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 역사
8 궁핍한 나날들


“궁핍한 나날들”, 『성도들: 후기의 예수 그리스도 교회 이야기, 제2권, 그 어떤 신성하지 않은 손도, 1846~1893년』(2019), 제8장

제8장: “궁핍한 나날들”

제8장

궁핍한 나날들

벌집

1848년 9월 20일 오후, 루이자 프랫과 딸들은 브리검 영의 우마차 부대와 함께 솔트레이크밸리에 도착했다. 오전 내내 약속된 땅에서 신선한 채소를 먹을 기대감에 부풀어 있었던 그들은 오랜 벗들과 손을 맞잡고 인사를 나눈 후 마침내 자리에 앉아 분지에서 난 옥수수를 마음껏 먹을 수 있었다.

캘리포니아에서 출발한 애디슨의 부대는 아직 도착하지 않은 상황이었기에, 윈터쿼터스에서 루이자를 도와주던 한 형제의 아내인 메리 로저스가 루이자 가족에게 자신의 집에서 함께 지내자고 권했다. 루이자는 메리와 잘 아는 사이는 아니었지만 그 권유를 기쁘게 받아들였다. 메리는 출산을 앞두고 있었기에, 루이자와 딸들이 애디슨을 기다리는 동안 그 집에 머무른다면 그들은 메리를 도우며 그녀가 베푼 친절에 보답할 수 있을 것이었다.

애디슨은 여러 날이 지나도 나타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메리가 출산하자 루이자는 밤낮으로 메리와 아기를 보살폈다. 그러던 중 9월 27일에 분지로 온 몰몬 대대의 퇴역 군인 몇 명이 하루 뒤면 애디슨이 돌아온다는 소식을 전했다. 루이자의 딸들은 몹시 기뻤다. 여덟 살인 앤은 친구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사람들이 나한테 아빠가 있다고 하는데, 난 아빠를 몰라. 아빠가 있는데도 아빠를 모른다니 이상하지 않아?”

이튿날, 맑고 화창한 아침이 밝았다. 루이자는 남편과의 재회를 위해 우마차로 가서 옷을 차려입었다.1 열여섯 살인 엘런이 로저스네 오두막 바닥에 무릎을 꿇고 바닥을 닦고 있을 때, 가족의 친구 하나가 안으로 들어오며 말했다. “엘런, 아버지가 오셨어.”

엘런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고, 햇볕에 그을린 텁수룩한 한 남자가 방으로 들어왔다. 엘런은 아버지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아, 아빠! 오셨어요!” 5년여 세월이 지난 후라 엘런은 아버지를 거의 알아볼 수가 없었다.

곧 방으로 뛰어 들어온 프랜시스와 로이스는 애디슨의 추레한 모습을 보고 입을 다물지 못했다. 딸들은 바깥에서 놀고 있는 앤을 불렀다. 안으로 들어온 앤은 손을 뒤로 감추고 경계하는 눈빛으로 애디슨을 바라보았다. 언니들 중 하나가 말했다. “아빠야.” 딸들은 앤에게 아버지와 악수하도록 해 보려 했지만 앤은 밖으로 달아나 버렸다.

앤은 울면서 말했다. “아빠 아니야!”2

곧 루이자도 안으로 들어와 여독에 지친 애디슨의 얼굴을 마주했다. 그녀는 낯선 사람이나 다름없는 남편을 보고 할 말을 잃었다. 남편이 없는 동안 가족들이 얼마나 달라졌는지를 깨닫자 슬픔이 밀려왔다. 하나님의 왕국을 건설하는 일이 아니라면 그 무엇도 이 기나긴 이별의 시간의 정당한 이유가 될 수 없다고 그녀는 생각했다.3

애디슨도 감정이 북받쳤다. 딸들은 이제 자신이 기억하는 어린 소녀들이 아니었다. 자신이 떠날 때 세 살배기였던 앤은 더더욱 그랬다. 루이자는 윈터쿼터스에서 괴혈병을 앓고 이가 빠져서 목소리가 달라져 있었다. 애디슨은 이방인이 된 듯한 기분마저 들었다. 그는 다시 가족을 알아 가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앤은 이튿날 아침까지도 아빠와 말을 하지 않았다. 그래서 애디슨은 앤을 자신의 우마차로 데려가서 가방을 열고 조개껍데기 몇 개와 다른 신기한 물건들을 앤 옆에 꺼내 놓기 시작했다. 애디슨은 물건들을 하나씩 내려놓으며 그것을 어디서 가져왔는지 설명하고, 전부 다 오로지 앤을 위해 고른 것들이라고 말해 주었다. 애디슨은 그 위로 알사탕과 건포도, 계피 사탕을 수북이 쏟아 놓으며 앤에게 물었다.

