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도 무거운”, 『성도들: 후기의 예수 그리스도 교회 이야기, 제3권, 담대하고 고결하고 굳세게, 1893~1955년』(2022) 제11장
제11장: “너무도 무거운”
제11장
너무도 무거운
1914년 8월 6일 저녁, 독일군 포병대가 벨기에 리에주에 대포 공격을 퍼붓자, 그곳에 살고 있던 17세의 후기 성도 아서 호르바흐는 몸을 숨겼다.1 그해 초여름에 세르비아인 민족주의자가 유럽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후계자를 암살하면서, 오스트리아-헝가리 왕국과 세르비아 왕국 사이에 전쟁이 발발되었다. 곧 양국의 동맹국들이 전쟁에 뛰어들었고, 8월 초까지 세르비아, 러시아, 프랑스, 벨기에, 영국은 오스트리아-헝가리 및 독일에 맞서 전쟁을 벌였다.2
원래 중립국이었던 벨기에도 독일군이 벨기에 동부 국경을 통한 프랑스 침공에 나서자 전투에 돌입했다. 리에주시는 침략군이 넘어야 할 중대한 첫 번째 장애물이었다. 처음에는 리에주를 에워싸고 있는 12개의 요새가 독일군의 접근을 저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독일군의 공격은 수그러들 줄 모르고 계속되었다. 수천 명의 독일군 병력이 요새를 공격했고, 벨기에 방위군은 무너지기 시작했다.
독일군은 곧 벨기에 전선을 침범하여 리에주를 점령했다. 적군은 도시를 휩쓸고 지나가며 가정집들을 약탈하고, 건물을 불태우고, 민간인들에게 총격을 가했다.3 아서와 그의 어머니 마틸드는 어찌저찌 군대를 피할 수 있었다. 아서와 마찬가지로 리에주에 있는 50여 명의 성도들은 모두 위험에 처해 있었다. 그러나 아서의 머릿속에 계속 맴도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것은 그 도시에서 봉사하는 선교사들이었다. 아서는 선교사들과 함께 많은 시간을 보냈고 그들을 잘 알았다. 그 공격으로 그들이 다치지는 않았을까?4
그렇게 여러 날이 지났다. 아서와 그의 어머니는 독일군과 함락되지 않은 요새를 폭격하는 중포병 부대에 대한 공포 속에서 살았다. 후기 성도들은 도시 곳곳에 흩어졌고, 몇몇 지부 회원들은 지하실에 옹송그리고 모여 지냈다. 한 무리의 병사들이 평소 지부 모임을 하는 임차 회관을 점거했다. 다행히 연로한 교회 회원인 토니아 데게는 독일어에 능숙했다. 그녀는 곧 침략군들의 신뢰를 얻어 회관이나 그 안에 있는 가구에 손상을 입히지 않도록 설득해 냈다.5
마침내 아서는 장로들이 무사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리에주에 있는 미국 영사관은 폭격 첫날 그들에게 도시를 떠나라고 명령했지만, 도로 봉쇄 때문에 그들은 아서나 다른 어느 누구에게도 자신들의 이동 소식을 전할 수가 없었다.6
사실 유럽 대륙 전역의 선교사들은 자신들의 활동 지역을 떠나고 있었다. 조셉 에프 스미스 회장은 유럽 선교부 지도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전보를 보냈다. “독일과 프랑스 선교사들을 모두 해임하십시오. 교전국뿐 아니라 중립국의 모든 선교사를 미국 선교부로 이동시키는 문제에 대해 적절히 재량권을 행사해 주십시오.”7
아서는 곧 이제 이곳에 선교사들이 없다는 상실감에 젖었다. 그와 마틸드가 교회에 가입한 후 6년 동안, 그들의 지부는 신권 지도자 직분과 관련하여 선교사들에게 의존해 왔다. 이제 그 지부의 유일한 신권 소유자는 교사 한 명과 집사 두 명이었는데, 그중 한 명은 아서 자신이었다. 아서는 아론 신권을 받은 지 1년도 채 되지 않은 상태였다.8
리에주가 독일의 손아귀에 넘어간 후, 지부 모임은 거의 중단되었다. 그들의 회관을 점거한 군인들은 진군해 나갔지만, 건물 주인이 지부가 그곳에서 모이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하루하루가 생존을 위한 투쟁이었다. 식량과 일용품이 부족했고, 도시는 온통 굶주림과 곤궁에 시달렸다.
