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 역사
33 폭풍이 지나갈 때까지


“폭풍이 지나갈 때까지”, 『성도들: 후기의 예수 그리스도 교회 이야기, 제2권, 그 어떤 신성하지 않은 손도, 1846~1893년』(2020) 제33장

제33장: “폭풍이 지나갈 때까지”

제33장

폭풍이 지나갈 때까지

바다에 떠가는 증기선

1882년 성탄절을 하루 앞둔 날, 마오리족의 족장인 하레 테이마나는 뉴질랜드 케임브리지 근처 자신의 마을 옆에 있는 절벽 끄트머리에 섰다. 저 아래로, 결연히 벼랑을 오르는 한 남자가 보였다. 길을 이용하면 더 쉬울 텐데, 저 방문자는 왜 절벽을 통해 마을로 오려는 것일까? 왜 그렇게 서둘러 이곳에 닿으려는 것일까? 긴히 할 말이라도 있는 것일까?

절벽을 오르는 그 방문자를 지켜보던 하레는 자신이 그를 알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몇 달 전, 어느 날 밤에 사도 베드로가 흰옷을 입고 하레의 방에 나타난 일이 있었다. 그는 하레에게 한 남자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상에 계실 때 가르치셨던 것과 똑같은 복음을 가지고 마오리 사람들을 찾아오리라고 말했다. 그리고 베드로는 하레가 그 사람을 보면 알아볼 수 있으리라고 했다.1

개신교와 가톨릭 선교사들은 1850년대까지 마오리 인구의 대부분을 기독교로 개종시켰고, 그래서 하레는 고대 그리스도의 교회에서 베드로가 맡았던 임무를 익히 알고 있었다. 또한, 그는 시현과 계시가 존재한다고 믿었다. 마오리족은 하나님께 직접 인도받기 위해 자신들의 matakite[마타키테], 즉 선견자에게 의지했다. 마타키테와 부족 및 가문의 족장들은 기독교로 개종한 후에도 자신의 부족이나 가문을 위해 계속 시현을 보고 신성한 지침을 받았다.2

사실 일 년 전에 마오리족의 지도자들은 존경받는 마타키테인 파오라 테 포탕아로아에게 마오리족 사람들이 어느 교회에 속하는 것이 좋을지 물은 적이 있었다. 파오라는 사흘간 금식하고 기도한 후, 그들이 들어갈 교회는 아직 그곳에 들어오지 않았다고 대답했다. 그는 그들이 속해야 할 교회가 1882년이나 1883년 즈음에 그곳에 들어오리라고 말했다.3

하레는 자신이 본 시현에서 베드로가 말한 사람이 바로 지금 저 절벽을 오르고 있는 남자임을 깨닫고, 어서 그가 전할 말을 듣고 싶었다. 하지만 절벽을 올라 온 남자는 마을에 당도했을 때 기진맥진한 상태였고, 하레는 그가 숨을 고르도록 기다려야 했다. 마침내 입을 연 그는 마오리어로 말을 했다. 윌리엄 맥도넬이라고 하는 그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 후기 성도 교회의 선교사라고 했다. 그는 하레에게 종교적인 내용이 담긴 소책자 몇 부를 건네며, 그리스도께서 살아 계셨을 때 가르치셨던 복음이 거기에 담겨 있다고 간증했다. 그 선교사는 또한 그리스도께서 베드로에게 당신이 승천하신 후에 복음을 선포하도록 위임하신 것도 언급했다.4

하레는 말을 더 듣고 싶었지만, 윌리엄은 길을 따라 마을로 출발했던 자신의 두 동반자를 빨리 찾고 싶어 했다. 윌리엄이 자리를 나서려는데 하레가 그의 외투 깃을 붙잡으며 말했다. “지금 여기서 복음에 대한 모든 것을 내게 말해 주시오.”

