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샘에서 영감을 얻어”, 『성도들: 후기의 예수 그리스도 교회 이야기, 제2권, 그 어떤 신성하지 않은 손도, 1846~1893년』(2020) 제42장
제42장: “하나님의 샘에서 영감을 얻어”
제42장
하나님의 샘에서 영감을 얻어
1892년 1월 초, 지나 영과 에멀라인 웰스는 상호부조회 설립 50주년 기념행사를 계획하기 위해 솔트레이크시티에서 본부 상호부조회 임원회의 다른 일원들을 만났다. 임원회 자매들은 전 세계 후기 성도 여성들이 이 일을 함께 기념하기를 바라며, 교회의 모든 상호부조회에 나름대로 기념행사를 열 것을 독려하는 편지를 보냈다.1
모든 자매에게 “진심 어린 인사”를 건네는 것으로 시작된 이 편지에서, 그들은 각 상호부조회 회장단에게 상호부조회 자매들과 신권 지도자들을 지역의 기념행사에 초청하고, 조직 위원회를 꾸려 이 행사를 계획하도록 요청했다. 각 지역은 나부에서 처음으로 상호부조회가 조직되었던 3월 17일 오전 10시 정각에 기념행사를 시작하여, 두 시간 뒤에는 “하나님을 찬송하고 그분께 감사드리며 모두 함께 기도”하기로 계획되었다.2
지나는 솔트레이크시티에서 모두가 만족할 만한 기념행사가 준비되도록 돕기 위해 에멀라인에게 많은 부분을 의지했다. 에멀라인은 3월 초까지 눈코 뜰 새 없이 행사 계획에 매달렸다. 그녀는 자신의 일지에 이렇게 적었다. “나는 50주년 기념행사를 준비하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을 해내려고 애쓰고 있다. 그 어느 때보다도 바쁜 시간을 보내는 중이다.”3
본부 상호부조회 임원회는 태버내클에서 솔트레이크시티의 기념행사를 열기로 계획했다. 그들은 조셉 스미스와 에머 스미스, 엘리자 알 스노우, 지나 영의 대형 초상화를 연단 뒤편에 걸어 회당을 장식하고자 했다.4
그러나 상호부조회의 초대 회장인 에머 스미스는 일리노이에 머물며 복원 예수 그리스도 후기 성도 교회의 회원이 되었으므로, 그녀의 초상화를 회당에 거는 것은 적절치 않다고 여기는 사람들이 일부 있었다. 논쟁이 격해지자, 지나는 윌포드 우드럽 회장에게 그녀의 초상화를 거는 것에 대한 의견을 물었다. 윌포드는 이렇게 말했다. “거기에 반대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매우 편협한 사람일 것입니다.”5
50주년 기념행사 당일, 회당의 오르간 파이프에는 네 사람의 초상화가 모두 걸렸다. 또한 그 옆으로는 1842년에 조셉 스미스가 여성들에게 넘겨 준 열쇠를 상징하는 뜻에서 열쇠 모양으로 꽃 장식이 준비되었다.6 지나와 에멀라인은 벳시바 스미스, 세라 킴볼, 메리 이사벨라 혼 등 지난 50년간 상호부조회의 사명을 진전시켜 온 여성들과 함께 연단에 앉았다. 회당은 수천 명의 상호부조회 자매들로 가득 찼고, 조셉 에프 스미스와 십이사도 정원회의 두 사도를 비롯한 많은 남성들도 그 자리에 함께했다.7
지나는 전 세계에서 교회의 여성들이 이날을 축하하고 있으리라 생각하며 모임을 시작했다.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제가 드리는 말씀이 모든 사람에게 전해지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이 회당과 유타 곳곳에 계신 형제 자매님들만이 아니라 이 대륙의 모든 사람, 유럽과 아시아, 아프리카, 바다의 섬들에 있는 모든 사람이 제 말을 듣고 이해하기를 염원합니다.”
그리고 그녀는 이렇게 덧붙였다. “우리는 이 조직의 자매로서 병들고 고통받으며 궁핍하고 괴로워하는 사람들을 위로하고 다독이도록 성별받았습니다. 우리가 이를 염두에 두고 계속해서 그것을 실천한다면, 주님께서는 그분의 보석을 모으러 오시는 그날에 우리를 받아들여 주실 것입니다.”
