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 역사
23 조화로운 하나의 무리


“조화로운 하나의 무리”, 『성도들: 후기의 예수 그리스도 교회 이야기, 제2권, 그 어떤 신성하지 않은 손도, 1846~1893년』(2019) 제23장

제23장: “조화로운 하나의 무리”

제23장

조화로운 하나의 무리

철로 위의 망치와 못

수지 영은 병치레가 많은 아이였다. 아홉 살이 되던 1865년 봄에는 폐렴과 백일해 등 심각한 질환들을 앓기도 했고, 너무 빨리 달리거나 열심히 뛰놀 때면 숨을 쌕쌕거리곤 했다. 수지의 아버지 브리검 영은 그런 딸을 다정하게 끌어안고서 이렇게 살살 타이르곤 했다. “아가, 잠깐만 있어 보렴. 그렇게 서두르지 말고 천천히 숨을 쉬어 보자.”1

그러나 수지는 대부분 그 잠깐을 가만있질 못했다. 수지가 아버지의 여러 아내들, 그리고 그들이 낳은 대부분의 어린 자녀들과 함께 사는 집은 하루도 조용할 날이 없었다. 그들이 사는 기다란 이층집은 라이언 하우스라는 이름으로 불렸는데, 그 집의 바로 옆에는 수지 아버지의 사무실이 있었고, 서쪽으로 한 구획 떨어진 곳에는 솔트레이크시티의 성전 부지가 있었다. 라이언 하우스 2층에는 가족들이 쓰는 침실과 거실이 여러 개 있었다. 1층에는 몇 개의 침실이 있었고, 손님들이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가족이 함께 기도할 때 모이는 널찍한 응접실이 있었다. 지하에는 저장고들과 창고들, 세탁실, 주방, 그리고 온 가족이 함께 앉을 수 있는 널찍한 식당이 있었다.

이 집의 전면 발코니에는 항상 거리를 내려다보고 있는 듯한 장엄한 사자상이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2

한때 라이언 하우스에는 수지의 쉰다섯 남매 중 서른 명가량이 함께 살았고, 인도에서 온 여자아이인 이나 메이버트 같은 고아들이 함께 산 적도 있었다. 이웃에 사는 히버 그랜트라는 소년은 라이언 하우스에서 수지의 남자 형제들과 자주 어울려 놀았으며, 영 가족의 가족 기도 자리에 함께하기도 했다. 히버는 브리검 영의 보좌였던 제디다이아 그랜트와 레이철 아이빈스의 외아들이었다. 겨울이면 히버는 브리검의 썰매를 가져다 얼음지치기를 하는 걸 좋아했다.3

영 가족은 엄격한 일정에 따라 식사를 하고, 자녀들을 가르치고, 기도를 하며 항상 질서정연한 생활을 하려 노력했다. 그러나 그것도 난간에서 미끄럼을 타고, 계단을 뛰어오르고, 숨바꼭질하며 노는 수지와 남매들을 막을 수는 없었다.4 어린 수지는 이렇게 많은 사람이 한 가족으로 생활하고 아버지가 여남은 명 이상의 아내를 두는 것을 지극히 평범한 일로 여겼다. 사실 수지의 가족은 복수결혼으로 맺어진 가정들 중에서도 일반적인 유형이 아니었다. 보통 그런 가정은 이들에 비해 규모가 훨씬 작았다. 수지의 아버지와 달리 복수결혼을 한 대부분의 교회 남성들은 아내가 두 명을 넘지 않았다.5

수지의 생모인 루시 비글로 영은 헌신적인 어머니였으며, 넘치는 사랑과 보살핌으로 수지를 돌보았다. 브리검 영의 또 다른 아내들인 지나 헌팅턴 영과 에밀리 파트리지 영도 잠시 라이언 하우스에 산 적이 있는데, 이들은 수지에게 두 번째 어머니와도 같았다. 브리검의 다른 아내인 클라라 데커 영도 마찬가지였다. 클라라는 수지와 수지의 자매들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조언을 하며 밤늦도록 함께 시간을 보내곤 했다.6

