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 역사
31 부서진 삶의 파편들


“부서진 삶의 파편들”, 『성도들: 후기의 예수 그리스도 교회 이야기, 제2권, 그 어떤 신성하지 않은 손도, 1846~1893년』(2020) 제31장

제31장: “부서진 삶의 파편들”

제31장

부서진 삶의 파편들

줄무늬 죄수복을 입은 남자

1879년 1월의 어느 추운 날, 오벤도 홀리스터는 존 테일러의 사무실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오벤도는 유타준주의 세금 징수원으로, 가끔씩 동부에서 발행되는 한 신문에 기사를 쓰곤 했다. 조지 레이놀즈의 소송 건에 대한 미국 대법원의 판결이 나온 후, 그 신문사는 오벤도가 재판 결과에 대한 교회의 선임 사도 존의 생각을 알아봐 주기를 바랐다.

존은 보통 기자들의 인터뷰에 응하지 않았지만, 정부 관리가 질문을 하는 것이므로 종교의 자유와 대법원의 판결에 관하여 견해를 밝혀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존은 오벤도에게 말했다. “종교적 믿음은 그것을 실행에 옮기는 것이 허락되지 않는 이상 아무런 가치가 없습니다.” 그는 법원의 판결이 성도들이 믿음을 실행할 권리를 제약하기 때문에 이 판결은 정당하지 못하다고 설명했다. 존은 이렇게 말했다. “미국의 대법원이나 의회는 제 종교적 견해에 간섭할 아무런 권리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오벤도는 정부가 끊임없이 반대하는데도, 복수결혼을 계속 시행할 가치가 있는지 물었다.

존은 대답했다. “삼가 말씀드리건대, 이 반목의 주체는 우리가 아닙니다.” 그는 미국의 헌법은 성도들이 복수결혼을 시행할 권리를 보장한다고 믿었다. 존은 의회가 헌법에 위배되는 법안을 통과시킴으로써 교회와 국가 사이에 긴장을 촉발한 것이라 판단했다. 그는 말했다. “이제 문제는 하나님께 순종할 것인가, 사람에 순종할 것인가입니다.”

오벤도가 물었다. “국가는 일부다처제에 관한 견해와 법률을 바꿀 가능성이 없으므로, 이에 맞추어 교회가 일부다처제의 시행을 중단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교회가 일부다처제 금지법에 계속 저항한다면 머지않아 무너지게 되리라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존은 말했다. “우리는 그 부분을 하나님께 맡깁니다. 하나님의 성도들을 돌보는 것은 그분의 일입니다.”1


그해 봄, 수지 영은 브리검 영 아카데미에서 매일 아침 8시 30분에 학교 일과를 시작했다. 학생들은 프로보의 센터스트리트에 있는 2층짜리 벽돌 건물에서 만났으며, 연령은 어린이부터 이십 대 여성과 남성에 이르기까지 다양했다. 그들은 대부분 학교에 매일 등교해야 하고, 시작하는 시간도 정해져 있다는 사실이 익숙지가 않았다. 그러나 칼 메이저 교장은 시간 엄수를 매우 중시했다.2

수지는 브리검 영 아카데미에 다니는 것이 좋았다. 수지와 함께 공부하는 학생 중에는 최근 영국에서 이주해 온 제임스 탈매지가 있었는데, 그는 과학에 대한 열정이 있는 학생이었다. 프로보의 울 방적 공장에서 일하는 조셉 태너도 있었다. 조셉은 메이저 교장을 설득하여 공장 노동자들을 위한 야간반을 열게 하기도 했다.3 그가 다니는 방적 공장의 사장인 에이브러햄 스무트는 브리검 영 아카데미의 이사회 의장이었다. 그의 딸 애나 크리스티나는 일과 중에 어린 학생들을 가르치며 학업을 병행했고, 애나의 남동생인 리드 역시 이 학교에 재학하며 사업을 준비 중이었다.4