“상호부조회가 조직된 지 50년이 되었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에멀라인은 모임을 마치며 회중을 향해 물었다. “그것은 단지 50년 전에 하나님의 선지자가 이 조직을 설립했다는 것만을 뜻하지는 않습니다. 이는 여성이 그릇된 생각과 미신, 어둠에서 해방되고, 세상에 빛이 비쳤으며, 복음이 여성을 해방했고, 지식의 열쇠가 주어지고, 여성이 하나님의 샘에서 영감을 얻었음을 의미합니다.”8
이 무렵, 하버드 대학교의 찰스 엘리엇 총장이 미국 서부를 여행하던 중 솔트레이크시티를 방문했다. 적은 수였지만 지난해에 하버드에 온 후기 성도 학생들을 보고 깊은 인상을 받았던 찰스는 회당에서 강연해 달라는 요청을 수락했다.
그의 짧은 강연을 듣기 위해 모인 사람은 7,000명에 달했다. 찰스는 성도들 편에 서서 그들을 하버드를 설립한 초기 영국인 정착민들과 비교하며, 종교의 자유를 옹호하고 성도들의 노고와 근면에 찬사를 보냈다.9 나중에 『솔트레이크 트리뷴』을 포함한 신문들이 성도들에 대한 그의 우호적인 시각을 비판하자, 찰스는 다음과 같은 말로 성도들을 옹호했다.
“나는 그들이 이제 재산권과 사상 및 종교의 자유에 관하여 로마 가톨릭, 유대교, 감리교 같은 타종파와 동등한 대우를 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10
아나 윗소는 여동생 페트롤리네와 열네 살 된 아들 오스보네와 함께 청중 가운데 앉아 있었다. 1년 전에 맏아들 존을 하버드로 진학시켰던 아나는 그 학교에 다니는 후기 성도 학생들을 매우 높이 평가한 이 저명한 연사를 보고 감명을 받았다.11
윗소 모자는 이제 솔트레이크시티 제13와드에서 페트롤리네와 함께 생활하고 있었으며, 이 와드는 스칸디나비아에서 온 성도들이 많아 간증 모임에서 여러 언어를 들을 수 있었다. 오스보네는 메인 스트리트에 있는 “시온의 협동조합 상업 협회의 상점에서 일했고, 아나와 페트롤리네는 재봉사로 일했다. 또한, 아나와 오스보네는 그 지역 스테이크에서 운영하는 학교에서 매주 강의를 들었다.12
4월의 첫 번째 주말, 솔트레이크시티에는 한겨울처럼 눈이 내렸다. 그러나 수요일인 4월 6일 아침이 되자 날은 맑게 개었고, 아나와 오스보네는 템플스퀘어 안팎으로 늘어선 4,000여 인파와 함께 솔트레이크 성전 동쪽 중앙의 첨탑 꼭대기에 관석이 놓이는 장면을 보기 위해 기다리고 있었다. 석재로 된 반구형의 관석은 사이러스 댈린이 제작한 3.7미터 높이의 천사상을 지지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으로, 천사상은 그날 오후에 올려질 예정이었다. 관석과 천사상이 놓이면 성전 외부 공사가 마무리되고, 마지막으로 내부 공사가 끝나면 성전 헌납이 가능해질 것이었다.13
성전을 둘러싼 거리 곳곳은 마차로 빼곡했다. 구경하는 이들 중 몇몇은 더 잘 보이는 곳을 찾아 우마차와 전신주, 옥상 같은 곳으로 올라갔다.14 북적거리는 군중 틈에 선 윗소 모자는 우드럽 회장과 교회 지도자들이 성전 뜰에 놓인 연단에 선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악단의 연주에 맞춰 태버내클 합창단이 노래를 부르고, 조셉 에프 스미스가 개회 기도를 드렸다. 그런 뒤, 교회의 건축가이자 브리검 영과 에밀리 파트리지의 아들인 조셉 돈 칼로스 영이 성전 맨 꼭대기에 있는 비계에서 소리쳤다. “이제 관석을 놓을 준비가 되었습니다!”15
우드럽 회장은 연단 끝으로 가서 성도들을 바라보며 양팔을 높이 들고 외쳤다. “만방의 백성들이여! 이제 우리는 우리 하나님의 성전 관석을 놓을 것입니다!” 그가 단추를 누르자, 전류가 흐르고 장치의 걸쇠가 풀리면서 제 위치에 관석이 놓였다.16
그런 뒤, 성도들은 호산나를 외치고 “타는 듯한 하나님의 영”을 불렀다. 뒤이어, 사도 프랜시스 라이먼이 앞으로 나왔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저는 최대한 빨리 성전이 완공될 수 있도록 여기 모인 우리가 함께, 또 개별적으로, 필요한 대금 전액을 가능한 한 빠른 시간 안에 마련하겠다고 약속할 것을 제의합니다. 그렇게 하면 우리는 1893년 4월 6일에 헌납식을 할 수 있습니다.”