“이제 내가 네 아빠라는 걸 믿겠니?”

앤은 선물들을 들여다보다가 다시 애디슨을 바라보며 신이 난 목소리로 대답했다. “네!”4


그다음 달, 올리버 카우드리는 미주리강 동편의 케인스빌 근처에서 열린 성도들의 대회에서 말씀을 하기 위해 연단에 올랐다. 그는 앞에 앉은 많은 사람들을 알아보지 못했다. 교회는 십 년 전에 그가 떠난 이후로 놀랍도록 성장해 있었다. 그의 매부인 피니아스 영은 이 대회에 참석한 성도 중 그가 아는 몇 안 되는 사람 중 하나였다.

올리버가 미주리강 유역 정착지들에 머무는 성도들과 만나게 된 데는 피니아스의 결의가 한몫을 했다.5 그리고 올리버도 데이비드 휘트머의 새로운 교회에는 합당한 권세가 없다는 결론을 내린 터였다. 신권은 예수 그리스도 후기 성도 교회에 있었다.

연단 위 올리버 가까이에는 케인스빌을 감리하는 사도인 올슨 하이드가 앉았다. 거의 14년 전에 올슨을 후기의 첫 번째 사도 중 한 명으로 성임한 사람이 올리버였다. 올슨도 올리버처럼 미주리에서 교회를 떠났지만, 얼마 안 가서 교회로 돌아와 조셉 스미스를 직접 만나 화해했었다.6

올리버는 생각을 정리한 뒤 성도들에게 말씀을 전했다. “제 이름은 카우드리, 올리버 카우드리입니다. 선지자가 하나님의 은사와 권능으로 몰몬경을 번역해서 구술할 때, 저는 몇 쪽을 제외한 나머지 모두를 제 자신의 펜으로 직접 받아 적었습니다.” 그는 몰몬경이 참되며, 그 책에는 구원의 원리가 들어 있다고 간증했다. “몰몬경의 빛을 따라 걷고 그 가르침에 순종하면, 여러분은 하나님의 영원한 왕국에서 구원받게 될 것입니다.”

그는 이어서 신권의 회복과 조셉 스미스가 선지자로 부름을 받은 것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리고 이렇게 간증했다. “저희는 많은 이에게 이 거룩한 신권을 부여했으며, 그렇게 부여한 신권은 하나님께서 직접 주신 것만큼 훌륭하고 정당합니다.”7

올리버는 성도들에게 말씀을 전하면서 자신도 다시 삶에서 신권의 축복을 누리기를 열망했다. 자신이 한때 교회에서 지녔던 것과 똑같은 권세의 직책을 받지 못하리라는 것을 알았지만, 그런 건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그는 다시 침례를 받고 예수 그리스도 교회의 겸손한 회원으로 환영받고 싶었다.

대회가 끝나고 2주 뒤에 올리버는 케인스빌의 통나무 회당에서 교회의 지도자들을 만났다. 그는 자신의 상황을 인정했다. “저는 오랜 시간 동안 여러분과 떨어져 있었습니다. 이제는 돌아오고 싶습니다.” 그는 침례가 하나님 왕국으로 들어가는 관문임을 알았고, 그 관문으로 들어가고 싶었다. 올리버가 말했다. “저는 명예롭게 돌아올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몇몇은 올리버의 진정성에 의문을 표했다. 올리버는 그들에게 말했다. “제가 돌아와서 침례의 관문을 통해 회원이 되고자 겸허히 간청하는 것이 모든 것을 말해 준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이 권세에 순종합니다.”

올슨 하이드는 형제들에게 이 결정에 대한 지지를 물었다. “올리버 형제를 침례를 통해 받아들이고 지난 모든 일은 잊어버릴 것을 정식으로 제안합니다.”