아서는 기도하며 위안을 얻기 위해 함께 모이고 싶어 하는 모든 지부 회원들의 갈망을 알았다. 하지만 집회소도, 성찬을 축복할 권세를 지닌 사람도 없이 그들의 지부는 어떻게 다시 제 기능을 할 수 있을 것인가?9
전쟁이 유럽 전역으로 확산되자, 아이다 스미스는 어떻게 하면 전쟁터로 떠나는 영국 군인들을 도울 수 있을지 고민했다. 아이다와 그녀의 남편인 사도 하이럼 엠 스미스는 약 1년 전에 네 자녀를 데리고 리버풀로 이사를 왔다. 조셉 에프 스미스의 맏아들인 하이럼은 유럽 선교부의 회장으로 봉사하고 있었다. 아이다도 선교 사업을 돕긴 했지만, 집에 어린 자녀들이 있는 동안에는 선교 활동이나 자신이 다니는 작은 지부 밖에서 하는 봉사에는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기로 했었다.10
그러나 어느 날 오후, 아이다는 리버풀의 여성 시장인 위니프레드 래스본이 쓴 공고문을 보게 되었다. 공고문에는 영국 전역의 여성 자원봉사자들이 군인들에게 제공할 따뜻한 옷을 뜨개질하고 있으므로 리버풀의 여성 단체들에게 동참을 독려하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아이다는 몇몇 후기 성도들을 포함한 수십만 명의 영국 군인들이 올겨울을 무사히 넘기기 위해 그런 옷이 절실히 필요하리라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은 별 도움이 될 수 없으리라고 느꼈다.
‘시장님을 도와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그녀는 스스로에게 물었다. ‘난 평생 뜨개질을 해 본 적도 없는데.’11
그러자 한 음성이 그녀에게 이렇게 말하는 듯했다. “지금이 바로 유럽 선교부의 상호부조회가 나서서 봉사를 해야 할 때이다.” 그 말은 아이다의 가슴 깊이 새겨졌다. 리버풀의 상호부조회는 인원이 많지 않았다. 활동 회원이 기껏해야 여덟 명이었지만, 그 여성들은 자신의 역할을 할 수 있었다.12
선교부 비서의 도움으로, 아이다는 다음 날 위니프레드와 만날 약속을 잡았다. 만남을 앞두고 아이다는 가슴이 두근거렸다. ‘왜 넌 시장님에게 가서 몇 명 되지도 않는 여성들과 봉사를 하겠다고 하는 거야?’ 그녀는 스스로를 나무랐다. ‘집에 가서 네 일이나 신경 써.’
그러나 아이다는 그 생각을 떨쳐 버렸다. 주님이 그녀와 함께하셨다. 아이다는 상호부조회와 그 목적에 대한 정보가 인쇄된 작은 카드를 손에 들고 있었다. ‘시장님에게 이 카드만 건네줄 수만 있다면, 난 갈 거야.’ 그녀는 스스로에게 말했다.13
시장의 집무실은 큰 건물에 있었는데, 그 건물은 시장이 진행하는 자선 사업의 본부이기도 했다. 위니프레드는 아이다를 정중하게 맞이했고, 아이다는 시장에게 상호부조회와 교회, 그리고 리버풀의 조그마한 지부에 대해 이야기했다. 말을 시작하자 아이다의 초조했던 마음은 금세 진정되었다. 아이다는 “군인들을 위해 바느질이나 뜨개질하는 일을 돕는 데 봉사하려고 왔습니다.”라고 설명했다.14
할 말을 다 한 아이다가 자리를 뜨려 하자, 위니프레드가 그녀를 불러 세웠다. 시장은 “우리 건물을 둘러보면서 우리의 일이 어떻게 진행되는지 봐주신다면 좋겠군요.”라고 말했다. 시장은 아이다를 데리고 열일곱 개의 커다란 사무실을 지나갔는데, 각 방에는 열두 명 정도의 여성들이 근무에 열중하고 있었다. 그런 후, 시장은 아이다를 자신의 집무실로 데려갔다. 시장은 아이다에게 장부를 보여 주며 “이것이 우리가 기록을 남기는 방법입니다.”라고 말했다. “당신들이 우리를 위해 하는 일은 모두 이 원장에 예수 그리스도 후기 성도 교회의 상호부조회가 하는 일로 기록될 것입니다.”
