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에게 허락하신 것으로 만족함
인생을 결정짓는 필연적인 순간들은 주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것들 속에서 일어납니다. … 중요한 것은 우리가 어떻게 대응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인생은 저마다 그 자체로 이미 충분한 시험을 담고 있습니다.
형제, 자매 여러분, 저는 여러분 모두와 함께, 교회의 미래를 열어 가시는 힝클리 대관장님의 지칠 줄 모르는 활동에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이 컨퍼런스 센터가 그 상징의 하나입니다.
양식 있는 사람들과 앨마를 통해 개심한 사람들은 불과 몇 마디 말 속에서 깊은 통찰을 갖게 되었습니다. “주님께서 내게 허락하신 것들로 만족해야 하리라”(앨마서 29:3) 한편, 그는 바로 직전에 “주의 나팔”이 되어 “땅이 흔들릴” 음성을 가질 수 있기를 소망하는 절박한 심경을 토로했습니다.(앨마서 29:1 참조) 그렇다고 자아 도취 때문은 아니었습니다. 사실 앨마는 온 인류에게 회개와 구원의 계획을 선포하여 다시는 인간에게 슬픔이 깃들지 않게 되기를 바랬습니다.(앨마서 29:2 참조) 그럼에도 불구하고 앨마는 하나님께서 궁극적으로 각자가 바라는 바에 따라 우리에게 허락해 주신다는 진리에 만족했던 것입니다. 이보다 공정한 것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이처럼 자신의 부름에 만족한 앨마는 영혼을 조금이라도 구원하는 일을 돕는 도구가 되기를 온유한 마음으로 소망했습니다.(앨마서 29:9 참조) 따라서 의미 심장한 영적 여정이 독백과도 같은 단 아홉 구절에 잘 드러나 있습니다.
우리의 열망이 하나님의 뜻 안에서 행해지고 그와 일치된다면 앨마가 누렸던 만족을 우리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가난으로 인해 허락된 기회가 지극히 제한된 사람들의 예도 있습니다. “각각 저들이 지닌 부와 학식의 정도에 따라 계급이 생기더라. 어떤 백성은 가난하여 배울 기회가 없어 무지하였고, 부유한 자들은 재물로 인하여 많은 학문을 닦았더라.”(니파이삼서 6:12 참조)
더욱이, 과거에는 노예 제도나 강제 수용소와 같이 비극적인 억압의 제도가 횡행하던 사악한 사회 구조가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그렇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자신에게 허락된 “토지” 안에서, 어떠한 속박에 묶여 있든지 간에 그 안에서 혼신의 힘을 다해 할 수 있는 일을 해야 합니다. 우리에게 허락된 것 안에서 우리는 영적인 만족을 가질 수 있습니다. 바울은 그러한 만족을 “지족하는 마음이” 있는 “경건”으로 묘사하였는데, 이는 사랑이나 소망, 온유함, 인내, 복종과 같은 속성들이 마땅히 있어야 함을 의미하는 것입니다.(디모데전서 6:6 참조)
그렇지만 살다보면 이와는 다른 고착화된 제약도 따릅니다. 예를 들어 육체적, 정신적, 혹은 지리적인 제한 속에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자기 자신의 과오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결혼을 하지 못하고 있거나, 자녀를 갖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으나 아직 갖지 못한 부부도 있습니다. 더구나, 부모의 권고에 반항하며 혼자 힘으로 살아가려는 자녀를 포함하여(니파이삼서 1:29 참조), 사랑하는 사람들과 화해하지 못하고 불편한 관계를 지속해 가는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도 있습니다. 참으로 그와 같거나 혹은 그와 비슷한 여러 상황 속에서 가슴 아픈 일들을 수없이 겪게 될 것입니다.
만족이란 자기 연민 없이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합니다. 한편 이와 같은 박탈도 온유하게 견뎌낸다면 결국에 가서는 크게 넓어진 영혼을 담는 그릇으로 변모할 것입니다.
어떤 이들은 현실 생활에 별안간 찾아 드는 가슴 저미는 아픔을 겪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시련을 겪어야 하는 반면에 또 어떤 사람들은 “육체에 가시”를 간직하고 살아가야만 합니다. 바울은 “육체에 가시”를 지니고 살아야 했습니다.(고린도후서 12:7 참조)
지금은 그러한 “육체에 가시”가 다가올 세상에서 모두 바뀔 것이라고만 말해 두겠습니다. 다가올 세상에서 우리의 지위를 결정지을 회개하지 않은 죄에 대해서는 예외가 될 것입니다.
