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악한 자들을 조금도 두려워할 것 없으니”, 『성도들: 후기의 예수 그리스도 교회 이야기, 제2권, 그 어떤 신성하지 않은 손도, 1846~1893년』(2020) 제34장
제34장: “사악한 자들을 조금도 두려워할 것 없으니”
제34장
사악한 자들을 조금도 두려워할 것 없으니
1885년 3월 8일, 스물일곱 번째 생일을 맞이한 아이다 우달은 눈부신 햇빛을 받으며 잠에서 깨어났다. 그러나 겨울 끝자락의 따스한 날이 아무리 반갑더라도 바깥에 나갈 때는 조심해야 한다는 것을 그녀는 알고 있었다. 아이다는 거의 매일 해가 질 때까지 집 안에서만 지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연방 보안관의 눈에 띌 위험이 있었다.1
성도들은 법망을 피해 숨어 지내는 생활을 가리켜 “지하 생활”이라는 말을 쓰기 시작했는데, 아이다가 도망치듯 애리조나 세인트존스의 집을 나와 “지하 생활”에 들어간 지도 이제 8개월째가 되고 있었다. 그러는 동안 그녀의 남편 데이비드는 여러 아내를 둔 혐의로 기소되어 다섯 명의 다른 성도들과 함께 재판에 회부되었다. 재판에는 마흔 명 가까운 사람들이 증인으로 나왔고, 그중 몇몇은 성도들에게 불리한 거짓 증언을 했다. 그 당시 데이비드가 아이다에게 보낸 편지에는 이런 말이 적혀 있었다. “애리조나에는 몰몬을 위한 법이나 정의가 없는 것 같아요.”2
재판 결과, 여섯 명 중 다섯 명이 일부다처제를 행한 혐의로 유죄 선고를 받았다. 그들 중 세 명은 3년 반의 징역형을 선고받고 3,200여 킬로미터 떨어진 미시건 디트로이트의 교도소로 가게 되었다. 유일하게 데이비드만은 유죄 선고를 피했으나, 그것은 단지 검찰이 아이다를 비롯해 데이비드에게 불리한 증언을 할 증인을 더 찾고자 재판을 6개월 후로 미뤘기 때문이었다.3
아이다는 애리조나를 떠난 뒤, 솔트레이크시티에서 남쪽으로 130킬로미터가량 떨어진 니파이라는 마을로 가서 데이비드의 아버지와 새어머니와 함께 지냈다. 아이다가 있는 곳을 아는 사람은 그녀의 가까운 가족과 친구들뿐이었다.
아이다는 그때까지 시가의 가족들과 지내 본 적이 없었으므로 처음에는 그들과 함께 있는 것이 낯선 사람들과 사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며 그녀는 그들을 사랑하게 되었고, 복수결혼을 한 뒤 가족을 지키기 위해 숨어 지내는 다른 여성들을 포함한 새로운 이웃들과도 친구가 되었다. 아이다는 이제 교회 모임에 참석하고 친구들과 어울리면서 길고도 외로운 나날을 활기차게 살아갈 힘을 얻었다.4
아이다의 생일이 되자, 니파이에 있는 그녀의 친구와 가족들이 파티를 열어 주었다. 그러나 그녀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 곧 부모님과 데이비드, 그리고 데이비드의 첫 번째 부인인 엘라는 수백 킬로미터나 떨어진 곳에 있었다. 데이비드를 못 본 지도 거의 6개월이 되어 갔다. 게다가 첫 출산을 몇 주 앞둔 상황인지라 그녀는 데이비드의 부재가 그 어느 때보다도 견디기 힘들었다.5
생일 파티가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아이다는 애리조나에서 온 신문 한 부를 받았다. 신문을 편 아이다는 망연자실했다. 어머니인 로이스 프랫 헌트의 부고 기사의 제목이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로이스는 이제 겨우 마흔여덟이었고, 아이다는 어머니의 죽음을 맞이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친구들은 아이다의 손에서 조심스럽게 신문을 가져간 뒤 해 질 녘까지 곁을 지켜 주었다. 그로부터 몇 시간 뒤에 진통을 시작한 아이다는 푸른 눈을 가진 건강한 여자아이를 낳았고, 딸에게 폴린이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다.
