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로를 위해 목숨이 붙어 있기를”, 『성도들: 후기의 예수 그리스도 교회 이야기, 제2권, 그 어떤 신성하지 않은 손도, 1846~1893년』(2022) 제17장
제17장: “서로를 위해 목숨이 붙어 있기를”
제 17 장
서로를 위해 목숨이 붙어 있기를
교회가 계속해서 전 세계로 퍼져 나가자, 히버 제이 그랜트 회장은 교회 교육의 미래에 대해 고심하게 되었다. 지난 25년간 교회 학교의 운영비는 10배가 오른 상태였다. 비용이 많이 드는 스테이크 아카데미 제도를 세미나리 프로그램으로 대체하는 등 몇 가지 노력으로 예산을 절약하긴 했지만, 브리검 영 대학교와 후기 성도 대학교, 그리고 다른 교회 대학들이 성장하고 있었다. 만약 이 기관들이 유타 대학교와 지역의 다른 여러 공립 학교 수준의 교육을 제공하기를 원한다면, 십일조 기금으로 조달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자금이 필요할 터였다.1
비용 문제는 끊임없이 선지자를 괴롭혔다. 1926년 2월, 그는 교회의 본부 교육 위원회에서 이렇게 말했다. “제가 회장이 된 후로 이보다 더 걱정되는 일은 없었습니다.” 브리검 영 대학교만 해도 100만 달러 이상을 들여 캠퍼스를 확장하길 원하고 있었다. “우린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그랜트 회장은 단언했다. “이상입니다.”2
일부 위원들은 선지자의 우려에 공감하며 교회가 브리검 영 대학교를 포함한 모든 대학을 폐쇄하기를 바랐다. 하지만 교회 학교를 다녔고 교회 교육 총감을 맡은 적이 있는 사도 데이비드 오 맥케이와 존 윗소는 청년 성인들이 교회 학교가 제공하는 중요한 종교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교회 학교가 유지되어야 한다고 맞섰다.
“이 학교들은 우리 자녀들에게 영향력을 미치기 위해 설립되었습니다.” 맥케이 장로는 3월에 열린 위원회 모임에서 그렇게 말했다. 그는 젊은이들이 충실한 후기 성도가 되도록 이끄는 일에서 교회 대학이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믿었다.
존 윗소도 그 점에 동의했다. “저는 한 사람이 성숙한 사람이 되도록 돕는 일에 교회 학교가 지닌 가치를 알고 있습니다.” 존은 이렇게 말했다. “교회가 고등 교육 기관을 유지하지 않는다면 큰 실수를 저지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3
이 무렵, 그랜트 회장의 보좌인 찰스 더블유 니블리는 유타 바로 북쪽에 있는 아이다호주의 교회 회원인 윌리엄 게데스를 만났다. 윌리엄의 딸들인 노마와 졸라는 아이다호 대학교에 다니는 소수의 후기 성도 중 하나였다. 그들의 작은 지부는 세를 내고 빌린 허름한 회관에서 모임을 했는데, 이따금 지역 주민들은 토요일 밤에 그곳에서 무도회를 했다. 다음 날 아침 노마와 졸라가 교회 모임을 하러 그곳에 갈 때면 담배 연기가 코를 찌르고 쓰레기와 빈 술병들이 바닥에 어지러이 뒹굴었다.4
윌리엄은 학교 근처에 딸들을 위한 더 좋은 집회소가 있기를 바랐다. 그는 니블리 회장에게 “더 나은 시설이 없다면 그 대학교는 결코 후기 성도 학생들을 유치할 수 없을 겁니다.”라고 말했다.5
그랜트 회장과 교육 위원회는 교회 교육의 미래를 논의하면서 아이다호의 상황에 대해 숙고했다. 그들은 브리검 영 대학교에 계속 자금을 지원하는 한편, 대부분의 다른 교회 대학들을 위한 지원은 점차 철회하기로 결정했다. 교회는 또한 세미나리를 대학 수준으로 확대하여 학생들에게 종교 교육을 제공하기 시작할 것이었다. 위원회는 아이다호 대학교를 새로운 프로그램의 시험장으로 보았다. 이제 그들은 아이다호 대학교가 있는 작은 마을인 모스코로 갈 누군가가 필요했다.6
10월에 제일회장단은 남아프리카 선교부 회장으로 봉사하고 막 귀환한 와일리 세션스를 만났다. 와일리는 아이다호 대학교의 전 농업 담당관이기도 했다. 그들은 그를 지역 설탕 회사의 한 직책에 이미 추천했지만, 그와 함께 그 직업에 대해 이야기하던 중 니블리 회장은 말을 끊고 선지자에게로 몸을 돌렸다.
