었다. 선지자 학교는 의례를 행함으로써 깨끗하게 되는 것과 단합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장로들은 “이 세대의 피에 대하여 깨끗하[게]” 되고 세상과 구별되기 위해 몸을 씻는 의례에 동참했다.17 각 장로가 자기 얼굴과 손, 발을 씻으면, 조셉 스미스는 요한복음 13장 4~17절에서 예수께서 보이신 모범과 교리와 성약 88편 138~141절에 있는 가르침에 따라 한 사람 한 사람의 발을 씻어 주었다. 조셉은 선지자 학교에 새로 들어온 일원의 발을 씻겨 주었으며, 선지자 학교의 다른 모임에서도 이 의례를 반복했다.18 훗날, 발 씻음을 포함하는 씻음 및 기름 부음은 새로 헌납된 커틀랜드 성전에서 거행된 성회를 위한 준비의 일부가 되었으며, 이러한 씻음은 성회의 독특한 특징이 되었다.
일상에서 깨끗함에 대한 관심이 커지자 선지자 학교에서도 그 영향이 나타났다. 한 참가자는 학교에 가기 전에 매번 “몸을 씻고 깨끗한 아마 옷을 입었다.”19라고 회고했다. 또한, 선지자 학교의 일원들이 담배를 씹으면서 생긴 쓰레기로 에머 스미스가 불평을 하자 지혜의 말씀으로 알려진 계시가 주어지기도 했다.20
발을 씻는 데는 정결을 상징하는 것 외에 장로들의 단합을 꾀하려는 의도도 있었다. 주님은 계시에서 장로들을 향해 “서로 사랑하[고] 서로 결점 찾기를 그치라.”라고 거듭 촉구하시며, “만일 너희가 하나가 되지 아니하면, 너희는 나의 것이 아니니라.”라고 경고하셨다.21 조셉 스미스는 하나 됨은 권능을 부여받기 위한 전제조건이자 시온을 정의하는 요소 중 하나라고 가르쳤다.22 오하이오와 미주리의 교회 지도자들 간에 화합을 이루는 것은 조셉 스미스가 지속적으로 추구했던 목표였으며, 그는 발 씻음에는 영적으로 깨끗해지는 것 외에도 “우리가 똑같이 인식하고 느낄 수 있도록 우리 마음을 단합시키려는 의도가 있었다.”23라고 가르쳤다.
선지자 학교에 들어갈 때를 위해 고안된 인사법은 다툼의 문화 속에서도 화합을 이루려는 의도가 담겨 있었다. 인사를 나눌 때는 회장 또는 교사가 먼저 들어가서 하늘을 향해 손을 들어 올리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대는 형제 또는 형제들인가? 나는 영원한 성약의 표시 또는 기념으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네게 인사하노니, 이 성약에 따라 나는 사랑의 띠 안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통하여 그대의 친구와 형제가 되고 영원무궁토록 감사하며 흠 없이 하나님의 모든 계명 안에서 행하고자 하는 확고부동하며 변하지 않는 결의로써 그대를 동료로 받아들이노라. 아멘.” 학교에 들어가려는 사람은 그 성약문을 따라서 말하기도 했고, 간단히 “아멘”이라고 답하기도 했다.
선지자 학교에 참석한 이들은 함께 성찬도 취했는데, 당시의 성찬은 오늘날 후기 성도에게 친숙한 방법인 빵 한 조각과 물 한 모금으로 취하는 것이 아니라 아마도 최후의 만찬에 버금가는 양을 취하는 식이었던 것 같다. 제베디 콜트린은 이렇게 회고했다. “자르기 좋은 따뜻한 빵이 주먹만 한 크기로 잘려서 전달됐고, 사람들은 포도주를 한 잔씩 들고 앉아서 빵을 먹고 포도주를 마셨다.”24
약속을 성취하고자 노력하다
단합을 위해 마련한 이러한 의식에도 불구하고 화합은 쉽게 이뤄지지 않았다. 첫 번째로 열린 선지자 학교는 1833년 4월에 참석자 여럿이 선교사로 부름받으며 마무리되었는데, 6월에 받은 계시(교리와 성약 95편)에서는 당시에 열린 선지자 학교가 불협화음으로 끝났음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선지자 학교에서 다툼이 일어났으니, 이는 내게 심히 비통한 일이었느니라.” 주님은 같은 계시에서 성도들이 주님의 집을 짓는 일을 아직 시작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그들을 질책하셨고, 그곳은 “나의 사도들의 학교”를 위한 장소라고 재차 강조하셨다. 또한, 새로운 성전 안에서 있을 “성회”에서 오랫동안 기다렸던 “엔다우먼트”가 주어질 것이라고 약속하셨다.