아이다는 그 뒤 몇 주 동안 슬픔과 기쁨을 분간할 수 없을 만큼 힘겨운 시간을 보냈지만, 자신에게 폴린이 있다는 사실에 감사함을 느꼈다. 그녀는 자신의 일지에 이렇게 적었다. “나는 소중한 어린 딸을 축복으로 받았다. 이제 내게 살아야 하고, 또 힘써 일해야 할 이유가 있음에 하나님께 감사드린다.”6
그해 봄 유타 북부에서는 새그위치와 그의 아내 모요가, 그리고 그 외 열여섯 명의 쇼숀족 인디언이 로건 성전을 향해 언덕을 올랐다.7 1년 전에 완공되어 헌납된 로건 성전은 유타 북부 및 아이다호 남부 성도들의 신앙과 노고에 대한 증거 그 자체였다. 새그위치를 비롯한 쇼숀족 성도들은 성전을 짓기 위해 다른 성도들과 함께 지칠 줄 모르고 일했다.8
쇼숀족은 성전에 이르기 위해 길고 험한 과정을 거쳐야 했다. 새그위치와 200명이 넘는 쇼숀족 인디언들이 교회의 회원이 된 지도 12년이 흘렀다. 이제 그들은 그들의 와드에서 그들의 언어로 예배를 드렸다.9 새그위치와 모요가는 엔다우먼트 하우스에서 인봉받았고,10 새그위치의 아들인 프랭크 팀빔부 워너는 쇼숀족을 위해 선교사로 봉사하도록 부름받았다.11
하지만 베어강 유역에 머물던 중 미국의 군대로부터 공격을 받았던 일은 여전히 쇼숀족 생존자들의 뇌리 속에 남아 그들을 괴롭혔고, 한편으로 그들은 끊임없이 이어지는 다른 고난들과도 맞서야 했다. 새그위치와 그의 부족민들은 교회의 회원이 된 후 아이다호 남부에 땅을 얻어 정착하고 농사를 지었다. 그러나 그들이 그곳에 도착하고 몇 달 후, 근처 마을에 사는 교회의 회원이 아닌 주민들은 백인 성도들이 인디언들을 선동하여 자신들을 공격하게 할까 봐 두려워하기 시작했다. 마을 사람들은 쇼숀족을 위협하여 추수철이 시작될 무렵 그들에게 땅을 버리고 떠날 것을 강요했다. 쇼숀족은 이듬해에 돌아왔으나, 이번에는 메뚜기 떼와 농장을 벗어난 가축들이 밭에 침입해 그들이 심은 곡물을 먹어 치워 버렸다.12
교회의 지도자들은 존 테일러 회장의 지시에 따라 곧 그들에게 유타의 북쪽 경계 쪽에 땅을 마련해 주었다.13 이제 그들의 작은 마을인 와샤키에는 여러 채의 집과 가축우리가 있었으며, 대장간과 협동조합 상점도 하나씩 있었고, 학교 건물도 들어서 있었다.14
새로운 삶을 꾸린다는 것은 몹시 힘겨운 일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새그위치와 그의 부족민들은 성전 건축에도 계속 힘을 보탰다. 쇼숀족의 남성들은 없는 시간을 짜내어 우마차와 기차를 이용해 로건으로 가서 석재 운반 일을 도왔다. 그 외의 시간에는 성전 외벽을 고정할 때 쓰는 회반죽을 준비하거나 내벽을 칠할 석회를 배합했다.(회반죽: 회나 시멘트에 모래를 섞고 물로 갠 것으로 주로 벽돌이나 석재 따위를 쌓는 데 쓰임—옮긴이) 성전이 헌납될 때까지 그들이 이 성스러운 건축물에 바친 노동 시간은 수천 시간에 달했다.15
새그위치는 나이가 들어가는 데다 손에는 베어강 학살 당시 생긴 상처가 가득했지만, 그 역시 자신의 몫을 해냈다. 쇼숀족 인디언들은 그 학살을 한시도 잊은 적이 없었다. 이제 많은 생존자들은 그 참사가 있었던 때로부터 몇 년이 지났는지로 자신의 나이를 세었다.16 그들은 그때 떠나 보낸 부모와 형제자매, 남편과 아내, 자녀와 손주들을 잊지 못했다.
