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셉과 에머 헤일 스미스 가족”, 교회 역사 주제
“조셉과 에머 헤일 스미스 가족”
조셉과 에머 헤일 스미스 가족
조셉과 에머 스미스 가족은 정치적 종교적 박해, 강제 추방, 일곱 자녀의 이른 죽음, 조셉의 순교 등과 같은 엄청난 적대와 비극을 헤쳐 나갔다.1 고난의 시기마다 스미스 가족은 서로에게 의지하며 힘을 얻었다. 한 예로, 리버티 감옥에 감금되어 있던 시기에 조셉은 예기치 못한 생이별로 마음이 힘든 와중에도 아내에게 편지를 보내 그녀를 격려했다. 또한, 그 편지에서 조셉은 아내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자녀들에게 전해 달라고 당부했다. “아이들에게 아버지가 그들을 완전한 사랑으로 사랑하며, 폭도들에게서 벗어나 그들에게 가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을 다하고 있다고 말해 주오.”2 살아남은 조셉 스미스의 자녀들은 훗날에도 돈독한 관계를 유지하고 협력하며 그들의 교회에서 함께 봉사했다. 그들은 어머니의 명예를 지키려고 노력했으며, 1879년에 에머가 사망할 때까지 그녀를 돌보았다.
1827년에 결혼한 에머와 조셉은 맨체스터에서 잠깐 조셉의 가족과 함께 지내다 펜실베이니아주 하모니로 거처를 옮겼다. 조셉과 에머는 처음에 얻은 세 자녀를 모두 출산 하루 만에 잃었다. 그들이 슬하에 자녀를 두고 양육하기 시작한 것은 오하이오로 이주한 뒤 쌍둥이를 입양했을 때부터이다. 오하이오에서 조셉은 수많은 공식 업무를 수행하는 동시에 가정생활을 병행해 나갔다. 당시 조셉은 미국 전역에서 소규모 지부들이 조직되며 급성장하게 된 교회와, 미주리주에서 번성해 가던 후기 성도 공동체를 이끄는 일을 모두 도맡고 있었다. 미 전역의 경제 공황, 커틀랜드 세이프티 소사이어티 은행[Kirtland Safety Society Banking Company] 도산, 날로 심각해지는 조셉에 대한 위협 등으로 그의 가족은 결국 1838년 초반에 오하이오에서 미주리로 이주한다. 하지만 미주리에서도 그 이듬해까지 줄기차게 성도들에 대한 적대감이 격렬해지며 폭도의 만행이 이어졌고, 그 여파로 조셉의 가족들은 뿔뿔이 흩어지게 되었다. 조셉이 미주리에서 감금되자, 에머는 다른 성도들과 함께 일리노이주로 피신했다. 1839년 초반, 조셉은 사법 관계자의 묵인 아래 감금에서 탈출하여 가족들과 재회했다.
일리노이에서 그의 가족은 나부시 개발에 참여했으며, 조셉과 에머는 그 이후 몇 년 동안 나부의 시민 단체 및 종교 단체를 이끌었다. 나부에서 조셉은 계시에 따라 복수 결혼을 시행했다. 조셉은 많은 여성과 결혼했으나, 그가 그런 여성들과 자녀를 낳았다는 확실한 증거는 없다.3 나부에서 복수 결혼은 비밀리에 시행되었고, 조셉은 에머 외의 다른 부인들을 공개적으로 인정하거나 함께 살지 않았다. 따라서 조셉의 자녀들은 아버지의 복수 결혼 정황을 직접 목격한 적이 없었다. 특히, 조셉 삼세와 알렉산더, 데이비드는 그 교리가 자신들의 아버지에게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을 믿지 않았다.4
1844년에 조셉이 사망한 이후에는 에머가 조셉의 유품을 관리했는데, 조셉의 유품에는 진귀한 유물도 몇 가지 포함되어 있었다. 조셉 스미스가 성경을 번역한 원본 자료(값진 진주의 모세서 포함), 그리고 아브라함서와 관련된 이집트 파피루스도 모두 에머의 소유가 되었다. 에머는 대부분의 교회 회원이 그레이트베이슨으로 떠나갈 때 자녀들과 함께 나부에 남았다. 나부 하우스의 모퉁잇돌 안에 넣어 둔 몰몬경 원본 원고는 그녀와 재혼한 루이스 비더몬이 찾아냈다. 스미스 가족은 복원 예수 그리스도 후기 성도 교회에서 유력 지도자가 되었고, 그 결과 이러한 유물 중 상당수는 현재까지도 복원 교회에서 보관하고 있다.(복원 교회는 이후에 커뮤니티 오브 크라이스트[Community of Christ]로 개명했다.) 스미스 가족은 조셉의 업적과 시현을 옹호했으며, 또한 그들 후손을 위한 영원한 유산이자 초기 후기 성도 역사의 귀중한 증거가 되는 여러 자료를 후대에 남겼다.