사도들은 만장일치로 올리버를 위해 손을 들었다. 일주일 뒤에 올슨은 올리버에게 침례를 주고 그가 교회로 돌아온 것을 환영했다.”8


한편, 전 세계 곳곳의 도시와 마을들에 캘리포니아의 황금에 대한 소문이 들불처럼 번졌다.이 소문에 미혹된 사람들은 손쉽게 부를 얻을 수 있으리라는 기대로 집과 일터와 가족을 떠났다. 1848년 가을에는 수천 명이(그중 상당수가 젊은 남자들이었음) 일확천금을 꿈꾸며 캘리포니아 해안으로 몰려들었다.9

브리검 영은 궁핍한 성도들이 황금의 유혹을 받게 될 것을 알고, 솔트레이크시티에 돌아온 직후 성도들에게 이 문제를 언급했다. “우리가 샌프란시스코로 가서 금덩이를 캐낸다면 그것은 우리를 파멸시킬 것입니다.” 그는 성도들에게 주님께서 주신 땅에 남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무슨 이유에서든지 이 솔트레이크밸리를 떠나는 것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제 눈에 식초를 붓는 것과 같습니다.”10

브리검은 무슨 일이 있어도 분지에 남겠다고 결심하고 교회와 도시의 질서를 바로잡기 시작했다. 성도들은 1848년 10월 대회에서 다시 한번 브리검 영과 히버 킴볼, 윌라드 리차즈를 교회의 제일회장단으로 지지했다.11 그로부터 얼마 후, 성도들은 그 지역에 준주 정부가 설립되도록 미국 의회에 청원을 제출했다. 한편, 브리검은 도시 운영을 위해 오십인 평의회를 재소집했다.

미국은 최근에 일어난 멕시코와의 전쟁을 종결하는 조약의 일부로 멕시코 북부의 영토를 획득한 상태였다. 곧 정착민들과 정치인들은 이 땅에 새로운 준주와 주를 설립하려는 계획에 혈안이 되었다. 그 지역의 원주민이나 이미 그곳에 거주하고 있던 멕시코인들의 상황은 뒷전이었다.

브리검과 교회의 지도자들은 성도들이 자주적으로 스스로를 다스릴 자유를 얻도록 그레이트베이슨에 준주를 조직하고자 했다. 그러나 준주를 설립하는 데는 위험이 따랐다. 에서는 지도자를 선출할 권리가 시민들에게 부여되지만, 준주에서는 그곳 정부의 요직 중 일부를 미국 대통령이 임명하도록 되어 있었다. 만일 대통령이 교회에 적대적인 인사들을 지명한다면, 성도들은 더 큰 박해를 겪게 될 수도 있었다.12

오십인 평의회는 그해 겨울에 정기적으로 모여서 성도들의 필요 사항을 논의하고 의회에 전달할 청원의 초안을 작성했다. 그들은 그레이트베이슨의 대부분과 남부 캘리포니아 해안의 일부를 포함하는 지역을 준주로 제안했다. 이 광대한 지역이 준주가 되면, 새로운 정착촌들을 위한 충분한 공간이 확보되며 성도들의 집합에도 도움이 될 해양의 항구가 들어설 수 있을 것이었다.하여 성도들의 집합을 도울 수 있었다. 성도들은 이렇게 제안된 준주를 “데저렛[Deseret]”이라고 불렀다. 데저렛은 수고와 근면, 협동의 상징인 꿀벌을 의미하는 몰몬경 속 단어에서 따왔다.(몰몬경에는 Deseret이 데세레트로 표기되어 있다—옮긴이)13

평의회가 의회에 보낼 청원서를 마무리한 1월, 솔트레이크밸리는 겨울의 혹독한 일기에 시달리고 있었다.14 일부 지역의 성도들은 1미터 깊이의 눈과 뼛속까지 스미는 칼바람을 견뎌야 했다. 산악에는 눈이 깊게 쌓여 땔감을 모으는 것도 힘들어졌다. 곡물 공급이 다시 소진되어 가고, 소들은 굶주림과 추위로 쓰러져 갔다. 성도들 중에는 오로지 신앙만으로 버티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제일회장단이 뭐라 하든, 기후가 훨씬 온화한 캘리포니아의 금광 지대로 가는 것에 대해 다시 이야기를 꺼내는 이들도 있었다.15

1849년 2월 25일, 브리검은 분지에 머무르는 성도들은 번성할 것이며, 그들이 세우는 정착지들은 번영하리라고 예언했다. 그는 이렇게 간증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들이 거할 곳은 바로 이곳이라고 제게 밝혀 주셨습니다. 그분은 성도들의 유익을 위해 악천후를 가라앉히실 것입니다. 그분은 서리와 땅의 메마름을 꾸짖으실 것이고, 땅은 비옥하게 될 것입니다.”

