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 역사
제1장: 더 밝고 더 좋은 날


“더 밝고 더 좋은 날”, 『성도들: 후기의 예수 그리스도 교회 이야기, 제3권, 담대하고 고결하고 굳세게, 1893~1955년』(2021) 제1장

제1장: “더 밝고 더 좋은 날”

제1장

더 밝고 더 좋은 날

넓은 운하의 다리와 배들, 그 뒤로 보이는 궁전 같은 돔형 건물

에번 스티븐스와 태버내클 합창단은 일생의 기회를 맞았다. 때는 미국 중서부의 번창하는 대도시 시카고에서 만국 박람회가 막 개막했던 1893년 5월이었다. 앞으로 6개월 동안 전 세계에서 온 수많은 사람이 이 박람회로 모여들 것이었다. 70만여 평의 드넓은 박람회장에는 잔디로 뒤덮인 공원, 햇빛에 반짝이는 석호와 운하, 상아색으로 빛나는 궁전 같은 건물들이 가득했다. 박람회를 찾은 방문객들은 어디서나 아름다운 음악회를 감상하고, 새로 출시된 매혹적인 아로마 향을 맡고, 46개 참가국에서 내놓은 경탄을 자아내는 전시품들을 볼 수 있었다.

세상의 주목을 받고 싶은 사람에게 세계 박람회만큼 큰 무대는 없으리란 걸 에번은 알았다.1

합창단의 지휘자로서 그는 그해 가을 박람회에서 개최될 웨일스의 권위 있는 노래 경연 대회, 그랜드 인터내셔널 아이스테드바드[Eisteddfod] 무대에 오르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그와 다수의 합창단원들은 웨일스 출신이거나 웨일스 혈통을 지닌 사람들이었고, 고국의 음악적 전통에 매료된 채 성장기를 보냈다. 하지만 이번 대회는 자신들의 유산을 기념할 수 있는 기회 이상의 것이었다. 시카고에서 공연을 한다는 것은 태버내클 합창단(예수 그리스도 후기 성도 교회의 최고의 노래 그룹)이 재능을 선보이고 더 많은 사람에게 교회를 소개할 절호의 기회가 될 것이었다.2

자신들에 대한 잘못된 정보가 전해질 때마다 성도들은 매번 고난을 당하고 이웃과의 갈등을 겪어야 했다. 반세기 전에 그들은 자신들을 괴롭히는 사람들을 벗어나 멀리 떨어진 솔트레이크밸리로 갔다. 그러나 평화는 오래가지 못했다 특히 성도들이 공개적으로 복수 결혼을 시행하면서부터 평화는 빠르게 사라졌다. 그 후로 수십 년간 미국 정부는 끊임없이 복수 결혼에 반대하는 캠페인을 벌였고, 교회에 대한 비판을 일삼는 이들은 온갖 수단을 동원하여 교회에 대한 대중의 이미지를 손상시키며 성도들을 천하고 미개한 사람들로 묘사했다.

1890년, 교회 회장인 윌포드 우드럽은 성도들 사이에 복수 결혼을 종식하도록 요구하는 공식 성명서를 발표했다. 그때부터 연방 정부는 교회에 대한 적대 조치를 완화했다. 그러나 변화는 더디고 오해는 끊이지 않았다. 세기가 끝날 즈음, 성도들은 자신들이 어떤 사람들이고 무엇을 믿는지에 대한 참모습을 세상에 보여 주고 싶어 했다.3

에번은 합창단이 이번 박람회에서 교회를 대표할 수 있기를 간절히 원했지만, 그는 그만 그 기회를 거의 놓칠 뻔한 상황이었다. 그 무렵에 미국을 강타한 경제 위기로 유타의 경제 역시 타격을 받았다. 합창단원 다수는 경제적으로 어려운 사람들이었고, 에번은 그들이 자신들의 수입으로 여행 경비를 충당하는 상황을 원치 않았다. 그는 또한 합창단이 경연에 나갈 만큼 준비가 되어 있지는 않다는 점도 우려했다. 최근에 솔트레이크 성전 헌납식에서 천사처럼 노래를 부르긴 했지만, 그들은 여전히 아마추어 합창단이었다. 만일 그들이 다른 합창단들의 상대가 되지 않는다면, 교회로서는 창피한 일일 수도 있었다.4