조셉 스미스 이세(1805~1844)
(See “Joseph Smith and His Papers: An Introduction,” josephsmithpapers.org.)
에머 헤일 스미스 비더몬(1804~1879)
(교회 역사 주제 “Emma Hale Smith[에머 헤일 스미스]” 참조)
이름이 지어지지 않은 아들(1828)
에머는 1828년 6월 15일에 아들을 낳았지만, 그 아이는 하루도 살지 못하고 죽었다. 펜실베이니아주 하모니의 헤일 가족 소유지에는 “1828년 6월 15일, 조셉과 에머 스미스의 갓난아이를 추모하며”라고 적힌 묘비가 있다. 가족 소유의 성경에 한 친척이 이 아이의 이름을 “앨빈”이라고 적은 적도 있었지만, 에머는 훗날 그 아이의 이름을 짓지 않았다고 확실하게 밝혔다.5
이름이 지어지지 않은 쌍둥이(1831년)
1831년, 에머는 남매 쌍둥이를 출산했으나 둘 다 출생 시에 사망했다. 그다음 날, 스미스 가족의 친구인 줄리아 클랩 머독 또한 쌍둥이를 출산했지만, 그녀는 출산 후 여섯 시간 만에 숨졌다. 돌봐야 할 자녀가 다섯이나 더 있는 상황에서 아내를 잃은 남편 존 머독은 결국 쌍둥이를 에머와 조셉에게 입양 보냈다. 에머는 사망한 쌍둥이의 이름을 짓지 않았던 것 같다. 그녀의 시어머니인 루시 맥 스미스가 가족 역사를 위해 자료를 요청했을 때, 에머는 첫째 아이와 쌍둥이에 대한 내용은 자료에 포함시키지 않았다. 성인이 된 조셉 스미스 삼세와의 인터뷰에서, 에머는 이 세 아이들이 곧바로 세상을 떠나 이름을 짓지 못했다고 설명했다. 가족 소유의 성경에는 이 쌍둥이의 이름이 “루이자”와 “타데우스”라고 되어 있기는 하지만, 이 이름들은 훗날 한 친척이 출처에 대한 근거 없이 기록한 것이었다.6
조셉 머독 스미스(1831~1832)
조셉과 에머는 자신들의 친구인 존 머독에게서 쌍둥이를 입양했는데, 그들의 이름은 조셉 머독과 줄리아 머독이었다. 그들의 생모는 출산 후 곧바로 세상을 떠났다. 1832년 초반, 홍역에 걸린 아기 조셉이 바퀴 달린 침대에 누워 부모의 간호를 받던 시기에 폭도들이 이들의 집을 습격해 왔다. 이때 아기의 양부인 조셉 스미스는 방에서 끌려 나가 추운 밤에 정신을 잃을 때까지 구타를 당했다. 그때 생후 1년도 채 되지 않았던 조셉 머독 스미스는 며칠 뒤에 숨을 거두었다. 조셉 스미스는 아이의 죽음이 그날 밤 추위에 노출되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이는 당시의 의학적 관념에 따른 판단이었다.7
줄리아 머독 스미스 딕슨 미들턴(1831~1880)
줄리아의 생부인 존 머독이 줄리아와 그녀의 쌍둥이 형제를 입양 보낼 때, 에머 스미스는 이 아이들에게 입양 사실을 알리지 말아 달라고 머독에게 부탁했다. 에머는 그렇게 함으로써 쌍둥이가 스미스 가족 안에서 온전한 소속감을 느끼기를 바랐다. 하지만, 줄리아는 다섯 살 무렵 “악의를 품은” 한 이웃을 통해 이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녀는 1850년 이전에 엘리사 딕슨과 결혼했으며, 1853년에 남편이 사망하자 나부로 거처를 옮겼다. 3년 뒤, 줄리아는 존 미들턴이라는 가톨릭 신자와 결혼한 뒤 가톨릭으로 개종했다. 그녀에게는 자녀가 없었으며, 나부 근처에 살다가 1880년에 세상을 떠났다.8
조셉 스미스 삼세(1832~1914)
조셉 스미스 삼세는 아버지인 조셉 스미스 이세가 뉴욕시와 보스턴을 방문하고 커틀랜드로 돌아온 직후인 1832년 11월 6일에 태어났다. 6년 뒤, “어린 조셉”은 아버지가 미주리에서 체포되는 모습을 직접 목격했다. 당시 한 호송원은 칼로 “찔러 죽이겠다”고 위협하며 그를 아버지에게서 강제로 떼어 놓았다.9 그는 어린 시절에 어머니와 함께 리버티 감옥에 가서 아버지를 비롯해 그곳에 갇혀 있던 다른 사람들과 함께 하룻밤을 보냈다. 그는 나부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고, 1843년 11월에 아버지에게서 침례를 받았다.
