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
부활은 단순히 영과 육을 재결합하는 것보다 훨씬 이상의 것입니다. … 부활은 “육욕은 육욕적인 것으로”, “선은 선으로”(앨마서 41:13) 되돌아가는 회복을 뜻합니다.
욥기는 다음과 같은 보편적인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사람이 죽으면 어찌 다시 살리이까”(욥기 14:14) 죽은 자의 부활에 관한 질문은 고대에서나 현대에서나 경전의 중심 주제가 됩니다. 부활은 우리 신앙의 대들보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교리에 의미를, 우리의 행위에 동기를, 우리의 미래에 희망을 더해 줍니다.
Ⅰ. 예수의 부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로 인하여 모든 사람에게 부활이 실제로 일어나게 되는 것이 되었습니다.(마태복음 27:52~53 참조) 예수님은 돌아가셔서 묻히신 뒤 사흘째 되던 날에 무덤 밖으로 나오셨습니다. 그분은 여러 명의 남자와 여자들에게 모습을 보이셨으며, 그런 다음에 함께 모여 있던 사도들에게도 나타나셨습니다. 세 복음서에 이 사건이 묘사되어 있습니다. 누가복음이 그 중 가장 완전한 기록을 갖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찌어다 하시니
“저희가 놀라고 무서워하여 그 보는 것을 영으로 생각하는지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어찌하여 두려워하며 어찌하여 마음에 의심이 일어나느냐
“내 손과 발을 보고 나인줄 알라 또 나를 만져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 …
“이에 저희 마음을 열어 …
“또 이르시되 이같이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고 제 삼일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것이 기록되었으니”(누가복음 24:36~39, 45~46)
구세주께서는 사도들에게 또 다른 증인을 주셨습니다. 십이사도 중 한 사람이었던 도마는 예수께서 오셨을 때 저들과 함께 있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신이 직접 보고 느끼기 전에는 믿지 못하겠다고 고집하였습니다. 요한은 이렇게 기록합니다.
“여드레를 지나서 제자들이 다시 집안에 있을 때에 도마도 함께 있는데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찌어다 하시고
“또 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보라 그리하고 믿음이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도마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도마야]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시니라”(요한복음 20:26~29)
성경 상의 이러한 증거에도 불구하고, 스스로를 기독교인이라 칭하는 많은 사람들이 부활의 실재를 부인하거나 이에 대해 심각한 의문을 표합니다. 마치 이러한 의문을 예상하고 있었다는 듯이, 성경은 살아나신 그리스도께서 여러 번 나타나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그분은 무덤에서 막달라 마리아에게 나타나셨던 것처럼 개인에게 몇 차례 나타나셨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또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고린도전서 15:6)던 것처럼 크고 작은 무리에게도 모습을 보이셨습니다.
몰몬경에는 살아나신 주님을 직접 보고, 또 직접 만져서 그 손과 발의 못 자국을 느끼고, 손을 그분의 옆구리에 넣어보았던 수많은 사람들의 경험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주님이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요 세상의 죄를 위하여 죽임을 당한 온 땅의 하나님임을”(니파이삼서 11:14) 그들이 “차례대로 한 사람씩”(니파이삼서 11:15) 알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이 충실한 사람들에게 몸소 성역을 베푸시는 동안,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는 병자들을 고치셨으며, “어린 아이들을 안으시고 차례대로 저들을 축복”(니파이삼서 17:21)하셨습니다. 이러한 정감어린 일을 약 2,500명의 남자와 여자와 어린 아이들이 목격하였습니다. (니파이삼서 17:25 참조)
Ⅱ. 필멸의 존재의 부활
사망한 필멸의 존재가 나아와서 부활한 몸으로 다시 살 수 있다는 가능성은 소망을 일깨워주었으며, 또 기록된 역사의 많은 부분을 통하여 논쟁을 불러일으켰습니다. 분명한 경전 가르침에 의거하여, 말일성도들은 그리스도께서 “죽음의 사슬을 끊”(모사이야서 16:7)으셨으며 “사망이 이김의 삼킨 바”(고린도전서 15:54) 되었음을 확실하게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관한 성경과 몰몬경의 묘사를 문자 그대로 믿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이와 비슷한 부활이 이제껏 이 지상에 살았던 모든 필멸의 존재들에게 오게 될 것이라는 경전상의 수많은 가르침을 어렵지 않게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5:22, 니파이이서 9:22, 힐라맨서 14:17, 몰몬서 9:13, 교리와 성약 29:26, 76:39, 42~44편 참조) 예수께서는 이렇게 가르치셨습니다. “내가 살았고 너희도 살겠음이라”(요한복음 14:19)
부활에 관한 문자 그대로의 보편적인 본질이 몰몬경에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습니다. 예언자 앰율레크는 이렇게 가르쳤습니다.