메이저 교장은 학생들에게 복음과 배움에 대한 사랑을 길러 주었다. 브리검 영은 그에게 이 학교에서 성경과 몰몬경, 교리와 성약을 가르치는 용도로 사용할 표준 교과서를 만들도록 요청했었다. 학생들은 일반적인 학과목과 함께 복음 원리와 관련된 과정들을 수강했다. 매주 수요일 오후면, 메이저 교장은 학생들을 불러 모아 영적 모임을 열었다. 학생들은 기도를 마친 뒤 간증을 나누고 수업에서 배우는 것들을 함께 이야기했다.5

여러 해 전 솔트레이크시티에 있는 영 가족의 집에서 일할 때처럼, 메이저 교장은 수지에게 잠재력을 기르라고 권면했다. 그는 수지에게 글을 쓰도록 격려하고, 학업에서 최대한 좋은 성과를 내는 것을 목표로 삼으라고 일깨워 주었다. 또한, 그녀에게 영적 모임에 대한 공식 기록의 작성을 돕게 하기도 했다.

유타에는 숙련된 교육자가 거의 없었으므로, 메이저 교장은 학생들 중 나이가 많은 이들을 교사로 채용하곤 했다. 어느 날, 학교를 마치고 수지와 수지의 어머니 루시와 함께 집으로 걸어가던 메이저 교장이 갑자기 걸음을 멈췄다.

그는 이렇게 물었다. “수지 양은 음악을 가르칠 수 있을 만큼 음악을 잘 압니까?”

그러자 루시가 대답했다. “물론이지요. 이 아이는 열네 살 이후로 쭉 음악 교습을 해 왔답니다.”

교장이 말했다. “그 점을 고려해야겠군요.”

며칠 뒤, 수지는 메이저 교장의 지시에 따라 브리검 영 아카데미에 음악 학부를 조직하기 시작했다. 학교에는 피아노가 없었으므로 수지는 자신과 학생들이 쓸 피아노 한 대를 구입했다. 수지에게 교실이 마련되자, 제임스 탈매지는 그녀를 도와 수업 시간과 연주회 예행연습, 학생들을 위한 개인 지도 일정을 계획했다. 이제 수지는 음악을 가르치며 하루의 대부분을 보냈다.6

그러나 수지는 학교생활이 즐거운 만큼이나 여전히 자신의 이혼을 받아들이려 애쓰고 있었다. 아들 베일리는 프로보에서 수지와 함께 있었지만, 딸 리아는 전 남편이 본가로 보내 버린 탓에 프로보에서 북쪽으로 240여 킬로미터 떨어진 베어레이크에 있었다. 수지는 자신이 딸의 인생을 망치고 딸이 행복해질 기회를 그르친 것은 아닌지 걱정스러웠다.

수지는 세인트조지에서 알았던 친구이자 지금은 하와이에서 선교 사업을 하고 있는 제이컵 게이츠와 얼마 전부터 편지를 주고받고 있었다. 처음에 두 사람은 그저 친구로서 편지를 교환했지만, 이제는 서로 더 깊은 속마음을 털어놓고 있었다. 수지는 제이컵에게 첫 번째 결혼에 대한 후회와 학교생활의 즐거움을 이야기했으며, 자신은 음악을 가르치는 것 이상을 이루고 싶다는 포부도 털어놓았다.

한번은 편지에서 이런 말을 하기도 했다. “제이컵, 난 학교 선생님이 되려는 게 아니에요. 언젠가 작가가 되고 싶어요. 충분히 공부한 뒤에 말이에요.”

학기가 끝나자, 수지는 아버지의 부인 중 한 명이자 자신이 “또 다른 어머니”라 부르는 지나 영과 함께 하와이의 상호부조회들을 방문하기 위한 계획을 세웠다. 그녀는 하와이에 머물며 제이컵도 보고 싶었다. 이제 자신에게는 기회가 없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도 있었지만, 수지는 하나님이 자신을 생각하고 계심을 변함없이 믿었다.