따라서, 현재 우리가 처한 제약과 기회의 범주 안에서 보다 큰 만족을 키워 가는 것은 우리가 도전해야 할 과제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자신이 제대로 활용되거나, 제대로 온 마음을 쏟아 붓거나, 올바른 평가를 받고 있다는 느낌을 갖지 못할 것입니다. 한편, 역설적이기는 하지만, 우리에게 주어진 것들 가운데 우리 주위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봉사할 기회가 사용되지 않은 채 묻혀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천사의 강력한 음성과 같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이외의 것들을 갖지 못했다 하여 슬퍼해서는 안됩니다. 왜냐하면 이미 우리에게 허락된 것 중에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참으로 많기 때문입니다.(앨마서 29:3~4 참조)더욱이, 우리에게 허락된 환경이 제각기 다르다고 해도, 우리는 여전히 하나님의 계명을 지킬 수 있습니다!
한편, 우리는 “[우리에게] 허락된” 것들을 구성하는 특정한 인간 사회에서 서로에게 임상 자료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그 특정한 인간 사회가 줄어 들거나 늘어 날수도 있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가 어떤 사람인가 하는 것과 제각기 다르게 허락된 것 안에서 그리고 “[우리에게] 부름 받은” 특정한 일에서 우리가 무엇을 하느냐 하는 것입니다.(앨마서 29:6 참조)
따라서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도록 허락된 경계 또한 “거룩한 선물”에 포함됩니다. 우리는 자신의 구원을 이루기 위해 가장 적절한 때에 다른 사람의 눈에 가장 잘 띄는 곳에 있어야 할 필요는 없습니다.
하지만 이와는 대조적으로 우리의 행동을 향상시키고자 한다면, 기꺼이 그렇게 하고자 하는 사람에게는 넘어 갈 수 없는 국경이나 입국 사증이 없어 가지 못할 나라는 애당초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점진적인 향상이란 흔한 것이며, 우리가 꼭 배워야 할 교훈들을 배우고자 힘써 노력하는 과정에서 그러한 향상을 거두기 위해서는 주님의 오래 참으심이 필수적으로 수반되어야 한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입니다.
마리아는 자신과 앞날에 대해 놀라운 말들을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모든 말을 마음에 지키어 생각”하였습니다.(누가복음 2:19) 흔히 만족에 앞서 깊은 사색이 이루어집니다.
중요한 것은 공연이지 무대 규모가 아닙니다. 갈릴리 바다는 그 길이가 21킬로미터이고 폭이 11킬로미터밖에 되지 않았지만, 제자들이 신앙과 물 위를 걷는 기적에 관련된 생생한 경험을 하기에는 조금도 부족함이 없었습니다.(마태복음 14:22~33 참조) 바람은 몹시 사납고 흉포했습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니파이 일행이 광대한 해양에서 겪어야 했던 폭풍에 비해 갈릴리 바다에서의 파도 규모는 어떠했겠습니까!(니파이일서 18:13~21 참조) 하지만 이 두 사건은 모두 필요로 하던 배움의 경험을 주고 있습니다. 물론, 물의 과잉과 관련된 비교를 할 때는 보다 신중해야 합니다. 노아가 역사의 증언대에 서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말입니다!