사실 그해 초에 이미 에번과 교회의 제일회장단은 대회에 불참하기로 결정을 내렸었다. 하지만 아이스테드바드 측은 대표자들을 솔트레이크시티로 파견했고, 합창단의 노래를 들은 그들은 제일회장단 제1보좌인 조지 큐 캐넌에게 성도들이 그 대회에서 우승할 수도 있다는 의견을 말했다.

캐넌 회장은 에번에게 물었다. “우리 합창단이 입선할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이에 에번은 “저는 우리가 이번 대회에서 우승을 하리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좋은 인상을 남길 수는 있을 것입니다.”라고 답했다.5

캐넌 회장에게는 그것으로도 충분했다. 교회를 훌륭하게 대표하고 싶어 했던 다른 성도들은 이미 시카고로 떠난 상태였다. 상호부조회 및 청녀 상호향상회[Young Ladies’ Mutual Improvement Association] 지도자들은 역사상 가장 큰 규모의 여성 지도자들의 모임인 ‘박람회 여성 대표자 대회’[Congress of Representative Women]에서 연설을 할 예정이었다. 칠십인 정원회의 일곱 회장 중 한 명인 비 에이치 로버츠는 박람회의 종교 회의에서 교회에 대한 연설을 하고자 했다.

제일회장단의 요청에 따라, 합창단은 즉시 연습을 시작했고, 여행 경비를 댈 방법을 찾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에번이 그 불가능한 일을 해내야 할 기간은 3개월도 채 되지 않았다.6


그해 봄, 태버내클 합창단에 걸림돌이 된 경제 위기는 교회마저 재정 파탄으로 위협하고 있었다.

일부다처제에 반대하는 캠페인이 한창이던 6년 전, 미국 의회는 교회 재산의 몰수를 승인하는 에드먼즈-터커 법을 통과시켰다. 많은 성도들은 정부가 자신들의 헌금을 압류할 것을 우려하여 십일조를 내는 것을 중단했고, 따라서 교회의 주요 자금원은 크게 줄어들었다. 그러한 손실을 메우기 위해 교회는 주님의 일을 계속 진척시킬 충분한 자금을 마련하고자 돈을 빌리고 벤처 사업에 투자했다. 또, 교회는 솔트레이크 성전을 완공할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대출을 받았다.7

1893년 5월 10일, 제일회장단은 사도인 히버 제이 그랜트에게 즉시 동부로 가서 교회의 재정적 부담을 덜기 위한 새로운 대출 협상을 하도록 요청했다. 유타에서는 은행들이 파산하고 농산물 가격이 폭락하고 있었다. 곧 교회는 비서와 서기, 그 외 다른 직원들에게 임금을 지불할 수도 없을 것이었다.8 히버는 솔트레이크시티 은행의 은행장이었고, 금융 업계에 친구들이 많았으므로, 교회 지도자들은 그가 돈을 확보할 수 있기를 희망했다.9

일단 히버가 동부로 가는 데 동의하자, 캐넌 회장은 그에게 축복을 주며 천사들의 도움을 받게 될 것이라고 약속했다. 히버는 자신의 어깨 위에 놓인 교회에 대한 무거운 책임감을 느끼며 동부 해안으로 가는 기차에 몸을 실었다. 만약 그가 이번 일에 실패한다면, 교회는 대출금을 갚지 못하고 채권자들의 신뢰를 잃게 될 것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되면, 교회를 계속 운영하는 데 필요한 돈을 빌릴 수도 없게 될 것이다.10