브리검은 성도들에게 지금은 금을 찾아 땅을 팔 때가 아니라고 말했다. “복음을 가르치고, 이스라엘을 모으고, 십일조를 내고, 성전을 짓는 것이 우리가 할 일입니다.” 부는 나중에 찾아올 것이었다.

브리검은 말했다. “제가 이 백성들에 관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그들이 이 나라에서 부유해져서 하나님과 그분의 백성을 잊고, 살이 쪄서, 스스로 교회에서 뛰쳐나와 지옥으로 가는 것입니다.”16

얼마 후에 히버 킴볼도 성도들에게 한 설교에서 그의 말에 동의했다. “저는 여러분의 가난이 염려되지 않습니다.” 그는 머지않아 미국 동부의 대도시들보다 이 분지의 물가가 더 내려가리라고 예언하며 이렇게 약속했다. “여러분이 충실하다면, 마음속의 소망을 모두 이루실 것입니다.”17


그해 겨울, 스물여덟 살의 엘리자 파트리지 라이먼은 요새 안에 통나무로 지은 작은 방에서 갓 태어난 아들과 함께 살고 있었다. 여기에는 그들 외에도 남편을 잃고 홀로된, 엘리자의 어머니 리디아와 여동생 에밀리, 캐롤라인, 리디아, 남동생 에드워드 파트리지 이세도 함께 기거했고, 그녀의 남편이자 사도인 아마사 라이먼도 종종 이곳에 머물렀다. 그녀의 남편은 엘리자 외에도 다른 아내들이 있었으며, 그는 시간을 나누어 아내들과 함께했다. 아마사가 첫 번째 부인인 루이자 태너에게서 얻은 아홉 살 된 맏아들 프랜시스 라이먼도 요새 안에 있는 학교에 다니기 위해 이곳에서 지냈다.18

분지에는 약 4천 명의 성도가 정착해 있었는데, 그중 많은 이들이 아직도 우마차와 천막에서 생활하고 있었다.19 엘리자의 방은 비나 눈이 와서 지붕이 새기는 해도 어느 정도 칼바람은 피할 수 있었다. 그러나 질병과 굶주림 앞에서는 이 집도 속수무책이었다. 그 겨울, 엘리자의 아들과 남동생은 백일해에 걸렸고, 날이 갈수록 가족들에게 제공되는 음식은 줄어 들었다.20(백일해: 경련성 기침을 일으키는 어린이의 급성 전염병—옮긴이)

분지 내 어디를 가도 식량이 부족했다. 성도들은 겨울 동안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먹을 것을 아끼고 또 아껴야 했다. 유타밸리 근처에서 성도들과 이웃하여 살던 우트족의 팀파노고스 부족도 굶주리기는 마찬가지였다. 성도들이 이곳에 들어오면서 이 지역의 천연자원이 과도하게 사용되었다. 특히 팀파노고스족의 식량원이던 낚시터의 물이 남용되었다. 성도들과 팀파노고스족은 서로 좋은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곧 팀파노고스족의 원주민 몇몇은 굶주림을 면하기 위해 성도들의 소를 약탈하기 시작했다.21 평화를 지켜야 한다는 간절함으로, 브리검은 인디언에게 복수하려 하지 말고 대신 그들에게 복음을 전해 달라며 성도들을 설득했다.22

엘리자의 이복동생인 올리버 헌팅턴은 때때로 우트족 가운데서 통역을 하고 정찰하는 일을 했다. 습격이 계속되자, 팀파노고스족의 족장인 리틀 치프는 습격자들 때문에 성도들이 자신들에게 악감정을 갖기 전에 그들을 응징해 달라며 올리버와 브리검에게 부탁했다. 이에 브리검은 습격을 중단시키기 위해 올리버와 무장 부대를 유타밸리로 보냈다.

부대는 리틀 치프의 도움으로 습격자 무리를 찾아내어 그들을 포위한 후 항복을 명했다. 그러나 그 무리는 항복을 거부하는 대신 부대를 공격했다. 소규모 전투가 벌어졌고 부대는 습격자 네 명을 사살했다.23

이 전투로 습격은 끝이 났지만, 굶주림과 궁핍은 여전히 지속되었다 엘리자는 4월 8일자 자신의 일지에 이렇게 적었다. “오늘 남은 밀가루를 모두 털어 빵을 만들었다. 수확을 하기 전까지는 밀가루를 더 구할 길은 없는 것 같다.” 이 무렵, 제일회장단은 엘리자의 남편인 아마사 라이먼에게 샌프란시스코로 선교 사업을 나가서 캘리포니아의 지부들을 감독하고 십일조를 모으도록 부름을 주었다. 캘리포니아의 성도들로 부대를 구성하여 가을이 되면 그들을 솔트레이크밸리로 인도하는 것이 그가 받은 임무였다.24