윌리엄은 자신이 아는 모든 것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말을 듣는 동안 하레는 윌리엄의 외투 깃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15분이 지났을 무렵, 윌리엄은 동반자들을 발견했다. 선교부 회장인 윌리엄 브롬리와 토머스 콕스는 큰길을 통해 마을에 들어와 있었다. 그는 허공에 대고 모자를 높이 흔들며 동반자들의 주의를 끌었고, 하레는 마침내 그의 옷깃을 놓아 주었다. 그런 뒤 그들은 윌리엄의 통역을 빌려, 그 지역의 마오리족 사람들을 만나고 싶다는 뜻을 하레에게 전했다.

하레는 그들에게 그날 저녁에 다시 오라고 하며 이렇게 말했다. “내 집에서 모임을 열어도 좋소.”5


그날 저녁, 윌리엄 맥도넬은 브롬리 회장과 토머스 콕스와 함께 하레 테이마나의 집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아일랜드에서 태어난 윌리엄은 뉴질랜드가 좋은 나라라고 하는 어느 선장의 말을 듣고 뉴질랜드로 이주해 온 이민자였다. 나중에 그는 마오리족이 사는 곳에서 몇 년을 지내며 그들의 언어도 배웠다. 그런 뒤 그는 뉴질랜드의 오클랜드라는 도시로 거주지를 옮겼고, 그곳에서 1874년에 결혼을 하고 그 몇 년 뒤에 교회에 들어왔다.6

뉴질랜드와 그 이웃에 있는 오스트레일리아에는 1850년대 초반 이래로 복음 선교사들이 들어와 있긴 했지만, 뉴질랜드의 교회는 아직 규모가 작았다. 지난 30년 동안 130명 이상의 회원이 솔트레이크밸리로 집합하고자 그곳을 떠나면서, 다른 여러 나라에서와 마찬가지로 뉴질랜드 지부들의 회원 수는 줄어들었다.

뉴질랜드의 회원들은 대부분 윌리엄처럼 유럽에서 온 이민자였다. 그러나 윌리엄이 침례받은 직후 뉴질랜드에 온 브롬리 회장은 제일회장단 제2보좌로 새롭게 부름받은 조셉 에프 스미스의 요청에 따라 마오리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사명을 받고 왔다.7 브롬리 회장은 마오리족에 보내기에 알맞은 사람들을 찾고자 기도했으며, 윌리엄이 그중 한 사람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윌리엄은 그로부터 6개월 뒤에 응아타키라는 남자에게 침례를 주었는데, 그는 뉴질랜드에서 침례를 받아들인 첫 번째 마오리족이 되었다.8

선교사들은 하레의 집에서 마오리 사람들과 둘러앉아 조셉 에프 스미스가 부여한 임무를 수행했다. 브롬리 회장이 영어 성경에서 한 구절을 읽으면, 윌리엄이 마오리어 성경에서 같은 부분을 찾아 다른 사람에게 건넨 뒤 그 부분을 읽어 달라고 부탁하는 방식이었다. 부족민들은 선교사들의 이야기를 귀 기울여 들었고, 윌리엄은 그들에게 이튿날 저녁에 다시 오겠다고 말했다.

선교사들이 집을 나서기 전, 하레는 자신의 딸 메리가 있는 곳으로 윌리엄을 데려갔다. 메리는 몇 주째 병상에 누워 있었는데, 의사들은 메리의 죽음이 시간문제라는 진단을 내렸다고 했다. 조금 전 윌리엄은 하나님의 신권을 지닌 장로는 병 고침의 축복을 행할 수 있다고 가르쳤고, 하레는 그들에게 자신의 딸을 축복해 줄 수 있는지 물었다.

메리는 금방이라도 숨을 거둘 듯한 모습이었다. 윌리엄과 브롬리 회장, 토머스는 메리 곁에서 무릎을 꿇고 그녀의 머리에 손을 얹었다. 선한 영이 방을 감쌌고, 토머스는 메리가 생명력을 얻도록 축복했다.

그날 밤, 윌리엄은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그는 메리가 치유될 수 있다는 신앙이 있었다.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면 어떻게 해야 할까? 만일 메리가 죽으면 그 일은 하레와 마오리 사람들의 신앙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가?

윌리엄은 동이 트기 무섭게 하레의 집으로 향했다. 멀리서 마을의 여인 하나가 이쪽으로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그녀는 윌리엄과 마주하자 그를 번쩍 안아 올렸다. 그러더니 그의 손을 잡고 하레의 집으로 끌고 갔다.