뉴욕시에 도착한 직후, 히버는 몇 개의 대출을 갱신하고 25,000달러를 더 빌렸다. 그런 후에 그는 또 다른 대출을 받기 위해 노력한 끝에 5만 달러를 추가로 확보했다. 그러나 그것으로는 교회를 재정적으로 지탱하기엔 역부족이었다.11

날이 갈수록 그는 더 많은 대출 기관을 찾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모두들 경제 위기에 공포를 느끼고 있었고, 이미 빚이 많은 기관에 대출을 주려고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히버는 점점 밤잠을 이루지 못하게 되었다. 그는 임무를 완수하기도 전에 건강을 먼저 잃게 되지는 않을까 걱정이 되었다. 그는 일지에 이렇게 썼다. “내 키가 180센티미터가 넘는데 몸무게는 고작 63킬로그램이니 앞으로 쓸 여분이 많지 않다.”12


5월 19일 아침, 에멀라인 웰스는 마음이 불안했다. 10시에 그녀와 상호부조회의 다른 지도자들은 시카고 세계 박람회의 세계 여성 대표자 대회에서 상호부조회 조직에 대한 연설을 하기로 되어 있었다.13

그녀는 자신들의 연설이 교회의 여성들에 대한 해로운 고정관념을 바로잡기를 바랐다. 20만 명의 교회 회원 중 대부분이 미국 서부에 살고 있었으므로, 실제로 후기 성도 여성을 만나 본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들에 대한 대중의 인식은 주로 교회에 대한 잘못된 정보를 퍼뜨리고 교회 여성들을 무지하고 억압받는 존재로 묘사한 책과 잡지, 소책자 등에서 기인한 것이었다.14

10시가 되었을 때, 800석의 회의실은 자리가 듬성듬성 비어 있었다. 상호부조회에서 맡은 순서는 홍보가 잘 되었지만, 그 시간에는 다른 중요한 대회들도 진행되고 있었다. 그런 대회들이 아니었더라면 유타 여성들의 연설을 들으려는 청중이 더 왔을 수도 있다. 에멀라인은 청중 속에서 몇 사람의 얼굴을 알아보았다. 그 사람들 중 다수는 그들을 지원하기 위해 온 후기 성도들이었다. 하지만 에멀라인은 후기 성도가 아닌 중요한 인물을 발견했다. 바로, 에터 길크라이스트 기자였다.15

에터는 10년 전에 복수 결혼과 성도들을 비난하는 소설을 쓴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 이후로 에터와 에멀라인은 여성 투표권을 옹호한다는 공동의 대의를 찾았고, 에멀라인은 참정권에 관한 에터의 기사 중 하나를 자신이 유타에서 편집인으로 있던 신문인 『우먼스 익스포넌트』[Woman’s Exponent, 여성 주창자라는 뜻—옮긴이]에 게재했다. 에터의 긍정적인 보도는 확실히 성도들의 평판에 도움이 될 것이었다.16

엘리자 알 스노우의 찬송가 “오 높은 영광 보좌에” 공연으로 모임은 시작되었다. 그런 후, 본부 상호부조회의 회장인 지나 영을 비롯한 지도자들은 상호부조회가 하는 일과 교회의 역사에 대한 짧은 연설을 했다. 연설에 나선 이들 중에는 개척자로서 유타에 온 여성들뿐만 아니라 유타에서 태어난 여성들도 있었다. 에멀라인은 연설에서 유타 여성 작가들의 세련됨을 칭찬했고, 상호부조회가 곡물을 저장하는 데 쌓아 온 다년간의 경험을 설명했다.

그녀는 청중을 향해 이렇게 말했다. “기근이 들면 시온으로 오십시오.”17

모임이 끝나기 전, 에멀라인은 에터를 연단으로 올라오게 했다. 에터는 지나 옆으로 자리를 옮겨 앉았다. 그녀는 유타에서 온 여성들과 각각 악수를 했고, 한때 자신이 경시했던 그들이 자신을 친절히 대하려 한다는 점에서 감명을 받았다.

