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8장
교만을 조심하십시오
“교만은 널리 행하여지고 있는 죄이며, 큰 악입니다. 교만의 치료제는 겸손입니다.”
에즈라 태프트 벤슨의 생애에서
교회 회장으로서 처음 맞은 연차 대회에서 에즈라 태프트 벤슨 회장은 교만과 겸손의 차이에 대해 가르쳤다.
“교만은 하나님을 받들지 않는 것이며, 무엇이 옳은지 상관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것은 사람을 곁눈질로 보게 하고 누가 옳은지 다투게 합니다. ……
교만은 ‘하나님께서는 나의 생에서 나에게 무엇을 하게 하실 것인가?’보다는 ‘나는 이 생에서 무엇을 얻을 것인가?’로 특징지어집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에 반대되는 자신의 뜻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을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겸손은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두려움과 주위 사람들의 필요 사항에 대한 하나님의 뜻에 응답하는 것입니다. 교만한 이는 세상 사람들의 찬사가 귓전에 맴돌겠지만, 겸손한 이는 하나님의 칭찬으로 마음이 따뜻해집니다.”1
이런 가르침은 십이사도 정원회에서 벤슨 회장과 함께 봉사했던 사람들에게는 익숙한 것이었다. 그들은 정원회 회장으로서 그가 자신의 견해에 대해서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뜻을 알고 따르는 것에 대해서만 걱정한다는 것을 알았다. 훗날 십이사도 정원회의 회장이 된 보이드 케이 패커 회장은 정원회 모임에서 토론에 접근하는 벤슨 회장의 방식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토론을 할 때 그것을 개인적인 것으로 받아들일 것이라는 염려 없이 벤슨 회장님과 다른 의견을 낼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그분의 견해가 어떠할지에 대한 걱정없이 의제들에 대해 충분히 토론했습니다.”2 벤슨 회장이 십이사도 정원회를 이끌 때 그 밑에서 2년 동안 봉사했던 러셀 엠 넬슨 장로는 이렇게 말했다. “어떤 것을 고려할 때, 그것이 그분의 의견이 아닐지라도 벤슨 회장님은 오직 하나의 기준, 즉 어떤 것이 왕국을 위해 최선인가 하는 기준에 비추어 상황을 판단하셨습니다. 자신이 해 왔던 방식과는 다르게 처리해야 하더라도 받아들이셨습니다. 그분은 왕국을 위해 최선의 것만을 원하셨습니다.”3
정부 지도자로서도 벤슨 회장은 하나님의 왕국을 위해 최선의 것을 행하고자 똑같이 헌신했다. 미국 농무장관으로 일할 때 그는 험한 비판도 많이 받았지만 “세상 사람들의 찬사”4 역시 많이 받았다. 하지만 그는 그 둘 중 어느 것에도 크게 마음을 두지 않았다. 그 대신에 아내인 플로라에게서 자주 받았던 이 조언에 충실했다. ”당신이 주님과 함께하고 있다면, 세상의 의견은 신경쓰지 마세요.”5 그는 고요한 “하나님의 칭찬”6에 만족하고 늘 하나님의 뜻을 따르려 노력했다.
에즈라 태프트 벤슨의 가르침
1
주님은 교만을 조심하라고 우리에게 경고하셨다.
교리와 성약은 몰몬경이 “타락한 백성의 기록”(교리와 성약 20:9)임을 말해 줍니다. 왜 그들은 타락했습니까? 그것은 몰몬경의 주요 메시지의 하나입니다. 몰몬경은 끝부분에서 이와 같이 답해 줍니다. “볼지어다, 이 나라 곧 니파이 백성의 교만이, …… 그들의 멸망이 되었도다.”(모로나이서 8:27) 우리가 그 타락한 백성들로부터 나온, 중요한 몰몬경의 메시지를 놓지치 않게 하시려고, 주님은 교리와 성약에서 이렇게 우리에게 경고하십니다. “너희가 옛날의 니파이인같이 되지 않도록 교만을 조심하라.”(교리와 성약 38:39)
저는 간절히 여러분의 신앙과 기도의 도움을 구하며, 몰몬경의 메시지인 교만이라는 죄에 초점을 맞추고자 합니다. 이 메시지는 얼마 동안 저에게 큰 부담이 되어 왔습니다. 저는 주님께서 지금 이 메시지가 전달되기를 원하신다는 것을 압니다.