“메리는 어떤가요?” 윌리엄이 물었다.

여인이 말했다. “아주 좋아요!”

윌리엄이 집에 들어서자, 메리는 침상에 앉아 방을 둘러보고 있었다. 메리와 악수를 한 윌리엄은 메리의 어머니에게 메리가 먹을 수 있게 딸기를 조금 가져다 달라고 했다.9

그날 저녁, 하레와 그의 아내 파레는 마을 주민 한 사람과 함께 침례를 받았다. 무리와 함께 와이카토강으로 간 윌리엄은 물살을 헤치고 들어가 오른손을 직각으로 들어 올린 뒤, 세 사람에게 각각 침례를 집행했다. 침례가 끝난 후 그는 오클랜드의 집으로 돌아갔고, 토머스 콕스와 그의 아내 해나는 케임브리지에 남아 계속하여 마오리 사람들에게 성역을 베풀었다.

그리고 두 달이 지난 1883년 2월 25일, 교회의 첫 번째 마오리 지부가 조직되었다.10


침례를 받은 아나 윗소는 시온에 집합하라는 주님의 부름에 어서 빨리 응하고 싶었다. 아나에게 복음을 가르쳤던 선교사 중 한 명인 안톤 스칸퀴는 자주 편지를 보내어 그녀와 그녀의 어린 아들들이 유타에 있는 자신과 다른 스칸디나비아 성도들에게 합류하도록 권유했다. 맨타이의 성전과 비슷한 규모와 외양의 성전이 완공되어 가고 있는 유타 로건으로 이주해서 살던 안톤은 아나가 노르웨이를 떠나고 싶어 하는 마음을 이해했다.

그는 아나에게 편지로 다음과 같이 확신을 주었다. “자매님의 유익을 위하여 모든 것이 함께 역사할 겁니다. 하나님은 자매님과 자매님의 어린 아들들을 잊지 않으실 겁니다.”11

유타로 가고 싶은 마음이 강해질수록 아나는 고향이 그리워질 거라는 생각도 함께 들었다. 이곳에는 고인이 된 남편이 묻혀 있었고, 그녀는 이곳의 교회 회원들을 깊이 사랑했다. 유럽의 성도들이 자신의 지부를 떠나 시온으로 갈 때면 현지 교회는 지도자가 부족해지기 십상이었고, 그러면 그곳에 남은 적은 수의 회중이 성장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아나는 자신이 소속된 지부의 상호부조회 보좌였는데, 그녀가 유타로 가기로 결정한다면 몇 안 되는 그곳의 자매들은 그녀의 빈자리를 느끼게 될 것이 분명했다.

아나는 두 아들도 생각해야 했다. 열한 살인 존과 다섯 살인 오스보네는 영리하고 예의 바른 아이들이었다. 그들은 유타에서 새 언어를 배우고 새 문화에 적응해야 할 것이고, 그 과정에서 또래의 다른 아이들보다 뒤처질 수 있었다. 게다가 거기 가서 무엇으로 아이들을 부양한단 말인가? 아나가 침례를 받은 후로 그녀가 하던 양재업은 번창했었다. 노르웨이를 떠난다면, 그녀는 남편의 연금을 받을 수 없는 데다 새로운 곳에서 이 일을 완전히 다시 시작해야 했다.12

또한, 아나는 전에 자신에게 깊은 관심을 보였던 한스라는 사람과 다시 가까워지고 있었는데, 그는 아나와 다시 사랑을 시작하고 싶어 하는 눈치였다. 그는 교회의 회원은 아니었지만, 아나의 신앙을 지지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아나는 그가 교회의 성도가 되리라고까지는 기대하지 않았다. 그는 하나님의 왕국을 얻는 것보다는 세상의 이익을 좇는 데 더 관심이 있어 보였기 때문이었다.13

이러한 문제들로 고심하던 아나는 노르웨이에 계속 머무는 것은 자신과 아들들의 성장에 저해가 될 뿐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노르웨이 정부는 예수 그리스도 후기 성도 교회를 인정하지 않았고, 기독교로 받아들이지도 않았다. 폭도들은 선교사들을 괴롭혔고, 성직자들은 설교나 소책자 등을 통해 교회를 비판하기 일쑤였다. 교회에 관심을 보이는 여동생 페트롤리네를 제외하고는 아나가 교회의 회원이 된 후 가족들은 모두 그녀에게 등을 돌렸다.