상호부조회 모임에 대한 에터의 기사는 며칠 후 신문에 실렸다. “몰몬들은 분명 가장 종교적인 사람들이다.” 에터의 기사는 이렇게 되어 있었다. “그들이 자신들의 종교에 대해 보이는 신앙은 놀랍다.”

그녀는 성도들로부터 받은 환영에 대해 설명하면서 “이 한 번의 만남은 내가 시카고에 올 만한 가치가 있음을 보여 주었다.”라고 덧붙였다.

에멀라인은 그 칭찬을 감사히 여겼다.18


유타의 은행과 기업체들이 파산하자, 열아홉 살의 리아 던포드는 가족들을 걱정했다. 리아의 어머니인 수사 게이츠(브리검 영의 딸)는 넉넉하지 않은 형편에도 불구하고 리아가 매사추세츠주 케임브리지에 소재한 하버드 대학교에서 여름 학교에 다니며 보건 및 신체 단련 과목을 공부할 수 있도록 귀중한 땅을 팔았다. 리아는 그 학교에 가야 할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어머니의 희생으로 자신이 혜택을 받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인지 의문이 들었다.19

수사는 아무리 비용이 많이 들더라도 리아가 이 여름 학교에 다니기를 바랐다. 그 당시, 많은 젊은 후기 성도들은 미국 동부의 명문 대학에서 공부하기 위해 유타를 떠나고 있었다. 전년도에 그 여름 학교에서 공부한 경험이 있는 수사는 딸도 자신과 비슷한 좋은 경험을 하기를 바랐다. 수사는 또한 그곳에서 만난 학생 중 한 명인 존 윗소라는 노르웨이 출신의 후기 성도 젊은이가 리아와 이상적인 짝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20

돈에 대한 걱정은 차치하고, 리아도 더 많은 교육을 받고자 하는 열망이 있었다. 리아의 어머니는 젊은 후기 성도 여성들이 좋은 교육과 직업 훈련을 받는 것이 필요하다고 여기는 사람이었다. 최근까지 복수 결혼이 시행되었으므로, 사실상 모든 후기 성도 여성은 본인이 원하기만 한다면 성약의 결혼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복수 결혼 종식을 알리는 성명서가 발표된 이후 성년이 된 첫 세대인 리아의 세대는 그런 보장, 즉 당시 여성들이 결혼을 통해 얻는 재정적 지원을 더는 보장받지 못했다.21

세계 각지에서 여성의 교육적, 직업적 가능성이 확대되고 있었지만, 교회 내 부모들은 이러한 기회가 딸들이 교회 밖의 남성과 결혼하고 신앙을 등지는 결과를 초래하지는 않을지 걱정했다. 이 때문에 청녀 상호향상회[Young Ladies’ Mutual Improvement Association]의 지도자들은 청녀들이 간증을 키우고 기도하는 마음으로 중요한 결정을 내려야 한다고 강조하기 시작했다.22

사실, 수사는 이미 리아에게 존 윗소와의 관계에 대해 금식하고 기도하도록 격려했었다. 수사는 술고래였던 리아의 친부와 이혼으로 결혼을 끝냈다. 수사는 딸이 의로운 젊은이와 행복한 결혼 생활을 하기를 갈망했다. 물론 리아는 아직 존을 직접 만나 본 적이 없었고, 지금까지 편지만 몇 통 주고받았을 뿐이었다.23

1893년 6월, 리아는 다른 여성 네 명과 함께 유타에서 3,200킬로미터 이상 떨어진 하버드로 갔다. 존과 다른 후기 성도 학생들이 사는 집에 늦은 시각에 당도했기에 리아 일행은 다른 청년들과 인사를 나눌 시간이 없었다. 다음 날 아침, 리아는 구석에 혼자 앉아 있는 한 조용한 청년을 보게 되었다. “윗소 형제님이죠?” 리아가 말을 건넸다. “어머니에게 형제님 이야기를 많이 들었어요.”