브리검의 아내 중 한 명이자 시인인 엘리자 스노우는 여가 시간에 독서를 즐겼는데, 그녀는 막 싹트기 시작한 수지의 창의력을 자극해 주었다. 엘리자는 지식이 풍부한 달변가였으며 자기 수양이 매우 잘 된 사람이었다. 엘리자가 사용하는 침실과 거실, 책상은 깔끔하게 잘 정돈돼 있었다. 더러 그녀를 쌀쌀맞고 냉담한 사람으로 보는 이들도 있었지만, 수지는 엘리자가 친절하고 다정하며 병자를 돌볼 때는 더더욱 그러하다는 것을 알았다.7

라이언 하우스가 늘 평화롭기만 했던 것은 아니지만, 가족들은 그들의 생활 방식이 잘 유지되도록 노력했다. 브리검은 복수결혼을 세상의 관습과 비교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는 성도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복수결혼은 하나님께서 명하신 것입니다. 주님은 왕의 민족과 거룩한 신권, 당신이 소유하고 축복하실 수 있는 민족을 일으킨다는 분명한 목적을 위해 이것을 제정하셨습니다.”8

그는 또한 이렇게 간증했다. “제 신앙 생활 중 시련을 꼽는다면, 그것은 조셉 스미스가 제게 이 교리를 밝혔을 때였습니다. 저는 멈추지 않고 기도하며 신앙을 행사해야 했고, 주님께서는 그것이 참되다고 제게 계시해 주셨습니다. 저는 그렇게 확신을 얻었습니다.”9

많은 자녀를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양육하며 그가 느꼈던 기쁨은 바로 그러한 신앙에서 맺어진 결실이었다.10 저녁이면 그는 가족 기도를 하기 위해 종을 울려 온 가족을 불러 모았다. 브리검은 진심 어린 사랑을 담은 부드러운 음성으로 주님께 자주 기도했다. “이 평화로운 분지에 저희 가정들을 주시고, 당신의 백성들을 위해 이 산속의 요새를 집합 장소로 보존해 두셨음에 감사드립니다. 궁핍한 자와 가난한 자, 병든 자와 고통받는 자를 축복하소서. 애통해하는 자의 마음을 위로하소서. 나이 든 자를 도와주시고 나이 어린 자를 인도하소서.”11

브리검은 성도들의 복지로 자주 깊은 생각에 잠겼다. 시대가 변하고 있었으며, 미국을 횡단하는 철도도 건설되는 중이었다.12 브리검은 철도가 생기면 선교사와 이민자들이 힘을 덜 들이고도 더 빠르고 저렴하게 유타를 오갈 수 있으리라 확신하며 철도 건설 사업에 투자했다. 그러나 철도가 준주에 더 큰 유혹을 불러오리라는 것도 알았기에, 그는 철도가 들어올 때를 대비해서 성도들을 영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준비시키고 싶어 했다.13

또한, 브리검은 자신의 가족들을 굳건히 하고 싶었다. 그해 봄에 수지와 남매들은 아버지가 자신들의 가정 교사로 칼 메이저를 고용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수지의 남자 형제 중에는 메이저 선생의 지도에 성을 내며 수업을 그만둔 아이들도 있었지만, 수지는 메이저의 수업에 흠뻑 빠져들었다.

메이저가 가르칠 때면 마치 책 속의 내용이 생생하게 눈앞에 펼쳐지는 듯했는데, 특히 경전을 가르칠 때 그러했다. 메이저 선생은 영 집안의 자녀들에게 질문을 던지고 그들이 문제에 대한 해결법을 찾도록 독려했다. 수지는 언제나 새로운 것을 배우는 데 열의를 보였으나 공부 중에 실수할 때면 좌절감에 빠지기도 했다.14

그러나 인내심이 많은 메이저 선생은 수지에게 이런 말을 해 주었다. “실수할 용기가 있는 사람만이 언제나 가치 있는 교훈과 진리를 배우는 법이란다.”15


그해 봄에 요한 도리우스는 에프라임 요새에서 신발 만드는 일을 하고 있었다. 요한과 그의 형 칼이 스칸디나비아 선교부에서 집으로 돌아온 지도 이제 2년이 되었다. 덴마크를 떠나기 전에 요한과 칼은 어머니와 함께 시온으로 가고 싶었으나 아네 소피의 재혼한 남편이 코펜하겐을 떠나고 싶지 않아 했으므로 그들의 어머니는 덴마크에 머무르기로 결정을 내렸다. 두 형제는 실망스러운 마음으로 며칠 뒤에 300명의 성도들과 함께 덴마크를 출발했다.

