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차 대회
하나님의 가장 사랑받는 자녀
2024년 10월 연차 대회


하나님의 가장 사랑받는 자녀

하나님의 사랑으로 가득 차면 인생의 폭풍으로부터 보호받으며 행복한 순간들이 더욱 행복하게 됩니다.

제 자녀 중 두 명이 연단에서 말씀하다가 기절한 적이 있는데, 지금 이 순간만큼 제가 그 아이들과 더 긴밀한 유대감을 느꼈던 적이 없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도망치고 싶은 마음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저희는 여섯 자녀가 있는데, 그 아이들은 가끔 서로 자기가 가장 사랑받는 자식이라며 장난을 칩니다. 서로 자기가 가장 사랑받는 자식이라는 이유도 다양합니다. 자녀 한 명 한 명에 대한 저희의 사랑은 순수하고 충만하며 전적입니다. 저희는 그들 중 어느 하나를 다른 자녀보다 더 사랑할 수 없습니다. 아이들이 태어날 때마다 저희의 사랑은 더없이 풍성해졌습니다. 저는 자녀들에 대한 제 사랑을 통해 저에 대한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가장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저희 아이들이 각자 자기가 가장 사랑받는 자식이라고 주장하기에 저희 가족은 방 청소 같은 문제는 전혀 없는 가정인 것처럼 들릴지도 모르겠습니다. 사랑에 초점을 맞추면 부모와 자녀 간의 관계에서 결점을 느끼는 일이 줄어듭니다.

어느 순간, 아마도 가족 간에 싸움이 벌어질 것 같다면 저는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그래, 졌다, 졌어. 하지만 내가 누굴 가장 사랑하는지 입 밖으로 꺼내 말하지는 않을 거야. 너흰 내가 너희 중에 누굴 가장 사랑하는지 이미 알고 있잖니.” 제 목표는 여섯 아이 각자가 자기가 가장 사랑받는다고 느끼게 하여 전면전을 피하는 겁니다. 최소한 다음번까지 말입니다.

요한은 그의 복음서에서 자신을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라고 묘사하여 그 관계가 마치 특별하다는 듯이 표현했습니다. 저는 요한이 예수님의 사랑을 온전히 느꼈기 때문에 그렇게 표현했다고 생각하고 싶습니다. “나는 나의 예수를 자랑하노니”라고 쓴 니파이에게서도 저는 비슷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물론 구주는 니파이나 요한만을 위한 분은 아니십니다. 그러나 니파이는 자신과 “자신의” 예수님 사이의 개인적인 관계의 본질 때문에 그런 정감 어린 묘사를 한 것입니다.

우리가 온전히 그리고 개별적으로 주목받고 사랑받고 있음을 느낄 수 있는 순간들이 있다는 것이 놀랍지 않습니까? 니파이가 그분을 “나의” 예수님이라고 부를 수 있듯이, 우리도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우리 구주의 사랑은 “가장 높고 가장 고귀하며 가장 강한 종류의 사랑”이며, 그분은 우리가 “충만하게 될” 때까지 채워 주십니다. 신성한 사랑은 결코 고갈되지 않으며, 우리는 저마다 그분의 소중한 사랑받는 자녀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벤 다이어그램의 원들이 겹쳐지는 부분처럼 우리 모두가 함께 하는 곳에 있습니다. 부분적으로는 다르더라도 우리는 그분의 사랑 안에서 일체감을 느낍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이 가장 큰 계명이라는 사실은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서로에게 그리스도와 같은 사랑을 보이는 것을 볼 때, 저는 그 사랑이 단순히 그들의 사랑 이상의 것으로 채워져 있다고 느껴집니다. 그 사랑에는 신성함 즉, 하나님의 사랑도 담겨 있습니다. 우리가 이런 식으로 서로를 최대한 온전하고 충만하게 사랑할 때, 하늘도 관여하게 됩니다.

따라서 우리가 소중히 여기는 사람이 신성한 사랑을 느끼지 못하는 것 같다면, 우리는 이 패턴을 따를 수 있습니다. 먼저 하나님과 더 가까워지기 위한 일들을 하고 그런 다음 그 사람과 더 가까워지기 위한 일들을 하는 것입니다. 이는 그리스도께 나아오라는 무언의 초대입니다.

저는 여러분께 어떤 상황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는지 물어보고 싶습니다. 어떤 경전 구절이나, 어떤 봉사를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십니까? 어디에 있을 때, 어떤 음악을 들을 때, 누구와 함께 있을 때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시나요? 연차 대회는 하늘의 사랑과 연결되는 것에 대해 배울 수 있는 귀중한 모임입니다.