그녀는 존을 키가 크고 건장한 스칸디나비아 사람으로 늘 상상했었지만, 정작 그는 키가 작고 마른 모습을 하고 있었다. 도대체 그녀의 어머니는 그에게서 무엇을 보았던 것일까?

어떠한 깊은 인상도 받지 못한 리아는 저녁 식사 시간이 될 때까지 존을 계속 무시했다. 가정부가 존에게 고깃덩이를 썰어 달라고 부탁했을 때는 그런 생각마저 들었다. ‘그래도 쓸모는 있군.’ 그런 다음, 모두가 음식 축복을 위해 무릎을 꿇었고, 존이 기도를 했다. 그의 기도는 곧바로 리아의 가슴 깊이 스며들었다.

“바로 저 사람이야.”라고 그녀는 혼잣말을 했다.24

그 후, 리아와 존은 거의 늘 함께 지냈다. 어느 오후, 두 사람은 공원을 거닐다 연못이 내려다보이는 작은 언덕 위에 멈춰 섰다. 그곳에서 존은 리아에게 노르웨이에서 보낸 어린 시절과 유타 로건에서 보낸 청소년 시절을 들려주었다.

곧 비가 내리기 시작했고, 그들은 비를 피해 근처의 탑으로 갔다. 그곳에서 리아는 존에게 자신의 삶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런 후 두 사람은 탑 꼭대기로 올라가서 장래의 소망에 대해 한 시간 반 동안 대화를 나누었다.25


존 윗소는 리아 던포드와 사랑에 빠졌지만 그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는 않았다. 리아가 처음 학교에 왔을 때, 그는 그녀에게 관심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존의 삶은 너무도 바빴고, 인생의 이 단계에서 연애에는 흥미가 없었다. 그에게는 미래에 대한 큰 계획이 있었다. 리아는 그런 그의 주의를 흩트리는 존재였다.

하지만 존은 리아가 여러 악기를 연주하고 상황에 따라 가볍게도, 혹은 진지하게도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점이 마음에 들었다. 남들은 모두 앉아서 아무것도 하지 않을 때 그녀만은 가정부를 도와 청소를 하는 모습도 좋았다. 무엇보다도 존은 그녀의 야망이 마음에 들었다.

“리아는 세상에서 뭔가를 하고자 하는 야망이 있어요.” 그는 솔트레이크시티에 있는 어머니 아나에게 보내는 편지에 그렇게 썼다. “그녀는 유타 교육계의 여성 지도자 중 한 명이 될 거예요.”

존의 계산에 따르면, 하버드의 학자금 대출을 갚으려면 적어도 2년 내지 3년은 걸릴 것이었다. 그런 다음, 유럽에서 4년간 대학원을 다닐 것이고, 그 학자금 대출을 갚으려면 또 4년이 걸린다. 그런 후에 리아와 결혼하는 것을 고려해 볼 만큼 충분한 돈을 벌려면 적어도 3년은 더 필요할 것이다.26

존은 또한 여전히 자신의 종교적 믿음의 문제를 해결하는 중이었다 그는 예수님의 순수함과 선하심을 믿었다. 하버드에 처음 왔을 때, 그는 입학 시험에 합격하도록 하나님께서 도와주셨다는 강력한 영적 증거도 받았다. 하지만 교회에 대한 확신은 부족했다. 그해 초에 그는 교회와 교회 지도자들에 대한 의문을 편지에 적어 어머니에게 보냈다. 그 편지를 읽고 마음이 너무나 괴로웠던 아나는 아들이 간증을 잃었다고 확신하며 즉시 답장을 썼다.27

그다음 편지에서 존은 자신의 생각을 설명하려고 노력했다. 또래의 다른 몇몇 성도들과 마찬가지로, 그도 의심과 씨름했다. 교회 지도자들은 그가 마지막 날에 살고 있으며,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그분의 백성을 원수들로부터 구원하실 것이라고 늘 가르쳤었다. 그러나 지난 3년 동안, 그는 성도들이 복수 결혼을 제쳐 두고 정치 문제로 심하게 분열되는 것을 보았다. 그는 이제 성도들이 과연 성공적으로 시온을 건설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들었다.

