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시온이여 네 힘을 입을지어다
2022년 11월호


13:57

시온이여 네 힘을 입을지어다

우리는 각자 생각하는 현세적, 영적 우선순위를 기도하는 마음으로 진지하게 평가해 보아야 합니다.

비유는 위대한 교사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르치시는 방식의 전형적인 특징입니다. 구주께서 사용하신 비유를 간단히 정의하자면, ‘영적 진리를 물질적인 것들과 필멸의 경험에 빗대어 설명하기 위한 이야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실례로, 신약전서의 복음서에는 하늘의 왕국을 여러 대상에 비유한 가르침이 가득합니다. 겨자씨 한 알1, 값진 진주2, 포도원의 주인과 품꾼들3, 열 처녀4 등 이외에도 많은 예가 있습니다. 경전에는 주님께서 갈릴리에서 성역을 행하시는 동안 “비유가 아니면 말씀하지 아니하셨”던 때가 있었음이 나옵니다.5

비유에는 의도하는 의미나 메시지가 대체로 분명하게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 대신 비유 속 이야기에 담긴 신성한 진리는 오직 듣는 이의 하나님을 믿는 신앙, 영적으로 준비된 정도, 배우고자 하는 의지에 비례해서 그 사람에게 전달됩니다. 그러므로 비유에 내포된 진리를 발견하기 위해서는 도덕적 선택의지를 행사하며 적극적으로 ‘구하고 찾고 두드려야’6 합니다.

이제 우리가 임금의 혼인 잔치 비유에 깃든 중요성을 숙고하는 동안 성신이 우리 한 명 한 명을 깨우쳐 주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임금의 혼인 잔치

“예수께서 다시 비유로 … 이르시되

천국은 마치 자기 아들을 위하여 혼인 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과 같으니

그 종들을 보내어 그 청한 사람들을 혼인 잔치에 오라 하였더니 오기를 싫어하거늘

다시 다른 종들을 보내며 이르되 청한 사람들에게 이르기를 내가 오찬을 준비하되 나의 소와 살진 짐승을 잡고 모든 것을 갖추었으니 혼인 잔치에 오소서 하라 하였더니

그들이 돌아 보지도 않고 한 사람은 자기 밭으로, 한 사람은 자기 사업하러 가고”7

고대 유대인들의 삶에서 가장 큰 기쁨을 주는 행사 중 하나는 혼인 잔치였습니다. 혼인 잔치는 일주일에서 이 주일까지도 이어지는 행사였습니다. 이런 행사는 아주 많은 것이 계획되어야 했습니다. 손님들에게는 잔칫날에 한참 앞서 소식이 전해졌고 잔치 첫날 한 번 더 기별이 갔습니다. 임금이 백성을 혼인 잔치에 초대하는, 이와 같은 일은 본질적으로 명령과 같았습니다. 그러나 이 비유에서는 초대받은 많은 손님이 잔치에 가지 않았습니다.8

“임금의 잔치 초대를 거절하는 것은 임금의 권위에 대한 고의적인 반항이며, 통치자와 그의 아들에 대한 개인적인 모독을 나타내 보이는 것[입니다.] … 한 사람은 자기 밭으로 가고 다른 사람은 [사업상 이익을 따라갔]다는 것은”9 그들이 우선순위를 잘못 인식하고 임금의 뜻을 완전히 무시했음을 나타냅니다.10

비유는 다음과 같이 이어집니다.

“이에 종들에게 이르되 혼인 잔치는 준비되었으나 청한 사람들은 합당하지 아니하니

네거리 길에 가서 사람을 만나는 대로 혼인 잔치에 청하여 오라 한대

종들이 길에 나가 악한 자나 선한 자나 만나는 대로 모두 데려오니 혼인 잔치에 손님들이 가득한지라.”11

그 당시에는 혼인 잔치의 주인(이 비유에서는 임금)이 손님들에게 예복을 제공하는 관습이 있었습니다. 이때 예복이란 장식 없는 소박한 가운으로, 모든 참석자가 입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 계급과 신분이 가려져 잔치에 참석한 모든 사람이 동등하게 어우러질 수 있었습니다.12