수지는 제이컵에게 보내는 편지에 이렇게 적었다. “하나님은 선한 분이세요. 내가 부서진 삶의 파편들을 다시 모아서 무언가 쓸모 있는 것으로 고쳐 쓸 수 있도록 그분이 도와주실 거예요.”7


조지 레이놀즈는 나흘간 기차를 타고 간 끝에 네브래스카 주립 교도소에 도착했다. 그는 중혼 혐의로 2년 형을 선고받고, 솔트레이크시티에서 동쪽으로 1,400여 킬로미터 떨어진 이곳에서 수감 생활을 해야 했다. 안으로 들어간 후, 그는 옷과 성전 가먼트를 포함한 모든 소지품을 간수들에게 압수당했다. 레이놀즈가 목욕을 마치자, 간수들은 그의 머리와 턱수염을 짧게 밀었다.

그는 방을 배정받고, 거친 옷감으로 된 상의와 신발 한 켤레, 모자 하나, 흰 바탕에 푸른 줄무늬가 있는 죄수복 한 벌을 받았다. 레이놀즈는 하루 세 번 다른 수용자들과 함께 말없이 배식대로 걸어가서 음식을 받은 뒤 방으로 돌아와 혼자 식사를 했다. 며칠 뒤, 교도관들이 그에게 가먼트를 돌려주었다. 그는 최소한 이 문제에서만큼은 자신의 종교적 믿음이 존중받았다는 사실에 감사했다.

레이놀즈는 하루 10시간씩 주 6일을 감옥 내에 있는 바느질 가게의 회계 장부 담당자로 일했다. 그리고 일요일에는 재소자들을 대상으로 열리는 짧은 종교 예배에도 참석했다. 감옥의 규칙에 따라, 그는 격주에 한 번씩 아내인 메리 앤과 어밀리아에게 편지를 쓸 수 있었다. 그는 아내들에게 되도록 자주 편지를 써 달라고 부탁하면서, 그들이 보내는 편지는 자신에게 오기 전에 다른 사람이 개봉하여 읽을 수도 있다는 점을 염두에 두도록 당부했다.8

한 달 뒤, 레이놀즈는 유타에 있는 준주 교도소로 이송되었다. 이는 조지 큐 캐넌이 워싱턴 D.C.에서 막후교섭을 벌여 얻어낸 결과였다.9

레이놀즈는 오그던에서 솔트레이크시티행 열차로 환승할 때 가족과 상봉했다. 어린 자녀들은 턱수염이 깎인 아버지를 알아보지 못했다.

나중에 레이놀즈는 가족에게 이렇게 편지를 썼다. “세상에서 신념을 이유로 가게 될 곳 중에는 감옥보다 못한 곳도 많다는 사실을 기억하기를 바란다. 그러나 어느 곳이든 내 마음에 가득한 평화를 앗아갈 수는 없단다.”10


그해 여름, 스물두 살의 선교사 러저 클로슨은 동반자인 조셉 스탠딩과 함께 미국 남부 조지아주의 시골 지역에서 선교 사업을 하고 있었다. 브리검 영의 사무실에서 서기로 일했던 러저는 비교적 최근에 봉사를 시작한 선교사였다. 반면, 이미 한 차례 선교 사업을 한 적이 있는 스물네 살의 조셉은 현재 그 지역에서 교회의 지부들을 감리하고 있었다.11

그들이 봉사하던 지역은 미국 남북전쟁 이후 황폐해졌고, 그곳의 많은 주민은 외부인을 믿지 않았다. 게다가 레이놀즈의 소송 건에 대한 판결이 나온 이후로 후기 성도를 향한 그들의 적대심은 한층 더 심해졌다. 여러 교회와 신문들은 장로들에 대한 거짓 소문을 퍼뜨렸으며, “몰몬” 선교사들을 숨겨 주고 있다고 의심되는 사람이 있으면 폭도들은 그 집으로 쳐들어갔다.

