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뮤얼 브래넌”, 교회 역사 주제
“새뮤얼 브래넌”
새뮤얼 브래넌
브리검 영이 후기 성도들을 이끌고 일리노이주 나부를 떠나 서쪽으로 향하던 바로 그날, 새뮤얼 브래넌(1819~1889)은 238명의 성도들을 이끌고 뉴욕주에서 출발하여 남아메리카의 케이프혼을 돌아 캘리포니아 예르바 부에나로 가는 항해를 시작했다. 브래넌은 캘리포니아에서 교회의 선임 지도자로 잠시 봉사했으며, 1848년과 1849년 골드러시 기간에 여러 사업을 추진하며 전국적으로 유명해졌다. 캘리포니아의 초기 역사에서 브래넌은 캘리포니아의 저명인사 중 한 명으로 손꼽힌다.1
젊었을 때 오하이오주 커틀랜드에서 교회에 들어온 브래넌은 3년간 인쇄업자의 도제로 일했으며, 때때로 조셉 스미스의 가족과 함께 살기도 했다. 그는 후에 뉴욕주 뉴욕시에서 선교 사업을 했는데, 그곳에서 the Prophet이라는 교회 신문 출판을 도왔다.2 나부에서 브래넌은 승인되지 않은 복수결혼에 참여했고, 이 일로 교회 지도자들은 그의 회원 자격 정지를 고려했으나, 결국 그의 “회원 자격”을 복구해 주기로 결정했다.3
브래넌은 성도들의 미국 서부 이동 준비를 돕기 위해 이주 사무소를 개설하고, 브리검 영과 함께 여러 대체 경로에 대해 토론했다. 브래넌과 함께 이주한 성도들은 하와이와 캘리포니아 연안으로 가는 브루클린호에 탑승했다.4 폭풍과 질병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승객은 약 3만 9천 킬로미터의 항해를 안전하게 마쳤으며, 시온 건설을 열망하며 샌프란시스코베이에 도착했다. 브래넌은 나머지 성도들도 번영이 확실해 보이는 캘리포니아로 인도하기 위해 브리검 영을 설득하려 노력했다. 브리검 영은 솔트레이크밸리에 정착하겠다고 결정했지만, 브래넌을 캘리포니아 교회 지부들의 회장으로 임명했다.
브래넌은 캘리포니아 골드러시를 선전할 여러 기회를 포착했다. 캘리포니아 정착지에 탐광자들이 넘쳐났던 1849년, 새로 오는 사람들에게 채굴과 여행에 필요한 장비를 제공하여 큰 부를 축적한 브래넌은 캘리포니아의 첫 번째 백만장자가 되었다.5 브리검 영은 유타의 후기 성도들에게 그들의 정착지를 강화하는데 계속해서 힘쓰고 부에 대한 욕망을 자제할 것을 강력히 권고했으나, 브래넌은 브리검 영과 다른 지도자들에게 캘리포니아 땅에 투자하도록 설득하기 위해 애를 썼다.
1850년, 브래넌이 브루클린호 항해와 관련된 자금을 횡령했다는 보고가 솔트레이크시티로 날아들었다. 브래넌은 횡령한 금액을 아마사 라이먼 사도가 받아들일 만큼 변상했으나, 그때부터는 라이먼이 캘리포니아의 교회를 이끌도록 임명되었다.6 이듬해, 태평양 선교부를 감독하기 위해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한 팔리 피 프랫 장로는 평의회를 열고 브래넌을 파문했다. 그의 파문 사유는 “비기독교적인 행위 및 직무 태만”과 네 명의 범죄 용의자를 재판 없이 처형한 자경단에 참여한 것이었다.7
브래넌은 자신의 사업을 계속했고, 그의 영향력이 최고조에 이르렀을 한때 “캘리포니아 제일의 갑부”가 되기도 했다.8 그러나 투자가 실패하고 1870년에 이혼 위자료로 재산의 절반을 아내에게 넘겨주게 되면서, 그는 가난한 홀몸이 되었다. 브래넌은 가까스로 빚을 청산한 후 캘리포니아와 멕시코 북부에서 추가적으로 사업을 벌였으나 거의 성공하지 못했다. 그는 캘리포니아주 샌디에이고 근교에서 70세의 나이로 사망했다.9
관련 주제: 캘리포니아 골드러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