전세의 회의에서 아침의 아들인 루시퍼가 떨어져 나간 것은 바로 교만 때문이었습니다.(니파이후서 24:12~15; 또한 교리와 성약 76:25~27; 모세서 4:3 참조) 하나님께서 세상의 종말에 불로 세상을 깨끗하게 하실 때, 교만한 사람은 초개와 같이 될 것이며, 온유한 이는 땅을 상속받을 것입니다.(제3니파이 12:5; 25:1; 교리와 성약 29:9; 조셉 스미스-역사 1:37; 말라기 4:1 참조)
교리와 성약에서 주님은 교회의 두 번째 장로인 올리버 카우드리와 선지자의 아내 에머 스미스에게, 경고의 말씀을 포함하여, “교만을 조심하라”는 말씀을 세 차례에 걸쳐 하셨습니다.(교리와 성약 23:1; 또한 25:14; 38:39 참조)7
2
교만의 핵심적인 양상은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적대감이다.
교만은 잘 깨닫지 못하는 죄이며, 많은 사람이 무지한 채로 죄를 짓고 있습니다.(모사이야서 3:11; 제3니파이 6:18 참조) 경전에는 의로운 교만 따위의 말은 없습니다. 교만은 언제나 죄로 간주됩니다. 그러므로 세상 사람들이 어떻게 말하든,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 단어를 어떻게 사용하시는지를 이해하여 거룩한 기록에 있는 말들을 알고 거기서 유익을 얻을 수 있어야 합니다.(니파이후서 4:15; 모사이야서 1:3~7; 앨마서 5:61 참조)
우리는 대체로 교만을 자기 중심, 자만, 자랑, 거만함, 또는 오만함으로 생각합니다. 이러한 것은 모두 죄의 요소이지만, 중심 또는 핵심이 여전히 빠져 있습니다.
교만의 핵심적인 양상은 적대감, 즉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적대감입니다. 적대감이란 ‘증오의 감정, 적개심 또는 반목’을 의미합니다. 바로 이 힘으로 사탄은 우리를 지배하고자 합니다.
교만은 근본적으로 경쟁심에서 나옵니다.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고 우리 뜻대로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 교만하게 되면 ‘하나님의 뜻대로가 아니라 내 뜻대로’ 하려 들게 됩니다. 바울이 말한 대로, “다 자기 일을 구하고 그리스도 예수의 일을 구하지 아니[합니다.]”(빌립보서 2:21)
하나님의 뜻보다 우리의 뜻에 더 치중하면 소망, 욕망, 감정을 다스리지 못하게 됩니다.(앨마서 38:12; 제3니파이 12:30 참조)
교만한 사람은 그들의 삶을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권세를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힐라맨서 12:6 참조) 하나님의 위대하신 지혜보다는 진리에 대한 자신의 지각을, 하나님의 신권 권능보다는 자신의 능력을, 주님의 놀라우신 업적보다는 자신의 성취를 더 내세웁니다.
하나님에 대한 적대감은 반항, 강퍅한 마음, 완고함, 회개치 않음, 자랑, 쉽게 성냄, 표적을 구함 등 여러 형태로 나타납니다. 교만한 사람은 하나님이 자기의 뜻에 동의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뜻에 맞추어 자신의 의견을 바꾸는 데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이처럼 널리 퍼진 교만이라는 죄의 다른 중요한 측면에는 이웃에 대한 적대감이 있습니다. 우리는 매일같이 자신을 다른 사람보다 높게 생각하고 그들을 낮추어보려는 유혹을 받습니다.(힐라맨서 6:17; 교리와 성약 58:41 참조)
교만한 사람은 다른 사람보다는 자신의 지성과 의견, 행실, 부, 재능, 또는 기타 세상적인 평가 기준을 내세움으로써 모든 사람을 적으로 만듭니다. 시 에스 루이스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교만은 무언가를 갖고 있는 데서 즐거움을 얻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이 갖고 있는 데서 즐거움을 얻는다. 비교하는 것, 즉 다른 사람의 위에 있다는 즐거움을 얻는다. 비교하는 것, 즉 다른 사람의 위에 있다는 즐거움은 인간을 교만하게 한다. 비교의 요소가 사라지면, 교만도 사라진다.”(Mere Christianity, New York: Macmillan, 1952, pp. 109–10.)