조셉은 폭도들에게 붙잡히는 것이 두려웠다. 폭도들은 붙잡은 사람을 통나무에 묶고 채찍질을 하기도 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그는 채찍질을 당하느니 죽는 게 낫겠다는 말을 러저에게 한 적이 있었다.12

1879년 7월 21일 오전, 러저와 조셉이 길을 가는데 맞은편에 여남은 명의 남자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 중 셋은 말을 타고, 나머지는 걸어서 이쪽으로 오고 있었는데, 모두들 손에 총이나 몽둥이를 쥐고 있었다. 남자들이 말없이 노려보자, 장로들은 걸음을 멈췄다. 그 순간, 그들은 모자를 홱 벗어 던지더니 선교사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꼼짝 마!” 한 사람이 소리쳤다.

“체포 영장이 있으시면 보여 주시지요.” 조셉이 말했다. 조셉의 목소리는 크고 명료했지만, 얼굴은 사색이 되어 있었다.

또 한 사람이 말했다. “미국 전체가 너희를 반대하는 마당에, 조지아에 몰몬을 위한 법은 없다.”

폭도들은 총을 겨누며 주변의 숲속 깊은 곳으로 선교사들을 데려갔다. 조셉은 그들의 대장 격인 사람들과 대화를 시도했다. “우리의 목적은 이 지역에 남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진리라고 이해한 것을 가르칠 뿐입니다. 그것을 받아들일지 말지는 이곳 주민들의 몫입니다.”

그런 조셉의 말도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잠시 후 폭도들은 몇 무리로 갈라졌고, 그중 한 무리가 러저와 조셉을 맑은 물이 흐르는 개울가로 끌고 갔다.

“내가 이 사람들의 대장이라는 걸 알아 둬라.” 무리 중 나이가 많아 보이는 사람이 말했다. “또다시 조지아에서 우리 눈에 띄면, 개처럼 목을 매달아 버릴 거야.”

그는 선교사들이 자신들의 아내와 딸들을 유타로 데려가기 위해 조지아에 온 것이라며, 20분이 넘도록 비난을 퍼부었다. 남부 지방에 퍼진 선교사들에 관한 소문들은 복수결혼에 대한 매우 부정확한 인식을 근거로 한 경우가 많았고, 필요하다면 어떤 수단을 써서라도 자기 가족의 여성들을 지키는 것이 명예로운 일이라고 여기는 남성들도 있었다.

말을 타고 있던 세 남자가 개울가에 도착하자, 대장이라던 남자는 말을 멈췄다. “따라와!” 소총을 든 남자가 말했다.

조셉은 벌떡 일어났다. 채찍질을 하려는 것인가? 조셉은 폭도 한 명이 나무 그루터기에 놓아둔 권총을 낚아챘다.

“항복하시오!” 조셉은 폭도들을 향해 소리쳤다.

그때, 조셉의 왼편에 서 있던 남자가 일어서서 조셉의 얼굴에 대고 방아쇠를 당겼다. 조셉은 잠시 굳은 듯 가만히 서 있더니 몸을 휘청이다 바닥에 그대로 쓰러졌다. 그의 주위로 연기와 먼지가 자욱하게 피어올랐다.

무리의 대장은 손가락으로 러저를 가리키며 소리쳤다. “저놈도 쏴 버려!” 러저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총을 든 사람들이 모두 그의 머리를 겨냥했다.

“쏘시오!” 러저는 팔짱을 낀 채 말했다. 그는 눈을 뜨고 있었지만, 앞이 캄캄했다.

“됐어!” 대장이 마음을 바꾸고 소리쳤다. 남자들은 총을 내렸고, 러저는 몸을 굽혀 자신의 동반자를 살폈다. 조셉은 이마에 큼지막한 총상을 입고 바닥에 등을 대고 쓰러져 있었다.

폭도 중 한 명이 말했다. “자기 손으로 자기를 쏘다니 끔찍하지 않나?”

이것은 자살이 아니라 타살임을 러저는 알고 있었다. 그러나 도저히 반박할 용기가 나지 않았던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네, 끔찍합니다. 가서 도움을 청해야 합니다.” 그러나 폭도들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러저는 마음이 급해져서 소리쳤다. “아무도 가지 않을 거라면 저라도 보내 주십시오.”