“우리가 실수를 하고 있군요.” 니블리 회장이 말했다.
“유감스럽게도 그런 것 같습니다.” 그랜트 회장도 동의했다. “세션스 형제님을 설탕 회사에 보내는 게 내키지가 않네요.”
방 안은 잠시 조용해졌다. 이윽고 니블리 회장이 말을 꺼냈다. “세션스 형제님, 형제님은 우리가 아이다호 대학교에 보내야 할 사람입니다. 그 대학교에 다니는 우리 젊은이들을 돌보고, 그곳 사정을 면밀히 살펴 교회가 주립 대학교에 다니는 후기 성도 학생들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할지를 저희에게 알려 주는 것이 형제님이 할 일입니다.”
“안됩니다, 형제님들!” 와일리가 말했다. “지금 저에게 또 다른 선교 사업 부름을 주시는 겁니까?” 남아프리카에서 7년간 임무를 수행한 그와 그의 아내 맥덜런은 이제 거의 무일푼 신세였다.
“아닙니다, 세션스 형제님. 우리는 형제님에게 또 다른 선교 사업 부름을 주는 것이 아닙니다.” 선지자는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우리는 형제님에게 교회에 훌륭한 봉사를 할 좋은 기회를 드리는 것입니다.” 선지자는 그것이 직업적인 기회, 즉 봉급을 받는 직책이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자리에서 일어서는 와일리의 표정은 슬퍼 보였다. 니블리 회장은 그에게 다가가 팔을 잡았다.
“실망하지 마세요.” 그가 말했다. “이 일이 바로 주님께서 형제님이 하기를 바라시는 것입니다.”7
1927년 새해 첫날, 솔트레이크시티는 온통 눈에 뒤덮여 있었지만 윗소 가족의 집에는 눈부신 햇살이 쏟아져 추위를 느낄 수 없었다.8 평소 같으면 자녀라고는 열네 살의 유도라만 있던 집에 명절을 맞아 온 가족이 모였다. 리아는 자녀들이 곁에 있어서 마음이 기뻤다.
이제 스물네 살이 된 마셀은 약혼을 했고, 몇 달 후에는 유타 대학교를 졸업할 것이었다. 그는 곧 아버지처럼 하버드 대학교에 진학하기를 바랐는데, 아마도 경영학을 공부하길 원했다.9 한편 그의 누나인 앤은 최근에 젊은 후기 성도 변호사인 루이스 왈러스와 결혼하여 그와 함께 워싱턴 디시로 이사를 갔다. 하지만 한차례 향수병을 앓게 된 그녀는 유타로 돌아와 있었는데, 리아는 딸이 걱정스러웠다. 그래도 리아와 존은 주님께서 그들의 가족에게 베풀어 주신 친절과 자비에 감사해했다.10
새로운 해가 하루하루 지나면서 존은 자신이 맡은 십이사도 정원회의 임무로 돌아갔고, 리아는 여가 시간에 어머니의 새로 집필 과제를 도와 드렸다.11 리아는 수사가 본인의 아버지 브리검 영의 전기를 출판하는 것을 목표로 관련 정보를 수집하고 일대기를 작성하는 모습을 수년 동안 지켜보았다. 그러나 얼마 전 리아는 어머니가 후기 성도 여성의 역사와 같은 다른 집필 과제는 여전히 진전을 이루고 있지만 전기 집필 작업은 더 이상 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어머니, 외할아버지에 관한 책은요?” 어느 날 리아가 물었다. “이제 안 쓰세요?”
“그런 건 아니고, 아버지는 내가 쓰기엔 너무 엄청난 분이라서 말이야.” 수사가 대답했다. “산 옆에 서 있으면, 산을 볼 수 없을 정도로 가까이 있기 때문에 그 산을 제대로 묘사할 수가 없는 법이지.”