“그리스도의 죽으심이 이 육체적 죽음의 사슬을 푸신지라 모두가 이 육체적 죽음에서 일어서리라.
“영과 육체는 원래의 완전한 모양으로 다시 결합될 것이요, 수족과 뼈의 마디가 모두 지금 우리의 모양 그대로 회복될 것이라 …
“이 부활은 모든 사람, 곧 늙은 사람이나 젊은 사람, 속박에 매인 사람이나 자유로운 사람, 남자나 여자, 악하거나 의로운 모든 사람에게 다 이루어질 것이요, 머리털 하나라도 잃지 않고 혹 지금 우리가 가진 대로가 아니라고 하면 인간의 형태 그대로 완전한 모양을 갖추어 회복되리니”(앨마서 11:42 ~44)
앨마 또한 부활의 때에 “모든 부분이 본래의 완전한 모양으로 회복되리라”(앨마서 40:23)라고 가르쳤습니다.
살아계신 많은 증인들이 부활에 관한 경전상의 이러한 단언이 문자 그대로 성취되는 것을 증거할 수 있습니다. 제 가족 가운데 몇 분을 포함하여, 많은 분들이 시현 또는 직접적인 출현을 통해 이미 저 생으로 떠나 보낸 분을 보았으며, 또 그들이 인생에서 가장 활력 있던 때의 “본래의 완전한 모양”으로 회복된 것을 목격했습니다. 그 분들이 이미 부활한 몸으로 나타났든지, 부활을 기다리고 있는 의로운 영으로 나타났든지, 필멸의 존재가 실제로 부활한다는 점과 그 본질은 분명한 것입니다. 출생시의 결함이나 육신의 부상이나 질병이나 또는 고령으로 인한 자연적 노화에서 불편을 겪어온 모든 사람들이 “본래의 완전한 모양”으로 부활될 것이라는 점을 안다는 것이 얼마나 커다란 위안인지 모르겠습니다.
Ⅲ. 부활의 의의
문자 그대로의 보편적인 부활에 대한 우리의 믿음이 갖는 그 엄청난 의미를 우리가 충분히 인식하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불사불멸에 대한 확신은 우리 신앙의 토대가 되는 것입니다. 예언자 요셉 스미스는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우리 종교의 근본 원리는 사도와 예언자들의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간증, 곧 그가 죽으시고 장사된 지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셔서 하늘에 올라가셨다는 간증이며, 우리 종교와 관련된 그 밖의 것들은 모두 이 원리에 부수되는 것들이다.”(예언자 요셉 스미스의 가르침, 조셉 필딩 스미스 편, 117쪽)
그 영화로운 성역에서의 모든 것 가운데서도, 왜 예언자 요셉 스미스는 “그 밖의 것들은 모두 이 원리에 부수되는 것”이라고 말하며 우리 종교의 근본 원리로서 구세주의 사망, 매장, 부활에 대한 간증을 사용하였겠습니까? 예언자들이 “죽음에서 구원해 내시는 크고도 영원한 계획”(니파이이서 11:5)이라고 불렀던 것에 대해 구세주의 부활이 그 중심에 있다는 점에서 해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영원한 우리의 여정에서, 부활은 필멸의 종결과 불사 불멸의 시작을 알려주는 중대한 이정표입니다. 주님께서는 이 중대한 전이의 중요성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셨습니다. “이같이 나 주 하나님은 인간에게 시험 받는 날을 정하여 믿는 자는 누구나 다 육체적 사망으로 말미암아 불사 불멸의 몸으로 부활하여 영생을 얻게 하였느니라.”