누군가 말했다. “가서 알아봐.”13


8월 3일 일요일, 솔트레이크시티의 회당 내 연단에서 존 테일러는 엄숙한 표정을 하고 앉아 있는 만 명의 추모객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의 뒤로 검은 천이 덮인 연단 좌석은 꽃으로 장식되어 있었다. 신권에 성임된 남성들은 정원회 별로 모여 앉았고 다른 성도들은 회당 1, 2층의 나머지 좌석을 채웠다. 연단 가까이에는 꽃으로 장식된 조셉 스탠딩의 관이 잘 보이게 놓여 있었다.14

러저 클로슨은 폭도에게서 풀려난 뒤 근처에 살던 친구에게 도움을 요청해 솔트레이크시티에 전보를 보내어 조셉의 살해 소식을 보고했다. 그런 후에 그는 시신을 수습하러 검시관과 함께 살해 현장으로 돌아갔는데, 그가 자리를 비운 사이 더 많은 총격으로 조셉의 시신은 알아볼 수 없는 지경이 되어 있었다. 열흘쯤 후, 러저는 무거운 금속 상자에 조셉의 시신을 수습하여 넣고 열차를 타고 유타로 돌아왔다. 조셉이 살해되었다는 소식은 순식간에 준주 곳곳으로 퍼져나갔다.15

존은 성도들과 함께 분노하고 슬퍼했다. 그러나 그는 성도들은 슬퍼하는 만큼이나 자랑스러워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조셉은 시온의 대업을 행하는 가운데 의롭게 죽음을 맞이했다. 조셉은 살해되었지만, 하나님의 사업은 계속 전진해 나아갈 것이다.16 성도들은 계속하여 성전을 짓고, 만방에 선교사를 보내며, 시온의 경계를 넓혀 갈 것이다.

브리검 영이 교회를 이끄는 동안, 성도들은 유타를 시작으로 이웃의 네바다와 와이오밍, 뉴멕시코, 아이다호에 이르는 미국 서부 지역에 수백 개의 정착촌을 건설했다. 브리검은 죽기 전 마지막 한 해 동안 200명의 개척자를 애리조나 북동부의 리틀콜로라도강 유역으로 보내 그곳에 터를 잡게 했다.

그 이후로 존 테일러의 요청에 따라, 미국 남부에서 온 개종자 70명이 스칸디나비아 성도들과 함께 인근 콜로라도주의 매나사라는 마을에 자리를 잡았다. 유타 남동부에서는 대규모 성도들 무리가 샌후안강 유역에 안착하기 위해 그곳의 깊은 협곡들을 가로질러 가고 있었다.17

신성하지 않은 손이 성도들을 쓰러뜨리려 할지라도, 진리의 원리들은 계속하여 세상을 가득 채우리라는 것을 존은 알았다. 그는 이렇게 선포했다. “사람들은 우리가 가진 것을 빼앗으려 할 것입니다. 과거에 늘 그랬던 것만큼, 그들은 우리의 목숨을 앗아가려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하나님의 이름으로, 시온은 전진하고 번영할 것입니다.”18


지나와 수지 영이 마차를 타고 오아후섬을 가로지르는 큰 산맥을 넘을 무렵, 토란밭에는 바람이 불고 있었다. 그들은 호놀룰루를 출발하여 하와이 성도들의 집합 장소인 라이에로 가는 길이었다. 내리막길은 경사가 워낙 심한 탓에 길 한쪽에 추락 방지용 철제 막대가 길게 설치되어 있었다. 녹음이 짙은 골짜기를 향해 내려갈 때는 마차가 제멋대로 굴러가지 않도록 굵은 밧줄을 묶어 두 사람이 마차를 잡아당겨 주어야만 했다.19

이제 하와이제도에서는 교회가 확실히 자리를 잡아, 대략 하와이 주민 열두 명 중 한 명이 후기 성도였다.20 지나와 수지가 라이에에 도착하자 성도들은 현수막과 음악, 춤으로 그들을 맞이했다. 성도들은 환영 만찬 자리로 손님들을 안내하고, 특별히 이날을 위해 만든 노래를 불러 주었다.