“그렇지만 그건 어머니가 하셔야 할 일이에요.” 리아는 단언했다. “언젠가는 어머니가 외할아버지에 대한 책을 쓰셔야 해요. 제가 기꺼이 도와드릴게요.”12
그때부터 수사는 브리검 영에 관한 많은 분량의 원고를 두 가지 썼고, 그것을 논리 정연한 하나의 전기로 만들기 위해 리아의 손을 빌렸다. 리아는 그 일이 힘들고 때로는 지겹도록 느리게 진행된다는 것을 깨달았지만, 어머니에게 자신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았다. 수사는 강한 의지와 단호한 목소리를 가진 타고난 집필가였고, 리아는 그런 어머니의 산문을 다듬고 구조를 잡아 주는 일을 했다. 그들은 수사의 집에서 함께 일하면서 좋은 팀을 이루었다.13
1927년 5월 23일 아침, 마셀이 세미나리를 가르치고 있는 아이다호주 프레스턴에서 편지 한 통이 도착하면서, 리아의 일상은 급작스럽게 중단되었다. 마셀은 최근에 길에서 오도 가도 못하는 운전자를 도와준 후 독한 감기에 걸렸다. 친구들은 마셀이 호전되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그의 체온은 높게 오르고 있었다. 마셀은 폐렴이 폐에 자리를 잡게 되면 생명이 위태로울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14
리아는 한 시간 내로 프레스턴행 기차를 잡아 탔고, 얼마 지나지 않아 마셀 곁에 있게 되었다. 다음 날 마셀의 체온은 몇 도 떨어졌고, 리아는 아들이 회복될 것이라는 희망을 가졌다. 하지만 상태가 더는 나아지지 않자 두려움이 다시 찾아왔다. 존도 프레스턴으로 와서 주님께 마셀의 목숨을 살려 주시기를 간청했다. 존은 자신의 친구인 한 의사를 불러 마셀을 돌보도록 했다. 다른 친구들은 신권 축복을 주거나 밤을 새며 마셀을 간호했다.
5월 27일에 리아는 지칠 대로 지쳐 쓰러졌다. 하지만 그날 밤 마셀은 회복될 기미가 보였다. 다음 날 아침에는 약혼녀인 매리언 힐이 도착했다. 마셀은 폐가 깨끗해지는 듯하고 열도 다시 떨어졌지만, 그날 늦게 다시 호흡이 거칠어지고 몸이 부어올랐다. 리아는 오후 내내 존, 매리언과 함께 아들 곁을 지켰다. 하지만 몇 시간이 지나도 마셀의 상태는 나아지지 않았다. 그리고 그날 저녁 늦게, 마셀은 눈을 감았다.15
리아는 슬픔을 가눌 수가 없었다. 그녀는 이미 자녀 중 넷을 잃었다. 새해 벽두만 해도 미래가 밝고 확실해 보이던, 딱 하나 남은 살아 있는 아들이 이제 세상을 떠났다.16
그해 봄, 솔트레이크시티에서 동쪽으로 약 2,575킬로미터 떨어진 곳에서 여덟 살 난 폴 방이 침례를 받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폴은 십 남매 중 여섯째였다. 폴의 형제는 총 6남 4녀이다. 그들의 부모는 인구 40만 명이 넘는 미국 중서부의 혼잡한 도시 오하이오주 신시내티에서 본인들 소유의 식료품점을 운영했고, 가족들은 가게 뒤에 있는 니은자 모양의 방에서 살았다. 가족들은 사생활 보호를 위해 커튼을 쳐 방을 4등분으로 나눴지만, 실제로 그 누구에게도 사생활이란 것은 조금도 없었다. 밤에는 접이식 침대 위에서 잠을 자곤 했는데, 침대들이 공간을 너무 많이 차지하는 바람에 식구들이 방을 돌아다니는 것 자체도 거의 불가능했다.17
폴의 아버지인 크리스티안 방 일세는 독일에서 건너온 사람이었다. 그는 어린 소년 시절에 가족과 함께 신시내티로 이주해 왔다. 신시내티는 19세기에 많은 독일 이민자들이 정착했던 지역이다. 1908년에 크리스티안은 로사 키퍼와 결혼했는데, 로사의 부모도 독일 이민자였다. 3년 후에 로사는 친구인 엘리스 하브레히트에게 몰몬경을 받게 되었고, 로사와 크리스티안은 그 책을 흥미롭게 읽었다. 선교사들과 일 년 동안 만난 후, 그들은 인근에 있는 오하이오강이 얼어 유대인 목욕탕에서 침례를 받았다.18
신시내티의 지부는 미국 동부에 있는 교회의 많은 지부와 비슷했다. 한때 이 도시는 번창하는 성도들 회중의 본거지였지만, 점점 더 많은 교회 회원이 유타로 모이면서 몇 년 동안 규모가 축소되었다. 폴의 부모가 교회에 가입할 무렵에는 아예 후기 성도가 희귀한 지역이 되어 있었다. 1912년에 선교사들이 한 소년에게 침례를 주었을 때는 수백 명이 그 아이를 보기 위해 강으로 내려왔다. 이튿날 신문은 그 침례에 관한 기사를 싣고 독자들에게 선교사들이 그 지역에 있다고 알렸다.