하지만 여러분은 하나님의 사랑에서 멀어져 있다고 느끼실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의 마음을 짓누르는 낙담과 어둠의 목소리가 메아리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것들은 여러분이 너무 상처 입고 혼란스러워서, 너무 약하고 보잘 것 없어서, 너무 달라서 또는 방황하고 있어서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자격이 없다는 메시지를 전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만약 그런 생각이 든다면 제 말을 들어 주십시오. 그런 생각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우리는 흠 없는 구주께서 “우리를 위하여 … 피 흘려 고난을 받”기로 택하셨음을 상기시키는 찬송가를 부를 때 마다, 떼어 낸 빵을 취할 때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자격이 없다고 느끼게 하는 우리의 결함이나 상처를 자신 있게 내려놓을 수 있습니다. 분명 예수님은 상한 사람들의 모든 상처를 없애 주십니다. 그분은 당신의 상함을 통해 완전해지셨으며, 우리의 상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완전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그분은 상하고, 외롭고, 찢기고, 상처 입으셨습니다. 우리도 그렇게 느낄 수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에서 멀어진 것은 절대 아닙니다. 한 노래의 가사에 나오듯 그분은 “[상한 사람들을] 온전한 사랑으로” 돌보십니다.

자기 자신만이 아는, 자신이 사랑받을 자격이 없는 이유가 있을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이 자신에 대해 아무리 잘 알고 있더라도, 자신이 하나님의 사랑의 손길이 닿지 않는 곳에 있다는 생각은 틀렸습니다. 우리는 때때로 다른 사람에게는 상상도 못할 방식으로 자신을 가혹하고 참을성 없이 대합니다. 이생에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많지만, 자기혐오나 심한 자책은 그 대상이 아닙니다. 우리가 스스로를 아무리 흉하게 손상되었다고 느낄지라도 그분의 구원하시는 손길은 짧지 않습니다.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그분의 팔은 항상 우리를 “어루만지”실 수 있을 만큼 충분히 길며, 그 팔로 우리 각자를 감싸 안아 주십니다.

우리가 신성한 사랑의 따뜻함을 느끼지 못한다고 해서 그 사랑이 사라진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친히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산들이 떠나며 언덕들은 옮겨질지라도 나의 자비는 네게서 떠나지 아니하[리라.]” 분명히 말씀드리면, 하나님이 더 이상 우리를 사랑하시지 않아서라는 생각은 삶에서 생각해 낼 수 있는 이유 중에서 극히 가능성이 없는 설명입니다. 산과 언덕이 다 없어진 후에나 생각해 볼 정도로 말입니다.

저는 하나님의 확실한 사랑에 대한 증거가 산으로 상징된 것이 매우 마음에 듭니다. 그 강력한 상징적 표현은 계시를 받기 위해 산에 올라가는 사람들의 이야기와 “여호와의 전의 산이 모든 산 꼭대기에 굳게 설 것”이라는 이사야의 묘사에 잘 나와 있습니다. 주님의 전은 우리의 가장 소중한 성약의 집이며 우리 모두가 일상의 분주함에서 물러나 우리 아버지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증거를 깊이 사색할 수 있는 장소입니다. 또한 저는 제 침례 성약을 더욱 굳건히 지키며 상실로 인해 애도하거나 실망으로 슬퍼하는 사람을 찾아 그들이 자신의 감정을 이해하고 추스르도록 도울 때 제 영혼에 위안이 찾아오는 것을 느꼈습니다. 이러한 것들이 우리가 귀중한 성약의 사랑인 hesed[헤섿]에 더욱 깊이 몰입할 수 있는 방법이 아닐까요?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를 떠나지 않는다면, 왜 우리는 그 사랑을 항상 느끼지는 못하는 것일까요? 미리 말씀드리자면, 저도 잘 모릅니다. 하지만 사랑받는 것과 사랑받는다고 느끼는 것은 엄연히 다른 일이며,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찾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는 몇 가지 생각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어쩌면 여러분은 깊은 슬픔, 우울함, 배신감, 외로움, 실망 또는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는 데 방해가 되는 다른 강력한 감정들과 씨름하고 있을 것입니다. 만약 그렇다면, 이런 것들은 우리가 원래라면 느낄 수 있었을 감정을 둔화시키거나 일시적으로 느끼지 못하게 할 수 있습니다. 적어도 한동안은 그분의 사랑을 느끼지 못한 채 그저 알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만족해야 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신성한 사랑을 표현하고 받는 다양한 방법을 인내심을 가지고 실험해 보시면 어떨까요? 여러분 눈앞에 있는 것에서 한 걸음 물러나, 필요하다면 또 한 걸음, 또 한 걸음 물러나 더 넓은 풍경을 보실 수 있지 않을까요? 별들을 바라보고 무수한 세상과 그것들을 통해 그 창조주를 기억하며 말 그대로 “해의 왕국의 방식으로 생각”하게 될 때까지 점점 더 넓은 시야로 바라보는 건 어떨까요?