“모든 게 기대와는 어긋나는 것 같아요.” 그는 어머니에게 그렇게 말했다.

집에 보낸 편지에서 존은 단순히 뭔가를 믿는 것만으로는 자신에게 충분하지 않다는 점을 설명하려 노력했다. 그는 자신이 왜 그것을 믿는지를 알아야만 했다. 그는 편지에서 이렇게 말했다. “제가 ‘그것을 믿는다’라고 말은 하고 그것에 대해 더는 생각하지 않는다면 아무런 소용이 없잖아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교회에 관한 것들을 더 깊이 이해하기 위해 계속 기도했다.28

그리고 7월 23일, 그는 강력한 영적 경험을 했다. 감리교 신자인 한 여성이 후기 성도 학생들의 일요일 예배에 참석했는데, 즉석에서 설교를 해 달라는 요청이 존에게 온 것이다. 깜짝 놀란 그는 자리에서 일어섰지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그는 그 방문자가 자신의 말을 통해 성도들이 무엇을 믿는지를 이해하게 되기를 바라며, 하나님의 성품에 대해 말하기로 얼른 마음을 정했다. 말씀을 전하는 동안, 그는 대중 앞에서 말할 때 가끔 그랬듯이 당황하거나 했던 말을 되풀이하지 않았다. 그는 30분이 넘도록 알아듣기 쉬운 명확한 설교를 전했다.

“하나님의 영이 저를 도와주고 있다는 걸 느꼈어요.” 그는 어머니에게 편지로 그렇게 말했다. “하나님과 그분의 성품에 대해 그렇게 많이 알았던 적은 없어요.”29

모임이 끝난 뒤, 존은 남은 하루를 리아와 함께 보냈다. 대화를 주고받던 중, 존은 리아에게 자신의 어머니와 만나봤으면 좋겠다는 뜻을 전했다. 그는 이미 아나에게 리아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했고, 이제 그는 두 사람이 직접 만나기를 원했다.30


1893년 9월 1일 자정이 가까운 시각에 히버 제이 그랜트는 뉴욕시의 한 호텔 방에서 졸음기 하나 없이 누워 있었다. 그날 일찍 그는 무서운 내용이 담긴 전보를 받았다. 교회의 가장 중요한 금융 기관인 ‘시온의 저축 은행 및 신탁 회사’[Zion’s Savings Bank and Trust Company]가 파산될 위기에 처해 있었다. 히버가 은행장으로 있던 ‘유타 주립 은행’[State Bank of Utah]도 마찬가지였다. 만약 그가 이튿날 은행으로 돈을 송금하지 않는다면, 영업은 불가능해질 것이고, 채권자들 사이에서 히버와 교회의 평판은 아마도 영원히 산산조각이 나고 말 것이었다.

히버는 몇 시간이나 몸을 뒤척이며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해 초, 조지 큐 캐넌은 천사들이 그를 도울 것이라고 약속했었다. 그리고 좀 더 최근에는 제일회장단 제2보좌인 조셉 에프 스미스가 그에게 기대 이상의 성공을 거둘 것이라고 약속한 바가 있다. 그러나 지금 히버는 은행들을 구할 수 있을 만큼 충분한 자금을 과연 누구에게 빌릴 수 있을지 상상이 되질 않았다.