1883년 가을, 아나는 노르웨이를 떠나기로 결심했다. 아나는 9월에 페트롤리네에게 다음과 같이 편지를 썼다. “최대한 빨리 유타의 집으로 가려고 해. 가진 것을 다 버릴 수 없다면 우린 그리스도의 제자가 아니야. 설령 그것이 목숨이라 해도 말이야.”14

그러나 돈 문제가 걸림돌이 되었다. 가족들은 절대 도와주지 않을 상황에서, 아나는 이주 비용을 충당할 방법이 없었다. 그러던 차에, 두 명의 귀환 선교사와 한 노르웨이 성도가 그녀에게 어느 정도의 돈을 기부하게 되었다. 한스도 얼마쯤 여비를 보탰고, 교회는 아나가 자신의 십일조 중 일부를 가족의 뱃삯을 지불하는 데 쓰도록 승인했다.

아나는 노르웨이에서 마지막으로 상호부조회 모임에 참석하여, 하나님의 왕국이 다시 지상에 세워졌으며 이 왕국 건설을 도울 기회를 얻게 되어 무척 기쁘다는 말을 전했다. 상호부조회 자매들의 간증을 들으면서, 그녀는 자신과 자매들이 합당하게 생활함으로써 하나님의 영이 항상 함께하여 자신과 그들을 일깨워 줄 수 있기를 기원했다.

1883년 10월, 아나와 존, 오스보네는 오슬로에서 영국행 배에 올랐다. 그들의 동료인 노르웨이 성도들은 뭍에서 손수건을 흔들며 작별 인사를 했다. 아나의 눈에 비친 노르웨이의 장엄한 해안 지대는 그 어느 때보다도 아름다웠다. 그녀가 아는 한, 다시는 이 광경을 보지는 못할 것이었다.15


1884년 초여름, 아이다 헌트 우달은 애리조나 동부 스테이크의 젊은 여성 상호향상회 회장으로 봉사하고 있었다. 아이다는 이 일을 하면서 스노플레이크와 세인트존스를 비롯한 그 지역 정착촌들의 젊은 여성들을 돌보고 가르쳤다. 스테이크 내 모든 상호향상회를 자주 방문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분기마다 대회에서 여성들이 함께 모일 때면 아이다는 기쁨을 느꼈다.16

아이다는 데이비드 우달과 결혼한 뒤 다시 세인트존스로 돌아갔는데, 그곳의 성도들은 거센 반대에 시달리고 있었다. 이 마을을 운영하는 주체는 성도들이 그들의 군에 정착하는 것을 원치 않는 영향력 있는 시민들이었다. 링이라고 알려진 이 단체는 교회의 회원들을 괴롭히며 그들의 투표권 행사도 막으려 했다. 그들은 또한 신문을 발행하여 성도들을 공포에 몰아넣도록 독자들을 선동했다.

이 신문의 한 기사에는 이런 질문도 있었다. “미주리와 일리노이는 어떻게 몰몬을 제거했는가? 그들은 총과 밧줄을 썼다.”17

그러나 아이다는 데이비드와 엘라와 함께 꾸린 가정에서 안정을 찾았다. 한동안 엘라는 아이다가 이 가정에서 얻은 새로운 위치에 적응하기 어려워했지만, 두 여성은 질병을 비롯한 매일의 고난을 함께 헤쳐 나가며 더욱 가까워졌다. 아이다가 우달 가족에 합류한 후로 엘라는 두 딸 어마와 메리를 낳았고, 아이다는 엘라의 출산과 육아를 도왔다. 아이다는 아직 아이가 없었다.