아이다는 시장에게 감사를 표했다. 그녀는 “최선을 다하겠습니다.”라고 말했다.15
그해 가을, 리버풀의 상호부조회는 뜨개질 작업에 들어갔다. 그들은 도움을 줄 친구와 이웃들도 모집했다. 일주일 후, 뜨개질 작업에 참여한 이들의 수는 약 40명에 이르렀다. 아이다도 뜨개질을 배워 커다란 목도리를 몇 개 만들기 시작했다. 솔트레이크시티의 본부 상호부조회 회장단의 요청으로, 아이다의 남편은 그녀를 유럽 선교부의 상호부조회 회장으로 성별했다. 유럽 대륙 전체가 여행 위험 지역이 되었지만, 아이다는 영국 곳곳을 다니며 새로운 상호부조회를 조직하고, 회원들을 훈련하고, 군인들을 위해 뜨개질 작업을 할 회원들을 모집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로 여성들은 수제 의류 2,300여 점을 만들어 배부할 수 있었다.16
아이다와 상호부조회 회원들은 영국 전역에서 중요한 관리들로부터 편지와 표창장을 받았다. 한 여성은 그들에게 “만일 영국의 모든 여성 단체가 후기 성도 여성들처럼 일한다면 우리 군인들은 아무런 부족함이 없을 것입니다.”라고 썼다.17
“유럽에서 벌어지고 있는 대학살과 파괴에 대한 보도를 보면 소름끼치고 개탄스러운 마음이 드는구나.” 조셉 에프 스미스 회장은 1914년 11월 7일에 하이럼 엠 스미스에게 편지를 썼다. 두 달 전, 프랑스와 영국의 군대는 프랑스 북동부의 마른강에서 벌어진 유혈 전투로 독일군의 진격을 저지했다. 그 뒤에도 더 많은 전투가 이어졌지만, 어느 쪽도 결정적인 타격을 가하지 못했다. 이제 군대들은 프랑스 시골 지역에 걸쳐 거미줄처럼 서로 연결되어 있는 방어용 참호 속에서 장기간 머물게 되었다.18
전쟁은 동유럽 전역, 아프리카와 중동, 태평양의 섬들까지 번지고 있었다. 스미스 회장은 분쟁에 대한 신문 기사들을 읽으며 전쟁에 대해 주님께서 주신 1832년의 계시를 떠올렸다. “그리하면 전쟁은 모든 나라 위에 쏟아지게 되리라.” 그 계시의 예언은 이러했다. “그리고 이같이 칼과 피 흘림으로 땅의 주민은 애통할 것이요.”19
1915년 1월 24일 일요일, 선지자는 미국과 캐나다의 교회 회원들에게 도움이 필요한 유럽 성도들을 위한 구호 기금에 기부해 달라고 요청했다. 그는 “이것이 도움이 필요한 교회 회원들에게 손을 내미는 가장 직접적인 방법”이라고 말했다.20 이에 부응하여 700여 개의 와드 및 지부는 성금을 모아 교회 감리 감독단 사무실로 보냈다. 이 성금은 전쟁에서 어느 편을 지지하든 상관없이 유럽의 모든 성도에게 분배하도록 리버풀의 선교부 사무실에 있는 하이럼 앞으로 보내졌다.21
몇 달 후, 스미스 회장은 감리 감독인 찰스 더블유 니블리와 함께 세계에서 비교적 평화로운 지역인 하와이 라이에에 있는 730만여 평의 교회 농장을 시찰하러 갔다.22 두 사람은 호놀룰루에서 사도이자 미국 상원 의원인 리드 스무트를 만났다. 그는 아내 앨리의 건강을 회복하고 하와이 주의회를 방문하기 위해 아내와 함께 섬에 와 있었다. 그들은 에이브러햄과 미네르바 페르난데스(조지 큐 캐넌이 마지막으로 하와이를 방문했을 때 이들의 집에서 숙박했음)와 함께 라이에로 가서 400명의 성도들과 함께 축하연에 참석했다.23
그 후로 며칠 동안 교회 회원들을 방문하고 농장을 둘러본 스미스 회장은 하와이 성도들이 영적으로나 현세적으로 번영하는 것을 보고 기뻐했다. 이제 그 섬에는 거의 만 명의 성도들이 살고 있었고, 최근에는 교리와 성약과 값진 진주가 하와이어로 출판되었다. 섬 곳곳에는 50개 이상의 후기 성도 집회소가 세워져 있으며, 라이에에는 교회 소유의 학교도 있었다. 라이에의 성도들은 그들의 뜰과 거리를 꽃과 튼실한 나무들로 아름답게 가꾸었다.24