두 달 동안 이곳에 머물면서, 지나는 자신처럼 머리가 희끗희끗한 개척자 성도들을 만났다. 그중 한 명은 상호부조회 회장인 메리 카포였다. 메리 카포는 흔들림 없는 하와이인 선교사이자 교회 지도자였던 조너선 나펠라의 아내인 키티의 친자매였다. 나펠라는 얼마 전 여름에 굳건한 간증을 가슴에 품은 채 몰로카이에서 숨을 거뒀다. 그리고 딱 2주 뒤에 그의 아내 키티도 세상을 떠났다.21

지나는 하와이 성도들과 지내는 시간이 행복했다. 그녀와 수지는 이곳의 상호부조회와 젊은 여성들을 자주 만났다. 그들이 처음으로 만나던 날, 하와이의 자매들은 작은 자루 하나 분량의 고구마와 멜론 한 덩이, 오이 하나, 달걀 몇 개, 생선 한 마리, 양배추 한 통을 가져왔다. 지나는 자신의 일지에 이렇게 적었다. “기부는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것인 줄만 알았다. 그런데 우리에게 그것은 우정의 상징이었다.”22

어느 날 저녁, 몇몇 성도들이 한 집에 모였다. 수지의 선교사 친구인 제이컵 게이츠의 연주를 듣기 위해서였다. 그는 수지가 라이에 성도들을 위해 가져온 오르간으로 “오 높은 영광 보좌에”를 연주할 것이었다. 지나는 하와이 성도들의 노랫소리를 들으며, 여러 해 전 나부에서 이 찬송가를 쓴 친구 엘리자 스노우를 떠올렸다. 이 노래에는 하늘 부모에 관한 가르침과 함께 지나가 선지자 조셉 스미스에게 처음으로 배웠던 진리들이 담겨 있었다. 이제 이 찬송가는 세계 각지에서 함께 부르는 노래가 되어 있었다.23

사흘 뒤, 수지와 제이컵은 함께 협곡을 올랐다. 제이컵이 선교 사업을 위해 라이에를 떠나 있던 2주 전, 수지는 그에게 짧은 연서를 보냈었다.

“난 지금 멀리 떨어진 언덕에 올라 당신을 생각하고 있어요. 당신도 나처럼, 오늘은 하던 일을 접어 두고 미래에 대해 함께 이야기하며 마음속 이런저런 생각들을 나누고 싶으신가요?”24

수지와 제이컵이 교제하는 동안, 지나는 하와이 성도들과 함께 브리검 영의 사망 2주기를 맞아 추모 계획을 세웠다. 8월 29일, 라이에 전역의 성도들은 지나와 수지와 함께 추모 행사를 열었다. 어린 소년소녀들이 집회소를 장식하는 동안 상호부조회 자매들은 만찬에 쓸 쇠고기를 샀고, 다른 성도들은 고기를 조리하기 위해 구덩이를 팠다.

지나는 그들의 노력에 감사했다. 성도들이 고인이 된 자신의 남편만이 아니라 그가 성도들 사이에 확립하고자 힘썼던 원리들 또한 기리고 있음을 느꼈던 것이다.

그 주 일요일에 지나는 서른 명의 회원으로 새로 상호부조회를 조직하는 일을 도왔다. 그리고 이튿날 지나와 수지는 그곳을 떠났다. 섬이 점점 멀어지자, 지나는 수지에게 집으로 돌아가게 되어 기쁜지 물었다. 수지는 마음이 아팠다. 그녀는 어서 아이들을 다시 보고 싶었지만, 한편으로는 이제 자신이 결혼하고자 하는 그 사람과 함께 있고 싶었다.