따라서 별로 주목 받지 못한 사건이나 잘 알려지지 않은 사람들도 일을 이루는 데 그에 “못지 않은” 역할을 합니다.(앨마서 48:19 참조)
보다 규모가 큰 경우의 예를 들어 생각해 봅시다. 예언자 몰몬은 잠시나마 자신이 이끌던 백성들이 슬픔으로 인해 회개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몰몬서 2:12~13 참조) 그러나 곧 그는 그들의 슬픔이 실제 회개로 이끄는 슬픔이 아니라,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 오도 가도 못하게 하는 저주 받은 자들의 슬픔이라는 것을 분별할 수 있었습니다. 홀로 회개의 길을 걸어간 탕자의 경우와 이 백성의 경우를 비교해 보십시오. 진실한 슬픔으로 인해 탕자가 진정으로 “스스로 돌이”켰던 것입니다.(누가복음 15:17 참조) 우리는 때로 슬픈 경험을 통해 배우기도 하지만 때로 그렇게 하지 못할 때도 있습니다!(교리와 성약 121:39 참조)
인생을 결정짓는 필연적인 순간들은 주님께서 허락하신 것들 속에서 일어나며, 우리는 이러한 허락하신 것들 속에서 “기록에 남을 만한” 선택들을 하곤 합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어떻게 반응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인생은 저마다 그 자체로 이미 충분한 시험을 담고 있습니다.(마태복음 6:34 참조)
한편 사람들은 전세계보다도 훨씬 작은 것을 위해 자신의 영혼을 팔아 치웁니다. 로버트 볼트의 역작 “사계절의 사나이”에서, 토마스 모어 경은 한 지방 관리에게 매수된 자신의 친구 리치의 배신으로 인해 곧 순교할 처지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모어는 “고뇌에 찬 눈으로, 또 한편으로는 재미있어 하며 리치의 얼굴을 바라 보면서” 이렇게 되물었습니다. “웨일즈를 위해서라고? 저런, 리차드. 전세계를 위해 자신의 영혼을 내준다 해도 아무런 이득이 없거늘 하물며 웨일즈를 위해서라고!”(사계절의 사나이, 로버트 볼트[1960년], 92쪽) 그 어떠한 중대 관심사라 할지라도 우리의 마음을 영적인 것들로부터 앗아가는 모든 것에 대해 모어 경의 이러한 꾸짖음을 다시 새겨봅시다!
예수께서 참으로 과거나 현재에도 우주의 주님이심을 묵상하여 보십시오.(교리와 성약 45:1; 76:24; 모세서 1:33; 2:1) 그러나 그분의 성역은, 우리 모두가 알고 있듯이, 매우 작은 지리적 공간 속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성역을 베풀며 다니시던 행로는 지극히 제한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구세주께서는 바로 그러한 곳에서 온 인류를 위한 구속을 이루셨습니다. 골고다보다 훨씬 뛰어난 언덕이나 겟세마네보다 훨씬 아름다운 동산이 많다는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그런 것들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지형들은 온 인류의 역사에 있어 중심이 되는 행위가 이루어지는 데에는 전혀 손색이 없었습니다.
우리는 회개로 말미암아 그 영광스러운 구속을 얻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비록 자신이 속한 인간 사회의 실례가 오직 가족이나 친구 만으로 이루어졌다고 하더라도 그 안에서 봉사하고 용서하기를 배울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비와 공의가 최후의 심판 때에는 완전하다는 것이 너무도 확연하게 드러나 자신들이 필멸의 삶을 사는 동안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것들에 대해 마지막 심판 때에는 하나님의 공의와 자비가 분명하고도 완벽하게 나타나서 한때 이의를 제기했던 사람들조차 전혀 불평하지 않을 것입니다.(니파이이서 9:14~15; 앨마서 5:15~19; 12:3~14; 42:23~26; 마태복음 4:48)
따라서, 우리는 주어진 여건에 만족하거나 자기 만족에 빠지거나 자신의 행동에 대해 자만하지 않고, “우리에게 허락하신 것들로 만족”할 수 있으며 또 그렇게 해야 합니다.(니파이삼서 12:48, 27:27; 마태복음 5:48)
그러한 만족은 어깨를 으쓱이며 체념하고 마는 수동적인 태도가 아닙니다. 만족한다는 것은 무관심한 체념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동의를 의미합니다.
주님은 우리의 처지나 우리 마음 속의 생각뿐 아니라 우리에게 주신 재능과 은사를 분명하게 알고 계십니다. 그분은 우리 주변에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있는 많은 사람들의 마음에 위안을 주는 일을 포함하여 우리가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여건 안에서 어떻게 일을 했는가 하는 것을 완벽하게 측정하실 수 있습니다. 따라서 자기에게 주어진 기회를 활용하지 못하면서 보다 많은 기회를 갈망하는 것은 영적으로 무례함을 범하는 것입니다.
포도원의 주인은 우리가 할당 받은 일터에서 얼마나 일할 수 있는지, 그리고 실제로 얼마나 했는지 완벽하게 알고 계십니다.
주님께서 세상의 연약한 자로 그분의 사업을 이루시는 한 가지 이유는 그들의 온유함과 영적인 만족을 누리는 능력이 보다 뛰어나기 때문입니다.(교리와 성약 1:19, 23, 35:13, 133:58~59; 고린도전서 1:27) 세상적인 사람들은 어차피 그들이 보기에 주님의 보잘 것 없는 사업이라고 생각하는 이 일을 하는데 별다른 관심이 없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또한 중요한 것은 주님께서 사람들에게 그분의 뜻을 반드시 행하게 할 목적으로 천사 군단을 보내 위협을 가하기를 거절하셨다는 것입니다.(마태복음 26:47~53) 그분의 뜻은 강압에 의해서가 아니라 “말씀으로 인하여”(앨마서 36:26) 이루어지게 될 것입니다. 과거나 현재나 미래에도 규칙은 언제나 변함없이 “네게 맡기노라”(모세서 3:17)입니다. 주님은 강압 없는 개심을 원하십니다.