전세의 천국 회의에서 루시퍼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옹호한 하나님의 계획과 경쟁하여 자신의 제안을 내놓았습니다.(모세서 4:1~3 참조) 그는 다른 모두보다 존경받고 싶어 했습니다.(니파이후서 24:13 참조) 간단히 말해서 그의 교만한 욕망은 하나님을 쫓아내는 것이었습니다.(교리와 성약 29:36; 76:28 참조)
경전에는 개인이나 단체, 도시, 나라에 대한 교만이라는, 그 죄의 심각한 결과가 낳은 증거로 가득합니다. “교만은 패망의 선봉[입니다.]”(잠언 16:18) 교만은 니파이인의 나라와 소돔 시를 멸망시켰습니다.(모로나이서 8:27; 에스겔 16:49~50 참조)8
3
교만한 사람은 하나님의 심판보다 인간의 심판을 더 두려워한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것도 교만 때문이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주장하셨기 때문에 분노했으며, 그것은 또한 그들의 지위를 위협하는 것이었으므로 예수님을 죽이려는 음모를 꾸몄습니다.(요한복음 11:53 참조)
사울은 교만했기에 다윗을 적대시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많은 이스라엘 여인들이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사무엘상 18:6~8)라고 노래했기 때문에 질투가 났습니다.
교만한 사람은 하나님의 심판보다는 인간의 심판을 더 두려워합니다.(교리와 성약 3:6~7; 30:1~2; 60:2 참조) 교만한 사람에게는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하는 것이 하나님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실까?” 하는 것보다 더 큰 비중을 차지합니다.
노아 왕은 선지자 아빈아다이를 풀어 주려 했으나 그의 사악한 제사들이 그의 교만에 호소하여 아빈아다이를 불길 속에 처넣게 했습니다.(모사이야서 17:11~12 참조) 헤롯은 침례 요한의 목을 베라는 아내의 요청을 받고 슬퍼했습니다. 그러나 곁에 “앉은 사람들”에게 좋게 보이려는 교만한 욕망 때문에 요한을 죽이게 했습니다.(마태복음 14:9; 또한 마가복음 6:26 참조)
인간의 판단을 두려워하는 것은 사람들의 인정을 받고자 하는 데서 나타납니다. 교만한 사람은 “사람의 영광을 하나님의 영광보다 더”(요한복음 12:42~43) 사랑합니다. 우리가 하는 일의 동기를 보면, 죄가 어디에 있는지가 곧 나타납니다. 예수님은 “항상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요한복음 8:29) 하셨다고 하셨습니다. 우리의 동기가 자신을 우리 형제나 다른 사람보다 높이 올리려는 것이 아닌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리려는 데 있다면 더 좋지 않겠습니까?
교만한 일부 사람들은 월급으로 자신에게 필요한 것을 해결할 수 있는가 하는 것보다는 월급이 다른 사람보다 많은가에 관심을 쏟습니다. 그들이 얻는 것은 다른 사람보다 조금 낫다는 것뿐입니다. 이것이 교만의 적대감입니다.
교만이 마음에 자리를 잡게 되면, 세상 사람들로부터 벗어나지 못하고 다른 사람들의 판단에 속박당하게 됩니다. 세상 사람들은 성신의 속삭임보다 더 강하게 유혹합니다. 논리를 따지는 사람은 하나님의 계시를 무시하고, 교만한 이는 쇠막대를 지나칩니다.(니파이전서 8:19~28; 11:25; 15:23~24 참조)9
4
교만은 많은 면에서 나타난다.