교회는 오세아니아의 다른 지역에서도 확장되고 있었다. 몰몬경과 교회의 다른 자료들은 이제 마오리어, 사모아어, 타히티어로도 볼 수 있었다. 타히티 선교부에는 인쇄기가 있었는데, 그들은 타히티어로 된 교회 정기 간행물 『터 헤헤라 애피』[Te Heheuraa Api: 새로운 계시라는 뜻]를 발행했다.25 10년 넘게 선교 사업이 폐쇄되었던 통가에서도 교회가 다시금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오스트레일리아, 사모아, 뉴질랜드의 성도들은 상호부조회, 주일학교, 합창단을 갖춘 탄탄한 지부에서 예배를 드렸다. 1913년, 교회는 또한 뉴질랜드 헤이스팅스에 마오리 농업 대학을 개설했다. 그 학교는 젊은이들에게 농업과 기타 직업 기술을 가르쳤다.26
라이에에서 보내는 마지막 날인 6월 1일 저녁, 스미스 회장은 니블리 감독, 스무트 장로와 함께 마을이 내려다보이는 낮은 언덕 꼭대기의 집회소로 걸어갔다. 그 집회소는 1883년부터 그곳에 있었다. 그 집회소의 명칭인 I Hemolele[이 헤모레레]는 “주님께 거룩함”이라는 뜻이었는데, 그것은 솔트레이크 성전 외벽에 새겨진 것과 같은 성경 구절이었다.[Holiness to the Lord, 개역개정판 한글 성경에는 “여호와께 성결”로 번역되어 있음—옮긴이]27
그 건물 바로 밖에서 스미스 회장은 스무트 장로에게 하와이의 교회가 견고한 토대 위에 세워졌기 때문에 자신과 니블리 감독은 라이에에 엔다우먼트 하우스나 작은 성전을 지을 가능성에 대해 논의해 왔다고 말했다. 그는 I Hemolele[이 헤모레레] 자리에 성전을 지을 수 있도록 그 건물을 다른 장소로 옮기는 것을 제안했다.28
스무트 장로는 그 계획에 찬성했다. 그 주 초에, 그도 수년 전 유타에서 자신의 엔다우먼트를 받은 한 연로한 성도의 장례식에 참석한 후로 비슷한 생각을 했었다. 교회 역사 대부분에 걸쳐 교회는 성도 수가 많은 지역 인근에 성전을 지었다. 하지만 1913년에 스미스 회장은 캐나다 앨버타주 카드스턴에서 성전 건립을 위한 부지를 헌납했는데, 그곳은 현재 두 개의 스테이크가 있는 곳이었다. 교회의 본대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사는 성도들을 위한 성전 건축 계획이 세워진 것은 그것이 처음이었다.29
스미스 회장은 일행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형제 여러분, 저는 이 땅을 성전 건립을 위해 하나님께 헌납해야 한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습니다. 태평양 제도의 주민들이 와서 그들의 성전 사업을 할 수 있는 곳이 되도록 말입니다.” 그는 십이사도 정원회나 제일회장단의 다른 구성원들과 그 문제에 대해 상의하지 않았다는 것을 인정했다. “하지만 여러분이 이에 대해 반대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저는 지금이 이 땅을 헌납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스무트 장로와 니블리 감독은 그 계획에 열광했다. 선지자는 즉석에서 헌납 기도를 드렸다.30