새소리, 피부에 닿는 따스한 햇살, 살랑이는 바람, 빗방울처럼 자연이 제 감각을 통해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을 일깨우는 순간들, 이 모든 것들이 제가 하늘과 연결되어 있음을 느끼게 해 주었습니다. 충실한 친구의 위로가 도움이 되지 않을까요? 어쩌면 음악, 아니면 봉사는 어떨까요? 하나님과의 연결이 더욱 분명하게 느껴진 때를 기록하거나 일기로 쓴 적이 있으신가요? 여러분이 위안과 이해를 찾는 동안, 신뢰하는 사람들에게 그들이 하늘과의 연결을 느끼는 경우를 이야기해 달라고 하는 건 어떨까요?

만약 예수님께서 여러분과 만날 장소, 여러분이 온전히 그분께 집중할 수 있는 개인적인 장소를 고르신다면, 그분은 여러분만의 고유한 아픔이 있는 곳, 가장 절실한 도움이 필요한 곳, 다른 누구도 알 수 없는 그곳을 선택하시지 않을까요? 여러분이 너무 외로워서 정말 혼자라고 느낄지 모르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은 그곳, 아마도 오직 그분만이 다녀가신 곳이지만 여러분이 도착했을 때 그분이 이미 여러분을 만나기 위해 준비해 놓으신 그런 곳 말입니다. 여러분이 그분이 오시기를 기다리고 있다면, 그분은 이미 그곳에서 여러분이 손닿을 수 있는 곳에 계시지 않을까요?

이러한 시기에 여러분이 사랑으로 가득 차 있다고 느낀다면 여러분은 그 사랑을 혼자서만 간직하지 말고 모든 사람과 기꺼이 나누어야 합니다. 어디를 가든 그 사랑을 흩뿌리십시오. 하늘의 섭리의 기적 중 하나는 우리가 예수님의 사랑을 나누려고 할 때 우리 자신이 그 사랑으로 채워진다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와 비슷한 원리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가득 차면 인생의 폭풍으로부터 보호받으며 행복한 순간들이 더욱 행복하게 됩니다. 즉, 우리의 기쁜 날, 하늘에 햇빛이 비치는 날은 우리 영혼의 햇빛으로 더욱 더 밝아집니다.

우리의 예수님과 그분의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지게]” 합시다. 우리 삶에서 하나님의 사랑과 권능을 느끼는 경험을 찾고 소중히 간직합시다. 복음의 기쁨은 모든 이에게 열려 있습니다. 행복한 사람들뿐만 아니라 낙담한 사람들에게도 말입니다. 기쁨은 우리의 목적이며, 우리의 상황에 따라 받는 선물이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기뻐하며 하나님과 만인에 대한 사랑으로 충만”해야 할 충분한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충만해집시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말씀드립니다. 아멘.

  1. 요한복음 21:20; 또한 요한복음 13:23; 19:26; 20:2; 21:7 참조.

  2. 니파이후서 33:6; 강조체 추가.

  3. 경전 안내서, “자애”.

  4. 성지에서: 마태복음 14:15~20. 미대륙에서: 제3니파이 27:16.

  5. 마태복음 22:35∼40 참조.

  6. 요한1서 4:12 참조.

  7. 『청소년의 힘을 위하여: 선택을 위한 안내서』에는 “[다른 사람들이 우리를] 통해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느끼도록 도와주”라고 나와 있다.([2022], 12쪽)

  8. “나사렛 예수는 구주며 왕”, 『찬송가』, 119장; 또한 이사야 53:5; 마태복음 26:26 참조.