닷새 뒤, 너무도 가난했던 아마사는 가족들에게 밀가루 한 줌도 사주지 못한 채 길을 나섰다. 4월 19일, 엘리자와 그녀의 가족 일부는 요새를 나와 도시 구역의 천막과 우마차 몇 곳에 거처를 마련했다. 엘리자는 초의 심지를 만들어 팔아서 옥수수와 끼닛거리를 마련하여 라이먼의 대가족과 나누었다.25

다른 사람들도 그녀를 도와주었다. 엘리자의 동생이자 브리검 영의 아내인 에밀리는 언니 집에 빵이 떨어졌다는 소식을 남편에게 전한 뒤 밀가루 7킬로를 갖다주었다. 4월 25일에는 제인 매닝 제임스가 자기 집에 있던 밀가루 2킬로그램 중 절반을 덜어서 엘리자에게 가져왔다. 제인은 엘리자와 에밀리가 조셉 스미스와 복수결혼을 하고 나부 맨션에 함께 살던 시절에 알았던 사이였다.26

엘리자는 더 많은 심지를 만들고 밭을 경작할 계획을 세웠으며 자신의 부지에 유실수도 여러 그루 심었다. 5월까지도 분지는 계속 바람이 불고 눈보라가 휘몰아쳤다. 어느 날 엘리자가 어머니를 보러 간 사이 그녀의 천막이 완전히 불타 버렸다. 그러나 5월 말이 되자, 그녀는 성도들의 익어 가는 들판에서 희망의 이유를 찾았다.

엘리자는 자신의 일지에 이렇게 적었다. “밀 이삭을 보았다. 이 궁핍한 시기에 얼마나 큰 힘이 되는지 모른다.”27


1848년부터 1849년에 걸쳐 매서운 겨울을 보내는 내내, 루이자 프랫은 남편이 선교 사업 이후의 삶에 적응하느라 애쓰는 모습을 지켜보아야 했다. 그가 집을 떠나 있는 동안 교회 안에서는 많은 변화가 있었다. 성도들은 성전 엔다우먼트를 받았고 영원한 결혼과 승영의 교리를 받아들였으며, 하나님과 그리고 다른 성도들과도 성약을 통해 새로운 관계를 형성했다. 성도들 가운데 은밀히 시행되고 있는 복수결혼도 애디슨에게는 낯설기만 했다.28

때로 애디슨은 새롭게 밝혀진 원리들에 관하여 루이자와 의견이 갈리기도 했다. 루이자에게 익숙한 것들이 애디슨에게는 이상해 보였던 것이다. 애디슨은 밸리의 성도들이 뜨거운 음료와 담배에 대한 지혜의 말씀의 경고에 엄격히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 것도 마음에 걸렸다. 그래도 루이자는 남편이 집에 있어서 행복했다. 그는 가족과 함께 안식일 모임들에 참석했으며 그가 속한 칠십인 정원회의 회장으로 봉사했다.29

프랫 가족은 요새에서 겨울을 보냈다. 루이자의 여동생 부부인 캐롤라인과 조너선 크로스비도 따로 집을 마련할 때까지 그들과 함께 생활했다. 애디슨은 일을 해서 가족을 부양했고, 예비 선교사들에게 타히티어를 가르쳤다.30

봄이 되자 제일회장단과 십이사도 정원회는 애디슨과 그 가족에게 다른 열한 명의 선교사 및 여섯 가족과 함께 태평양 제도로 가라는 부름을 주었다. 그곳으로 가게 되어 신이 난 프랫 가족은 추수가 끝난 뒤에 떠날 수 있도록 채비를 시작했다. 7월 21일, 애디슨은 엔사인피크 꼭대기에서 엔다우먼트를 받았다. 엔사인피크는 교회의 지도자들이 성전이 없는 동안 엔다우먼트 의식을 집행하기 위해 성별한 장소였다. 그리고 애디슨 가족은 이제 자신들에게 필요 없는 물건과 재산을 정리하기 시작했다.31