그는 눈물을 흘리며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는 간절한 기도를 드렸다. 마침내, 새벽 3시쯤 여전히 이 딜레마를 어떻게 풀 것인지 확신하지 못한 채 잠이 들었다.31

평소와 달리 그는 늦게 일어났다. 토요일이라 은행들이 정오면 문을 닫기에 서둘러야 했다. 히버는 무릎을 꿇고 주님께 20만 달러를 빌려줄 사람을 찾아 달라고 부탁드렸다. 그는 대출을 해 주는 사람에게 거액의 수수료를 지불하는 등 어떤 희생도 불사할 용의가 있다고 말씀드렸다.32

기도 후, 히버는 기분이 좋아졌고 주님이 자신을 도와주실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그는 큰 상업 회사의 대표인 존 클래플린을 찾아가기로 했다. 그러나 존은 사무실에 없었다. 시간이 촉박했기에, 히버는 다른 은행을 가 보고자 금융가로 가는 기차를 탔다. 도중에 그는 신문에 정신이 팔려 내릴 역을 놓치고 말았다. 그는 기차에서 내려 정처 없이 걸었다. 그러다 뜻밖에 지인의 사무실을 발견하고 그곳으로 들어갔다. 그곳에 존 클래플린이 있었다. 히버가 만나고 싶어 했던 바로 그 사람이었다.

히버의 곤경을 알게 된 존은 수수료 20퍼센트를 조건으로 25만 달러를 교회에 빌려주기로 했다.33 비록 많은 대가가 따랐지만, 히버는 주님께서 자신의 기도에 응답하셨다는 것을 알았다.34 그는 즉시 솔트레이크시티로 송금했고,

때맞춰 도착한 자금은 좌초하는 은행들을 구해 낼 수 있었다.35


“노래를 다 부를 때까지 경쟁자들에게는 주의를 기울이지 마세요.” 에번 스티븐스가 태버내클 합창단 단원들에게 말했다. “침착하게 하시면 됩니다.”

9월 8일 오후였다. 합창단은 아이스테드바드를 위한 마지막 리허설을 마쳤다. 몇 시간 후면 단원들은 무대에 올라 그 여름 동안 거의 매일 연습했던 세 곡을 공연할 것이다. 우승에 대한 확신은 여전히 크지 않았지만, 최선을 다한다면 에번은 그것만으로도 만족스러울 것이었다.36

합창단은 제일회장단과 함께 대회가 있기 닷새 전에 시카고에 도착했다. 에번은 경연 대회의 요건을 갖추기 위해 합창단 단원을 250명으로 줄였다. 합창단원의 주역 소프라노인 넬리 퍼그슬리는 대회를 몇 주 앞두고 출산을 해서 이번 공연이 어려울 거라 생각했지만, 그녀의 여동생이 넬리가 노래를 하는 동안 아기를 돌봐 주기로 했다.37

경제 불황기에 여행 자금을 대는 것은 합창단에게 노래 준비를 시키는 것 못지않게 어려운 일이었다. 합창단 지도자들은 처음에 솔트레이크시티의 사업가들에게서 모금을 하려고 시도했다. 그러나 모금이 실패하자, 합창단은 음악회를 몇 차례 열어 표를 판 대금으로 여행 경비를 충당하기로 결정했다. 그들은 유타에서 두 차례, 솔트레이크시티와 시카고 사이의 주요 도시에서 네 차례 더 음악회를 열었다.38

음악회는 재정적으로 성공적이었지만, 단원들의 목소리에는 부담이 되는 일이었다. 합창단은 시카고에서 계속해서 준비하여, 수백 명의 관객을 그 지역의 물품과 공예품을 전시하는 대형 전시장인 유타 빌딩의 리허설로 끌어 모았다.39

마지막 리허설이 끝난 후, 에번과 단원들은 공연장 지하실에 모였다. 공연 순서를 기다리는 동안, 합창단의 총무인 존 누털은 각 단원이 박람회에서 교회와 교회 회원들을 대표한다는 사실을 상기시키는 기도를 드렸다.