기사에는 “많은 개종자를 공개적으로 확보하기 위한 강력한 시도가 이루어질 것이다”라고 적혀 있었다.19
교회에 가입한 폴의 부모는 선교사들과 몇몇 다른 성도들과 함께 세를 내고 빌린 작은 회관에서 예배를 보았다. 하지만 교회의 한 회원은 곧 유타로 이사했고, 또 다른 회원은 사망했으며, 두 명은 더는 모임에 나오지 않았다. 크리스티안과 로사 역시 유타로 집합하는 것에 대해 생각해 보았지만, 그들은 가족과 사업체가 오하이오에 있었기 때문에 그곳에 머물기로 결정했다.20
솔트레이크시티에서 멀리 떨어진 다른 지부들이 그렇듯이, 신시내티 지부도 경험 많은 교회 회원들이 경계 안으로 이사를 올 때면 혜택을 입었다. 방 부부가 교회에 가입한 직후, 유타에서 후기 성도 부부인 찰스와 크리스틴 앤더슨이 신시내티로 이사를 와서 함께 교회에 참석하기 시작했다.
앤더슨 부부는 성전에서 엔다우먼트와 인봉을 받았으며 미국 서부의 와드와 스테이크에서 수년간 봉사를 했었다. 그들은 다른 곳에서 기회를 찾기 위해 유타를 떠난 많은 성도 중에 속한다. 스웨덴 태생인 찰스는 새로운 종류의 대걸레를 발명했고 그 제품을 제조하기 위해 동부로 온 것이었다. 그는 신시내티가 대도시이고 번창하는 상업 중심지라는 것 외에는 그 도시에 대해 아는 바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부 주 선교부 회장은 즉시 그에게 부름을 주어 지부를 재조직하고 이끌게 했다. 폴의 아버지는 그의 제1보좌가 되었다.21
당시는 신시내티에서 후기 성도로 지내는 것이 쉽지 않던 시절이었다. 뉴스 보도와 시위자들은 수년 동안 그 지역에서 교회를 맹비난해 왔다. 한때 조지 큐 캐넌의 배도한 아들 프랭크 캐넌이 신시내티에서 집회를 열었을 때, 지역 신문은 그 도시를 “미국 내의 몰몬이즘 확산과 싸우는 전쟁터”로 칭했다.22
그런 반대에도 불구하고, 폴의 부모는 자녀들을 복음 안에서 양육하기 위해 열심히 노력했다. 그들은 매주 교회 모임에 참석하고 작은 지부에서 충실히 봉사했다. 폴의 아버지는 아침마다 가족 기도와 독일 기독교인들의 일반적인 관습인 주기도문 낭송을 위해 온 가족을 불러 모았다. 폴의 어머니는 월요일 저녁에 종종 선교사들을 불러 식사를 대접했다. 폴의 가족과 선교사들은 가게 뒤편과 연결된 부엌의 큰 식탁에 앉곤 했다. 쓸 수 있는 것은 절대 버리는 법이 없는 폴의 어머니는 가게에서 오래된 식품으로 과일이나 야채 또는 고기의 상한 부분을 조심스럽게 잘라 내고 요리를 해서 내놓았다. 그러면 폴의 아버지는 선교사들에게 배가 터질 때까지 다 먹으라고 권했다.23
방 부부는 또한 자녀들이 모두 여덟 살 때 침례를 받을 수 있게 했다.24 1927년 6월 5일, 폴과 네 명의 다른 사람들이 오하이오 강변의 ‘앤더슨스 페리’라는 곳에서 침례를 받았다. 폴의 부모와 앤더슨 회장, 폴의 친구 몇 명이 침례식을 축하하기 위해 그곳에 와 주었다.