미주리와 오하이오의 교회 지도자들은 1834년부터 커틀랜드에 모여서 선지자 학교에 참석하거나 엔다우먼트를 받게 될 성회를 준비했다. 두 무리의 지도자들은 그간도 서로 잘 어울린 것은 아니었으나, 이 기간에는 더욱더 불화가 두드러졌다. 그 무렵 올슨 하이드는 다른 사도이자 조셉의 동생인 윌리엄 스미스와 벌인 언쟁을 두고 조셉 스미스에게 통렬한 편지를 보냈다.25 하이드는 이 일이 해결될 때까지 선지자 학교에 참석하지 않았다. 하이드의 문제는 곧 일단락되었지만 무리를 어지럽히는 다툼은 수그러들지 않았다. 조셉 스미스는 이렇게 말했다. “대적은 십이사도와 칠십인 사이에 분열을 일으키고 장로들 사이에 논쟁과 시기를 조장하며 성도들이 엔다우먼트를 받지 못하도록 온갖 교묘한 수를 다 동원하고 있다.”26
다행히도 1835년과 1836년 사이의 겨울에 이르러서 오랫동안 소망해 온 교회 내의 화해와 화합이 실현되었다. 조셉 스미스와 그의 동생 윌리엄 스미스는 종종 주먹질이 오갈 만큼 손상됐던 관계를 회복했다.27 제일회장단과 십이사도 정원회 사이에 일어난 의견 충돌은 감정적인 면에서 화해하고 선지자 학교의 인사 의례와 비슷한 성약을 맺음으로써 종식되었다.28 얼마 뒤, 조셉 스미스는 새롭게 단합한 교회 지도자들이 모여 말씀을 전했던 교회의 모임에 관해 일지에 다음과 같이 적었다. “주께서 우리에게 그분의 영을 부어 주셨고, 형제들은 자기 잘못을 서로 고백하기 시작했다. 회중은 곧 주체할 수 없이 눈물을 흘렸으며, 몇몇은 형용하기 어려운 느낌에 휩싸였고, 우리에게 폭풍이 몰아치듯 방언의 은사가 임했다. 내 영혼은 하나님의 영광으로 가득 찼다.”29 이렇게 단합하여 하나님께서 용납하심을 눈으로 확인한 그들은 약속된 엔다우먼트를 받고자 자신을 준비해 가고 있었다.
풍성하게 영이 임하다
장로들이 하나님의 뜻에 따라 생활하고 엔다우먼트를 받기 위해 준비하는 동안, 선지자 학교에는 여러 차례 기적 같은 영적인 나타내심이 일어났다.30 조셉 스미스는 성회에서 일어난 그러한 나타내심은 “하나님께서 선사하실 기쁨을 알리는 전주”와 같았다고 말했다.31
1836년 3월, 마침내 커틀랜드 성전이 헌납될 준비를 마치자 조셉 스미스는 이 역사적인 날에 올릴 기도를 준비하며 인도를 구했다. 계시를 통해 주어져 지금은 교리와 성약 109편에 수록된 이 기도에서는 권능이 있는 엔다우먼트를 받고자 오랫동안 준비하며 선지자 학교에서 다루었던 여러 주제가 언급되었다. 배움, 영적인 깨끗함, 조직과 단합, 선교 사업 등이 이러한 주제에 속했다.
오랜 시간 고대했던 성전 성회에서는 많은 이가 권능이 있는 엔다우먼트라고 단언할 만큼 강렬한 영적 경험을 했다. 조셉 스미스는 이렇게 기록했다. “구주께서 나타나신 것을 본 사람도 있었고, 천사들의 모습을 본 사람들도 있었다. 또한, 오순절과 같이 이곳에서부터 온 세상에 소리가 울려 퍼지며, 이런 날이 있었다는 사실이 성스러운 역사에 기록되어 온 세대에 길이 전해지리니 가히 이날이 오순절이요, 엔다우먼트의 날이로다.” 그 주에 있었던 커틀랜드 성전 헌납식에서는 더 많은 영적 나타내심과 시현이 있었다.32
1836년 4월 3일 일요일, 조셉 스미스와 올리버 카우드리가 성전 연단에서 기도할 때 예수 그리스도와 하늘의 많은 사자가 그들을 방문했다. 그리스도는 조셉과 올리버가 깨끗하다고 말씀하셨으며, 그들이 주님을 위해 지은 집을 받아들이셨고, “[당신의] 종들이 이 집에서 … 엔다우먼트[를 받았음]”을 확인하셨다. 곧이어 그들은 모세에게 “땅의 사방으로부터 이스라엘을 모으[는] … 열쇠들”을 받았으며, 고대의 다른 선지자들에게 다른 열쇠들도 받았다.33 그들이 보기에 약속은 이미 성취되었으며 장로들은 커틀랜드에 더 머물 필요가 없었다.
만국으로 나아가
그 후 여러 달에 걸쳐, 복음을 전파할 선교사들이 커틀랜드에서 출발했다. 올슨 하이드와 히버 시 킴볼은 1837년에 영국으로 건너갔다. 이 때의 선교 사업과 뒤이어 영국에서 행해진 선교 사업으로 수천 명이 예수 그리스도 후기 성도 교회에 들어와 교회의 진로를 바꾸어 놓았다. 1844년에 조셉 스미스는 이렇게 적었다. “이 교회의 선교사들은 동인도 제도, 호주, 독일, 콘스탄티노플, 이집트, 팔레스타인, 태평양제도에 나가 있으며, 지금은 광활한 러시아 영토의 문을 열고자 준비하고 있다.”34 선지자 학교에서 교육을 받고 커틀랜드 성전에서 권능을 부여받은 이들이 크게 기여한 이러한 선교 노력은 온 세상에 회복된 복음이 퍼져 나가는 서막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