요한은 유타로 돌아온 이후 돈을 모으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요한이 없는 동안 그의 아내 카렌은 스프링타운에 있는 그들 소유의 빈 땅에 방 두 칸짜리 집을 짓고, 작물을 심어 길렀으며, 우리 가득 가축을 길렀다. 그렇게 카렌은 남편과 자녀들을 데리고 새집에서 살아갈 기쁜 나날을 고대했지만, 요한은 집에 돌아온 후 곧 승인을 받아 구닐드 토르게센이라는 노르웨이 개종자를 두 번째 아내로 맞이했다. 이 변화는 그녀에게 큰 시련이었다. 하지만 카렌은 주님을 믿는 신앙으로 이 상황을 버텨 나갔다. 가족이 늘면서 집이 비좁아지자 이들은 일 년이 못 되어 에프라임에 있는 큰 도시 구역으로 이사했다.16

그 무렵, 샌피트밸리의 성도들과 우트족 인디언은 갈등이 깊어지고 있었다. 유타로 집합하는 이민자 수가 늘면서 마을은 빠른 속도로 성장했고, 새로운 정착촌이 형성되면서 우트족이 오래전부터 이용해 온 식량과 식수 공급원이 차단되는 경우가 많아졌다. 정착민 중에는 유타 중심부에서 넓은 초지를 차지하고 대규모로 소 떼를 기르는 사람들도 있어서 우트족 인디언들은 그 지역에서 더 멀리 밀려났다.17

이러한 문제를 알게 된 브리검 영은 인디언에게 식량을 나누어 주고 그들을 친절하게 대하도록 성도들에게 강권했다. 그는 교회의 어느 지도자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정착한 땅은 그들의 땅이었습니다. 그러한 탓에 우리는 그들의 사냥과 낚시에 방해가 되고 그들에게 물질적인 피해를 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최대한 친절을 베풀고 그들을 속박해서는 안 되며 인내와 관용으로 그들을 대해야 합니다.”18

브리검은 성도들이 더 큰 연민으로 인디언을 대하도록 이끌고 싶었지만 일부 정착촌에는 이미 식량이 바닥나 있었고 기꺼이 식량을 나누려는 성도는 드물었다. 정착민들이 식량을 나누지 않으려 하자 우트족 인디언들은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성도들의 소를 자주 습격하기도 했다.19

1865년 봄, 샌피트밸리의 성도들과 우트족간의 평화 회담이 결렬된 후에는 급기야 폭력 사태가 터지고 말았다. 몇 주가 지나지 않아서 블랙 호크란 남자가 이끄는 우트족 무리가 소를 습격하고 정착민을 살해하기 시작했다.20 계절이 봄에서 여름으로 바뀌는 동안 갈등의 골은 더욱 깊어갔다. 6월에 브리검과 미국 정부는 우트족 지도자들을 설득하여 정부가 인디언들이 생활하도록 따로 마련한 인디언 보호 구역으로 그들의 부족을 이주시키려 시도했으나 정착촌에 대한 인디언들의 공격은 그치지 않고 계속되었다. 이에 브리검은 민병대에 우트족의 여자와 어린이, 폭력에 가담하지 않은 남자들에게는 해가 가지 않는 선에서 습격자들을 저지하도록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양측은 더욱 맹렬히 서로를 공격했다.21

10월 17일 오후, 요한 도리우스는 블랙 호크 일당이 에프라임 요새 바깥의 들판에서 덴마크인 부부와 그들의 갓 난 아들, 그리고 젊은 스웨덴 여자 한 명을 해치는 현장을 공포에 떨며 목격했다. 일당이 정착촌의 소를 습격하기 위해 말을 타고 떠나자, 요한과 몇몇 성도들은 쏜살같이 들판으로 달려나갔다. 덴마크인 부부는 이미 숨져 있었고, 스웨덴 여자도 가망이 없어 보였지만, 어떻게 된 일인지 부부의 아들만은 무사했다. 요한은 아기를 안아 들고 마을로 돌아갔다.22

민병대가 블랙 호크 일당을 쫓는 동안, 교회의 지도자들은 샌피트밸리와 그 인근 지역의 성도들에게 신중하고도 방어적으로 행동하도록 지시했다. 그러나 그들 중 더 직접적으로 갈등의 영향을 받은 성도들은 두려움과 불신에 휩싸여 지도자들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았다.23