교만은 다른 사람에게서는 곧바로 찾아볼 수 있으면서 자신에게 있는 것은 거의 인정하려 들지 않는 죄입니다. 우리는 대부분 교만이란 자기보다 못한 사람들을 내려다보는 부자나 학식 있는 자와 같이 지위가 높은 사람들의 죄로 생각합니다.(니파이후서 9:42 참조) 그러나 우리 사이에서 훨씬 더 흔히 보게 되는 문제는 밑에서 올려다보는 사람들에게서 나타나는 교만입니다. 그것은 결점 찾기, 험담, 비난, 불평, 분수에 넘는 생활, 질투, 탐심, 배은망덕, 용서하지 않고 시기함 등 너무나 많은 면에서 나타나고 있습니다.
불순종은 우리보다 권세가 높은 사람에 대항하여 싸우는, 근본적으로 교만한 힘입니다. 그 대상은 부모나 신권 지도자, 교사, 그리고 마침내는 하나님이 될 수 있습니다. 교만한 사람은 누군가 자기 위에 있다는 사실을 싫어합니다. 그것이 자신의 위치를 낮게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기심은 좀 더 흔히 보는 교만의 한 모습입니다. “모든 것들은 나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 하는 것은 자기 기만, 자기 연민, 세상적인 자기 성취, 자기 만족, 자기 본위와 같은 모든 문제의 중심이 됩니다.
교만은 세상의 영광과 힘을 얻기 위해 세워지는 비밀 결사를 낳습니다.(힐라맨서 7:5; 이더서 8:9, 16, 22~23; 모세서 5:31 참조) 소위 비밀 결사라 부르는, 교만의 죄에서 맺히는 열매가 야렛인과 니파이인 문명의 몰락을 초래했습니다. 교만은 지금까지 많은 나라를 멸망시켜 왔으며, 앞으로도 그렇게 할 요인이 될 것입니다.(이더서 8:18~25 참조)
교만의 다른 모습은 논쟁입니다. 말다툼, 싸움, 불의한 지배, 세대 차이, 이혼, 배우자 학대, 폭동, 소요 등 이러한 모든 것은 교만의 범주에 포함됩니다.
가정에서 하는 논쟁은 주님의 영을 쫓아냅니다. 또한 많은 가족을 쫓아냅니다. 논쟁은 거친 말에서부터 세계 도처의 분쟁에 이르기까지 그 범위가 다양합니다. 경전은 우리에게 “교만에서는 다툼만 일어날 뿐이라”(잠언 13:10; 또한 잠언 28:25 참조)고 말해 줍니다.
경전은 교만한 자는 쉽게 화내며 악의를 품는다고 증거합니다.(니파이전서 16:1~3 참조) 그런 사람은 그것을 마음속에 담아 두고, 용서하지 않으며, 상처받은 자신의 감정을 정당화하려 듭니다.
교만한 자는 권고나 시정을 쉽게 받아들이지 않습니다.(잠언 15:10; 아모스 5:10 참조) 자기 방어는 자신의 연약함이나 실패를 정당화하고 합리화하기 위한 것입니다.(마태복음 3:9; 요한복음 6:30~59 참조)
교만한 자는 자신이 가치가 있는지, 없는지에 대한 판단을 세상 사람들에게 맡깁니다. 그들의 자긍심은 세상적인 면에서 얼마나 성공했는지를 판단하는 타인의 의견에 따라 정해집니다. 업적, 재능, 아름다움, 지적인 면에서 저 밑에 있는 사람들의 수가 많이 있다면 자신이 가치 있다고 느낍니다. 교만은 추한 것입니다. 그것은 “당신이 성공했다면, 나는 실패한 것입니다.”라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분의 뜻을 행하며, 인간의 판단보다는 하나님의 심판을 더 두려워한다면, 우리는 자긍심을 갖게 될 것입니다.10
5
교만은 발전을 저지하거나 멈추게 한다.
교만은 그 말 자체로 보면 저주스러운 죄입니다. 그것은 발전을 저지하거나 멈추게 합니다.(앨마서 12:10~11 참조) 교만한 사람은 쉽게 가르침을 받지 못합니다.(니파이전서 15:3, 7~11 참조) 그렇게 하면 자신이 잘못되었음을 인정한다는 뜻이라고 생각하기에 진리를 받아들여 마음을 바꾸려 하지 않습니다.