1915년 여름, 멕시코 혁명은 더는 멕시코 북부에 있는 교회의 정착지들에 큰 위협이 되지 않았다. 많은 가족들이 정착촌에 있는 집으로 돌아왔고, 그들은 비교적 평화롭게 살고 있었다. 한편, 커밀라 아이어링의 가족을 포함한 일부 정착촌 주민들은 미국에 남기로 결정했다.31
하지만 산마르코스의 상황은 달랐다. 이곳에서 라파엘 몬로이는 약 40명의 성도가 참석하는 지부의 회장으로 봉사하고 있었다. 7월 17일, 마을은 한 무리의 반군들에게 점령당했고, 그들은 마을 한복판에 있는 큰 집에 본부를 설치한 뒤, 부유한 목장 주인 라파엘에게 소고기를 제공하라고 요구했다.32
라파엘은 반군들을 달래기 위해 도축할 소 한 마리를 내주었다. 이 반군들은 멕시코 정부를 장악하기 위해 서로 다투는 반군 지도자들 중 한 명인 에밀리아노 사파타의 추종자들이었다. 사파타의 추종자들은 산마르코스 주변 지역에서 베누스티아노 카란사의 세력과 몇 달 동안 전투를 벌여 왔다. 레이 엘 프랫 선교부 회장의 조언에 따라, 라파엘과 그의 동료 성도들은 전투에 휘말리지 않으려고 애쓰며 군대가 자신들을 평화롭게 내버려 두기를 희망했다. 반군이 도착하기 전까지만 해도 산마르코스는 멕시코 중부의 폭력 사태로 쫓겨난 성도들의 피난처였다.33
산마르코스의 성도들 중에는 라파엘의 어머니 헤수시타와 그의 아내 과달루페가 있었는데, 그 두 사람은 모두 1913년 7월에 침례를 받았다. 미국으로 떠난 프랫 회장은 멀리서 그 지부를 계속해서 지원했다.34
라파엘이 소를 넘겨준 후, 그의 이웃 몇 사람이 반군들에게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한 이웃인 안드레스 레예스는 그 지역에 성도들이 늘어나는 것을 불만스러워하는 사람이었다. 많은 멕시코인들은 그들의 조국에 끼치는 외국의 영향력에 반대했으며, 안드레스를 비롯한 마을 사람들은 천주교를 떠나 미국과 광범위하게 연관된 교회에 들어간 몬로이 가족에게 분개했다. 마을 주민들은 몬로이 가족의 큰딸 나탈리아가 미국인과 결혼했다는 사실을 알고서 그 가족을 더욱 의심하게 되었다.35
이 말을 들은 반군들은 라파엘을 뒤쫓아 집까지 쫓아가서 아침 식사 자리에 앉은 그를 체포했다. 군인들은 라파엘과 그의 미국인 매부가 사파타의 추종자들에 대항하기 위해 무기를 숨기고 있는 카란사 군대의 대령이라고 주장하며, 그에게 가족 소유의 가게 문을 당장 열라고 명령했다.
가게에서 라파엘과 군인들은 잡일 중이던 또 다른 교회 회원 비센테 모랄레스를 발견했다. 비센테 역시 카란사의 군인이라 여긴 반군은 그를 체포한 뒤, 가게를 뒤지며 무기를 찾기 시작했다. 라파엘과 비센테는 결백을 주장하면서 자신들은 그들의 적이 아니라고 강하게 주장했다.
하지만 군인들은 그들의 말을 믿지 않았다. “무기를 내놓지 않으면, 너희는 가장 키큰 나무에 매달리게 될 거야.” 군인들은 말했다.36
사파타의 군인들은 라파엘을 집 밖으로 끌고 나갔다. 그의 누이들인 호비타와 루페가 그들을 뒤쫓았다. 호비타가 먼저 군인들 앞에 도달했지만, 그들은 그녀의 간청을 무시했다. 바로 뒤이어 루페가 도착했을 때, 군인들은 그녀의 언니를 붙잡고 있었다. “루페.” 호비타가 외쳤다. “이 사람들이 날 잡아가려고 해!”
순간, 라파엘과 비센테 주변으로 군중이 몰려들었다. 어떤 사람들은 밧줄을 쥐고 이렇게 소리쳤다. “그들을 매달아!”
“어쩌려구요? 오빠는 아무 죄도 없어요.” 루페가 말했다. “필요하면 집을 허물어요. 그렇게 해도 무기는 없을 거예요.”