메리가 태어난 지 닷새가 지난 1884년 7월 10일, 아이다가 저녁 식탁을 치우고 있는데 데이비드의 매제인 에먼 테니가 문간에 들어섰다. 그는 일부다처제 혐의로 기소되었고, 그의 아내이자 데이비드의 여동생인 일라이자는 남편에 대해 불리한 증언을 하도록 소환된 상태였다. 일라이자는 법에 따라 남편의 재판에서 핵심 증인이 되는 대신, 보안관들을 피해 은신하기로 결정했다.18

“다음은 당신일지도 몰라요.” 에먼은 아이다에게 주의를 주며 말했다. 세인트존스의 감독이자 일부다처론자로 알려진 아이다의 남편 데이비드는 가장 주요한 기소 대상이 될 터였다. 보안관이 소환장을 들고 와서 아이다를 붙잡으면, 그녀는 법정에서 데이비드에게 불리한 증언을 해야만 할 것이다. 에드먼즈 법에 따라, 그는 불법 동거 혐의로 300달러의 벌금형과 6개월 이하의 징역형을 선고받을 수도 있었다. 일부다처제에 대한 처벌은 더 가혹했다. 만일 유죄 판결을 받는다면, 데이비드는 500달러의 벌금형에 5년 이하의 징역형을 받을 수도 있었다.19

아이다가 제일 먼저 마음에 걸린 사람은 딸을 출산하고 아직 몸을 추스르지 못한 엘라였다. 엘라는 아직 아이다의 도움이 필요했고, 아이다는 엘라를 두고 떠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가 집에 머무른다면 가족들이 더 위험해질 뿐이었다.

아이다는 황급히 머리에 숄을 두르고 조용히 집을 빠져나갔다. 일라이자를 비롯한 여성들은 보안관을 피해 이웃에 숨어 있었고, 아이다도 그들과 합류했다. 그들은 대부분 선택의 여지 없이 다른 사람의 손에 어린 자식들을 맡기고 나와 있었다.

여성들은 매일 바깥을 주시했으며, 그러다 낯선 사람이 집 근처로 다가오면 얼른 침대 밑이나 커튼 뒤로 몸을 숨겼다.

아이다가 이웃에서 지낸 지 엿새가 지났을 무렵, 한 동료가 그녀와 여성들을 은밀히 스노플레이크로 옮겨 주겠다고 제안했다. 아이다는 마을을 떠나기 전에 집으로 돌아가 재빨리 여행에 필요한 몇 가지 물건을 챙겼다. 엘라와 아이들에게 작별을 고하는 동안, 그녀는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야 그들을 다시 볼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20

스노플레이크에 도착한 직후, 아이다는 젊은 여성 조직에서 말씀을 전하게 되었다. 그녀의 머릿속에는 아직도 세인트존스에서의 시련이 생생했다. 아이다는 이렇게 간증했다. “복음을 위해 박해를 겪는 사람은 좀처럼 기대하기 힘든 평안과 만족을 얻게 됩니다. 이 교회에서 아무 시련 없이 그저 순조롭게 생활하리라고 기대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분명 위험에 처하며 살아갈 것입니다.”21


여름이 끝나 갈 무렵, 유타준주에서는 에드먼즈 법에 따라 몇몇 성도가 체포되었지만, 기소되어 수감된 사람은 아직 없었다. 체포된 성도 중에는 러저 클로슨도 있었는데, 그는 5년 전에 자신의 선교사 동반자인 조셉 스탠딩이 살해되던 순간을 목격한 사람이었다. 러저는 두 아내를 두었으며, 그들의 이름은 플로렌스 딘우디와 리디아 스펜서였다. 러저가 체포되자 리디아는 자취를 감췄고, 그렇게 이 기소 건은 핵심 증인이 없어진 상황이었다.22

러저의 재판은 10월에 시작되었다. 존 테일러 회장을 비롯한 후기 성도 증인들은 공판에서 최대한 법정에 협력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검사들이 선지자에게 교회에서 행해진 결혼 기록의 소재를 묻자, 그는 모호한 답변을 내놓았다.

한 변호사는 그에게 이렇게 물었다. “증인이 기록을 보고 싶다면, 혹시 그 소재를 알아낼 방법이 있습니까?”

테일러 회장이 답했다. “알아보면 알아낼 수 있겠지요.”