그의 기도는 이러했다. “대부분 우리를 무지하고 교양 없는 사람으로 여기는 세상 사람들 앞에서 저희가 당신의 백성을 대표하기 위해 노력할 때, 적어도 당신의 일과 당신의 백성이 인정을 받을 수 있게 해 주시기를 간구합니다.”40

합창단의 차례가 되자, 에번이 지휘대에 올라섰다. 공연장에는 만 명 정도의 관객이 들어 찼고, 그중 교회의 회원은 거의 없었다. 과거에는 후기 성도라면 으레 그런 관객 앞에서 야유를 받을 것으로 예상했겠지만, 에번은 그들에게서 아무런 적대감도 느끼지 못했다.

단원들이 무대 위에서 자리를 잡자 객석이 조용해졌다. 합창단이 헨델의 “죽임을 당하신 어린 양(Worth Is the Lamb)” 첫 소절을 불렀다.

죽임을 당하신 어린 양은

능력과 부와 지혜와

힘과 존귀와 영광과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도다

합창단의 목소리는 우렁찼다. 에번은 합창단의 노랫소리가 아주 훌륭했다고 생각했다. 합창단이 노래를 마치자, 객석에서 갈채가 터져 나왔다. 합창단은 두 곡을 더 불렀다. 에번은 목소리에서 피곤함이 다소 묻어나는 걸 느꼈지만, 합창단은 공연을 잘 마무리하고 무대를 내려왔다.41

“우리가 할 수 있는 최고의 기량을 선보였습니다.” 공연을 마친 에번이 제일회장단에 말했다. “저는 만족합니다.”

후에 발표된 결과는 이러했다. 태버내클 합창단은 우승 팀보다 겨우 0.5점 뒤진 점수로 준우승을 차지했다. 심사위원 중 한 명은 성도들이 그 대회의 우승팀으로 뽑혔어야 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캐넌 회장은 합창단이 그보다 더 큰 성과를 거두었다고 여겼다. 그는 이렇게 기록했다. “합창단은 수천 명의 사람들에게 우리에 대한 진실을 조금이라도 알 수 있는 기회를 줄 것이므로, 선교 사업 면에서 성공할 가능성이 높다.”42

에번 역시 모든 단원이 이룩한 성취에 기뻐했다. “몰몬 합창단”이 세계 박람회에서 수상했다는 소식이 전 세계 신문에 보도되었다. 그로서는 이보다 더 좋은 보상은 없었다.43


음악회 이튿날, 박람회에서 열린 공식 연회 자리에서 우드럽 회장은 성도들에 대한 연설을 했다. “우리를 보러 오십시오.” 그는 힘차게 말했다. “만약 솔트레이크시티에 와 보신 적이 없으시다면, 우리는 그런 여러분 모두를 환영합니다.” 그는 또한 다른 종교의 성직자들에게 솔트레이크시티에서 설교를 해 달라고 초청했다. “교회에 자리가 모자라면, 우리의 태버내클을 내드리겠습니다.”44

선지자는 시카고에서 성도들이 받은 친절에 힘을 얻고 열흘 후에 유타로 돌아갔다. 박람회에서 교회가 유일하게 경험한 상처는 비 에이치 로버츠가 종교 회의에서 교회에 대해 연설하려고 하자 회의 주최 측에서 항의를 한 일뿐이었다. 그들의 행동은 슬프게도 교회에 대한 편견이 여전하다는 것을 상기시켰지만, 교회 지도자들은 전국의 사람들이 성도들을 새로운 시각으로 보기 시작했다고 믿었다.45 이 박람회에서 상호부조회와 태버내클 합창단이 받은 따뜻한 환영은 지난 60년간의 박해가 끝나가고 있다는 희망을 안겨 주었다.46

교회의 연차 대회 전날인 10월 5일 저녁, 제일회장단과 십이사도 정원회는 솔트레이크 성전에서 작은 모임을 열고 함께 성찬을 취했다.

조지 큐 캐넌은 이렇게 말했다. “저는 우리에게 더 밝고 더 좋은 날이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마음 깊이 느끼고 있습니다.”4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