학살이 일어나던 그날, 새그위치는 자신의 부족민들을 살해하는 군인들을 막아 내지 못했다. 그러나 1885년 봄, 새그위치와 쇼숀족 인디언들은 성전에서 나흘을 보내며 베어강에서 목숨을 잃은 많은 이들과 세상을 떠난 그들의 친척들을 대신해 의식을 수행했다.17
1885년 6월, 조셉 스미스 삼세와 그의 동생 알렉산더가 복원 예수 그리스도 후기 성도 교회를 위한 임무를 수행하려 유타준주를 찾았다. 이전에 그들의 교회에서 온 선교사들처럼, 두 형제는 유타 안팎의 성도들에게 선지자 조셉 스미스는 결코 복수결혼을 한 적이 없다는 주장을 납득시키려 했다.18
성도들은 그들이 온 것을 예의주시했는데, 히버와 빌리트 킴볼의 쉰여섯 살 된 딸 헬렌 휘트니도 그중 한 명이었다. 헬렌은 이 형제들이 전하는 이야기를 익히 알고 있었다. 사실 그녀는 조셉 삼세가 자신의 아버지 선지자 조셉에 대해 이야기한 여러 주장을 반박하며 Plural Marriage as Taught by the Prophet Joseph(『선지자 조셉이 가르친 복수결혼』)이라는 소책자를 펴낸 적이 있었다. 조셉 스미스의 아내 중 한 명이었던 헬렌은 선지자가 복수결혼을 했었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알았다.19
헬렌의 아버지가 그녀에게 복수결혼의 원리를 가르치며 그녀에게 조셉에게 인봉될 의향을 물었을 당시, 헬렌은 열네 살이었다. 처음에 헬렌은 반발심이 들었고, 아버지의 말에 몹시 화를 냈다. 그러나 그 하루 동안 이 일을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하던 헬렌은 아버지는 자신을 너무도 사랑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에 반하는 그 무엇도 자신에게 가르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헬렌은 조셉의 아내가 되면 자신과 가족이 승영에 이르고 자신의 가족이 조셉과 영원히 연결되는 데 도움이 되리라 믿으며 그와의 인봉에 동의했다.
이 결혼은 거의 모든 면에서 관습적인 결혼과는 거리가 멀었다. 당시 미국에서는 헬렌의 나이에 결혼하는 여성들도 있긴 했으나 헬렌은 결혼을 하기에는 아직 어렸다. 조셉의 몇몇 부인들과 마찬가지로, 헬렌은 영원만을 위해 선지자에게 인봉되었다. 헬렌과 조셉이 만나서 어울리는 일은 거의 없었고, 헬렌이 조셉과 육체적인 관계를 가졌다고 시사한 적도 없었다. 그녀는 나부에서 복수결혼을 한 다른 여성들처럼 계속 자신이 인봉된 사실을 비밀에 부쳤으며, 자신의 부모와 한집에서 생활했다. 그러나 헬렌의 몇몇 또래들은 이성 교제를 시작했으므로, 자신이 일부 사교 모임에 더는 가지 않는 이유를 친구들에게 설명하려 할 때 그녀는 난감함을 느꼈다.20
선지자가 사망한 후, 헬렌은 뉴얼과 엘리자베스 앤 휘트니의 아들인 호러스 휘트니와 결혼했다. 당시 열일곱 살이던 헬렌과 스물두 살이던 호러스는 서로 깊이 사랑했다. 두 사람은 결혼식을 올리며 죽음이 둘을 갈라놓을 때까지, 그리고 가능하다면 영원히 서로에게 충실할 것을 약속했다. 그러나 두 사람은 나부 성전의 제단에서 현세만을 위한 결혼식을 올렸다. 헬렌이 이미 조셉 스미스에게 영원을 위해 인봉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21
나중에 유타에 정착한 후, 헬렌은 호러스가 루시 블록셈과 메리 크레바스와 결혼하는 데 동의했다. 루시는 얼마 후 세상을 떠났지만, 메리와 헬렌은 서로 이웃에 살며 좋은 관계를 맺고 지냈다. 헬렌과 호러스는 38년 동안 행복한 결혼 생활을 이어 갔으며, 헬렌은 열한 명의 자녀를 낳았다.22 호러스는 1884년 11월 22일에 세상을 떠났고, 이제 헬렌은 종종 『데저렛 뉴스』와 『우먼스 익스포넌트』에 글을 쓰기도 하며 하루하루를 보냈다.23
복수결혼은 헬렌에게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지만, 그녀는 복수결혼을 힘껏 옹호했다. 그녀는 이렇게 적었다. “주님으로부터 비롯된 강한 간증이 아니었더라면, 나는 단 한 순간도 복수결혼에 순종할 수 없었을 것이다.”