그 무렵, 금을 찾기 위해 동부의 주들을 떠나온 수천 명의 인파가 캘리포니아로 가기 위해 앞다투어 로키산맥을 오르고 있었다. 얼마 안 가서 솔트레이크시티는 황금이 묻힌 땅으로 넘어가기 전에 숨을 돌리고 필요한 물품을 다시 챙기기에 안성맞춤인 장소가 되었다. 금을 찾는 사람들은 대부분 젊은 농부와 노동자, 상인들이었다. 그들 중 많은 사람들이 미대륙을 동에서 서로 횡단하는 것은 고사하고 고향을 떠나 멀리 벗어나 본 적도 없었다.32

그들이 솔트레이크시티에 들어오게 되면서, 사람들이 예상했던 것보다도 훨씬 더 빨리 히버 킴볼의 예언이 성취되었다.33 금을 좇는 사람들은 밀가루와 설탕, 온갖 식료품, 신발, 옷가지, 천, 도구들을 가지고 있었다. 황금을 찾는 사람들 중 다수가 신선한 채소, 더 가벼운 우마차, 짐을 나를 동물들이 절실했기 때문에 그들은 물물교환을 위해 요새에서 길을 멈췄다. 그들은 구하기 힘든 물건들을 성도들에게 싼값에 팔 때가 많았다. 때로는 가지고 다니기에 지친 나머지 물건들을 버리거나 나누어 주기도 했다.34

이들은 솔트레이크시티의 경제에 활기를 불어넣었지만 이곳을 떠나면서 솔트레이크와 캘리포니아 사이의 목초지를 황폐하게 만들어 버린 탓에, 그해 말경에는 육로 여행이 거의 불가능해지고 말았다. 또한 위험한 사람들이 여행자들을 공격한다는 말이 돌아서, 가족을 데리고 가기에 그 길은 안전하지 못했다.35 루이자는 그런 이야기에 아랑곳하지 않았지만, 브리검은 길을 떠나는 가족들의 안전이 우려스러웠다. 곧 교회의 지도자들은 루이자와 자녀들 없이 애디슨만 보내기로 결정을 내렸다.

애디슨의 가족들은 가슴이 찢어지는 듯했다. 프랜시스가 우겼다. “아버지도 그렇게 안전하진 않아요. 강도들은 가족과 함께 가는 사람보다는 혼자 가는 사람을 공격해서 소나 말을 빼앗으려 할 거예요!”

루이자는 “얘야, 안타깝지만 넌 강도들을 잘 모른단다.”라고 딸을 다독였다.

루이자는 복음은 희생을 필요로 함을 알았다. 누가 묻더라도, 그녀는 한 치의 망설임 없이 애디슨을 보낼 수 있다고 장담했다. 그러나 가족에게는 다시 만난 지 겨우 일 년밖에 되지 않은 상황에 또 헤어진다는 것이 견딜 수 없는 일이라고 그녀는 생각했다.36

브리검은 초지가 조금 더 회복되고 금을 찾는 사람들이 줄어드는 봄이 될 때까지, 애디슨의 선교 사업을 미루기로 계획했다. 그러나 그해 가을에 솔트레이크시티를 경유하던 우마차 행렬이 몰몬 대대의 퇴역 군인인 제퍼슨 헌트 대위를 고용했고, 제퍼슨은 남서쪽으로 난 인적 드문 길을 통해서 그들을 캘리포니아까지 안전히 안내하기로 했다. 이를 알게 된 브리검은 애디슨 외 두 명의 선교사에게 그들과 합류하여 헌트 대위를 보조하고 캘리포니아에 이르면 태평양 제도로 항해하도록 요청했다.37

루이자는 하늘도 땅도 모두 자신에게 등을 돌린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루이자와 애디슨은 서로에게 거의 말을 하지 않았다. 그녀는 홀로 있을 때 기도를 드리며 자신의 슬픔과 고통을 있는 그대로 하나님께 털어놓았다. “제 고통은 절대 끝나지 않는 것인가요?” 루이자는 울음을 삼키며 신음했다.38

애디슨이 밸리를 떠나던 날, 루이자와 엘런은 야영지까지 애디슨을 따라가서 하룻밤을 함께 보냈다. 아침이 되자 애디슨은 아내와 딸을 축복했고, 그런 뒤 서로 작별을 고했다. 루이자는 지난 몇 주 동안 이별을 두려워하고 있었지만, 요새로 돌아가면서는 마음속에 위안이 느껴졌다. 최근 얼마 동안에 비해 그녀의 마음은 훨씬 더 가벼웠다.3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