에프라임 요새가 공격받은 지 반 년이 지난 후, 서클빌이라는 가난하고 작은 마을의 교회 회원들이 평화롭게 살아가던 파이우트족 인디언들을 스무 명가량 생포하는 일이 벌어졌다. 그들은 파이우트족 인디언들을 블랙 호크의 첩자로 의심했다. 정착민들은 인디언 남자들을 결박한 후 마을의 집회소에 가두고 감시했으며, 여자들과 어린아이들은 빈 지하 저장고에 가두었다. 그러나 파이우트족 남자들 몇몇이 탈출을 시도하자 정착민들은 그들을 총으로 쏜 뒤 남은 포로들을 한 명씩 살해했다. 여자들과 어느 정도 자란 어린이들도 예외는 아니었다.24

브리검은 그들의 폭력 행위를 강력히 규탄했다. “무고한 인디언에게 총을 쏜 사람은 살인죄를 저지른 것입니다.”25 브리검은 분쟁의 책임을 우트족이 아니라 성도들에게 돌렸다. “이스라엘의 장로들이 마땅히 해야 할 방식으로 레이맨인들을 대했더라면, 우리는 절대 그들과 문제를 겪지 않았을 것입니다.”26

유타 중심부에 널리 퍼진 성도들과 인디언 사이의 분쟁은 일 년 더 지속되었다. 작은 마을의 성도들은 더 큰 마을로 옮겨 갔고, 정착민들은 소를 지키기 위해 보초를 세웠다. 1867년 7월에 인디언들의 대규모 습격이 있었으나 성도들은 이를 진압했고, 블랙 호크와 두 명의 족장은 정부 당국에 투항했다. 아직 일부 우트족들이 성도들의 소를 습격하기도 했으나 사실상 갈등은 이것으로 막을 내렸다.27


그로부터 몇 달 후인 10월 6일, 성도들은 성전 부지 바로 서쪽에 있는 널찍한 새 회당에서 처음으로 연차 대회를 열었다. 1863년에 제일회장단은 성전 구역에 더 큰 집회 장소를 건설한다는 계획을 발표한 바 있었다. 타원형으로 된 이 건물에는 거북이 등딱지 모양의 커다란 반구형 지붕을 얹고 있었고,그 그 지붕을 떠받치기 위해 사암으로 된 마흔네 개의 기둥이 세워졌다. 지붕을 설계한 사람은 내로라하는 교량 건축가인 헨리 그로우였는데, 그는 목재로 격자형 트러스를 아치 형태로 짜 지붕을 만들었으며, 나무못과 가죽끈을 이용해 그 뼈대들을 단단히 연결했다.(트러스: 여러 개의 뼈대 재료를 얽어 짜서 지붕이나 교량 따위의 도리로 쓰는 구조물—옮긴이) 혁신적인 설계 방식을 따른 이 건물에는 거대한 천장을 받치는 내부 기둥이 없었으므로 가리는 것이 없어서 대회에 참석한 성도들은 연단의 연사들을 잘 볼 수 있었다.28

그해 가을, 브리검 영은 철도 건설의 진척 상황을 계속 주시하고 있었다. 1865년 봄에 북부의 승리로 남북 전쟁이 종전되고 미국이 새로운 기회를 찾아 서부로 눈을 돌리자, 철도 건설 프로젝트는 새로이 탄력을 받았다. 브리검은 한 철도 회사의 이사회에서 일했지만, 그가 이 사업을 후원한다고 해서 준주와 준주의 경제에 초래할 변화에 대한 그의 두려움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29

교리와 성약에는 “하나”가 되고, 경제적인 짐을 나누어 지며, “해의 영광의 세계 아래에 있는 다른 모든 피조물 위에 자립”하도록 백성들에게 가르치신 주님의 말씀이 나와 있었다.30 여러 해 동안 브리검과 지도자들은 성도들이 서로 단합하고 연합할 수 있도록 다양한 노력을 기울였다. 데저렛 알파벳이 만들어진 것도 그런 노력의 일환이었다. 데저렛 알파벳은 사람들이 영어의 철자법에서 어렵게 느끼는 점을 바로잡고, 젊은 성도들에게 읽는 법을 가르치고, 이민자들이 영어를 빠르게 배워서 유타를 편안하게 느끼도록 돕고자 고안된 표음 문자였다.31

