콜스빌 지부의 여정
조셉 스미스는 홀로 첫번째 시현을 경험하고 그 후 모로나이 천사를 만났지만 그의 가정에서는 혼자가 아니었다. 그의 어머니와 아버지, 형제자매들은 든든한 지원군이 되어 주었다. 조셉은 부모님을 신뢰할 수 있었으며, 형제자매들에게 의지할 수 있었다. 조셉의 아내 에머는 조셉과 함께 통솔에 대한 요구와 부담, 반대, 박해를 감당했다. 마틴 해리스, 올리버 카우드리, 데이비드 휘트머, 존 휘트머 등과 같은 그 밖의 친구들은 조셉이 몰몬경을 출현시키고, 교회를 조직하고, 시온 사회를 건설하는 일의 기반을 놓는 동안 그의 곁에서 함께해주었다.
조셉이 많은 시련과 고난을 겪는 동안 그에게 힘과 지지를 보내준 사람들 중에는 그들 못지 않게 주목할 만한 사람들이 있었는데, 바로 뉴욕 주 콜스빌에 있던 나이트 가족과 그 이웃들이었다. 그들은 젊은 조셉 스미스와 결연하여 그를 따라 이제 막 시작하는 교회에 입교했고, 그를 옹호하며, 교회의 첫 지부 중 하나가 조직될 때 핵심 구성원이 되어주었다. 나이트 가족과 콜스빌 지부에 관한 일화는 복음의 회복과 주님 왕국의 건립에 있어서 친족과 우정이 가지는 힘을 입증한다.
콜스빌 성도들의 역사는 조셉이 그 지역을 찾아간 1820년대 중반에 시작되었는데, 당시에 그는 조시아 스톨에게 고용되어 뉴욕 주 사우스베인브릿지 근방에 있는 실패한 보물 발굴 사업 현장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그 일이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지만 조셉은 그 일을 계기로 조셉 나이트 일세 및 그의 아들 뉴얼 나이트와 친분을 맺게 되었다. 이후, 조셉 나이트 일세는 조셉이 에머 헤일에게 구혼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그는 조셉 스미스가 에머의 도움을 받아 쿠모라 산에서 몰몬경 판들을 꺼내 가지고 오던 밤에 스미스 가족의 농가에 있었으며, 조셉이 몰몬경을 번역하는 동안 그에게 음식과 필기 재료를 제공해 주었다.
나이트 가족들과 그들의 몇몇 이웃들은 1830년에 교회에 가입한 첫 회원들에 속해 있었다. 그해 후반에 그들은 교회에서 조직된 (첫 지부가 아니라면) 첫 지부 중 하나의 핵심 구성원이 되었다. 1830년 7월에 조셉은 현재 교리와 성약 24편과 26편에 나오는 두 개의 계시에서 나이트 가족을 포함하여 콜스빌에 있는 회원들을 방문하고 “경전을 연구하는 일과 전도하는 일과 콜스빌에 있는 교회를 확인하는 일”에 시간을 바치라는 권고를 받았다.1(교리와 성약 26:1 참조) 하이럼 스미스는 1830년 후반에 그 지역에 머무르며 몇 달 동안 그 지부를 감리했다. 그의 뒤를 이어서 조셉 나이트 일세의 아들인 뉴얼이 그 지부를 감리했다.