그 행사를 구경하겠다고 몰려든 군중도 없었고, 신문에 기사로 나는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 대신, 이 침례식 기사는 교회의 북미 선교부 공식 잡지인 『장로들의 저널, 리아호나』[Liahona, the Elders’ Journal]에 실렸다. 폴의 이름도 잡지에 함께 나왔다.25
와일리와 맥덜런 세션스는 아이다호 대학교에 갔을 때 따뜻한 환영을 받지는 못했다. 모스코는 아이다호 북부에 있었는데, 그곳은 교회 회원이 거의 살지 않는 지역이었다. 그곳에는 비옥한 토양을 경작하거나 광업과 목재 산업으로 부를 얻기 위해 이주해 온 많은 사람이 살고 있었다. 주민들은 교회를 의심스러워했고, 와일리의 존재는 그들을 불안하게 했다.
“이 세션스라는 사람은 뭐하는 사람이요?” 몇몇이 물었다. “그 사람이 이곳에서 맡은 일이 뭡니까? 대체 뭘 하려는 거죠?”26
마지막 두 질문을 직접 받았더라면 사실 와일리 본인도 명확하게 대답하지 못했을 것이다. 제일회장단은 그에게 학교에서 후기 성도 학생들을 도우라고 지시했지만 어떻게 할지는 전적으로 그에게 맡겨져 있었다. 그는 학생들에게 정규 종교 교육과 모임을 할 새로운 장소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와일리는 선교부 회장의 책무 외에 종교 교육을 받은 경험이 전혀 없었다. 그는 대학에서 농학을 공부했으므로, 학생들이 비료에 대해 배우고 싶다면 가르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성경 학자는 아니었다.27
모스코에 도착하고 얼마 안 되어서, 와일리와 맥덜런은 교육을 더 받고, 학교에도 익숙해지고, 교직원들과 친해지려는 목적으로 그 학교의 대학원에 등록했다. 와일리는 철학 및 교육학을 공부하고 종교와 성경 강좌도 수강했으며, 미국 주립 대학교들에서의 종교를 주제로 논문도 쓰기 시작했다. 맥덜런은 사회 복지와 영어 강좌를 수강했다.
와일리와 맥덜런은 협력자 한 명을 얻게 되었는데, 철학과의 학과장인 시 더블유 체노웨스였다. 그는 주립 대학에서 종교 교육이 이루어지지 않는 문제를 우려하고 있었다. 세계 대전에서 군목으로 복무한 그는 모스코 근처에 있는 한 교회에서 목사로 활동 중이었다. 그는 와일리와 맥덜런에게 이렇게 말했다. “만약 여러분이 이 캠퍼스에 종교 프로그램을 가져오려 한다면, 이 대학의 경쟁 기준에 부합하기 위한 준비를 하는 것이 좋을 겁니다.”
체노웨스 박사의 격려로, 세션스 부부는 공립 대학의 후기 성도 학생들을 위해 세미나리와 비슷한 프로그램을 계획했다. 그들은 다른 대학의 종교 교육 프로그램에 바탕을 두고 프로그램을 짜고, 교회와 주의 분리를 존중하기 위해 신중을 기했다. 그들의 종교 수업은 대학 수준의 과정에 대한 주의 기준에도 맞고, 이 프로그램은 또한 학교로부터도 완전히 독립적이어야 했다. 그리고 교회가 수업을 위한 건물을 지을 때는 대학 캠퍼스 밖에 지어야 했다.28
와일리는 지역의 지도자들이 자신과 교회를 의심하는 한, 대학도 이 새로운 프로그램을 지지하지 않을 것임을 알았다. 그래서 그는 지역 사회의 주요 인사들을 만날 수 있는 상공 회의소와 시민 단체에 가입했다. 와일리는 지역 재계 인사들, 목사, 교수진이 자신을 주시하고 자신이 그 대학에 교회의 영향력을 행사하려는 것은 아닌지 확인하기 위해 위원회를 꾸린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 위원회의 위원장은 보험 영업을 하는 프레드 풀턴이었다. 와일리는 상공 회의소 행사에 참석할 때마다 프레드 옆에 앉아 그와 친구가 되려고 노력했다.