헬렌은 『선지자 조셉이 가르친 복수결혼』을 쓰고 몇 년 후에 Why We Practice Plural Marriage(『우리가 복수결혼을 하는 이유』)라는 제목으로 두 번째 소책자를 냈다. 여기에는 복수결혼에 대한 일반적인 비판들이 언급되어 있었다. 그녀는 이 책자에서 이렇게 말했다. “사람을 기도하게 하고, 마음에서 이기심을 몰아내며, 사랑하는 능력을 키워 주는 것에는 악이 거할 자리란 없다. 그것으로 인해 사람은 자신이 속한 작은 울타리를 벗어나 더 큰 친절을 베풀게 된다.”24
글을 쓰느라 때로는 진이 빠져 지치기도 했지만, 헬렌은 그렇게 번 돈을 신문을 구독하는 등의 용도로 사용했다.25 헬렌은 여러 편의 사설에서, 교회를 박해하는 사람들이 개인의 자유와 종교적 자유를 옹호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교회에 대해 무자비한 반대 운동을 펼치는 것을 비판했다. 헬렌의 글은 동료 성도들에게 힘을 북돋아 주었다.
그녀는 1885년 8월에 다음과 같은 글을 통해 다시 한번 독자들에게 용기를 주었다. “성도들이 자신의 몫을 다한다면, 장차 그들을 대신하여 전능하신 하나님의 권능이 드러날 것이다. 우리는 사악한 자들을 조금도 두려워할 이유가 없다.”26
헬렌은 조셉 삼세가 자신의 아버지는 복수결혼에 관여하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것은 진실을 모독하는 행위라고 생각했다.27 어느 날, 헬렌이 기차를 타고 유타 중부를 지나는데, 한 남자가 그녀가 탄 칸으로 들어와서 바로 앞자리에 앉았다. 그는 교회의 회원인 것 같지는 않았으며, 헬렌은 그가 일부다처제 금지법을 강행하기 위해 그곳에 온 정부의 관리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 낯선 남자가 기차에서 내린 뒤, 헬렌은 그가 조셉 스미스 삼세라는 사실을 알고 충격을 받았다.
헬렌은 자신의 일지에 이렇게 적었다. “그가 누구인지 알았더라면, 나는 더 대담하게 그를 비판하고 나를 알리고 싶은 마음이 들었을 것이다.”28
헬렌은 생애의 대부분을 호러스의 아내로 살았지만, 자신은 선지자 조셉 스미스에게 인봉된 사람임을 알고 있었다. 자신이 맺은 관계들이 장래에 어떻게 될지 항상 확신했던 것은 아니었지만, 헬렌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가족에게 약속하셨던 영원한 축복을 모두 얻고 싶었다. 하나님은 언제나 그녀가 고난의 용광로를 지나도록 이끌어 주셨고, 그녀는 그분께서 결국 모든 것을 바로잡아 주시리라는 것을 흔들림 없이 믿었다.
그녀는 이렇게 적었다. “나는 아주 오래전에, 무엇이 우리를 행복하게 할지를 우리보다 더 잘 아시는 주님께 모든 것을 맡기는 법을 배웠다.”29
아이다 우달은 딸을 낳고 몇 달 만에 또다시 거처를 옮겼다. 그녀는 가명을 사용해 이동하며 유타에 사는 여러 친구와 친척의 집을 몇 주에 한 번씩 전전하며 지냈다.30 데이비드는 1885년 8월에 재판을 받았다. 검사들은 그의 일부다처제 혐의에 대해 설득력 있는 주장을 펼치지 못했기에, 그 대신 얼마 전 세인트존스에서 그를 반대하는 사람들이 그를 공개적으로 비난하며 들이댄 위증죄 혐의로 눈을 돌렸다.31
아이다와 데이비드가 마지막으로 서로 얼굴을 본 것은 폴린이 태어나고 두 달이 지난 1885년 5월의 일이었다. 그 후로 아이다는 데이비드에게 편지 한 통을 받았는데, 그는 편지에서 자신 때문에 아이다가 이 모든 일을 견뎌야 하는 상황이 후회스럽다고 말했다.