오하이오로의 이주
1830년 12월과 1831년 1월에 뉴욕에 있는 회원들에게 오하이오 밸리 지역으로 이주하라는 지시가 내려오자(교리와 성약 37편 및 38편), 콜스빌 지부 회원들은 재정적으로 엄청난 희생을 치르며 서쪽으로 이주할 준비를 했다. 콜스빌 지부에 속했던 가족들 중에는 나이트 가족, 펙 가족, 드밀 가족, 스트링햄 가족, 컬버 가족, 슬레이드 가족, 배저 가족, 하인즈 가족, 카터 가족이 포함되었다. 모든 사람이 오하이오에 집결해야 했으며, 가난한 사람들이 뒤에 남겨지지 않도록 해야 했다. 1831년 4월에 그 지부 회원들은 자신의 이전 삶과 집을 뒤로하고 뉴얼 나이트의 통솔을 받아 커틀랜드 지역으로 향하는 여정을 시작했다. 5월에 도착한 그들은 “계속 함께한 채로 이웃 도시인 톰슨으로 가라”는 권고를 받았는데, “그곳에 상당히 많은 땅을 갖고 있던 [레먼] 코플리라는 사람이 그 땅을 교회 회원들에게 제공했기 때문이었다.”2
코플리는 아마도 일찍이 1831년 초에 오하이오 성도들 사이에서 제기되었던 중요한 질문에 대한 응답으로 주어진 계시(교리와 성약 48편)에 응하기 위해 그 땅을 제공했다. 그 질문은 “우리가 동부 지역에서 올 형제들을 위해 어떤 준비를 언제, 어떻게 해야 합니까?” 였다.3 그 계시로 온 응답은 “너희에게 토지가 있는 만큼, 너희는 동부의 형제들에게 나누어 줄지니라.” 였다.4(교리와 성약 48:2 참조) 코플리는 콜스빌 지부 회원들을 맞이했으며, 그들은 톰슨에 도착하자 곧바로 307헥타르의 커다란 농장에 농작물을 심고 건물을 짓기 시작했다.
5월 20일에 조셉 스미스는 현재 교리와 성약 51편으로 확인된 또 다른 계시를 받았는데, 그것은 톰슨에 정착한 이들이 앞서 계시된 헌납과 청지기 직분의 원리를 제일 먼저 따르는 회원들 중에 속해야 한다는 지시였다. 새로 부름 받은 에드워드 파트리지 감독은 “나와 성약을 맺은 이 백성들의 재산을 받아” “이 백성에게 그 가족에 따라, 그 …… 부족과 필요에 따라, 모든 사람에게 균등하게 그들의 몫을 정해” 주어야 했다.5(교리와 성약 51:3 참조) 그 계시는 오하이오가 일시적인 집합 장소가 될 것임을 분명히 했지만 그들에게 미래의 시온 도시로 이주할 “시와 그 날은 그들에게 주어지지 아니하였[음을]” 상기시켰다. 그들은 “여러 해 동안 있을 것같이 이 땅에서 활동[해야]” 했다.6(교리와 성약 51:17 참조)
그러나 콜스빌 지부 회원들은 그 헌납의 법을 실행하라는 계명을 따를만한 시간적 여유를 별로 갖지 못했다. 5월 초에 레먼 코플리는 자신이 이전에 속했던 셰이커 교도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임무에 참여하면서 자신의 땅을 나눠주겠다던 결심이 시험대에 올랐다. 그 경험은 그의 간증을 약화시키는 의심을 일으키는 듯했으며, 톰슨으로 돌아온 직후에 그는 자신의 계약을 파기하고 성도들을 자신의 소유지에서 쫓아냈다. 1831년 6월, 장래가 불투명하고 생활이 불안정해지자 나이트 가족과 다른 콜스빌 지부의 회원들은 어떻게 해야 할지 알고자 조셉 스미스에게서 권고와 인도를 구했다.