(교리와 성약 29:43) 몰몬경도 이와 비슷하게 “죽음이 만민에게 임하는 것이매 위대하신 창조주의 자비로우신 계획이 이루어지기 위하여는 부활의 권세가 필요하였[다]”(니파이이서 9:6)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우리는 또한 현대의 계시로부터 부활로 영과 육신이 결합하지 못하면 “충만한 기쁨”(교리와 성약 93:33, 34)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의 영원한 여정을 다스리는 “구속의 계획”(앨마서 12:25)에서 부활이 차지하는 중요한 위치를 이해할 때, 우리는 사도 바울이 이렇게 가르친 이유를 알게 될 것입니다. “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으면… 우리의 전파하는 것도 헛된 것이요 또 너희 믿음도 헛것이며”(고린도전서15:13~14) 우리는 또한 사도 베드로가 아버지이신 하나님께서 그분의 충만하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라고 기록한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베드로전서 1:3; 또한 데살로니가전서 4:13~18 참조)
Ⅳ. 부활은 필멸의 생에 대한 우리의 시각을 변화시킴
부활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주어진 “산 소망”은 죽음이 우리 존재의 끝이 아니라 필멸에서 불사 불멸로 가는 운명적인 변이 과정에서 필요한 한 단계라고 확신합니다. 이 소망은 필멸의 생에 대한 전체적인 관점을 변화시켜 줍니다. 부활과 불사 불멸에 대한 확신은 우리가 필멸의 생에 따르는 물리적인 난관을 바라보는 방법, 우리가 이 필멸의 생을 살아가는 방법, 그리고 우리가 주변의 사람들과 관계를 맺는 방법에 영향을 줍니다.
부활에 대한 확신은 우리에게 우리 개개인, 그리고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겪는 필멸의 생의 난관들, 곧 선천적, 후천적으로 얻게 되는 물리적, 정신적 또는 정서적 결함과 같은 것들을 견뎌낼 수 있는 힘과 어떤 안목을 우리에게 제공하여 줍니다. 우리는 부활 때문에 이러한 필멸의 생에 따르는 결함이 단지 일시적인 것이라는 점을 알고 있습니다.
또한 부활에 대한 확신은 우리가 필멸의 삶을 살아가는 동안에 하나님의 계명을 지켜야겠다는 강력한 동기를 부여해 줍니다. 부활은 단순히 영과 무덤에 갇혀있는 육을 재결합하는 것보다 훨씬 이상의 것입니다. 우리는 부활이 “육욕은 육욕적인 것으로 선은 선으로” 되돌리는 회복이라는 것을 몰몬경에서 알 수 있습니다.(앨마서 41:13, 또한 2~4절 및 힐라맨서14:31 참조) 예언자 앰율레크는 이렇게 가르쳤습니다. “이 생에서 너희 육신을 다스린 그 영이 영원한 세상에서도 너희 몸을 다스리리라”(앨마서 34:34) 결과적으로 사람이 이 생을 떠나서 다음 생으로 갈 때, “의로운 자는 의에 머무를 것”(니파이이서9:16)이며, “이 세상에서 우리가 얻은 예지는 어떠한 것이든지 다 부활할 때에… 우리와 함께 부활”(교리와 성약 130:18)하는 것입니다.
또한 회복의 원리는 이 필멸의 생에서 의롭지 않았던 사람은 부활할 때에 의롭게 일어서지 못할 것이라는 점을 말해주고 있습니다.(니파이이서 9:16, 고린도전서 15:34 ~44, 교리와 성약 88:27~32) 더욱이 필멸의 상태에서의 죄가 회개와 용서를 통해 깨끗하게 되고 죄없이 됨을 받지 않는 한(앨마서 5:21, 니파이이서 9:45~46, 교리와 성약 58:42 참조), 우리는 “명백[한] 기억”(앨마서 11:43)과 “모든 죄악과 불결함과 벌거벗음에 대한 완전한 지식”을 가지고 부활할 것입니다.(니파이이서 9:14, 또한 앨마서5:18) 경전은 부활 이후에 곧 마지막 심판이 뒤따를 것이라고 하면서 많은 구절을 통해 진지하게 그 현실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니파이이서 9:15, 22; 모사이야서 26:25; 앨마서 11:43~44, 42:23; 몰몬서 7:6, 9:13~14) 참으로 “이 생은 하나님을 만나는 길을 준비하는 시간”(앨마서 34:32)입니다.