프랜시스 라이먼이 제안한 날짜는 브리검 영이 성전의 초석을 놓은 지 40주년이 되는 날이었다. 조지 큐 캐넌은 이 제안에 대해 지지를 물었고, 성도들은 오른손을 들고 “예!”라고 외쳤다.17
프랜시스는 성전 완공을 위해 사비로 큰돈을 내놓았다. 아나는 자신의 이름으로 5달러, 오스보네의 이름으로 10달러를 내고, 존도 돈을 내고 싶어 하리라는 생각에 존의 이름으로도 10달러를 더 냈다.18
그해 봄, 조셉 에프 스미스는 예순셋의 제임스 브라운을 만나기 위해 그의 집을 찾았다. 제임스는 지금보다 한참 젊었을 적에 몰몬 대대에서 행군했고, 타히티와 그 주변 섬들에서 애디슨과 루이자 프랫, 벤자민 그루아드 같은 이들과 선교사로 봉사했다. 1851년에 아나환초에서 봉사하던 중에 그는 폭동을 일으켰다는 혐의로 누명을 쓰고 체포된 적이 있었다. 그때 제임스는 타히티로 압송된 후 수감되었다가 결국은 추방을 당했다.19 정부는 다른 선교사들도 그곳을 떠나라며 압박을 가했고, 그 후로 그곳의 선교부는 폐쇄되었다.
그로부터 40년가량 지난 지금, 교회의 지도자들은 남태평양 지역의 선교 사업을 확대하기 시작하고 있었다. 1891년 7월, 사모아 선교부는 두 명의 젊은 장로인 브리검 스무트와 앨바 버틀러를 통가로 보내 선교 사업을 시작하게 했다. 6개월 뒤, 사모아 선교부의 두 선교사인 조셉 댐런과 윌리엄 시그밀러는 프랑스령 폴리네시아로 가서 오랫동안 교회로부터 고립되어 생활해 온 타히티 안팎의 성도들에게 성역을 행하며 그곳의 선교 사업을 재개했다.20
그러나 조셉 댐런은 건강이 좋지 않았고, 그와 윌리엄이 파악한 바로는 그 지역에 사는 대부분의 후기 성도가 여러 해 전에 남태평양 지역에 선교사를 파견했던 복원 예수 그리스도 후기 성도 교회의 회원이 되어 있었다. 두 사람은 그 지역에서 선교 사업을 이끌어 가려면 더욱더 숙련된 사람이 선교부에 필요하다고 믿었다.21
솔트레이크시티에 있는 제임스의 집을 찾아간 조셉 에프 스미스는 타히티의 선교사들에게 받은 편지를 꺼내며 이렇게 물었다. “소시에테제도에서 다시 선교 사업을 하시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누구든, 그리고 어느 곳으로든 저를 선교사로 부르지 않기를 바랍니다.” 제임스가 답했다.22 이제 그는 세 명의 아내와 여러 자녀와 손주들을 둔 노인이었다. 제임스는 몸이 좋지 않은 데다 여러 해 전에 총기 사고로 다리도 잃은 상태였다. 그런 몸으로 남태평양까지 간다는 것은 누구에게라도 힘든 일이었다.
조셉 에프는 제임스에게 선교사들의 편지를 건네며 읽어 보도록 권했다. 그런 뒤, 그는 내일 다시 와서 한 번 더 의향을 묻겠다는 약속을 남긴 채 그 집을 떠났다.23
제임스는 편지를 읽어 보았다. 젊은 선교사들이 힘겨운 시간을 보내고 있는 것은 분명해 보였다. 초기 선교사들 가운데 유일하게 생존해 있는 사람인 제임스는 타히티 사람들이나 그들의 언어에 익숙했기에 잘 해낼 수 있을 것이었다. 제임스는 제일회장단이 태평양제도로 가도록 요청한다면, 그렇게 하리라고 마음을 먹었다. 그는 하나님께서 어떤 일을 명하실 때는 반드시 그 일을 해낼 힘을 주신다고 믿었다.24
이튿날 조셉 에프 스미스가 다시 찾아오자, 제임스는 선교사 부름을 수락했다. 그리고 몇 주 뒤, 제임스는 가족과 작별 인사를 한 후 자신과 함께 봉사하도록 부름받은 아들 일랜도와 함께 도시를 떠났다.