교만은 우리와 하나님, 그리고 그분 종과의 관계, 남편과 아내, 부모와 자녀, 고용주와 고용인, 교사와 학생의 관계 등 모든 인류의 관계에 나쁜 영향을 미칩니다. 우리의 교만 수준에 따라 우리가 하나님과 우리 형제 자매들을 어떻게 대하는지가 결정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그분이 계신 곳으로 올려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을 그렇게 해 주고자 열망합니까?
교만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이며 다른 사람과 형제 관계라는 느낌을 희미해지게 합니다. 교만은 우리의 “부와” 우리의 “배움을 위한 기회”에 따라 우리를 “계층으로”(제3니파이 6:12) 구분하고 나눕니다. 교만한 사람에게 단합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나 하나가 되지 않는 한 우리는 주님의 것이 아닙니다.(모사이야서 18:21; 교리와 성약 38:27; 105:2~4; 모세서 7:18 참조)
교만으로 우리 생활, 우리 가정, 교회에서 자신이 어떠한 대가를 치러 왔고, 치르고 있는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교만으로 우리가 죄를 고백하고 버리는 일에서 제약을 받지 않는다면, 회개를 통해 생활이 변하고, 결혼 생활이 안정되고, 가정이 강화될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해 보십시오.(교리와 성약 58:43 참조)
감정이 상하고, 교만했기에 용서를 못하고 주님의 식탁에 온전히 앉을 수 없어 교회에서 활동이 저조해진 많은 회원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들의 마음을 하나님께로 돌리지 못하게 하는 교만이 아니었다면, 선교 사업에 나가 있었을 수많은 젊은이들과 부부들을 생각해 보십시오.(앨마서 10:6; 힐라맨서 3:34~35 참조)
우리의 시간을 교만함 때문에 추구하는 수많은 것보다 거룩한 봉사에 쓰는 것을 더 중시한다면, 얼마나 많은 성전 사업이 이루어질지 생각해 보십시오.11
6
교만의 치료제는 겸손이다.
교만은 모든 사람에게 때와 정도를 가리지 않고 영향을 미칩니다. 이제 여러분은 세상의 교만을 나타내는 리하이의 꿈에서 본 건물이 왜 그처럼 크고 넓었으며 그곳으로 들어간 무리가 왜 그렇게나 많았는지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니파이전서 8:26, 33; 11:35~36 참조)
교만은 보편적인 죄이며, 크나큰 악입니다. 그렇습니다, 교만은 보편적인 죄이자 크나큰 악입니다.
교만의 치료제는 겸손, 즉 온유함과 유순함입니다.(앨마서 7:23 참조) 그것은 애통하는 마음과 상한 심령입니다.(제3니파이 9:20; 12:19; 교리와 성약 20:37; 59:8; 시편 34:18; 이사야 57:15; 66:2 참조) 루드야드 키플링이 그것을 잘 묘사했습니다.
걱정 소요 사라지고
수령과 왕은 떠나가
주께서 보이신 희생
결단코 없어지지 않으니
만군의 주 잊지 않게
우리와 함께 하소서 ……
하나님은 겸손한 백성을 원하십니다. 우리는 스스로 겸손해지기도 하고, 어쩔 수 없이 겸손해지기도 합니다. 앨마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어찌할 수 없어 겸손하게 됨이 없이 스스로 겸손하여진 자들은 복이 있도다”(앨마서 32:16)
스스로 겸손해지도록 합시다.