  9. 러셀 엠 넬슨 회장은 이렇게 설명했다.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에 [구주는] ‘제 삼일에는 완전하여지리라’라고 하셨습니다.[누가복음 13:32; 강조체 추가] 이 말씀을 생각해 보십시오. 이미 육신의 기준으로 온전해지셨으며, 죄도 없고 실수도 없는 주님이 장차 완전한 상태가 되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분의 영원한 온전함은 그분의 부활과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받으신 뒤에 이루어지는 것이었습니다.[마태복음 28:18; 또한 교리와 성약 93:2~23 참조]”(“언젠가는 실현될 온전함”, 『성도의 벗』, 1996년 1월호, 87쪽) 선지자 모로나이는 모든 사람에게 이렇게 권고했다. “그리스도에게로 나아와, 그의 안에서 온전하게 되고, 모든 경건하지 아니한 것을 거부하라. 너희가 만일 모든 경건하지 아니한 것을 거부하고, 너희의 능력과 생각과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할 것 같으면, 그러면 그의 은혜가 너희에게 족하리니, 그의 은혜로 너희가 그리스도 안에서 온전하게 될지라.”(모로나이서 10:32)

  10. “내 영혼의 구주”, 「2024 청소년 앨범」, ChurchofJesusChrist.org.

  11. 이사야 59:1 참조.

  12. “내 평안 어디서 찾을 수 있나”, 『찬송가』, 62장.

  13. 이사야 54:10.

  14. 예를 들면, 니파이(니파이전서 17:7 참조), 모세(출애굽기 19:3 참조), 열한 제자(마태복음 28:16 참조), 그리고 구주(마태복음 14:23 참조); 또한 시편 24:3 참조.

  15. 이사야 2:2; 또한 3절 참조. 이러한 상징은 주님께서 그분의 자녀를 위해 전 세계에 수백 개의 성전을 마련해 주시는 목적을 더 깊이 생각하게 해 준다.

  16. 나는 우리가 맺은 성전 성약 안에서 살아갈 때 가장 안전하다고 한 넬슨 회장의 약속이 사실임을 증거하는 경험을 했다.(“성전과 여러분의 영적인 기초”, 『리아호나』, 2021년 11월호, 96쪽 참조)

  17. 넬슨 회장은 다음과 같은 확신을 주었다.

    “성전에서 보내는 시간은 우리가 해의 왕국의 방식으로 생각하는 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또한, 자신이 진정 누구이고 어떤 존재가 될 수 있으며 어떤 종류의 삶을 영원히 누릴 수 있는지를 알아 가는 데도 도움이 될 것입니다. 우리가 성전에서 자주 예배를 드리면, 우리 자신을 바라보는 관점이 향상되고 하나님의 위대한 계획에서 자신의 위치를 더 잘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그것을 여러분께 약속드립니다. …

    … 고통의 시기에 이보다 여러분의 영혼을 달래 줄 것은 없습니다. 이보다 하늘 문을 활짝 열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다른 어떤 것으로도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신권 열쇠의 은사에 기뻐하십시오”, 『리아호나』, 2024년 5월호, 121, 122쪽)

  18. 모사이야서 18:8~10, 13 참조. “침례 성약은 하나님을 섬기고, 그분의 계명을 지키며,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받들겠다는, 하나님 아버지께 드리는 세 가지 구체적인 약속에 대한 공개적인 증거입니다. 침례 성약과 자주 연관되는 다른 측면들, 즉 ‘서로의 짐을 져 가볍게 하고자 하며’, ‘슬퍼하는 자들과 함께 슬퍼하고’, ‘위로를 필요로 하는 자들을 위로’[모사이야서 18:8, 9]하는 것은 실제 성약의 일부라기보다는 성약을 맺은 결과로 나타나는 열매입니다. 이러한 측면들은 개종한 영혼이 자연스럽게 할 일이기 때문에 중요합니다.”(데일 지 렌런드, “Stronger and Closer Connection to God through Multiple Covenants”[브리검 영 대학교 영적 모임, 2024년 3월 5일], speeches.byu.edu)

  19. 러셀 엠 넬슨, “영원한 성약”, 『리아호나』, 2022년 10월호, 4~11쪽 참조.

  20. 러셀 엠 넬슨, “해의 왕국의 방식으로 생각하십시오!”, 『리아호나』, 2023년 11월호, 117, 118쪽 참조.

  21. 마태복음 16:25.

  22. 에베소서 3:17.

  23. 니파이후서 2:25; 러셀 엠 넬슨, “기쁨과 영적 생존”, 『리아호나』, 2016년 11월호, 81~84쪽 참조.

  24. 모사이야서 2:4.

  25. 모로나이서 7:48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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