배를 타고 가는 동안 수지는 제이컵에게 편지를 썼다. “나를 봉투에 담아서 당신에게 보낼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요? 이제 난 당신을 볼 수 없어요.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자리에 앉아서 행복했던 과거를 곱씹으며 축복된 미래를 꿈꾸는 것뿐이에요.”25


멜리톤 트레호는 남부 애리조나에서 생활하던 중에 테일러 회장에게 멕시코시티에서 선교사로 봉사하라는 부름을 받았다. 멜리톤이 멕시코로 떠나는 첫 번째 선교사들과 작별 인사를 나눈 것은 3년도 더 전의 일이었다. 그 선교사들은 멕시코로 향하는 여정 동안 멜리톤이 번역한 몰몬경 구절들을 모아 만든 책을 수백 명에게 나누어 주었다. 오래지 않아, 『몰몬경 발췌문 모음집』을 읽은 사람들이 선교사를 더 보내 줄 것을 요청하는 편지가 교회 지도자들에게 속속 전해지기 시작했다.

번역 작업을 통해 자신을 증명한 멜리톤은 이제 제임스 스튜어트, 그리고 새로 부름받은 사도인 모지스 대처와 함께 멕시코의 수도로 갈 채비를 했다.

이 세 명의 선교사는 11월에 뉴올리언스에서 만난 후 그곳에서 증기선을 타고 베라크루스로 갔고, 다시 그곳에서 열차를 타고 멕시코시티로 갔다.26 일행이 멕시코시티에 도착한 이튿날, 플로티노 로다카나티라는 사람이 호텔로 그들을 찾아왔다. 그는 멕시코시티에서 복음을 받아들인 스무 명가량의 사람들을 인도하고 있다고 했다. 그리스 출생인 플로티노는 그들을 따뜻하게 맞이했다. 사도들이 마음을 움직여 이곳으로 선교사들을 보낸 것은 그가 테일러 회장 앞으로 보낸 여러 통의 편지 덕분이었다.27 선교사들을 기다리는 동안, 플로티노는 아직 침례를 받지 못한 다른 개종자들과 함께 La vos del desierto『라 보스 델 데시에르토(사막의 음성)』라는 명칭으로 신문을 발행하여 회복된 복음에 관해 다루기 시작했다.28

며칠 뒤, 선교사들은 교외에 있는 조용한 올리브나무 과수원으로 갔다. 모지스는 온천수가 솟는 샘에서 플로티노와 그의 친구인 실비아노 아르테아가에게 침례를 주었다. 모지스는 자신의 일지에 이렇게 적었다. “온 자연이 우리를 둘러싸고 웃음지었다. 하늘의 천사들도 기뻐했을 것이다.”29

며칠 뒤, 멜리톤은 또 다른 여섯 사람에게 침례를 주었다. 선교사들은 지부를 조직하고 플로티노의 집에서 모임을 열기 시작했다. 그들은 서로 복음을 가르치고 아픈 이들을 돌보았다. 모지스는 플로티노를 지부 회장으로 부르고, 실비아노와 최근에 개종한 호세 이바롤라를 그의 보좌로 불렀다.

선교사들은 주의를 기울여 계획하고 기도한 끝에, 팔리 프랫의 『보이스 오브 워닝』을 비롯한 교회의 소책자들을 번역하기로 결정했다. 한편, 교회의 회원이 되려면 때로 대가를 치러야 할 때도 있었다. 학교 교사였던 플로티노가 새로 받아들인 믿음을 부인하지 않다가 직장을 잃게 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작은 지부는 성장해 나갔고, 선교사들과 개종자들은 모두 자신들이 기념비적인 일에 참여하고 있음을 느꼈다.

멜리톤과 제임스, 플로티노는 1880년 1월 8일에 『보이스 오브 워닝』의 번역 작업을 마무리했다. 며칠 뒤, 모지스는 테일러 회장에게 선교 사업의 진척 상황을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저희는 모든 기회를 활용하여 유용한 지식을 얻을 것이며, 한편으로는 최선을 다해 복음의 진리에 대한 지식을 넓힐 것입니다. 또한, 저희는 주님께서 저희를 도우셨으며, 앞으로도 계속 그러하실 것을 믿습니다.”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