이에 변호사가 물었다. “증인께서는 그런 친절을 베풀어 주시겠습니까?”

선지자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글쎄요, 저는 그렇게 할 만큼 친절하지 않습니다.” 그러자 법정에서는 실소가 터져 나왔다.23

일주일 동안 그와 유사한 증언들이 계속되면서 열두 명으로 구성된 배심원단은 이 소송에 대한 결론을 내리지 못했고, 판사는 재판을 중단했다. 그러나 같은 날 밤, 한 보안관보가 리디아 클로슨의 행적을 추적하여 법정에서 러저에 대해 증언하도록 그녀를 소환했다.

곧 새로운 공판이 시작되었다. 검사는 이전 공판에 나왔던 몇몇 증인들의 증언을 들어 본 뒤, 리디아를 증인석에 세웠다. 리디아는 창백했지만 결의만큼은 굳건해 보였다. 서기가 리디아에게 진실만 말하겠다는 맹세를 받으려 하자, 그녀는 선서를 거부했다.24

“증인은 선서를 거부하는 것이 잘못된 일임을 모릅니까?” 판사의 말에 리디아는 이렇게 답했다.

“그럴 수도 있겠군요.”

“증인은 수감될 수도 있습니다.”

“뜻대로 하십시오.” 자신의 경고에도 리디아가 이렇게 나오자 판사는 이렇게 말했다.

“정부에 반하는 행위를 할 시에는 엄중한 책임이 따를 것입니다.” 그런 뒤 판사는 리디아를 보안관에게 넘기고 재판을 중단했다.

그날 밤, 교도소로 이송된 리디아는 러저에게 전갈을 받았다. 러저는 자신에게 불리한 증언을 하라고 간청했다. 리디아는 임신 중이었고, 법정에 협조하지 않으면 그녀는 결국 집과 가족들로부터 수백 킬로미터 떨어진 연방 교도소에서 아기를 낳아야 할 것이었다.25

이튿날 아침, 보안관은 리디아를 데리고 사람들이 운집한 법정으로 갔고, 검사들은 그녀를 다시 증인석에 세웠다. 서기가 선서를 진행하자, 이번에는 리디아도 거부하지 않았다. 이어서 검사가 그녀에게 결혼을 했느냐고 물었다.

리디아는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그렇다고 답했다.

검사는 추궁하듯 물었다. “누구와 결혼했습니까?”

“러저 클로슨입니다.” 리디아가 대답했다.

배심원단이 유죄 판결을 내리는 데는 20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에드먼즈 법이 발효된 뒤 내려진 첫 번째 유죄 판결이었다.26 9일 뒤, 러저는 판결을 앞두고 재판정에 나왔다. 판사는 러저에게 판결을 듣기 전에 할 말이 있느냐고 물었다.

“내 조국의 법이 하나님의 법과 갈등을 일으켜야 한다는 것이 유감스럽습니다만, 그럴 때마다 저는 예외 없이 하나님의 법을 택할 것입니다.”

판사는 의자 깊숙이 몸을 밀어 넣어 앉았다. 그는 관대한 판결을 내릴 마음이었으나, 나이도 어린 사람이 보란 듯이 저항하는 모습을 보고 생각을 바꾸었다. 판사는 근엄한 얼굴로 일부다처제의 혐의에 대해서는 4년의 징역형과 500달러의 벌금형을, 불법 동거 혐의에 대해서는 300달러의 벌금형을 선고했다.

법정에는 침묵이 감돌았다. 보안관은 러저를 바깥으로 안내하여 친구와 친척들에게 인사할 시간을 준 뒤 그를 교도소로 데려갔다. 러저는 준주에서 가장 흉악한 범죄를 저지른 50명가량의 사람들과 함께 감옥에서의 첫 밤을 보냈다.27


그해 겨울, 유타준주 곳곳의 정착지에서는 보안관들이 성도들의 집집을 다니며 성도들을 끊임없이 괴롭혔다. 그들은 복수결혼을 시행하는 가족들이 방심하는 틈을 타서 그들을 잡아들이고자 했다. 법 집행관들이 밤낮으로 집을 뒤지고 어린아이들을 침대에서 끌어 내리는 광경을 부모들은 겁에 질린 눈으로 바라보았다. 어떤 보안관들은 창문을 통해 몰래 집 안으로 들어가기도 하고, 문을 부수겠다고 위협하기도 했다. 복수결혼을 한 여성을 발견하여 그녀가 남편에 대해 증언하기를 거부하면, 그들은 그 여성을 체포할 수도 있었다.