“때로는 당신이 발각될 것을 두려워하며 가명으로 이곳저곳으로 몸을 피해 다니는 것보다는 내가 감옥에서 고통을 겪는 편이 낫겠다는 생각이 들어요.”32
그러나 많은 사람이 데이비드는 무죄 판결을 받으리라고 했기에 아이다는 더욱더 자신의 희생이 가치 있는 일이 되리라고 내다봤다. 아이다는 애리조나에서 열릴 재판에 관한 소식을 기다리는 동안 폴린을 돌보며 안정을 얻었다. 아기를 보살피는 일은 그녀가 때로 소모적인 긴장감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되었다.33
8월 17일, 데이비드가 위증죄로 유죄를 선고받고 징역 3년에 처해졌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아이다는 절망감을 느꼈지만, 적어도 자신은 애리조나에 있는 가족들에게 돌아갈 수 있기를 바랐다. 그러나 사도인 조지 티즈데일은 그녀에게 계속 숨어 지내라고 권고했다. 만일 데이비드가 설득력 없는 위증죄에 대해 사면 조치를 받으면, 그를 반대하던 사람들은 다시 그가 일부다처제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도록 발버둥칠 것이었다.
아이다는 티즈데일의 권고에 따라 애리조나로 돌아가지 않았다.34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그녀는 감옥에 있는 데이비드의 소식이 궁금해서 애간장을 태웠다. 데이비드는 한 달에 한 번만 가족에게 편지를 쓸 수 있었으므로, 아이다는 엘라가 그의 편지를 그대로 베껴서 적어 보내 주는 것에 의지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특히 1885년 10월에 막내 메리가 세상을 떠나면서, 엘라도 시련을 겪고 있었다.
그러면서 아이다는 석 달 동안 데이비드의 편지를 전혀 받아 보지 못했다. 마침내, 그가 보낸 편지들이 뭉치로 도착했을 때 아이다는 남편이 그녀를 위해 다른 이름을 사용하기 시작했음을 알게 되었다. 데이비드는 아이다에게 죄가 씌워질까 염려하여, 그녀를 그녀의 어머니 이름인 로이스 프랫으로 지칭했다.35
그해 가을, 보안관들의 눈을 피해 솔트레이크시티 남쪽에 은신해 있던 테일러 회장은 제이컵 게이츠에게 다시 선교사 부름을 주고 하와이로 갈 것을 요청했다. 제이컵이 하와이제도에서 첫 번째 선교 사업을 마치고 돌아온 지 6년이 흘러 있었다. 그동안 그는 지금은 수사라는 이름을 쓰는 수지 영과 부부가 되었다. 그들은 프로보에 살며 함께 세 자녀를 길렀고, 곧 한 아이가 더 태어날 예정이었다. 수사가 첫 번째 결혼에서 얻은 아들인 베일리도 그들과 함께 살았다. 하지만 그녀의 딸인 리아는 아직도 유타 북부에 있는 친가에서 살고 있었다.
제이컵이 갑자기 선교사로 부름받자, 수사는 불안감과 함께 수많은 질문이 마음속으로 밀려 들어왔다. 선교사 부름장에는 제이컵이 불과 3주 뒤에 하와이로 떠나도록 되었으므로, 그는 하던 일을 마무리할 시간이 별로 없었다. 선교사들은 임지에 가족을 동반하기도 했는데, 그의 부름장에는 가족을 데려갈 수 있는지 여부에 대한 언급이 없었다.