우리는 형제 자매에 대한 적대감을 없애고 그들을 우리 자신과 같이 존중하며, 우리와 같이, 또는 더 높이 올려 줌으로써 스스로 겸손해질 수 있습니다.(교리와 성약 38:24; 81:5; 84:106 참조)
우리는 권고와 징계를 받음으로써 스스로 겸손해질 수 있습니다.(야곱서 4:10; 힐라맨서 15:3; 교리와 성약 63:55; 101:4~5; 108:1; 124:61, 84; 136:31; 잠언 9:8 참조)
우리는 우리의 감정을 상하게 한 사람들을 용서해 줌으로써 스스로 겸손해질 수 있습니다.(제3니파이 13:11, 14; 교리와 성약 64:10 참조)
우리는 헌신적으로 봉사함으로써 스스로 겸손해질 수 있습니다.(모사이야서 2:16~17 참조)
우리는 선교사로 나가 다른 사람들을 겸손하게 할 수 있는 말을 전파함으로써 스스로 겸손해질 수 있습니다.(앨마서 4:19; 31:5; 48:20 참조)
우리는 좀 더 자주 성전에 감으로써 스스로 겸손해질 수 있습니다.
우리는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버려 하나님의 사람으로 거듭 태어남으로써 스스로 겸손해질 수 있습니다.(교리와 성약 58:43; 모사이야서 27:25~26; 앨마서 5:7~14, 49 참조)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주님의 뜻에 따르며, 우리 생활에서 주님을 우선시함으로써 스스로 겸손해질 수 있습니다.(제3니파이 11:11; 13:33; 모로나이서 10:32 참조)
겸손해지도록 합시다. 우리는 할 수 있습니다. 저는 우리가 할 수 있다는 것을 압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우리는 시온을 구속하기 위해 준비해야 합니다. 선지자 조셉 스미스의 시대에 우리가 시온을 건설하지 못했던 것은 본질적으로 교만이라는 죄 때문이었습니다. 니파이인의 헌납이 종말을 맞이했던 것도 교만이라는 죄 때문이었습니다.(제4니파이 1:24~25 참조)
교만은 시온의 큰 장애물입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교만은 시온의 큰 장애물입니다.
우리는 교만을 극복하여 그릇의 안을 깨끗이 해야 합니다.(앨마서 6:2~4; 마태복음 23:25~26 참조)
우리는 “성령의 이끄심을 따르며” 교만한 “육에 속한 사람을 벗어 버리고 주 그리스도의 속죄를 통하여 성도가 되며, 어린아이와 같이 되고, 유순, 온유, 겸손”(모사이야서 3:19; 또한 앨마서 13:28 참조)해야 합니다.
우리가 그와 같이 할 수 있고 우리에게 주어진 성스러운 소명을 다할 수 있게 되기를 간절히 [간구합니다.]12
학습 및 교수 제언
질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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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슨 회장은 교만이 니파이 백성을 멸망으로 이끌었다고 지적했다.(1편 참조) 교만에 그런 치명적인 힘이 있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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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어떤 식으로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고 [자기] 뜻대로 하는[가?]”(2편 참조) 하나님의 뜻을 따를 때 오는 축복에는 어떤 것들이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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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때로 우리가 “하나님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실까?”보다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라고 생각하는 이유는 무엇인가?(3편 참조)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것이 우리의 가장 큰 염원일 때 우리 생활은 어떻게 변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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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편에 열거된 교만이 나타나는 여러 형태를 살펴본다. 우리 생활에서 이런 교만이 나타나는 것을 어떻게 피할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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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슨 회장은 “교만은 우리의 모든 관계” 즉, 하나님과의 관계와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 “나쁜 영향을 미칩니다.”라고 말했다.(5편) 왜 이 말이 맞는가? 우리가 겸손하면 우리의 관계는 어떤 면에서 좋아지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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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편에서 벤슨 회장은 겸손하기 위해 선택할 수 있는 여러 방법을 제시했다. 어쩔 수 없이 겸손해지는 것보다 스스로 겸손해지는 것이 더 좋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관련 성구
마태복음 23:12; 누가복음 18:9~14; 야고보서 4:6; 앨마서 5:27~28; 교리와 성약 112:10; 121:34~40
학습을 위한 도움말
선지자의 말씀을 자신에게 비추어 보기 위해, 선지자의 가르침이 여러분과 어떤 관련이 있는지 생각해 본다.(교사, 가장 중요한 부름 [1999], 165쪽 참조) 생활 속에서 갖고 있는 걱정거리, 질문, 어려움을 풀어가는 데 그런 가르침이 어떻게 도움이 될 수 있는지를 자문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