제임스와 일랜도는 또 다른 한 명의 선교사와 함께 그다음 달에 타히티에 도착했다. 댐런과 시그밀러 장로는 새로운 선교사들을 티니아라우라는 타히티 사람의 집으로 안내했다. 그는 제임스 부자가 쓰도록 침대 하나를 내어 주었다. 여독으로 지칠 대로 지친 제임스는 방 밖을 나가지 않고 며칠을 지냈다.25
그러나 얼마 안 가서 방문객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아나환초에서 왔다는 한 사람은 목소리를 들으니 제임스를 알아보겠다면서, 다른 사람들도 제임스의 얼굴은 기억을 못한다 해도 그 목소리만큼은 기억할 것이라고 말했다. 방문객 중에는 제임스가 집으로 돌아간 뒤에 태어난 이들도 있었다. 그들 역시 제임스를 만난 것을 기쁘게 여겼다. 나이가 지긋한 한 부인은 그를 알아보고서는 영영 보내 주지 않을 듯 오랫동안 손을 붙잡고 악수를 했다. 알고 보니, 그녀는 프랑스 장교들이 제임스를 체포하여 군함에 태우고 떠날 당시 아나환초에 있었다고 했다.
어느 날 밤, 제임스는 포헤미티라고 하는 또 다른 남자를 만났다. 아나환초 출신의 그는 제임스를 기억했다. 포헤미티는 이제 복원 예수 그리스도 후기 성도 교회의 회원이었지만, 제임스를 다시 만난 것을 기뻐하며 그에게 음식을 대접했다. 그는 만일 제임스가 아나환초에 간다면 그곳 사람들이 그의 말을 들어줄 것이라며 장담했다.26
하버드 대학교에 간 존 윗소는 솔트레이크시티에 있는 어머니와 동생에게서 수시로 편지를 받았다. 두 사람의 편지는 항상 조언과 격려가 가득했다. 오스보네는 편지에서 이런 말을 한 적도 있었다. “엄마가 화학 실험할 때 조심하라셔. 폭발같은 것 때문에 두 눈이 실명되어 가는 교수에 대한 글을 읽으셨거든.”27
아나는 편지를 통해 존이 마음을 다잡을 수 있도록 조언했다. “네가 하는 모든 일이 잘될 거다. 네가 지금 가진 것과 앞으로 가진 것을 모두 들여 모두에게 유익을 가져다주는 일을 하려무나. 그렇게 해서 모든 좋은 것을 지으시고 자녀들을 위해 모든 것이 더 낫고 아름답게 되도록 지칠 줄 모르고 일하시는 그분께 봉사할 수 있기를 바란다.”28
일 년 전 말이 끄는 전차를 타고 처음 하버드에 왔던 날, 존은 이 학교의 역사와 전통을 보고 입을 다물지 못했다. 밤이면, 그는 세상의 모든 지식을 섭렵하는 꿈을 꾸었다. 그런 꿈에서는 한 과목 한 과목을 통달하는 데 얼마나 많은 시간이 필요할까 하는 걱정 따위는 전혀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나 가을에 있을 입학시험을 준비하면서 그는 자신이 배워야 할 것이 너무나도 많다는 사실을 깨닫고서 엄청난 중압감을 느꼈다. 존은 학교 도서관에서 한 아름씩 책을 빌려 꼼꼼히 읽으며 공부했지만, 한 과목이라도 제대로 숙지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실감하고는 좌절감에 휩싸였다. 가난한 노르웨이 이민자인 그가 다른 학생들과 경쟁할 수 있을까? 학생들 중에는 미국에서 가장 좋은 사립 학교들에서 최고 수준의 교육을 섭렵하고 온 이들이 많았다. 과연 유타에서 공부한 것만으로 미래를 헤쳐 나갈 수 있을까?
처음 몇 달간 존은 불안감에 향수병까지 더해져서 아예 짐을 쌀 생각까지 했었다. 그러나 그는 그곳에 계속 있기로 마음을 정했다. 그리고 모국어가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영어 시험도 잘 치러 내면서 입학시험을 통과했다.
