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시를 구하도록 “역사하시매”
“성탄절이라 하루 종일 집에서 가족과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이런 특권을 오랜 시간 동안 마음껏 누린 유일한 날이었다.” 1835년 12월 25일자 조셉 스미스의 일지에 기록된 내용이다.1 그다음 날인 토요일에 조셉이 몇몇 동료들과 함께 앉아 “히브리어 공부를 시작하는데” 누군가가 문을 두드렸다. 문 밖에 서 있던 사람은 그의 친구 라이먼 셔먼이었다. “나는 영의 속삭임에 따라 자네에게 내 감정과 소망을 말해 주려고 왔네.”라고 셔먼 형제는 말했다. “나는 내 임무를 알려줄 계시를 받을 것이라는 약속을 받았네.”2 이 요청의 결과로 현재 교리와 성약 108편에 나와 있듯이 개인적인 영적 보증에 관한 간결하고도 강력한 말씀이 담긴 계시가 주어졌다. 또한 그 보증의 말씀으로 라이먼 셔먼은 더 중요한 일의 중심에 서게 되었다.
“네 영혼이 쉼을 얻고”
1835년 그해 겨울에 라이먼 셔먼은 31세였으며, 침례 4주년이 다가오고 있었다. 일찍이 1831년 가을에 그의 아내 델세나의 형제들 중 일을 하러 집을 떠난 두 형제가 “몰몬 백성”의 신설 교회에서 침례를 받았다는 글을 가족에게 써 보냈다. 델세나의 형제 벤저민은 “그 소식이 우리에게 거의 공포와 치욕으로 다가왔다”고 회상했다. 그 첫 편지가 도착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 두 명의 힐 형제는 몰몬경과 그들의 새로운 믿음에 대한 “장문의 설명”이 담긴 소포를 보냈다. 벤저민은 그 소포를 받은 후에 이렇게 적었다. “어머니와 세스 형, 낸시 누이, 라이먼 알 셔먼, 몇몇 이웃들, 종교에 헌신적인 모든 사람이 비밀리에 만나서 몰몬경과 동봉된 편지를 읽으며 형들을 빠져들게 한 망상을 찾아내려 했다.”
처음에 품었던 그런 의심은 “곧 그들이 읽은 내용의 평이함과 순수함에 놀라고, 그와 더불어 그 책이 참되다고 증거하는 영에 놀라면서” 사라졌다.3 라이먼 셔먼과 델세나 셔먼 및 존슨 가족의 몇몇 구성원들은 1832년 1월에 침례를 받았다. 셔먼의 가족들 또한 개종했다.4 셔먼 가족은 1833년 중반 무렵에 커틀랜드로 이사하였으며, 그곳에서 조셉 스미스를 비롯하여 많은 성도들을 알게 되었다. 그들의 아들 앨비는 조셉 스미스 삼세와 나이가 비슷해 그 두 소년은 친구가 되었다.5
셔먼은 성도들을 사랑하고 회복된 복음에 대한 확고한 신앙을 갖고 있긴 했지만 자신이 가진 제자로서의 자질에 대해서는 의심했던 것이 분명하다. 우리는 그 계시를 통해 셔먼이 요청한 과정에는 선지자 조셉에게 구하라는 영의 속삭임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주님은 라이먼이 “나의 음성에 순종하여 …… 이리로 올라[왔다]”고 말씀하심으로써 그가 그렇게 하라는 영의 음성을 받았음을 확인시켜 주셨다. “다시는 내 음성에 항거하지 말라”는 주님의 권고는 셔먼이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입장을 알고자 영적으로 깊고도 통렬한 추구를 했을 때 그런 느낌을 여러 번 받았으나 그것에 따라 행하기를 주저했음을 시사한다. 그 추구에 대한 응답으로 그 계시에서는 그에게 그의 죄가 사함 받았음을 확신시키며 “네 영적 입장에 관하여 쉼을 얻[으라]”고 친절하게 알려 주었다.6(교리와 성약 108:1~2 참조)
“너는 …… 기억될 것이요”
그 계시는 또한 주님이 “[자기의] 의무를 알게 해 주[실]” 것이라고 말하며 셔먼의 간청에 대해 답을 주었다. 그는 이미 부상하는 교회의 신권 조직에서 지도자로 봉사하고 있었다. 1835년 초반에 그는 전해 여름에 시온 진영과 함께 “시온으로 여행한 이들의” 모임에 참석했었다. 이 모임에서 조셉 스미스는 시온으로 갔던 사람들이 “성직에 성임되어 마지막으로 포도원을 손질하도록 나아가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발표하였으며, 그리하여 이 경륜의 시대의 첫 십이사도들이 부름을 받았다.7 2주 후에 “십이사도들이 요청하는 곳이면 어디이든 온 세상으로 가도록” 첫 칠십인 정원회가 조직되었다.8 라이먼 셔먼은 칠십인의 일곱 회장 중 한 명으로 성임되었다.(교리와 성약 107:93~94 참조) 셔먼은 성임 축복에서 다음과 같은 약속을 받았다. “그대의 신앙은 흔들리지 않을 것이며 그대는 큰 고난으로부터 구함을 받을 것이니라. …… 그대는 주님의 택한 그릇이노라.”9
하지만 그들이 “온 세상으로” 나가기 전에 라이먼 셔먼을 포함한 칠십인은 1836년 봄에 성전 헌납과 관련된 몇몇 행사에서 주요 참여자가 되어야 했다. 라이먼 셔먼에게 주어진 그 계시에서는 다음과 같은 권고가 주어졌다. “나의 종들에 의해 성회가 소집될 때까지 참고 기다리라. 그리하면 너는 나의 첫 장로들과 함께 기억될 것이요, 내가 택한 나의 나머지 장로들과 함께 성임에 의해서 권리를 받으리라.”(교리와 성약 108:4 참조) 이 약속은 셔먼이 커틀랜드 성전의 헌납식에서 열린 성회와 당시 성도들에게 주어진 영적 부어주심 및 “권능의 엔다우먼트”의 서곡이 되는 여러 모임과 의식에 참여하면서 성취되었다.