군중 속에서 누군가가 그녀도 체포하라고 소리쳤다. 루페는 곧바로 근처 나무로 내달려 있는 힘을 다해 나무 기둥을 꽉 껴안았지만, 반군들은 그런 루페를 손쉽게 붙잡아 떼어 냈다.37 그런 후 그들은 몬로이 집으로 돌아가 나탈리아도 붙잡았다.
반군들은 세 자매를 모두 본부로 데려가 각기 다른 방에 감금했다. 밖에 있던 몇몇 사람들은 반군들에게 라파엘과 비센테가 이상한 종교로 마을을 타락시키고 있는 “몰몬들”이라고 말했다. 반군들은 들어 본 적도 없는 그 말을 나쁜 뜻으로 받아들였다. 그들은 두 사람을 높다란 나무로 데리고 간 후, 튼튼한 가지 위로 밧줄을 걸었다. 그런 후, 군인들은 그들의 목에 올가미를 씌었다. 그들은 라파엘과 비센테에게 종교를 버리고 사파타 무리에 들어오면 풀어 주겠다고 말했다.
“내 종교는 내 목숨보다 더 소중하오. 그걸 버릴 수는 없소.” 라파엘이 말했다.
군인들은 라파엘과 비센테가 목이 졸려 기절할 때까지 밧줄을 잡아당겼다. 그러다 그들은 밧줄을 풀어 두 사람의 의식을 회복시킨 후, 계속해서 고문을 이어갔다.38
반군은 가게로 다시 와서 무기를 찾으려고 수색을 계속했다. 헤수시타와 과달루페는 무기가 없다고 주장했다. “내 아들은 평화를 사랑하는 사람이에요!” 헤수시타가 말했다. “그렇지 않았다면, 당신들이 잡으러 왔을 때 그 아이가 그렇게 집에 있었겠어요?” 군인들이 가족의 무기를 내놓으라고 다시 요구하자, 몬로이 가족은 몰몬경과 성경을 내밀었다.
“이건 무기가 아니잖아.” 반군들은 말했다.
그날 오후, 사파타 본부의 군인들은 몬로이 남매들을 모두 한 방에 몰아넣었다. 루페는 라파엘을 보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오빠, 목에 피가 묻어 있어.” 그녀가 말했다. 라파엘은 방에 있는 개수대로 걸어가서 세수를 했다. 그는 일어난 모든 일에도 불구하고 침착해 보였고, 화가 난 것 같지도 않았다.
나중에 헤수시타가 자녀들에게 음식을 가져다주었다. 헤수시타가 떠나기 전, 라파엘은 어머니에게 편지 한 통을 건넸다. 그것은 라파엘이 알고 있는 사파타 군대 지휘관에게 자신의 결백을 증명하도록 도움을 구하는 편지였다. 헤수시타는 편지를 들고 그 지휘관을 찾으러 나갔다. 그런 후, 몬로이 가족과 비센테가 음식 축복을 한 뒤 식사를 시작하려 하는데 문밖에서 발소리와 찰가닥거리는 무기 소리가 들려 왔다. 군인들은 라파엘과 비센테를 불렀고, 둘은 방을 나갔다. 문 앞에서 라파엘은 나탈리아에게 함께 나가자고 불렀지만, 파수병들은 그녀를 방 안으로 밀어 넣었다.