존 테일러는 계속해서 종교의 가르침대로 생활하도록 성도들을 격려하고 싶었으나, 그런 마음이 큰만큼 가정이 붕괴되는 성도들의 상황을 모를 리 없었고, 그들의 복지에 책임을 느꼈다.28 얼마 후, 그는 체포를 피하고 더 큰 자유를 찾기 위해 성도들을 미국 밖으로 이주시키는 문제를 교회의 지도자들과 논의하기 시작했다.29

1885년 1월, 존 테일러 회장은 조셉 에프 스미스와 몇몇 사도들, 그리고 믿을 만한 친구들과 함께 멕시코 바로 북쪽의 애리조나 준주에 사는 성도들을 방문하고자 솔트레이크시티를 나섰다. 그곳에서는 많은 성도들이 두려움에 떨며 생활하고 있었으며, 그중에는 이미 보안관을 피해 멕시코로 달아난 이들도 있었다.30

존과 조셉, 그리고 그들의 동반자들은 혹시 더 많은 성도가 멕시코에서 피난처를 찾을 수 있을지 직접 확인하고자 국경을 넘어서 멕시코로 갔다. 멕시코로 간 그들은 정착촌에 공급할 물이 충분히 흐르는 곳 근처에서 괜찮아 보이는 장소 몇 곳을 찾아냈다.31 며칠 뒤 일행과 함께 애리조나로 돌아간 존은 그들과 함께 다음에 할 일을 논의했다.

그들은 결국 멕시코의 치와와주에 땅을 사서 정착촌들을 건설하기로 뜻을 모았다. 존은 몇몇 형제에게 기금 마련을 시작해 달라고 부탁한 후, 일행과 함께 기차를 타고 샌프란시스코로 갔다.32 존은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한 후 조지 큐 캐넌에게서 급한 전보 한 통을 받았다. 조지는 유타의 반대 세력이 활발히 움직이고 있으며, 그들이 제일회장단을 체포하기 위한 계획을 세웠다고 경고했다.

몇몇 사람은 위험한 상황이 지나갈 때까지 존이 캘리포니아에 머물러야 한다고 주장했다. 어떻게 해야 할지 확신이 서지 않았던 선지자는 기도로 인도를 구했다. 그런 후, 그는 자신이 솔트레이크시티로 돌아갈 것이며, 조셉 에프 스미스가 하와이에서 다시 한번 선교 사업을 하도록 보내겠다고 발표했다. 유타로 돌아가면 존을 비롯한 형제들이 체포를 피할 수 없을 것이라며 반대하는 이도 있었지만, 존의 생각은 확고했다. 그가 있어야 할 곳은 유타였다.

며칠 뒤, 집에 도착한 존은 교회 지도자들을 소집하여 특별 평의회를 열었다. 그 자리에서 그는 멕시코에 땅을 매입할 것이라고 말하며, 자신은 피신하여 체포를 피하겠다는 뜻을 전했다. 존은 성도들에게 기소를 피하기 위해 폭력을 제외하고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하도록 권고했다. 이제 그 역시 그렇게 할 생각이었다.33

일요일이 돌아오자, 존은 체포될 위험을 감수하고 회당에서 성도들에게 공개적으로 말씀을 전했다. 그는 성도들에게 그들이 전에도 반대에 부딪힌 적이 있음을 일깨워 주었다. 그리고 이렇게 권고했다. “외투 깃을 여미고 단추를 단단히 잠그십시오. 그리고 폭풍이 지나갈 때까지 추위를 피하십시오. 다른 폭풍들이 그랬듯이, 이번 폭풍도 결국 지나갈 것입니다.”34

존은 있는 힘껏 성도들을 격려한 뒤, 회당을 나와 마차에 오른 뒤 밤의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3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