1844년에 아버지가 살해되고 난 뒤 10년 동안, 조셉 삼세는 그가 선지자 조셉 스미스의 후계자가 될 권세를 받았다고 주장하는 몇몇 교회와 거리를 두며 지냈다. 조셉 스미스 이세는 생전에 조셉 삼세에게 몇 가지 축복을 주었는데, 그중에는 조셉 삼세가 교회를 감리할 것이라는 약속도 있었다는 주장이 이후에 제기되었다.10 1856년, 교회 재조직 운동을 대표하는 두 명의 남성이 서면으로 작성된 계시를 들고 그에게 접근했다. 그들이 가져온 문서에는 직계 비속인 조셉 스미스 삼세가 그의 아버지의 후계자로서 명명되어 있었다. 그는 재조직된 교회를 맡아 달라는 그들의 요청에 처음에는 주저했으나 아버지에게서 받은 여러 축복과 특정한 영적 체험으로 설득되어 결국에는 재조직 운동에 합류하게 되었다. 그는 복원 예수 그리스도 후기 성도 교회(현재는 커뮤니티 오브 크라이스트)를 관장했다.11
조셉 삼세는 그 후 54년 동안 선지자이자 회장으로 복원 교회를 이끌었으며, 서부로 이주하지 않은 초기 성도들로 신도층을 구성해 나갔다. 고결한 성품과 정치적 통찰력이 있었던 그는 아버지의 종교적 청사진을 실현하려 노력했고, 교회 조직이 오래 지속되도록 체계를 갖추어 나갔다. 이 교회는 조셉 스미스를 창건자로 내세운 교회 중 두 번째로 규모가 큰 교회이다. 조셉 삼세는 유타에 있는 예수 그리스도 후기 성도 교회 회장이자 사촌인 조셉 에프 스미스와 원만한 관계를 유지했지만, 자신의 아버지가 복수 결혼을 실행했음을 부인했으며, 후기 성도 교회의 선교 활동과 사적지 소유권에 관해 이견을 보였다. 12 그는 형제인 알렉산더와 데이비드를 선임 지도자 자리에 선출했으며, 자신의 아들이 후임 교회 회장이 되도록 후계 구도를 확고히 했다.13 그는 1856년에 에멀린 그리즈월드와 결혼했으며, 그녀가 세상을 떠나자 1869년에 버사 매디슨과 재혼했다. 버사가 사망한 후에 그는 1898년에 에이다 레이철 클라크와 다시 결혼했다. 조셉 삼세는 17명의 자녀를 두었다. 그는 1914년에 심장 발작으로 사망했다.14
프레드릭 그레인저 윌리엄스 스미스(1836~1862)
에머가 다섯 번째로 출산한 자녀인 프레드릭 그레인저 윌리엄스 스미스에 관한 자료는 거의 남아 있지 않다. 1836년 6월 20일 커틀랜드에서 태어난 그는 조셉 스미스의 보좌 중 한 명이었던 프레드릭 지 윌리엄스의 이름을 따서 이름이 지어졌다. 농업과 상업에 종사하며 삶의 대부분을 나부에서 보낸 프레드릭은 1857년에 애나 마리 존스와 결혼했고, 1862년에 (아마도 결핵으로) 사망했다.15
알렉산더 헤일 스미스(1838~1909)
성도들의 옹호자이자 신임받는 변호사였던 알렉산더 도니판의 이름을 따서 이름을 지은 알렉산더 헤일 스미스는 미주리에서 박해가 극심해지고 있던 시기에 태어났다. 에머는 1839년에 8개월 된 알렉산더를 품에 안고 미주리 주지사 릴번 더블유 보그스의 악명 높은 “근절령”을 피해 꽁꽁 얼어붙은 미시시피강을 건넜다. 알렉산더는 성장하면서 아버지가 선지자로서 베푼 성역과 몰몬경에 대한 믿음에 헌신했다. 성인이 된 후 그는 자신의 형인 조셉 삼세를 따라 재조직 운동에 가담하여 복원 교회에서 중요한 직책을 수행했다.16
알렉산더는 1861년에 엘리자베스 애그니스 켄들과 결혼해 아홉 자녀를 두었다. 첫 아이인 프레드릭 알렉산더가 태어난 직후 그의 형인 프레드릭 그레인저 윌리엄스 스미스가 사망하자, 그는 형의 영원한 운명에 대해 깊은 근심을 느끼게 되었다.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이때 그는 처음으로 영적 경험을 했다고 한다. 그는 영혼에 평안을 안겨 주는 성령의 속삭임을 들었다. 그는 ‘프레드릭이 좋은 상태에 있다’는 느낌을 받고 안심했다.17