어느 한 모임에서 프레드는 와일리에게 이렇게 말했다. “이 친구, 당신 정말 기막힌 사람이야.” 그는 위원회에서 자신이 무슨 역할을 하는지 고백했다. 그리고 그는 이렇게 말했다. “볼 때마다 당신이 여기 들어와서 나한테 너무 친근하게 구니까 늘 당신이 더 좋아지더라고.”29
마을 사람들은 곧 세션스 가족에게 호의를 보이게 되었다. 와일리의 도움으로 교회는 캠퍼스 근처에 있는 사유지를 찾았고, 성도들의 학생 회관을 짓기 위해 그 땅을 구입했다. 그런 다음, 와일리와 교회 건축가는 대학 및 상공 회의소와 협력하여 건물을 설계하고 건축을 승인 및 감독했다. 1927년 가을, 와일리는 종교 수업을 가르치기 시작했으며, 대학은 종교 수업을 이수한 학생들에게 학점을 주는 데 동의했다. 맥덜런은 노마와 졸라 게데스와 같은 후기 성도 학생들을 위한 일련의 사교 활동도 조직했다.30
어느 날, 와일리는 학부장인 제이 엘드리지와 함께 길을 가던 중 교회의 새 학생 회관이 될 건물 옆을 지나게 되었다. “저 땅을 구입하다니 정말 머리를 잘 쓰셨군요.” 엘드리지 박사가 와일리에게 말했다. 그는 교회가 새로운 프로그램에 어떤 명칭을 붙이려 하는지를 물었다. 그는 “그걸 신학교라고 부를 순 없잖아요.”라고 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이미 당신들이 당신네 고등학교 프로그램을 신학교라고 해 버렸으니 그 명칭은 이제 못쓰게 되었죠.”[신학교는 영어로 seminary(세미나리)임—옮긴이]
“모르겠습니다.” 와일리가 말했다. “그에 대해 별로 생각해 본 적이 없네요.”
엘드리지 박사는 걸음을 멈췄다. “내가 지어 주지요.” 그리고 그는 이렇게 말했다. “저기 보이는 건 후기 성도 종교 교육원입니다.”
와일리는 그 명칭이 마음에 들었고, 교회의 본부 교육 위원회도 생각이 같았다.31
1927년 9월, 리아 윗소는 자신이 영적으로,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힘이 다 소진되었고 느꼈다. 아들 마셀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그녀는 심한 우울증에 빠졌다. “정말 삶이 가치 있는 것인지 모르겠어요.” 어느 날 그녀는 존에게 말했다. “당신의 사랑이 아니었다면 삶은 아무런 가치가 없었을 거예요.”32
마셀은 5월 31일에 솔트레이크 묘지에 묻혔다. 다음 날이 리아와 존의 스물아홉 번째 결혼기념일이었지만, 그들은 장례식 뒷정리를 하느라 그날을 보냈다. 그 후로 몇 주, 몇 개월 동안 친구와 가족들이 종종 그들을 찾아와 주었지만 그런 도움과 사랑에도 불구하고 치유는 더디기만 했다.33 그러던 중 들린 딸 앤의 임신 소식은 그들에게 기쁨을 주었다. 하지만 결혼 생활이 행복하지 않았던 앤은 워싱턴 D.C.에 있는 남편에게 돌아가는 대신 유타에서 부모와 함께 지내기로 했다.