모든 것이 어지럽게 돌아가는 이 시대에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유일한 회전은 우리가 강압 받지 않고 죄로부터 돌이켜 그분께로 돌아가는 것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우리를 압도하려 하시기 보다는 우리가 세상을 이겨낼 수 있도록 돕고자 하십니다!(교리와 성약 64:2; 요한계시록 3:21)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여건들 속에서, 심지어 철조망에 갇힌 상황에서도 성자와 같은 친절을 베푸는 사람들을 볼 수 있는 반면에, 풍요로움 속에서 철조망에 갇힌 태도를 보이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한편, 불만을 품은 자는 계속해서 자기 연민의 웅덩이를 파내려 가는데, 어떤 사람은 올림픽 기록을 수록할 만큼 깊이 파내려 갑니다.
우리는 앨마의 영감에 차고 교훈적인 일화에서 또 다른 것을 배울 수 있습니다. 앨마는 하나님께서 모든 나라에 그분의 말씀을 전파하고 가르칠 수 있는 인물들을 두셨다는사실을 고백했습니다.(앨마서 29:8 참조) 따라서, 우리가 자기 자신의 역할이 보다 확대되기를 너무나 과하게, 너무나 자주, 너무나 강하게 열망한다면, 우리는 실제로 다른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행동 영역을 위축시킬 수도 있습니다. 더욱이 우리가 신뢰하는 가운데 만족한다면 성신은 그의 고유한 일을 수행할 귀중한 시간을 갖게 됩니다.
영적으로 온전히 조화를 이룰 때, 설령 “모든 것의 진정한 의미”를 알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평정이 찾아올 것입니다.(니파이일서 11:17) 그 같은 만족에 찬 확신은 오만이 아니라 평온한 수용을 가져오는데, “힘써 노력”하되 요란하게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 모습이 바로 그 모습입니다.(교리와 성약 58:27~28 참조)
하지만 이 영적 만족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을 받아 들이는가 하는 여부에 달려 있습니다. 그 이유는 우리가 “하나님의 선하심과 한량없으신 능력과 지혜와 인내와 인간에 대하여 오래 참으심을 알며, 창세 전부터 마련된 속죄를 알”기 때문입니다.(모사이야서 4:6)
형제 자매 여러분, 앨마가 “주의 나팔”에서 겸손한 “도구”로, “땅을 뒤흔들 음성”을 갖는 것에서 “많은 영혼을 회개로 인도”하는 것으로 소망을 옮긴 것은 참으로 깜짝 놀랄 만한 변화였습니다. 더구나, 우리가 성장하도록 허락되었다는 것이 참으로 놀랍지 않습니까? 그 성장이 단 아홉 구절의 짧은 시간 안에 이루어지든 혹은 평생을 통해 이루어지든 간에 말입니다.
콜린과 저에게는 애나 조세핀이라는 특별한 손녀가 있는데, 그 아이는 태어날 때부터 왼손이 없었습니다. 하루는 다섯 살 난 애나 조와 그 아이의 사촌인 세 살 난 탈매지 사이의 대화를 듣게 되었습니다. 탈매지는 함께 놀면서 힘차게 말했습니다. “애나 조, 어른이 되면 다섯 손가락을 갖게 될 거야.” 애나 조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그렇지 않아, 탈매지, 어른이 되어도 손가락은 생기지 않을 거야, 하지만 하늘나라에 가면 손을 갖게 될 거야.”
만일 애나 조가 험난한 앞날을 헤치고 자신에게 허락된 여건 안에서 한결같은 생활을 한다면 그 아이는 계속해서 많은 사람들에게 큰 축복이 될 것입니다!
앨마의 말씀이 우리 모두를 위해 보존되어 왔다는 것은 우리 모두에게 참으로 큰 축복이 아닐 수 없습니다. 앨마의 말씀을 우리 자신의 삶에 적용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니파이일서 19:23 참조) 모든 참새와 손가락을 헤아리시는 분이며 동시에 우주의 주님이시기도 한 그분의 이름, 곧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말씀 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