알렉산더는 복원 교회에서 여러 차례 선교 사업을 했으며, 이따금 유타를 방문해 예수 그리스도 후기 성도 교회에 속해 있는 친척들을 만났다. 때로는 종교적 차이로 열띤 논쟁이 벌어지기도 했으나, 그는 재조직 운동에 함께하지 않은 사촌들을 언제나 열린 마음으로 대했다. 그는 복원 예수 그리스도 후기 성도 교회 제일회장단에서 형 조셉 삼세의 보좌로 봉사했으며, 1890년에는 복원 교회의 십이사도 정원회 회장이 되었다. 그는 1909년에 축복사로 봉사하던 중 나부에서 사망했다.18
돈 칼로스 스미스(1840~1841)
돈 칼로스 스미스는 1840년 6월 13일에 나부에서 태어나 14개월 만에 말라리아로 사망했다. 이는 아버지 조셉 스미스의 동생이자 그와 이름이 똑같은 삼촌 돈 칼로스 스미스가 사망한 지 불과 며칠 만의 일이었다. 조셉과 에머의 또 다른 아들인 알렉산더 스미스는 그의 어머니 에머가 1879년에 숨을 거두기 직전에 한 시현을 보았다고 전했다. 시현에서 에머는 조셉 스미스의 안내로 하늘의 저택으로 갔고, 그곳에서 아기방에 있는 어린 돈 칼로스를 품에 안았다. 이때 에머가 먼저 세상을 떠난 다른 아이들에 관해 묻자, 조셉은 그녀가 필멸의 삶을 마치고 나면 성인이 될 때까지 살지 못했던 그녀의 모든 자녀를 키우게 될 것이라고 약속했다고 한다.19
이름이 지어지지 않은 아들(1842)
에머는 1842년 2월 6일에 나부에서 아들을 낳았지만, 그 아이는 그날 바로 숨졌다고 전해진다.20
데이비드 하이럼 스미스(1844~1904)
1844년에 조셉 스미스가 사망했을 때, 에머는 데이비드 하이럼 스미스를 임신한 상태였다. 시와 노래, 미술에 뛰어났던 데이비드는 훗날 복원 교회에서 여러 차례 선교 사업을 했으며, 그 일환으로 유타를 방문해 친척들과 다른 후기 성도들을 만나기도 했다. 아버지의 복수 결혼에 관한 이야기로 고민하던 데이비드는 사촌 조셉 에프 스미스와 설전을 벌이고, 또한 조셉 스미스에게 인봉되었다고 주장하는 여성들을 만나 면담했다. 데이비드의 이러한 활동은 나부에서 실행된 복수 결혼에 관한 중요한 자료가 수집되는 계기가 되었다.21
유타로 선교 사업을 다녀오고 나서 얼마 후, 데이비드는 정신 건강이 악화되었고, 결국 1877년에 그의 형 조셉 삼세는 그를 일리노이주 엘긴에 있는 정신병원에 입원시켰다. 조셉 삼세는 데이비드의 친한 친구에게 이런 편지를 보냈다. “오랜 시간 슬퍼하며 숙고하고 기도한 끝에 데이비드를 엘긴에 있는 병원에 보내 치료를 받도록 조치했네. … 마음이 너무 무겁지만, 현재로서는 이게 최선이라고 생각하네.”22 엘긴에 있는 병원 직원들은 데이비드가 우울증, 은둔 경향, 소음에 대한 민감한 반응, 주기적 기억 상실 등을 보이며, 다른 사람들이 신비한 힘으로 자신을 지배한다는 확신을 하고 있다고 기록했다. 그의 상태는 오늘날로 말하자면 조증 및 치매와 관련이 있었던 것 같다. 가족과 친구들은 데이비드가 호전되기를 기대했지만, 병원 직원들은 그가 그곳에서 생활했던 27년 동안 그의 증상에는 별다른 변화가 일어나지 않았다고 전했다. 말년에 당뇨병을 앓던 데이비드는 60번째 생일을 석 달 앞두고 신장 질환으로 사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