리아는 우울증으로 대부분의 날들을 힘겹게 보냈다. 존은 여느 때처럼 교회 임무 수행 차 이곳저곳을 다녀야 했지만 집에 있을 때는 아내의 삶이 견딜만 하도록 자주 아내 곁에 있었다. 그해 여름에 리아는 존에게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서로를 위해 목숨이 붙어 있기를 기도하고 있어요. 당신과 함께라면 어떤 전투도 치를 수 있어요!”34
앤의 아기 존 윗소 월리스가 1927년 8월 8일에 태어나면서 두 사람은 할머니 할아버지가 되었다.35 한 달 후, 솔트레이크시티를 방문한 영국의 신문 기자인 해럴드 셉스턴은 리아의 어머니를 만났다. 수사는 자신과 리아가 브리검 영에 대해 쓰고 있는 전기에 대한 모든 것을 그에게 말했고, 기자는 그것을 보고 싶다고 부탁했다. 수사는 기자에게 원고의 사본을 주었으며, 해럴드는 수사가 출판사를 찾는 일을 돕는 데 동의했다.
그는 “이것은 매우 흥미로운 읽을거리가 될 것입니다. 하지만 내용을 많이 압축해야 할 거예요.”라고 말했다.36
하지만 이 모든 좋은 소식도 리아의 기분이 나아지게 하지는 못했다. 수사는 해안 지대를 여행하면 딸이 생기를 되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해서 함께 캘리포니아로 여행을 가자고 했다.37 그러나 그들이 거의 표를 구입하자마자, 존이 그랜트 회장으로부터 유럽 선교부의 신임 회장으로 봉사하라는 부름을 받게 되었다. 존은 그날 남은 하루를 멍한 채로 지내다 밤에는 거의 잠을 이루지 못했다. 유럽 선교부는 교회에서 가장 오래되고 가장 큰 선교부 중 하나로, 유럽 선교부 회장은 노르웨이에서 남아프리카 공화국까지 수천 킬로미터에 걸쳐 퍼져 있는 국가들에 주재하는 9명의 다른 선교부 회장들도 관리할 책임이 있었다. 보통 그 선교부는 더 경험이 많은 사도가 부름을 받아 이끌었다.38
새로운 부름을 맡게 되면 유타에 있는 사랑하는 사람들과 집을 남겨두고 떠나야 하지만, 리아는 그 부름을 반겼다. 지난 한 해는 악몽이었고, 그녀는 이러한 삶의 변화는 그녀에게 유익이 될 수 있을 것이었다. 이곳에는 마셀을 떠올리게 하는 것들이 도처에 있었으므로, 유럽으로 가면 마음의 여유를 가지고 그를 떠나보낼 수 있을 것이었다. 존은 그랜트 회장이 영감을 받아 아들을 여읜 상실감을 극복할 수 있도록 자신들에게 선교부 감리 부름을 준 것이라고 믿었다.39
그다음 두 달은 준비를 하는 데 보냈다.40 리아는 짐을 싸면서 해럴드 셉스턴과 브리검 영의 전기에 대해 생각했다. 리아는 해럴드가 출판사를 찾는 일을 도와주겠다고 한 말을 지키게끔 하겠다고 결심하며 원고를 챙겼다.41
11월 21일, 리아와 존은 자신들의 임무를 위해 성별되었다. 그런 다음 집으로 돌아와 이제 일흔넷이 된 존의 이모 페트롤리네에게 작별 인사를 했다. 리아와 존이 유럽으로 함께 가자고 제안했지만, 페트롤리네는 자신이 그곳까지 갈 만한 체력이 못 된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자신과 존의 어머니가 20년 전에 했던 것처럼 존이 유럽으로 돌아가 복음을 가르칠 기회를 얻게 된 것이 기뻤다.
그날 늦게, 리아와 존, 그리고 그들의 딸 유도라는 기차역에서 많은 사람의 배웅을 받았다. 수사는 그들에게 편지를 건네며 기차에서 열어 보라고 했다. “나도 너희의 여정에 함께할 거란다. 너희 둘은 위대한 일을 해낼 거야.” 편지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너희가 집으로 돌아올 때는 너희 이모와 함께 기차역 승강장으로 마중을 나갈게. 그래서 차분한 마음으로 미소를 지으며 우리가 사랑하는, 가장 훌륭한 우리 아이들의 귀환을 기뻐할 거야.”
수사는 리아에게 임무를 수행하며 겪을 많은 어려움에 대비하라고 충고하며 이렇게 썼다. “우리의 하늘 아버지는 당신의 자녀들이 슬픔, 가난, 투쟁을 통해 경험을 얻어야 할 때는 냉혹해지기도 하신단다.”42