또한, 브리검은 시온이 경제적으로 자립할 수 있도록 성도들을 대상으로 협동조합 운동을 장려하기 시작했다. 설교를 할 때면 그는 성도들에게 각자 먹을 식량을 재배하고, 집에서 짠 천으로 옷을 만들고, 방앗간과 공장, 주물 공장을 만들도록 자주 독려했다. 또한, 그는 준주로 들어와서 유타에서는 구하기 힘든 동부의 제품을 팔아 이윤을 남기고 시온의 대의 대신 자기 배를 불리는 교회 안팎의 상인들을 비판했다.32

브리검은 철도가 들어오면 더 많은 상인과 제품이 유입되어 성도들의 가내 공업과 경쟁을 벌이게 되리라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그는 교회의 회원들에게 향토 산업을 지지하고 외부 시장으로부터 경제적으로 독립할 길을 찾도록 간곡히 요청했다.33 브리검은 성도들의 경제적인 구원이 영적인 구원만큼 중요한 문제라고 여겼다. 시온의 경제를 공격하는 것은 시온을 공격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또한, 그는 교회에 마련된 제도를 통해 성도들을 강화할 길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1849년에는 스코틀랜드 성도인 리처드 밸런타인이 솔트레이크밸리에서 최초의 주일학교를 조직했다. 그 후로 많은 와드가 자체적으로 주일학교를 운영하기 시작했는데, 그 교재와 수업 자료는 서로 다른 경우가 많았다. 그 무렵에 조지 큐 캐넌은 Juvenile Instructor『청소년 교사』라는 잡지를 창간했다. 삽화가 들어간 이 잡지에는 교사와 학생들이 저렴한 비용으로 주일학교에서 사용할 수 있도록 복음 공과들이 수록되었다. 1867년 11월, 브리검과 교회의 지도자들은 교회 전역의 와드와 지부가 자체적으로 주일학교를 설립하고 운영하도록 독려하기 위해 조지를 주일학교 연합 회장으로 선출했다.34

주일학교의 수업은 대부분 기본적으로 교회의 어린 소년 소녀들을 대상으로 했다. 브리검은 교회의 성인들을 위해서도 준주의 비교적 큰 마을마다 선지자 학교를 조직하기로 결정했다. 약 35년 전에 주님께서는 이 신생 교회에서 생활하는 신권 지도자들의 단합과 신앙을 키우고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형제들을 준비시킬 목적으로 커틀랜드와 미주리에 선지자 학교를 조직하라는 명을 조셉 스미스에게 주신 바가 있었다.35

브리검은 새로 조직된 선지자 학교를 통해 교회의 형제들이 영적으로 더 단합하고 헌신하기를 바랐다. 또한, 선지자 학교가 그들이 경제적으로 협력하고 성약을 지키며 철도가 들어오기 전에 시온을 건설해야 하는 중요성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다고 믿었다.

선지자 학교는 1867년 12월 2일에 솔트레이크시티에서 문을 열었다. 그 후로 몇 주 동안 브리검은 외부의 상인이 아닌 성도들을 이롭게 할 방식으로 사업을 운영하도록 선지자 학교의 일원들을 독려하며 이렇게 가르쳤다. “우리는 하나가 되어 서로 이해해야 합니다.” 그리고 시온의 필요와 관계없이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내키는 대로 물건을 사는 회원들을 나무라며 이렇게 말했다.

“그들은 이 왕국에 있을 필요가 없습니다.”36


솔트레이크시티에 선지자 학교가 조직된 지 엿새가 지난 후, 브리검은 감독들과 함께 각 와드에 상호부조회를 재조직하는 문제를 논의했다. 상호부조회는 10년 전 교회가 미국 군대와 위협적인 갈등을 겪는 동안 대부분 해체된 터였다. 브리검은 각 와드의 상호부조회가 가장 궁핍한 회원들을 도움으로써 성도들이 하나로 더욱 굳게 뭉칠 수 있기를 바랐다.37

감독들은 상호부조회의 목적을 잘 알지 못했으므로, 브리검은 엘리자 스노우에게 감독들이 각 와드에서 상호부조회를 조직할 수 있도록 그들을 도와주라고 부탁했다. 엘리자는 이 일에 동참하는 것을 영예롭게 여겼다. 그녀는 그 누구보다도 상호부조회의 목적에 대한 이해가 깊었다. 나부의 여성 상호부조회 서기였던 엘리자는 세세히 모임의 회의록을 작성하고 조셉 스미스가 여성들에게 전한 가르침을 기록하여 책으로 보관하고 있었다.