자매들은 서로의 얼굴만 바라보았다. 가슴이 쿵쾅거렸다. 그들은 서로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이윽고, 밤을 찢을 듯한 총성이 들려왔다.39
하이럼 엠 스미스는 유럽의 상황을 숙고하면서 어깨를 짓누르는 엄청난 중압감을 느꼈다. 유럽 선교부의 회장으로서 그는 즉시 제일회장단의 지시를 따랐고, 전쟁이 시작되자마자 독일과 프랑스의 선교사들을 철수시켰다. 그러나 영국처럼 격렬한 전투가 없는 지역이나 중립국의 선교사들은 어떻게 해야 할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제일회장단은 그에게 앞으로 어떻게 하라는 지시를 거의 주지 않았다. 그들은 편지에서 “그 문제에 대한 결정은 형제님에게 맡기겠습니다.”라고 썼다.40
하이럼은 올바른 행동 방침을 논의하기 위해 선교부 사무실에서 장로들과 두 차례 만났다. 몇 가지를 논의한 끝에 그들은 유럽 대륙에 있는 선교사들만 해임하고, 영국에 있는 선교사들은 계획대로 선교 사업을 하도록 영국에 남겨 두기로 합의했다. 하이럼은 유럽 대륙의 선교부 회장들에게 서신을 보내어 그들과 그들의 보조들에게 그들 지역의 교회를 유지하기 위해 자리를 지키라고 지시했다. 나머지 선교사들은 떠나야 했다.41
그로부터 1년이 지난 지금, 독일인들이 영국의 군함과 여객선을 공격했다는 기사들이 여러 신문의 지면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1915년 5월에는 독일 잠수함이 영국 원양 여객선인 루시타니아호를 격침시켜 거의 1,200명의 민간인과 승무원이 사망했다. 3개월 후에 독일은 아일랜드 해안에서 또 다른 영국 원양 여객선인 아라빅호를 침몰시켰다. 그 배에는 한 귀환 선교사가 타고 있었는데, 그는 그 공격으로 거의 목숨을 잃을 뻔했다.
대서양을 건너는 선교사들과 이주하는 성도들을 위해 표를 마련하는 책임을 맡고 있던 하이럼은 그 위기에 대처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 무엇일지 고심했다.42 영국에 있는 미국 선교사 중 다수가 고국으로 돌아가기를 간절히 원했기 때문에 그들은 귀국을 위해서라면 어떤 위험도 감수할 용의가 있었다. 마찬가지로, 이주하는 성도들도 종종 개인적인 안전보다 유타로 집합하고 싶은 소망이 앞섰다.
하지만 교회가 대서양을 건너는 모든 교회 관련 여행을 한 영국 해운 회사에서 담당하도록 계약을 맺은 탓에 일이 더 복잡해졌다. 그 계약에서 벗어날 적법한 방법을 찾을 수 없었던 하이럼은 미국은 독일과 전쟁을 벌이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미국 선박이 더 안전하다고 여기긴 했지만, 선교부 사무실이 성도들을 위해 미국선박의 표를 예약할 합법적인 방법은 없다고 생각했다.
1915년 8월 20일, 그는 이 문제에 대해 제일회장단 앞으로 서한을 보냈다. 그는 몇몇 선교사들과 이주하는 성도들을 위해 9월 17일에 리버풀을 출발하는 영국-캐나다 선박 스칸디나비안호의 선표를 이미 예약한 상태였다. 하지만 이제 그는 그들이 떠나게 두어야 할지 의문이 들었다.
“혼자 지기에는 너무도 무거운 책임입니다.” 그는 편지에 이렇게 썼다. “제가 형제님들의 바람과 전적으로 일치하게 행하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도록 이 문제에 대해 제게 조언해 주시기를 겸손히 간청합니다.”43
스칸디나비안호가 출발하기 일주일 전, 하이럼은 제일회장단으로부터 전보를 받았다. “교전국의 배를 타고 오는 이주민들은 각자 자신이 책임을 져야 합니다.” 만약 성도들이 영국 국기를 단 선박으로 여행하는 것을 선택한다면, 그들은 위험을 무릅쓰고 스스로 그렇게 하는 것이었다.44
하이럼은 여러 선택지를 신중하게 따져 보았다. 분명 제일회장단은 성도들이 공격을 받을 수 있는 배를 타고 여행하는 것을 권장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교회와 무관하게 별도로 여행하는 것을 선택하지 않는 한, 성도들이 더 안전한 미국 선박을 이용할 방법은 없었다. 만약 그들이 그렇게 한다 하더라도, 미국 선박은 표 값이 매우 비싸서 여행을 하는 것 자체가 어려울 것이었다.
“대양 위에서 우리 성도들을 위태롭게 하는 건 정말 못 할 짓이다.” 그는 일지에 그렇게 썼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뭔가를 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렇게 하지 말라는 지시를 받지 않은 만큼, 우린 계속 영국 배를 타고 항해를 하고 주님을 신뢰할 것이다.”45
1915년 9월 17일, 하이럼은 스칸디나비안호에 탑승한 4명의 선교사와 37명의 이민자들에게 작별 인사를 했다.46 이제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목적지에 무사히 도착했다는 소식을 기다리는 것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