네거리에서 혼인 잔치에 초대받은 사람들은 행사에 대비해 적절한 복장을 마련할 시간이나 수단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임금은 자신의 옷장에 있던 옷을 손님들에게 주었을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임금의 옷을 입는 기회를 얻게 됐던 것입니다.13

임금은 연회장에 들어서며 좌중을 살피다가 곧 눈에 띄는 손님이 한 명 있음을 알아차렸습니다. 그 사람은 혼인 예복 차림이 아니었습니다. 임금은 이 사람을 앞으로 불러 물었습니다. “친구여, 어찌하여 예복을 입지 않고 여기 들어왔느냐[?] 하니 그[는] 아무 말도 못”했습니다.14 즉, 임금은 이렇게 물은 것이었습니다. “내가 그대에게 예복을 주었거늘 그대는 왜 그것을 입지 않고 있는가?”15

그는 당연히 이런 특별한 행사에 걸맞은 차림새가 아니었습니다. 그러므로 “그가 아무 말도 못”했다는 문구는 그에게 변명할 구실이 없었음을 나타냅니다.16

제임스 이 탈매지 장로님은 이 사람이 이렇게 행동한 의미를 다음과 같은 가르침을 담아 풀이하셨습니다. “의복을 입지 않은 이 손님은 그것을 무시했거나 의도적으로 무례하게 굴었거나 그보다 더 심하게는 모욕을 표한 것이었음이 문맥에서 분명히 드러난다. 처음에는 왕도 친절하게 배려하며 어떻게 혼인 잔치 예복을 입지 않고 들어왔느냐고만 물었다. 손님은 자신이 남다른 복장을 하게 되었던 이유를 설명할 수 있었거나 타당한 구실이 있었다면 그것을 이야기했을 것이다. 그러나 기록된 바와 같이 그는 아무 말도 못했다. 임금의 초청은 그의 종들이 발견한 자들에게 모두 아무 대가 없이 전해졌다. 그러나 그들은 모두 문을 통하여 왕정으로 들어와야 했으며, 왕을 만날 수 있는 연회장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합당한 의복을 입었어야 했다. 그러나 의복을 제대로 갖추지 않은 이 사람은 다른 방법으로 들어왔던 것이다. 정문을 지키는 신하를 거치지 않았다는 것은 그가 침입자였다는 뜻이다.”17

기독교 작가인 존 오 리드는 이 사람이 혼인 예복을 입지 않으려 한 것은 “임금과 임금의 아들 둘 다에 대한 [노골적] 불경”의 전형적인 예라고 언급했습니다. 그는 단순히 혼인 예복이 없었던 것이 아니라 그것을 입지 않는 편을 선택했습니다. 반항적으로 행사에 걸맞은 차림새를 거부한 것입니다. 이에 임금은 신속하고 단호한 처분을 내렸습니다. “그 손발을 묶어 바깥 어두운 데에 내던지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되리라.”18

임금이 이 사람을 판단한 주된 근거는 혼인 예복을 입지 않았다는 점이 아니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사실 그가 혼인 예복을 입지 않기로 결심했다는 점이었습니다. 그는 … 혼인 잔치에 참석하는 명예는 바라면서 … 임금이 정한 관례는 따르고 싶어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원하는 대로 행동하고자 했습니다. 그가 적합한 옷차림을 하지 않았다는 사실에는 임금과 임금의 지침에 대한 그의 내적 반항이 드러납니다.”19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

이 비유는 다음과 같이 깊은 통찰이 담긴 성구로 마무리됩니다.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20

흥미롭게도 조셉 스미스는 조셉 스미스 역 성경에서 마태복음의 이 구절을 이렇게 수정했습니다.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 그러므로 모두가 혼인 예복을 입는 것은 아님이라.21

혼인 잔치에 초대받는 것과 잔치에 참여하기를 선택하는 것은 서로 관계는 있지만 다른 일입니다. 초대는 모든 남성과 여성에게 전해집니다. 그 개개인은 초대를 수락하고 잔치에서 자리를 차지하고 앉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직 잔치에 참여하도록 택함을 받은 것은 아닙니다. 마음을 돌이켜 주 예수와 그분의 신성한 은혜를 믿는 신앙을 행사한다는 의미의 합당한 혼인 예복을 갖추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부름받고, 각자의 방식으로 부름에 응합니다. 그래서 부름(청함)을 받은 자는 많으나 택함을 받은 자는 적은 것입니다.22

택함을 받거나 택함받는 사람이 되는 것은 우리에게 일방적으로 주어지는 독점적인 상태가 아닙니다. 그보다 여러분과 저는 도덕적 선택의지를 의롭게 행사함으로써, 궁극적으로는 택함받기를 선택할 수 있습니다.