엘리자는 감독들과 함께 일하는 것을 좋아했고, 그들은 엘리자의 기여에 고마워했다.38 이듬해 봄에 브리검은 엘리자에게 할 일이 또 한 가지 있다는 말을 꺼냈다. 그러자 엘리자는 그것이 무엇인지 묻지 않은 채 그저 이렇게 대답했다. “해낼 수 있도록 노력할게요.”

브리검이 엘리자에게 말했다. “당신이 자매들을 가르쳤으면 해요.” 브리검은 시온을 건설하는 과정에서 상호부조회가 해야 할 역할을 교회의 여성들에게 이해시키려면 엘리자의 도움이 필요하리라고 생각했다.

엘리자는 가슴이 뛰는 것을 느꼈다. 교회의 여성들을 가르치는 것은 막대한 임무였다. 보통으로 교회의 여성들은 간증 모임을 제외한 공적인 모임에서는 말씀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 엘리자는 준주의 모든 정착촌을 방문하여 각 와드와 지부의 상호부조회를 일일이 찾아가 공적인 자리에서 말씀을 전해야 했다.39

엘리자는 브리검을 만난 직후에 『데저렛 뉴스』에 기고했다. 기사에서 엘리자는 독자들에게 이런 질문을 던졌다. “여성 상호부조회의 목적은 무엇일까? 나는 선한 일을 하는 것이라고 답하고 싶다. 즉, 우리는 궁핍한 사람을 구제하는 데 그치지 않고 영혼들을 구원하기 위해 우리가 가진 모든 역량을 발휘해서 선한 일을 해야 한다.”

그녀는 나부 상호부조회의 기록을 이용하여, 여성들에게 한 발짝 앞으로 나아가 여성들에게 주어진 의무를 받아들이도록 촉구하며 이렇게 적었다. “이스라엘의 딸과 어머니들 중 현재 자신의 활동 영역에서 조금이라도 제약을 느끼는 사람이 있다면, 이제 그들은 선을 행하기 위해 모든 힘과 능력을 발휘할 풍성한 기회를 찾게 될 것이다.”40

1868년 4월 30일 오후, 엘리자는 솔트레이크시티 제13와드의 여성 상호부조회를 방문했다. 그 자리에는 약 스물다섯 명이 참석했는데, 그중 지나 헌팅턴 영, 에밀리 파트리지 영, 벳시바 스미스는 모두 나부의 상호부조회에서 일한 경험이 있는 자매들이었다. 이 와드의 상호부조회 회장으로 새로 부름받은 레이철 그랜트는 두 보좌와 함께 모임을 진행했는데, 그녀의 두 보좌인 애니 가드비, 마거릿 미첼은 쌍둥이 자매였다.41

이제 47세가 된 레이철 그랜트는 1840년대 초에 나부에서 살았지만, 최초의 상호부조회에 소속되지는 않았다. 그녀는 복수결혼에 대해 알게 된 후 신앙의 큰 시련을 겪었고, 조셉 스미스가 죽은 뒤 자신의 가족들과 함께 살기 위해 동부로 돌아갔었다. 그러나 선교사와 교회의 회원들과는 계속 연락을 주고받았으며, 많은 기도와 성찰 끝에 1853년에 유타로 가기로 결정했었다. 그리고 2년 뒤, 레이철은 복수결혼을 통해 제디다이아 그랜트와 결혼하여 히버를 낳았다. 히버는 아버지가 때 이른 죽음을 맞기 아흐레 전에 태어났다. 그녀는 재봉사 일을 하며 변변찮은 수입으로 히버를 길렀다.42

상호부조회 모임이 시작된 후, 레이철은 엘리자에게 여성들에게 가르침을 전해 달라고 부탁했다. 엘리자는 이렇게 말했다. “선지자 조셉 스미스는 여성 상호부조회가 조직되어 훌륭한 결실이 나오기를 기대했습니다. 그는 여성들이 병들고 고통받는 이들을 방문함으로써 많은 선한 일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었습니다.” 엘리자는 정기적으로 모임을 열고, 선한 일을 하며, 서로 보살피도록 여성들을 격려했다.