벌써 하버드에서 1년을 수학한 존은 이제 더 자신 있게 학업을 이어가고 있었다. 그는 하버드 및 그 주변 몇몇 학교에서 공부하는 후기 성도 젊은이들과 함께 세를 낸 집에서 생활했다. 그는 숱하게 기도를 드린 후, 화학을 집중적으로 공부해 보기로 선택했다. 후기 성도 학생들 중에는 과학자를 꿈꾸는 이들도 있었고, 공학, 법률, 의학, 음악, 건축, 경영 등의 분야에서 일하기 위해 공부하는 이들도 있었다. 다른 많은 대학생들처럼, 이 젊은이들 역시 학구적인 주제를 놓고 벌이는 격렬한 토론을 즐겼다.29
1892년 7월, 이들의 동료 화학자이자 교회에서 존경받는 학자인 제임스 탈매지가 솔트레이크시티의 한 교회 대학에서 사용할 실험 기기를 조사하고 수집할 목적으로 보스턴에 도착했다.30 제임스의 친구이자 전에 학교에서 함께 공부했던 수사 게이츠도 여름 학기에 영어 과목을 수강하기 위해 하버드로 왔다.
존은 수사가 연설과 글쓰기에 탁월한 재능이 있다고 생각했고, 수사 역시 교양 있고 예술을 사랑하는 존에게 깊은 인상을 받았다. 두 사람은 금세 친구가 되었다. 수사는 존과 나이가 비슷한 자신의 딸 리아에게 이렇게 편지를 썼다. “여기 청년이 하나 있는데, 잘 생기고 침착한 데다 학구적이고 진중하단다. 성품도 아주 훌륭해. 정말이지 이렇게 뛰어난 학자가 또 있을까 싶구나. 너도 그 청년이 마음에 들 거야.”
수사는 이런 아쉬움도 내비쳤다. “그런데 춤은 전혀 못 출 것 같구나. 하지만 제임스 탈매지 못지않게 똑똑하고, 내가 보기에는 그에 걸맞게 얼굴도 번듯하단다.”31
로레나 라슨은 2년이 넘는 지하생활을 마치고 아이들과 함께 유타주 먼로에 다시 자신들만의 집을 마련했다. 그곳은 남편 벤트와 그의 첫 번째 부인인 줄리아가 사는 곳에서 가까운 거리였다.32 그러나 로레나는 먼로가 고향임에도 불구하고 그곳에서 항상 환영받는 느낌은 아니었다.
복수결혼으로 꾸려진 교회 내 수많은 가족들은 전과 다름없이 함께 살았고, 그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있다고 확신했다. 그러나 먼로의 교회 회원들 중에는 남자가 복수결혼을 통해 얻은 아내와 계속 자녀를 갖는 것을 죄악시하는 이들이 일부 있었다. 로레나가 임신했음이 명백해지자, 그녀의 이웃과 일부 가족들은 그녀를 대놓고 비난하기 시작했다.
벤트의 어머니는 로레나 때문에 아들이 다시 감옥에 갈까 봐 두려워했고, 로레나의 자매 중 하나는 복수결혼을 해서 임신한 여자는 간음한 여자보다 나을 것이 없다는 말까지 했다. 또 어느 날에는 와드의 상호부조회 회장인 로레나의 친어머니가 집을 찾아와 로레나가 벤트와 계속 아기를 갖는 것을 책망하는 일도 있었다.33
그날 저녁, 벤트가 로레나와 아이들을 위해 장작 패기를 마쳤을 때, 로레나는 자신의 어머니에게 들은 말을 남편에게 전했다. 그러나 벤트는 로레나를 연민하는 대신, 도리어 자신도 그 말에 동의한다는 대답을 내놓았다. 벤트는 이 일을 친구들과 여러 차례 의논했는데, 그들은 복수결혼으로 얻은 아내가 있는 남자는 첫 번째 아내와 지내야 하고 다른 아내들과는 헤어질 수밖에 없다는 결론을 내렸던 것이다. 그와 로레나는 인봉 상태를 유지할 테지만, 다시 함께하기 위해서는 다음 생까지 기다려야 한다는 것이었다.