“네 형제들을 굳게 하라”
라이먼 셔먼이 커틀랜드에서 성도들에게 행한 봉사는 그가 “[그의] 형제들을 굳게 하라”는 그 계시의 권고를 마음으로 받아들였음을 보여준다. 당시 커틀랜드 성전 헌납식에 참석하지 못해 영적 부어주심도 받지 못한 젊은 칠십인 윌포드 우드럽은 셔먼의 영적 지도력에 주목했다. 성전에서 집행된 한 놀라운 성찬식에서 우드럽은 이렇게 기록했다. “셔먼 장로님은 방언의 은사로 노래를 불렀으며, 하나님의 권능과 영을 받아 크고 기이한 것들을 선포했다.”10 1836년~1837년 겨울 동안에 칠십인들은 매주 화요일 저녁에 성전의 다락층인 서쪽 방에서 모임을 했는데,11 한번은 이런 모임에서 셔먼이 열두 명의 형제들을 칠십인 제삼 정원회로 성임했다. 12 이 시기에 있었던 주요 사건으로는 성전의 헌납을 기념하고 그 전해에 참석하지 못한 이들에게 의식을 베풀기 위해 4월 첫째 주에 열린 두 번째 성회가 있었다.
내부의 불화에 외부의 반대가 가세하여 교회를 적대할 때, 라이먼 셔먼과 그의 가족은 조셉 스미스에게 충실히 남아 그 힘든 시기에 성도들을 강화하도록 도왔다. 셔먼은 1837년 10월에 커틀랜드 고등평의회에 지명되었다.13 그는 미주리 주 파웨스트로 이주하였으며, 그곳에서 1838년 가을에 파웨스트 고등평의회에 지명되었다.14 이 무렵, 조셉 스미스와 교회의 다른 지도자들은 수감되어 있었으며, 미주리에 있는 성도들은 폭도들을 피해 필사적으로 도망을 치던 중이었다. 벤저민 존슨에 따르면, 셔먼은 감옥에 있는 선지자 조셉을 방문하러 갔으며, 그 여행의 결과로 “감기에 걸려” 몹시 앓게 되었다.15 그러는 사이 1839년 1월 16일에 제일회장단은 선임 사도들인 브리검 영과 히버 시 킴볼에게 라이먼 셔먼을 십이사도 정원회의 공석 중 하나를 채우도록 임명하는 서한을 보냈다.16 킴볼은 자신과 영이 1839년 2월 8일에 리버티 감옥에 있는 조셉 스미스를 방문했다고 기록했다. 그는 자신들이 파웨스트를 떠날 때 “라이먼 셔먼의 건강이 별로 좋지 않았다”고 말했다. “우리가 돌아오고 나서 며칠 후 그는 사망했다. 우리는 그에게 그의 임명을 알리지 못했다.”17
한 충실한 형제의 현세적 성직이 조용히, 갑작스럽게 끝나고 말았다. 셔먼의 죽음은 그의 아내 델세나와 어린 여섯 자녀의 고난을 의미했으며, 사실상 그들은 일리노이와 이후 유타에서 빈곤한 생활을 이어가게 되었다.18 초기의 아주 많은 성도들과 마찬가지로 라이먼 셔먼은 시온을 건설하는 대업에 자신의 삶을 바쳤으며 가난과 반대와 불확실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선지자 조셉 스미스를 기꺼이 따랐다. 그의 처남은 “그가 매우 성실하고,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 설교가였다”고 회고했다.19 그는 “네 모든 대화로, 네 모든 기도로, 네 모든 권면으로, 네 모든 행함으로 네 형제들을 굳게 하라”(교리와 성약 108:7 참조)는 주님의 명을 이행하는 데 온전히 삶을 바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