그녀는 이렇게 설명했다. “상호부조회는 아이를 돌보는 어머니 같아야 합니다. 어머니는 아이를 멀찍이 떨어뜨려 놓은 채 안아 주는 것이 아니라, 아이를 가까이 데려와 가슴에 품으며 단합과 사랑의 필요성을 보여 줍니다.”

엘리자가 말씀을 마치자, 레이철은 여성들이 자랑스럽다고 말하며 그들이 이렇게 함께 모임으로써 힘을 얻길 바란다고 전했다. 그런 뒤 엘리자는 입을 열라며 여성들을 독려했다. 그녀는 여성들이 서로 이야기를 나눔으로써 힘을 얻을 수 있다고 간증하며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수줍은 감정을 극복하지 못하고 격려와 결심의 말을 입안에만 간직하고 있을 때마다 대적은 기뻐합니다. 그런 소심한 마음을 내려놓을 때, 우리는 곧 확신을 얻을 것입니다.”

그녀는 이렇게 약속했다. “여성이 넓은 곳으로 나가서 책임 있는 지위에서 행동을 해야 할 때가 올 것입니다.”43


와드와 지부들에 상호부조회가 조직되어 가는 동안, 엘리자는 나부 상호부조회를 함께 창립했던 세라 킴볼을 만나 상호부조회 지도자들의 임무에 대한 골자를 잡았다.44 그런 후 그녀는 준주 곳곳의 상호부조회를 방문하기 시작했다. 엘리자는 여성들에게 그들의 의무에 대해 가르칠 때마다 나부 상호부조회의 회의록을 자주 이용했다. 엘리자는 이렇게 말했다. “그리스도 교회의 조직이 완전한 형태로 갖추어진 경륜의 시대라면 언제나 교회 조직에 이 조직이 있습니다.” 엘리자는 상호부조회를 직접 방문할 수 없을 때는 자매들에게 편지를 썼다.45

한편, 브리검은 선지자 학교의 분교를 더 조직했다. 그는 선지자 학교의 일원들에게 모든 종류의 지식을 공부하고 한마음 한뜻이 되도록 권고했다.46 1868년 4월, 브리검은 학교를 설립하기 위해 프로보로 갔다. 그는 소란스럽고 다루기 힘든 마을을 교화할 목적으로 에이브러햄 스무트, 존 테일러, 윌포드 우드럽, 조셉 에프 스미스 등을 그곳에 보냈었고, 에이브러햄에게 이 학교의 관리를 맡겼었다. 그곳에 있는 동안 브리검과 에이브러햄은 자원과 이윤이 성도들 안에서 운용되도록 성도들 사이의 거래를 우선시할 것을 프로보 학교의 일원들에게 촉구했다.

에이브러햄은 말했다. “모든 회원은 영향력을 미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 각각의 영향력을 올바른 방법으로 사용해야 합니다.”47

몇 주 뒤, 브리검의 보좌인 히버 킴볼이 프로보에서 마차 사고를 당했다. 마차에서 떨어져 땅에 세게 머리를 부딪힌 그는 한참 동안 찬 공기에 노출된 채 그대로 쓰러져 있었고, 한참이 지나서야 한 친구에게 발견되었다. 브리검은 자신의 가장 오랜 친구 중 하나인 히버가 상해에서 회복될 수 있기를 바랐으나 히버는 6월 초에 뇌졸중을 일으킨 후 한 달이 못 되어 가족들 곁에서 생을 마감했다.

이는 그의 아내 빌리트가 죽은 지 8개월 만의 일이었다. 히버는 아내의 임종을 지키며 “나도 곧 아내를 따라갈 겁니다.”라고 예견한 적이 있었다. 브리검은 히버의 장례식에서 자신의 친구이자 보좌인 히버의 의로움에 대해 짧게 감사를 표했다.