부활할 때 우리의 가족들, 곧 남편, 아내, 부모, 형제 자매들, 자녀와 손자녀들을 만날 기회를 갖게 될 것이라는 확신은 우리가 이 필멸의 생에서 우리가 맡은 가족 의무를 다하는 데 커다란 격려와 힘이 됩니다. 또한 다음 생에서의 기쁨에 찬 재회와 결합을 기대하는 마음으로 이 생에서 서로 함께 사랑하면서 생활하도록 도와줍니다.
불사 불멸에 이르는 부활에 관한 우리의 확실한 지식은 또한 우리에게 우리 자신의 죽음, 특별히 때이르다고 할 수도 있는 죽음에 대해서까지도 맞서는 용기를 줍니다. 따라서 몰몬경의 암몬 백성들은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과 부활에 대한 소망으로 죽음에 대하여는 여하한 공포도 느끼지 않았”으며, 이는 “그리스도께서 죽음을 극복하시고 승리하신 까닭으로 죽음이 저들을 어쩌지 못하였”(앨마서 27:28)기 때문이었습니다.
또한 불사 불멸에 대한 확신은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으로 인한 이 세상에서의 이별을 감당할 수 있도록 도움을 줍니다. 우리 모두는 죽음 앞에서 울며, 장례식 내내 슬퍼하며, 또는 무덤의 한 곁에서 고통스럽게 서 있기도 합니다. 저도 그런 경험이 있습니다. 우리 모두 필멸의 세상에서의 이별을 일시적인 것으로 만들어주며 또 우리에게 소망과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갈 힘을 부여해 주는 부활이 가능하게 해주신 하나님께 찬양합시다.
Ⅴ. 부활과 성전
우리는 성전을 건축하는 영화로운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또한 이것은 부활을 믿는 우리의 신앙의 결과이기도 합니다. 저는 몇 달 전에 힝클리 대관장님과 함께 새로운 성전의 헌납식에 참석하는 특권을 가졌습니다. 그 신성한 모임에서 그분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성전은 불사 불멸에 대한 우리의 신념에 대한 증거입니다. 우리의 성전은 무덤 너머에 있는 삶과 관련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우리가 만일 이 필멸의 생애 동안으로 한정된 결혼 생활에만 관심을 갖는다면 성전에서 결혼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러한 예언적인 가르침을 통해 저의 이해력이 넓혀졌습니다. 우리의 성전은 부활의 실재에 대한 우리의 믿음을 살아서 생생하게 간증해 주고 있습니다. 성전은 살아있는 대리인들이 영의 세계에 살고 있는 이들을 대신하여 필멸의 세상에서 받을 필요가 있는 모든 의식들을 수행할 수 있는 신성한 공간과 여건을 마련하여 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만일 우리의 주님이시며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로 인해 가능해진 보편적인 불사 불멸과 영생에 대한 확신을 갖고 있지 못하다면 그 어떤 것도 의미가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의 부활”로 인해 문자 그대로 온 인류의 보편적인 부활이 있음을 믿습니다.(니파이이서 9:12) 또한 최근에 같은 이름으로 발표된 사도들의 다음 선언과 같이 우리도 “살아계신 그리스도”에 대해 간증합니다.
“우리는 온 인류 역사의 중심이 되시는 그분의 삶이 베들레헴에서 시작되지도 않았고 갈보리에서 끝나지도 않았다는 사실을 엄숙하게 간증합니다. …
“합당하게 성임 받은 그분의 사도로서 우리는 예수님이 살아계신 그리스도시요 하나님의 영원한 아들이라는 사실을 간증드립니다. 그분은 위대한 왕인 임마누엘이시며 오늘날 아버지의 우편에 서 계십니다. 그분은 세상의 빛이요 생명이요 소망이십니다. 그분의 길은 이 생에서는 행복으로 인도하고 장차 올 세상에서는 영생으로 인도하는 길입니다.”(“살아계신 그리스도—사도들의 간증”, 2000년 1월 1일)
이것이 진실되며 또 주님과 우리의 부활이 실재한다는 것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증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