현재 교리와 성약 54편으로 알려진 다음과 같은 지시가 계시의 형태로 주어졌다. “너희는 서쪽 지역으로 여행을 떠나 미주리 땅으로, 레이맨인의 경계 지역으로 갈지니라. 그리고 너희가 여행을 마친 후에, 보라, 내가 네게 이르노니, 내가 너희를 위하여 장소를 예비할 때까지 사람들처럼 생계를 찾으라. 그리고 또, …… 환난 중에 인내하라.”7(교리와 성약 54:8~10 참조) 뉴얼 나이트는 이후에 그 상황을 이렇게 설명했다. “우리는 이제 [오하이오]가 우리의 기업의 땅, 곧 약속의 땅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 미주리가 교회의 집합지로 선택된 장소였음이 계시로 알려졌기 때문이며, 몇몇 사람이 미주리로 가는 길을 인도하도록 부름을 받았다.”8 다시금 함께 뭉친 콜스빌 회원들은 그 여정을 떠날 준비를 했다. 그들은 뉴얼 나이트가 이미 계시에 의해 복음을 전하도록 부름을 받았음에도(교리와 성약 52편 참조) 불구하고 그를 계속해서 자신들을 감리할 사람으로 선택했다. 교리와 성약 56편이 된 계시에서 그는 선교사 부름을 취소하고 대신에 콜스빌 지부의 수장으로서 미주리로 여행하라는 승인을 받았다.
미주리로의 이주
1831년 6월 초에 60명의 그 지부 회원들은 톰슨을 떠나 약 1600킬로미터를 여행하여 7월 26일에 미주리 주 잭슨 군에 있는 코 군구에 도착했다. 조셉 스미스가 콜스빌 성도들보다 조금 일찍 그곳에 도착하긴 했지만, 그들은 시드니 리그돈이 1831년 8월 2일에 시온으로 헌납한 그 땅에 정착하는 교회의 첫 지부라는 명예를 얻게 되었다. 안타깝게도 조셉 나이트 일세의 아내인 폴리는 그곳에 도착하고 나서 며칠 후에 사망했다. 조셉 스미스의 이후 역사 기록에 따르면, 그는 “폴리 [펙] 나이트 자매의 장례식에 참석했다. …… 그것은 이 땅에서 교회 안에 일어난 첫 사망이었으며, 한 합당한 회원이 부활하는 날까지 예수님 안에서 잠든 것임을 알고 있다.”9
바로 그날, 조셉은 현재 교리와 성약 59편으로 알려진 계시를 받았는데, 교회가 주님의 날을 어떻게 준수해야 하는가를 개략적으로 설명하는 계시였다. 그 계시에는 주님이 폴리 나이트 가족과 친구들에게 주신 위안의 말씀이 다음과 같이 포함되어 있다. “나의 계명에 따라 나의 영광만을 전념하여 구하면서 이 땅에 올라온 자들은 복이 있도다. 이는 사는 자들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이요 죽는 자들은 그들의 모든 수고를 떠나 쉴 것이며 그들의 업적이 그들을 따를 것임이라. 또 그들은 내가 그들을 위하여 예비한 나의 아버지의 거처에서 면류관을 받으리라.”10(교리와 성약 59:1~2 참조)
조셉 스미스는 1832년 4월에 미주리에 있는 콜스빌 지부의 회원들을 다시금 방문했다. 그 방문에서 조셉은 그 지부 회원들을 영생으로 인봉했다.11 1833년 잭슨 군에서 폭도의 습격을 받았을 때 콜스빌 지부 회원들은 다른 많은 성도들과 함께 인접해 있는 클레이 군으로 도피했다. 그들은 함께 한동안 그곳에 정착하며 예배당까지 지었다. 그러나 1836년에 교회가 콜드웰 군으로 옮겨가게 되자, 그 지부 회원들은 뿔뿔이 흩어졌으며 교회에서 처음으로 조직된 단위 조직 중 하나로서 함께했던 그들의 시간은 끝을 맞이했다.
나이트 가족을 비롯하여 그 지부의 다른 회원들은 1838년의 미주리 몰몬 전쟁 직후에 일리노이로 달아나는 다수의 성도들에 합류했다. 나이트 가족은 나부 지역에 정착하여 충실한 교회 회원이자 조셉 스미스의 친구로 남았다. 1844년 조셉의 순교 후에 나이트 가족은 십이사도 정원회의 인도를 따랐다. 조셉 나이트 일세와 그의 아들 뉴얼은 1847년 나부에서 솔트레이크밸리로 향하는 대이동 중에 사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