“그는 이 세상에 살았던 사람 중 그 누구 못지않게 진실한 사람이었습니다.”48


히버가 세상을 떠날 무렵, 대륙 횡단 철도의 완공을 위해 철도 건설 노동자들이 몰려들고 있었다. 이 노동자들은 중국 이민자와 과거에 노예였던 사람들, 그리고 남북 전쟁 참전 용사들이 대다수를 이루고 있었다. 8월에 브리검 영은 교회의 형제들에게 공사를 돕도록 독려했다. 브리검은 두 개의 철도가 그레이트솔트레이크 호수 북쪽에서 하나로 이어지면, 솔트레이크시티를 지나 유타 남부 곳곳을 연결하는 철도도 건설하고 싶었다. 그렇게만 되면 정착촌 간에 이동이나 성전 공사에 쓰일 석재 운반이 빨라질 수 있었다.49

그러나 브리검은 가족 기도를 마친 어느 날 밤에 몇몇 아내와 친구들, 큰 아이들 앞에서 철도에 대한 불안감을 내비쳤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세상을 떠났지만, 세상은 우리를 향해 다가오고 있어요.” 주일학교와 선지자 학교, 상호부조회는 성도들을 지원하고 강화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와 그의 세대는 앞으로 다가올 것들에 대비해 과연 어린 세대들을 충분히 준비시킨 것일까?

그는 말했다. “어린 세대가 겪을 시련들은 그 아버지와 어머니들이 겪었던 시련과 같지 않을 겁니다. 그들은 죄로 가득한 세상의 교만과 어리석음, 쾌락으로 시험받을 테지요.” 젊은 세대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신앙을 기르도록 자신의 세대가 돕지 않는다면 세상의 유혹이 그들을 길 밖으로 끌어내 버릴 수도 있을 것이었다.50

그러나 브리검은 결국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계속해서 젊은이를 비롯한 하나님의 백성을 단결시키고 보호하리라고 믿었다.

그는 1869년 초에 다음과 같이 자신의 생각을 전했다. “[회복된 복음은] 세상 끝까지 복음을 가르칠 교사들을 보냈고, 하늘 아래 거의 모든 언어와 신념에 속한 백성들, 그리고 가장 다양한 교육과 가장 반대되는 전통을 지닌 백성들을 모아 조화로운 하나의 무리로 뭉치게 했습니다.

서로 다른 다수의 사람들을 모아서 그들을 행복하게 하고, 만족하게 하며, 하나 되게 하는 신조의 내면에는 다른 많은 사람은 대부분 알지 못하는 힘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권능입니다.”51


1869년 3월, 오그던 마을 주민들이 철도의 선로공들을 보기 위해 높은 언덕으로 몰려들었다. 철도의 침목과 선로의 부분 부분이 하나씩 연결된 끝에 마침내 준주의 중심부까지 철도가 들어온 것이다.(침목: 선로 아래에 까는 나무로 된 토막—옮긴이) 얼마 후면 기차들이 도착하며 검은 연기와 잿빛 증기를 하늘로 내뿜을 것이었다.52

몇 달 뒤, 브리검은 남쪽의 여러 정착촌을 방문하여 성도들을 만났다. 그가 방문한 많은 마을들에는 이제 주일학교와 선지자 학교, 상호부조회가 조직되어 있었다. 또한, 성도들은 브리검의 요청에 따라 경제적인 면에서 성도들 사이에 경쟁이 아닌 협력이 증진되도록 “협동조합”이라고 하는 새로운 상점들을 열고 있었다. 브리검은 모든 마을에 협동조합 상점이 있어서 성도들이 기본적으로 필요한 것들을 공정한 가격에 살 수 있기를 바랐다.53

5월 초에 브리검은 유타 중심부의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철저히 지키며 생활할 것을 권고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이 분지에 산다는 것만으로 하나님의 성도라는 증거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이나 사람들 앞에 자신이 성도임을 증명하고 싶다면, 그 누구도 아닌 하나님을 위해 살아야 합니다.”54

이튿날인 1869년 5월 10일, 동쪽에서 출발한 철도와 서쪽에서 출발한 철도가 마침내 오그던 서쪽의 골짜기에서 만났다. 철도 회사들은 선로의 침목을 고정하기 위해 마지막 남은 못들을 박을 때, 전신선들을 연결한 망치를 사용했다. 망치가 못을 두드릴 때마다 전신선을 통해 솔트레이크시티와 미국 전역의 도시로 전기 신호가 흘러가면서, 이제 철도가 미국의 대서양 해안과 태평양 해안을 하나로 연결했음을 알렸다.55

솔트레이크시티의 성도들은 성전 구역에 새로 지은 태버내클에서 이 일을 축하했다. 그날 저녁, 모든 관공서와 건물들은 운영 시간 이후로도 오래도록 불을 끄지 않고 도시를 밝혔다. 성도들은 마을 북쪽 언덕에서 몇 킬로미터 밖에서도 보일 만큼 큰 모닥불을 피웠다.5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