수사는 제이컵과 함께 가고 싶었고 아이들도 데려가고 싶었지만, 그다지 희망적이지는 않았다. 이튿날, 수사는 자신의 어머니에게 다음과 같이 편지를 썼다. “부름장 분위기로 보아, 그이는 이 여행에서 저는 배제된 것으로 생각하고 있어요. 그러니 앞으로 3년 동안 제가 어떻게 살아가게 될지는 어머니께서 짐작할 수 있으실 거예요.”36
제이컵은 곧바로 부름을 받아들였지만, 테일러 회장에게 수사와 자녀들이 함께 가도 좋을지 문의했다. 그는 이렇게 편지를 썼다. “저는 혼자보다는 가족과 함께 가고 싶습니다.” 그러면서 제이컵은 수사가 전에 하와이에 가 보았으며 그 지역을 잘 알고 있다는 사실을 언급했다.37
답은 즉시 오지 않았고, 수사는 제이컵을 홀로 떠나보내기 위해 준비했다. 그러다 그녀는 이미 다른 세 명의 선교사가 라이에로 가족들을 데려가는 문제에 대해 승인을 받았음을 알게 되었다. 라이에에는 주거 시설이 한정되어 있었으므로 수사는 자신도 그런 축복을 받게 되리라고는 기대하지 않았다. 그런데 유타를 떠날 날이 겨우 일주일이 남았을 무렵, 제이컵은 가족을 동반해도 좋다는 내용의 편지를 받게 되었다.38
수사와 제이컵은 준비를 서둘렀다. 그러는 가운데, 그들은 수사의 전 남편인 앨마 던퍼드에게 편지를 보내어 열 살 된 베일리가 함께 하와이로 가도 좋을지 의견을 물었다. 앨마는 답장을 보내지 않고 수사의 가족이 하와이로 출발할 때까지 묵묵부답을 일관했다. 그러던 그가 보안관보를 대동하고 솔트레이크시티의 기차역에 나타났다. 앨마는 자신이 베일리를 유타에 데리고 있을 권리가 있다는 법원의 명령을 발부받은 상태였다.
베일리는 항상 수사와 지내 왔음에도 불구하고, 법원의 이번 명령으로 수사는 앨마가 베일리를 데려가는 것을 막을 방도가 없어졌다. 수사는 무너지는 가슴으로 베일리와 헤어졌고, 베일리는 울부짖으며 엄마에게 돌아가려 했다.39
수사와 제이컵은 곧바로 나머지 아이들을 데리고 배에 올라 하와이로 향했다. 배를 타고 가는 동안 수사는 주체할 수 없는 슬픔을 느꼈고, 몸도 아팠다. 배가 호놀룰루에 닿자, 체포를 피해 섬에서 망명 생활을 하던 조셉 에프 스미스가 그들을 맞이했다. 이튿날 아침에 라이에로 갔고, 그곳에는 어마어마한 숫자로 모인 성도들이 저녁 식사와 음악회를 준비하여 그들을 맞았다.40
수사와 제이컵은 곧 라이에에서의 삶에 안착했다. 수사는 자신을 둘러싼 아름다운 경관이 감탄스러웠지만, 갖가지 야생동물과 해충이 들끓는 선교사 숙소에 적응하느라 애를 먹었다. 그녀는 『우먼스 익스포넌트』에 다음과 같이 농담조의 글을 기고했다. “조금이라도 외롭다고 느낄 때면, 내게는 많은 친구가 있다는 것을 상기한다. 생쥐와 쥐, 전갈, 지네, 바퀴벌레, 벼룩, 모기, 도마뱀, 그리고 수백만 마리의 개미가 그들이다.”41
수사는 거의 늘 유타에 대한 그리움을 놓지 못했다.42 하와이에 도착하고 몇 달 후, 베일리의 편지가 도착했다.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엄마가 여기 있었으면 좋겠어요. 기도할 때마다 엄마를 생각해요.”43
수사는 적어도 베일리가 기도를 하고 있다는 말에서 위안을 받았다.