로레나는 아무 말도 나오지가 않았다. 성명서가 발표된 후로 벤트는 로레나에게 절대 그녀를 버리지 않겠노라고 몇 번이나 장담했었다. 그런데 출산을 겨우 몇 주 앞둔 이 시점에 그는 로레나와 아이들을 떠나려 하고 있었다.
두 사람의 대화는 밤새 이어졌다. 로레나가 울음을 터트리자, 벤트는 그렇게 울어도 그들이 처한 현실은 바뀌지 않는다고 말했다.34
그러자 로레나는 벤트에게 이렇게 말했다. “당신이 하나님의 일을 한다는 생각에서 그러는 거라는 믿음이 없다면, 난 절대 당신을 용서할 수 없을 거예요.”
벤트가 떠난 뒤, 로레나는 힘과 지혜를 구하며 기도했다. 산 너머에서 동이 틀 무렵, 로레나는 줄리아의 집 뒤편 마구간에서 일을 보던 벤트를 찾아갔다. 그녀는 남편에게 적어도 아기가 태어날 때까지는 자신 곁에 있어야 한다고 하면서, 그런 뒤에는 어디든 원하는 곳으로 가도 좋다고 말했다. 이제 로레나의 친구는 하나님뿐이었고, 그녀는 하나님께 의지하며 도움을 구하기로 했다.35
로레나는 2주 뒤에 딸을 출산했다. 아기가 태어난 지 닷새가 되었을 때, 로레나는 죽음에 관한 꿈을 꾸고는 겁에 질려 잠에서 깨어났다. 만일 자신이 죽으면, 벤트가 아이들을 돌봐줄 거라 믿어도 되는 것일까? 벤트는 약속대로 출산 전까지 내내 로레나와 아이들을 부양했다. 그러나 그는 아이들과 거의 교류를 하지 않았고, 있더라도 그가 불안한 얼굴로 짧게 집에 다녀갈 때면 로레나와 아이들은 저녁에 잠깐 낯선 사람이 다녀간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로레나가 불길한 예감이 든다고 하자, 벤트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다. “꿈일 뿐이에요.” 그렇지만 불안한 마음은 도통 지워지지가 않았다. 로레나는 그다음 한 달 동안 자주 기도를 드리면서, 자신은 참을성 있게 시련과 고난을 견딜 것이며 성전 사업 등 당신의 일이 진척되도록 최선을 다하겠노라고 주님께 약속했다.36
그 꿈을 꾸고 5주가 지난 뒤, 로레나와 벤트는 불법 동거 혐의로 보안관에게 체포되었다. 법원은 몇 달 뒤 열릴 벤트의 재판에서 로레나가 남편에게 불리한 증언을 하리라 기대하며 두 사람을 보석으로 석방했다.
로레나는 체포는 물론 가족과 친구들의 멸시도 도저히 견디기가 힘들었다. 그녀는 어찌해야 할지 혼란스러운 마음으로 맨타이 성전의 회장이자 사도인 안톤 룬드에게 속마음을 털어놓았다. 안톤은 그녀의 이야기를 듣고 눈물을 흘렸다. 그는 이렇게 권고했다. “모든 사람의 조롱과 야유 속에서도 똑바로 앞으로 걸어가십시오. 자매님은 괜찮을 것입니다.”37
로레나는 사도의 권고대로 의연히 앞을 향해 나아갔다. 로레나는 경고가 담긴 꿈과 뒤이은 기도 덕분에 더욱 인내할 수 있었고, 더 큰 힘으로 고난을 견디며 자신의 삶에 대해 주님께 더욱 감사할 수 있었다. 벤트 또한 자신이 로레나를 등한시할수록 그녀가 고통스러워한다는 것을 깨닫고서는 결코 쉽지는 않겠지만 결국 계속 그녀와 함께 살아가기로 결정을 내렸다.
그해 9월, 벤트는 불법 동거 혐의를 인정하고 1개월의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벤트는 비슷한 혐의로 6개월 동안 수감된 적이 있었으므로, 이 정도면 지난 수년간에 비해 처벌 수위가 무거운 것은 아니었다. 사실, 성명서가 발표된 후로 불법 동거 혐의로 받는 처벌 기간이 전보다 훨씬 짧게 선고될 때가 많았다. 로레나와 벤트는 자신들이 계속 부부 관계를 유지한다면 견디기 힘든 결과가 일어날 수 있음을 이로써 다시 한번 깨닫게 되었다.38
그러나 그들은 이제는 그 위험을 기꺼이 감수하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