교리와 성약에 있는 잘 알려진 다음 구절에서 택함을 받다라는 말이 어떻게 쓰이는지 주목해 보십시오.

“보라. 부름을 받는 자는 많으나 택함을 받는 자는 적도다. 어찌하여 그들이 택함을 받지 못하느냐?

이는 그들의 마음이 이 세상 일에 지나치게 얽매여 있고 사람의 명예를 갈망하여 그들이 이 한 가지 교훈을 배우지 아니함이니.”23

저는 이 구절들이 암시하는 내용이 꽤 단순하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께는 당신이 좋아하는 사람들의 명단이 따로 있지 않습니다. 우리도 언젠가 이름이 오르기를 바라야 하는 그런 명단은 없습니다. 그분은 “택함을 받은 자”를 한정된 소수로 제한하지 않으십니다. 그 대신 하나님께 택함받은 자로 헤아려지는 데 결정적으로 작용하는 것은 우리의 마음과 소망, 성스러운 복음 성약과 의식의 준수, 계명에 대한 순종, 그리고 무엇보다 구주의 구속하시는 은혜와 자비입니다.24

“이는 우리가 우리의 자손과 또한 우리의 형제들을 설득하여, 그리스도를 믿게 하고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부지런히 수고하여 기록함이니, 이는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것 후에 우리가 구원받는 것이 은혜에 의한 것임을 우리가 앎이라.”25

일상의 분주함과 우리가 사는 요즘 세상의 소란 속에서 쾌락, 번영, 인기, 유명세를 주된 우선순위로 삼다 보면 정작 가장 중요한 영원한 것들에는 집중하기가 어려울 수 있습니다. 또한 순간순간 “이 세상의 것들”과 “사람의 명예”에 사로잡힌 나머지 죽 한 그릇보다 훨씬 못한 것을 탐하다 보면 영적인 생득권은 박탈당하고 말 것입니다.26

약속과 간증

주님께서 구약전서의 선지자 학개를 통해 당신의 백성에게 경고하신 말씀을 그대로 전해 드리겠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만군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느니 너희는 행위를 살필지니라.”27

우리는 각자 생각하는 현세적, 영적 우선순위를 기도하는 마음으로 진지하게 평가해 보아야 합니다. 그리하여 하늘 아버지와 구주께서 우리에게 주고자 하시는 풍성한 축복을 가로막는 것들을 파악해야 합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바라볼 수 있도록 성신이 분명히 도와줄 것입니다.28

우리가 ‘보는 눈’과 ‘들을 귀’라는 영적인 은사를 합당하게 구할 때,29 살아 계신 주님과 성약으로 맺은 연결 관계를 강화할 수 있는 역량과 판단력을 축복으로 받게 될 것임을 약속합니다. 또한 우리는 삶에서 경건의 능력을 얻고30 마침내 주님의 잔치에 참여하도록 부름과 택함을 받게 될 것입니다.

“시온이여 깰지어다 깰지어다 네 힘을 입을지어다.”31

“무릇 시온은 아름다움과 거룩함이 더해져야 하며, 그 경계가 넓어져야 하고, 그 스테이크가 강화되어야 하나니, 그러하도다.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시온은 반드시 일어나 그 아름다운 옷을 입어야 하느니라.”32

저는 영원하신 아버지 하나님과 그분의 사랑하는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신성하시고 실재하심을 증거하며, 이를 기쁘게 선포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구주요 구속주시며 그분이 살아 계심을 간증합니다. 아버지와 아들께서 소년 조셉 스미스에게 나타나셨고, 그리하여 구주의 복음이 후기에 회복되기 시작했음을 증거합니다. 우리가 저마다 보는 눈과 들을 귀를 구하고 또 축복으로 받게 되기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성스러운 이름으로 간구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