1885년 초에 은신에 들어간 존 테일러는 자신보다 몇 주 앞서 은신 생활을 시작한 조지 큐 캐넌과 합류했다. 지금껏 그들은 솔트레이크시티 안팎에 사는 몇몇 충실한 성도들의 집을 은신처로 삼아 지냈으며, 이웃이 수상한 행동을 시작하거나 존이 불안감을 느낄 때마다 거처를 옮겨 다녔다. 계속되는 보안관의 추적 속에서 그들은 절대 긴장을 내려놓을 수가 없었다.44
제일회장단은 성도들을 직접 만날 수 없는 상황에서 편지를 통해 교회의 업무를 처리하고자 노력했다. 그런 식으로 해결할 수 없는 사안이 있을 때는 솔트레이크시티에서 비밀리에 교회의 다른 지도자들을 만났다. 도시로 가는 것은 항상 위험한 일이었다. 복수결혼을 한 교회의 지도자는 그 누구도 안전하지 않았다.45
연방 보안관들은 11월에 사도 로렌조 스노우를 체포했다. 로렌조는 일흔한 살에, 건강도 좋지 않았다.46 체포되기 전에 그는 불법 동거에 대한 기소를 피하고자 자신의 여러 가족 중 한 가족과만 생활하겠다는 결정을 내렸었다. 그러나 이 소송에 관여한 판사 한 명은 그가 모든 아내와 관계를 끊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때 로렌조는 이렇게 말했다. “내 아내들을 포기하고 이 성스러운 임무를 훼손하느니 천 번이라도 죽는 편이 나을 것입니다.”47
1886년 1월, 판사는 3건의 불법 동거 혐의로 로렌조에게 18개월의 징역형을 선고했다. 그다음 달, 엘윈 아일랜드 보안관과 몇몇 보안관보가 조지 큐 캐넌의 농장에 예고 없이 들이닥쳐 그곳에 살던 가족들에게 소환장을 내밀었다. 그런 후 아일랜드는 조지에 대해 500달러의 현상금을 내걸었다.48
자신에게 현상금이 걸렸다는 소식을 들은 조지는 “인간 사냥개들”이 자신을 뒤쫓으리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선지자를 위험에 빠뜨리고 싶지 않았기에 한동안 존과 갈라져 있기로 했다. 존도 이에 동의하고 조지에게 멕시코로 가도록 조언했다. 며칠 뒤, 턱수염을 깎은 조지는 눈에 띄지 않고 유타를 벗어날 수 있기 바라며 기차에 올랐다.49
그러나 어찌 된 일인지 조지가 유타를 떠났다는 말이 새어 나갔고, 최고 보안관이 기차에 올라타서 그를 체포했다. 뒤이어, 조지를 다시 솔트레이크시티로 호송하기 위해 아일랜드 보안관이 왔다.
기차가 출발할 무렵, 조지에게 다가온 한 교회 회원은 귓속말로 기차가 솔트레이크시티에 도착하기 전에 일단의 성도들이 그를 구출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조지는 자리에서 일어나 기차 칸 바깥에 있는 승강구로 나갔다. 그는 자신 때문에 누군가가 체포되거나 죽게 되는 것을 원치 않았다.
겨울 풍경을 바라보며, 조지는 기차에서 뛰어내리는 것에 대해 생각했다. 그러나 서부의 사막은 사람이 살지 않는 곳이었다. 적당한 시점에 뛰어내리지 못하면 가장 가까운 마을과도 수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내리게 될 수도 있었다. 예순을 바라보는 사람이 이 황량한 땅을 걸어서 이동한다는 것은 극도로 위험한 일이었다.
그때 갑자기 기차가 휘청였고, 그 바람에 조지는 기차 밖으로 튕겨져 나갔다. 그는 추락하여 머리와 몸의 왼편을 땅에 세게 부딪혔다. 기차는 굉음을 내며 차디찬 잿빛 사막을 향해 저멀리 사라졌다.
조지는 의식을 반쯤 잃은 채 차디찬 땅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아프지 않은 곳이 없었다. 콧등은 부러져서 한쪽으로 쏠려 있었고, 한쪽 눈썹은 뼈가 보이도록 깊이 파여 얼굴과 옷이 피범벅이 되었다.
조지는 몸을 일으킨 후 천천히 선로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얼마 안 가 그는 이쪽으로 다가오는 보안관보를 발견했다. 조지가 없어진 것을 알아차린 아일랜드 보안관이 기차를 세운 것이었다. 조지는 절뚝이며 보안관보에게 다가갔고, 보안관보는 그를 가까운 마을로 데려갔다.
조지는 그곳에서 어떤 성도도 그의 체포를 막는 일에 관여하지 않도록 요청하는 전보를 보냈다. 이제 그는 주님의 손안에 있었다.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